이상세계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지금까지도 그러한 입장에서 자녀를 울린 역사가 반복해 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현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모든 조건과 책임을 가지고, 이른바 95%의 책임을 가지고 지상을 행복의 세계로 인도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환경을 만들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자녀의 수를 늘이고, 그런 자리에 서서 하나님이 행하시면 거기에 복종하는 무리를 만들어 가자는 섭리를 해오셨다.

그것은 중심적인 부분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안 된다. 외적인 부분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복귀노정을 보더라도 구약시대에는 외적으로 제물을 하나님 앞에 세워 인간을 거기에 접하게 한다고 하는 조건을 터로 하여 기나긴 4천년의 역사를 지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고부터는 이 외적 조건을 터로하여 내적 조건을 세워 하나님에게 바치고자 했다. 그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제1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참이신 예수님 앞에 내적 외적인 조건을 세워 바치는 것같이 복종하지 않았던 까닭에 예수님은 괴로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외적 조건을 세워 가지고 개척하면서 싸워 오셨다. 그리고 지금의 세계에 있어서는 2대 진영으로 갈라져 그 중심으로서 두사상이 하나의 목적의 세계에 이르는 관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목적의 세계가 우리 자녀에게 걸려 있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2대 진영이 세계적으로 구원받아 목적의 세계에 멀지 않아 다다른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하나님은 우리들이 모르는 가운데 이러한 세계적인 환경을 만들어 주셨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쓰라린 가시밭 길을 더듬어 오셨다고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은 2천년 전 그 시대에 있어서 예수님을 통해서 유대교 신자와 이스라엘 민족이 합체화하고 예수님을 내외 함께 하나님에게 바치는 입장에 서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외적인 사탄세계에 대해서 여하한 고통이 있고 비참한 자리에 서더라도, 그것을 타고 넘는 심정을 가지고 지상의 소원이 하나님께서 바라셨던 대로 본래의 인간과의 관계와 소원을 통한 입장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고 섰더라면 그때부터 예수님은 이상권내에 들어가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적 환경을 지켜 주는 참된 한 사람이, 참된 하나의 가정이, 참된 하나의 민족과 국민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적인 제2의 문제를 수습하는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외적 책임을 이루어야 했기 때문에 싸웠고 그리고 승리의 깃점을 세운 것이 영적 구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