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요강

 

서 문 (序 文)

 

지난 2, 3년간은 세계가 일찍이 없었던 대격변을 경험한 기간이었다. 세계적화를 표방하면서 20세기의 세계를 뒤흔들던 소련 제국이,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를 계기로 하여 소련의 사멸이라고 하는 충격적인 사태를 맞이했던 것이다. 그리고 소련을 인수한 러시아 공화국 옐친대통령은, 1992년 6월 미국을 방문한 후 상하양원에서 가진 합동연설회에서 `공산주의는 사멸했다'고 선언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를 다시 부활시킨다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에서 해방된 구 소련은 아직껏 가야 할 방향을 상실한 채 혼란과 경제적 파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일부 국가에 있어서는, 경제의 개혁과 개방을 목표하면서 동시에 사회주의 제도와 공산당독재를 견지한다고 하는 모순을 지닌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한편 민주주의 세계의 기수인 미국은 걸프전쟁의 승리의 영광은 잠시였을 뿐, 방대한 적자경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급속히 그 지도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공산주의의 이상은 땅에 떨어지고, 민주주의 세계에는 강력한 리더가 없어진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는 민족과 종교의 대립에 의한 분쟁, 경제마찰 등이 분출하고 있으며, 이러한 혼란을 틈타고 각종 형태의 복고주의마저 대두하고 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AIDS의 만연, 소말리아 등 후진국에 있어서의 빈곤과 기아가 심화되고 있어서 인류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이와 같은 혼란과 불안속에서 세계는 지금 인류를 이끌 새로운 이념과 지도력을 절실히 요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 문선명(文鮮明)선생님 내외분이 추진하시는 통일운동 및 여성해방운동이 유일한 희망의 빛으로서 인류 앞에 찬연히 빛나기 시작하였다.

 

통일사상(統一思想)은 문선생님의 사상으로서 통일운동 및 여성해방운동의 이념인 바, 하나님주의 또는 두익사상이라고도 불리운다. 하나님주의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사상이라는 뜻이며, 두익사상(頭翼思想)이란 우익도 아니요, 좌익도 아니며, 더 높은 차원에서 양자를 포용하는 사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새로운 가치관에 의한 애타정신으로써, 좌익사상인 공산주의로부터는 증오심, 투쟁심 및 물질주의를 제거하고, 우익사상인 민주주의로부터는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를 제거해서 대립하는 양자를 화해시키고, 공동으로 하나님과 인류의 숙원인 이상세계의 실현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도록 양자를 이끌기 위한 사상이 바로 하나님주의이며, 두익사상이며 통일사상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통일사상은 인류의 부모요, 모든 종교를 설립한 최고의 중심인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 의하여, 대립하는 여러 민족과 여러 종교를 화해시켜서 인류 대가족이념을 실현함과 아울러, 인류의 모든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영원한 하나님의 참사랑에 의한 이상세계를 창건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상이다. 따라서 어떠한 난문제라 하더라도 통일사상(하나님主義)을 적용한다면 쉽게 또 근본적으로 풀리게 된다.

 

필자는 오늘날까지 제자의 한 사람의 입장에서 문선명선생으로부터 배운 사상(통일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선생님의 제시와 지도하에 진행해 왔다. 일찍이 수많은 인생문제를 지닌 채 인생의 항로에서 번민해 온 필자는 1956년 입교 후 문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사상) 속에서 인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놀랍고도 엄청난 진리가 함축되어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때 나에게 비쳐진 선생님의 모습은 진리의 보고요, 사상의 용천이셨다. 한번 말씀이 시작되면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사상의 샘물이 한없이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 가르치시는 진리의 사상에 도취되어 시간가는 줄을 모르는 때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만큼 그 말씀 모두가 나에게는 진실로 귀하고 값진 것이었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의 그 귀중한 사상도 이것을 듣는 데서만 끝나버린다면, 마치 꿰지 않은 구슬이 분실되기 쉽듯이 귀중한 말씀 한마디 한마디도, 그 보배로운 사상의 한 토막 한 토막도, 그 일부가 기억의 세계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인생문제를 고민한 필자가 이 진리의 사상에 의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진리와 사상의 구슬들을 꿰어서 지난날의 필자와 같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구슬(진리)의 사슬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귀중한 보배를 꿰는 심경으로 가르쳐 주신 많은 사상을 홀로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72년 여름, 문선생님의 지시에 따라서 일본에서의 한?일교수친선학술대회에 참가하는 기회에 일본 통일교회의 지성적인 간부들에게 그동안 정리한 것을 강의했던 바 의외의 좋은 반응에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귀국 즉시 보고를 드리자 그동안 정리한 내용을 책으로 출판하라고 명령을 내리심과 동시에 5~7개의 분과로 구성되는 통일사상연구원을 만들어서, 말씀을 계속 정리하면서 사상운동을 전개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선생님의 사상을 다시 재정리하여서 1973년에 친필에 의한 통일사상요강의 표제하에 통일사상연구원의 이름으로 그 제1판을 출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모두가 필자가 초창기때부터 선생님의 사상을 선생님의 지도하에 정리한 것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이 필자의 명의가 아닌 통일사상연구원의 이름으로 출판한 것은 본서의 내용이 전부 선생님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선생님의 통일원리를 선생님의 지도하에 집필한 유효원(劉孝元) 전협회장이 자신의 명의로 내지 않고 교회(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명의로 출판한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첫째로 이 책속에 정리된 체계화 그 자체가 통일사상이 아니라 선생님의 사상 자체가 통일사상이며, 체계화는 선생님의 사상의 기술형식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이때까지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사상을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전하고자 하는 생각은 많았으면서도, 능력의 한계 때문에 필자로서는 표현의 정확성을 기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던 것이며, 그 때문에 출판된 내용들 중에는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통일사상은 위대한 사상가로서의 문선명 선생님의 이론체계이기 때문에 사상에 관심있는 학자들이 반드시 읽어 볼 필요가 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리하여 몇 사람의 외국인 학자들에게 영역한 책을 보낸 바 있었다. 그런데 그 후에 의외의 반응이 나타났다. 저자(著者)의 이름이 없는 책이란 독자에 대해서 실례일 뿐만 아니라 사상의 발표에 있어서 때 때로 일기 쉬운 논쟁을 회피하려는 무책임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생님께 선생님의 사상을 학자의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학자들이 읽어 줄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틀린 표현이나 문장에 대한 책임(文責)을 져야할 당사자로서 부득이 임시로 필자의 명의로써 출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는 것을 말씀드렸던 것이다.

 

그 후 일본어판(統一思想解說과 統一思想槪要)과 영어판(Explaining Unification Thought와 Fundamentals of Unifica\tion Thought)은 모두 필자의 이름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전연 예기치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 그것은 서언속에 이 책의 내용은 모두 문선명 선생님의 사상이라는 것을 명확히 소개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 책의 내용이 필자의 사상인 것처럼 오해하는 학자들이 적잖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필자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했던 것이다.

 

그 후 최근에 이르러 선생님의 사상을 전공한 제자들이 여럿이 탄생되었다. 즉 선생님의 사상을 계승한 통일주의 학자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서 통일사상을 학생들에게 강의할 수 있게까지 되었으며, 또 통일사상에 관한 논쟁도 이 학자들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게까지 에 이르렀다. 즉 책 출판에 있어서 문책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이미 필자의 이름을 표시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저자를 선생님으로 한다는 것도 적당치 않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독자에 대해서는 대체로 문책의 필요성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본서의 내용은 하늘의 사상인, 선생님의 심오한 사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또 그 일부나마라도 하늘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대필되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상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데 필수적인 요건의 하나는 한 사상부문을 체계화할 때 그 부문에 관한 종래의 학자들의 사상을 비교 검토하여 그들의 사상보다도 통일사상이 우수하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인 바, 이 작업 또한 완벽하게 되었다고는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원리강론을 쓰신 유효원 전협회장이, 그 내용이 모두 문선생님의 통일원리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명의로 발행할 수 없었던 심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원리강론이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의 이름으로 발행된 것처럼 통일사상을 서술한 본서(통일사상요강)도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서 초판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통일사상연구원(統一思想硏究院)의 이름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단 이번에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서 서명밑에 부제(頭翼思想)를 붙이기로 하였다. 통일사상요강의 초판이 나온 후, 선생님께서는 기회있을 때마다 더 깊은 진리를 알려 주시곤 하였으며, 그때마다 그것을 정리하여 사상의 체계속에 삽입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 발간된 신판은 초판에 비하면 그 내용이 크게 증대되었다.

 

통일사상은 모든 사상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그 사상의 전개 순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순서에 따라서 배열되었다. 즉 통일사상은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관한 이론으로서 맨 처음 원상론(원상론)을 다루었고, 다음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인간보다 만물이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에 관한 이론으로서 존재론(存在論)을 다루었다. 만물 다음에는 인간이 창조되었다. 따라서 제3의 부문은 본연의 인간에 관한 이론인 본성론(本性論)이 된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창조된 짐승과 새들을 아담에게 데리고 가셨다(창2:19~20). 아담은 이것을 보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인간이 그 때 만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인식하고 사고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4, 제5번째에 다루어지는 부문은 인식론(認識論)과 논리학(論理學)이다. 그리고 아담과 해와는 3대축복을 완성해야 했는데, 그것은 창조이상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이상의 세계는 이러한 인격을 완성한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 중심의 가치관이 실현된 세계이다. 따라서 제6의 부문은 가치론이 된다.

 

아담과 해와가 책임분담을 다하여 완성하면 성장기간(成長期間) 중의 그들의 체험을 자녀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자녀들은 가벼운 책임분담으로 성장하여 제1축복을 완성할 수 있도록 교육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제7의 부문은 교육론(敎育論)이 된다. 그런데 제1축복은 제2축복, 제3축복과 함께 3대축복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교육론은 제2 및 제3축복의 교육적 측면도 아울러 다루고 있다.

 

인간이 성장하면 결혼해서 창조본연의 가정을 이루게 되는데, 따라서 8번째는 가정의 규범의 학으로서의 윤리학(윤리論)을 다루게 된다. 다음은 만물주관이다. 인간은 만물을 사랑으로 주관하고 만물은 인간에게 미를 돌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9번째는 예술론(藝術論)을 다룬다. 그런데 주관이란 자연만물의 주관 뿐만 아니라 실천항위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이 모두 주관의 개념에 포함된다. 통일사상은 아직은 정치, 경제 등을 취급하고 있지 않으나 이들의 시대적변천의 측면인 역사는 이것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10번째는 역사론(歷史論)이 된다.

 

이상의 모든 분야에 일관해서 작용하고 있는 불변의 법칙이 있는데, 그 법칙의 이론이 11번째의 방법론(방법론)이다. 방법론은 그 성격상 원상론의 다음에 삽입되어야 할 것이나, 기존 사상의 방법론과 비교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제일 나중에 넣었다. 이상이 통일사상의 11개 부문의 배열의 본래 순서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인식논과 논리학은 종래의 인식론이나 논리학도 다 함께 다루고 있어서 초심자에게는 좀 난해할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편의상 이것을 뒤로 돌려서 방법론의 바로 앞에 넣기로 하였다.

 

다음에 겸해서 한 말씀 하고자 하는 것은 상술한 바와 같이, 본서의 내용은 이때까지 발표된 문선명(文鮮明) 선생의 사상의 주요 부분을 정리한 것뿐이며, 선생님에 의해서 앞으로 더 깊고 더 새로운 진리가 속속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하여 필요하면 선생님의 직접 지시에 의해서 그 새로운 부문은 그때그때 추가되리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 책자가 세계의 통일과 평화를 위하여, 필설로 표현키 어려운 박해 속에서 그 일생을 바쳐 오신 문선생님의 사상을, 보다 더 깊게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 여러분께 일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서언(序言)을 마치기로 한다.

 

1993년 4월 필자

 

 

<제목 차례>

서 문 (序 文)   1

         제1장 원상론   17

                     一. 원상(原相)의 내용(내용)        18

 1. 신상(신상)  18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18

   1) 성상(性相)(본성상(本性相))        18

    ① 본성상(本性相)과 피조물(被造物)  18

    ② 본성상(本性相)의 내부구조(內部構造))     19

      i) 내적성상(內的性相)     19

      ii) 내적형상(內的形狀)    19

   2) 형상(形狀); 본형상(本形狀))       21

      ① 본형상(本形狀)과 피조물(被造物)        21

      ② 본형상(本形狀)과 과학(科學)    21

      ③ 본형상(本形狀)과 힘    22

3)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이동성(異同性)     22

  (2) 양성(陽性)과 음성(陰性)   24

   1) 양성(陽性)과 음성(陰性)도 이성성상이다.   24

   2) 陽性-陰性과 男子?女子와의 관계    26

   3)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속성으로서의 양성-음성과 현실문제의 해결  28

  (3) 개별상(個別相)    29

   1) 개별상이란 무엇인가       29

   2) 개별상(個別相)과 보편상(普遍相)   29

   3) 개별상(個別相)과 돌연변이(突然變異)       30

   4) 개별상(個別相)과 환경     30

   5) 인간개성의 존귀성         30

 2. 신성(神 性)         31

  (1) 심정(心情)        31

   1) 심정(心情)이란 무엇인가?  31

   2) 심정(心情)은 정적충동(情的衝動)이다.      31

   3) 하나님은 심정(心情)이시다.        32

   4) 우주(宇宙) 창조(創造)와 심정(心情)        32

   5) 심정(心情)과 문화         33

   6) 심정(心情)과 원력(原力)   34

  (2) 로고스    34

   1) 로고스란 무엇인가         34

   2) 로고스는 이법(理法)이다.  35

   3) 로고스는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체(統一體)       35

   4) 로고스 및 자유와 방종     36

   5) 로고스 및 심정(心情)과 사랑       37

  (3) 창조성(創造性)    38

   1) 창조성(創造性)이란 무엇인가       38

   2) 인간의 창조성(創造性)     39

   3) 닮기의 창조(創造)         39

   4) 창조성(創造性)과 책임분담(責任分擔)       40

   5) 인간의 완성과 책임분담(責任分擔)  41

   6) 본연(本然)의 창조성(創造性)과 문화활동    41

                   二. 원상(原相)의 구조(構造)  42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상대적(相對的) 관계(關係)         42

 2. 수수작용(授受作用)과 사위기대(四位基臺)     43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수수작용(授受作用)      43

   1) 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이란 무엇인가       43

   2) 합성체(合性體)와 신생체(新生體)의 개념    43

   3) 수수작용(授受作用)의 특징은 원만성, 조화성, 원활성이다.   44

  (2)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 및 주체와 대상  44

   1) 사위기대(四位基臺)란 무엇인가     44

   2) 주체와 대상의 개념        45

   3) 주체와 대상의 격위(格位)는 다르다.        46

   4) 상대물(相對物)과 대립물(對立物)   46

  (3)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종류         47

   1) 사위기대(四位基臺)의 구성요소     47

   2)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와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   48

   3)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와 존재의 2단구조(構造)         49

   4)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종류         50

    ① 내적자동적사위기대(四位基臺)     50

    ② 외적자동적사위기대(四位基臺)     51

    ③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52

     i) 중심=목적       52

     ii) 주체=내적성상(內的性相)        53

      ㄱ) 내적성상(內的性相)이란 무엇인가        53

      ㄴ) 내적성상(內的性相)은 육심(肉心)과 생심(생심(生心))의 통일체이다.       53

     iii) 대상(對象)=내적형상(內的形狀) (p. 109)        54

      ㄱ) 내적형상(內的形狀)이란 무엇인가        54

      ㄴ) 내적형상(內的形狀)은 일종의 주형(靈的鑄型)이다.        55

     iv)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         55

      ㄱ)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이란 무엇인가    55

      ㄴ) 관념(觀念)의 조작(操作) 생각하는데 일정량(一定量)의 관념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55

      ㄷ) 관념(觀念)의 조작(操作)은 수수작용(授受作用)이다.      56

ㄹ) 수수작용(授受作用)의 유형    56

      ㅁ) 생각(사고(思考))도 대비형의 수수작용이다.      57

      ㅂ) 목적이 중심(中心)이다.         58

     v) 결과=구상(構想)         58

      ㄱ) 결과란 무엇인가        58

      ㄴ) 구상(構想)으로서의 로고스      59

      ㄷ) 로고스는 구상체(구상(構想)體)이다.     59

     vi)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60

      ㄱ)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중심      60

      ㄴ)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주체      60

      ㄷ)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대상(對象)        60

      ㄹ)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         61

      ㅁ)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결과      61

    ④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     61

     i)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란 무엇인가         62

     ii)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의 기반위에 형성된다.    62

     iii) 모든 창조는 2단계의 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에 의해서         63

     iv)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의 構成要素        64

      ㄱ) 주체(主體)=본성상(本性相)      65

      ㄴ) 대상(對象)=본형상(本形狀)      65

      ㄷ)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         65

      ㄹ) 결과=피조물(被造物)    67

       a) 결과란 무엇인가       67

       b) 닮음과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         67

       c) 로고스와 피조물(被造物)의 관계        68

 3.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      68

  1)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란 무엇인가?       68

  2) 正分合과 正反合    69

  3) 정반합(正反合)이론의 비판(批判)    70

  4) 정반합(正反合)이론과 현실문제 해결의 실패(失敗)    71

 4. 원상구조(原相構造)의 통일성(統一性)         72

 5. 창조이상(創造理想)  73

  1) 창조이상(創造理想)이란 무엇인가    73

  2) 창조(創造)목적과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차이         73

  3) 창조(創造)목적과 창조이상(創造理想)의 개념(槪念)은 다르다.         74

  4) 창조이상(創造理想)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이다.     75

            三. 종래의 본체론(本體論)과 통일사상        76

  1) 아우구스티누스 및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관(神觀)     76

  2) 이기설(理氣說)     76

  3) 헤겔의 절대정신(絶對精神)  77

  4) 쇼펜하우어의 맹(盲)목적의지(意志)  77

  5) 니체의 권력의지(權力意志)  78

  6) 마르크스의 변증법적(辨證法的) 유물론(唯物論)       78

  7) 통일사상의 본체론(本體論)  78

                  제2장 존 재 론(第2章 存 在 論)        79

                        一. 개성진리체  80

 1. 성상과 형상 p.170   80

 2. 양성과 음성 83

  (1) 양성과 음성도 이성성상이다.       83

  (2) 인간의 경우의 양성실체와 음성실체 84

 3. 개성진리체의 개별상 85

  (1) 보편상의 개별화 p.180     85

  (2) 종차와 개별상     85

  (3) 개별상과 환경     86

                        二. 연 체(聯 體)        87

 1. 연체(聯體)란 무엇인가       87

  (1) 구조(構造)로 본 연체(聯體)        87

  (2) 목적으로 본 연체(聯體)    87

  (3) 관계(關係)의 방향성으로 본 연체(聯體)     88

  (4) 격위(格位)로 본 연체(聯體)        89

  (5)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과 상호관련성(相互關聯性)   89

 2. 주체(主體)와 대상(對象)     89

  (1)피조세계(被造世界)에 있어서의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의 계열(系列)  90

  (2)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의 유형    91

   1) 본래형(型)        92

   2) 잠정형(暫定型)    92

   3) 교호형(交互型)    92

   4) 부정형(不定型)    92

  (3) 수수작용(授受作用)        92

   1) 양측의식형(兩側意識型)    93

   2) 편측의식형(片側意識型)    93

   3) 무자각형(無自覺型)        93

   4) 타율형(他律型)    94

   5) 대비형(對比型)    94

  (4) 상대물(相對物)과 대립물(對立物)   94

 3. 존재양상(存在樣相)  95

  (1) 원환운동(圓環運動)        95

  (2) 자전운동(自轉運動)과 공전운동(公轉運動)   96

  (3) 원환운동(圓環運動)의 제형태(諸形態, 여러 형태)    97

   1) 기본적(基本的) 원환운동(圓環運動)         97

   2) 변형(變形)된 원환운동(圓環運動)   98

   3) 정신적 원환운동(精神的 圓環運動)  99

  (4) 성장(成長)과 발전운동(發展運動)   99

   1) 통일사상의 발전관         99

   2) 공산주의(共産主義)의 발전관(發展觀)       100

   3) 공산주의(共産主義)의 운동관(運動觀)       100

 4. 존재격위(存在格位)  101

  (1) 연체(聯體)로 본 존재격위(存在格位)        101

  (2) 종적질서(縱的秩序)와 횡적질서(橫的秩序)   101

  (3) 우주질서(宇宙秩序)와 가정질서(家庭秩序)   102

 5. 우주(宇宙)의 법칙(法則)     103

  (1) 상대성(相對性)(의 법칙(法則))     103

  (2) 목적성(目的性)과 중심성(의 법칙(法則))    103

  (3) 질서성(秩序性)과 위치성(位置性)(의 법칙(法則))    103

  (4) 조화성(調和性)(의 법칙(法則))     103

  (5) 개별성(個別性)과 관계성(關係性)(의 법칙(法則))    103

  (6) 자기동일성(자기(自己)同一性)과 발전성(發展性)(의 법칙(法則))      104

  (7) 원환운동성(圓環運動性)    104

                     제3장(第3章) 본성론        105

                  一.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    107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統一體)  108

  (2)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조화체(調和體)  109

  (3) 개성체(個性體)    111

                  二. 신성적존재(神性的存在)    112

  (1)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    112

  (2) 로고스的 존재(存在)       114

  (3) 창조적존재(創造的存在)    115

                  三.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    116

  (1) 대상격위(對象格位)와 주체(主體)   117

  (2) 주체격위(主體格位)와 대상(對象)   118

  (3) 연체의식(聯體意識)과 민주주의(民主主義)   119

                  四. 결론(結論)        121

                           五. 통일사상에서 본 실존주의(實存主義) 인간관(人間觀)        121

  (1) 키에르케고르      121

   1)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人間觀)     121

   2) 통일사상에서 본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人間觀)     123

  (2) 니 체     124

   1) 니체의 인간관(人間觀)     124

   2) 통일사상에서 본 니체의 인간관(人間觀)     125

  (3) 야스퍼스  126

   1) 야스퍼스의 인간관(人間觀)         126

   2) 통일사상에서 본 야스퍼스의 인간관(人間觀)         127

  (4) 하이데거  128

   1) 하이데거의 인간관(人間觀)         128

   2) 통일사상에서 본 하이데거의 인간관(人間觀)         129

  (5) 사르트르  130

   1) 사르트르의 인간관(人間觀)         130

   2) 통일사상에서 본 사르트르의 인간관(人間觀)         131

                제4장 가치론 (第4章 價 値 論)   132

               一. 가치론(價値論) 및 가치의 뜻  133

  (1) 가치론(價値論)의 뜻       133

  (2) 가치(價値)란 무엇인가     134

  (3) 욕망(欲望)        134

                  二. 가치론(價値論)의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        134

  (1) 성상(性相)-형상(形狀)과 二性목적  135

  (2) 성상(性相)-형상(形狀)과 2성욕망(二性欲望)         135

  (3) 이중목적(二重目的)과 이중욕망(二重欲望)   135

  (4) 욕망(欲望)의 유래와 창조목적      135

                  三. 가치(價値)의 종류(種類)   136

  (1) 성상적(性相的) 가치(價値)         136

  (2) 형상적(形狀的) 가치(價値)         137

                  四. 가치(價値)의 본질(本質)   137

  (1) 가치의 본질적 요소와 현실적가치   137

  (2) 잠재적(潛在的)가치(價値, 본질적요소(本質的要素)   137

                  五. 현실적가치(現實的價値)의 결정과 가치기준(價値基準)        138

  (1) 가치(價値)의 決定         138

  (2) 주관작용(主觀作用)        138

  (3) 가치(價値)의 기준         139

   1) 상대적(相對的) 기준       139

   2) 절대적(絶對的) 기준       139

   3) 절대적(絶對的) 기준(基準)과 인간의 개성   141

            六. 종래의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141

  (1) 기독교(基督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142

  (2) 유교(儒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142

  (3) 佛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143

  (4) 이슬람교(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145

  (5) 인도주의(人道主義)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145

            七.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定立)      146

  (1) 신학적(神學的)근거(根據)의 제시   146

  (2) 철학적(哲學的)근거(根據)의 제시   147

  (3) 역사적(歷史的)근거(根據)의 제시   148

            八. 가치관의 역사적(歷史的) 변천(變遷)      149

  (1) 그리스시대의 가치관       149

   1) 유물론적(唯物論的) 가치관         150

   2) 자의적가치관(恣意的價値觀, 궤변적가치관(詭辯的價値觀)     150

   3) 절대적(絶對的) 가치관     150

    ① 소크라테스       150

    ② 플라톤   151

  (2) 헬레니즘?로마시대의 가치관        151

   1) 스토아학파(學派)  151

   2) 에피쿠로스학파(學派)      152

   3) 회의학파(懷疑學派)        152

   4) 新플라톤주의(主義)        152

  (3) 中世의 가치관(價値觀)     152

   1) 아우구스티누스    152

   2) 토마스 아퀴나스   153

  (4) 근세(近世)의 가치관(價値觀)       153

  (5) 새로운 가치관(價値觀)의 출현(出現)의 필요성(必要性)       154

                제5장 교육론(敎育論)    155

               一. 통일교육론(敎育論)의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       156

  (1) 하나님에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과 3대축복(三大祝福)  156

   1) 完全性    157

   2) 번식성(繁殖性)    157

   3) 주관성(主管性)    158

  (2) 인간의 성장과정(成長過程)         158

  (3) 교육(敎育)의 3대이념(三大理念)    159

               二. 교육(敎育)의 3형태(三形態)   160

  (1) 심정교육(心情敎育)        160

   1) 개체완성(個體完成)을 위한 교육    160

   2)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표현 형태   160

    ① 所望의 심정(心情)        160

    ② 슬픔의 심정(心情)        161

    ③ 고통(苦痛)의 심정(心情)  161

   3)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이해(理解)  161

    ① 아담가정(家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162

    ② 노아가정(家庭)에서의 하나님의 심정       162

    ③ 아브라함가정(家庭)에서의 하나님의 심정   162

    ④ 모세노정(路程)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163

    ⑤ 예수노정(路程)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163

   4)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소개        164

   5) 실천(實踐)을 통한 심정교육(心情敎育)      164

  (2) 규범교육(規範敎育) p. 364 164

   1) 가정완성(家庭完成)을 위한 교육(敎育)      164

   2) 이법적(理法的) 존재(存在)가 되게 하는 교육(敎育)  165

  (3) 주관교육(主管敎育)(지식교육(知識敎育), 기술교육(技術敎育), 체육(體育))    166

   1) 주관성(主管性)완성(完成)을 위한 교육      166

   2) 창조성(創造性)의 개발과 2단구조(構造)의 형성      166

   3) 보편교육(普遍敎育)을 기반으로 한 주관교육(主管敎育)       166

               三. 피교육자(被敎育者)의 이상상(理想像)  167

  (1) 인격(人格)者 교육(敎育)   168

  (2) 선민교육(善民敎育)        168

  (3) 천재교육(天才敎育)        168

               四. 종래의 교육관(敎育觀)        169

  (1) 그리스의 교육관(敎育觀) 플라톤의 敎育觀)  169

  (2) 중세(中世)의 기독교적 교육관(敎育觀)      170

  (3) 르네상스시대(時代)의 교육관(敎育觀)       170

  (4) 코메니우스의 교육관(敎育觀)       170

  (5) 루소의 교육관(敎育觀)     170

  (6) 칸트의 교육관(敎育觀)     171

  (7) 페스탈로치의 교육관(敎育觀)       171

  (8) 프뢰벨의 교육관(敎育觀)   171

  (9) 헤르바르트의 교육관(敎育觀)       172

  (10) 듀이의 교육관(敎育觀)    172

  (11) 공산주의(共産主義)의 교육관(敎育觀)      172

  (12)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교육관(敎育觀)      173

           五. 통일사상에서 본 종래의 교육관(敎育觀)    174

           제6장 윤리론(第6章 倫 理 論) 175

            一. 통일윤리론(倫理論)의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  176

                  二. 윤리와 도덕(道德) 177

  (1) 윤리와 도덕(道德)의 정의(定義)    177

  (2) 윤리와 질서(秩序)         178

  (3) 윤리?도덕(道德)과 천도(天道)      178

  (4) 가정(家庭)윤리의 확대적용(擴大適用)으로서의 사회(社會)윤리        179

                  三. 질서(秩序)와 평등(平等)   180

  (1) 오늘날까지의 질서(秩序)와 평등(平等)      180

  (2) 원리적(原理的)인 질서(秩序)와 평등(平等)  180

         四. 통일윤리론(倫理論)에서 본 종래의 윤리관    181

  (1) 칸트      182

   1) 칸트의 윤리관     182

   2) 통일사상에서 본 칸트의 윤리관     182

  (2) 벤담      183

   1) 벤담의 윤리론(倫理論)     183

   2) 통일사상에서 본 벤담의 윤리관     184

  (3) 분석철학(分析哲學)        184

   1) 분석철학(分析哲學)의 윤리관       184

   2) 통일사상에서 본 분석철학(分析哲學)의 윤리관       185

  (4) 프래그머티즘      186

   1) 프래그머티즘의 윤리관     186

   2) 통일사상에서 본 프래그머티즘의 윤리관     186

           제7장 예술론 (第7章 藝 術 論)        187

            一. 예술론(藝術論)의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      188

                  二. 예술(藝術)과 미(美)       189

  (1) 예술(藝術)이란 무엇인가   189

  (2) 예술(藝術)과 기쁨         189

   l) 성상(性相)의 상사성(相似, 서로 닮음性)    190

   2) 형상(形狀)의 상사성(相似, 서로 닮음性)    190

  (3) 미(美)란 무엇인가         191

  (4) 미(美)의 決定     191

  (5) 미(美)의 요소(要素)       192

         三. 예술활동(藝術活動)의 이중목적(二重目的)과 창작(創作) 및 鑑賞       192

                  四. 창작(創作)의 요건(要件)   193

  (1) 주체(主體)의 요건(要件)   193

   1) 모티브, 주제(主題), 구상(構想)    193

   2) 대상의식(對象意識)        194

   3) 개성(個性)        195

  (2) 대상(對象)의 요건(要件)   196

                  五. 창작(創作)의 기교(技巧), 소재(素材), 양식(樣式)   196

  (1) 기교(技巧)와 소재(素材)   196

  (2) 창작(創作)의 양식(樣式)과 유파(流派)      197

   1) 이상주의(理想主義; Idealism)      197

   2) 고전주의(고전주의(古典主義); Classicism)  197

   3) 낭만주의(浪漫主義)(Romanticism)   198

   4) 사실주의(寫實主義)(Realism)?자연주의(自然主義)(Naturalism)        198

   5) 상징주의(象徵主義; Symbolism)     198

   6)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         198

   7) 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         198

   8) 입체주의(立體主義; Cubism)        198

   9) 통일주의(統一主義; Unificationism)        198

                  六. 감상(鑑賞)의 요건(要件)   199

  (1) 주체(主體)의 요건(要件)   199

  (2) 대상(대상(對象))의 요건(要件)     200

  (3) 미(美)의 판단(判斷)       200

               七. 예술(藝術)의 통일성(統一性)  201

  (1) 창작(創作)과 감상(鑑賞)의 통일    201

  (2) 내용과 형식(形式)의 통일  202

  (3) 보편성(普遍性)과 개별성(個別性)의 통일    202

  (4) 영원(永遠)과 瞬間의 통일  202

                  八. 예술(藝術)과 윤리 203

                  九. 미(美)의 유형     203

  (1) 통일사상에서 본 사랑과 미(美)의 유형      204

  (2) 종래의 미(美)의 유형      206

            十.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 비판(批判)   206

  (1)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        206

  (2)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에 대한 비판    207

  (3) 작가(作家)에 의한 공산주의(共産主義)의 고발       208

  (4) 통일사상에서 본 공산주의예술론의 오류(誤謬)       209

         제8장 역사론 (第8章 歷 史 論)  211

               一. 통일사관(統一史觀)의 기본입장(基本立場)      211

  (1) 죄악사(罪惡史)    212

  (2) 재창조(再創造)역사        212

  (3) 복귀(復歸)역사    212

  (4) 역사의 법칙성(法則性)     212

  (5) 역사의 시원(始元)과 방향(方向)과 목표(目標)       213

                  二. 창조(創造)의 법칙(法則)   213

  (1) 상대성(相對性)의 법칙(法則)       214

  (2)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         214

  (3) 상극(相剋)의 법칙(法則)   214

  (4) 中心의 주관(主管)의 법칙(法則)    215

  (5) 3단계완성(完成)의 법칙(法則)      216

  (6) 6수기간(期間)의 법칙(法則)        217

  (7) 책임분담(責任分擔)의 법칙(法則)   218

                     三. 복귀(復歸)의 법칙(法則)        218

  (1) 탕감(蕩減)의 법칙         218

  (2) 분립(分立)의 법칙         219

  (3) 4수복귀(四數復歸)의 법칙(法則)    220

  (4) 조건적섭리(條件的攝理)의 법칙(法則)       221

  (5) 거짓과 참의 선후(先後)의 법칙(法則)       221

  (6) 종(縱)의 횡적전개(橫的展開)의 법칙(法則)  222

  (7) 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     223

                     四. 역사의 변천(變遷)      224

               五. 종래의 역사관(觀)    226

  (1) 순환사관(循環史觀)(운명(運命)史觀)        227

  (2) 섭리사관(攝理史觀)        227

  (3) 정신사관(精神史觀; 진보사관(進步史觀))    227

  (4) 유물사관(唯物史觀)        228

  (5) `생(生)의 철학(哲學)'의 사관(史觀)        229

  (6) 문화사관(史觀)    229

  (7) 역사관(觀)의 변천(變遷)과 통일사관(統一史觀)      230

                        六. 섭리사관(攝理史觀)과 유물사관(唯物史觀)과 통일사관(統一史觀)의 비교 231

  (1) 역사의 시작(始作)         231

  (2) 역사의 성격(性格)         231

  (3)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력(原動力)    232

  (4) 역사변천(變遷)의 법칙(法則)       232

  (5) 종말(終末)에 나타나는 투쟁(鬪爭)  232

  (6) 종말(終末)의 현상(現象)   232

  (7) 종말(終末)의 사건(事件)   232

  (8) 종말(終末)을 고(告)하는 역사      233

  (9) 도래(到來)하는 이상세계(理想世界)         233

         제9장 인식론 (第9章 認 識 論)  234

               一. 종래의 인식론        235

 1. 인식(認識)의 기원(起源)     236

  (1) 경험론    236

   1) 베이컨    236

   2) 로크      237

   3) 버클리    237

   4) 흄        238

  (2) 이성론    238

   1) 데카르트  238

   2) 스피노자  239

   3) 라이프니츠        240

   4) 볼프      240

 2. 인식대상(認識對象)의 본질(本質)     241

  (1) 실재론    241

  (2) 주관적(主觀的) 관념론(觀念論) p.536       242

 3. 방법(方法)에서 본 인식론    242

  (1) 칸트의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     242

   1)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의 요점     242

   2) 내용과 형식(形式)         243

   3) 형이상학(形而上學)의 부정과 물자체(物自體)        244

  (2) 마르크스주의(主義)의 인식론(認識論)       245

   1) 반영론(反映論, 模寫說)    245

   2) 감성적인식(感性的認識), 이성적인식(理性的認識), 실천(實踐) p. 544         245

   3) 절대적진리(絶對的眞理)와 상대적진리(相對的眞理)   246

                           二. 통일인식론       247

 1. 통일인식론(통일인식론)의 개요(槪要)         247

  (1) 인식(認識)의 기원(起源)   247

  (2) 인식(認識)의 대상(對象)   248

  (3) 인식(認識)의 방법(方法)   248

 2. 인식(認識)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形式)     249

  (1) 대상(對象)의 내용과 주체의 내용   249

  (2) 대상(對象)의 형식(形式)과 주체(主體)의 형식(形式)         250

  (3) 원형(原型)의 구성요소(構成요소(要素))     250

  (4) 원형(原型)의 선재성(先在性)과 그 발달     251

 3. 원의식(原意識), 원의식상(原意識像) 및 범주(範疇)    251

  (1) 원의식(原意識)    251

  (2) 원의식(原意識)의 기능(機能)       252

  (3) 원의식상(原意識像)의 형성         252

  (4) 사유형식(思惟形式)의 형성         253

  (5) 존재형식(存在形式)과 사유형식(思惟形式)   253

 4. 인식(認識)의 方法   254

  (1) 수수작용(授受作用)        254

  (2)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         255

   1) 중심(中心)        255

   2) 주체(主體)        256

   3) 대상(對象)        256

   4) 결과      256

 5. 인식(認識)의 과정   257

  (1) 감성적단계(感性的단계)의 인식     257

  (2) 오성적단계(悟性的단계)의 인식     258

  (3) 이성적(理性的)단계의 인식         259

 6. 인식과정(認識過程)과 신체적(身體的) 조건(條件)      261

  (1) 심리작용(心理作用)과 생리작용(生理作用)의 병행성  261

  (2) 원의식(原意識), 원영상(原映像)의 대응원(對應源)   262

  (3) 인식(認識)의 3단계의 대응원(對應源)       262

  (4) 정보전달에 있어서의 심리적 과정(心理的 過程)과 생리적 과정(生理的 過程)의 대응관계        263

  (5) 원형(原型)의 형성에 있어서의 대응관계(對應關係)   265

  (6) 원형(原型)과 生理學       265

  (7) 관념(觀念)의 기호화(記號化)와 기호(記號)의 관념화(觀念化)         266

   三. 통일사상에서 본 칸트와 마르크스주의(主義)의 인식론       267

 1. 칸트의 인식론 비판  267

  (1)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에 대한 비판        267

  (2)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대한 비판    267

 2. 마르크스주의(主義) 인식론의 비판    268

  (1) 반영론(反映論)의 비판     268

  (2) 감성적인식(感性的認識), 이성적인식(理性的認識), 실천(實踐)에의 비판       268

  (3) 절대적진리(絶對的眞理)와 상대적진리(相對的眞理)에 대한 비판       269

            제10장 논리학 (第10章 論 理 學)     269

                     一. 종래의 논리학(論理學)  269

 1.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      270

  (1) 사고(思考)의 원리(原理)   270

  (2) 개념(槪念)        271

  (3) 판단(判斷)        273

   1) 판단(判斷)이란 무엇인가   273

   2) 판단(判斷)의 종류(種類)   273

   3) 기본적(基本的) 형식(形式)         274

   4) 주연(周延)과 부주연(不周延)       274

  (4) 추리(推理)        276

   1) 연역추리(演繹推理)        276

  2) 귀납추리(歸納推理; 귀납법) p. 611  277

  3) 유비추리(類比推理, 유추(類推))     277

 2. 헤겔논리학(論理學)  278

  (1) 헤겔논리학의 특징(特徵)   278

  (2) 헤겔논리학의 골격(骨格)   278

  (3) 유(有)-무(無)-성(成)의 변증법     279

  (4) 정유(定有)에의 이행과 정유(定有)  280

  (5) 有-본질(本質)-개념(槪念) p. 617   280

  (6) 논리(論理)-자연(自然)-정신(精神)  280

  (7) 헤겔논리학(論理學)의 골격         281

  (8) 헤겔변증법의 원환성(圓環性)과 법칙(法則)과 형식(形式)     282

 3. 마르크스주의(主義) 논리학(論理學)   282

 4.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      283

 5. 선험적논리학(先驗的論理學)  284

                  二.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    285

 1. 기본입장    285

  (1) 사고(思考)의 출발점과 방향        285

  (2) 사고(思考)의 기준(基準)   285

  (3) 관련분야(關聯分野)        286

  (4) 원상구조(原相構造)        286

 2. 원상(原相)의 논리적(論理的) 구조(構造)      287

  (1) 로고스형성(形成)의 구조와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287

  (2) 본래의 인간의 모습        288

  (3)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        288

 3. 사고과정(思考過程)의 2단계(二段階)와 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  289

  (1) 오성적(悟性的)단계와 이성적(理性的)단계   289

  (2) 이성적(理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사고(思考)의 발전   289

  (3) 사고(思考)의 기본형식(基本形式) p. 637    290

  (4) 사고(思考)의 기본법칙     292

   1) 삼단논법(三段論法)과 수수법(授受法)       292

   2) 동일률(同一律)과 수수법(授受法)   293

   3) 사고(思考)와 자유         293

            三.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에서 본 종래의 논리학(論理學)     294

  (1)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    294

  (2) 헤겔논리학(論理學)        294

  (3) 마르크스주의(主義) 논리학(論理學)         296

  (4)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    296

  (5) 선험적논리학(先驗的論理學)        297

  (6)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과 종래의 논리학(論理學)의 비교(比較)       297

            제11장 방법론 (第11章 方法論)       298

                        一. 사적고찰(史的考察)  298

 1. 헤라클레이토스의 변증법운동(辨證法運動法)   298

 2. 제논의 변증법(辨證法, 靜止法)       299

 3. 소크라테스의 변증법(辨證法; 對話法)         299

 4. 플라톤의 변증법(辨證法; 分割法)     300

 5.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법(演繹法)     300

 6. 베이컨의 귀납법(歸納法)     301

 7. 데카르트의 방법적회의(方法的懷疑)   301

 8. 흄의 경험론         302

 9. 칸트의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       302

 10. 헤겔의 개념(槪念)변증법(辨證法)    302

 11.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  303

 12. 훗서얼의 현상학적방법(現象學的方法)        304

 13. 분석철학(分析哲學)의 언어분석(言語分析)    305

               二. 통일방법론(수수법(授受法))   306

 1. 수수법(授受法)의 종류       306

  (1) 자동적수수작용(自同的授受作用)과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授受作用)   307

  (2)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과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   307

 2. 수수법(授受法)의 범위(範圍)         308

 3. 수수법(授受法)의유형        309

 4. 수수법(授受法)의 특징(特徵)         309

               三. 통일방법론에서 본 종래의 방법론      309

  (1) 헤라클레이토스    309

  (2) 제논      309

  (3) 소크라테스        310

  (4) 플라톤    310

  (5) 아리스토텔레스    311

  (6) 베이컨    311

  (7) 데카르트  311

  (8) 흄        312

  (9) 칸트      312

  (10) 헤겔     312

  (11) 마르크스         313

  (12) 훗서얼(훗설 E. Husserl 1859~1938)       313

  (13) 분석철학(分析哲學)       314

               註       314

①종래의 신(神)의 存在증명(證明)        321

②假說的 방법   322

            부 록       344

     부록 I     344

    공생-공영-공의주의(共生-共榮-共義主義)      344

  (1)共生主義   344

  (2)공영주의(共榮主義)         347

  (3) 공의주의(共義主義)        352

      맺는말    353

                     부록 II    354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      354

  (1) 하나님의 사랑     354

  (2) 3대주체(三大主體)의 참사랑        355

  (3) 한 中心의 3주체성(三主體性)과 3대주체사상(三大主體思想)   356

  (4) 사랑의 확산(擴散)         357

  (5) 3대주체(三大主體)의 근원은 하나님         358

  (6) 共生-共榮-共義主義 및 이상가정(理想家庭)의 理念과의 관계  359

   (7) 새 가치관(價値觀)의 定立         359

                        부록 III        360

     사대심정권과 3대王權의 의의(意義)  360

 1. 4대심정권(四大心情圈)       360

  (1) 심정의 개념       360

  (2) 심정권(心情圈)    360

  (3) 종적사랑과 횡적사랑 및 가정적 사랑        360

  (4) 4대 심정권과 사랑의 성장(成長)    361

  (5) 사랑의 내포(內包)性       362

  (6) 대표(代表)愛로서의 부부(夫婦)愛   362

  (7) 우주(天宙)의 中心과 사랑의 결실체(結實體)         363

  (8) 4대 심정권의 확대형으로서의 世界的 심정권(心情圈)         364

   1) 4대 심정권의 기본형은 가정적 4대 심정권임         364

2) 가정적 4대 심정권의 확대형으로서의 세계적 4대 심정권         364

   3) 세계적 4대 심정권         365

 2. 3대 왕권(王權)      365

  (1) 3대 王權의 뜻     365

  (2) 3대 王權의 性格   366

  (3) 3대 왕권의 표현(表現)이 필요한 이유(理由)     366

  (4) 王權과 그 개념(槪念)      367

차례 Index      368

 

 

 

 

         제1장 원상론(原相論)

 

Theory of the Original Image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통일사상은 인류의 모든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인류를 영원히 구원하기 위해서 출현한 사상이다. 그런데 그러한 난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정확히 또 충분히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관한 이론이 원상론이다. 여기서 원상(原相)이란 원인적 존재인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꼴의 측면과 성질, 성품, 능력 등의 기능적 측면이 있다. 전자(前者)를 신상(신상)이라 하고 후자를 신성(神性)이라고 한다.

 

종래의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여러가지로 표현해 왔다. 즉 전지(全知), 전능(全能), 편재성(遍在性), 지선(至善, 지고지선), 지미(至美), 지진(至眞), 정의(正義), 사랑, 창조주(創造主), 심판주(審判主), 유일무이(唯一無二, 唯一神), 영원불변, 무소부재 등으로 하나님을 표현해 왔다.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러한 성품은 하나님의 속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만 파악해서는 현실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한 것이다.

 통일사상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신성이라고 한다. 하나님에게는 이러한 신성 외에 보다 더 중요한 속성이 있으니 그것이 신상(神相)이다. 통일원리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이 신상과 신성을 함께, 그리고 정확히 이해함으로써만 현실문제(인생문제, 사회문제, 역사문제, 세계문제 등)의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게 된다.

 

통일사상에서 다루는 하나님의 신상이란 두 종류의 이성성상(性相, 形狀)과 양성(陽性) 음성(陰性))과 개별상(個別相)을 말하며 하나님의 신성(神性)이란 심정(心情), 로고스, 창조성(創造性)을 말하는 바, 본 원상론에서는 원상(原相)의 내용이라는 제목하에 신상과 신성(神性)의 하나하나의 내용을 설명하고, 원상(原相)의 구조(構造)라는 제목하에 神相중 특히 성상과 형상의 상호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一. 원상(原相)의 내용

 

원상의 내용이란 하나님의 속성(屬性) 하나하나의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제목 하에 신상인 성상-형상, 양성-음성, 개별상 등과 신성(神性)인 심정, 로고스, 창조성 등의 각각의 내용을 상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신상을 다루고 다음에 신성(神性)을 다룬다.

 

 1. 신상(神相)

 

신상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중의 꼴의 측면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정한 꼴 또는 꼴이 될 수 있는 가능성(可能性), 素材), 규정성(規定性)을 갖고 있다. 이것이 곧 신상이다. 이 신상에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의 두 종류의 이성성상과 개별상이 있는 바, 먼저 성상과 형상을 다루고자 한다.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은 본성상(本性相), 본형상(本形狀)이라고도 하며 이 양자를 합하여 이성성상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만물(萬物, 자연)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지만, 이 관계를 원인(原因)과 결과의 관계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본성상(本性相)은 피조물의 무형성(無形的), 기능성(機能的) 측면의 근본원인이며 본형상(本形狀)은 피조물의 유형적(有形的), 물질적측면(質料的側面)의 근본원인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부자(父子)의 관계로서 서로 닮고 있기 때문에 본성상(本性相)은 인간의 마음에 해당하며 본형상(本形狀)은 인간의 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양자는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속성이 아니며, 서로 상대적 및 상보적(相補的)인 관계에서 중화(中和, 調和)를 이루어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원리강론에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계신다(원리강론, 1987, p. 35)고 한 것은 이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확히 말해서 신상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 중화를 이룬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본체론(本體論)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신상관(神相觀)은 유심론(唯心論)도 유물론(唯物論)도 아니며, 유일론(唯一論) 또는 통일론(統一論)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심론(唯心論)은 본성상만이 우주의 근본이라고 보는 입장에 해당하며, 유물론(唯物論)은 본형상만이 우주의 실체라고 보는 입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각각의 내용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1) 성상(性相)(本性相)

 

    ① 본성상(本性相)과 피조물(被造物)

하나님의 성상(性相)(本性相)을 인간에 비유하면 인간의 마음에 해당하며(따라서 성상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무형적, 기능적측면의 궁극적 원인이 된다. 즉 인간의 마음, 동물의 본능(本能), 식물의 생명, 광물의 물리화학적(物理化學的) 작용성의 근본원인인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시간, 공간의 세계에 전개된 것이 광물의 물리화학적 작용성이며, 식물의 생명, 동물의 본능, 인간의 마음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성상(性相, 마음)이 광물과 같은 무기물에도 비록 극히 낮은 차원에 있어서나마 깃들어 있음을 뜻하며, 식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마음이 생명의 형태를 취한, 보다 더 높은 심적기능(心的機能)으로서 나타나며(최근 인간의 마음에 반응하는 심적 작용이, 식물에도 있음이 실험을 통해서 알려지고 있다), 동물의 단계에 있어서는 육심(肉心, 본능(本能))의 형태를 취한 한층 더 높은 심적기능으로 나타남을 뜻한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동물에도 인간에서와 똑같은 지정의(知情意)의 기능 즉 의식(意識)이 있음이 밝혀졌다(다만 동물이 인간과 다른 점은 동물에는 인간에서와 같은 자아의식(自我意識)이 없다는 점이다).

 

    ② 본성상(本性相)의 內部構造)

그런데 하나님의 성상(本性相)은 다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바, 내적성상 및 내적형상이 그것이다. 내적성상은 기능적부분(따라서 주체적부분)을 말하며 내적형상은 대상적부분(對象的部分)을 말한다. 하나님의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자 한다(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이다).

 

      i) 내적성상(內的性相)

 기능적부분이라 함은 지-정-의의 기능을 말하는 바, 이중에서 지적기능(知的機能)은 인식(認識)의 능력으로서 감성(感性), 오성(悟性), 이성(理性) 등의 능력을 말하며 정적기능(情的機能)은 정감성(情感性) 즉 희로애락 등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며, 의적기능(意的機能)은 의욕성 즉 욕구하거나 결심, 결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기능은 내적형상(內的形狀)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내적성상(內的性相)은 내적형상(內的形狀)에 대하여 주체적(主體的) 部分이 되고 있다. 지적기능에 있어서 감성이란 오관(五官)에 비치는 대로 아는 능력, 즉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뜻하며, 오성(悟性)이란 논리적으로 원인(原因)이나 이유(理由)를 따져서 아는 능력이다. 이성(理性)이란 보편적 진리를 구하는 능력 또는 개념화(槪念化)의 능력을 말한다.

 

이 3기능(機能)을 뉴턴이 만유인력(萬有引力)을 발견하는 과정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함에 있어서 먼저 사과가 落下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인식(認識)하였으며, 다음에 사과가 落下하는 원인을 생각하여 大地와 사과가 서로 引力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으며, 다시 그후에 여러 가지 실험 관찰 등의 연구를 통해서, 지구나 사과뿐 아니라 우주내의 質量을 갖고 있는 모든 物體가 인력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경우 처음 단계의 인식이 감성적인식(感性的認識)이며, 두번째 단계의 인식이 오성적인식(悟性的認識)이며, 세번째 단계의 인식이 이성적인식(理性的認識) 즉 보편적 인식인 것이다.

 

      ii) 내적형상(內的形狀)

 이것은 본성상(本性相) 內의 대상적 부분을 말하며, 몇 개의 꼴의 요소로써 이루어져 있다. 그 꼴의 요소중 주요한 것은 관념(觀念), 개념(槪念), 원칙(原則), 수리(數理) 등이다.

 

ㄱ) 관념(觀念)...... 관념(觀念)은 마음(성상(性相))속에 있는 피조물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표상(表象), 즉 영상(映像)을 말한다. 인간들은 경험을 통해서 객관세계의 사물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모습을 영상으로서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바, 이 영상(映像)이 바로 관념(觀念)이다. 인간의 경우는 경험(선험적)을 통해서 관념을 얻지만 하나님은 절대자(絶對者)이시기 때문에 본래부터 무수한 관념(觀念)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ㄴ) 개념(槪念)...... 개념(槪念)은 추상적인 영상을 말하며, 일군(一群, 한 무리)의 관념에 공통적으로 포함된 요소가 영상화(映像化)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개, 닭, 소, 말, 돼지 등의 관념에 있어서 공통적인 요소는 감각(感覺)을 가지고 운동하는 성질인 바, 이것을 영상화시키면 동물(動物)이라는 추상적인 꼴을 얻게 된다. 이것이 개념(槪念)이다. 이 개념에는 종개념(種槪念), 유개념(類槪念)이 있다.

 

ㄷ) 원칙(原則)...... 原則은 피조세계의 자연법칙(예:물리학적 법칙, 화학적 법칙 등) 및 규범법칙(當爲의 법칙) 또는 가치법칙(價値法則)의 근본원인이 되는 법칙으로서, 수많은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은 이 원칙이 각각 자연현상(물리적 및 화학적현상)과 인간생활을 통해서 나타나는 표현형태인 것이다. 마치 식물(예:나무)에 있어서 한 알의 씨앗이 발아하여 줄기가 되고 수많은 잎(葉)들이 무성하게 되듯이, 하나의 원칙에서 수많은 법칙(法則, 자연법칙, 규범법칙)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본다.

 

ㄹ) 수리(數理)...... 數理는 수적원리(數的原理)라는 뜻으로 자연계의 수적(數的) 현상(現象)의 궁극적 원인을 말한다. 즉 내적형상속에는 수적현상의 근원이 되는 무수한 數, 수치(數値), 계산법(計算法)이 관념으로서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數理이다. 피타고라스(Pythagoras)가 만물(萬物, 자연)의 근본(根本)은 數이다라고 말할 때의 數의 개념(槪念), 또 양자역학(量子力學)의 대성에 공헌한 영국의 물리학자 디락(P. Dirac, 1902- )이 하나님은 고도의 수학자(數學者)이며, 우주를 구성할 때 극히 고급한 수학을 사용했다'2)라고 했을 때의 數의 개념은 모두 통일사상의 數理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ii)내적형상(內的形狀)의 원리적(原理的) 및 성서적(聖書的) 근거(根據) 다음은 以上의 내적형상에 관한 이론이 통일원리 및 성서의 어디에 그 근거가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ㄱ)내적형상(內的形狀)...... 따라서 내성(內性, 성상(性相))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반드시 그 어떠한 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난 그 외형(外形)이 눈에 보이는 그 어떠한 꼴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전자(前者)를 성상(性相)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형상(形狀))이라 한다(원리강론,1987.p. 33). 이것은 눈에 보이는 꼴 이전에 성상(性相)속에 이미 꼴이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 성상(性相)속의 꼴이 바로 내적형상(內的形狀)이다.

 

ㄴ)관념(觀念)?개념(槪念)......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男子와 女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하나님이 6일간에 걸쳐 만물을 창조함에 있어서 매일(每日)의 창조를 마치시고는 그대로 된지라(창세기 1:7, 9, 11절),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4, 10, 12, 18, 21, 25절)고 하셨는데 이것은 마음속에 지녔던 관념(觀念), 개념(槪念)대로 피조물이 닮아 났음을 뜻한다.

 

ㄷ)원칙(原則)(原理)... ... 하나님은 원리(原理)에 의해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원칙에 따라서 攝理를 하심(원리강론, 1987, p. 108), 하나님은 원리(原理)의 주관자로 계시다(同上 p. 64), 원리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同上 p. 103), 하나님은 원리(原理)로써 창조된 인간을 사랑으로 주관하셔야 하므로(同上 p. 92)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원칙(원리)을 세운 후,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ㄹ)수리(數理)...... 피조세계(被造世界)는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 수리적인 원칙에 의해서 실체적으로 전개된 것이다(同上 p. 62). 하나님은 수리성(數理性)을 갖고 계시다(同上), 하나님은 數理的으로도 존재하시는 분이시다(同上 p. 376)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적형상(內的形狀)을 이루고 있는 꼴의 요소들은 모두 統一原理(원리강론)와 聖書에 그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以上은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內의 기능적부분(내적性相)과 대상적부분(對象的部分, 내적형상(內的形狀))을 인간의 마음에 비유해서 설명한 것이다. 본성상을 이와 같이 상세히 다루는 것은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서이다. 예컨대 내적성상인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은 그것이 심정(心情)(후술(後述))을 터로 하고 작용할 때, 사랑을 터로 하는 眞?美?선(善)의 가치관이 성립되는데 이러한 가치관은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내적형상(內的形狀)은 지(知) 정(情) 의(意)의 대상적부분(對象的部分)인 동시에 본형상(後述)과 더불어 피조물의 유형적부분(有形的部分)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실과, 지(知) 정(情) 의(意)(主體部分)에 대응하는 가치가 眞 美 선(善)이라는 사실에서, 현실생활에 있어서 의식주(衣食住)의 물질적생활보다도 眞 美 선(善)의 가치생활을 우선해야 한다는 논리가 도출된다. 이것도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된다.

 

   2) 형상(形狀); 본형상(本形狀))

 

다음은 하나님의 형상(本形狀)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① 본형상(本形狀)과 피조물(被造物)

하나님의 형상(本形狀)을 인간에 비유하면 인간의 몸에 해당하며,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유형적(有形的)인 要素(측면)의 근본원인이 된다. 즉 인간의 몸(肉體), 동물의 肉, 식물의 조직세포(組織細胞), 광물의 分子 原子 등의 궁극적 원인인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본형상(本形狀)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시간 공간의 세계에 展開된 것이 광물의 분자 원자이며, 식물의 조직세포이며, 동물의 肉이며, 인간의 몸인 것이다.

 

이와 같이 피조물의 유형적요소(有形的要素)의 근본원인이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 피조물의 유형적요소의 근본원인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소재(素材; 質料)적 요소(要素)요, 또 하나는 무한(無限)한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無限應形性)이다(만물의 형태 자체의 근본원인은 내적형상(內的形狀)이다).

 

여기서 무한(無限)한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無限應形性)을 비유적으로 예를 든다면 물(水)과 같다 하겠다. 물 자체는 다른 만물과 달라서 일정(一定)한 형태가 없다. 그러나 용기(容器)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를 나타낸다. 삼각형(三角形) 용기에서는 삼각형(三角形)으로, 사각형 용기에서는 사각형으로, 원형의 용기에서는 원형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물이 무형(無形)인 것은 실은 어떠한 용기의 형태에도 응변(應變)하는 무한(無限)한 응형성(應形性)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물이 무형(無形)인 것은 실은 무한형(無限形)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형상(本形狀)도 그것 자체는 일정(一定)한 형태가 없지만, 어떠한 형태의 영상에도 응변(應變)할 수 있는 응형성(應形性) 즉 무한응형성(無限應形性)을 소재적(素材的) 요소외(要素外)에 또한 갖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피조물의 유형적요소(有形的要素)의 근본원인에는 소재적요소와 무한응형성의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두 가지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形狀)(本形狀)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경우, 창작(創作); 창조(創造))이란 마음이 구상한 무형의 꼴의 틀에 일치(一致)하도록 가시적(可視的)인 소재(조각의 경우:石膏 또는 大理石)를 변형시키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창작이란, 구상한 꼴의 틀(形式)에다가 소재(내용)를 맞추어 내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본성상내의 내적형상(각종 觀念)이 틀(용기) 또는 주형(鑄型)이 되어서, 이 틀에 무한응형성을 지닌 소재적요소를 부어 넣은 후 일정하고도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하는 작업을 창조(創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② 본형상(本形狀)과 과학(科學)

본형상(本形狀)에 있어서, 피조물의 유형적(有形的) 측면의 두 근본원인중의 하나인 소재적 요소는 요컨대 과학의 대상인 만물(물질)의 근본원인이기 때문에, 소재적요소와 과학자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까?

 

오늘의 과학은 물질의 근본원인을 소립자(素粒子)의 전단계(前段階)인 에너지(物理的에너지)라고 보고 있으며, 그 에너지는 파동성(波動性)과 입자성(粒子性)을 띠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은 결과의 세계, 현상의 세계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그 원인이 에너지라 하더라도 궁극적인 제일원인(第一原因)에는 과학이 도달할 수 없다. 본원상론(本原相論)은 그 궁극적 원인을 바로 본형상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본형상을 과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에너지의 前단계 즉 前단계에너지'(Prior-stage Energy) 또는 간단하게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Pre-Energy)3)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③ 본형상(本形狀)과 힘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는 본형상(本形狀; Pre-Energy)에서 수수작용(授受作用)(후술(後述))에 의하여 먼저 두 가지의 힘(에너지)이 발생한다고 본다. 그 하나는 형성(形成)에너지(Forming-Energy)요, 다른 하나는 작용(作用)에너지(Acting- Energy)이다.

 

전자(前者)(形成에너지)는 곧바로 입자(粒子)로 化하여 현실적인 물질적 소재가 되어서 만물(피조물)을 형성하고, 후자(後者)(作用에너지)는 만물에 작용하여 만물(萬物, 자연) 상호간에 주고 받는 힘(例:求心力, 遠心力 등)을 일으킨다. 이것을 통일사상에서는 원력(原力; Prime-Force)이라고 부르며, 이 원력(原力)이 만물을 통해서 작용력으로 나타날 때 이 작용력을 만유원력(萬有原力; Universal Prime-Force)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본형상(本形狀)에서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형성(形成)에너지 및 작용(作用)에너지가 발생함에 있어서, 사랑의 근원인 심정(心情)(後述)이 수수작용의 터전이 되기 때문에 발생한 두 에너지는, 단순한 물리적인 에너지만이 아니며, 물리적에너지와 사랑의 힘과의 복합물(複合物)인 것이다. 따라서 원력(原力)에도, 만유원력(萬有原力)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文鮮明 先生은 1975년 5월의 희망(希望)의 날 만찬(晩餐) 대강연회(大講演會)이후, 자주 만유원력(萬有原力)에도 사랑의 힘이 작용한다고 말씀하고 계심).

 

3)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이동성(異同性)

다음에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이 本質的으로 동질적(同質的)인가 이질적(異質的)인가, 즉 성상과 형상의 이동성(異同性)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論이, 일반 철학상의 본체론(本體論)으로 볼 때 어떠한 입장이 될 것인가, 즉 성상(性相) 형상(形狀)의 이성성상(二性性相)論이 일원론(一元論)인가 이원론(二元論)인가, 또는 유물론(唯物論)인가 유심론(唯心論; 관념(觀念)論)인가. 여기의 일원론(一元論)이란 우주의 시원(始元)이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유물론(唯物論)이거나, 우주의 시원(始元)이 정신이라고 주장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유심론(唯心論, 觀念論)을 말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전자(前者)에 속하고 헤겔의 관념론은 후자(後者)에 속한다. 그리고 二元論은 물질과 정신이 각각 별개이면서 우주생성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며 사유(思惟; 精神)와 연장(延長; 물질)의 두 실체를 인정하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유심이원론(物心二元論)이 그 예이다.

 

그러면 통일사상의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이성성상論은 一元論인가, 二元論인가, 즉 원상(原相)의 성상과 형상이 본래 동질적인 것인가 이질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만일 성상과 형상이 이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원적 존재(二元的 存在)가 되어 버린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상(마음)과 형상(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이 이질적(異質的)인 두 요소인가, 동질적인 요소의 두 표현태(表現態)인가를 알아보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은 동질적인 요소의 두 표현태(表現態)이다. 이것은 마치 수증기와 얼음(氷)이 물(水:H₂O)의 두 가지의 표현태(表現態)인 것과 같다. 물은 물分子(H₂O)의 引力과 斥力이 균형을 이룰 때이며, 열을 가하여 척력이 우세해지면 기화(氣化)하여 수증기(水蒸氣)가 되고, 기온(氣溫)이 下降하여 빙점 이하로 떨어져서 引力이 우세해지면 얼음이 된다. 수증기나 얼음은 모두 물의 표현태, 즉 물분자의 引力과 斥力의 상호관계의 표현양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전혀 이질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상(性相) 형상(形狀)의 이성성상도 하나님의 절대속성의, 즉 동질적요소의 두 가지 표현태(表現態)인 것이다. 절대속성이란 에너지的 心이요, 心的에너지이다. 에너지와 마음은 별개가 아니라 본래 하나이다. 이 절대속성이 창조과정에서 分化된 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서의 성상(性相)과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형상(形狀)이다.4)

 

성상과 형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상은 심적요소(心的要素)로 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에너지的 요소도 갖고 있으며, 단지 심적요소(心的要素)가 에너지적요소보다 많을 뿐이다. 또 형상은 에너지적 요소로 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심적요소도 갖춰져 있으며 에너지적 요소가 심적요소보다 많을 뿐이다. 그와 같이 성상과 형상은 전혀 이질적(異質的)인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공통적으로 心的요소와 에너지的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피조세계(被造世界)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정신(마음)과 물질로서 서로 이질(異質)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역시 거기에도 공통된 점이 있다. 그것을 표시하는 例로서 마음에도 에너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개구리 등에서 채취한, 신경이 달린 골격근(骨格筋; 신경근표본)에 대하여 신경(神經)에 전기적 자극을 주면 근육은 수축(收縮)한다. 한편 우리들은 마음으로써 손이나 발의 근육을 움직인다. 이것은 마음이 신경을 자극하여 근육을 움직이는 것이다. 즉 마음에도 물질적인 에너지(전기에너지)와 같은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면술(催眠術)로 타인의 몸, 예컨대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마음에 에너지가 있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에너지에도 성상적요소가 깃들어 있다. 최근의 과학에 의하면, 物理的 眞空狀態에서 에너지가 진동(振動)하여 소립자(素粒子)가 형성되는데, 이 때의 에너지의 진동은 연속적이 아니고 단계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마치 음악에 음계(音階)가 있듯이 同에너지가 단계적으로 진동해서 그 결과 그 단계에 따라서 규격(規格)이 다른 소립자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마치 음악에 있어서 음계(音階)의 차가 마음에 의해서 나타나듯이 에너지의 배후에도 마음(성상)이 있어서 진동단계를 나타낸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이 성상(性相) 속에도 형상적요소가 있고 형상(形狀)속에도 성상적요소가 있지만 원상에 있어서의 성상과 형상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절대속성에서 성상과 형상의 차이가 생기고, 창조를 통하여 그 속성이 피조물이 되어서 피조세계에 나타날때 이질의 두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하나의 점에서 두 방향으로 두 개의 직선(直線)이 그어지는 것과 같다. 그 때 하나의 직선은 성상(精神)에 대응(對應)하고, 다른 직선은 형상(物質)에 대응하는 것이다(그림 1-1).

 

성서에는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질을 알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로마서 1:20). 피조물을 보면 마음(정신)과 육신, 본능과 肉, 생명과 세포?조직 등의 양면성(兩面性)이 있기 때문에 귀납적(歸納的)으로 볼 때, 절대원인자인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이성성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에 있어서 이성성상은 실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원리강론에서는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을 본체론(本體論)에서 볼 때는 統一論'5)이 되게 된다. 그리고 창조를 구상하기 전의, 절대속성 그 자체만을 표현할 때의 본체론은 유일론(唯一論)'6)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 C.)에 의하면 실체(實體)는 형상(形相; eidos)과 질료(hyle)로 되어 있다. 형상(形相)이란 실체로 하여금 바로 그것이 되게 하는 본질을 말하며, 질료는 실체를 이루고 있는 소재를 말한다. 서양철학의 기본적인 개념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形相)과 질료(質料)는 통일사상에서 말하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형상(形相)과 질료(質料)를 구극(究極)에까지 소급(遡及)해 올라가면 순수형상(純粹形相; 第一形相)과 제1질료(第一質料)에 도달한다. 여기의 순수형상이 곧 하나님이지만 그것은 질료가 없는 순수한 활동이며, 사유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순수한 思惟 또는 사유의 사유(노에시스, 노에세오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제1질료(第一質料)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체론(本體論)은 이원론(二元論)이다. 또 제1질료(第一質料)를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본체론은 하나님을 모든 존재의 창조주로 보고 있는 기독교의 신관(神觀)과도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 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思惟)를 근거로 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순수형상 또는 사유의 사유를 하나님으로 보았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 354~430)와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님이 無에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질료를 포함한 일체의 창조주시며 게다가 하나님에게는 질료적요소가 없으므로 그는 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無에서 물질이 생긴다는 교의(敎義)는, 우주가 에너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는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하나님과 정신과 物體(물질)를 세 가지의 실체라고 하였다. 구극적(究極的)으로는 신이 유일(唯一)한 실체이나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정신과 물체는 각각 하나님에 의존하면서도 상호간에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실체라고 하여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했다. 그 결과, 정신과 물체는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그 설명이 곤란(困難)하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二元論)을 이어받은 게엘링크스(A. Geulincx, 1624~1669)는, 서로 독립한 이질적인 정신과 신체 사이에 어떻게 해서 상호작용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양자 사이를 매개(媒介)한다고 설명했다. 즉 정신이나 신체의 한편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계기(契機)로 하여 그에 대응하는 운동을 신(神)이 다른 한편에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기회원인론(機會原因論; occasionalism)7)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방편적(方便的)인 설명에 불과할 뿐 오늘날에는 아무도 이것을 거들떠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즉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라고 본 데카르트의 관점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p.44

 

이와 같이 서양사상이 포착한 형상(形相)과 질료(質料) 혹은 정신과 물질의 개념에는 설명하기 곤란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난점을 해결한 것이 통일사상의 성상과 형상의 개념, 즉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은 동일한 본질적 요소의 두 가지의 표현태(表現態)이다라는 이론이다. 이상으로 신상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또 하나의 신상인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양성(陽性)과 음성(陰性)

  

   1) 양성(陽性)과 음성(陰性)도 이성성상이다.

 

양성(陽性)과 음성(陰性)도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다. 그러나 같은 이성성상인 성상과 형상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성상과 형상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속성이지만 양성과 음성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속성이며, 직접적으로는 성상과 형상의 속성(屬性)이다. 즉 양성과 음성은 모두 성상(性相)의 속성인 동시에 형상(形狀)의 속성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상(性相)(본성상(本性相))도 양성과 음성을 그 속성으로서 지니고 있고, 하나님의 형상(形狀)(본형상(本形狀))도 양성과 음성을 그 속성으로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양성과 음성도 이성성상과 마찬가지로 중화(中和)를 이루고 있다. 원리강론에 하나님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주체로 계시다(1987, p. 35)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사실을 뜻한다. 이 中和의 개념도 성상과 형상의 중화와 마찬가지로 조화(調和), 통일(統一)을 의미하며 창조가 구상되기 이전에는 하나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 하나가 창조에 있어서 양적속성(陽的屬性), 음적속성(陰的屬性)으로 분화(分化)되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철학인 역학(易學)의 태극생량의(太極生兩儀)(太極에서 음양이 생겨났다)는 맞는 말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양성 음성의 개념은 易學의 양(陽) 음(陰)의 개념과 비슷하나 반드시 一致하지는 않는다. 동양적인 개념으로는 陽은 빛(光), 밝음(明)을 뜻하며 陰은 그늘(蔭), 어두움(暗)을 뜻한다. 이 기본적인 개념(槪念)이 확대적용되어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즉 陽은太陽 ,山, 天, 낮, 경(硬; 단단함), 열(熱), 高 등의 뜻으로, 그리고 陰은 이에 대응하여月, 谷, 地, 밤, 연(軟; 연함), 냉(冷), 저(低) 등의 뜻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은 모두 성상 형상의 속성이기 때문에 피조세계에 있어서 성상 형상은 개체(個體) 또는 실체(實體)를 이루고 있으며, 양성-음성(陽性-陰性)은 이 실체(피조물)의 속성으로 나타나 있다. 예컨대 태양과 밝음(明)에 있어서 태양(個體)은 성상 형상의 통일체(統一體); 實體)이며 태양빛의 밝음만이 陽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달(月) 그 자체는 개체(實體)이며 달의 반사광의 밝음의 희미함만이 陰인 것이다.

 

여기서 통일사상의실체(實體)의 개념을 잠깐 다루고자 한다. 통일사상의 실체는 물론 통일원리의實體의 뜻에서 유래한다. 통일원리에는 실체기대(實體基臺), 실체헌제(實體獻祭), 실체성전(實體聖殿), 실체세계(實體世界), 실체상(實體相), 실체대상(實體對象), 실체노정(實體路程) 등 실체와 관련된 용어가 자주 쓰여지고 있는데, 여기의실체(實體)는 피조물, 개체, 육신을 쓴 인간, 물질적존재 등의 뜻을 지닌 용어이다.

 

그런데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성상 형상의 합성체(合性體; 통일체(統一體))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피조물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각각 개체(個體)의 구성부분이 되고 있어서, 성상이나 형상 그 자체도 또한 실체(피조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마치 자동차도 제작물(제작물(製作物); 實體)이며, 자동차의 구성부분인 부품(예:타이어, 트랜스미션 등)도 제작물(실체)인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의 성상과 형상도 통일사상에 있어서는 각각 실체의 개념에 포함된다.

 

그런데 원상(原相)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을 각각 본양성-본음성(本陽性-本陰性)이라고 한다(원리강론 1987, p. 35). 원상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 및 본양성(本陽性)과 본음성(本陰性)을 닮아난 것이 인간의 성상-형상과 양성-음성이다. 그런데 피조세계에서는 상술한 바와 같이 성상도 형상도 모두 실체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양성과 음성은 모두 실체로서의 성상-형상(또는 그 합성체(合性體)인 개체)의 속성이 되고 있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그림 1-2와 같다.

   

따라서 원상에 있어서의 성상-형상과 양성-음성의 관계를 정확히 알려면, 인간에 있어서의 실체로서의 성상-형상과 그 속성으로서의 양성-음성의 관계를 알아보면 된다. 다음에 도표로써 인간의 경우의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의 관계를 밝히면 그림 1-3과 같다. p. 47

   

그림1-3.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속성으로서의 陽性-陰性(인간의 경우)

 

이 도표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성상(性相)(마음)의 지(知) 정(情) 의(意)의 기능에도 각각 그 속성으로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이 있다. 예컨대 지적(知的)기능에는 명석(明晳), 판명(判明) 등의 양적측면과 모호(模糊), 혼동(混同) 등의 음적측면이 있고, 의적(意的)기능에도 적극적, 창조적 등의 양적측면과 소극적, 보수적 등의 음적측면이 있다. 그리고 형상(形狀)(육신)에 양적측면(隆起部, 突出部 등)과 음적측면(陷沒部, 孔穴部 등)이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이 도표에서 열거(例擧)한 것은 인간의 경우일 뿐이며, 하나님의 경우는 이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심정 중심한 원인적존재이시기 때문에 창조 전의 하나님의 성상(知情意)과 형상의 속성인 陽性-陰性은 다만 조화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며, 일단 창조가 개시되면 그 가능성으로서의 양성-음성이 표면화되어서,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에 조화있는 변화를 일으키고 형상에도 조화로운 변화를 가져 온다.

 

   2) 陽性-陰性과 男子-女子와의 관계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陽性-陰性과 男子-女子의 관계이다. 동양에서는 고래(古來)로 남자를 양(陽), 여자를 음(陰)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통일사상(통일원리)에서는, 남자를 양성실체(陽性實體), 여자를 음성실체(陰性實體)라고 말한다. 얼핏보면 동양의 男女觀과 통일사상의 남녀관(男女觀)이 같은 것 같으나 사실은 전연 다르다.

 

上記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남녀의 성상과 형상이 다 함께 양성-음성을 갖고 있으나, 성상에 한해서는 남자의 성상의 陽陰과 여자의 성상의 양음이 질적으로 다르다(후술(後述)). 이를테면 남자의 陽性-陰性은 남성적인 陽陰, 여자의 陽性-陰性은  여성적인 陽陰이라고 할 수 있다(후술(後述)). 이러한 양성과 음성을 가진 남자를, 양성을 지닌 성상(性相)-형상(形狀)의 통일체라고 하며, 이러한 양성과 음성을 지닌 여자를, 陰性을 지닌 성상-형상의 통일체라고 한다. 이것을 간단히 말해서, 남자를 양성의 실체, 여자를 음성의 실체라고 표현한다(원리강론 1987, p. 37).

 

여기서 특별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남자를 양성(陽性)의 실체(實體)라고 할 때의 양성과, 여자를 陰性의 실체라고 할 때의 음성이 上記 도표에서 밝혀진 양성-음성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성상에 있어서 男女間의 양성과 음성이 다르고, 형상(形狀)에 있어서 男女間의 양성-음성이 다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형상(形狀)(육신)에 있어서의 남녀간의 양성-음성의 차이를 설명한다. 형상 즉 몸에 있어서는 陽性인 융기부(隆起部)나 돌출부(突出部)도, 또 음성인 함몰부(陷沒部)나 공혈부(孔穴部)도, 남녀가 똑같이 갖고 있으나 남녀간에 차이가 있다. 남자는 突出部(陽性)가 하나 더 있고 여자는 孔穴部(陰性)가 하나 더 있다. 따라서 형상(形狀)에 있어서는 남녀간의 양성에도, 음성에도 모두 양적차이(量的差異)가 있음을 알게 된다. 즉 형상(形狀)에 있어서 남녀간의 양성-음성의 차이는 양적차이(量的差異)이다.

 

그러면 성상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성상에 있어서의 남녀간의 陽性-陰性의 차이는 양적차이(量的差異)가 아니라 질적차이(質的差異)이다(量的으로는 도리어 男女間에 차이가 없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성상 즉 마음에 있어서 陽性인 명석(明晳)의 경우, 남녀가 다 함께 명석(明晳(陽))을 갖고 있으나 그 명석의 質이 남녀간에 차이가 있다. 남자의 명석은 포괄적(包括的)인 경우가 많고 여자의 명석은 축소지향적(縮小指向的인 )경우가 많다. 재치(才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 성상(性相)(마음)의 감정상의 슬픔(陰)이 과도(過度)할 경우, 남자의 슬픔은 비통(悲痛(억센 슬픔))으로 변하기 쉽고, 여자의 슬픔은 비애(悲哀(가냘픈 슬픔))로 변하기 쉽다. 성상의 의욕(意欲)에 있어서 적극성(陽)의 경우, 남자의 적극성은 상대방에게 경성감촉(硬性感觸)을 주기 쉽지만 여자의 적극성은 상대방에게 연성감촉(軟性感觸)을 주기 쉽다. 남녀간의 이러한 차이가 질적차이(質的差異)이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1-4와 같다.

   

 

이와 같이 성상(性相)(마음)에 있어서는, 남녀간에 陽性에도 질적차이가 있고, 陰性에도 질적차이가 있다. 이것을 음악(聲樂)에 비유하면 고음(高音)에 男子(tenor)와 여자(soprano)의 차이가 있고, 저음(低音)에도 남자(bass)와 여자(alto)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와 같이 성상(性相)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이 남녀간에 질적차이(質的差異)가 보일 때, 남자의 양성-음성을 통틀어서 남성적이라 하고, 여자의 양성-음성을 통틀어서 여성적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여기에 남성적(男性的)인 양성-음성과 여성적(女性的)인 양성-음성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여기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는지 모른다. 즉 형상에 있어서는 남녀간의 차이가 양적차이(量的差異)이기 때문에, 즉 남자는 양성이 量的으로 더 많고 여자는 陰性이 量的으로 더 많기 때문에, 남자를 陽性의 실체로 여자를 음성의 실체로 보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성상(性相)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이가 질적차이일 뿐, 남녀가 量的으로는 똑같이 陽-陰을 갖고 있는데 왜 남자를 양성의 실체, 여자를 음성의 실체라고 하느냐 하는 의문이다.

 

그것은 男女間의 陽的 및 陰的 차이가 量的이건 質的이건 간에, 양성과 음성의 관계는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의 관계(후술(後述))이기 때문이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적극성(積極性)과 소극성(消極性)의 관계요, 능동성(能動性)과 피동성(被動性)의 관계요, 외향성과 내향성의 관계이다. 그런데 상술한 성상(性相)(지(知) 정(情) 의(意))의 속성인 陽陰의 남녀간의 질적차이를 살펴볼 때, 그 질적차이에 있어서도 남성의 陽과 여성의 陽의 관계 및 남성의 陰과 여성의 陰의 관계가 모두 주체와 대상의 관계임을 알게된다.

 

즉 상기한 例로 볼 때, 지적기능(知的機能)인 陽에 있어서 남성의 명석의 포괄성(包括性)과 여성의 축소지향성(縮小指向性)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며, 정적기능(情的機能)인 陰에 있어서 남성의 悲痛(억센 슬픔)과 여성의 悲哀(가냘픈 슬픔)의 관계도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또 의적기능(意的기능(機能))의 陽에 있어서 남성의 적극성(積極性)의 경성(硬性)과 여성의 적극성(積極性)의 연성(軟性)의 관계도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이같은 남녀간의 陽과 陰의 질적차이는 양적차이(量的差異)때와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양과 음의 관계임을 뜻한다. 이상으로 男子을 양성실체(陽性實體), 女子를 음성실체(陰性實體)라고 부르는 이유를 밝혔다.

 

   3) 성상(性相) 형상(形狀)의 속성으로서의 양성-음성과 현실문제의 해결

 

이상에서 양성-음성은 성상 형상의 속성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 사실이 왜 중요하냐 하면, 그것이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의 현실문제란 남녀문제를 말한다. 남녀간의 성도덕(性道德)의 퇴폐문제(頹廢問題), 부부(夫婦)間의 불화문제, 가정파탄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양성-음성이 성상-형상의 속성이라는 말은, 성상(性相)-형상(形狀)과 陽性-陰性의 관계가 실체와 속성과의 관계임을 뜻하는 것이다. 실체와 속성에 있어서 선차적(先次的)으로 중요한 것은 실체이다. 속성이 依據하는 근거가 실체이기 때문이다. 실체없는 속성은 무의미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상-형상은 양성-음성이 의거(依據)하는 근거로서의 실체이며, 이 성상-형상이 없는 양성-음성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인간에 있어서의 성상-형상이란, 현실적으로는 성상-형상의 통일을 말하는 것으로서 마음과 몸의 통일, 생심(生心)과 肉心의 통일을 말하며, 인격(人格)의 완성을 뜻한다.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볼 때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뜻한다. 여기서 인격(人格)의 완성(完成)과 男女間의 結合과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즉 남녀의 결혼에 있어서, 인격의 완성이라는 조건이 왜 필요한가 하는 문제이다. 陽性-陰性이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속성이다라는 命題에 따른다면 남녀는 결혼하기 전에 먼저 인격을 완성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통일원리(統一原理)의 삼대축복(個性完成, 家庭完成, 主管性完成)에 있어서 개성완성(人格完成)이 가정완성(부부의 결합)보다 앞에 놓인 것은, 그 근거가 바로 이 陽性-陰性은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속성이다라는 명제에 있었던 것이며, 대학(大學)의 8조목(條目)中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平천하에 있어서 수신을 제가보다 앞에 놓은 것도, 大學의 저자가 무의식중에 이 명제(命題)를 감지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남녀관계에 관련된 각종 사회문제(性道德의 퇴폐, 가정불화, 이혼, 가정파탄, 부녀자 가출, 부녀자 인신매매 등)가 속출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가정완성전에 개성완성이 안되었기 때문이요, 齊家전에 修身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그 해결이 가장 어려운 현실문제의 하나인 남녀문제(男女問題)는 가정완성(家庭完成)전에 즉 결혼전에, 먼저 남녀가 함께 인격을 완성(個體完成)함으로써, 또는 제가(齊家)하기 전에 먼저 수신(修身)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陽性-陰性이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속성이다라는 명제도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원상(原相)中의 양성-음성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또 하나의 꼴로서의 속성(屬性)인 개별상(個別相)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3) 개별상(個別相)

 

   1) 개별상이란 무엇인가

 

위에서 말한 성상(性相)-형상(形狀) 및 陽性-陰性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으로서, 이 두 종류의 상대적 속성은 모두 피조세계에 전개되어서 보편적으로 모든 개체속에 일일이 나타나고 있다. 성경(聖經)에 창세로부터 그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永遠)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신상)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로마서 1:20)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사실을 두고 한 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만물이 모두 보편적으로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을 보편상(普遍相)이라고 한다.

 

한편 만물은 개체마다 독특한 성질을 또한 지니고 있다. 광물, 식물, 동물 등의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천체(天體)도 항성이거나 유성이거나 모두 특성을 갖고 있으며, 특히 인간은 각개인(每個人)마다 독특한 성질을 갖고 있다. 체격(體格), 체질(體質), 용모(容貌), 성격(性格), 기질(氣質) 등이 개인마다 다르다.

 

만물과 인간의 개별적(個別的)인, 이와같은 특성의 원인의 소재는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의 내부, 특히 내적형상의 내부인 것이다. 하나님의 내적형상의 내부에 있는 이같은 개별적 특성의 원인을 개별상(個別相)이라고 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屬性)속에 있는 개별상이 피조물의 개체 또는 종류마다에 나타난 것을 피조물의 개별상이라 한다. 그리고 인간은 개인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개별상을 개인별(個人別) 個別相이라 하고, 만물은 종류에 따라서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만물의 개별상을 종류별(種類別) 개별상(個別相)이라고 한다.

 

   2) 개별상(個別相)과 보편상(普遍相)

 

그런데 여기서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물의 개별상(個別相)과 인간의 개별상이 그 범위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인간에 있어서의 개별상은 每 個人의 특성을 말하지만, 인간 이외의 만물(동물, 식물, 광물 등)의 개별상은 일정(一定)한 종류의 특성 즉 種差(특히 最下의 종차)를 말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 및 하나님의 子女로 지음받았고, 만물은 인간의 기쁨의 대상(對象)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피조물의 보편상과 개별상과의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개별상이 아무리 개체의 특성이라 하더라도, 보편상과 별개의 특성이 아니며 보편상 그 자체가 개별화된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얼굴(容貌)이 각각 다른 것은 얼굴이라고 하는 형상(形狀)(보편상)이 개별화되고 특수화된 것이며, 인간의 개성이 각각 다른 것은 성격(性格), 기질(氣質)이라고 하는 성상(性相)(보편상)이 개별화되고 특수화된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에 있어서의 개별상이란 每 個人의 보편상이 개별화된 것이며, 이외의 피조물에 있어서는 매 종류의 보편상이 개별화된 것이다.

 

피조물에 있어서 이와 같이 보편상의 개별화가 개별상인 것은, 하나님의 내적형상(內的形狀)속에 있는, 피조물에 대한 개별화의 要因(개별상)이 하나님의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을 개별화시키는 요인(要因)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보편상을 원보편상(原普遍相)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내적형상(內的形狀)속에 있는 개별상을 원개별상(原個別相)이라고도 부른다. 그리하여 피조물의 보편상과 개별상은 원보편상 및 원개별상에 각각 대응(對應)하고 있는 것이다.

 

   3) 개별상(個別相)과 돌연변이(突然變異)

 

다음은 개별상(個別相)과 유전인자(遺傳因子)와의 관계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즉 일반 생물의 종차(種差) 및 인간의 개성과 유전인자(遺傳因子)와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진화론(進化論)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생물의 종차(種差)로서의 개별상의 출현은 돌연변이(突然變異)에 의한 신형질(新形質)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인간의 개성으로서의 개별상의 출현은 父의 DNA(遺傳情報)와 母의 DNA의 단편(斷片)들의 다양한 혼합(混合), 또는 조합(組合)에 의한 유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진화론(進化論)은 창조과정의 현상론적(現象論的) 파악(把握)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생물(生物)에 있어서 돌연변이(突然變異)에 의한 신형질(新形質)의 출현이 실은 돌연변이의 방식을 취한 신개별상(新個別相) 의 창조인 것이며, 인간에 있어서 父母의 DNA의 혼합(조합(組合))에 의한 신형질의 출현도 실은 유전정보(遺傳情報; DNA)의 혼합(조합(組合))의 방식을 통한 인간의 신개별상(新個別相)의 창조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물이나 인간의 신개별상(新個別相)의 창조란, 하나님의 내적형상(內的形狀)에 있는 일정한 원개별상을 이에 대응하는 피조물(被造物)(생물과 인간)에게 신개별상(新個別相)으로서 부여(賦與)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4) 개별상(個別相)과 환경

 

다음으로 개별상과 환경과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개별상을 지닌 개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환경과의 사이에 부단한 수수관계(授受關係)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즉 개별상을 지닌 개체는 환경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변화하면서 성장, 발전한다. 이것은 수수작용의 결과로서 반드시 합성체(合性體) 또는 신생체(新生體; 변화체)가 형성된다는 수수법(授受法)의 원칙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한 개체의 특성(個別相)은 원칙적으로 선천적(先天的)인 것이지만, 그 개별상의 일부는 환경요인에 의해 변화되어서 마치 후천적(後天的)으로 형성된 특성인 것처럼 느껴진다(예:일란성쌍생아(一卵性雙生兒)의 경우). 그러나 동일한 환경요인에 의해서 나타나는 특성에도 개인별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수수작용의 방식)에도 개인차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개인차는 바로 개별상에 기인하는 개인차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개별상의 일부가 변형되어서 후천적으로 형성된 특성처럼 나타난 것을 개별변상(個別變相; Individual Changed Image)이라고 한다.

 

   5) 인간개성의 존귀성

 

끝으로 인간의 개성의 존귀성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무릇 피조물의 특성은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屬性)중의 개별상(原個別相)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모두 귀한 것이지만 특히 인간의 개성은 더욱 존엄하고 신성하고 귀중한 것이다. 인간은 만물에 대한 주관주(主管主)인 동시에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으로 구성된 이중체(二重體)이며 육신의 사후에도 영인체가 영생(永生)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 그 개성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實踐)하면서 창조이상을 실현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연의 개성은 그만큼 존귀하고 신성한 것이다. 흔히 인도주의(人道主義)가 인간의 인격이나 개성의 존귀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개인의 특성의 신래성(神來性)이 인정되지 않는 한, 인간을 동물시하는 유물론적(唯物論的) 인간관을 극복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별상(原個別相)에 관한 이론도 또 하나의 현실문제(現實問題; 인간의 개성(個性)이 왜 존중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의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以上으로 신상(성상(性相)-형상(形狀), 陽性-陰性, 個別相)에 관한 설명 전부를 마친다. 다음은 신성(神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신성(神 性)

 

하나님의 속성(屬性)(원상(原相))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꼴의 측면뿐만 아니라 기능, 성질, 능력의 측면도 있다. 이것이 신성(神性)이다. 종래의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전지(全知), 전능(全能), 편재성(遍在性), 至선(善), 至眞, 至美, 공의(公義), 사랑, 창조주(創造主), 심판주(審判主), 로고스 등은 그대로가 신성(神性)에 관한 개념들이며 통일사상도 물론 이러한 개념(槪念)들을 신성(神性)의 표현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문제의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槪念)들은 꼴(신상)의 측면을 함께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槪念)들은 꼴(신상)의 측면을 함께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창조와 직접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대로는 현실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통일사상은 현실문제 해결에 직접 관련되는 신성(神性)으로서 심정(心情), 로고스, 창조성(創造性)의 세 가지를 꼽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심정(心情)이 가장 중요하며, 이것은 이때까지 어느 종교도 다루지 않았던 신성(神性)이다. 다음에 이들의 신성의 개념을 설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1) 심정(心情)

 

   1) 심정(心情)이란 무엇인가?

 

심정(心情)은 하나님의 속성 특히 성상(性相)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서,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이다. 심정의 이와 같은 개념(槪念)(뜻)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경우를 例로 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인간은 누구나 생래적(生來的; 태어나면서부터)으로 기쁨을 추구한다. 즉 기뻐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이것은 인간이 언제나 기쁨을 얻고자 하는 충동(衝動), 또는 기쁘고자 하는 충동(衝動)을 갖고 살고 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대부분의 인간들은 참 기쁨, 영원한 기쁨을 얻지 못하고 있음도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대부분 기쁨을 금전이나 권력, 지위나 학식속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참된 기쁨, 영원한 기쁨은 사랑(참사랑)의 생활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생활이란 남을 위해서 사는 생활, 애타적(愛他的)인 봉사생활, 즉 남에게 온정을 베풀어서 남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생활을 말한다.

 

   2) 심정(心情)은 정적충동(情的衝動)이다.

 

여기서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에 대해서 설명한다. 정적인 충동이란,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억제(抑制)하기 어려운 소원 또는 욕망을 뜻한다. 보통의 소원이나 욕망은 의지(意志)로써 억제할 수 있으나, 정적(情的)인 충동은 인간의 의지로써 억제할 수 없는 원망이요 욕망(欲望)이다.

 

우리들은 기쁘고자 하는 충동(욕망(欲望))이 이와 같이 억제하기 어려운 것임을 일상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인간이 돈을 벌려 하고, 지위를 얻으려 하고, 학식을 넓히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도 기쁘고자 하는 충동때문이요, 어린 아이들이 무엇이든지 호기심(好奇心)을 가지고,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것도 기쁘고자 하는 충동때문이요, 심지어 범죄행위(犯罪행위)마저도 다만 방향이 그릇되었을 뿐, 그 동기는 역시 기쁘고자 하는 충동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쁘고자 하는 충동(욕망(欲望))은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욕망은 달성되어야만 充足이 된다. 대부분의 인간들에 있어서 기쁘고자 하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있는 것은, 기쁨이 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짐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쁨이 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그 기쁨의 근거(根據)가 하나님에 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심정(心情)이시다.

 

하나님은 심정(心情) 즉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을 지니고 있는 바, 이같은 하나님의 충동은 인간에 있어서의 충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억제(抑制)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인간은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이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비록 타락(墮落)하여 사랑은 상실(喪失)되었지만 기쁘고자 하는 충동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정적(情的)인 충동을 억제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에 있어서 이 기쁘고자 하는 정적인 충동은,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즉 참 기쁨은 참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지기 때문에,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이 기쁘고자 하는 충동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충동은,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욕망(欲望)을 뜻하게 된다.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함은, 사랑의 대상을 갖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음을 또한 뜻한다.

 

이러한 사랑의 충동에 의해서 기쁘고자 하는 충동이 촉발(觸發)된다. 따라서 사랑의 충동이 1차적인 것이요, 기쁨의 충동은 2차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기쁨을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며, 다만 무조건적인 충동일 뿐이다. 그 사랑의 필연적(必然的)인 결과가 기쁨이다. 따라서 사랑과 기쁨은 표리(表裏; 겉과 속)관계에 있으며, 기쁘고자 하는 충동도 실은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이 표면화(表面化)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정(心情)은 한없이 사랑하고 싶은 정적(情的)인 충동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에는 반드시 그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은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대상이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창조는 필연적(必然的), 불가피적(不可避的)이었으며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4) 우주(宇宙) 창조(創造)와 심정(心情)

 

이와 같이 심정(心情)이 동기가 되어, 사랑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직접적(直接的)인 사랑의 대상으로, 만물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만물이 간접적인 대상이라 함은, 직접적으로는 만물이 인간의 사랑의 대상임을 뜻한다. 그리고 창조의 동기로 볼 때의 인간과 만물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지만, 결과로 볼 때의 인간이나 만물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심정(心情)이 동기가 된 우주 창조의 이론 즉 창조의 심정동기설(心情動機說)은 또 하나의 현실문제(창조설(創造說)이 참이냐, 생성설(生成說)이 참이냐의 문제)를 해결한 결과가 되었다. 즉 우주의 발생에 관한 종래의 창조설과 생성설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결과가 된 것이다. 그것은 생성설〔예:플로티노스의 유출설(流出說), 헤겔의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설(自己展開說), 가모브(Gamov)의 대폭발(Big Bang)설, 유교의 천생만물설(天生萬物說) 등〕로서는 현실의 죄악이나 혼란 등의 부정적 측면까지도 자연발생에 의한 것으로 다루어져서 해결할 길이 막혀 있었으나, 정확한 창조설(創造說)로서는 그러한 부정적 측면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심정(心情)과 문화

 

다음은 심정(心情)이 하나님의 성상의 핵심(위에서 말)이라는 명제가 의미하는 또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심정과 문화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다. 하나님의 성상(본성상(本性相))은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으로 되어있는 바, 내적성상이 내적형상보다 더 내적이며 심정은 그 내적성상보다도 더 내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창조 본연의 인간의 성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그림 1-5와 같다.

   

 

이 사실은 심정(心情)이 인간의 지적활동(知的活動), 정적활동(情的活動), 의적활동(意的活動)의 원동력이 됨을 뜻한다. 심정은 정적인 충동력으로서 이 충동력이 지적기능, 정적기능, 의적기능을 부단히 자극하여 나타나는 활동이 바로 지적활동, 정적활동, 의적활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적활동(知的活動)에 의해서 철학, 과학을 위시한 여러 학문분야가 발달하게 되고, 정적활동(情的活動)에 의해서 회화(繪畵), 음악(音樂), 조각(彫刻), 건축(建築) 등의 예술분야가 발달하게 되고, 의적활동(意的活動)에 의해서 종교, 윤리, 도덕, 교육 등의 규범분야(規範分野; 當爲의 分野)가 발달하게 된다.

 

따라서 창조본연의 인간들로 구성되는 사회에 있어서는 지적, 정적(情的), 의적활동(意的活動)의 원동력이 심정이요, 사랑이기 때문에 학문도 예술도 규범도 모두 심정이 그 동기가 되고 사랑의 실현이 그 목표가 된다.8) 그런데 학문분야, 예술분야, 규범분야의 총화(總和) 즉 인간의 지적(知的), 정적(情的), 의적활동(意的活動)의 성과의 총화가 바로 문화(文化, 문명(文明))인 것이다.

 

따라서 창조본연의 문화는 심정을 동기로 하여 사랑의 실현(實踐)을 목표로 하고 성립하며, 이러한 문화는 영원히 계속된다. 이러한 문화를 통일사상은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 또는 중화문화(中和文化)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 조상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인류문화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 비원리적(非原理的)인 문화로서, 흥망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성상의 핵심인 심정이 이기심(이기심(利己心))에 의해서 가려져 버렸기 때문이며, 따라서 심정(心情)의 충동력이 이기심을 위한 충동력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혼란(混亂)이 거듭되는 문화를 바로잡는 길은, 이기심을 추방하고 성상의 핵심의 자리에 심정의 충동력을 다시 활성화(活性化)시킴으로써, 전문화분야를 심정을 동기로 하고 사랑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문화영역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즉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를 창건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심정(心情)은 하나님의 성상의 핵심(核心)이라는 명제가, 오늘날의 위기(危機)에서 문화를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 하는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6) 심정(心情)과 원력(原力)

 

끝으로 심정(心情)과 원력(原力)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주 만물은 일단 창조된 뒤에도 부단히 하나님으로부터 일정한 힘을 받고있다. 피조물(被造物)은 이 힘을 받아 가지고 개체간에도 힘을 주고 받는다. 따라서 전자(前者)는 종적(縱的)인 힘이요, 후자(後者)는 횡적(橫的)인 힘이다. 통일사상은 전자를 원력(原力)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만유원력(萬有原力)이라고 한다.9)

 

그런데 이 원력(原力)도 실은 원상내의 수수작용(授受作用), 즉 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신생체(新生體)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상내의 심정(心情)의 충동력과 형상내의 전에너지(Pre-Energy)와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새로운 힘이 원력(原力; Prime Force)이다. 이것이 만물에 작용하여 횡적(橫的)인 만유원력(萬有原力)(Universal Prime Force)으로 나타나면 만물(萬物, 자연) 상호간의 수수작용을 일으킨다. 따라서 만유원력(萬有原力)은 하나님의 원력의 연장인 것이다.

 

만유원력(萬有原力)이란, 물리학에서 말하는 만유인력(萬有引力)에 해당하는 개념(槪念)인 바, 만유원력이 심정(心情)의 충동력과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에 의해서 형성된 원력의 연장이란 말은, 우주내의 만물 상호간에 물리학적인 힘 뿐 아니라, 사랑의 힘도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10) 따라서 인간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아니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천도(天道)인 것이다.

 

이리하여 심정(心情)과 원력(原力)과의 관계에 관한 이론도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됨을 알게 된다. 즉 인간은 남을 반드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때에 따라서는 투쟁(폭력)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는가, 적을 사랑할 것인가, 타도(打倒)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 이 이론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상으로 심정(心情)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로고스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로고스

 

   1) 로고스란 무엇인가

 

로고스(Logos)란, 統一原理에 의하면 말씀 또는 이법(理法)을 뜻한다(원리강론, 1987, p. 222).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 1:1~3)

 

통일사상에서 보면,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할 때의 그 말씀은, 하나님의 사고(思考), 구상(構想), 계획(計劃)을 뜻하며, 또 로고스를 이법(理法)이라고 할 때의 그 이법은 이성(理性)과 법칙(法則)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의 이성은 본성상내의 내적성상의 지적기능(知的機能)에 속하는 이성을 뜻함은 물론이지만, 만물을 창조한 로고스의 일부인 이성은 인간의 이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이성은 자유성을 지닌 지적능력(知的能力)인 동시에 개념화(槪念化)의 능력 또는 보편적 진리 추구의 능력이지만, 로고스內의 이성은 단순한 자유성, 사고력, 지적능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로고스의 또 하나의 측면인 법칙은 자유성이나 목적성이 배제된 순수한 기능성(機械性), 필연성(必然性)만을 지닌 규칙을 뜻함은 물론이다. 즉 때와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나타나는 규칙적인 현상이 법칙이다. 마치 기계장치인 시계의 시침(時針)이나 분침(分針)이,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일치하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것이 법칙의 규칙성(規則性), 기능성(機械性)인 것이다.

 

   2) 로고스는 이법(理法)이다.

 

이법(理法)이란, 이러한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을 뜻한다. 이리하여 여기서는 이러한 이법으로서의 로고스를 주로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 로고스에서 또 하나의 현실문제 의 해결의 기준을 찾아세우기 위해서이다. 그 현실문제란, 오늘날 사회의 대혼란(大混亂)의 원인이 되고 있는 가치관(價値觀)의 붕괴를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원리강론에는 로고스가 하나님의 대상인 동시에 이성성상을 지닌 것(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원리강론, 1966, p. 229. 同 1987, p. 222). 이것은 로고스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일종의 피조물이며 신생체임을 뜻하는 것으로서, 성상과 형상의 합성체(合性體)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상(構想)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로고스 그 자체가 만물과 똑같은 피조물일 수는 없다. 실제의 피조물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하나님의 대상은, 사고(思考)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즉 그것은 완성(完成)된 구상(構想)을 뜻하는 것이며, 마음(본성상(本性相))에 그려진 일종의 설계도인 것이다. 건물을 세울 때 먼저 그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계도를 작성하듯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함에 있어서도 만물 하나 하나의 창조에 관한 구체적인 청사진(靑寫眞) 또는 계획안(計劃案)이 먼저 세워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고스이다.

 

그런데 설계도는 비록 건물은 아닐지라도, 설계도 그 자체는 제작물(製作物) 즉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로고스도 구상(構想)이요 설계도인 이상 그것 역시 결과물이며, 따라서 신생체요 일종의 피조물(被造物)인 것이다.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서 존재한다. 그러면 신생체로서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무엇을 닮았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본성상(本性相)안의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다.11)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일정한 목적을 중심하고 통일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로고스의 이성성상인 것이다. 마치 하나님에 있어서, 본성상과 본형상이 中和(통일)를 이룬 상태가 신상인 것과 같다. 그런데 로고스는 말씀인 동시에 이법(理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로고스를 이법(理法)으로만 이해할 때 로고스의 이성성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성과 법칙(法則)이다. 따라서 이성과 법칙의 관계는 바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관계와 같다. 그런데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상호관계는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성과 법칙(法則)의 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인 것이다.

 

   3) 로고스는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체(統一體)

 

이와 같은 이성(理)과 법칙(法則)의 통일로서의 로고스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에는 모두 이성적요소(理性的要素)와 법칙적요소(法則的要素)가 통일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리하여 만물이 존재하거나 운동함에 있어서 반드시 이 양자가 통일적으로 작용한다. 단 저차원의 만물일수록 법칙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하고, 고차원의 만물 일수록 이성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한다.

 

그리하여 가장 低차원인 광물에는 법칙적요소만이 작용하고 이성적요소는 전연 없는 것 같고, 가장 고차원(高차원)인 인간에는 이성적요소만이 작용하고 법칙적요소는 전연 없는 것 같지만, 양자의 모두에 이성적요소(理性的要素) 및 법칙(法則)的 요소(要素)가 함께 통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만물의 존재와 운동은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이며, 목적성(目的性)과 기능성(機械性)의 통일인 것이다. 즉 필연성속에 자유성이 작용하고, 기계성속에 목적성이 작용한다. 필연(必然)과 자유의 관계가 종래에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의 관계인 것처럼 이해되어 왔다. 그것은 마치 구속(拘束) 과 해방(解放)이 정반대의 개념인 것처럼, 필연과 자유도 정반대의 개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사상은 로고스의 개념(槪念)(이법(理法))에 관한 한, 이성과 법칙을 이율배반(二律背反)의 관계로 보지 않고 도리어 통일의 관계로 본다. 이것은 비유컨대 기차가 레일(rail) 위를 달리는 현상과 같다할 것이다.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법칙(法則))이며, 만일 그 레일을 벗어나면 기차 자체의 파괴뿐 아니라 인근(隣近)의 인명이나 건물에 피해를 준다. 기차는 반드시 레일 위만을 달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차의 운행은 준법적인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레일 위를 달린다 하더라도, 빨리 달리고 천천히 달리는 것은 기관차(기관사)의 자유이다. 따라서 기차의 운행은 전적으로 필연적(必然的)인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인 것이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 보자. 교통신호를 지키는 자동차 운전자의 예가 그것이다. 운전자는 청신호 때에는 전진하고, 적신호 때에는 정지한다. 이것은 교통법규로서 누구나 지켜야 할 필연성이다. 그러나 일단 청신호가 켜진 뒤에는 교통안전에 지장이 되지 않는 한 속도는 자유로이 조정할 수가 있다. 따라서 자동차 운전도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이다.12) p.68

 

以上으로 기차의 운행이나 자동차의 운전에 있어서 필연성과 자유성의 관계가 통일의 관계임을 밝혔는데, 로고스에 있어서의 이성과 법칙(法則)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통일의 관계이다. 이로써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서의 이성(자유성)과 법칙(필연성)은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아니라 통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로고스가 이성(자유성)과 법칙(法則)(必然性)의 통일이기 때문에 로고스에 의해서 창조된 만물은 크게는 천체(天體)로부터 작게는 원자(原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예외없이 이성(자유성)과 법칙(法則)(필연성)의 통일적 존재이다. 즉 만물은 반드시 그 내부(內部)에 이성과 법칙, 자유성과 필연성, 목적성과 기계성의 통일에 의해서 존재하고 운동하고 발전한다.

 

이 사실은 오늘날의 일부 과학자의 이론과도 일치한다. 예컨대 검류계(檢流計; 폴리그라프)의 부착실험에 의한 식물심리의 확인(Backster 效果)13)과 샤론(Geun E. Charon)博士의 복합상대론(複素相對論; Complex Relativity)에 있어서의 전자(電子), 광자(光子)內의 기억과 사고의 메카니즘의 확인14)등이 그것이다. 즉 식물에 마음이 있고, 전자에 사고(思考)의 메카니즘이 있다는 사실은 모든 피조물 속에 이성과 법칙(法則), 자유성과 필연성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p. 69

 

   4) 로고스 및 자유와 방종

 

다음은 로고스와 관련해서 자유와 방종의 참 뜻을 밝히고자 한다. 자유와 방종에 관한 바른 인식(認識)에 의해서 또 하나의 현실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의 이름 밑에 자행되는 갖가지의 질서파괴(秩序破壞) 행위와, 이에 따르는 사회혼란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와 방종(放縱)의 참 뜻이 밝혀져야 한다.

 

原理(원리강론)에는 원리를 벗어난 자유는 없으며(1987, p. 103), 책임없는 자유는 없으며(同上), 실적없는 자유는 없다(同上)라고 적혀 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자유의 조건은 원리 안에 있을 것, 책임을 질 것, 실적을 올릴 것의 세 가지가 된다. 여기서 원리를 벗어난다는 것은 原則 즉 법칙을 벗어난다는 뜻이며, '책임'이란 각자의 책임분담 완수를 뜻하는 동시에 창조목적의 완성을 의미하며, '실적'이란 창조목적을 완성하여(同上), '선의 결과를 가져옴'을 뜻한다(同上). 그런데 책임분담의 완수나, 창조목적의 완성이나, 선(善)의 결과를 가져옴은 모두 넓은 의미의 원리요, 인간이 따라야 하는 천도(天道)이며, 법칙(法則; 가치법칙, 규범법칙)이다.

 

따라서 자유에 관한 세 가지 요건 즉 '원리 안에 있을 것', '책임을 질 것', '실적을 올릴 것'등은 한마디로 '자유는 원리안에서의 자유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참 자유는 결국 법칙성(法則性), 필연성(必然性)과의 통일에 있어서만 성립한다는 결론이 된다. 여기서 법칙이란, 자연에 있어서는 자연법칙이요, 인간생활에 있어서는 가치법칙(규범법칙)이다. 가치니 규범이니 하는 것은 질서 하에서만 성립된다. 규범을 무시하거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는, 본연의 세계에서는 결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엄격한 의미에서 선택(選擇)의 자유이며, 이 선택은 이성에 의한 선택이다. 따라서 자유는 이성에서 출발하여 실천으로 옮겨진다. 이때 자유를 실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자유의지이며, 이 의지(意志)에 의해서 자유가 일단 실천되면 그 실천행위가 자유행동이 된다. 이것이 원리강론에 보이는 자유의지, 자유행동(同上 p.103) 등의 개념(槪念)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의 자유에 의한 선택이나, 자유의지나, 자유행동은 모두 자의적(恣意的)인 것이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원리 안에서 즉 법칙(價値法則)과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필연성과 통일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본래 자유는 이성의 자유이며, 이성은 법칙과의 통일하에서만 작용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연의 자유는 '이법(理法)' 즉 '로고스'안에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로고스를 떠난 자유는 존립(存立)할 수 없다. 흔히 법칙은 자유를 구속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법칙과 자유의 원리적인 의미를 모르는 데서 오는 착각인 것이다. 본연의 법칙이나 자유는 모두 사랑의 실현을 위한 것이며, 사랑 안에서의 법칙이며 자유이다. 참사랑은 생명(生命)과 기쁨의 원천(源泉)이다. 따라서 본연의 세계에서는 기쁨 속에서 법칙을 따라서 자유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로고스가 심정(心情)을 터로 하고 형성(形成)되기 때문이다.

 

로고스를 떠난 자의적(恣意的) 사고(思考)나 자의적 행동은 사이비(似而非) 자유로서 이것이 바로 방종(放縱)이다. 따라서 자유와 방종은 그 뜻이 전연 다르다. 자유는 선(善)의 결과를 가져오는 건설적인 개념(槪念)이지만, 방종은 악(惡)의 결과를 가져오는 파괴적(破壞的)인 개념이다. 이와 같이 자유와 방종은 엄격히 구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혼동되거나 착각되고 있다. 이것은 자유의 참 근거(根據)로서의 로고스에 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로고스의 뜻을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자유의 참 뜻을 알게 되고, 따라서 자유라는 이름하의 온갖 방종이 방지(防止)될 수 있으며, 마침내는 사회혼란의 수습도 가능해 질 것이다. 이것으로 로고스에 관한 이론도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5) 로고스 및 심정(心情)과 사랑

 

마지막으로 로고스와 심정 및 사랑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는 말씀, 구상(構想)인 동시에 이법(理法)이었다. 그런데 말씀(構想)과 이법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말씀 속에 그 말씀의 일부로서 이법(理法)이 포함되어 있다. 마치 생물을 다루는 생물학 속에 그 일분과로서, 생물의 生理學(生理作用)의 學)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다. 생물학에는 해부학(解剖學), 생화학(生化學), 생태학(生態學), 발생학(發生學), 분석학(分析學), 생리학(生理學) 등 여러 분과로 분류되지만 그 중의 一分科가 생리학인 것처럼,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무한대한 양과 종류를 내용으로 하는 말씀(構想)中의, 적은 일부분이 이법(理法)(로고스)으로서, 말씀중의 만물의 상호작용(相互作用) 또는 상호관계(相互關係)의 기준에 관한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과 이법(理法)은 별개의 것이 결코 아닐 뿐 아니라, 말씀의 터전이 되고 있는 심정은 동시에 이법(理法), 로고스의 터전도 되는 것이다. 마치 유기체(有機體)의 생활현상의 연구가 생물학의 모든 분과의 공통항목인 것처럼,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정(心情)이 구상과 이법의 공통기반이 되고 있다.

 

심정(心情)은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이었다. 이와 같은 심정이 창조에 있어서 구상과 이법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것은, 피조물 전체의 구조(構造), 존재(存在), 변화(變化), 발전(發展) 등 모든 우주현상이 사랑의 충동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법(理法)도 자연법칙이건 가치법칙이건 간에, 그 배후에 사랑이 반드시 작용하고 있고, 또 작용해야 한다. 자연법칙은 일반적으로 물리화학적(物理化學的) 법칙(法則)으로만 이해되고 있는데 이것은 불완전한 이해이며, 비록 차원은 다를망정 거기에 반드시 사랑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상호간의 가치법칙(價値法則), 규범법칙(規範法則)에는 이 사랑이 더욱 더 현저하게 작용해야 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로고스 즉 이법의 해설에 있어서 이성과 법칙(法則), 따라서 자유성과 필연성에 관해서만 주로 다루었지만, 이법의 작용에 있어서는 이법 그 자체 못지않게 사랑이 중요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중요도에 있어서 사랑은 이법을 능가하기조차 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이법(理法)만의 생활은 규율(規律) 속에서만 사는 병영(兵營)처럼 냉랭해지기 쉽고, 알맹이 없는 쭉정이처럼 시들기 쉬운 것이다. 따뜻한 사랑 속에 지켜지는 이법의 생활에서만 비로소 백화가 만발하고, 봉접(蜂蝶; 벌과 나비) 이 군무(群舞; 무리지어 춤추는)하는 봄동산의 평화가 찾아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정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참된 방안(方案)이 무엇인가 하는,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基準)이 된다. 즉 심정을 터전으로 하는 로고스(이법(理法))의 이론은 가정에의 참된 평화 수립의 방안(方案)도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로고스에 관한 설명을 모두 마치고 다음은 창조성(創造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3) 창조성(創造性)

 

   1) 창조성(創造性)이란 무엇인가

 

창조성은 일반적으로 새 것을 만드는 성질(性質)이라고 정의(定義)되고 있다. 통일원리에서도 창조성을 일반적인 뜻으로도 해석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창조의 능력(能力)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원리강론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能力)과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1987, p. 65)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와 같이 창조의 성질이나 창조의 능력(能力)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없다. 이미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는 목적은 현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이해(理解)가 정확하고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창조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창조에 관한 상식적인 이해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특성(特性) 또는 요건(要件)이 밝혀질 필요가 있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발적(偶發的)인 것이 아니며, 자연발생적인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억제불능(抑制不能)의 필연적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명백한 합목적적인 의도(意圖)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창조가 이른바 심정(心情)을 동기(動機)로 한 창조심정동기설(心情動機說)로서 이 창조에는 창조목적을 중심한,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 또는 수수작용(授受作用)(후술)이 반드시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구체적으로는 목적을 중심한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 형성의 능력으로 정의(定義)하게 된다. 이것을 인간의 창조(新品目의 製造)의 경우를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내적사위기대의 형성은 구상(構想)하는 것, 또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개발(따라서 청사진(靑寫眞)의 작성)을 뜻하며, 외적사위기대의 형성은 그 청사진에 따라서 인간(主體)이 기계와 원료(對象)를 적절히 사용(수수작용)해서, 청사진대로의 신제품(신생체(新生體))을 만들어 냄을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있어서 주체와 대상(후술(後述))은 각각 성상과 형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있어서 내적사위기대의 형성은 上記한 목적중심의 로고스를 형성하는 것이며, 외적사위기대의 형성은 목적 중심한 성상(性相)(주체)과 형상(形狀)(대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신생체(만물)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은 이와 같은 내용을 갖춘 내적 및 외적사위기대 형성의 능력으로서,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로고스 형성에 이어서 신생체를 형성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의 개념(槪念)을 이처럼 상세히 다루는 것은, 창조와 관련된 여러 가지의 현실적 문제(예컨대 공해문제(公害問題), 군비제한(軍備制限) 내지 철폐문제(撤廢問題), 과학과 예술의 방향성(方向性) 문제 등) 해결의 근본적 기준을 정립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2) 인간의 창조성(創造性)

 

다음은 인간의 창조성에 관하여 설명코자 한다. 인간에게도 새것을 만드는 능력(能力), 즉 창조성(創造性)이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이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닮기의 법칙(法則)에 의해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창조성도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닮기로, 또는 이어받기로 되어 있었으나(원리강론 1987, pp. 65, 93, 208),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불완전하게밖에 닮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사실상 인간의 창조성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닮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창조성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성을 인간에게 부여(賦與)하는 것을 뜻한다.(同上 pp. 108, 218)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부여하시고자 하였을까?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萬物, 자연)世界에 대한 창조주의 입장에 서게 하여서(同上 p. 107), 만물에 대한 주관(主管) 자격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同上. pp. 94, 108)였던 것이다. 여기서 만물주관이란 만물을 아끼고 소중히 하면서, 그 만물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사랑의 마음을 갖고 여러 가지의 사물을 다루는 것을 만물주관(萬物主管)이라 하며, 여기에는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領域)이 포함된다. 예컨대 경제, 산업, 과학, 예술 등이 모두 만물주관의 개념에 포함된다. 지상의 인간은 육신을 쓰고 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물질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생활 전체가 만물주관의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본연(本然)의 만물주관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본연의 주관(主管)이란 사랑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사물을 다루는 것, 즉 사랑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행하는 행위, 예컨대 경작, 제작, 생산, 개조, 건설, 발명, 보관, 운송, 저장, 예술창작 등의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경제, 산업, 과학, 예술 등의 활동 뿐 아니라 심지어 종교생활, 정치생활도 그것이 사랑을 가지고 물건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본연의 만물주관에 포함된다. 이와 같은 본연의 인간에 있어서 사물을 다루는 데는, 사랑과 함께 새로운 창안(구상(構想))이 부단히 요구되기 때문에, 본연의 주관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창조성을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닮을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본연의 만물주관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며, 따라서 이러한 인간이 이어받은 창조성은 불완전한 것이 되어버렸으며, 만물주관도 불완전하고 비원리적(非原理的)인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는지 모른다. 즉 하나님이 닮기의 법칙에 의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날 때부터 본연의 창조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타락과는 관계없이 그 창조성은 지속되었을 것 아닌가? 실지로 오늘날 과학기술자들은 훌륭한 창조(創造)의 능력(창조성)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이다.

 

   3) 닮기의 창조(創造)

 

여기서 잠깐 닮기의 창조(創造)가 시공(時空)의 세계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창조란 요컨대 피조물 즉 하나 하나의 만물이, 시공의 세계(時間)을 포함한 四차원의 세계)에 출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창조가 하나님의 구상(構想)의 단계에서는 초시간(超時間), 초공간(超空間的)으로 이루어졌더라도, 그 피조물이 시공세계에 출현하는데 있어서는 소형(小形), 미숙(未熟) 또는 유소(幼少)의 단계에서부터 출발하여, 일정한 시간적 경과를 거쳐서 일정한 크기까지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일정한 크기의 단계에까지 완성한 후에야 하나님의 구상(構想) 또는 속성(屬性)을 완전히 닮게 된다. 그때까지의 기간은 미완성단계이며,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나아가는 과정적 기간으로서, 통일원리는 이 기간을 성장기간(成長期間)이라고 하여 소생기(蘇生期), 장성기(長成期), 완성기(完成期)의 삼단계(3단계;질서적 3단계)의 기간으로 구분하고 있다(원리강론 1987, p. 62). 인간은 이러한 성장과정인 장성기의 완성급 단계에서 타락했던 것이다(同上 p. 64).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받음에 있어서도 본연의 창조성의 2/3정도만을 이어받았던 것이니, 과학자들이 아무리 천재적(天才的)인 창조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창조성에 비하면 크게 못 미쳐 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피조물중에서 타락한 것은 인간뿐이다. 만물은 타락하지 않고 모두 완성하여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각자의 차원에서 닮고 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또 생길 것이다. 즉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이 왜 영장(靈長)답지 않게 타락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것은 만물이 원리 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해서만 성장하게 되어 있는데 대하여, 인간은 성장(成長)에 있어서 이 원리의 자율성(自律性), 주관성(主管性) 외에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4) 창조성(創造性)과 책임분담(責任分擔)

 

여기서 원리 자체의 자율성이란 유기체(有機體)의 생명력을 말하며, 주관성은 같은 생명력(生命力)의 환경에 대한 영향성을 말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성장하는 것은 그 내부의 생명력 때문이며, 주관성은 그 나무(生命力)가 주위에 미치는 영향력(影響力)을 말한다. 그런데 인간의 성장의 경우에도 이 원리 자체의 자율성과 주관성이 작용(作用)한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는 육신만이 자율성과 주관성에 의해서 성장하며, 인간의 영인체는 그렇지 않다. 영인체의 성장에는 다른 차원의 조건(條件)이 요구된다. 그것이 책임분담 즉 분담(分擔)책임의 완수인 것이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영인체(靈人體)의 성장이란 육신처럼 영인체의 신장이 커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인체는 육신에 밀착(密着)되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성장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커지게 되어 있다. 여기의 영인체의 성장이란 영인체의 령성의 성숙과 인격의 향상을 뜻한다. 또한 심정 수준의 향상을 뜻한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 자세의 성장이 바로 영인체의 성장인 것이다.

 

이러한 영인체의 성장은 다만 책임분담의 완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여기의 책임분담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견지(堅持; 굳건히 지키면서)하고 계명(誡命)을 준수(遵守)하는 가운데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내적 외적으로 가해지는 수많은 시련을, 스스로의 판단(判斷)과 결정하(決定下)에 극복해 나아가면서, 사랑의 실천을 계속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상황(狀況)에서, 육신의 부모마저 없는 여건하에 이같은 책임분담을 다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아담은 그 책임을 다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와 같은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하고 결국,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타락(墮落)하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실패할 수도 있는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아담에게 메웠을까? 만물처럼 쉽게 성장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그것은 인간을 만물의 주관(主管)位에 세우기 위해서였으며(창 1:28, 원리강론 1987, p. 108) 만물에 대한 주관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同上). 주관은 자기의 소유물(所有物)이나 자기가 창조한 것(제작물(製作物))만을 주관하는 것이 원칙이며, 타인의 소유나 타인의 창조물은 주관(主管)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또한 아담은 만물보다 뒤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의 소유자도 창조자도 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자신의 창조주(創造主)의 자격을 물려주어서 주관주(主管主)로 세우고 싶었기 때문에(창 1:28), 일정한 조건을 세우게 하여 그것으로 아담도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동참했다는 것으로 인정해 주려(쳐 주려) 했던 것이다.

 

   5) 인간의 완성과 책임분담(責任分擔)

 

그 조건(條件)은 아담이 자기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즉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자기를 완성시키면, 그것으로써 우주를 창조한 것과 같은 자격(資格)으로 쳐주려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로 볼 때, 인간 하나의 가치는 전체 우주의 가치와 같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우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며(원리강론 1966, pp. 48~49, p. 54), 소우주(小宇宙)(同上 p. 54)이기 때문이요, 또 인간의 완성으로써만 우주 창조도 완성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태 16:26)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스스로 자신을 완성시키면, 가치로 보아서 아담이 우주를 창조한 것과 동등한 입장에 서는 셈이 된다.

 

그런데 창조는 창조자(創造者) 자신의 자기 책임 하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책임 하에서였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자신을 완성시키는 일(창조(創造))도 아담 자신의 책임분담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해와에게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메웠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100% 책임을 아담에게 메운 것은 아니다. 인간 성장의 대부분의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고, 아담-해와에게는 극히 적은 부분의 책임(책임;5% 책임)분담(分擔)을 메워, 그 5%의 책임분담을 다하기만 하면 100% 책임 전체를 아담이 다 해낸 것으로 쳐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특혜에도 불구하고 아담-해와는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墮落)하고 말았으며, 그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창조성을 온전히 이어받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즉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온전히 이어받았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되었을 것인가.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먼저 하나님의 심정 즉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얻으려는 정적(情的)인 충동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것처럼 인간은 사랑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주관활동(主管活動)이 심정을 터전으로 하는 사랑 중심의 활동이 되게 됨을 뜻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 산업, 과학, 예술, 종교 등이 물질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모두 주관활동(主管活動)인데, 이러한 활동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어받은 창조성(創造性; 온전한 창조성)을 터로 한 사랑의 주관활동으로 변모(變貌)하게 된다.15) P.81

 

   6) 본연(本然)의 창조성(創造性)과 문화활동

 

上記의 심정(心情)의 항목에서, 심정의 충동력을 동기로 하는 지적(知的), 정적(情的), 의적활동(意的活動)의 총화가 문화(心情文化)라고 했는데, 여기의 지적활동, 정적활동, 의적활동이 모두 물질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이기 때문에 이 문화활동도 따지고 보면 본연(本然)의 창조성에 의한 주관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화(文化)라는 관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바라볼 때, 세계문화는 급속히 몰락(沒落)되어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예술, 교육, 언론, 윤리, 도덕, 종교 등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혼란의 와중(渦中)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획기적인 어떠한 방안이 세워지지 않는 한, 이 몰락해 가는 문화를 다시 구출한다는 것은 거의 절망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혹자는 다년간 철의 장막으로 가린 채 강력한 기반을 유지해 온 공산독재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와 대결하다가 오늘날 개방을 계기로 하여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 방식의 도입을 서두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고 자본주의의 경제체제와 과학기술의 우월성(優越性)을 자랑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근시안적 인식착오(認識錯誤)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적 모순에 의한 노사분규(勞使紛糾) 및 빈부(貧富)의 격차의 심화와 이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가치관의 붕괴현상과 사회적 범죄의 범람, 그리고 과학기술의 첨단화(尖端化)에 따르는 범죄기술의 첨단화, 산업의 발달에 따르는 공해의 증대 등은 자본주의의 고질적(痼疾的)인 병폐로서 미구에 반드시 자본주의를 쇠망시키는 요인이 될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주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문화적 위기의 근본원인은 멀리 인류역사(人類歷史)의 시발에까지 소급(遡及)하여 거기서 찾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사랑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고 이기주의(利己主義)가 팽배하게 된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문화를 위기(危機)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중심주의(中心主義), 이기주의(利己主義)를 청산하고 모든 창조활동, 주관활동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전개하는 것이다. 즉 세계의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행동하게 될 때,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종교, 사상, 예술, 언론 등 여러 문화영역(文化領域)의 얽히고 설킨 난문제(難問題)들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통일적으로 해결되어, 여기에 새로운 참된 평화의 문화가 꽃피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문화도 아니요, 자본주의문화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문화이니 그것이 바로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라고도 불리우는 중화문화(中和文化)인 것이다.

 

이상으로 하나님의 창조성에 관한 이론도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창조성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동시에 하나님의 신성(神性), 더 나아가서 원상(原相)의 내용에 관한 설명도 이것으로 마치고자 한다.

 

                   二. 원상(原相)의 구조(構造)

 

다음은 원상(原相)의 구조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미 本원상론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 원상(原相)의 구조에서는 신상의, 특히 성상과 형상의 상호관계를 다루려는 것이다. 앞의 원상의 내용의 제목하에서는 신상과 신성(神性)의, 하나 하나의 속성의 내용을 다루었는데, 여기의 원상의 구조에서는 신상인 성상과 형상의 상호관계 및 양성과 음성의 상호관계(주로 성상과 형상의 상호관계)를 다루려 한다. 이와 같은 속성(屬性)의 상호관계를 다루는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관계를 중심한 여러 현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기준을 발견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상대적(相對的) 관계(關係)

 

원리강론의 창조원리에는, 만물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에 의한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으며(1987, p.34), 또 (만물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하게 된다.(同上 p. 32)고 적혀 있으며, 이것은 만물의 제일원인(第一原因)인 하나님이 성상(본성상(本性相))과 형상(본형상(本形狀))의 중화적주체로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同上 p. 35).

 

여기서 우리는, 성상과 형상은 만물에 있어서나 하나님에 있어서나 반드시 상대적 관계를 맺고서만 존재하고, 개별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의 상대적 관계(相對的關係)란 두 요소나 두 개체가 서로 마주 대하는 관계를 말한다. 예컨대 두 사람이 대화할 때, 또는 상품을 매매할 때, 그 대화나 매매가 이루어지기 직전에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대하는 관계가 먼저 성립(成立)한다. 이것이 상대적 관계이다. 그런데 이같은 상대적 관계는 반드시 상호 긍정적인 관계여야 하며, 상호 부정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16) P.83

 

이러한 상대적 관계가 맺어지면 대개의 경우,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현상(現象)이 벌어진다. 인간은 자주 말(대화), 금전, 힘(協力), 영향, 사랑 등등을 주고받는다. 자연계에서는 천체간의 만유인력(萬有引力), 동물과 식물간의 가스(CO₂, O₂) 교환(交換) 등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이 양자가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 현상을 수수작용(授受作用)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적 관계가 성립됐다고 해서 수수작용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거기에 상대기준이 함께 조성되어야 한다. 상대기준이란 공통기준 즉 공통요소 또는 공동목적(共同目的)을 중심하고 맺어진 상대적 관계를 뜻한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상대적 관계가 성립하여 상대기준이 조성되면 이때에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성상(본성상(本性相))과 형상(본형상(本形狀)) 사이에도 이 원칙에 의해서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즉 성상과 형상은 공통요소(심정(心情) 또는 창조목적)를 중심하고 상대적 관계를 맺어서, 즉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 작용 즉 수수작용을 지속한다. 성상이 형상에게 주는 것은 관념(觀念)的인 것과 심정적인 것이며, 형상이 성상에게 주는 것은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的 요소이다. 이와 같은 성상-형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하나님의 속성이 중화(합성체(合性體))를 이루거나 피조물(신생체)을 産出한다. 그러면 수수작용과 사위기대라는 제목을 가지고, 성상과 형상의 상대적 관계 또는 수수작용에 대해서 좀더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2. 수수작용(授受作用)과 사위기대(四位基臺)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수수작용(授受作用)

 

   1) 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이란 무엇인가

 

원상(原相)中의 성상(본성상)과 형상(본형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으면 수수작용이 벌어지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때에는 반드시 일정한 공통요소(共通要素)가 중심이 되어서 상대기준이 조성(造成)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에 있어서 이 공통요소로서의 중심은 심정(心情) 또는 그 심정을 터로 한 창조목적이다. 이러한 수수작용, 즉 일정한 공통요소를 중심한 수수작용은 반드시 일정한 결말을 짓게 마련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상-형상의 수수작용에는 반드시 일정한 중심과 일정한 결과가 수반(隨伴)된다. 심정이 중심일 때에 그 결과는 합성체(合性體) 또는 통일체(統一體)가, 목적(創造目的)이 중심일 때에 그 결과는 신생체(新生體) 또는 번식체(繁殖體)가 나타난다. 즉 중심에 따라서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여기서 합성체란 하나로 통일된 형태를 말하며 신생체는 창조된 만물(인간 포함)을 말한다. 따라서 원상(原相)에 있어서 신생체의 출현은 만물창조를 뜻한다.

 

   2) 합성체(合性體)와 신생체(新生體)의 개념

 

여기서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합성체(合性體)와 신생체(新生體)의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합성체는 만물의 존재, 생존, 존속(存續), 통일, 공간운동, 현상유지 등을 뜻하며, 신생체는 새로이 출현 또는 산출되는 새로운 결과물을 뜻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성질 혹은 특성이거나 그러한 성질 혹은 특성을 지닌 신요소(新要素), 신개체(新個體), 신현상(新現象)을 뜻하며, 이러한 신생체의 출현은 피조세계에 있어서 곧 발전을 의미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피조세계에서 만물이 존재-생존-존속하고 운동-발전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크게는 천체로부터 작게는 원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개체들 상호간에, 원상내의 성상-형상간의 수수작용과 동일한 수수작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조의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하나하나의 만물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닮고 있고, 만물의 상호관계와 상호작용은 원상의 구조 즉 성상-형상의 상대적 관계 및 수수작용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모든 피조물이 존재-생존하고, 운동-발전하기 위해서는 원상내의 수수작용을 반드시 닮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원상내에서의 수수작용은 심정(心情) 중심 때이건 목적 중심 때이건, 작용 그 자체는 원만성(圓滿性), 원화성(圓和性), 조화성(調和性), 원골성(圓滑性)을 그 특징으로 한다. 중심에서 사랑이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심정은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이기 때문에, 심정은 사랑의 원천(源泉)이 된다. 따라서 심정이 중심인 곳에서는 사랑이 우러나오게 된다. 목적이 중심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창조목적은 심정을 터로 하고 세워지기 때문이다.

 

   3) 수수작용(授受作用)의 특징은 원만성, 조화성, 원활성이다.

 

이와 같이 원상내의 수수작용은 원만성, 조화성, 원활성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거기에 모순(矛盾), 대립(對立), 상충(相衝)같은 현상은 존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상호작용에 모순, 대립이 나타나는 것은 거기에 심정, 목적과 같은 공통요소로서의 중심이 없기 때문이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외형상으로는 아무리 수수작용이 벌어지더라도 거기에 사랑이나 공통요소가 중심이 되지 않는 한, 그 작용은 조화성-원화성을 나타낼 수 없으며 도리어 대립-상충이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따라서 이 원상에서의 수수작용의 원화성, 조화성의 이론은 수많은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세계의 대혼란(大混亂)은 무수한 종류의 이해관계의 상충이 그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수많은 유형의 상대적 관계가 상충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관계,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관계, 민족과 민족의 관계, 종교와 종교의 관계, 정당과 정당의 관계, 노사관계, 사제관계(師弟關係), 부모와 자녀의 관계, 부부관계, 대인관계 등 무수한 상대적(相對的) 관계가 상충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무수한 상충적 관계의 누적이, 오늘날 세계의 대혼란을 야기한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적 혼란을 수습하는 길은, 매개의 상충적인 상대적 관계를 원화의 관계, 조화의 관계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각 단위의 상대적 관계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수수작용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원상내의 수수작용의 원만성, 조화성, 원활성의 이론은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2)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 및 주체와 대상

 

   1) 사위기대(四位基臺)란 무엇인가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수수작용에는 상술한 바와 같이 반드시 중심(심정(心情) 또는 목적)과 결과(합성체 또는 신생체)가 동반되기 때문에 수수작용에는 반드시 中心-성상(性相)-형상(形狀)-결과의 4요소가 관련되게 된다.17) 그런데 이 4가지 요소의 상호간의 관계는 위치(位置)의 관계가 된다. 즉 수수작용에 있어서 중심, 성상, 형상, 결과는 모두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 후,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고, 수수작용이 벌어지는 4위치의 터전을 사위기대라고 한다. 그리하여 수수작용은 원상에 있어서나 피조세계에 있어서 또 어떤 유형의 수수작용이거나 예외 없이 이 사위기대를 터전으로 하고 이루어진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그림 1-6과 같다. p.88

   

 

그런데 성상과 형상이 수수작용하는데 있어서, 이 양자는 동격이 아니다. 즉 격위가 다르다. 격위(格位)란 자격상의 위치를 말한다. 통일원리(따라서 통일사상)에서의 자격이란 주관에 관한 자격을 뜻한다(원리강론 1987, p. 108).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의 격위(格位)란 능동성에 관한 입장(또는 위치)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상과 형상이 격위가 다르다는 것은, 성상은 형상에 대하여 능동적인 위치에 있고, 형상은 성상에 대하여 피동적인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이때 능동적 위치에 있는 요소나 개체를 주체라 하고 피동적인 위치에 있는 요소 또는 개체를 대상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상(性相)과 형상(形狀)과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성상이 주체의 입장이 되고 형상이 대상의 입장이 된다.

 

따라서 사위기대(四位基臺)란 중심-주체-대상-결과의 네 위치로 이루어지는 기대로서 어떠한 수수작용도 반드시 네 위치 즉 사위기대를 터로 하고 이루어진다. 네 위치를 터로 하고 수수작용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매번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중심, 주체, 대상, 결과라는 이 네 위치는 고정불변(固定不變)이지만, 그 위치에 세워지는 실제의 요소는 각양각색임을 뜻한다.

 

예컨대 가정적 사위기대에 있어서 중심의 위치에는 가훈이나 가법 또는 조부모가 세워지고, 주체의 위치에는 아버지가, 대상의 위치에는 어머니가, 결과의 위치에는 가정평화 또는 자녀번성 등이 세워진다. 또 주관적 사위기대(예:기업활동(企業活動))에 있어서는, 중심의 위치에 기업의 목표 또는 이념이 세워지고, 주체의 위치에는 여러 人的要素(관리직과 종업원)가, 대상의 위치에는 물적요소(物的要素, 기계, 원자재)가, 그리고 결과의 위치에는 생산물(生産物, 상품)이 세워지게 된다. 또 태양계에 있어서 중심은 창조목적, 주체는 태양, 대상은 혹성, 결과는 태양계이며, 인체에 있어서 중심은 창조목적, 주체는 마음, 대상은 몸, 결과는 인체(혹은 心身一體)이다. 이와 같이 사위기대에 실제로 세워지는 요소(이것을 定着物이라 함)는 각양각색이지만 네 개의 위치만은 항상 중심-주체-대상-결과로서 고정불변(固定不變)이다.18) p.89

 

   2) 주체와 대상의 개념

 

다음은 앞에서 언급한 주체와 대상의 개념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수작용의 성격이 구체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주체는 능동적 위치에 있고, 대상은 피동적 위치에 있다고 했는데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주체가 중심적일 때 대상은 이에 대하여 의존적(依存的)이고, 주체가 동적(動的)일 때 대상은 이에 대하여 정적(靜的)이고, 주체가 적극적일 때 대상은 이에 대하여 소극적이며, 주체가 창조적일 때 대상은 이에 대하여 보수적(保守的)이다. 그리고 주체가 외향적일 때 대상은 내향적(內向的; 내성적)이 된다.

 

이러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피조세계에 있어서, 크게는 천체로부터 작게는 원자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다. 예컨대 태양계의 태양과 혹성과의 관계, 원자의 양자와 전자와의 관계는 중심적인 것과 의존적인 것의 관계이며, 어미동물과 새끼동물,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는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의 관계이며, 지도자와 추종자, 주는 자와 받는 자와의 관계는 적극성과 소극성의 관계 또는 능동성과 피동성의 관계이다.

 

또 가정생활에 있어서 부단히 가정의 번영을 꾀하는 남편은 창조(創造)的 또는 외향적이요, 가정을 내적으로 알뜰히 꾸려나가는 아내는 이에 비해서 보수적 또는 내향적이다. 그런데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의 개념은 상대적이다. 예컨대 아무리 한 개체가 주체일지라도 상위자에 대해서는 대상인 것이요, 아무리 한 개체가 대상일지라도 하위자에 대해서는 주체가 된다.

 

   3) 주체와 대상의 격위(格位)는 다르다.

 

이와 같이 주체는 대상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중심적, 동적, 적극적, 창조적, 능동적, 외향적이며, 대상은 주체의 각각의 입장에 대응해서 의존적, 정적, 소극적, 보수적, 피동적, 내향적이다.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위치상의 주체와 대상의 차이성은, 그 근원이 원상내의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주체와 대상의 격위의 차이 때문이다. 이러한 주체와 대상을 포함한 사위기대를 터로 하고서만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간단히 말해서 주체와 대상사이에만, 즉 격위(格位)의 차이가 있는 곳에서만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두 요소나 개체가 동격일 경우에는 수수작용이 벌어질 수 없으며, 도리어 반발이 벌어지기 쉽다. 양전기와 양전기 사이에 벌어지는 반발이 그 예이다.

 

그런데 주체와 대상의 격위의 차이는 바로 질서를 뜻한다. 따라서 질서있는 곳에서만 수수작용이 벌어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의 이론은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거의 모든 유형의 상대적 관계가 원만한 수수관계가 되지 못하고, 상충적관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모든 상대적 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되지 아니하고, 주체와 주체의 반발의 관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혼란을 수습하는 길은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요,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주체와 주체의 상충적 관계를 주체와 대상의 조화적 관계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 설정의 필연성(必然性) 또는 그 당위성이 밝혀져야 하는데, 여기에 주체와 대상의 관계의 기준 또는 근거가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원상(原相)內의 사위기대이론 또는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의 이론이다. 이리하여 원상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에 관한 이론도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임을 알게 된다.

 

   4) 상대물(相對物)과 대립물(對立物)

 

끝으로 주체와 대상에 관련하여 상대물과 대립물의 개념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주체와 대상의 원리적인 관계는, 목적중심의 상대적 관계이기 때문에 조화적(調和的)이요, 상충적이 아니다. 두 요소 또는 두 개체(個體)의 관계가 조화적일 때, 이 두 요소(個體)를 통일사상에서는 상대물(相對物)이라 하고, 그 관계가 상충적일 때는 이 두 要素(個體)를 대립물(對立物)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상대물 사이에는 조화가 벌어져서 발전이 이루어지지만, 대립물 사이에는 상충과 투쟁이 벌어져서 발전이 정지되거나 파탄(破綻)이 온다. 공산주의 철학인 유물변증법은 모순(矛盾)의 이론, 대립물의 이론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론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변혁(變革)하려 했기 때문에, 예상과는 달리 오늘날 걷잡을 수 없는 파탄이 초래되고 말았던 것이다.

 

발전은 목적 중심의 주체와 대상, 즉 상대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목적(目的; 中心)이 없는 대립물의 상충작용에 의해서는 결코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리하여 상대물(相對物, (주체와 대상)의 이론은, 오늘날의 공산주의의 혼란(混亂, 뿐 아니라 자유세계의 혼란까지도)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는 방안도 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상대물의 이론도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 및 주체와 대상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친다. 다음은 사위기대의 종류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3)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종류

 

   1) 사위기대(四位基臺)의 구성요소

 

이미 앞의 (1)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의 항목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은 중심에 따라서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그 하나는 합성체(合性體)이며, 또 하나는 신생체(新生體)이다. 즉 심정(心情)이 중심일 때는 합성체를 나타내고, 목적(창조목적)이 중심일 때는 신생체를 낳는다. 이러한 두 가지의 결과는 피조물 상호간의 수수작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조물의 수수작용이 원상(原相)內의 수수작용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수작용에 두 가지의 종류가 있음을 뜻한다. 즉 성상-형상의 수수작용은 중심의 종류(심정, 목적)와 결과의 종류(합성체, 신생체)에 따라서 두 가지 종류로 나뉘게 된다. 즉 심정이 중심이 되고 결과가 합성체(合性體)인 경우의 수수작용과, 목적이 중심이 되고 결과가 신생체인 경우의 수수작용이 그것이다. 전자(前者)는 성상과 형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중화체(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 원리강론, 1987, p. 35)를 이루는 경우이며, 후자(後者)는 성상-형상(이성성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하나님의 실체대상을 번식하는 경우(同上, p. 42), 즉 만물을 창조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그림 1-7과 같다.

   

 

이같은 수수작용은 피조물 특히 인간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인체가 마음과 몸의 통일체(統一體)인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을 원리(창조원리)로 보면, 목적(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성상(마음)과 형상(몸)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합성체(合性體)를 이루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가끔 마음으로 구상(構想)(성상)하고, 이에 따라서 손 또는 도구(형상)를 움직여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한다. 이것을 원리로 표현하면, 목적(新作品을 만들려는 목적)을 중심하고 성상과 형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신생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합성체(合性體)를 이루는 경우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인간의 예에서와 같이 수수작용을 하기 전이나 한 이후, 성상과 형상의 결과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성상도 형상도 수수작용을 하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양자가 결합해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을 뿐이다. 이를 비유하면 남녀의 결혼과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결혼 전이나 후나 내내 그 남자요, 그 여자도 결혼전이나 후나 내내 그 여자이다. 다만 다른 것은 결혼 후의 부부는 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결과가 합성체(合性體)인 경우의 성상과 형상도 마찬가지이다.

 

다음 신생체를 이루는 경우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수수작용을 하기 전의 성상-형상과 수수작용을 한 후에 나타난 결과와는 본질적으로 전연 다르다. 즉 수수작용의 결과, 새로운 신생체(新生體)(作品)가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전자(前者) 즉 합성체를 이루는 경우의 수수작용을, 자기동일적(自己同一的) 수수작용, 또는 간단히 자동적(自同的)수수작용이라 하고, 후자(後者) 즉 신생체(新生體)를 산출하는 경우를 발전적(發展的)수수작용이라고 한다. 이 양자를 변화,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전자(前者)는 수수작용의 전과 후에 있어서 성상-형상이 무변화이기 때문에 이것을 정적수수작용(靜的授受作用)이라고 하고, 후자는 수수작용에 의해서 변화된 결과로서 신생체(新生體)가 출현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동적수수작용(動的授受作用)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성상-형상의 수수작용은 위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실은 주체와 대상간의 수수작용이며, 중심과 결과의 위치를 포함하면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은 결국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形成)인 것이다. 따라서 위치로 볼 때, 자동적수수작용(授受作用)은 자동적(자기동일적)사위기대(四位基臺)임을 뜻하며, 발전적수수작용(授受作用)은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임을 뜻한다. 이리하여 사위기대에는 우선 합성체(合性體)를 이루는 자동적사위기대와, 신생체를 이루는 발전적사위기대의 두 가지의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된다.

 

   2)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와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

 

그런데 사위기대(四位基臺)에는 이 외에 또 다른 두 종류의 사위기대가 있다. 그것이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와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이다. 이에 관해서 다시 설명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의 사위기대를 알아보려면 위에서 처럼 먼저 수수작용에 내적수수작용과 외적수수작용이 있음을 이해하면 된다. 우리는 위에서 성상과 형상이 상대적관계를 맺어서 상대기준을 조성하면 반드시 수수작용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원상(原相)의 내용중의 신상의 항목에서, 하나님의 성상(본성상(本性相))은 기능적부분과 대상적부분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과, 기능적부분을 내적성상(內的性相), 대상적부분을 내적형상(內的形狀)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즉 본성상(本性相) 내부에 다시 성상과 형상이 있는 것이다. 본성상을 중심하고 볼 때 내부에도 성상(내적性相)과 형상(내적형상(內的形狀))이 있고, 외부에도 성상(본성상(本性相))과 형상(본형상(本形狀))이 있다. 내부이거나 외부이거나 성상-형상이 공통요소를 중심하고 상대적 관계를 맺으면 반드시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즉 외부의 본성상과 본형상 사이뿐 아니라, 내부의 내적성상과 내적형상 사이에도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전자(前者)를 외적수수작용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내적수수작용이라고 한다. 이 내적수수작용에도 중심(심정(心情) 또는 목적)과 결과(합성체(合性體) 또는 신생체(新生體))가 포함됨은 물론이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그림 1-8과 같다. p. 96

   

 

이것은 본성상(本性相)만을 중심하고 볼 때, 안팎(內와 外)으로 수수작용이 벌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것을 인간에 비유하면 인간이 내적 생활과 외적생활을 동시에 행하는 것에 해당한다. 내적생활이란 내면생활 즉 정신생활을 뜻하며, 외적생활이란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서 하는 생활을 말한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의 이 내적 생활도 수수작용이며, 외적생활도 수수작용으로서, 내적 생활은 마음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수수작용(내적授受作用)이요, 외적생활은 타인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수작용(외적授受作用)인데, 그 기원이 바로 원상(原相)의 본성상의 내적 및 외적수수작용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본성상으로부터 유래된 내적 및 외적수수작용은 인간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모든 개체에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상술한 바와 같이 성상과 형상의 관계는 위치로 볼 때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며, 따라서 중심과 결과를 포함한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은 바로 사위기대의 형성인 것이다. 따라서 위치로 볼 때, 내적수수작용은 내적사위기대를 뜻하며 외적수수작용은 외적사위기대를 뜻한다. 즉 본성상(本性相)은 안팎으로 사위기대를 형성하고 있다. 원상내의 본성상을 중심한 이같은 내적사위기대와 외적사위기대를 특히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라고 부른다. 그리고 피조물도 원상의 구조를 본떠서 개체마다 안팎으로 사위기대(四位基臺)를 형성하고 있어서 이것을 존재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3)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와 존재의 2단구조(構造)

 

그러면 다음에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와 존재의 2단구조(構造)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피조물이 예외없이 본성상(本性相)으로부터 유래된 내적 및 외적수수작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인간뿐만 아니라 피조물 전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예외 없이 내적사위기대 및 외적사위기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뜻한다. 수수작용이란 심정(心情) 또는 창조목적을 중심한 원만하고 조화로운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만물은 예외 없이 이같은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내적 및 외적인 수수작용 즉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를 형성하고 있다.19) 그런데 인간만이 타락으로 내적생활(精神생활) 즉 내적사위기대와, 외적생활(사회생활) 즉 외적사위기대가, 심정(心情)(사랑)이나 창조목적을 중심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이 되어버려서 상충, 갈등, 대립, 투쟁, 분규 등의 사회혼란을 야기(惹起)시키고 있다. p.98

 

따라서 이러한 성격의 사회적 혼란(현실문제)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는 길은, 인간이 내적 및 외적으로 본연의 사위기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본성상 중심의 내적사위기대 및 외적사위기대의 이론도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상내의 내적사위기대 및 외적사위기대는 피조만물의 존재방식(存在方式)의 기준이 되고 있다. 원상(原相)의 내적 및 외적사위기대가 바로 위에서 말한 바의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이다. 그리고 이것을 닮은 피조물의 안 밖의 사위기대를 존재의 2단구조(構造)라고 부른다. 이 존재의 2단구조(構造)는 창조의 닮기의 법칙에 의해서 원상의 이단구조를 닮아난 것이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그림 1-9 및 그림 1-10과 같다.

 

 

   

 

   4)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종류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위기대의 종류를 다루고자 한다. 이상의 설명에서 사위기대에는 자동적사위기대(四位基臺) 및 발전적사위기대(四位基臺) 외에,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및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또 다른 두 종류의 사위기대가 있음을 알게되었다. 따라서 사위기대에는 원리적으로 4종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들이 서로 조합(組合)되어서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사위기대가 형성된다. 즉 내적자동적사위기대(內的自同的四位基臺), 외적자동적사위기대(外的自同的四位基臺),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외적발전적사위기대(外的發展的四位基臺)가 그것이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그림 1-11과 같다. 다음에 이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① 내적자동적사위기대(四位基臺)

이것은 내적사위기대와 자동적사위기대가 조합(組合)된 것이다. 즉 본성상 내부의 내적사위기대(내적수수작용)가 자기동일성 즉 불변성을 지니게 된 것을 말한다. 자동적사위기대란 성상(주체)과 형상(대상)이 수수작용을 한 후, 그 결과로서 합성체 또는 통일체를 이루는 사위기대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위기대가 실제에 있어서는 안팎에서 동시에 형성된다. 예컨대 인간의 경우, 인간은 누구나 생각(사고(思考))하면서 생활하고 있는데, 생각한다는 것은 내적으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수수작용을 하는 것, 즉 내적사위기대(의 형성(形成))를 의미하며, 생활한다는 것은 외적으로 타인과 수수작용하는 것, 즉 외적사위기대(의 형성(形成))를 의미한다.

 

이때의 생각은 막연하고도 비생산적인 생각으로서, 그 생각의 결과는 다만 마음의 한 상태일 뿐이다. 즉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합성체일 뿐이다. 이러한 합성체를 이루는 사위기대가 자동적사위기대이다. 그런데 그것이 내적으로 마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내적자동적사위기대가 된다. 내적자동적사위기대도 그 중심은 심정 또는 창조목적20)이며,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도 역시 원만하고 조화롭게 이루어지며, 그 결과 역시 합성체(통일체)이다. 모든 피조물은 예외 없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수수작용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 때 반드시 그 내부에서도 수수작용 즉 사위기대가 형성된다. 이러한 내적사위기대의 원형이 바로 본성상(本性相)內의 내적사위기대이다. p. 100

 

    ② 외적자동적사위기대(四位基臺)

이것은 외적사위기대와 자동적사위기대가 하나로 조합된 것이다. 즉 본성상 외부(즉 본성상과 본형상간)의 외적사위기대가 자기동일성(불변성)을 띠게 된 것을 말하며,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기 직전의 속성의 상태 즉 성상과 형상이 중화를 이룬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은 후,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수가 많다. 이때의 사위기대(四位基臺)(授受作用)가 바로 외적자동적사위기대이다. 단 이때에는 내적자동적사위기대가 동반되게 된다. 그 좋은 예가 부부생활이다. 남편이나 아내는 각각 내적생활(정신생활), 즉 내적자동적사위기대를 조성해 가면서, 그 터 위에서 서로 협조하고 화합하여 부부일체(夫婦一體; 合性體)를 이룬다. 이것이 외적자동적사위기대의 형성인 것이다.

 

이와 같이 외적자동적사위기대는 내적자동적사위기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으며, 내적인 자동적사위기대의 터 위에서 외적자동적사위기대가 성립된다. 원상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내적 및 외적사위기대의 불가분리성(不可分離性, 떼려야 뗄 수 없는)은, 피조물 및 인간 상호간의 사위기대(외적자동적사위기대) 형성의 기준이 된다.

 

다음에 만물 상호간의 실례로서 태양과 지구를 예로 들어보자. 태양과 지구는 만유원력(萬有原力)을 주고 받으며 수수작용을 한다. 이때 태양은 주체이고 지구는 대상이다. 태양이 주체이기 때문에 지구에 대해서 중심적이며, 이에 대하여 지구는 대상이기 때문에 태양에 대하여 의존성(依存的)이다. 그런데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수수작용은 원칙적으로 대상이 주체의 주위를 반드시 도는 원환운동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원상내의 성상-형상의 수수작용의 원화성, 원만성의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피조세계에 있어서 일정한 원환운동(圓環運動)이 벌어지면, 그것은 거기에 반드시 주체와 대상간의 수수작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볼 때, 지구가 태양을 돌면서(公轉) 지구 자체도 돈다(自轉). 이것은 지구와 태양계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즉 지구는 자전을 통해서 자체의 존립(存立)(自己同一性)을 유지하고, 공전을 통해서 태양과 더불어 태양계 전체의 존립(存立)(自己同一性)을 유지한다. 지구의 이같은 자전과 공전은, 지구 내부에도 자동성 유지를 위한 수수작용(내적수수작용)이 벌어지고, 지구 외부에도(태양과의 사이에) 자동성 유지를 위한 수수작용이 벌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은 태양대로 자전하면서 자체의 자동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지구에 대해서는 주체로서 지구의 의존의 중심이 되어 지구를 주관한다. 즉 지구에 만유원력과 빛을 준 후 지구의 공전을 도우면서 지구의 생물을 살린다. 뿐만 아니라 은하계의 중심에 대하여 대상이 되어서 은하계의 주변을 공전한다.

 

이와 같이 태양과 지구의 예로 볼 때, 거기에 내적자동적사위기대와 외적자동적사위기대가 동시에 조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양 기대(兩 基臺)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내적자동성 유지와 외적자동성 유지를 나타내는 원환운동(자전, 공전)은, 본연의 인간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단 인간생활은 정신과 정신의 관계를 터로 한 생활이기 때문에, 원환운동은 물리적인 원환운동이 아니라 원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중심한 원만성, 조화성, 원활성을 띤 수수작용을 뜻한다. 따라서 내적자동성(내적자동적사위기대)의 유지는 사랑을 중심하고 타인과 화해하면서, 보다 더 효과적으로 타(他)에 봉사하려는 심적자세의 유지로 나타나며, 외적자동성(외적자동적사위기대)유지는 특히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상하간(上下間)일 때는, 대상의 주체에 대한 공전운동이 상위자(主體)에 대한 감사에 찬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주체의 대상에 대한 주관은 진리의 힘과 사랑의 빛의 시여(施與; 베품)로서 나타난다. 즉 주체(上位者)는 대상을 잘 가르치면서 계속해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이상이 본연의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조성하게 되는 내적자동적사위기대와 외적자동적사위기대로서, 오늘의 타락한 사회에서는 그 모범적 실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가치관의 총체적인 붕괴와 사회적 범죄의 증대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원상의 내적 외적인 자동적사위기대이론은 단순한 신관(神觀)이 아니라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21) p.103

 

    ③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다음은 내적발전적사위기대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은 내적사위기대와 발전적사위기대가 조합된 것이다. 즉 본성상내의 내적사위기대가 발전성, 운동성을 띠게 된 것을 말한다.22) 발전적사위기대란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신생체(新生體)를 산출할 때의 사위기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위기대도 실제에 있어서는 안팎에서 형성된다. 그러나 자동적사위기대 때와는 달리, 동시적(同時的)이 아니고 계시적(繼時的)이다. 즉 내적인 발전적사위기대가 먼저 형성되고, 이어서 나중에 외적인 사위기대가 형성된다. p.103

 

이러한 내적인 사위기대는 창조에 있어서 제일 먼저 형성되는 사위기대이다. 예컨대 인간이 제품을 만들거나 작품을 창작할 때에, 먼저 마음으로 구상해서 계획(청사진)을 세우고 나중에 그 구상, 계획에 의해 도구 또는 기계를 사용하여 물품을 제작(창작)한다. 즉 구상의 단계가 먼저이고 제작의 단계가 나중이다. 그리고 구상은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내적이요, 제작은 외부의 도구나 기계를 사용하면서 하기 때문에 외적이다. 그리고 구상도 수수작용 즉 사위기대 조성이요, 제작도 사위기대 조성이다. 그리고 구상한 결과도 신생체요, 제작한 물품도 신생체이다. 그리고 또 구상은 막연한 구상이 아니라, 일정한 물품을 제작하겠다고 하는 뚜렷한 목표를 세워놓고 한 구상이며, 제작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구상단계의 사위기대나 제작단계의 사위기대는 모두 목적을 중심한 사위기대인 것이다. 목적과 신생체를 포함한 사위기대는 발전적사위기대이다. 이것이 안팎의 두 단계에 걸쳐서 형성되었으니 처음 구상단계의 것이 내적발전적사위기대요, 다음의 제작단계가 외적발전적사위기대의 단계이다.

인간의 제작의 경우, 이처럼 구상(構想)(내적발전적사위기대)이 먼저 이루어지고, 이어서 제작(외적발전적사위기대)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 원형(原型)이 하나님의 원상의 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본성상내의 내적성상과 내적형상간의 목적 중심한 수수작용으로서, 신생체인 구상(로고스, 말씀)이 형성되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모든 유형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원형이다.23) p.104

 

그러면 피조세계에서 나타나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원형으로서의, 본성상내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에 관하여 좀 더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중심=목적, 주체=내적성상(내적성상), 대象=내적형상(內的形狀), 내적수수작용, 결과=구상(構想) 등의 소항목을 가지고 설명키로 한다.

 

     i) 중심=목적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중심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목적 즉 창조목적이다. 그런데 이 목적은 사랑하고자 하는 정적충동(情的衝動)인 심정을 터전으로 한 창조목적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심정을 동기로 한 창조이기 때문에 창조목적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사랑의 대상을 세워서, 그를 통하여 피조세계에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께서 기쁨과 위로를 받고자 하심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았고, 만물은 인간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았다. 따라서 인간의 피조목적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기쁨과 위로를 돌려드리는 것이요, 만물의 피조목적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에게 美와 기쁨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 때문에 인간은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되고, 만물을 사랑할 수 없게 되고, 만물로부터의 아름다움마저 전면적으로는 수용할 줄을 모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만물을 괴롭게 하는(로마서 8:22) 결과를 낳고만 것이다.

 

인간은 창조의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하나님을 닮아나도록 지음 받았다. 창조목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인간은 모든 창조활동(제작, 생산, 창작 등의 활동)에 있어서, 그 목적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으로 인하여 자기중심주의(中心主義), 이기주의(利己主義)로 흘러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천도(天道)를 어긴 결과가 되어서 인간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세계적 대혼란을 수습하는 방안의 하나는, 모든 창조활동에 있어서 각양의 창조목적을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일치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중심인 목적에 관한 이론까지도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

 

     ii) 주체=내적성상(內的性相)

 

      ㄱ) 내적성상(內的性相)이란 무엇인가

내적발전적사위기대에 있어서 주체의 입장에 있는 요소는 물론 내적성상이다. 내적성상이란 지(知)-정(情)-의(意)의 세 가지의 심적기능(心的機能)이다. 그런데 이 3기능은 각각 별개의 독립된 기능이 아니고 서로 연관되어 있다. 지적기능(知的機能)에도 情과 意가 포함되어 있으며, 정적(情的)기능에도 지(知), 의(意)가 포함되어 있고, 의적(意的)기능에도 지(知), 정(情)이 포함되어 있다. 즉 3기능은 서로 통일되어 있어서 그 통일체가 때로는 지적기능을 더 많이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적기능을 더 많이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적기능을 더 많이 발휘하기도 한다.

 

지정의(知情意)의 기능(機能)이란 이러한 성격의 세 기능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적발전적사위기대 형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성격의 3기능을 발휘했다고 본다. 지정의(知情意)의 3기능의 성격을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현실세계에 있어서 이에 대응하는 본연의 가치, 즉 眞-美-선(善)도 공통요소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되고, 더 나아가서 이 3가치에 대응하는 3대문화 영역(領域; 과학-철학 등의 학문분야, 예술분야, 종교-도덕분야)도 상호 공통요소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중간 영역도 있게 됨을 또한 알게 된다.

 

이 사실은 창조와 관련해서 현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먼저 심정을 동기로 하여 창조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중심하고 지정의의 3기능을 총동원시켜서, 즉 '전력투입(全力投入)'하여 ('하나님은 천지 창조에 있어서 자신을 전력 투입하셨다':선생님 말씀) 창조를 개시(開始)하고 추진하였음을 뜻하며, 뿐만 아니라 재창조에 있어서도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을 총집중시켜 왔음을 뜻한다. 그리고 다시 이 사실은 복귀역사에 있어서, 특히 말세적인 혼란이 계속되는 오늘에 있어서, 이 지(知)-정(情)-의(意)에 대응하는 과학, 철학 등의 학문분야와 음악, 무용, 회화, 조각, 문학, 시 등의 예술분야와 종교, 도덕윤리 등의 규범분야 등의 3대 문화분야는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의 실현에, 즉 통일문화세계, 심정문화세계의 창건에 총동원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실을 바라볼 때, 모든 문화분야는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저속(低俗)한 방향으로 타락해 가고 있다. 여기에 공산주의와 김일성주체사상과 같은 사이비(似而非) 개혁사상이 침투하여, 모든 문화영역 특히 예술분야를 프롤레타리아예술이니, 민중예술이니 하면서 더욱 저속화시키고 있고 더욱 불모화(不毛化)시키고 있다. 이것은 사탄이 그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문화영역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지성인, 학자들의 사명은 자명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창조목적 실현과 창조이상세계의 건설을 위하여, 그리고 통일문화(심정문화(心情文化))세계의 창건을 향하여, 총궐기하며 총진군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창조시에 원상(原相)의 본성상내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가 형성됨에 있어서, 내적성상인 지정의(知情意)의 3기능이 목적 중심으로 총동원되었다는 사실까지도, 현실문제 해결에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ㄴ) 내적성상(內的性相)은 육심(肉心)과 생심(生心)의 통일체이다.

끝으로 여기에 한가지 첨부할 것은, 인간의 지정의(知情意)에는 영인체의 지정의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육신과 영인체의 二重體(통일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本心)도 육심과 생심의 통일체이다. 따라서 내적성상도 육신의 지정의의 기능과 영인체의 지정의의 기능이 복합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육심의 지적기능은 감각과 지각정도이며, 기껏해야 약간의 오성적기능(悟性的機能)을 나타내는데 불과하다. 그러나 생심의 지적기능은 감성(感性), 오성(悟性), 이성(理性)을 전부 갖고 있어서 보편적 진리를 체득할 수도 있다. 생심(生心)은 또 자아(自我)를 인식하고 반성(反省)하는 능력 즉 자아의식(自我意識)(self-consciousness)도 갖고 있다. 과학자들(예:대뇌생리학자 존 엑클스, 생물학자 앙드레 구도페로 등)이 인간에게만 자아의식(自我意識)이 있고, 동물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한 것은, 인간에게는 생심이 있기 때문이다.

 

육심의 정적(情的)기능은 생심의 그것에 비하여 저차원이다. 생심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을 느끼며 제한된 범위내에서는 애타심(愛他心)도 발휘한다. 그러나 생심의 정적기능은 고차원적이어서 인간이 예술생활을 할 수 있고,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민족이나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생심(生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육심의 의적(意的)기능도 생심의 그것에 비하여 역시 저차원이다. 통일사상에 있어서의 의적기능은 의욕성(意欲性)으로서, 창조목적(創造目的; 개체목적, 전체목적)을 달성하려는 실천심(實踐心; 실천(實踐)力) 또는 결단심(決斷心; 決斷力)을 말한다. 동물의 창조목적은 주로 물질생활(육체 중심의 먹기, 살기, 새끼낳기 등)을 통해서 달성되지만, 인간의 창조목적은 육신생활을 터로 한 정신생활(眞?美?선(善)의 가치의 생활)을 통해서 달성되기 때문에, 의적기능에도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게 된다. 즉 동물의 의적기능은 의(衣)?식(食)?주(住)?성(性)에 관한 것이지만, 인간의 의적기능은 육심의 의적기능과 생심의 의적기능이 복합되어 있으며, 본연의 인간에게는 생심의 기능(가치의 실현 및 추구의 기능)이 육심의 기능보다 우위(優位)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적기능이 선차적으로는 가치(정신적가치)를 추구하며, 후차적으로는 물질생활을 추구한다.

 

이상으로 인간의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은 육심의 지정의와, 생심의 지정의와의 통일임을 밝혔다. 즉 지적기능도 두 마음(육심, 생심)의 지적기능의 통일이요, 정적기능도 의적기능도 각각 두 마음의 기능의 통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통일된 지적기능, 정적기능, 의적기능 등 3기능마저도, 서로 분리(分離)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술한 바와 같이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통일사상의 인식론(認識論)에는 이 내적성상의 통일된 측면을 특히 부각시켜서 이것을 영적통각(靈的統覺)이라고 부른다. 생심 중심의 통일된 인식능력(認識能力)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내적성상(內的性相)을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체로 보는 관점은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 전통적인 미해결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24) p.109

 

     iii) 대상(對象)=내적형상(內的形狀) (p. 109)

 

      ㄱ) 내적형상(內的形狀)이란 무엇인가

다음은 내적발전적 사위기대(內的發展的 四位基臺)에 있어서의 대상의 입장인 내적형상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내적형상은 본성상 내에 있는 꼴의 부분으로서 관념, 개념, 원칙, 수리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관념은 이미 창조되었거나 또는 장차 창조되어질 피조물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표상(表象) 즉 영상(映像)이며, 개념은 일군(一群, 한 무리)의 관념에 공통적으로 포함된 요소를 마음속에 영상화(映像化)한 것이다. 그리고 원칙은 피조세계의 자연법칙과 규범법칙 등의 근본원인이 되는 법칙이며, 수리(數理)는 수적(數的) 원리로서 자연계의 수적현상(數的現象)의 궁극적 원인이다.

 

그러면 내적형상을 이루고 있는 유형(有形)의 요소를 창조와 관련시켜서 보자. 이 내적형상은 하나님의 우주창조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그것은 비유컨대 주형(鑄型)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주형이란 쇠붙이를 녹인(融解한) 액체를 부어서, 물건을 만드는 거푸집을 뜻한다. 창조에 있어서 이 융해액(融解液)에 해당한 것이, 본형상 즉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Pre-Energy; 무형의 에너지)이다. 마치 인간이 주형에 철(鐵)의 융해액을 부어서 철물을 만들듯이, 하나님은 이 내적형상이라는 영적(靈的) 주형에 본형상(本形狀)이라는 영적액체(靈的 液體)를 부어 넣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물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25)

p.110

      ㄴ) 내적형상(內的形狀)은 일종의 주형(靈的鑄型)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내적형상(內的形狀)內의 주형은 인공주형(人工鑄型)과 달라서 겉모양만의 주형이 아니라, 내용 즉 세밀한 내부 구조까지를 갖춘 주형(영적주형)이다. 인간의 경우,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위시한 각종의 기관, 조직, 세포에 이르기까지 세밀한 구조를 갖춘 주형이며, 창조에 있어서 이러한 주형의 역할을 다한 것이 내적형상내의 여러 관념(단순관념(觀念), 복합관념(觀念))이라고 본다. 우리가 만물을 바라볼 때, 大小를 막론하고, 또 종류별을 막론하고 만물은 반드시 일정한 꼴을 갖고 있고, 일정한 종류에 걸쳐 공통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 일정한 법칙이 작용하면서 일정한 수적(數的)내용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마치 철물의 모양이 그 주형의 꼴을 닮아난 것처럼, 모두 주형(영적주형)인 내적형상(복합관념)을 닮아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또 하나 분명히 해둘 것은, 이상에서 설명한 내적형상이 모두 창조에 직접 관련된 것, 즉 피조물의 직접적인 모형이 된 것 뿐이었다는 점이다. 그 외에 창조의 모형(模型)과는 무관한 관념, 개념, 원칙, 수리 등이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하나님', '나', '부모', '美', '이상', '목적' 등의 관념(觀念)이나 개념(槪念)은, 시공의 세계에 만물로서 지음받을 수는 없는 것들이다. 이들은 창조와 간접적인 관련은 있어도, 직접적으로 피조물이 되지는 못한다. 이상으로 내적형상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iv)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

 

      ㄱ)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이란 무엇인가

다음은 내적수수작용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내적발전적사위기대가 본성상 내부에서 신생체의 형성을 위한 수수작용에 의해 벌어지는 사위기대(四位基臺)이기 때문에 이 수수작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수수작용 역시 주체와 대상간의 수수작용인데 이것은 바로 내적성상인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적기능과 내적형상간의 수수작용을 뜻한다. 물론 위에서 밝힌 창조목적을 중심한 수수작용이다. 그런데 이 내적수수작용은 요컨대 생각, 사고(思考), 구상(構想)을 뜻한다. 왜냐하면 본성상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그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수수작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하는 것을 왜 수수작용(授受作用)으로 보느냐 하는데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생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생각은 다음과 같은 기능을 다한 마음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억, 회상, 판단, 관심, 계획, 의견, 이해, 상상, 추측, 추리, 희망, 사색, 명상, 해석 등을 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심지어 망상(妄想)까지도 생각의 개념에 포함된다. 이것들은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의 현상(現象)(생각)은 과거에 경험한 것에 대한 생각과, 현재의 상황(狀況)에 대한 생각,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생각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과거에 경험한 것에 대한 생각이란 기억에 관한 것이며, 현재의 상황에 대한 생각이란 의견, 추측, 이해 등에 관한 것이며, 미래의 일에 대한 생각은 계획(計劃), 희망(希望), 이상(理想) 등에 대한 것을 말함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생각도 미리 마음속에 일정량(一定量)의 관념(일종(一種)의 마음의 영상(映像))이 들어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치 텔레비전의 시청(視聽)은 형광판(螢光板)에 영상이 비쳐질 때에만 가능하며, 영상이 형광판에 비쳐지지 않으면 시청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관념(영상(映像))은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만 형성된다. 우리가 눈을 감고도 마음속에서 새를 생각하고 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실지로 과거에 새나 꽃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ㄴ) 관념(觀念)의 조작(操作) 생각하는데 일정량(一定量)의 관념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의 일을 되새기는 생각뿐만 아니라 현재의 일을 살피고, 앞날의 일을 내다보는 생각까지도 모두, 과거에 일단 경험한 관념을 가지고서만 가능함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경험이 풍부할수록 즉 경험한 관념이 많을수록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저축(貯蓄)을 많이 해두면 필요할 때에 찾아내서 언제든지 살림을 늘릴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우리가 가재도구를 창고에 많이 저장해 두면, 언제든지 필요할 때에 꺼내어 쓸 수 있는 것과도 같다. 인간이 지식(知識)을 배우고 견문(見聞)을 넓히는 것도, 결국은 기억의 창고에 여러 가지 관념(觀念)을 많이 저장하기 위한 것이며, 실제로 많이 저장된다. 즉 생각이란, 창고에서 저장물을 끄집어내어 필요할 때마다 적절히 사용하듯이, 기억의 창고에서 관념을 끄집어내어 여러 가지로 다루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하는 것을 통일사상에서는 관념(觀念)의 조작(操作)(Operation of Ideas)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관념의 조작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관념이란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표상(表象) 또는 영상(映像)을 말하며, 사물 하나하나의 영상과 같이 간단한 것을 단순관념(單純觀念)이라 하고, 이 단순관념이 2개이상 복합(複合)된 것을 복합관념(複合觀念)이라 한다(단 이것은 비교상의 상대적 개념이다). 그리고 조작이란, 기계같은 것을 이리 저리 다루는 것을 뜻한다. 특히 여기서의 조작의 뜻은 예컨대 필요한 여러 부품이나 기계를 저장소에서 끌어내는 것(인출(引出)), 또는 필요한 기계와 기계를 연결시키는 것, 또 필요에 따라서 기계를 구성부분(構成部分)으로 분해하는 것, 혹은 부품을 모아서 새로운 기계를 조립하는 것, 기계의 몸체는 그냥 두고 두 개의 부품의 위치를 교환하는 것, 또는 여러 기계를 연결시켜서 하나로 통일하는 것 따위의 작업을 의미한다.

 

      ㄷ) 관념(觀念)의 조작(操作)은 수수작용(授受作用)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관념을 다루는 것이 관념(觀念)의 조작(操作)이다. 즉 첫째로, 기계의 인출(引出)에 해당하는 관념의 조작이 상기(想起(記憶), 기억을 떠올림)이며, 기계의 연결의 조작에 해당하는 것이 관념과 관념의 연합(聯合) 또는 복합(複合)이요, 기계의 분해에 해당하는 것이 관념의 분석(分析)이요, 새 기계의 조립에 해당하는 것이 신관념의 구성(構成)이요, 부품의 위치 교환에 해당하는 관념조작이 환위(換位)요, 여러 기계의 연결, 통일에 해당하는 것이 관념의 종합(綜合)이다. 그 외에 또 중요한 관념조작의 하나로, 일정(一定)한 관념(觀念)을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일도 있는데, 이것을 환질(換質)이라고 한다. 이상을 요약하면 관념의 조작(운용 operating system)이란, 과거에 경험한 여러 관념들 중에서 필요한 것을 가지고 상기, 연합, 분석, 구성, 종합, 환위, 환질 등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상기(想起; 회상 anamnesis)는 과거의 경험중에서 필요한 관념을 이끌어내는 것이요, 연합(聯合)은 한 관념을 생각할 때, 그로 말미암아 다른 관념이 연상되는 것이며(예:아버지를 생각할 때에 어머니가 연상됨과 같은), 여러 작은 관념들이 모여서 큰 관념을 이루는 것이 구성(構成)이요(예:토대, 주춧돌, 기둥, 도리, 들보, 대들보, 서까래, 지붕, 방 등의 관념이 모여서 집이라는 큰 관념이 구성되는 것), 어떤 관념을 작은 관념으로 나누는 것이 분석이며(예:인체는 신경계통, 소화기계통, 감각기관, 순환기계통, 호흡기계통, 근육조직, 비뇨기, 내분비선, 임파계통으로 되어 있다고 할때의 세분하는 방식), 분석한 여러 관념을 다시 하나의 큰 관념으로 總合하는 방식이 종합이다(예:신경계통, 순환기계통, 호흡기, 소화기, 감각기관, 비뇨기 등이 합해서 된 것이 인체이다 라고 할때의 생각(思考方式).

 

그리고 하나의 판단의 뜻을 변치 않게 하면서 주어와 술어를 바꾸는 조작을 환위(換位; 위치 바꿈)라 하고(예:모든 A는 B이다를 어떤 B는 A이다라고 하는 따위), 하나의 긍정판단을 부정판단(否定判斷)으로 하되 그 술어를 모순(矛盾)관념(觀念)으로 바꿔서 의미를 변하지 않게 하는 조작을 환질(換質)이라고 한다(예:A는 B이다를 A는 非 B가 아니다라는 따위의 사고방식). 설명이 조금 장황했지만, 생각이 내적수수작용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ㄹ) 수수작용(授受作用)의 유형

앞에서 말한 여러가지 종류의 사고(思考):예컨대 회상, 판단, 의견, 상상, 이해, 추리 등)이 여러 가지 방식의 관념(觀念)조작(操作)에 불과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관념조작이 바로 수수작용이다(그림 1-12 참조(參照)).

  

 

이제부터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관념의 조작이 수수작용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수수작용의 유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유형이란 양측의식형(兩側意識型(第一型)), 편측의식형(片側意識型(第二型)), 무의식형(無意識型(第三型)), 타율형(他律型(第四型)), 대비형(對比型(조합(組合)型: 第五型))의 5형의 수수작용을 말한다.

 

양측의식형은 주체와 대상이 모두 의식을 지니고 수수작용을 하는 경우를 말하며, 편측의식형은 주체만이 의식을 갖고 있고 대상은 무기물이거나 무기물과 같은 無생명(生命)의 입장에 있는 존재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수작용을 말한다. 또 무의식형(無自覺型)은 주체와 대상이 전연 알지 못하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수작용(예: 동물과 식물사이에 CO₂와 O₂의 교환)을 말하며, 타율형은 양측이 모두 무생명인 채 제3자(第三者)로부터 주어진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수수작용의 경우(예: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의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대비형은 인식 또는 판단하는 경우에 형성되는 것으로서, 편측의식형과 같으면서도 대상이 한몫에 두 개 또는 두 개 이상일 때, 혹은 대상의 속성이 두 개 또는 그 이상일 때, 이들의 요소를 비교해서 인식(認識)(判斷)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길을 걸어가는 한 쌍의 남녀(男女)를 멀리서 바라보고 두 사람의 연령, 태도 등을 비교 혹은 대조해서 그들이 부부라는 것을 판단하는 따위, 또는 가게에서 상품을 바라보고 비교한 후 좋은 것을 택하는 것, 혹은 푸른 숲속에 붉은 기와집의 지붕이 있음을 보고 그 녹색(綠色)과 적색(赤色)을 대조해서 조화의 미(美)를 느끼는 따위가 모두 대비형의 수수작용이다.

 

이때 이 대비에 의한 판단은 비록 그것이 수수작용이라 하더라도 주체가 일방적으로 행한다. 주체가 일방적으로 대비 및 판단하는 것이 수수작용이 되는 이유는, 주체는 대상에게 관심을 주고 대상은 주체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이 주고 받는 작용의 형식이 되기 때문이다.

 

      ㅁ) 생각(思考)도 대비형의 수수작용이다.

앞에서 생각(思考)이 수수작용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실은 이 대비형의 수수작용이다. 즉 인간의 경우 마음(성상(性相)) 내부의 영적통각(靈的統覺, 내적성상), 즉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체가 주체가 되어서 내적형상 속에 있는, 그리고 경험에서 얻어진 여러 관념(영상)들을 먼저 대비(對比, 또는 對照)한다. 이 대비작용 자체도 좁은 의미의 대비형수수작용이다. 대상의 두 요소중의 하나를 주체로, 다른 하나를 대상으로 삼고 양자를 대비하는 것으로서, 대비는 비록 영적통각이 하는 것이지만, 영적통각의 관심이 양자사이를 왕래하기 때문에 내적형상내에서 대비되는 임의의 두 요소 사이의 작용도 일종의 수수작용이다. 좁은 의미의 대비형(對比型)수수작용(授受作用)인 것이다. 결국 영적통각과 내적형상과의 수수작용도 대비형수수작용이요, 내적형상내의 대비되는 임의의 두 요소 사이의 작용도 대비형수수작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수작용(對比)의 결과이다. 그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양자가 완전히 일치할 때도 있고, 비슷할 때도 있지만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때로는 정반대일 경우도 있다. 또 양자가 대응관계(對應關係)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수수작용은 목적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목적에 따라서도 결과가 달라진다. 이러한 다양한 결과를 예상하면서 영적통각은 가급적 일정한 방향으로 이 수수작용을 조정해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내용이다. 생각에 회상, 이해, 판단, 추리, 희망 등 여러 가지가 있게 된 것은 이 수수작용의 목표(目的)와 대비방식의 차이에서 연유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리하여 다양한 생각이 계속되면서 물 흐르듯 이어져 나아간다.

 

그런데 물건을 창조할 때에는 이 생각의 흐름에 일단 매듭이 지어진다. 즉 창조코자 하는 주형(鑄型(模型))이 될 관념(단순관념, 복합관념 등)이 정해진다(이것을 주형성관념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것은 대비형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신생체가 형성됨을 뜻한다. 즉 창조에 관한한 그 주형은 신생체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로고스(말씀, 구상)로서의 신생체가 아니며, 그 전단계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前로고스(PreLogos), 또는 전구상(前構想)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신생체인 신생관념(新生觀念; 주형성관념)은 그 속에 그 관념에 필요한 개념, 원칙, 수리 등의 요소를 다 갖춘, 그리고 치밀한 내부구조까지를 갖춘, 보다 더 구체화된 관념이다. 창조에 있어서 이와 같이 내적수수작용을 통해서 신생관념이 형성되는 단계가 내적수수작용의 초기(初期)단계이며, 실제의 피조물에 대한 구상(構想)(로고스)은 후기(後期)단계에서 이루어진다.

 

      ㅂ) 목적이 중심(中心)이다.

이상으로 생각이란 마음(性狀)속에서 벌어지는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임을 밝혔는데, 이것이 수수작용이기 때문에, 목적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인간이 체험하는 생각에는 목적이 없는 막연한 생각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구상)은 처음부터 목적 중심이었다. 그것이 바로 심정을 터전으로 한 창조목적이었다.

 

하나님이 창조를 생각하기 前단계, 즉 심정 중심의 사위기대(四位基臺)(自同的四位基臺)만의 단계도 있었다고 보지만, 그 심정도 억제하기 어려운 정적인 충동이기 때문에 자동적사위기대의 터 위에서 필연적으로 창조목적이 세워져서 발전적사위기대가 세워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창조 후에도 이 자동적사위기대가 발전적사위기대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사실(하나님의 不變性, 絶對性)이 이것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구상이 목적(심정을 터로 한 창조목적)없이는 세워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중요한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아무렇게나 생각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 본연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사랑(心情)을 동기로 하고 피조목적(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만 생각하게 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적인, 자의적(恣意的)인 생각 패턴을 버리고 본연의 사고 패턴으로 돌아와서 사랑을 동기로 한 창조목적 실현(實現(地上天國實現))을 위하여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26) 이상으로 내적수수작용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p.118

 

     v) 결과=구상(構想)

 

      ㄱ) 결과란 무엇인가

다음은 결과 즉 구상(構想)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즉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결과의 위치에 세워지는 구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앞의 항목(내적수수작용)에서 다룬 구상은 생각한다는 뜻의 구상, 즉 내적수수작용과 같은 뜻의 구상이었지만 여기서의 구상은 생각한 결과로서의 구상으로서, 요한복음(1:1)에 있는 말씀 즉 로고스를 뜻하며, 바로 本원상론의 신성(神性)(심정, 로고스, 창조성)중의 하나인 로고스이다. 따라서 신성(神性)의 항목에서 로고스라는 소제목하에 구상(말씀)과 이법(理法)에 관한 설명을 이미 마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재론하는 것은, 신성(神性)의 항목에서 다룬 로고스는 구상 즉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라기 보다는, 이법으로서의 로고스여서, 여기에 더 보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앞에서 설명했던 로고스에 관한 요점을 다시 간단히 소개하고 이어서 약간의 보충을 가하려고 한다.

 

로고스는 원리강론의 해석에 따라서 말씀 또는 이법(理法)이라고 보는데, 말씀이 바로 구상, 사고, 계획 등이고 이법(理法)은 이성과 법칙의 통일이다. 그리고 이성은 자유성과 목적성이기도 하고, 법칙성(法則性)은 필연성과 기계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과 법칙의 통일인 이법은 동시에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 목적성과 기계성의 통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법에 의해서 우주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속에 이법(理法)(이성과 法則)이 들어있고, 만물 상호간에도 이 이법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계에 작용하고 있는 이법이 바로 자연법칙이요, 인간생활에서 지켜져야 하는 것이 가치법칙(價値法則, 規範法則)이다.

 

그리고 자유성(性)과 필연성(必然性)의 통일이 이법이라는 말은, 자유는 필연 즉 법칙속에서의 자유이며, 원리속에서의 자유 즉 원리안에서의 이성의 선택의 자유임을 뜻하며, 따라서 원리나 법칙을 무시한 자유는 사실은 방종(放縱)이다. 그리고 이법은 말씀과 별개의 것이 아니고 모두 로고스이며, 도리어 말씀의 일부가 이법이라는 것과, 말씀과 함께 이법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하나님의 대상(1987, p. 220)이기 때문에 일종의 신생체요, 일종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는 심정을 동기로 하였기 때문에 로고스(理法)도 사랑이 그 터전이 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자연법칙, 가치법칙의 배후에도 사랑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밝혔던 것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 이법(價値法則)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 생활은 따뜻한 사랑속에서 지켜지는 생활이어야만 거기에 비로소 백화가 만발하는 봄 동산과 같은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도 아울러 밝혔던 것이다.

 

      ㄴ) 구상(構想)으로서의 로고스

이상이 앞의 신성(神性)의 항목에서 다룬 로고스의 내용의 요점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앞에서는 주로 이법(理法)으로서의 로고스만을 다루었으며, 말씀 즉 구상으로서의 로고스는 상세히 다루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 구상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미 앞의 내적수수작용의 설명에서도 구상을 다루기는 했지만, 그것은 신생체 즉 결과물로서의 구상이 아니고 주로 생각한다는 뜻의 구상, 즉 수수작용으로서의 구상, 관념의 조작으로서의 구상이었다. 그런데 내적수수작용의 단계에서도 관념(觀念)의 조작의 의미를 갖는 구상 외에, 신생체의 뜻을 갖는 前구상(構想)이라는 개념이 쓰여진 바가 있었다. 즉 창조를 목적으로한 대비형의 수수작용의 결과 형성된 신생체로서 개념, 원칙, 수리 등을 갖춘, 그리고 치밀한 내부구조를 지닌 보다 더 구체화된 鑄型(靈的鑄型) 곧 모형(模型)으로서의 신생관념 즉 주형성관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말씀으로서의 구상이 아니며 다만 그 前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영상으로 말하면 사진과 같은 정적(靜的)영상(映像)에 불과하며, 영화에서와 같은 생동력있는 영상 즉 동적영상(動的映像)이 되지는 못한다. 문자 그대로의 설계도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말씀인 로고스는 생명이 들어있는 산 신생체(新生體)이며, 산 구상(構想)인 것이다. 요한복음 1장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그 안에 생명(生命)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1-4).

 

      ㄷ) 로고스는 구상체(구상(構想)體)이다.

이와 같이 만물을 창조한 말씀(로고스)은 생명을 지닌 생동(生動)하는 구상체였다. 이것은 前단계인 관념의 조작단계에서 형성된 신생체로서, 치밀한 내부 구조를 갖춘 신생관념(주형성관념)에 생명이 부여되어 그것이 동적(動的) 성격을 띠게 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서 정적(靜的)인 성격을 지닌 신생관념이 동적 성격을 띠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내적수수작용의 초기와 후기의 2단계(二段階) 과정에 의해서인 것이다. 즉 영적통각(靈的統覺,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체))과 내적형상과의 수수작용에는 초기단계와 후기단계의 두 단계가 있는데, 그 초기단계에서는 관념의 조작에 의해서 신생관념(前構想)이 형성되고, 그것이 후기단계에서는 심정(사랑)의 힘에 의해서 지정의의 기능이 주입된 후 活力을 얻게 됨으로써, 즉 생명을 얻게 됨으로써 완성된 구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지정의 속에 가능성으로서만 포함되어 있던 양성, 음성이 이 후기단계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지정의의 기능의 발현에 조화로운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구상이 바로 하나님의 대상인 로고스이며, 이성성상을 통일적으로 지닌 로고스 즉 로고스의 이성성상(원리강론 1987, p. 222)이다. 이것이 바로 이령(裡寧, 속에서 편안하게 거함) 창조한 말씀으로서의 로고스이며,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결과인 구상이다.

 

로고스의 이성성상이란 로고스속에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두 요소가, 로고스의 차원과 종류에 따라서 필요한 만큼 내포되어 있음을 뜻한다. 즉 내적성상(內的性相)인 지적기능, 정적기능, 의적기능과 내적형상인 관념, 개념, 원칙(법칙), 수리 등이 창조될 만물의 차원(광물, 식물, 동물, 인간 등)과 종류에 따라서 각양각색으로, 그 로고스에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내적수수작용의 후기의 단계에서 이미 관념조작(觀念操作)에 의하여 형성된 초구상(新生觀念)속에 지적, 정적, 의적기능이 심정(사랑)의 충동력에 의해서 차원을 달리하면서 주입된 후, 前구상(構想)을 활성화시킨 것이다.27) p.122

 

     vi)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설명의 요약 이상으로 내적발전적사위기대에 관한 설명을 일단 마치고자 한다. 그러나 설명의 어떤 부분은 장황하고 부드럽지 못한 점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상의 설명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다시 소개(紹介)하고자 한다.

 

      ㄱ)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중심

내적발전적사위기대는 창조에 있어서 외적발전적사위기대보다 먼저 조성되는 사위기대로서, 이 사위기대의 중심인 목적은 심정을 터전으로 하고 세워졌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세워놓고 그를 통해서 사랑을 실현하는데 있다. 따라서 인간의 피조목적은 서로 사랑함은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인간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의 대혼란이 야기되었으니, 이 혼란을 수습하는 길의 하나는 만인간의 모든 목적을 인간 본연의 피조목적으로 일치화시키는데 있다.

 

      ㄴ)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주체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주체의 입장은 내적성상인 지(知)-정(情)-의(意)의 三기능(機能)으로서, 이 세 기능은 서로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 이 3기능에 대응해서 진(眞)-미(美)-선(善)의 3가치(三價値)가 세워지고 이 3가치에 대응해서 3대문화 영역(領域)이 세워진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주창조에 있어서 창조목적을 실현하고자 全力(지(知)-정(情)-의(意)의 총기능)을 투입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는 문화를 구제함과 아울러 신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도 3대 문화영역의 지성인, 학자들은 통일된 理念(目的)을 중심하고 총궐기해야 된다. 한편 인간의 지(知)-정(情)-의(意)는 肉心의 그것과 생심(生心)의 그것이 통일된 통일心인 동시에 지?정?의도 통일되어 있어서, 이 통일의 면을 특히 부각시킨 지정의의 통일체를 영적통각(靈的統覺)이라 한다.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영적존재가 되게 하였으며, 아울러 자아의식(自我意識)을 갖게 하고 있다.

 

그리고 육심(肉心(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은 의식주(衣食住) 및 성(性)의 생활 즉 물질생활을 추구하는 것이고, 생심의 기능은 진(眞)-선(善)-미(美)의 가치생활을 추구한다. 여기에서 생심에 의한 가치생활의 추구를 선차적으로 하고, 육심에 의한 물질생활의 추구를 후차적으로 하는 것이 본연의 인간의 생활자세(생활姿勢)인 것이다.

 

      ㄷ)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대상(對象)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대상의 위치는 내적형상이다. 즉 관념, 개념, 원칙, 수리 등의 꼴의 요소들이다. 그 중 개념, 원칙, 수리 등은 창조에 있어서는 모두 관념속에 통일되어 있고, 그 관념(觀念)은 주형(鑄型)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때 단순관념이 주형(영적주형)이 되기도 하고 복합관념이 주형이 되기도 한다. 창조에 있어서 이 주형(영적주형)은 치밀한 내부구조를 갖는다. 그리고 여기의 融液(영적융액)에 해당하는 것이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인 본형상(本形狀)이다. 그리고 창조에 관련되는 주형의 수(數)는 무수히 많으며 각각 그 꼴이 다르다. 그 하나 하나가 개별상인 것이다. 이 개별상이 인간에 있어서는 개인별(個人別)의 개별상(個別相)이기 때문에 주형의 역할은 일회한(一回限, 한번 만)으로 끝난다. 그러나 만물의 개별상은 종류별이기 때문에 하나의 주형은 한 종류 전체의 창조를 망라한다.

 

      ㄹ)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내적수수작용은 상기(上記)의 목적 중심한 내적성상(靈的統覺)과 내적형상과의 수수작용인데, 이것은 생각, 구상을 뜻한다. 즉 내적수수작용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 구상하는 것을 뜻한다. 생각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크게 나누어서 과거에 관한 생각(기억, 회상 등)과 현재에 관련된 생각(의견, 판단, 추리 등)과 미래에 관한 생각(계획, 희망, 이상 등)으로 유별(類別, 분류하여 구별함)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의 가장 기본요소는 관념 즉 마음속에 간직된 영상으로서, 생각이란 이 관념을 여러가지로 조작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관념의 조작에는 상기(想起), 연합(聯合(複合)), 분석(分析), 종합(綜合), 구상(構成), 환위(換位), 환질(換質) 등의 여러 방식이 있다.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내적수수작용이란 요컨대 이러한 관념의 조작이다. 그런데 그 수수작용은 물론 주체인 영적통각(내적성상)과 대상인 내적형상과의 사이에서 벌어지지만, 실제의 내용은 대상내의 여러 관념들을 여러 방식으로 조작한 것에 불과하다. 이 조작은 관념과 관념의 대비(對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수수작용은 대상내의 관념과 관념의 대비가 병행되는, 주체(主體(영적통각))와 대상(對象(내적형상))간의 수수작용이기 때문에 대비(對比) 성격을 띤 편측의식형(片側意識型)의 수수작용으로서, 일종의 대비형의 수수작용이다.

 

      ㅁ)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결과

끝으로 결과의 위치에 세워지는 구상에 관한 설명을 요약한다. 결과로서의 구상은 내적수수작용에서 다룬 구상과 다르다. 후자는 생각한다는 것 즉 작용을 뜻하며, 전자는 수수작용의 결과로 나타난 신생체를 뜻한다. 신생체로서의 이 구상은 바로 로고스이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내적수수작용에는 초기, 후기의 2단계가 있는데 초기의 단계에서는 내적형상 내의 관념조작(觀念操作)에 의해서 신관념(新觀念)이 형성된다. 이것도 일종의 신생체이며 구상(前構想)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으로서의 구상의 전단계에 불과하며, 생동성(生動性, 살아서 움직이는 성질)이 없는 정적영상(靜的映像)에 불과하다.

 

우주를 창조한 말씀인 구상(로고스)은 생명이 들어 있는 산 신생체(新生體)로서, 이것은 내적수수작용의 후기단계에서 영적통각인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 심정의 충동력에 의하여 신생관념에 주입된 후 同관념(觀念)이 활성화됨으로써, 즉 생명을 얻게됨으로써 완성된 구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때의 구상이 바로 이성성상을 지닌 로고스이다. 그리고 이 구상(構想)中에는 이법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이법은 이성과 법칙의 통일이며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인 것으로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신성(神性)의 항목에서 로고스라는 소제목하에 비교적 상세히 다뤘으므로 여기서는 생략(省略)하고자 한다.

 

    ④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

  

     i)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란 무엇인가

네 종류의 사위기대(四位基臺)中에서, 끝으로 외적발전적사위기대에 관해서 설명코자 한다. 이것은 외적사위기대와 발전적사위기대가 조합된 것으로서 본성상(本性相)의 외부에서의 수수작용, 즉 본성상과 본형상의 수수작용의 터전이 되고 있는 외적사위기대가 발전성, 운동성을 띠게 된 것을 말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통일사상에서 볼 때, 발전이란 새로운 성질의 개체 즉 신생체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창조를 결과의 면에서 파악한 개념이다. 따라서 발전적사위기대란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한 후, 신생체를 낳을 때의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뜻한다.

 

그리하여 외적발전적사위기대는 본성상의 외부에 형성된 외적사위기대가 발전성을 갖추게 되어서, 발전적사위기대가 된 것이다. 이미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설명에서 언급했듯이, 외적발전적사위기대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가 형성된 뒤를 이어서, 그 다음 단계의 사위기대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본성상을 중심하고 볼 때, 자동적사위기대 때와 마찬가지로 발전적사위기대도 본성상의 안팎에서 형성되는데, 자동적사위기대 때처럼 동시적(同時的)이 아니고 계속적(繼續的)이어서 내적인 기대가 먼저 형성된 후 그 다음에 외적인 기대가 형성된다.

 

     ii)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의 기반위에 형성된다.

이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에 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누차 말한 바와 같이 사위기대란 요컨대 심정 또는 목적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한 후, 그 결과를 맺는 현상을 공간적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내적 및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도 수수작용으로써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발전이란 창조를 결과의 면에서 파악한 개념이기 때문에, 발전적사위기대를 바로 이해하려면 창조나 제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이것을 인간의 경우를 비유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사람은 무엇을 만들려 할 때, 먼저 마음으로 반드시 구상을 한다. 가령 집을 지으려면 일정한 목적을 세우고, 깊이 구상을 하여 계획서(計劃書)나 청사진을 만든다. 계획서나 청사진은 그 구상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지면에 나타냈을 뿐, 그대로가 마음의 구상인 것이다. 이 구상이 위에서 말한 내적수수작용이며 곧 창조의 第一단계이다. 이어서 창조의 제2단계(第2段階)가 시작된다. 이것은 여러가지 건축재료를 가지고 인간들이 그 구상(청사진)에 따라서 창조작업 즉 건축공사를 진행한다.

 

그리하여 드디어 일정한 시간후에 목적했던 대로의 건물을 완성한다. 여기서 마음의 구상은 성상내의 수수작용 즉 내적수수작용이다. 그리고 사람이 건축자재를 가지고 그 구상대로 집을 짓는 것도 수수작용이다. 이것은 마음(性相)의 밖에서 벌어진 수수작용이기 때문에 외적수수작용이라 한다. 그런데 구상(構想)(청사진)도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요, 건물도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모두 신생체(新生體)이다. 따라서 이 신생체의 출현은 동기로 보면 창조요, 결과로 보면 발전이다. 이 수수작용에서 주체는 구상(현실적으로는 구상을 지닌 인간, 또는 그 인간을 대리한 다른 인간들)이요, 대상은 건축자재 등이다. 그리고 이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이 바로 건축공사의 진행인 것이다. 그리고 이 수수작용의 결과인 신생체가 바로 완성된 건물인 것이다.

 

또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때에도 화가는 일정한 목적을 먼저 세워놓고 구상을 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 구상을 소묘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것이 제일(第一)단계이다. 구상이 끝나면 제2단계(第2段階)의 작업이 개시된다. 즉 화폭, 붓, 채료(彩料(물감)), 화가(畵架) 따위의 화구(畵具)를 써가면서 화가(畵家)는 구상한 대로의 그림을 그린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림이 완성된다. 이때 제일(第一)단계의 구상도 수수작용이요, 제2단계(第2段階)의 그림 그리기도 수수작용이다. 그리고 제일(第一)단계의 구상도, 제2단계(第2段階)의 완성한 그림도, 모두 전에 없었던 새로운 결과이므로 신생체(新生體)들이다. 따라서 이 그림 그리기도 또한 창조요, 발전인 것이다.

 

     iii) 모든 창조는 2단계의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에 의해서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 진다. 첫째로, 창조에는 반드시 두 단계의 과정이 있으며 둘째는, 첫단계는 내적인 구상의 단계요 다음 단계는 외적인 작업의 단계라는 것이며, 셋째는 두 단계의 수수작용(授受作用)이 모두 동일한 목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반드시 그 결과로서 신생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의 첫단계가 바로 내적발전적수수작용의 단계요, 둘째 단계가 외적발전적수수작용의 단계이다. 이 일련(一聯)의 원칙은 모든 창조활동에 적용된다. 생산, 제작, 발명, 예술 등 어떠한 유형의 창조활동에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그 이유는 이 원칙의 기준이 하나님의 원상(原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본성상의 안팎의 수수작용 즉 내적발전적수수작용과 외적발전적수수작용인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먼저 일정(一定)한 목적을 세워 놓고 만물 창조를 구상한 다음, 재료에 해당하는 형상(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을 사용해서 구상한 대로의 만물을 실제로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구상하는 단계가 내적발전적수수작용의 단계요, 실제로 만물을 만드는 단계가 외적발전적수수작용의 단계이다.

 

이상의 설명으로 인간의 창조나 제작에는 반드시 그 전에 구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외적발전적수수작용에는 반드시 그 전에 내적발전적수수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데 이 인간의 구상 때의 수수작용(授受作用)의 원형은 하나님의 원상내의 수수작용이었다. 즉 원상(原相)內의 수수작용은 반드시 사위기대를 터로 하고서만 행해진다. 사위기대의 별명이 수수작용이요, 수수작용의 별명이 사위기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내적발전적수수작용이 반드시 외적발전적수수작용에 先行한다는 것은 내적발전적사위기대가 반드시 외적발전적사위기대에 선행(先行)해서 형성(形成)됨을 뜻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창조에 있어서는 반드시 내적발전적사위기대와 외적발전적사위기대가 연속적(連續的)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원상(原相)의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1-13과 같다. 인간의 경우의 현실적인 창조활동 때에도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가 연속적으로 형성된다. 이와 같이 현실적인 창조활동에 있어서 연속적으로 형성되는 2단계의 사위기대를 현실적인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심(疑心)이 생길는지 모른다. 즉 실제(實際)의 창조에는 반드시 구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알기 쉽게 표현하면 될 것을, 왜 내적발전적사위기대니 외적발전적사위기대니 이단구조니 하는 어려운 표현을 쓰느냐, 통일사상은 왜 쉬운 말도 어렵게만 표현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해서 답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통일사상은 천주(天宙, 영계와 지상세계)의 근본원리(根本原理)를 다루기 때문이다. 근본원리란 영계(靈界)와 지상세계(地上世界)를 막론하고 존재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근본이치이다. 이 근본이치(根本理致(原理))는 깊고 넓은 내용을 함축하면서도 그 이치를 나타내는 용어는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한 용어여야 한다. 그 예의 하나가 통일원리의 이성성상 또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이다. 이 용어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나타내는 용어일 뿐 아니라, 동물, 식물, 광물 더 나아가서 영인체와 영계의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 속성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즉 이성성상의 뜻의 내용은 대단히 깊고 넓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성성상의 용어 그대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쉽고도 상세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설명에는 때때로 예화(例話)나 비유(比喩)도 필요하다. 통일사상에서 다루는 근본원리는 오관(五官)으로 느낄 수 없는, 하나님과 영적세계(靈的世界)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예화(例話)나 비유(比喩)를 들면서 행하는 설명은, 다만 그 근본원리를 밝히는 수단에 불과하며, 근본원리 그 자체는 아니다. 근본원리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이성성상 또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이다. 마찬가지로 수수작용(授受作用), 사위기대(四位基臺), 2단구조(構造) 등도 근본원리에 관한 개념(槪念) 즉 기본개념들이어서 이 용어들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외적발전적사위기대(外的發展的四位基臺),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도 그러한 근본원리를 함축한 개념들이다. 여기서 다시 분초(分秒)를 다투면서 살아야 하는 이 바쁜 시기에, 그런 어려운 기본개념을 우리가 꼭 배워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하는 의문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 기본개념들을 바르게 파악함으로써만 현실의 여러가지 난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준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통일사상에 있어서의 기본개념의 중요성에 관해서 설명하였다.

 

     iv)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의 구성요소(構成要素)

다시 본론에 돌아와서 본(本) 소제목인 외적발전적사위기대의 설명을 계속코자 한다. 앞에서 외적발전적사위기대는 반드시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다음 단계로서 형성되기 때문에, 이러한 2단계(二段階) 과정을 현실적 창조의 2단구조(構造)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원상(原相)內에서도 동일한 창조의 2단구조가 형성된다. 위에서 본성상의 안팎에서 형성된다고 한 사위기대 즉 내적발전적사위기대 및 외적발전적사위기대가 그것이다. 이것은 원상내에서 창조때에 형성되는 사위기대이기 때문에 이것을 원상(原相)의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前述)라고 한다.

 

원상(原相)內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는 이미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소항목에서 상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설명을 약하기로 하고, 다만 그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4위치중 중심의 위치에는 목적이 세워지며, 주체의 위치에는 내적성상(內的性相)(靈的統覺: 知-情-意의 통일체)이 세워지고, 대상의 위치에는 내적형상이, 그리고 결과의 위치에는 구상이 신생체로서 세워진다는 것과, 그리고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은 생각하는 과정 즉 관념조작(觀念操作)의 과정이라는 것만을 상기(想起)시켜 둔다.

 

그런데 원상내의 외적발전적사위기대도, 4개의 위치 즉 중심, 주체, 대상, 결과로서 이루어짐은 물론인데 이때의 중심(中心)은 내적인 사위기대 때와 마찬가지로 심정을 터로 하는 창조목적이요, 주체(主體)는 여기서는 본성상(本性相)이며 대상(對象)은 본형상(本形狀)이다. 그리고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되는 결과는 신생체로서의 피조물(被造物)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4위치 즉 중심, 주체, 대상, 결과의 위치에 각각 세워지는 목적, 본성상, 본형상 및 피조물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런데 목적은 내적발전적수수작용때의 목적, 즉 창조목적과 동일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약하기로 하고 주체(主體)=본성상(本性相), 대상(對象)=본형상(本形狀), 외적수수작용, 결과=피조물(被造物) 등의 소항목을 가지고 설명하고자 한다.

 

      ㄱ) 주체(主體)=본성상(本性相)

원상내의 외적발전적사위기대는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과의 수수작용의 기대(基臺)이기 때문에 주체의 입장이 본성상임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그 본성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결과의 입장인 구상(構想)이다. 즉 목적을 중심하고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수수작용을 한 후 신생체(新生體)로서 나타난 말씀이요, 로고스요, 구상이다. 그런데 이 내적수수작용이란 생각하는 것, 즉 사고(思考)의 과정이다.

 

이러한 내적수수작용의 과정에는 前단계와 後단계의 두 단계가 있는데(前述), 전단계는 관념(觀念)조작(操作)이 진행되는 과정이어서, 이 단계에서 新관념(觀念) 즉 前구상(構想)이 형성된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영적통각에서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 그 속성인 양성-음성의 영향을 받으면서 前구상(構想)에 주입된 후, 그 前구상(構想)이 생명을 지닌 완성된 구상(構想), 즉 로고스로서 나타나게 되는데 이렇게 완성된 로고스가 바로 이성성상을 지닌 로고스이다. 그런데 구상으로서의 로고스는 비록 신생체이기는 하지만, 본성상의 내부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주체(本性相)와 대상(本形狀)의 수수작용에 있어서는 영적통각(靈的統覺)에 파지(把持; 파악이 지속)되어 주체로서 작용한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내적수수작용에 의해서 내적성상인 영적통각에서 지-정-의가 내적형상내에 형성된 신생관념(新生觀念)에 주입되었다 하더라도, 영적통각 자체는 본래 무한성을 띤 기능이기 때문에, 그것의 일부가 신생관념 속에 주입된 뒤에도 여전히 내적성상으로서의,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적 기능은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성상과 본형상간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주체로서의 본성상은 영적통각(靈的統覺)에 파지(把持)된 상태에 있는 로고스이다. 이상으로 외적발전적사위기대의 주체(主體)=본성상(本性相)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ㄴ) 대상(對象)=본형상(本形狀)

이미 원상(原相)의 내용의 부분 중 신상의 제목 하에, 형상(본형상(本形狀))의 소항목에서 설명한 것처럼, 본형상은 무한응형성(無限應形性)의 궁극적(窮極的)-질료적(質料的) 요소이다. 질료적 요소란 피조물의 유형적(有形的)要素(물질)의 근본원인을 뜻하며, 무한응형성(無限應形性)은 마치 물(水)과 같이 어떠한 형태라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

 

그런데 질료적요소는 물질의 근본원인이면서도 과학의 대상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 궁극적 원인으로서 통일사상은 이것을 前단계에너지 또는 간단히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 Pre-Energy)라고 부른다. 이 본형상에서 후술하는 바와 같이, 마치 물이 용기에 부어 넣어져서 용기의 형태를 취하듯이, 본성상의 구상(로고스)의 주형(鑄型; 영적주형)속에 부어 넣어져서 현실적인 만물로서 지음받게 된다. p.134

 

      ㄷ)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

다음은 외적수수작용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만물이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창조되었다28)는 통일원리나 통일사상의 주장이 참된 내용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외적수수작용도 사위기대를 터로 하고 행해지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주체와 대상이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합해져서 하나의 신생체(新生體) 즉 만물이 되는 것으로 설명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의 세계에는 內와 外, 上과 下, 원근(遠近), 광협(廣狹, 넓고 좁고)이 없다. 大-中-小가 없으니 무한대(無限大)와 무한소(無限小)가 같다. 또 선후(先後)가 없으니 과거(過去)-현재(現在)-미래(未來)가 없으며 영원과 순간이 동일하다.

 

따라서 시공(時空)을 초월한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러한 수수작용이 벌어지기 때문에 설명의 편의상(또는 이해의 편의상(便宜上)), 주체와 대상이 동일 공간을 중첩적(重疊的)으로 차지하면서 수수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비유컨대 인간의 영인체(주체)와 육신(대상)이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가 합해져서 하나가 된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동일한 공간을 중첩적(重疊的)으로 차지하면서 수수작용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원상내의 외적수수작용을, 동일공간을 중첩적으로 차지한 주체와 대상간의 수수작용으로 보고, 또 수수작용에 의해서 산출된 신생체(新生體)인 피조물도 역시 동일 공간을 중첩적으로 차지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논리(論理)를 전개해 보자.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외적발전적사위기대의 주체인 본성상은 영적통각(靈的統覺)에 파지(把持)된 상태에 있는, 신생체(新生體)인 로고스이며, 대상인 본형상은 무한응형성(無限應形性)을 지닌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였다. 이러한 주체와 대상이 중첩되어서 동일공간을 차지한 채 수수작용하여 신생체인 피조물(예컨대 말과 같은 동물)을 산출(産出(創造))하게 되는데, 이때 산출된 피조물도 동일한 공간을 중첩적으로 차지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으로 수수작용이 행해지는 기대의 4위치는 문자 그대로 떨어져 있는 4위가 아니라 4개의 정착물(定着物)이 함께 겹쳐 있는 하나의 위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하나의 위치에서 서로 겹쳐진 채로 목적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한 후, 그 결과물로서 피조물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수수작용의 구체적인 내용이란 무엇인가. 중첩된 상황속에서의 수수작용이란, 본형상인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가 본성상내에 형성된 구상(構想)(로고스)의 주형(鑄型(영적주형))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성상내의 내적수수작용의 첫단계에서 형성된, 치밀한 內部구조(構造)를 갖춘 신생관념(新生觀念) 즉 주형성관념(鑄型性觀念)이 다음 단계에서 심정의 충동에 의하여 생명이 부여(賦與)된 후 나타난 것이 완성된 구상이다. 따라서 이 완성된 구상은 바로 생명을 얻은 주형성관념이요 살아있는 주형이다.29)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주형(鑄型)은 초기(初期)단계에서 형성된 신생관념(新生觀念)으로서, 치밀한 내부구조를 갖춘 주형성관념이 후기(後期)단계에서 활력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활력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그리고 또 아무리 내부 구조가 치밀하다 하더라도 주형(영적주형)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에, 거푸집에 쇠(鐵)의 융액(融液)을 부어 넣어 철물을 만들 때와 같이, 이 주형성관념속에도 반드시 융액에 해당하는 본형상(本形狀)의 질료 즉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가 부어 넣어질 수 있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주형의 공간은 반드시 융액이 넣어져서 채워지기 마련이다. 본성상과 본형상 사이에 이러한 현상이 벌어질 때 그것이 바로 수수작용이다. 즉 본성상의 주형성관념내의 치밀한 공간에 본형상의 질료적 요소가 삼투(渗透)하여 채워지는 것이 바로 수수작용(授受作用)이다(이때 본형상 속에 가능성으로만 잠재하고 있던 속성(屬性)인 음성-양성(陽性-陰性)이 표면화(表面化, 겉으로 드러남)되기 시작하여 질료적 요소의 삼투(渗透, 스며듬)의 흐름에 조화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왜 이 현상이 수수작용이 되느냐 하면, 본성상(주체)은 주형의 공간을 가지고 본형상(대상)에게 질료의 삼투(渗透, 스며듬)의 기회를 제공하고, 본형상은 질료로 공간을 채움으로써 그 공간의 존재목적을 이루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약간 모형적으로 표현했지만, 이러한 작용이 동일 위치의 주체와 대상이 중첩(重疊)된 상황하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주창조에 있어서 원상내부에서 이루어진 외적발전적수수작용의 참 내용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첨가할 것은, 이 수수작용은 형(型)으로 봐서 편측의식형(片側意識型)의 수수작용이다. 왜냐하면 이 수수작용때의 주체는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체인 영적통각(靈的統覺)(鑄型性觀念을 포함)이고, 대상은 본형상 즉 질료이기 때문이다.

 

      ㄹ) 결과=피조물(被造物)

       a) 결과란 무엇인가

다음은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의 결과의 위치에 세워지는 피조물에 관해서 살펴보자. 우선 이 결과로서의 피조물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본성상과 본형상이 수수작용함으로써 형성된 신생체(新生體)이다. 이것이 원리해설(原理解說)(1957년판)에 적힌 피조세계는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이 창조원리에 의해서 형상적 또는 상징적인 실체로 전개된...... , 하나님의 실체대상이다(同上 p. 25)라는 문장중의 하나님의 실체대상(實體對象)이며,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개별진리체(個性眞理體)(同上, p. 25)이며, 주체와 대상의 이성성상의 실체적 전개에 의하여 창조된 피조물(同上 p. 24)이다.

 

그리고 또 원리강론(1966년판)에 적힌 피조물은 모두 무형(無形)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 실체로 分立된 하나님의 실체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p. 26) 라는 문장의 실체대상(實體對象)이며, 이러한 실체대상을 우리는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한다(同上)의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다. 이와 같이 통일원리(원리해설(原理解說), 원리강론)에서 말하고 있는 실체대상이니 개성진리체이니 하는 개념은 모두 피조물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 표현을 달리한 개념들이다. 실체대상은 객관적(客觀的), 물질적(物質的) 측면을 부각(浮刻)시킨 개념으로서 로고스에서와 같이 마음에만 그려진 관념적인 대상이 아니라, 3차원의 공간적 요소를 갖춘 물질적 대상이라는 뜻이며, 개성진리체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았다는 측면을 부각시키는 개념으로서 피조물은 모두 닮기의 법칙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예외없이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인 것이다.

 

       b) 닮음과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

여기서 특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 피조물(被造物)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았다고 할 때의 그 닮음의 내용이, 외적(발전적)수수작용의 관점에서 볼 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미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피조물은 본성상과 본형상이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한 결과로서 나타난 신생체(新生體)였다. 그런데 이때의 본성상은 살아 있는 주형적(鑄型性)관념(觀念)을 파지(把持)한 영적통각, 또는 영적통각에 파지된 살아 있는 주형성관념이며, 본형상은 질료적요소(質料的要素)였다. 그리고 이 살아있는 주형성관념이 바로 로고스 즉 이성성상을 지닌 로고스이다.

 

이 이성성상은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두 요소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의 내적성상은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며, 내적형상은 관념조작(觀念操作)에 의해서 형성된 신생관념(新生觀念)(주형성관념)을 뜻한다. 즉 로고스는 지정의의 기능과 신생관념(주형성관념)이 복합된 신생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최종의 신생체인 피조물속에 포함된 본성상의 부분은 내적성상에 해당하는 영적통각의 일부로서의 지정의의 기능과, 내적형상에 해당하는 신생관념(주형성관념)이었다.

 

그리고 본형상인 질료적요소는 그대로 몽땅 신생체(新生體)(被造物)에 포함되어 있다. 주형성관념의 치밀한 공간속에 본형상의 질료적요소가 삼투(渗透)하였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을 뜻한다. 이리하여 외적수수작용에 의해서 본성상의 요소와 본형상의 요소 전체가 피조물을 구성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밝혀 두고자 하는 것은 본성상과 본형상이 각각 그 속성인 양성(陽性(本陽性))과 음성(陰性(本陰性))을 함께 지닌채로 피조물을 구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의 요소 및 본양성과 본음성의 요소를 모두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본성상속에 포함된 신생관념 즉 주형성관념은 그대로가 개별상(個別相)이기도 하다. 결국 피조물은 하나님의 속성(본성상-본형상, 본양성-본음성, 그리고 개별상)을 모두 이어 받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피조물(個體)을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한다. 이것이 통일원리에 피조물을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개성진리체라고 한 말의 내용인 것이다.

 

       c) 로고스와 피조물(被造物)의 관계

다음은 로고스와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성경(聖經)에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함에 있어서 말씀으로써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1:1~3) 이 말씀이 바로 로고스였다(원리강론 1988, p. 222). 그런데 통일원리에는 로고스는 하나님의 대상이며 주체이신 하나님이 이성성상이시므로 그 대상인 로고스도 역시 이성성상이 아닐 수 없다(同上). 만일 로고스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로고스로 창조된 피조물이 또한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을 수가 없다(同上)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피조물의 이성성상은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은 것이요, 로고스의 이성성상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것임을 뜻하는 것으로서 로고스의 이성성상과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완전히 동일한 것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통일사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이성성상은 물론 본성상과 본형상이지만 로고스의 이성성상은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다. 즉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로고스의 이성성상은 일치(一致)하지 않는다. 따라서 피조물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았다는 뜻이요,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았다는 것은 로고스의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을 닮았다는 뜻이다. 그러면 만물이 닮은 로고스의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는 내적수수작용의 後期단계에서 영적통각(지(知)-정(情)-의(意)의 통일체)의 일부가 전단계에서 형성된 신생관념(新生觀念)(주형성관념)에 주입(注入)됨으로써 생겨난 완성된 구상(構想), 산 구상(構想)이었다. 따라서 로고스의 내적성상은 주형성관념속에 주입된 일부의 지정의의 기능이며 내적형상은 주형성관념 바로 그것이다.30) 이러한 내용을 지닌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바로 로고스의 이성성상이었다.

 

통일원리에서 피조물의 이성성상이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았다.고 할 때의 로고스의 이성성상이란 바로 이러한 내용의 이성성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공간적-삼차원적 실체(三次元的 實體)인 피조물의 모습 그대로가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는 산 구상이며 활력(活力)을 띤 관념(觀念)(주형성관념)에 불과했다.

 

비유컨대 움직이는 영상과 같은 것이며 꿈속에서 만난 사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모두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았다는 것은, 이같은 살아 있는 영상을 닮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꿈속의 사람은 다른 모든 면에서 현실의 인간과 같지만 물질적(物質的)인 체(體(肉體))를 갖추지 않았다는 점에서만은 다른 것이다. 다른 만물도 마찬가지이다. 이 물질적(物質的) 체(體)까지를 갖춘 만물이 되려면, 만물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게 될 것인가? 그것은 창조 때의 외적수수작용에 의하여 본성상인 완성된 구상(構想) 즉 살아 있는 주형(鑄型(觀念))의 그 치밀한 공간속으로 본형상인 질료적요소(質料的要素(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가 삼투함으로써(즉 스며듦으로써) 닮게 된다. 이러한 수수작용을 통하여 움직이는 영상(映像)이 물질적인 체(體)를 갖추게 되어서 현실적인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이때의 만물이 바로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피조물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로고스의 이성성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가 밝혀졌을 것이며, 아울러 피조물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았다고 할 때의 닮음과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았다고 할 때의 닮음이 다르다는 것도 명백해졌으리라 믿는다. 다음은 수수작용과 관련된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에 관하여 살펴보자.

 

 3.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

 

  1)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란 무엇인가? (統一思想要綱 1994, p.141)

 

위에서 수수작용은 사위기대를 터로 하고 행해진다는 것을 밝혔다. 즉 수수작용이 벌어지려면 반드시 중심(中心)과 주체(主體)와 대상(對象) 및 결과의 4위치가 세워져야 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수수작용의 현상을 공간적 측면에서 파악(把握)한 개념이 사위기대(四位基臺)이다. 모든 현상은 공간성과 시간성을 동시에 지닌다. 수수작용의 현상도 시간적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수수작용의 과정을 시간적으로 파악한 개념이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다. 즉 수수작용에 있어서 사위기대가 정해지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다룬 개념이 동(同) 작용이다. 즉 먼저 중심이 정해지고 그 다음에 주체와 대상이 정해지고 맨 나중에 결과의 위치가 정해진다는 관점에서 본 수수작용이 바로 정분합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수수작용을 3단계 과정에서 파악한 개념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그림 1-14와 같다.

   

 

통일원리(원리강론)에 사위기대는 정분합작용에 의한 하나님, 부부, 자녀의 삼단계로써 완성되므로 삼단계 원칙의 근본이 된다(1987, p. 43)고 한 것도 사위기대는 수수작용의 공간적 파악이요, 정분합작용은 그것의 시간적 파악임을 보여 주고 있다.31) 따라서 이 작용의 내용은 수수작용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즉 심정(心情)을 터로 한 목적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이 원만하고 조화로운 상호작용에 의해서 합성체(合性體) 또는 신생체(新生體)를 이룬다고 하는 내용은 수수작용에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정분합작용의 종류도 수수작용의 종류와 일치한다. 즉 내적자동적정분합작용, 외적자동적정분합작용, 내적발전적정분합작용, 외적발전적정분합작용 등이 그것이다. p.142

 

  2) 正分合과 正反合

 

그런데 시간성(時間性)을 띤 이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의 개념은 특히 공산주의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과 비교된다는 점에서 의의(意義)가 있다 하겠다. 공산주의의 철학은 유물변증법으로서 이것은 자연의 발전법칙(發展法則)에 관한 이론이다. 그 내용은 모순(矛盾)의 법칙, 양(量)의 질(質)에의 전화(轉化)의 법칙,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의 법칙 등의 3법칙으로서 이것은 헤겔의 관념변증법에서 변증법을 따다가 유물론(唯物論)과 결부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헤겔은 그밖에 이같은 변증법이 진행하는 형식도 아울러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정-반-합(正-反-合), 또는 정립-반정립-종합(定立-反定立-綜合), 또는 긍정-부정-부정의 부정(긍정(肯定)-否定-否定의 否定)의 3단계형식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헤겔의 변증법의 형식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자연, 역사 등의 발전을 설명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즉 사물이 발전하려면, 그 사물(事物(肯定 또는 正))은 반드시 그 내부에 자체를 부정하는 요소(反)를 지니게 되어서 양자가 대립하게 되는데(이 상태를 모순(矛盾)이라 함), 이 대립(모순)은 다시 否定되어서(부정의 부정) 한층 높은 단계로 지양(止揚; Aufheben))한다(合)고 설명한다. 이것이 정-반-합(正-反-合) 또는 긍정-부정-부정의 부정(肯定-否定-否定의 否定)(혹은 定立-反定立-綜合)의, 삼단계의 변증법적 진행형식이다. 여기서 지양(止揚)은 사물이 부정되었다가 재차 부정될 때, 그 사물의 긍정적 요소는 보존되어서 새로운 단계로 높여지는 것을 말한다. 계란에서 병아리가 부화하는 과정이 그 적절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란(受精卵)이 병아리가 되려면 정(正) 또는 긍정(肯定)으로서의 계란은 그 내부에 그 자체를 부정하는 요소(반 또는 부정)인 배자를 지니게 되며, 이 배자가 커감에 따라서 양자의 대립(모순(矛盾))이 커가다가, 드디어 이 모순이 지양(止揚)되어서 계란 껍질은 다시 부정되고(부정의 부정), 긍정적 요소인 유황(卵黃, 노른자), 유백(卵白, 흰자) 등은 양분으로 배자에 흡수된 후(保存, 止揚) 병아리가 되어서 부화한다(合).

 

이 정-반-합(正-反-合)의 형식을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발전의 설명에도 적용한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로 발전하는 과정의 설명에 정-반-합(正-反-合)의 형식을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자본주의(正)는 반드시 그 내부에 그 자체를 부정하는 요소인 프롤레타리아계급(反)을 지니게 된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성장에 따라서 계급대립(모순)이 격화되며, 드디어 자본주의체제의 외피는 터지고(부정의 부정), 자본주의의 긍정적 성과(경제성장, 기술발전 등)는 그대로 보존되면서 한층 더 높은 단계인 사회주의에로 이행한다(合)는 것이다.

 

  3) 정반합(正反合)이론의 비판(批判)

 

그러면 이제부터 정-반-합(正-反-合)의 3단계 형식을 비판하여 그 옳고 그름을 밝히고자 한다. 그 옳고 그름의 기준(基準)은 자연의 발전이나 사회발전의 실제의 사실이 이 3단계의 形式과 일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변증법을 오래도록 과학이라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변증법의 진행형식(進行形式)도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는 과학적 형식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또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현실문제(現實問題(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병폐의 제거의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출현한 철학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유물변증법도 그리고 변증법의 진행형식의 이론도 모두 객관적(客觀的(과학적))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또 사회의 현실문제 해결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유물변증법도, 변증법의 진행형식의 이론도 모두 잘못된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먼저 계란이 부화되는 실제의 경우를 분석하면서 이 3단계형식을 비판하고자 한다. 첫째로, 계란내의 배자는 계란의 발전을 위하여 나중에 부정적 요소로서 발생한 것이 아니며, 계란 껍질이나 난백(卵白; 흰자), 난황(卵黃; 노른자)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계란의 일부였다. 따라서 배자는, 자신도 그 一部인 계란을 부정할 수가 없다. 만일 배자가 계란을 부정하려면, 처음부터가 아니고 중간에 계란속에서 대립물로 생겨난 것이어야 한다. 이래야만 정-반-합(正-反-合)의 본뜻에 부합된다. 그러나 배자는 실제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계란의 일부였던 것이다.

 

둘째는 난백(卵白), 난황(卵黃) 등이 배자의 양분으로서 보존되는 것은 분명히 긍정(肯定)임에도 불구하고 부정(否定)으로 다룬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이며, 셋째로, 계란 껍질이 부화되는 순간(터진 뒤에) 즉 부정된 뒤에 배자가 새로운 단계인 병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다 된 병아리가(즉 새로운 단계의 병아리가) 그 자신의 부리로 쪼아서 껍질을 부수고 나오는 것이다. 이것으로 계란의 부화의 실제(實際)의 경우가 변증법적(辨證法的) 발전의 3단계형식(形式)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사회발전에 적용한 3단계발전이론(三段階發展理論)을 비판하고자 한다. 자본주의(正)가 프롤레타리아계급(反)의 대립?모순(혁명)에 의해서 한층 더 높은 단계인 사회주의로 이행(移行)되며(合), 이때 자본주의의 성과가 그대로 보존된다고 한 것도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이 발전형식(發展形式)이 옳은 형식이라면 첫째로,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들이 벌써 사회주의사회로 이행되었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공식이 적용될 수 없는 후진국(後進國)에 사회주의가 세워졌으며 둘째로, 그 후진국에 사회주의가 세워짐에 있어서 그에 앞서 약간이나마 싹트고 있던 자본주의의 성과가 보존은 커녕 도리어 훼상(毁傷)을 입게 되어 경제가 후퇴(後退)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레닌이 혁명후 신경제정책(新經濟政策)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으며, 덩샤오핑(鄧小平)이 문화혁명후(革命後) 중국경제의 파탄을 자인(自認, 스스로 인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변증법적 진행의 삼단계형식을 사회발전에 적용한 이론도 실제의 역사적사실과 상치(相馳, 서로 맞지 아니함)됨을 알게 된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는 물론, 자본주의국가들보다 한 단계 더 앞서 있어야 했던 사회주의 종주국(宗主國)인 소련마저도, 경제적 파탄이 계속되다가 드디어 붕괴(崩壞)되고 말았다. 이 사실은 유물변증법의 삼단계발전형식(發展形式)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자연현상과도 맞지 않고,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는 유물변증법의 正-反-合의 발전형식이론(發展形式理論)은 현실문제 해결에 완전히 실패(失敗)하고 만 것이다.

 

  4) 정반합(正反合)이론과 현실문제 해결의 실패(失敗)

 

그러면 그 정-반-합(正-反-合)의 이론이 왜 현실문제의 해결에 실패하였는가? 그 원인을 분석해 보자. 그 첫째의 원인은 삼단계형식에 목적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적없는 발전은 예정된 방향이 없기 때문에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계란의 경우 이미 병아리라고 하는 목표(目標(目的))가 확정되어 있으며, 적당한 온도(溫度)와 습도만 가해지면 그 목표의 방향대로 발전운동이 벌어져서 드디어 그 목표에 도달한다. 목표(목적)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는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발전에 있어서도 목적없이 정(正)과 반(反)의 대립뿐이라면 거기에 설사 발전운동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자본가의 목적은 이윤(利潤)을 극대화(極大化)시키는 것이고 노동자의 목적은 임금인상(임금(賃金)引上)과 처우개선(處遇改善) 등을 실현하는 것이며, 극히 적은 일부 직업혁명가(職業革命家)들만이 사회주의사회를 목표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전체를 볼 때, 그리고 사회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양계급(兩階級)의 대립은 무목적(無목적)의 대립이 되어 버려서 삼단계형식에 따르는 새로운 단계에의 도달(到達)은 처음부터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패의 둘째 원인은 정-반-합(正-反-合)에 있어서 정(正)과 반(反)의 관계가 대립, 모순, 투쟁의 관계가 됨으로써 협조, 화합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발전은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과 인간과의 원만한 협조관계(協助關係)에서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발전의 법칙(辨證法)과 형식(정반합(正反合))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대립, 모순, 투쟁의 관계로 규정해 버렸기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는 으레 모순(矛盾)의 관계 및 적대의 관계인 것처럼 상식화되어 버려서, 화합(和合)이나 협조(協助)는 도리어 비정상적인 것처럼, 또는 이례적(異例的)인 것처럼 느껴지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사회환경속에서 어떻게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만일 그 사회내에 협조에 의해서만 발전이 이루어 진다는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상적 이질감(異質感) 때문에 그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그 사회에 항거할 것이다.

 

발전이 반드시 조화로운 협조관계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대로 자연의 발전에도 적용되는 명제(命題)이다. 예컨대 위에 예거(例擧)한 계란의 부화의 경우, 배자-흰자-노른자, 껍질 등이 모두 병아리를 산출(産出)시킨다는 공동목적하에 서로 협조적으로 상호작용한 터 위에서 비로소 병아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계의 발전이나 사회의 발전은 반드시 공동의 목적 또는 목표를 중심하고 여러 요소들 또는 개체(個體)들간에 원만한 협조와 협력의 관계가 성립된 뒤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마르크스주의의 정-반-합(正-反-合)의 이론에서는 이러한 목적이나 협조관계가 도출(導出)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그러한 이론은 거짓이 되었고 현실문제 해결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독자는 이 정-반-합(正-反-合)의 대안이 바로 정반합작용(正分合作用)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을 것이다. 正-分-合 작용의 이론은 바로 수수작용의 이론이요, 사위기대의 이론이기 때문에 이 정-분-합 작용의 3단계과정에 의해서만 목적 중심의 원만한 상호협조관계(相互協助關係)가 성립되며 그 결과로서 합(合)인 신생체(新生體)가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것이 바로 발전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반-합의 3단계와 정-분-합의 3단계가 결코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3단계라는 점만 같을 뿐 정의 개념도 양자가 다르고, 반과 분도 다르고, 합의 개념도 양자가 다르다. 정반합의 정은 사물을 뜻하나, 정분합의 정은 목적 또는 심정을 뜻한다. 또 정반합의 반은 정인 사물에 대립하는 부정적요소(否定的要素)를 뜻하지만, 정분합(正分合)의 분은 분립물 또는 상대물이라는 뜻으로서 상대적 관계에 있는 주체와 대상을 말한다. 그리고 정반합의 합은 대립물이 대립을 지양한 후 하나로 종합되는 것을 뜻하나, 정분합의 합은 분의 단계의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개체(個體) 즉 신생체(新生體)가 나타남을 뜻한다. 이리하여 수수작용(발전적수수작용)을 시간적으로 파악한 개념인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 발전에 관한 현실문제 해결에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의 정-반-합(正-反-合)의 유일한 대안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으로 원상구조(原相構造)의 주요내용을 전부 마친다. 그러나 여기서 마지막으로 원상구조에 관련된 사항 한 두가지를 더 첨가하고자 한다. 그것은 원상구조(原相構造)의 통일성과 창조이상이다. 먼저 원상구조의 통일성에 관하여 살펴보자.

 

 4. 원상구조(原相構造)의 통일성(統一性)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원상구조란 신상의, 특히 성상과 형상의 상호관계였으며, 이 관계가 밝혀짐으로써 많은 현실문제들의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현실적인 난문제(難問題)들은 관계상의 문제들이기 때문이며, 관계의 바른 기준을 일탈함으로써 야기된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원상구조가 밝혀짐으로써 그 관계의 본연의 기준이 명백해졌기 때문에 모든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또 항구적(恒久的)으로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원상구조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첨가하고 싶은 것은, 신상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왜 구조(構造)라는 개념이 필요한가 하는 것과, 구조라는 면에서 본 원상의 참모습은 어떠한가에 관한 설명이다.

 

본래 구조(構造)라는 용어는 일정한 재료로써 만들어진 구성물, 예컨대 건축이나 기계 등에 대하여 그 재료의 상호관계를 나타낼 때에 흔히 사용된다. 특히 구조는 유형물(有形物)의 구성을 분석하고 연구할 때 자주 쓰인다. 즉 인체구조, 사회구조, 경제구조, 분자구조, 원자구조 등이 그 예로서, 사물을 분석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구조의 개념이 필요할 때가 많다. 그러한 측면을 확대적용하면 의식(意識)이나 정신(精神) 등 무형적 존재를 분석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의식(意識)구조(構造)니 정신(精神)구조(構造)니 하는 용어가 쓰이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무형인 하나님의 하나하나의 속성의 관계를 알아보는데 구조의 개념을 사용한 것이 바로 그러한 동기(動機)에서였던 것이다. 즉 구조의 개념을 활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속성, 특히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의 상세한 내용을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성상과 형상의 상대적 관계가 상술한 바와 같이 종류가 여럿이 있다 하더라도, 원상의 세계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세계이므로 구조(構造)개념(槪念) 또는 시공관념(時空觀念)으로 유추(類推)할 때의 원상의 참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통일성(統一性)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공간이 없기 때문에 위치가 없으며, 따라서 전후와 좌우가 없고, 상하가 없으며, 내와 외가 없고, 넓고 좁음이 없으며, 원근이 없고, 삼각형, 사각형 등의 공간도 없다. 무한대(無限大)와 무한소(無限小)가 같은 세계이며, 모든 공간이 한 점에 모두 중첩되어 있는 다중첩(多重疊)의 세계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하, 전후, 좌우, 내외가 한없이 넓혀지고 있는 세계이다.

 

또 원상의 세계는 시간이 없는 세계이다. 따라서 시간관념으로 유추(類推)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 현순간에 합쳐져 있다. 마치 영화 필름의 두루마리(필름말이) 속에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 있는 것과 같다. 즉 시간도 현순간속에 합쳐져 있다. 즉 순간속에 영원이 있다. 그러면서 순간 시간이 영원으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순간과 영원이 같다. 이것은 원상의 세계가 하나의 상태(성상-형상, 양성-음성이 통일된 상태)의 순수지속(純粹持續)임을 뜻한다. 즉 상태(狀態)의 순수지속(純粹持續)이 원상세계의 시간이다.

 

이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원상의 세계는 순수한 통일체(統一體)이다. 공간과 시간 뿐만아니라 그 외의 모든 현상(墮落과 관련된 비원리적인 현상을 제외하고)의 원인이 중첩적(重疊的)으로 한 점에 통일되어 있는 세계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시간, 공간을 위시한 우주 내의 모든 현상은 이 통일된 한점(一點)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다. 마치 한점(一點)에서 상하 전후 좌우로 무한히 긴 직선을 무수히 그을 수 있는 것처럼 이 통일성에서부터 시공의 세계가 상하 전후 좌우로 무한히 뻗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가 아무리 광대(廣大) 무변(無邊)하고, 우주의 현상(現象)과 우주의 운동이 아무리 복잡한 것 같다 하더라도, 그 시공과 그 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기본원리는 이 한점(一點) 즉 통일성에 있으니 그것이 곧 통일의 원리 즉 수수작용의 원리, 또는 사랑의 원리이다. 예컨대 수수작용의 터전인 사위기대(四位基臺)라는 한점(一點)(원점)에서 공간이 전개되어 나왔고, 정분합작용이라는 일점에서 시간이 전개되어 나왔던 것이다.

 

 5. 창조이상(創造理想)

 

  1) 창조이상(創造理想)이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원상구조와 관련(關聯)된 사항으로서 창조이상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창조이상이 원상구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사위기대의 중심인 창조목적과 직접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상(理想)이란 인간이 희망하는 바, 또는 소원하는 바가 완전히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 인간이 왜 희망하고 소원하는가? 기쁘기 위해서이다. 영원한 기쁨을 얻기 위해서이다. 기쁨은 어떤 때에 오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되었을 때에 온다. 왜냐하면 참 기쁨의 터전은 심정의 충동성, 사랑의 충동성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쁨에 관한 통일원리의 기록을 몇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통일원리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어떤 때에 오는가 하는데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이처럼 피조물(被造物)이 선(善)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위함이었다(원리강론, 1987, p. 51), 창조목적은 기쁨에 있으며, 기쁨은 욕망을 채울 때 느껴지는(것이다)(同上 p. 97), 자기의 성상과 형상대로 전개된 대상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自體의 성상-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때 비로소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同上 pp. 52~53),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3대축복(三大祝福)의 말씀을 이루어 천국을 이룩함으로써 선(善)의 목적을 완성한 것을 보시고 기쁨을 누리시려는데 있었던 것이다(同上 p. 52) 등이 그것이다.

 

이상의 뜻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기쁨을 얻는데 있는데, 그 기쁨은 피조물이 선(善)의 대상이 될 때, 욕망이 채워질 때, 대상이 자신을 닮았을 때, 그리고 선의 목적을 완성했을 때에 느껴진다. 이것을 다시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기쁨은 첫째로 피조물이 선의 대상이 되어서 하나님을 닮음으로써 하나님의 욕망이 충족될 때, 둘째로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사이에 서로 상보적(相補的;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성립될 때 온다는 말이 된다. 여기의 욕망이 충족된다는 말은, 희망이 이뤄지고 소원이 성취됨을 뜻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이상이 실현됨을 뜻한다.

 

그리고 선(善)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사랑의 대상이 됨을 뜻한다. 선의 터전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는다는 말은 심정을 중심한 하나님의 성상-형상의 조화로운 수수작용의 모습을 닮는다는 말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자가 됨을 뜻한다. 원리강론의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랑으로 인하여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1987, p. 83)는 기록도 이것을 뜻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이상이 무엇인가가 명백해진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할때에 뜻(希望)하였던 바가 완전히 실현된 상태,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미래에 하나님을 닮아난 인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인 것이다.

 

  2) 창조(創造)목적과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차이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創造)목적과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차이를 밝히고자 한다. 창조목적은 통일원리에 적힌 대로 기쁨을 얻는데 있었다. 그런데 기쁨은 욕망이 충족될 때에 온다고 되어 있다. 욕망의 충족은 요컨대 희망(希望)이 이루어짐이요, 소원이 성취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소원의 성취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실현(實現)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욕망의 충족(充足)이나 하나님의 기쁨도 창조이상이 실현되었을 때에 이루어진다는 결론이 된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창조이상의 실현에 있었다. 즉 창조이상을 실현(實現)하는 것이 바로 창조목적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통일원리의 기록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즉 '이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졌더라면 죄의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이상세계가 이루어졌을 것이니'('원리강론' 1987, p. 56)의 문장이 그것이다.

 

여기서 참고로 인간의 창조목적과 만물의 창조목적의 차이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인간을 포함해서 만물전체를 창조한 목적은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그 피조물을 보시고 기뻐하시려는데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그러나 직접적인 기쁨으로는 그리고 자극적이고 아기자기한 기쁨은 인간에게서만 느끼게 되어 있었으며, 만물에서도 큰 기쁨을 느끼시지만 그 기쁨은 인간에서처럼 자극적인 것은 못되며 그것마저도 인간이 창조되어 완성한 뒤에야 인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끼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적 실체대상(實體對象)이며, 만물은 하나님의 상징적(象徵的) 실체대상(實體對象)이기 때문이다('원리강론' 1987, p. 55). 이 말은 만물은 인간의 직접적인 기쁨의 대상으로 지으셨음을 뜻한다. 통일원리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즉 만물세계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성상과 형상을 실체로 전개해 놓은 그 대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만물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게 된다(원리강론 1987, p. 55)가 그것이다.

 

그런데 통일원리(統一原理)에서는 만물이 창조목적을 가졌다고 할 때, 그 창조목적은 마치 개별상이 만물(萬物, 자연)(個體)에 따라서 다르듯이 개체마다 다른 것으로 느껴지는데 통일원리는 여기에 관한 언급이 없다. 예컨대 꽃의 창조목적과 새의 창조목적은 똑같지는 않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개별적(個別的)인 창조목적도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밝힐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즉 꽃의 개별적인 창조목적은 꽃의 색(色)의 아름다움으로 시각(視覺)을 통해서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며, 새의 창조목적은 새의 소리의 아름다움으로 청각(聽覺)을 통해서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지만, 인간에게 기쁨을 준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 같기 때문에, 그 공통점만을 만물의 창조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3) 창조(創造)목적과 창조이상(創造理想)의 개념(槪念)은 다르다.

 

지금까지 창조목적에 관해서 잠깐 알아보았는데, 여기서 원리강론에서는 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의 용어가 본래의 뜻대로 쓰인 것 외에 피조목적, 창조이상의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창조목적의 본래의 뜻은 위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이 피조물을 보시고 기뻐하시려고 한 것이었다. 즉 창조목적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세운 목적인 동시에 창조할 때에 세운 목적이었다. 그런데 원리강론에는 이 창조목적이 피조목적(被造目的)의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창조(創造)목적을 완성(完成)한 인간(1987, p. 146, p. 215)이 그것인데 이것은 피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뜻이다. 왜냐하면 창조목적은 창조자(하나님)의 목적으로서 하나님이 기쁨을 느끼시는 것이고, 피조목적은 인간이 기쁨을 돌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인간이 시계를 제작한 목적은 시간을 알고자 함에 있다. 이때 제조된 시계는 인간에게 시간을 알려주게 되어있다. 이것은 시계의 입장에서 보면 피조목적이다. 제조목적과 피조목적은 전연 다르다. 마찬가지로 창조목적과 피조목적이 다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쁨을 느끼는 것(창조목적)이 아니라 기쁨을 돌려드리는 것(피조목적)이다. 이 사실은 다음의 기록 즉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지 못하였다(1987, p. 201)의 창조목적과 비교(比較)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여기의 창조목적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쁨을 느끼는 일을 뜻하는 것으로 앞서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에서의 창조목적과는 그 의미가 다름을 알게된다.

 

다음은 창조목적이 창조이상의 뜻으로도 사용된 예(例)를 들어 보자. 타락 인간으로 하여금 믿음의 기대(基臺)를 세우게 하고,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게 함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는,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1987, pp. 235~236). 이 인용문(引用文)중의 창조목적은 기쁨을 느끼시려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조금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창조이상의 뜻으로 즉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狀態)로 해석하는 것이 도리어 무난(無難)하다. 다음의 문장과 비교해보면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해 진다. 즉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실 때에는 반드시 지상에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 되어, 다시는 그 이상(理想)이 지상에서 거두어 지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1987, p. 260)라는 문장에 있는 창조이상(創造理想)이나 전문(前文) 중의 창조목적의 완성이나, 그 뜻하는 바의 내용은 같은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후자(後者)인 창조이상을 창조목적의 뜻으로 해석(解釋)해서는 어색하며, 차라리 전자(前者)의 창조목적을 창조이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함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이런 예는 이 외에도 있다.

 

이와 같이 원리강론에는 창조목적이라는 용어가 때때로 피조목적의 뜻으로나 창조이상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통일사상에서는 이들의 개념을 명확히 한 후 구별해서 쓰고 있다. 단(但) 구별이 필요 없을 때에는, 예컨대 창조목적으로 해도 좋고 피조목적으로 해도 좋을 때, 또는 때에 따라서 인위적(人爲的)인 목적을 써야 할 때에는 그냥 목적으로만 표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창조이상과 창조목적의 개념의 차이를 밝혔는데 요컨대 창조이상은 이미 설정(設定)된 목표가 달성되어 있을 때의 상태(狀態)를 말하며 창조목적은 그 설정된 목표만을 말한다. 창조이상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미래에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난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이며, 창조목적은 대상(對象)을 보고 기뻐하려는 것으로서, 앞으로 도달(到達)코자 하는 목표이다. 문법상의 시제(時制)로 표현하면 창조목적은 미래형(未來形)이요, 창조이상은 미래완료형(未來完了形)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창조이상은 창조목적이 달성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창조목적은 창조이상의 실현(實現)을 통해서 달성된다.

 

  4) 창조이상(創造理想)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이다.

 

그러면 창조이상의 내용인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狀態)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그것은 이상인간(理想人間), 이상가정(理想家庭), 이상사회(理想社會), 이상세계(理想世界)가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이상인간이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성상-형상의 중화체를 닮은 이상적 남자와 이상적 여자를 말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만인과 만물에게 베풀 줄 아는 남자와 여자, 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실 줄 아는 남자와 여자를 말한다.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이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게 된(마태 5:48) 인간이며,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이며 전피조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에…… 천주적(天宙的)인 가치의 존재인 것이다.('원리강론 1987, p. 215).

 

이러한 남녀가 결합해서 하나님의 양성과 음성의 중화체를 닮은 부부를 이룬 것이 이상가정(理想家庭)이다. 이러한 가정은 그 내부에 사랑이 넘칠 뿐 아니라 이웃, 사회, 국가 더 나아가서 세계를 사랑하고, 만물까지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참 부모(父母)로 모시는 가정이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상가정이 모여서 사회를 이룰 때 그 사회 또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회가 되어서, 내부(內部)가 사랑에 넘칠 뿐 아니라 외적으로 다른 사회와 사랑으로써 화합(和合)하고, 하나님을 그 사회의 구심점(求心點)으로 참부모로 모시게 된다. 이것이 이상사회이다. 다음에 이상인간이 모여서 세계를 이룰 때 그 세계 또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세계가 되어서 온 인류가 하나님을 인류의 참부모로 모시고, 서로 서로가 한 부모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의 관계를 맺고 사랑이 넘치는 영원한 평화와 번영과 복된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상세계로서 역사 개시 이래 수많은 성현(聖賢)들, 의인(義人)들 철인(哲人)들이 꿈꾸었던 이상향(理想鄕)이다. 그런데 사랑은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이상사회, 이상세계는 가치의 사회요, 가치의 세계로서 진실생활(眞實生活), 윤리생활(倫理生活), 예술생활(藝術生活)의 3대 생활영역을 기반으로 한 통일세계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경제, 정치, 종교(倫理)에서 실천되는 공생공영공의주의(共生共榮共義主義) 사회이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이다. 그리하여 창조이상이란 이와 같은 이상인간, 이상가정, 이상사회, 이상세계가 미래에 실현된 상태(狀態)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상태가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 즉 창조이상이 실제로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32)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다시 말해서 영원한 기쁨을 얻고자 하셨던 당초의 소원이 달성되게 된다.

 

이것으로 창조이상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아울러 원상구조(原相構造)의 항목 전부를 마친다. 끝으로 종래의 본체론과 통일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종래의 몇 가지 본체론(本體論)(통일사상의 원상론에 해당)의 요점을 간단히 소개하여 그것이 현실문제 해결에 어떻게 실패하였는가를 촌평식(寸評式)으로 예시(例示)하고자 한다. 통일사상이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된다고 주장한 이유가 보다 더 명확히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p.158

 

            三. 종래의 본체론(本體論)과 통일사상

 

본체론(本體論)은 하나님 또는 우주의 근원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관한 이론으로서 일반적으로 사상체계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현실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도 대개 본체론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몇가지 종래의 본체론(本體論)의 요점을 간단히 소개(紹介)하면서 그것이 현실문제에 어떻게 연관되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1) 아우구스티누스 및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관(神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정신(精神)으로 보고, 그 하나님이 (無)에서 질료를 만들어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形相)과 질료(質料)의 원리를 이어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질료를 가지지 않는 순수형상(純粹形相)중에서 최고의 것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하나님은 세계를 무(無)에서 창조하였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현실문제에 어떻게 연관(聯關)되어 있는가. 이 신관(神觀)은 정신을 근원적인 것으로, 물질을 2차적(二次的)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 신관(神觀)에서 물질적인 현실세계를 2차적(二次的)인 것으로 경시(輕視)하고 정신의 세계, 영적인 세계만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나타나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그리하여 사후의 세계에서의 구원(救援)만을 중요시하는 구원관이 오래도록 기독교를 지배해 왔다. 그런데 현실 생활에 있어서 물질을 무시하고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성도들의 생활은 신앙상으로는 물질생활을 경시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물질생활을 추구(追求)하지 않을 수 없는 상호모순(相互矛盾)의 생활(生活)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의 신관(神觀)을 가지고서는, 지상의 현실문제의 해결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지상(地上)의 문제는 대부분이 물질문제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관이 현실문제의 해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원인은, 첫째가 하나님을 정신으로만 보고 물질의 근원(根源)을 무(無)라고 본 데 있었고, 둘째로 창조의 동기와 목적이 불분명(不分明)한데 있었던 것이다.

 

  2) 이기설(理氣說)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있어서 주렴계(周濂溪; 1017~1073)는 우주의 근원을 태극(太極)이라 했고 장횡거(張橫渠; 1020~1077)는 태허(太虛)라고 했다. 이것들은 모두 음양(陰陽)의 통일체로서의 기(氣)를 말한 것이다. (氣)란 질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유물론(唯物論)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정이천(程伊川; 1033~1107)에 의해서 만물은 모두 이(理)와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이기설(理氣說)이 주창되었으며 나중에 주자(朱子(1130~1200))에 의하여 대성(大成)되었다. 이(理)란 현상의 배후에 있는 무형의 본체를 뜻하고 기(氣)는 질료를 뜻하였다. 주자는 이(理)와 기(氣) 중에서 이(理)를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이(理)는 천지(天地)의 법칙(法則)일 뿐만 아니라 인간내에 있는 법칙이기도 하다고 설파하였다. 즉 천지(天地)가 따르고 있는 법칙과 인간사회의 윤리법칙은 동일한 이(理)의 표현이라고 본 것이다.

 

이같은 사상에 근거하여 현실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생활의 方向은 천지의 법칙을 맞추기 위한 조화(調和)의 유지에 치중하게 되었고 사회적인 윤리에 입각한 질서 유지에 편중하게 되었다. 또 모든 것을 법칙에 맡긴 나머지 자연이나 사회의 변화나 혼란에 대해서는 방관적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생겨났으며 자연을 지배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려는 창조적, 주관(主管)的인 생활방식 즉 능동적인 개혁(改革)의 방식은 경시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기설도 현실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이 실패의 근본원인은 태극(太極), 이기(理氣) 등에서 왜 만물이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그 동기와 목적이 밝혀지지 않은 데 있는 것이다.

 

  3) 헤겔의 절대정신(絶對精神)

 

헤겔(G.W.F. Hegel, 1770~1831)에 의하면, 우주의 근원은 절대정신으로서의 신(神)이다. 신(神)은 절대정신이면서 동시에 로고스이며 개념이었다. 이 개념(로고스)이 모순을 매개로 하면서 정-반-합(正-反-合)의 삼단계의 변증법적 발전형식에 따라서 자기발전(자기전개)해 간다고 헤겔은 생각했다. 개념은 자기발전하여 이념의 단계에까지 발전한 후 자기를 외부로 소외시켜서(부정) 자연으로 나타난다. 그 자연속에서 이념은 변증법적 발전을 통하여 드디어 인간으로 나타나는데, 이 인간을 통하여 이념이 자신을 회복(回復)하고, 그 후 여러 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절대정신으로서 자기를 실현한다. 즉 처음 출발했던 자기자신(절대정신)으로 복귀(復歸)한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개념(로고스)의 자기실현의 과정이다.

 

그리고 역사가 이성국가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자유가 최고도로 실현되며 인간사회가 가장 합리적인 모습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헤겔 철학에 따르면 세계와 역사는 로고스의 자기실현의 과정이기 때문에, 인간사회는 이 변증법적 발전형식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합리적인 모습이 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이같은 방식에 따라서 프러시아에 이성국가가 실현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는 비합리적인 현실을 필연의 법칙에 맡기고 방관만 해도 좋다고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또 자연을 이념의 타재형식(他在形式)으로 본 그의 자연관은 일종의 범신론(汎神論)33)이 되어서, 현실문제의 해결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쉽게 무신론적인 휴머니즘이나 유물론으로 전환(轉換)할 수 있는 소지(素地)를 갖고 있었으며, 모순을 발전의 계기로 봄으로써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투쟁이론을 발생시키는 소지도 지니고 있었다. 즉 헤겔 철학은 프러시아사회의 현실문제 해결에 실패하였으며, 도리어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무신론철학을 출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것은 그가 신(神)을 로고스로 보고, 창조를 변증법에 의한 자기 발전으로 잘못 본 때문이었다. p.161

 

  4) 쇼펜하우어의 맹(盲)목적의지(意志)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는 헤겔의 합리주의(合理主義와 理性主義)에 반대하여, 세계의 본질은 비합리적인 것으로서 아무 목적도 없이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의지라 하고, 이것을 맹(盲)목적인 삶에의 의지(意志)(Blinder Wille zum Laben)라고 불렀다. 인간은 이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서 좌우되면서 오로지 외곬으로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은 항상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만족과 행복은 한 순간의 경험(經驗)에 불과할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불만과 고통뿐이며, 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고통의 세계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사상이 염세주의(厭世主義; pessimism)였다. 그 대신 그는 예술적 관조(觀照)나 종교적 금욕생활(禁慾生活)에 의해서 고뇌(苦惱)의 세계로부터의 구원을 시도해 보았으나, 그것은 현실문제의 해결은 커녕 오히려 현실로부터의 도피(逃避)의 이론이 되고 말았다. 쇼펜하우어가 현실문제 해결에 실패한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섭리의 참 내용을 몰랐기 때문이요, 둘째로 이 지상세계가 악(惡)(사탄)이 지배하는 세계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5) 니체의 권력의지(權力意志)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본질을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라고 하여, 삶에 대하여 비관적태도(悲觀的態度)를 취한 데 대하여 니체(F. Nietzsche, 1848~1900)는 세계의 본질을 권력의지(權力意志; Wille zur Macht)라고 하여 철저(徹底)한 현실 긍정의 태도를 취했다. 니체에 의하면 세계의 본질은 맹목적인 의지가 아니라 도리어 강자(强者)가 되고 싶고, 지배력을 갖고 싶어하는 강력한 의지라고 했다. 이것이 그의 권력의지인데, 그는 권력의지를 체현(體現)한 이상상으로서 초인(超人)을 세워서, 인간은 초인을 목표로 삼고 生의 고통을 참으면서 어떠한 운명에도 견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신(神)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다. 기독교의 도덕(道德)을 강자를 동경하는 노예도덕으로 보고 삶의 본질에 적대(敵對)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전통적인 가치관이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니체의 권력의지(權力意志)의 사상은 힘에 의한 현실문제의 해결과 결부되었다. 그래서 히틀러나 뭇솔리니 등이 니체의 사상을 권력유지(權力維持)를 위하여 이용하였다. 즉 니체도 현실문제의 해결에 실패한 것이다. 니체의 실패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참된 신(神)까지를 부정한 데에 있다. 그가 부정해야 했던 신(神)은 참 신(神)이 아니라 거짓 신(神)이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있던 신(神)은 거짓 신(神)이었을 뿐, 참 신(神)이 아니었는데 그는 참 신(神)까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 마르크스의 변증법적(辨證法的) 유물론(唯物論)

 

마르크스(K. Marx, 1818~1883)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세계의 본질은 물질이고, 사물속에 있는 모순(대립물)의 투쟁에 의해서 세계는 발전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사회의 변혁은 종교나 정의(正義)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급투쟁에 의해서 폭력적(暴力的)으로 물질적인 생산관계(경제)를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한 계급혁명론도 현실문제 해결의 하나의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지배계급(支配階級)이나 피(被)지배계급(支配階級)중 어느 편에 속하는 계급적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은 피지배계급(프롤레타리아트)측에 서서 혁명에 가담할 때만 그 인격적 가치가 인정된다. 그의 인간관에는 인격을 절대적인 것으로 존중하는 가치관이 없으며,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은 혁명에 있어서 이용가치(利用價値)가 없는 인간, 혹은 혁명에 반대하는 인간에 대하여 하등에 양심의 가책 없이 학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공산주의체제는 동유럽과 소련에서 드디어 무너지고 말았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한 계급혁명론도 현실문제 해결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그 원인은 첫째로 참 하나님을 몰라보고 무조건 신(神)을 부정한 때문이요, 둘째로 폭력은 반드시 폭력을 낳는다는 천리(天理)를 무시하고 폭력에 의한 개혁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7) 통일사상의 본체론(本體論)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주의 근원을 어떻게 파악하느냐 혹은 하나님의 속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인간관, 사회관, 역사관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서 현실문제 해결의 방법이 달라진다. 따라서 올바른 신관(神觀), 올바른 본체론(本體論)을 세움으로써 현실의 인생문제, 사회문제, 역사문제를 올바르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통일사상의 본체론 즉 원상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심정(心情)이다. 심정을 중심하고 성상의 내부에서 내적성상(知情意)과 내적형상(觀念, 槪念 등)이 수수작용을 하며, 또한 성상과 형상(질료)이 수수작용을 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심정에 의해 목적이 세워지면 수수작용은 발전적으로 진행되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종래의 본체론은 이성이나 의지, 혹은 개념이나 물질이 중심이었다. 그리하여 정신만이 또는 물질 만이 실체라고 하는 일원론(一元論)이 나오게 되었고, 정신과 물질 모두가 우주의 실체라고 하는 이원론(二元論)도 나타나게 되었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종래의 본체론은 하나님의 속성의 실상(實相)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였고, 또 속성 상호간의 관계를 바르게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통일사상의 본체론(本體論)(원상론)에 의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와 목적,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하나의 내용이 상세히 밝혀지게 되었고, 그 속성의 구조까지 정확히 또 구체적으로 소개됨으로써 현실문제의 근본적 해결의 기준이 확립되게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세계의 지도자들이 그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뿐이다.

 

                  제2장 존 재 론(第2章 存 在 論)

 

Ontology p.167

 

일반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存在論)의 희랍어의 원어(原語)는 ontologia로서 onta(존재하는 것)와 logos(論理)의 합성어이며 존재(存在)에 관한 근본문제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부문을 말한다. 그러나 통일존재론(統一存在論)은 통일원리를 기본으로 하여 모든 존재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創造)된 피조물(被造物)이라고 보는 입장에서, 피조물의 속성(屬性)(共通의 屬性)은 무엇이며, 피조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또 그것은 어떻게 운동하고 있는가를 다루는 부문(部門)이다. 본(本) 존재론(存在論)은 모든 피조물을 그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인간도 피조물이므로 본(本) 존재론(存在論)의 대상(對象)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主管主)여서 만물과 그 격위(格位)가 다르므로 인간에 관해서는 별도로 본성론에서 더욱 상세히 논(論)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本) 존재론(存在論)은 주로 만물에 관한 이론이라고 할 수가 있다.

원상론은 하나님에 관한 이론이며, 존재론(存在論)은 만물에 관한 설명을 통하여 원상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이다. 즉 원상론은 통일원리에 근거한 연역적(演繹的)인 이론이기 때문에 원상론에서 설명된 하나님의 속성이 실제로 어떻게 만물속에 나타나 있는가, 또 나타나 있다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를 명백히 하는 것이 본(本) 존재론(存在論)이다. 그리하여 만물속에 그와 같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이 보편적(普遍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원상론 의 참(眞)이성은 한층 더 보장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속성을 취급하는 존재론(存在論)은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하나님의 속성을 가시적(可視的)으로 확인(確認)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자연과학(自然科學))은 급속한 발전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과학자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객관적(客觀的)으로 자연계(自然界)를 관찰(觀察)했을 뿐이다. 그러나 닮기의 법칙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연을 관찰한 과학적 사실이 하나님의 속성과 대응된다는 것이 밝혀지면, 자연과학은 도리어 원상론을 뒷받침한다는 논리가 성립되게 된다. 실제로 오늘날까지의 자연과학의 성과가 하나님에 관한 이론을 뒷받침한다는 사실이 본 존재론에서 증명(證明)될 것이다. 통일원리(統一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고(창 1:27) 만물은 인간을 닮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우주(宇宙)를 창조(創造)함에 앞서, 마음속에 먼저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상(像)(모습)을 그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상(像)을 근본으로 하여 그것을 닮도록, 만물을 하나하나 창조하신 것이다. 이것을 닮기의 창조(創造) 또는 상사(相似, 서로 닮음)의 창조라고 하며, 이러한 창조의 법칙(法則)을 닮기의 법칙(法則) 또는 상사(相似, 서로 닮음)의 법칙(法則)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만, 인간은 타락(墮落)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도 본래의 모습을 잃고 비정상적(非正常的)인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따라서 현실의 인간과 사회를 그대로 두고서는 존재(存在)의 문제(問題)와 관계(關係)의 문제(問題)의 해결의 길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인(聖人)이나 철인(哲人)들은 하늘의 별들의 운행이나 자연만물의 소장(消長)과 변화(變化)와 四時의 변천속에서 깨달은 철리(哲理)로써 자신(自身)들의 가르침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인간과 사회를 구제하는 진리가 자연계를 통하여 얻어지는 가를 알지 못했으며, 단지 직감적(直感的)으로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었다.

통일원리(統一原理)에 의하면, 만물은 본연의 인간의 모습을 표본으로 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자연계를 통하여 본래의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원상론에서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올바르게 이해(理解)하는 것이 인간이나 사회의 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창조(創造)가 닮기의 창조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屬性) 뿐 아니라 만물의 속성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이것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열쇠(基準)가 될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존재론도 현실문제(現實問題)를 해결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되는 사상부문(思想部門)인 것이다.

본 존재론에서는 만물 하나 하나의 개체를 존재자(存在者; existing being)라고 한다. 따라서 존재론(存在論)은 존재자(存在者)에 관한 설명(說明) 즉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존재자(存在者)에 관한 설명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와 연체(聯體)라는 두 항목(項目)으로 區分하여 개체를 다룬다. 여기서 개성진리체란 하나님의 속성(屬性), 즉 원상(原相)의 내용을 그대로 닮은 개체(個體)를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개체에 대하여 다른 개체와의 관계를 생각지 않고, 독립적으로 다룰 때의 피조물(被造物)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개체(존재자)는 상호간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존재한다. 그리하여 한 개체를 다른 개체와의 관계에서 볼 때, 그러한 하나하나의 피조물(被造物)을 연체라고 한다. 따라서 연체(聯體)는 상호관련성을 지닌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를 말한다.

피조물(被造物)(존재자)은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의 모습은 신상을 닮고 있다. 그런데 신상에는 보편상과 개별상이 있기 때문에 모든 개체는 원상을 닮아서 보편상(普遍相)과 개별상(個別相)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보편상이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및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을 말하며, 개별상은 개체마다 갖고 있는 특성을 말한다. 먼저 개성진리체의 보편상, 즉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p. 170

 

모든 피조물은 우선 원상(原相)을 닮은 속성, 즉 성상과 형상의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성상은 기능이나 성질 등 보이지 않는 무형적인 측면이요, 형상은 질료(質料)와 구조, 형태 등 유형적인 측면이다. 먼저 광물(鑛物)에 있어서의 성상은 물리화학적 작용성이며, 형상은 원자나 분자에 의해 구성된 물질의 구조, 형태 등이다. 식물(植物)에는 식물 특유(特有)의 성상과 형상이 있다. 식물의 성상은 생명(生命)이며, 형상은 세포와 세포에 의해 구성된 조직, 구조 즉 식물의 형체이다. 생명은 형체속에 잠재하고 있는 의식(意識)으로서, 목적성과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생명의 기능은 식물의 형체를 통제하면서 성장시켜 가는 능력 즉 자율성(自律性)인 것이다.

 

식물은 이와 같은 식물 특유의 성상과 형상을 지니면서 동시에 광물 차원의 성상적요소와 형상적요소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식물은 광물질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動物)에는 식물의 차원보다 더 높은 동물 특유의 성상과 형상이 있다. 동물의 성상이란 본능을 말한다. 그리고 동물의 형상은 감각기관이나 신경을 포함한 구조와 형태 등이다. 동물도 역시 광물질을 갖고 있어서 광물 차원의 성상과 형상을 내포하고 있고 또 식물 차원의 성상과 형상도 내포하고 있다. 동물의 세포나 조직은 모두 이러한 식물차원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영인체(靈人體)와 육신(肉身)으로 구성된 이중적 존재(二重的 存在)이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의 차원보다 더 높은 특유의 성상과 형상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특유한 성상이란 영인체의 마음인 생심(生心)이며, 특유한 형상이란 영인체의 몸(體)인 영체(靈體)이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에 있어서 성상은 육심(肉心)이고 형상은 육체(肉體)이다.

 

그런데 인간의 육체(肉體) 속에도 광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광물차원의 성상과 형상을 지니고 있다. 또 인간은 세포나 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식물차원의 성상과 형상도 지니고 있다. 또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감각기관과 신경을 포함한 구조와 형태를 지니고 있어서 동물의 성상과 형상을 또한 함께 갖고 있다. 인간(人間)속에 있는 동물차원의 성상 즉, 본능의 마음을 육심(肉心)이라 하고 영인체의 마음을 생심(生心)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인간의 마음은 본능(本能)으로서의 육심과 영인체의 마음인 생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육심의 기능은 의-식-주-성(衣·食·住·性)의 생활을 추구하며, 생심(生心)의 기능은 진-선-미-애(眞·善·美·愛)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 육심과 생심이 합성일체화한 것이 바로 인간의 본연(本然)의 마음(本心)이다.

 

여기서 인간의 영인체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육신은 만물과 동일(同一)한 요소로 되어 있어서 일정한 기간동안에만 생존(生存)한다. 한편 영인체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요소로 되어 있어서 영원히 생존(生存)하며, 그 모습은 육신과 다를 바 없다. 육신이 죽게 되면 마치 낡은 의복을 벗어 버리듯이 영인체는 육신을 벗어 버리고 영계에 들어가 그곳에서 영원히 산다. 한편 영인체도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 되어 있는 바, 영인체의 성상(마음)은 생심이며 형상(몸)은 영체(靈體)이다. 영인체의 감성(感性)은 육신생활중 육신과의 상대적 관계에서 발달한다. 즉 영인체의 감성은 육신을 터로 하고 성장(成長)한다. 따라서 인간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다가 타계(他界)하면, 영인체는 영계의 충만한 사랑속에서 영원히 기쁨의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지상에서 악(惡)한 생활을 하면 사후(死後)에는 악한 영계에 머물게 되어서 고통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광물, 식물, 동물의 성상과 형상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터 위에 더욱 차원높은 성상과 형상, 즉 영인체의 성상과 형상까지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만물의 요소를 모두 총합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만물의 총합실체상(總合實體相) 또는 소우주(小宇宙)라고 부른다. 이상의 설명에서 광물, 식물, 동물, 인간으로 존재자의 격위가 높아감에 따라서 성상과 형상의 내용이 계층적으로 증대(增大)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존재자에 있어서의 성상과 형상의 계층적 구조(階層的 構造)'라고 하며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2-1과 같다.

  

                    그림 2-1. 존재자의 성-형의 계층적구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함에 있어서 광물, 식물, 동물, 인간의 순서로 창조할 때, 새 차원의 특유한 성상과 형상을 다음 단계의 피조물에 더해 가면서 창조를 계속하다가 마지막으로 최고 차원의 인간의 성상, 형상을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함에 있어서 마음속에 먼저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인 인간을 구상하셨다. 그 인간의 성상과 형상에서 차례차례로 일정한 요소를 사상(捨象(省略))하여 차원을 낮추면서 동물, 식물, 광물을 구상하신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내에 있어서의 실제의 창조는 그 반대 방향으로 광물에서 시작하여 식물, 동물, 인간의 순서로 행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인간의 성상과 형상은 광물, 식물, 동물의 각각 특유한 성상과 형상이 쌓여서 된 것처럼 보여진다.

 

인간의 성상과 형상이 계층적(階層的)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그림 2-1)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첫째로, 인간의 성상은 계층성(階層性)을 지니면서 동시에 연속성(連續性)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인간의 마음은 생심과 육심으로 되어 있으며, 생심과 육심은 서로 연속되어 있다. 그래서 생심으로써 육심(本能)을 조절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인간의 마음은 생명(자율성)과도 연결(연속)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마음이 자율신경(自律神經)을 조절할 수는 없으나, 훈련에 의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예컨대 ‘요가’의 수행자(修行者)는 명상에 의해 심장의 고동을 자유로이 증감시킬 수 있으며, 때로는 멈추게 할 수도 있다.1)

 

또 마음은 체내의 광물질의 성상과도 통해 있다. 즉 인간의 마음은 對內(체내)的으로 뿐 아니라 대외적(對外的), 체외적(體外的)으로 다른 광물이나 식물의 성상과도 통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염력(念力) 에 의해서 물리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동물이나 식물은 물론 물질(광물)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도 밝혀져 있다.2) 한편 동물, 식물, 광물이 인간의 마음에 반응한다는 사실도 알려지고 있다. 예컨대 식물의 경우, 미국의 거짓말탐지기 검사관(檢査官)인 크리브 백스터가 실험을 해서 얻은 ‘백스터 效果’가 그 하나의 예이다.3) 그리고 광물이나 소립자도 자체내에 예지(叡智)나 사고력(思考力)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행해지고 있다.4) p. 174

 

둘째는, 인간의 성상·형상의 계층적구조는 생명의 문제에 대하여 중요한 사실을 시사(示唆)해 주고 있다. 오늘날까지 무신론자와 유신론자는 하나님의 실존의 유무에 관해서 끊임없이 논쟁해 왔다. 그때마다 유신론자들은 ‘神이 없이는 생명이 만들어질 수 없다. 즉 신(神)만이 생명을 창조한다’는 논거를 가지고 무신론을 제압해 왔던 것이다. 아무리 자연과학이 발달하더라도 생명의 기원에 관한한 자연과학은 합리적인 논증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생명의 기원의 문제(생명의 창조설)는 유신론이 성립할 수 있는 유일한 거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그 유일한 거점이 무신론에 의해 무너지려 하고 있다. 과학자가 생명을 만들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과학자가 생명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현대 생물학에 의하면 세포의 염색체에 포함되어 있는 DNA(디옥시리보핵산)는 아데닌, 구아닌, 티민, 사이토신이라는 4종류의 염기(鹽基)를 포함하고 있다. 이 4종류의 염기의 배열이 바로 생물의 설계도라 할 수 있는 유전정보(遺傳情報)이다. 이 유전정보에 의해서 생물의 구조나 기능이 결정된다. 결국 DNA에 의해서 생명체가 만들어 진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과학자가 DNA를 합성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유물론자들은 생명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신(神)의 존재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신(神)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자가 DNA를 합성한다는 것은, 과연 생명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통일사상에서 보면 과학자가 아무리 DNA를 합성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체의 형상면(形狀面)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 생명의 보다 근본된 요소는 생명체의 성상(性相)이다. 따라서 과학자가 만들 수 있는 것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고 생명을 지니는 담하체(擔荷體)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인간에 있어서 형상인 육신은 성상인 영인체를 지니고 다니는 터전인 것과 같다. 육신은 부모(父母)에서 유래하지만 영인체는 하나님에게서 유래(由來)한다. 마찬가지로 DNA가 과학자로부터 유래할 수 있다 하더라도(즉 과학자가 DNA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생명(生命) 그 자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라디오는 전파를 음파로 바꾸는 장치로서, 이것은 방송국에서 오는 전파를 포착하여 음파로 변환시키는 기구에 불과하다. 아무리 과학자가 라디오를 만들었다고 해도 음성까지 만든 것은 아니다. 음성은 방송국에서 전자파를 타고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과학자가 비록 DNA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생명을 유숙(留宿)시키는 장치를 만든 데 불과하므로 생명 그 자체를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우주는 생명이 충만해 있는 생명의 장(場)으로서, 이것은 신(神)의 성상에서 유래한다. 그리하여 생명이 깃들 장치만 있으면 생명은 거기에 나타나게 된다. 그 장치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DNA라는 특수한 분자이다. 이와 같은 결론이 ‘성상과 형상의 계층적 구조’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2. 양성(陽性)과 음성(陰性)

 

(1) 양성(陽性)과 음성(陰性)도 이성성상(二性性相)이다. p.176

 

다음은 개성진리체의 양성과 음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원상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양성과 음성도 하나님의 이성성상이다. 그리고 동시에 성상과 형상의 속성이다. 즉 성상에도 양성과 음성이 있고, 형상에도 양성과 음성이 있다.

 

먼저, 인간의 성상과 형상에 있어서 그 속성으로서의 양성 음성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인간의 성상은 마음인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마음에는 지정의(知·情·意)의 세 기능이 있다. 이 지정의(知·情·意)의 각각의 기능에는 양적(陽的)인 측면과 음적(陰的)인 측면이 있다. 이것은 성상(마음)에 양성과 음성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知의 양적인 측면은 명석, 기억, 상기력, 판명, 재치 등이다. 이에 대하여 지(知)의 음적인 측면은 모호, 망각, 기명력, 혼동, 고지식 등이다. 정(情)의 양적인 측면은 명랑, 시끄러움, 기쁨, 흥분 등이고 정(情)의 음적인 측면은 불쾌, 정숙, 슬픔, 침착 등이다. 의(意)에 있어서는 적극적, 공격적, 창조적, 경솔성 등이 양적인 측면이고 소극적, 포용적, 보수적, 신중성 등은 음적인 측면이다.

  

형상 즉 몸(신체)에 있어서는 융기된 부분, 돌출(突出)된 부분, 철(凸部), 표면(表面) 등이 양적인 면이며, 함몰(陷沒)된 부분, 공혈부(孔穴部), 요부(凹部), 이면(裏面, 속) 등이 음적인 면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그림 2-2와 같다. 동물·식물·광물에 있어서도 각각 성상에 양성과 음성이 있고, 형상에 양성과 음성이 있다. 동물에는 활발히 행동할 때(양)와 그렇지 않을 때(음)가 있다. 식물에는 성장할 때(양)와 시들 때(음)가 있다. 즉 꽃은 필 때(양)와 질 때(음)가 있으며 줄기는 위로 향하고(양), 뿌리는 땅속을 향한다(음). 그리고 광물에 있어서는 물리화학적 작용성이 활발하게 진행할 때(양)와, 그렇지 않을 때(음)가 있다. 이것이 각각 성상면에 있어서의 양성과 음성이다. 형상면에도 양성과 음성의 현상이 나타난다. 형상의 돌출부와 공혈부, 높음과 낮음, 표(表)와 리(裏; 속), 그리고 명(明)과 암(暗), 강(剛)과 유(柔), 동(動)과 정(靜), 청(淸)과 탁(濁), 열(熱)과 냉(冷), 낮과 밤, 여름과 겨울, 하늘과 땅, 산과 골짜기 등이 각각 양과 음의 예이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2-2 와 같다.

   

   그림 2-2. 성상-형상의 속성으로서의 양성 음성(인간의 경우)

 

이상으로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의 성상과 형상에서의 양성 및 음성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런데 각 개성진리체는 성상과 형상이 이와 같이 양성과 음성을 속성으로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떤 개체는 양성을 보다 더 많이 나타내고, 어떤 개체는 음성을 보다 더 많이 나타낸다. 전자(前者)를 양성실체(陽性實體)라 하고, 후자(後者)를 음성실체(陰性實體)라고 한다. 인간에서의 남자와 여자, 동물에서의 수컷과 암컷, 식물에서의 수술과 암술, 분자에서의 양이온과 음이온, 원자에서의 양자와 전자 등이 그 예들인 것이다. 단세포(單細胞)인 박테리아에도 수컷과 암컷이 있다고 한다.5)

 

(2) 인간(人間)의 경우의 양성실체(陽性實體)와 음성실체(陰性實體) p.178

 

양성실체(陽性實體), 음성실체(陰性實體)는 특히 인간의 경우, 각각 남자와 여자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자주 쓰인다. 그러면 인간의 경우, 양성실체와 음성실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形狀(신체)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양음의 차이는 명백하다. 그것은 양적차이(量的差異)이기 때문이다. 즉 남자의 신체는 여자의 신체보다 양적(陽的)인 요소가 더 많고, 여자의 신체는 남자의 신체보다 음적인 요소가 더 많다. 이와 같이 남과 여의 형상에 있어서의 차이는 양(陽)과 음(陰)의 양적(量的)인 차이이다. 이에 반하여 성상(지·정·의)에 있어서 남녀간의 차이는 질적(質的)인 차이이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남녀 다같이 지(知)에도 양·음이 있고, 정(情)에도 양·음이 있으며 의(意)에도 양·음이 있다. 그런데 성상의 양성·음성에는 남녀간에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양적(陽的)인 지(知)의 명석(明晳)인 경우, 男女가 다함께 명석함을 갖고 있으나, 명석의 질이 다르다. 남자의 명석은 포괄적(包括的)인 경우가 많고, 여자의 그것은 분석적(分析的), 또는 축소지향적인 경우가 많다. 또 음적(陰的)인 정(情)인 슬픔의 경우 남자의 슬픔은 悲痛(비통, 억센 슬픔)의 경향이 있고, 여자의 슬픔은 悲哀(비애, 가냘픈 슬픔)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양적인 의(意) 가운데 적극성(積極性)의 경우, 남자의 적극성은 딱딱한 感觸(감촉, 硬性感觸)을 주며, 여자의 적극성은 연한 感觸(軟性感觸)을 준다. 성상에 있어서의 이러한 남녀간의 차이가 질적차이(質的差異)이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성악(聲樂)에 있어서 남자의 테너와 여자의 소프라노는 모두 高音(고음, 陽)이나, 이들은 서로 질이 다름을 볼 수 있다. 또 남자의 베이스와 여자의 알토는 모두 低音(저음, 陰)이지만 이들도 역시 서로 질이 다르다. 남자와 여자에 있어서 성상의 속성인 양성·음성의 차이도 이와 비슷한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 때문에 남자에게는 남자다움이 나타나고 여자에게는 여자다움이 나타나는 것이다.

 

다음은 우주의 창조과정에 있어서 양·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창조는 양·음의 조화를 활용한 일종의 웅장한 예술작품에 비유할 수 있다. 조화라는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은 천지창조라는 하나의 장대한 교향곡을 연주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대폭발(Big bang theory...... 아직은 가정(假定)의 단계)6)로부터 시작하여 은하계를 만들고 태양계를 만들고, 지구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지구에 있어서 식물, 동물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교향곡의 연주에 있어서 음의 고저(高低), 강약(强弱), 장단(長短), 양적(陽的)인 악기와 음적인 악기의 연주 등, 여러가지 양·음이 조화롭게 작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 창조의 과정에 있어서도 무수한 종류의 양·음의 조화가 상호작용을 해 왔다고 본다. p. 179

 

은하계(銀河系)에는 약 2천억 개의 항성(恒星)이 있으며 그것들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다. 별의 조밀한 곳이 양이고, 성긴 곳이 음이다. 지구에는 육지와 바다가 있는 바, 육지가 양이고 바다가 음이다. 산과 골짜기, 낮과 밤, 아침과 저녁, 여름과 겨울 등도 양·음의 조화이다. 이와 같이 수많은 양음의 조화가 얽히고 설키면서 우주가 형성되었고 지구가 형성되었으며, 생물이 발생하고 인간이 출현한 것이다.

 

인간의 활동도 양·음의 작용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부부(夫婦)의 조화(調和)에 의하여 가정(家庭)이 유지된다거나 미술창작에 있어서 선(線)의 굴곡(屈曲)·색의 명암(明暗)·농담(濃淡)·양감(量感)의 大小 등과 같이 양·음의 조화가 필요하다. 이처럼 우주의 창조에 있어서나 인간사회의 활동에 있어서도 양성과 음성의 조화가 성상·형상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양·음의 조화적인 작용은 변화나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미(美)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양성과 음성을 성상·형상의 속성으로 두신 것은 양성-음성(陽性·陰性)을 통하여 조화(調和)와 美를 나타내기 위함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3. 개성진리체의 개별상 (個性眞理體의 個別相)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는 개체마다 普遍相(보편상; 성상·형상, 양성·음성)외에 독특한 속성(屬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개성진리체의 개별상(個別相)으로서 원상(原相)의 개별상(原個別相)에서 유래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1) 보편상(普遍相)의 개별화(個別化) p.180

 

개별상(個別相)은 보편상(普遍相)과 별개의 속성이 아니며, 보편상 그 자체가 특수화(特殊化) 또는 개별화(個別化)된 것이다. 즉 보편상은 성상·형상과 양성·음성이므로 이들 속성이 개체마다 다르게 나타난 것이 개별상(個別相)이다. 人間의 경우 개인마다 性格(성격, 性相)이 다르고 체격이나 容貌(용모, 形狀)가 다르다. 또 성상의 양·음과 형상의 양·음도 개인마다 다르다. 예컨대 같은 기쁨(情의 陽)이라도 그 표현방법이 각각 다르며, 슬픔(情의 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코는 몸의 양적(陽的)인 부분으로서 코의 높이와 모양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몸의 음적인 부분인 귓구멍을 보아도 그 크기나 모양은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이와 같이 개별상은 보편상 그 자체가 개별화된 것이다.

 

(2) 종차(種差)와 개별상(個別相)

 

일정한 사물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성을 보통 徵表(징표; Merkmal)라고 하며, 동일한 유개념(類槪念)에 속하는 종개념(種槪念) 중에서 일정한 종개념에 나타나는 특유한 징표(徵表)를 種差(종차; specific difference)라고 한다. 예컨대 `사람'은 `개'나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동물'이라는 유개념에 속하는 종개념이지만, `사람'이라는 종개념에 공통되는 성질의 징표로서 `理性的'이라는 말이 그 예이다(統一思想으로 볼 때 여기의 징표나 종차도 모두 보편상의 특수화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어떤 생물의 징표는 여러 가지 단계의 종차가 합쳐져 있는 것이다.

 

예컨대, 하나의 인간을 생각해 보자. 인간은 생물이면서 식물이 아닌 동물의 징표(徵表) 즉 종차(種差)를 가지고 있다. 또 인간은 동물이면서 무척추동물(無脊椎動物)이 아니고 척추동물(脊椎動物)의 종차(특성)를 가지고 있다. 또 척추동물이면서 어류나 파충류가 아닌 포유류의 종차(특성)를 가지고 있다. 또 포유류이면서 食肉類(식육류, 齧齒類)가 아닌 영장류(靈長類)의 종차(특성)를 가지고 있다. 또 영장류(靈長類)이면서 손이 긴 원숭이가 아닌 사람科(Homonidae)의 종차를 지니고 있다. 또 사람과(科)로서 소위 원인(猿人)이 아닌 사람屬(속, Homo)으로서의 종차를 가지고 있다. 또 사람屬으로서 소위 원(原人)이 아닌 호모 사피엔스의 종차(種差) 즉 특성(이 특성이 바로 `理性的'인 것이다)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미표(微表)에는 대체로界(kingdom),門(phylum), 綱(class), 目(order), 科(family), 屬(genius), 種(species)의 7단계(段階)의 종차(특성)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7단계 종차의 기반위에 개인의 특성(特性), 즉 개별상(個別相)이 세워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7단계의 종차를 터로 하는 개인의 특성이 바로 인간의 개별상(個別相)이다.

 

그런데 인간에 있어서 7단계의 종차는 생물학자(生物學者)들이 편의상(便宜上) 그렇게 구분한 것뿐이며, 하나님은 그와 같이 여러 종차를 거듭하면서 인간을 만드신 것은 아니다. ‘原理講論’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미래에 창조(創造)될 인간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형상적(形象的)으로 전개하여 만물세계를 창조하셨다"7)고 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천주(天宙)의 창조에 있어서 제일 마지막으로 만들어야 할 인간을, 마음속에서는 제일 먼저 구상(構想)하신 것이다. p.182

 

즉 제일 먼저 구상(構想)한 인간을 표준으로 하여 동물, 식물, 광물을 차례로 생각하신 것이다. 즉 구상(構想)된 인간을 표본으로 하여 동물을 생각하고 다음에 식물을, 그리고 나중에 광물을 생각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상에 있어서는 인간, 동물, 식물, 광물의 순서와 같이 하향식(下向式)으로 생각하였으나 실제로 피조세계를 만든 순서는 그 반대였다. 즉 광물(天體), 식물, 동물, 인간의 순서와 같이 상향식(上向式)으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상에 있어서 몇 개의 종차(種差)를 합쳐 가면서 인간을 구상한 것이 아니며, 한꺼번에 모든 屬性(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을 구비한 인간을 구상한 것이다.

 

더욱이 추상적(抽象的)인 인간이 아니고 구체적(具體的)인 개별상(個別相)을 가진 인간 아담과 해와를 마음에 그렸던 것이다. 그 다음은 인간에게서 일정한 성질과 요소를 생략하고 변형(變形)시키면서 여러 가지 동물을 구상하였다. 다음에는 동물의 일정한 성질과 요소를 생략하고 변형시키면서 여러 가지 식물을 구상하였다. 또 식물의 일정한 성질과 요소를 생략하고 변형시키면서 여러 가지 천체(天體)와 광물(鑛物)을 구상한 것이다. 이러한 하향식(下向式) 구상에 있어서의 한 단계의 구상, 예컨대 동물 단계의 구상에 있어서도 고급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거기에서 일정한 성질과 요소를 생략 또는 변형시킴으로써 점차로 저급한 동물을 구상해 나갔다고 본다(식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실제의 만물창조의 결과만을 보면 인간은 여러 단계의 동물의 종차가 겹쳐있는 것 같이 보여진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분자, 원자, 소립자 등 미시세계(微視世界)에 있어서, 개체의 개별상은 그 개체들이 속한 종류의 종차(특성)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물의 분자는 어떤 분자든지 같은 형태와 화학적(化學的) 성질을 가지고 있다. 원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소립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미시세계(微視世界)에서는 종차와 개별상이 일치한다고 본다. 원자나 소립자는 더 높은 차원의 개체의 구성요소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광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광물로 되어 있는 산하(山河), 하늘의 천체(天體)들은 각각 개별상을 갖고 있으나 구성 요소로서의 광물 그 자체는 역시 종차가 그대로 개별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식물이나 동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종류의 특성 그대로가 개별상(個別相)이 된다. 예컨대 무궁화나무의 특성은 그대로가 모든 무궁화나무의 개별상이 되며, 일정(一定)한 종류의 닭의 특성은 그대로가 동종(同種)의 모든 닭의 개별상이 된다. 이리하여 인간에 있어서는 개인마다 개별상이 다르지만 인간 이외(人間 以外)의 만물들은 종류에 따라서 개별상이 다르게 된다.

 

(3) 개별상(個別相)과 환경(環境) p.183

 

인간(人間)에 있어서 개별상이란 개체가 태어나면서 가진 특성이지만, 그 개별상에는 환경에 따라 변하는 측면(側面)이 있다. 그것은 원상(原相)이 그러했듯이 모든 개체는 존재 또는 운동함에 있어서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과 發展性(발전성, 變化性)의 양면을 동시에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不變性(불변성, 自己同一性)과 可變性(가변성, 發展性)의 통일적 존재로서 존재하며 성장한다. 그런데 이중에서 불변성(不變的)인 측면이 본질적인 것이고 변화하는 측면은 2차적인 것이다. 개별상을 유전학적(遺傳學的)으로 보면 유전형질(遺傳形質)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개별상이 개체의 성장과정에 있어서 환경과의 부단한 수수작용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변화해 간다. 개별상중(個別相中)에서 이와 같이 변화하는 부분(部分) 또는 변화한 부분을 개별변상(個別變相)이라고 한다.

 

이러한 개별상의 가변적(可變的)인 부분은 유전학상의 획득형질(獲得形質)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소련의 리셍코(T. D. Lysenko, 1898∼1976)는 春化處理(춘화처리, 低溫處理)에 의해서 가을보리(秋播小麥)를 봄보리(春播小麥)로 변화시키는 실험을 통해서, 환경에 의해 생물의 특성(特性)이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불변의 형질이 유전자에 의해 자손(子孫)에게 전해진다고 하는 멘델·모르간의 유전자설(遺傳子說)은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 하여 부정(否定)하였다. 생물의 본래적인 불변성을 부정하고 환경에 의해서 변화하는 면만을 강조한 것이다. 이 리셍코의 설(說)은 스탈린(J. V. Stalin, 1879∼1953)에게 인정받은 후 높이 평가되자 그때까지의 멘델·모르간파(派) 학자들은 반동으로 몰리어 추방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리셍코학설(學說)의 오류(誤謬)가 외국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확인되고 멘델·모르간학설의 정당성이 재차 인정되었다. 결국 리셍코의 학설(學說)은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을 합리화하기 위한 어용학설(御用學說)이라는 것이 폭로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로서도 만물은 불변성과 가변성의 통일적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개별상에 관련하여 `環境(환경)이 인간을 규정(規定)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성격은 환경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레닌(V. I. Lenin, 1870∼1924)의 혁명가적 인물로서의 지도 능력은 당시 러시아의 상황(狀況)에 의한 산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인간은 어디까지나 환경에 대해서 주체(主體)이고 주관주(主管主)이다. 즉 태어나면서부터 특출한 개성(個性)과 능력(能力)을 가진 인간이 일정한 환경조건이 성숙(成熟)되었을 때, 그 환경을 수습(收拾)하기 위하여 지도자(主體)로서 출현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혁명의 경우 레닌은 본래 특출한 능력의 소유자로서 출생했다가, 국내외(國內外)의 여건이 성숙되었을 때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여, 그 때의 환경을 수습하면서 러시아를 공산주의혁명(共産主義革命)으로 이끌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개별상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면, 환경은 인간의 개별상에 있어서 가변적(可變的)인 부분에만 영향을 줄 뿐, 개별상 전체가 환경에 의해서 규정(規定)되는 것은 아니다.

 

                        二. 연 체(聯 體)

 

 1. 연체(聯體)란 무엇인가

 

  (1) 구조(構造)로 본 연체(聯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란 그 내부에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인 요소가 있어서 양자가 목적을 중심으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개성진리체는 또 외적으로 다른 개성진리체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맺고 수수작용을 한다. 그때 이 개체(個體(個性眞理體))를 특히 연체(聯體)라고 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룬 한 개체(개성진리체)가 다른 개체(개성진리체)와 관계를 맺어서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를 형성했을 때의 개체, 즉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를 닮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를 연체(聯體)라고 한다.

 

  (2) 목적으로 본 연체(聯體)

 

목적을 중심하고 볼 때, 모든 개체는 반드시 개체목적(個體目的)과 전체목적(全體目的)이라는 이중목적(二重目的)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개체를 또한 연체(聯體)라고 부른다. 개체목적이란 개체로서 생존을 유지하거나 발전코자 하는 목적을 말하며, 전체목적이란 전체의 생존 또는 발전에 기여(寄與)코자 하는 목적을 말한다. 다음에 피조세계에 있어서 소립자로부터 우주에 이르는 개체의 계열(系列)을 살펴보자. 소립자는 소립자로서의 존재를 유지하면서 原子(전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원자는 원자로서의 존재를 유지하면서 分子(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존재하며, 분자는 분자로서의 존재를 유지하면서 세포(細胞(全體))를 형성하기 위하여 존재하며, 세포는 세포로서의 존재를 유지하면서 생물의 조직이나 器官(전체)을 형성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원자(原子)나 분자(分子)는 광물(鑛物)(전체)을 형성하고, 또한 지구(地球)(전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지구는 지구로서의 자체를 유지하면서 태양계(太陽系)(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또 태양계는 태양계 자체를 유지하면서 은하계(全體)를 위하여 존재한다. 은하계는 은하계 자체를 유지하면서 우주(宇宙)(전체)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 또한 우주는 우주로서 존재하면서 인간(全體)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외형으로는 극히 작은 존재이지만 그 가치로서는 전우주(宇宙)를 총합(總合)한 것보다 더 크다.

 

우주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와 같이 피조물은 모두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 피조물의 전체목적 중에서 최고의 전체목적은 모두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데 있다. 그리고 인간의 전체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데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립자에서 우주(宇宙),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은 이중(二重)목적을 가진 연체(聯體)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전체목적에는 형상(形狀)的인 전체목적과 성상(性相)的인 전체목적이 있다. 예컨대 지구는 태양계를 형성한다는 목적을 지니면서 동시에 인간의 주거지(住居地)가 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또 미시세계(微視世界)의 전자는 원자를 형성하기 위하여 원자핵(原子核) 주위를 돌면서 원자를 형성하고 있으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을 위해(인간의 주관의 대상인 만물을 만들기 위해)서도 돌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소립자에서 우주에 이르기까지 각급의 피조물은 보다 상위의 피조물을 구성하기 위해 존재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는 바, 전자(前者)를 형상적(形狀的)인 전체목적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성상적(性相的)인 전체목적이라고 한다. 이 관계를 도표로 나타낸 것이 그림 2-3이다.

   

 

  (3) 관계(關係)의 방향성으로 본 연체(聯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원상에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와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2단구조(構造)가 있는 것같이, 피조세계에 있어서도 모든 개체는 이단구조를 이루고 수수작용을 하면서 존재한다. 즉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로서 내적사위기대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다른 개성진리체와 더불어 외적사위기대를 이룬터위에서, 공통목적을 중심으로 수수작용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존재(存在)의 2단구조(構造)이다.(전술(前述))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에 있어서 인간은 上下, 전후(前後), 좌우(左右)의 6방향(六方向)으로 수수작용을 한다. 나를 중심하고 볼 때, 윗 방향에는 부모(父母)와 상사(上司), 연장자(年長者)가 있고, 아래 방향에는 子女와 부하(部下), 연하자(年下者, 나이 어린 사람)가 있다. 앞에는 스승과 지도자, 선배가 있고, 뒤에는 제자와 후배, 자기에의 추종자가 있다. 오른쪽 방향에는 형제와 친구, 동료들이 있고, 왼쪽에는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성격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6方向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 뿐 아니라 만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6방향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개체도 또한 연체(聯體)이다. 특히 인간이 그러하며 이것을 도표로 나타낸 것이 그림2-4이다.

 

   

                    그림 2-4 연체로서의 인간의 6방향 관계성

 

인간은 또 자연환경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 예컨대 대단히 먼별로부터도 인간은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다. 우주선(宇宙線)이 인간의 생리작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인간이 광물(鑛物), 식물(植物), 동물(動物)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도 인간은연체(聯體)이다.

 

  (4) 격위(格位)로 본 연체(聯體)

 

이항목에관해서는4. 존재격위(存在格位)의항목에서설명하기로함

 

  (5)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과 상호관련성(相互關聯性)

 

연체(聯體)와 관련하여, 공산주의의 이론중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의 주요 개념중의 하나인 상호관련성(相互關聯性)을 비판하고자 한다. 공산주의(唯物辨證法)도 우주의 모든 사물들이 상호관련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형이상학(形而上學)과는 반대로 변증법(辨證法)은 자연을 서로 분리(分離)하거나, 서로 고립(孤立)하거나, 서로 의존(依存)하지 않는 대상(諸對象, 여러 대상), 현상(諸現象, 여러 현상)의 우연적인 집적(集積)으로 보지 않고, 서로 관련을 가진 하나의 전체로 보며, 이 전체에 있어서의 제대상(諸對象, 여러 대상), 현상(諸現象, 여러 현상)은 서로 유기적(有機的)으로 결부됨으로써 서로 의존하며 서로 제약하고 있다고 본다."8)고 하면서 사물의 상호관련성(相互關聯性)을 강조함으로써 사물을 개별적으로만 보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을 비판하고 있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서 창조되었으므로, 개성진리체로서 존재할 뿐 아니라 연체로서 다른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와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유물변증법은 단지 이 사실을 상호관련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p.190

 

그러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은 사물의 상호관련성을 인정할 뿐, 왜 그러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또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공산주의자들은 이 상호관련성의 이론을 가지고 세계의 노동자들은 혁명을 위해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이것은 논리(論理)의 비약(飛躍)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 통일사상은, 연체(聯體)의 개념으로 모든 사물은 목적을 중심하고 직접 또는 간접으로, 上下, 전후(前後), 좌우(左右)로 반드시 다른 사람과 상호관련을 맺고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상호관련성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이다. 따라서 전우주는 상호관련성을 가진 무수히 많은 개체로 구성된 거대한 유기체(有機體)이다.

 

 2. 주체(主體)와 대상(對象)

 

앞에서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는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의 보편상(普遍相)을 지녔다는 것을 설명했는데 이러한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은 다같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피조물인 개성진리체는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 이외에 또 하나의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요소를 갖는다. 그것이 주요소(主要素)와 종요소(從要素)(또는 主個體와 從個體)이다. 이것은 피조세계가 시공적(時空的) 성격을 띠고 있는 데서 생기게 된 것이다. 예컨대 가정에 있어서의 부모와 자녀, 학교에 있어서의 스승과 제자, 태양계에 있어서의 태양과 지구, 세포에 있어서의 핵과 세포질 등은 성상과 형상의 관계도 아니고 양성과 음성의 관계도 아니다. 이것을 주요소(主要素)와 종요소(從要素)의 관계, 또는 주개체와 종개체의 관계라 한다. 이들의 관계 역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이와 같이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에는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 주요소와 종요소(주개체와 종개체)라는 세 가지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성립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성성상에 있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주체와 대상의 성격은 어떠한가. 주체는 대상에 대해서 중심적(中心的), 적극적(積極的), 동적(動的), 창조적(創造的), 능동적(能動的), 외향적(外向的)이며, 대상은 주체에 대해서 의존성(依存的), 소극적(消極的), 정적(靜的), 보수적(保守的), 수동적(受動的), 내향적(內向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일정한 주체적요소와 대상적요소가 일시에 여러 가지의 상대적 관계를 모두 지니는 것이 아니며, 주로 1 대 1의 상대적 관계를 지니게 된다. 즉 주체가 중심적일 때 대상은 의존적이 되고, 주체가 적극적일 때 대상은 소극적이 되고, 주체가 외향적일 때 대상은 내향적이 된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요약해서 주체는 주관적(主管的)이며, 대상은 피주관적(被主管的)이라고 표현한다.

 

  (1)피조세계(被造世界)에 있어서의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의 계열(系列)

 

존재자는 반드시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 주요소와 종요소(주개체와 종개체) 등의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 사실을 피조세계의 각급의 개성진리체 즉 극대세계(極大世界)인 우주(天宙)에서부터 극미세계(極微世界)인 소립자에 이르기까지의 계열(系列) 각급의 개성진리체를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주(天宙)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 역시 하나의 개성진리체이다. 그런데 천주는 영계(靈界)와 우주(宇宙)(지상계)로 되어있다. 영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이며, 지상계는 눈에 보이는 우주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 경우, 영계와 지상계의 관계는 인간의 영인체와 육신의 관계와 같아서 성상과 형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인 것이다.

 

다음에 우주를 보면 이것도 하나의 개성진리체이다. 우주에는 중심이 있고, 그 중심을 향하여 약 2천억 개로 추산되는 은하(星雲)가 돌고 있는데, 이 경우에는 우주의 중심에 있는 부분(部分)이 주요소이고, 여러 은하는 종요소들이다. 이 주요소와 종요소도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다. 다음에 은하계도 하나의 개성진리체인 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은하계는 중심핵을 이루는 항성군(核恒星系)과 그것을 에워싼 약 2천억 개의 별(항성)들로 구성된 별들의 대집단이다. 여기의 중심핵과 항성들도 각각 주요소와 종요소로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다. 태양은 은하계를 이루고 있는 여러 항성중의 하나이지만 태양계도 하나의 개성진리체이다. 태양계는 하나의 태양과 아홉 개의 혹성으로 되어 있는바, 태양과 혹성은 각각 주요소(主要素)와 종요소(從要素)로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 하에 놓여 있다. 태양계의 혹성중의 하나인 지구도 하나의 개성진리체인데 지구에는 중심부(핵)와 지각(地殼) 및 지표(地表)가 있다. 이것 역시 주요소와 종요소이므로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지표(地表)도 하나의 개성진리체로 볼 수 있다. 지표에는 자연만물과 더불어 인간이 살고 있다. 인간이 주요소(主要素)(주체)이고, 자연만물이 종요소(從要素)(대상)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데, 국가도 정부와 국민이라는 주요소(主要素)(주체)와 종요소(從要素)(대상)로 되어 있는 하나의 개성진리체이다. 국가의 단위인 가정도 하나의 개성진리체인데 가정은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부모와 자녀는 각각 주개체(主個體)와 종개체(從個體)로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고, 남편과 아내는 양성과 음성의 개체들로서 역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인간 개개인도 개성진리체로서 영인체와 육신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 영인체와 육신은 성상과 형상의 관계로서 역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그리고 육신도 개성진리체로서 뇌(腦)와 지체(肢體)인 주요소(주체)와 종요소(대상)로 되어 있다. 그리고 육신은 세포로 되어 있는데 개개의 세포도 각각 개성진리체로서 핵과 세포질이라는 주요소(주체)와 종요소(대상)로 되어 있다. 또 세포핵도 하나의 개성진리체로서 염색체와 核液이라는 주요소(주체)와 종요소(대상)로 구성되어 있다. 염색체(染色體)도 하나의 개성진리체로서 핵산(DNA)과 단백질이라는 주요소(주체)와 종요소(대상)로 되어 있다. 핵산도 역시 일종의 분자인 개성진리체로서 주요소(주체)인 염기와 종요소(대상)인 당(糖)?인산(燐酸)으로 되어 있다. 염기나 당과 인산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원자이다. 원자도 하나의 개성진리체로서 두 종류의 소립자, 즉 양자(핵)와 전자라는 주요소(주체)와 종요소(대상)로 되어 있다. 그리고 소립자도 한층 더 낮은 차원의 주요소(主要素)와 종요소(從要素)로 되어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피조세계에는 작게는 소립자(素粒子)에서부터 크게는 우주(天宙)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수많은 개성진리체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요소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의 개성진리체는 그것보다 상위의 개성진리체에서 볼 때 그 상위의 개성진리체의 구성요소에 불과하다. 예컨대 태양계는 태양과 혹성으로 구성된 개성진리체이지만, 은하계라는 상위의 개성진리체에서 보면 태양계는 그 은하계의 하나의 구성요소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개성진리체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예컨대 태양은 태양계에 있어서 혹성에 대하여 주체이지만 은하계에 있어서는 중심핵(핵항성계)에 대하여 대상이 된다. 개성진리체의 계열(系列)과 각 개성진리체의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요소를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2-5와 같다.

 

   

                 그림 2-5 개성진리체의 계열과 각급 개성진리체에 있어서의 상대적 요소

 

  (2)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의 유형

 

통일사상에서 말하고 있는 주체와 대상의 개념은 종래의 철학상의 주체와 대상의 개념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그 차이를 명백히 하고자 한다. 종래의 철학에 있어서 예컨대 인식론에서 말하는 주체는, 인식하는 사람의 의식 또는 인식하는 자아(自我)를 의미하고, 대상은 인식되는 것, 의식 안에 있는 대상(개념)과 의식 밖에 있는 대상(물체)을 뜻한다(인식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존재론적 또는 실천적인 의미에서의 주체란, 의식(意識)을 가진 존재자(인간)를 말하며, 대상은 주체가 상대하고 있는 존재를 뜻한다. 요컨대 종래의 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의식 내지 인간과 그 인간이 마주 대하고 있는 사물과의 관계를 뜻한다. 그런데 통일사상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의 개념은 이것과 다르며, 인간과 만물(물체)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나 물체와 물체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유형이 있다.

 

   1) 본래형(型)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로 볼 때 영원히 성립되는 보편적인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말한다. 예컨대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교사와 학생, 항성과 혹성, 세포핵과 세포질, 원자핵과 전자 등의 관계가 그 예이다.

 

   2) 잠정형(暫定型)

 

이것은 잠정적으로 성립되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서, 일상생활에 있어서 흔히 일어나는 관계이다. 예컨대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에 성립되는 강사와 수강자의 관계가 그러하다. 본래형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주체와 대상이 역전(逆轉)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가정에 있어서 남편이 부재중이거나 와병중(臥病中)일 때 아내가 남편을 대신하여 주체(家長)의 책임을 지는 경우가 있고, 부모가 노쇠(또는 와병)했을 때 자녀가 부모를 대신하여 가정을 책임지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가 잠정형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본래형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며, 본래형을 기반으로 한 잠정형인 것이다.

 

   3) 교호형(交互型)

 

인간 상호간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주체와 대상이 서로 바뀌는 경우에 있어서의 양자의 관계를 교호형이라 한다. 즉 말하는 사람은 주체이고 듣는 사람이 대상인데,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말하는 사람(주체)과 듣는 사람(대상)이 서로 바뀌는 때가 많은 것이다.

 

   4) 부정형(不定型)

 

어느 쪽이 주체이고 어느 쪽이 대상인가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결정해야 할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부정형(不定型)이라고 한다. 객관적으로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예컨대 동물과 식물의 관계에 있어서 동물은 탄산가스를 방출하여 식물에게 주고, 식물은 산소를 방출하여 동물에게 준다. 여기서 산소의 흐름으로 볼 때에는 식물이 주체이며, 탄산가스의 흐름에서 볼 때에는 동물이 주체이다. 어느 편에 중점을 두는가에 따라서 즉 판단자의 뜻에 따라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달라진다. 이와 같은 것이 부정형의 주체와 대상이다.

 

  (3) 수수작용(授受作用)

 

두 개체가 공통목적을 중심으로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으면, 일정한 요소 또는 힘을 주고 받는 작용이 벌어진다. 이 작용을 수수작용이라고 한다. 이 작용에 의해서 그 두 개체(사물)는 존속, 운동하고 변화, 발전한다. 예컨대 학교에 있어서 신입생이 입학수속을 마치면 그때부터 교사와 학생 사이의 상대적 관계가 성립된다. 상대적 관계란 서로 마주 대하는 관계이다. 이 상대적 관계의 기반 위에서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수수작용이다.

 

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지식이나 기술이 전달되며 학생들의 인격이 도야된다. 또 교사는 보람을 느끼고 학생은 스승에게 감사를 돌린다. 또 청춘 남녀는 흔히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알게 되거나 맞선을 보거나 하여, 약혼하고 결혼한 후 가정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게 된다. 이때 선을 보는 것과 약혼하는 것은 상대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요, 결혼과 서로간의 사랑은 수수작용을 하는 것이다. 또 태양과 혹성은 46억여년 전에 상대적 관계를 맺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유인력에 의해 힘을 주고 받는다. 이것도 수수작용이다. 이때 혹성들은 태양 주위를 돌게 된다.

 

원상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심정(心情)을 중심으로 성상과 형상이 수수작용을 하면 중화체(中和體) 또는 합성체(合性體)를 이루게 된다. 이것은 영원히 그 자존성을 유지하는 자기동일적(自己同一的)인 측면이다. 그리고 원상에는 목적(창조목적)을 중심으로 성상과 형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번식체, 또는 신생체(피조물)를 만드는 측면도 있다. 이것이 변화, 발전의 측면이다. 전자의 경우가 자동적수수작용(自同的授受作用))이고 후자의 경우가 발전적수수작용(發展的授受作用)이다. 마찬가지로 피조세계의 수수작용에 있어서도 자동적수수작용과 발전적수수작용의 양측면이 있다. 피조세계는 닮기의 법칙에 의하여 원상(原相)의 속성을 본따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은하계를 보면 중심의 핵항성계(核恒星系)와 그것을 중심으로한 약 2천억 개의 별(항성)사이에 수수작용이 행해지고 있다. 그런데 볼록렌즈형을 한 은하계의 모습은 언제나 일정하다. 또 모든 별은 일정한 궤도(軌道)를 지키면서 회전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은하계의 불변의 한 측면이다.

 

그런데 은하계가 처음에는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으나 점차 그 회전의 속도가 빨라져 왔다고 한다. 또 은하계에서는 항상 낡은 별은 소멸하고 새로운 별이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은하계에는 부단히 변화하는 면도 있다. 따라서 은하계에서 벌어지는 수수작용에도 자기동일적인 것과 발전적인 것이라는 두 측면이 있음을 알게 된다. 또 원상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성상의 내부에 두 내적요소(內的要素) 즉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두 부분이 있다. 이 두 내적요소가 심정 또는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주체, 대상의 관계를 맺고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합성체(合性體) 또는 신생체(新生體)를 이룬다. 이것이 내적수수작용이다. 그리고 상기(上記)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이 심정 또는 목적을 중심으로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체 또는 신생체를 이루는 것이 외적수수작용이다.

 

하나님에 있어서의 이같은 내적수수작용과 외적수수작용의 2단작용(作用)은 동시에 2단의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기 때문에 이것을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라고도 한다. 이 이단구조는 그대로 피조세계에도 적용된다. 그리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반드시 내적으로 주체와 대상의 두 요소를 지님과 동시에 외적으로도 타자와 더불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맺고 있다. 예컨대 인간과 만물(자연)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은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수수작용 즉 내적수수작용을 행하면서(즉 생각하면서) 외적수수작용에 의하여 만물을 인식하고 주관한다. 이때 인간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을 내적수수작용이라 하며, 인간과 만물(또는 인간과 인간)과의 수수작용을 외적수수작용이라 한다. 그런데 수수작용에는 여러가지의 유형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주체와 대상이 의지 또는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 구별되는 유형이다. 수수작용의 유형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양측의식형(兩側意識型)

 

학교의 수업시간에 있어서 교사는 주체요, 학생은 대상인데 양자가 다같이 의식(意識)을 가지고 수수작용을 한다. 이와 같은 경우를 양측의식형의 수수작용이라고 한다. 인간과 인간의 수수작용 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 동물과 동물에 있어서도 쌍방이 의지 또는 목적의식(意識)을 가지고 수수작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경우도 양측의식형의 수수작용이다.

 

   2) 편측의식형(片側意識型)

교사가 백묵으로 흑판에 글을 쓸 때, 교사와 백묵 사이에도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그 경우 교사는 의식을 가지고 있으나 백묵은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이 한편(주체)은 의식을 가지고 있으나 다른 한편(대상)은 다만 피동적으로만 움직이는 경우, 이것을 편측의식형의 수수작용이라고 한다.

 

   3) 무자각형(無自覺型)

 

동물이 호흡작용을 할 때, 식물로부터 방출된 산소를 흡입(吸入)하고 탄산가스를 방출한다. 한편 식물은 광합성작용을 할 때, 동물로부터 나온 탄산가스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보낸다. 이때 동물은 의식적으로 식물을 위해 탄산가스를 방출하는 것이 아니며, 식물도 의식적으로 동물을 위해 산소를 내보내는 것이 아니다. 양쪽 다같이 무의식중에 탄산가스와 산소를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체와 대상의 양자 혹은 한편(주체)이 의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서로 무자각적으로 수수작용을 하고 있는 경우, 이것을 무자각형의 수수작용이라고 한다.

 

   4) 타율형(他律型)

 

주체와 대상이 모두 의식은 없으나 제삼자의 의지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수수작용을 하게 되는 경우, 이것을 타율형의 수수작용이라고 한다. 예컨대 태양(주체)과 지구(대상)의 수수작용이 그러하다. 태양과 지구는 무의식중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의지)에 따라 타율적으로 수수작용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 시계도 여러 부품들이 서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시간을 가리키고 있으나 그것은 시계를 만든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그렇게 움직이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경우를 타율형의 수수작용이라고 한다.

 

   5) 대비형(對比型)

 

인간이 둘 또는 다수의 사물을 대비(대조)하여 그들 사이에 조화를 발견할 때, 인간은 그들이 수수작용을 하고 있다고 주관적으로 간주한다. 이것을 대비형 또는 대조형(對照型)의 수수작용이라고 한다. 대비형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인간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한편의 요소를 주체로, 다른 한편의 요소를 대상으로 가정(假定)(想定)하여 대비를 함으로써 그 두 요소(주체와 대상)가 수수작용을 하고 있다고 간주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형의 수수작용은 주관적인 수수작용이다.

 

이 대비형의 수수작용을 특히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가 예술의 창작이나 감상활동이다. 예술가는 작품을 만들 때, 색과 색, 빛과 그림자 그리고 양과 음 등이 조화를 이루도록 조절한다. 또 감상자는 작품을 대할 때 작품중의 여러가지 물리적요소를 대비하여 조화를 발견하려고 한다. 사고(思考)에 있어서도 대비형의 수수작용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이 꽃은 장미꽃이다라는 판단은 이 꽃을 주체, 장미를 대상으로 하여 대비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인식에 있어서는 외계의 대상에서 오는 형태, 색, 향기 등의 감각적내용과 인간 주체가 가지고 있는 원형(原型) 즉 일정한 관념군(觀念群)이 대비되어서 인식이 이루어진다. 인식론에 있어서는 특히 이 대비과정을 조합(照合)이라고 하며, 따라서 조합도 역시 대비형의 수수작용인 것이다.

 

  (4) 상대물(相對物)과 대립물(對立物)

 

개성진리체 속에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누차 설명했는데, 그와 같은 상대적 요소를 간단히 상대물(相對物)이라고도 표현한다. 주체와 대상은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상대적 관계를 맺은 후 원만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합성체를 이루거나 번식체를 만들거나 한다(통일사상에서는 수수작용의 법칙을 간단히 수수법(授受法)이라고도 한다). 한편 유물변증법은 모든 사물속에는 반드시 대립물(對立物)과 모순(矛盾)을 내포하고 있으며, 대립물의 투쟁에 의해서 사물은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통일사상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물은 상대물의 원만한 수수작용에 의해 발전하는 것일까, 혹은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이 주장한 바와 같이 사물은 대립물의 투쟁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일까. 모든 사물은 반드시 두 가지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통일사상과 유물변증법은 일치한다. 그러나 발전에 관해서는 양쪽의 주장이 다르다. 어느 쪽이 옳은가는 사물속에 내재한 이 두 가지 요소의 관계를 검토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두 요소 사이에 공통목적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만일 공통목적이 내포되어 있음이 확인되면 두 가지 요소는 상대물이고, 없으면 대립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또 두 요소의 상호작용이 조화적인 것인가, 혹은 투쟁적인 것인가를 검토해 보아, 조화적이면 수수작용이고 그렇지 않으면 변증법적인 작용이다. 그리고 또 두 요소의 격위(格位)가 같으냐, 다르냐를 밝힘으로써도 양자의 구별을 확정지을 수 있다.

 

마르크스는 사물이 변증법에 의해서 발전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실례로는 인간사회의 문제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즉 대립물의 투쟁에 의해서 발전하는 자연만물의 실례는 하나도 들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그와 같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엥겔스가 자연과학을 연구한 후 그 성과를 자연변증법(自然辨證法)과 반(反) 듀링론에서 밝혔는데, 그는 거기에서 자연은 변증법의 검증이다'9)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자연의 현상은 예외없이 변증법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p.203

 

그런데 엥겔스가 실례로 든 자연현상을 잘 검토해 보면, 거기에서 투쟁은 전연 발견되지 않는다. 도리어 공통목적을 중심으로 한 조화적인 작용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이에 관한 상세한 예증(例證)은 지면관계로 생략한다). 따라서 자연은 변증법(辨證法)의 검증이 아니라 도리어 수수법(授受法)의 검증이 되고 있다. 단지 인간사회에 있어서는 인간 조상의 타락 때문에,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수많은 투쟁이 벌어져 왔던 것이다.

 

 3. 존재양상(存在樣相)

 

다음은 존재자(存在者)가 어떠한 양식(樣式)으로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즉 존재양상(存在樣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피조물의 존재양식은 운동이다. 이 운동은 물론 시간, 공간내에서의 물리적 운동을 말한다. 즉 존재양상(存在樣相)은 피조세계에만 성립(成立)하는 시공적(時空的)인 개념이다. 하나님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공적(時空的) 성격을 띤 운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원상(原相)내에 존재양상(存在樣相)이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피조세계의 존재양상(存在樣相)에 대응하는 원형은 원상내(原相內)에 있는 것이다.

 

  (1) 원환운동(圓環運動)

 

피조세계에 있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는 두 요소 또는 두 개체(個體)가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수수작용을 하면, 그 결과로서 합성체(合性體)가 생김과 동시에 운동이 시작된다. 이때의 중심인 목적은 존재자(存在者)(만물)가 아니며, 또 합성체는 수수작용의 결과로서 생기는 상태에 불과하므로, 수수작용에 있어서 실제로 운동에 관여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의 두 요소(개체) 뿐이다. 이 때의 수수작용의 중심(目的)은 주체와 대상의 중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체 속에 있다. 따라서 수수작용에 의한 운동은 주체를 중심으로 한 원환운동(圓環運動)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2-6과 같다.

 

   

                     그림 2-6 수수작용에 의한 원환운동

 

예컨대 원자(原子)에 있어서는 전자(電子)가 핵(陽子)을 중심으로 돌고 있고, 태양계에 있어서 혹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 수수작용의 중심인 목적이 각각 핵과 태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피조세계에 있어서 주체와 대상은 왜 이와 같은 운동을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세계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으니, 운동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에게 원환운동과 같은 존재양상은 없다 하더라도 피조세계의 원환운동의 원형(原型)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수수작용의 원만성(圓滿性), 원화성(圓和性), 원골성(圓滑性; 원활성)이다. 원상에서는 성상과 형상이 심정(心情)(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원만한 수수작용을 하고 있는 바, 이 수수작용의 원만성 또는 원화성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상징적으로 전개된 것이 바로 원환운동(圓環運動) 다.

 

만물세계는 하나님의 속성의 상징적(象徵的)인 표현체이다. 예컨대 바다의 넓음은 하나님의 마음의 넓음을 상징하며, 태양의 열은 하나님의 사랑의 따뜻함을 상징하고, 태양의 빛은 하나님의 진리의 밝음을 상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피조세계의 원환운동도 하나님의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것인 바, 그것이 곧 원상내의 수수작용의 원화성(圓和性)이다. 수수작용의 원화성의 표현인 원형은 동시에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원상에 있어서 수수작용의 원화성(圓和性)은 심정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사랑은 모서리가 없는 것으로서 원형(圓形)으로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원상(原相)도 도면으로 표시할 때, 원형(圓形) 또는 구형(球形)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형(無形)이어서 일정한 모습은 없다. 그 대신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존재한다. 즉 하나님은 무형(無形)이며 무한형(無限形)으로서 이것을 물에 비유할 수 있다. 물에는 일정한 形이 없지만 사각의 용기에 넣으면 사각으로, 삼각의 용기에 넣으면 삼각으로, 둥근 용기에 넣으면 둥근 모습으로 나타난다. 용기에 따라 어떤 모양으로도 나타난다. 즉 무한형(無限形)이다. 그러나 물의 대표적인 모양이 있다면 그것은 구형(球形)이다. 그것은 물방울이 구형인 것으로써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때로는 파도와 같은 모습으로, 때로는 바람의 모습으로도 나타나며, 또 때로는 불꽃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대표적인 모양이 있다면 그것은 구형(球形)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원상(原相)은 원형(圓形) 혹은 구형(球形)으로 표시될 수 있다. 만물도 원상을 닮아서 모두 기본적인 형태는 구형을 이루고 있다. 원자나 지구, 달, 태양, 별 등은 모두 구형으로 되어 있다. 생물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식물의 씨(種子)나 동물의 알(卵)은 기본적으로는 모두 구형이다. 그리고 만물의 운동이 원환운동이라 함은 상술한 바와 같이 원상의 수수작용의 원화성(圓和性)을 닮은 때문임은 물론이지만 또 원상 자체의 구형성(球形性) 혹은 원형성(圓形性)을 닮은 때문이기도 하다.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할 때, 원환운동(圓環運動)이 벌어지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원환운동이 수수작용의 표현 형태이기 때문이다. 만일 대상이 주체를 중심으로 돌지 않고 직선적으로 운동한다면, 결국은 주체를 떠나고 말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은 수수작용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수수작용을 할 수 없다면 피조물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오직 수수작용에 의해서만 생존(存續)과 번식(發展)과 통일의 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대상은 주체와 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이 주체의 주위를 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자전운동(自轉運動)과 공전운동(公轉運動) p.206

 

다음은 자전운동(自轉運動)과 공전운동(公轉運動)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어떠한 개체든지 원환운동을 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자전운동과 공전운동이라는 두 가지의 운동을 동시에 행하게 된다. 모든 개체는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면서 연체(聯體)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개체는 내적으로 수수작용을 하면서 동시에 외적으로도 수수작용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 이 두 가지 수수작용에 대응(對應)하는 두 가지의 원환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내적수수작용에 의한 원환운동이 자전운동(自轉運動)이요, 외적수수작용에 의한 원환운동이 공전운동(公轉運動)이다.

 

예컨대 지구는 자전하면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公轉)하고 있고, 전자(電子)도 자전하면서 원자핵을 중심으로 돌고(공전) 있다. 피조물에 있어서 이와 같이 자전운동과 공전운동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은 만물의 안 밖의 운동(수수작용)이 원상에 있어서의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의 원화성(圓和性)과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의 원화성(圓和性)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내적 및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 때에는 반드시 내적사위기대 및 외적사위기대가 목적을 중심으로 형성된다(피조물(被造物)은 원상과는 달리 어떠한 사위기대(四位基臺)든지 모두 그 중심에 목적이 세워진다). 그리고 이 내적 및 외적사위기대 형성에 있어서, 결과가 합성체(合性體)인 경우와 신생체(新生體)인 경우의 두가지가 있게 된다. 여기서는 결과가 합성체인 경우만을 살펴보자.

 

원상(原相)에 있어서, 결과가 합성체인 경우의 수수작용 즉 사위기대는 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였으며 여기에 다시 내적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와 외적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가 있었는 바, 이것이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였다. 피조물도 원상의 사위기대(수수작용)를 닮은 내적자동적사위기대와 외적자동적사위기대를 이루고 있는 바, 이것이 존재(存在)의 2단구조(構造)이다. 수수작용은 사위기대를 터로 하고서 벌어지며, 수수작용 때에는 반드시 원환운동(圓環運動)이 나타난다. 따라서 내적 및 외적사위기대에서 내적 및 외적수수작용이 벌어지는 동시에 내적 및 외적인 원환운동이 벌어진다. 이때의 내적원환운동이 바로 자전운동(自轉運動)이며, 외적원환운동이 공전운동(公轉運動)이다.

 

  (3) 원환운동(圓環運動)의 제형태(諸形態, 여러 형태)

 

그런데 피조세계에 있어서 실제로 공간적인 원환운동을 하고 있는 것은, 천체(天體)와 원자(原子) 내의 소립자뿐이며, 그 외의 만물은 문자 그대로의 원환운동을 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식물은 일정한 위치에 고정되어 있으며, 동물도 비록 움직이고는 있지만 원환운동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피조물들도 그 존재양상(存在樣相)의 기본형은 역시 원환운동이며, 다만 그것이 변형(變形)되어서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된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피조물의 원환운동이 변형된 이유는 각 피조물의 창조목적(創造目的) 즉 전체목적과 개체(個體)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함이다. 이리하여 실제로 나타난 원환운동의 형태에는 몇 가지의 유형이 있게 된다. 기본적 원환운동, 변형된 원환운동, 정신적 원환운동이 그것이다.

 

   1) 기본적(基本的) 원환운동(圓環運動)

 

여기에 다시 공간적 원환운동과 시간적 원환운동의 두 가지가 있다. ①공간적(空間的) 원환운동(圓環運動)...... 이것은 물리적, 반복적인 원환운동으로서 천체(天體)와 소립자의 자전운동 및 공전운동이 그 예이다. 즉 원상내의 자동적수수작용이 공간적성격을 띠고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의 원환운동이지만 항상 거의 같은 궤도(軌道)를 돌고 있으므로 반복운동(反復運動)이기도 하다. ②시간(時間)的 원환운동(圓環運動)(螺旋形運動)... ... 이것은 生物(생명(生命))의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의 반복과 계대현상(繼代現象)을 말하는 것으로서, 식물의 경우 한 알의 씨에서 싹이 난 후 성장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새로운 씨)를 맺는 바, 이 새로운 씨는 처음의 씨보다 수가 많으며, 이 씨가 또 땅에 심겨진 후 싹이 나고 성장하여, 또 새로운 열매(씨)를 맺는다. 동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수정란(受精卵)이 성장하여 새끼가 되고, 새끼가 성장하여 어미 동물이 되면, 다시 새로운 수정란을 지니게 된다. 이 새로운 수정란이 다시 성장하여 어미가 된다. 이와 같이 식물도 동물도 라이프 사이클(生活史)을 반복(反復)하면서, 즉 대를 이어가면서 종족을 보존한다. 이와 같은 종족 보존을 위한 계대현상(繼代現象)도 일종의 원환운동인 바, 이 운동은 목적성(目的性), 시간성(時間性), 단계성(段階性)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것을 특히 나선형운동(螺旋形運動)이라고 하며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2-7과 같다.

 

   

그림 2-7 나성형운동

 

여기서 생물의 나선형운동(螺旋形運動), 즉 종족의 보존과 번식의 의미를 해명하고자 한다. 만물은 인간의 기쁨(美)의 대상인 동시에 주관(主管)의 대상(對象)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만물의 종족 보존과 번식은 인간들의 부단한 계대(繼代; 대를 이음)와 번식(繁殖)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육신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영인체(靈人體)만이 영생(永生)한다. 즉 육신을 터로 하고 영인체가 완성하면 육신이 죽은 뒤 그 성숙(成熟)된 영인체가 영계에서 영원히 살게 되어 있다(단, 인간의 타락(墮落)에 의하여 오늘날까지 인간의 영인체는 미완성한 채로 영계에 가 있다). 영인체(靈人體)의 완성이란 창조목적을 완성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성장하여 인격을 완성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번식(繁殖)하고 만물을 주관(主管)하는 것, 즉 삼대축복(三大祝福)의 완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상에 사는 인간은 일정한 수명을 누리다가 영인체는 영계에 가고 육신은 번식을 통하여 다음 대로 이어진다. 만물들은 이와 같이 지상인의 기쁨과 주관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만물 역시 대를 이으면서 종자를 보존하고 번식하게 된다. 이상이 시간적(時間的) 원환운동에 관한 설명인데, 이러한 원환운동은 모두 원상 내의 발전적수수작용이 주로 시간적(時間的), 계기적(繼起的) 성격을 띠고 나타난 것이다.10) p.210

 

   2) 변형(變形)된 원환운동(圓環運動)

 

여기에는 다시 고정성(固定性)운동과 대체성운동(代替性運動)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 ①固定性運動...... 이것은 원환운동이 한 개체의 창조목적 수행을 위해서 고정화된 것이다. 마치 정지위성(靜止衛星)이 그 목적수행을 위해서 일정한 위치에 고정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의 경우,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원자가 마음대로 운동한다면 지구는 가스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거기에서 살 수 없게 된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지구가 되기 위해서는, 원자와 원자가 굳게 결합하고 고정되어서 굳은 지각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인간이 사는 환경을 만들기 위하여(전체(全體)목적을 위하여) 원환운동의 형태를 변형시킨 후 고정화(固定化)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물체의 각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도 모두 서로 결합한 후 고정되어 있다. 예컨대 동물의 심장(心臟)을 이루고 있는 세포(細胞)는 서로 결합하고 있는 바, 이것은 심장의 기능인 신축작용(伸縮作用); 전체목적(全體目的)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세포들이 서로 떨어져서 개별적으로 운동한다면, 심장은 그 기능을 다 할 수 없게 된다. ②대체성운동(代替性運動)... ... 그런데 동물에 있어서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이 직접 원환운동을 하지 않는 대신, 혁액(血液)과 임파액(淋巴液)이 체내를 돌면서 세포와 세포를 연결시킴으로써, 세포들이 서로 원환운동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效果)를 나타내고 있다. 식물에 있어서도 도관(導管; 물관 [vessel])과 사관(篩管; 체관 [sieve tube])을 통하여 양분이 체내를 돌면서 세포와 세포를 연결시키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포들이 원환운동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혈액(血液)이나 임파액(淋巴液), 또는 양분(養分)이 유통하면서 세포의 원환운동을 대신하는 것을 대체성원환운동(代替性圓環運動) 혹은 대체성운동(代替性運動)이라고 한다. 지구에 있어서의 맨틀(mantle)의 대류(對流)라든지 플레이트(plate: 地球表面의 岩盤)의 이동 등도 대체성운동으로 볼 수 있으며, 경제생활에서의 상품이나 화폐의 유통도 역시 대체성운동에 속하는 원환운동으로 볼 수 있다.

 

   3) 정신적 원환운동(精神的 圓環運動)

인간에 있어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수수작용은 물리적인 원환운동이 아니며 생심(生心)이 원하는대로 육심(肉心)이 호응한다는 의미에서 정신적인 원환운동이다. 또 가정이나 사회에 있어서 인간과 인간의 원만한 수수작용은 주체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대상의 마음이 호응한다는 의미에서 역시 정신적인 원환운동이다. 예컨대 부모와 자녀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잘 지도하면 자녀는 부모의 뜻을 잘 따르게 된다. 이때 자녀가 부모의 뜻에 잘 따르는 것이 정신적인 원환운동이다.

 

  (4) 성장(成長)과 발전운동(發展運動)

 

   1) 통일사상의 발전관

 

여기서 성장과 발전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은 통일사상의 발전관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이다. 생물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 생명이란 원리의 자율성(自律性)과 주관성(主管性)을 말하며, 생물체에 잠재(潛在)하고 있는 의식성(意識性)을 지닌 에너지(또는 에너지를 지닌 의식(意識))를 말한다. 생물의 성장은 이 생명(生命), 즉 원리의 자율성과 주관성에 기인하는 바, 그것은 생물체에 잠재하고 있는 의식(意識)과 에너지의 통일物(의식성 에너지)인 것으로서 이 의식성(意識性)에너지의 운동이 바로 생명운동(生命運動)이다.

 

자율성이란 외부로부터 강요받지 아니하고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能力)이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돌고 있으나 그것은 단지 기계적(機械的)인 법칙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생명은 기계적인 법칙에 따르면서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을 조정(調整)하면서 여러 가지의 환경변화(環境變化)에 대처한다. 그렇게 해서 성 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원리(原理)의 자율성(自律性)이다.

 

한편 원리의 주관성이란 주위에 대하여 영향을 주는 작용을 말한다. 식물에 있어서 그 씨를 땅에 심으면 발아한 후 줄기가 자라고, 잎이 나는 등 성장(成長)하게 되는데, 그러한 힘 그 자체는 원리(原理)의 자율성이지만 동시에 그 식물은 주위에 영향을 주면서 성장한다.11) 동물에 산소를 공급한다든지 꽃을 피워서 벌과 나비를 부르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원리(原理)의 주관성(主管性)이다. 따라서 생명은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율성이고, 주위에 영향을 준다는 측면에서 보면 주관성이다. 이와 같이 생명에 의한 생물의 성장운동이 바로 발전운동이다. 그런데 피조물에는 모두 創造目的(被造目的)이 주어져 있다. 생물에도 피조목적이 주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生物(예컨대 식물(植物))에 피조목적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생물(生物) 속의 생명(生命)이 그 목적을 의식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생물의 성장은 처음부터 목표(目的達成)를 지향하는 운동인 것이다. p.213

 

따라서 발전에는 목표와 방향이 있게 마련이니 그것은 생명에 의해 정해지게 된다. 즉 식물의 경우 종자 속에는 생명이 있어서, 이 생명이 종자로 하여금 나무와 과실을 목표로 하여 성장하도록 작용하게 된다. 또 동물의 경우 알(受精卵)속에도 역시 생명이 있어서, 알로 하여금 성체(成體)를 목표로 하여 성장하도록 작용한다. 여기서 우주 발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빅뱅이론에 의하면, 우주(宇宙)는 처음에는 극히 고온(高溫)으로서 고밀도(高密度)의 극히 작은 에너지 덩어리였으나 150~200억 년 전에 이 작은 덩어리가 대폭발(大爆發)과 함께 팽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팽창하면서 소용돌이를 이룬 뜨거운 가스가 냉각(冷却)되고 응축(凝縮)되면서 여러 은하(銀河)가 형성되었으며, 각 은하속에 많은 별(恒星)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별(恒星)의 대부분은 혹성에 둘러싸이게 되었는데, 그 혹성(惑星) 중의 하나가 지구(地球)이며 이 지구에 생명이 발생하고 드디어 인간이 나타났다. 이것이 오늘날 알려져 있는 과학적인 우주 발전관의 골자이다. 그런데 이 우주의 발전은 생물의 成長(발전)과 어떻게 다른가. 생물과는 달리 단순한 물리화학적 법칙에 의한 발전인가, 아니면 생물의 경우처럼 생명에 의한 발전인가.

 

이 우주(宇宙)의 발전을 비교적 단기간의 과정만으로 다룬다면, 우주의 발전은 단순한 물리화학적 법칙에 의한 발전으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억 년의 오랜 기간을 하나의 발전과정으로 살펴 볼 때, 우주는 물리화학적 법칙에 따르면서도 일정한 방향을 향하여 진행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우주의 발전에는 일정한 목표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목표(目標)란 우주의 주관주(主管主)인 인간의 출현을 뜻한다. 즉 인류의 출현을 향하여 우주가 발전해 온 것이다. 우주의 발전에 이와 같은 방향성을 제시해 준 것은 우주의 배후에 잠재(潛在)해 있던 어떤 의식(意識)의 힘이며, 이것을 `우주의식(宇宙意識)' 혹은 `우주생명(宇宙生命))'이라고 부른다. 식물의 종자(생명체(生命體))가 발아한 후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주의 발전에 있어서도 처음에 우주적인 종자(생명체(生命體))가 형성되어 그것이 오늘날까지 팽창하면서 성장해 왔으며, 그 성장의 최종적인 열매가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과실이 과수(果樹)의 목표인 것과 같이, 인간이 우주 발전의 목표였던 것이다. 앞에서 성장은 생물(有機體)에게만 있는 현상이라고 했지만 150~200억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의 안목으로 우주를 볼 때, 우주 전체는 하나의 거대(巨大)한 유기체로서 계속 성장해 왔다고 보는 것이다.

 

   2) 공산주의(共産主義)의 발전관(發展觀)

 

다음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발전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발전은 일정한 목표를 지향하는, 즉 목적성을 띤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운동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발전을 목적성을 띤 운동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또한 공산주의는, 발전은 사물의 내부의 모순(矛盾)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발전에는 법칙성(法則性)과 필연성(必然性)만이 인정될 뿐이라고 하면서 목적(目標)을 부정한다. 왜 그럴까. 만일 목적을 인정한다면 그 목적을 세운 근원자(根源者)가 누구인가 라는 문제가 제기되며, 목적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의지(意志)나 이성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주가 생겨나기 전에 목적을 세운 이성이 있다면 그 이성은 바로 신(神)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결국 신(神)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며, 신(神)을 인정하게 되면 무신론(無神論)인 공산주의는 파탄되므로, 그들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목적만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발전에 있어서 필연성과 법칙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반드시 목적성(目的性)이 있음을 주장한다. 발전의 주체는 생명(生命)이며, 생명은 목적성을 지닌 의식성(意識性)의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발전에 있어서의 법칙성(法則性), 필연성(必然性)은 모두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즉 법칙성과 필연성은 만물로 하여금 그 목적(創造目的)을 달성하도록 하기위해서 만물에 부여되었던 것이다.

 

원상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상에 있어서 內的性相(理性)과 內的形狀(법칙)이 목적을 중심으로 수수작용을 할 때 로고스가 형성된다. 로고스는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체이다. 여기서 법칙은 하나님의 우주창조 이전부터 창조목적의 실현을 위해서 하나님의 내적형상(內的形狀) 內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물론자(唯物論者)들은 우주의 발전에 있어서 목적성을 부정했기 때문에, 인간은 다만 법칙(法則)의 필연성(必然性)에 의해서 탄생한 무목적적(無目的的)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목적을 지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간은 우연적(偶然的) 존재(存在)에 불과하며 그런 인간에게는 가치(價値)의 생활이나 도덕적(道德的)인 생활 모두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은 세계는 힘이 강한 者만이 사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공산주의(共産主義)의 운동관(運動觀)

 

공산주의는 물질(物質)을 `운동(運動)하는 물질(物質)'로서 파악하고 있다. 예컨대 엥겔스(F. Engels, 1820~1895)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운동(運動)은 물질의 존재양식(存在樣式)이다. 운동이 없는 물질은 언제 어디에도 없었고 또 있을 수 없다....... 운동(運動)이 없는 물질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물질이 없는 운동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12) 공산주의가 이와 같이 운동을 물질의 존재양식(存在樣式)이라고 주장한 것은 신(神)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함이다. p. 216

 

우주(宇宙)를 거대한 기계로서 파악한 뉴톤은 그 기계를 만들고 가동시킨 존재로서 신(神)을 인정했다. 물질과 운동을 분리해서 생각해 보면 운동은 물질 이외의 다른 존재(存在), 예컨대 신(神)과 같은 존재에 의해서 작동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형이상학(形而上學)的인 운동관을 방지하기 위해서, 운동은 물질이 본래부터 구비(具備)하고 있는 존재양식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사물은 존재하고 운동한다. 따라서 운동은 역시 만물의 존재양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운동은 한 개체에만 속해 있는 존재양식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할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現象)으로서, 수수작용 없이 만물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운동이 만물의 존재양식(存在樣式(樣相))인 것이다. 그런데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은 창조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작용이다. 따라서 운동은 창조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창조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과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고 있고, 그 때문에 자전운동(自轉運動)과 공전운동(公轉運動)을 하게 된다.

 

공산주의는 운동이 물질의 존재양식이라고 하면서도 왜 물질이 그와 같은 존재양식을 갖는가, 그리고 그 운동의 형태는 어떠한가(直線運動인가 圓環運動)인가 등)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없이, 다만 사물은 대립물(對立物)의 투쟁에 의해서 운동하고 있다고만 주장하고 있다.

 

 4. 존재격위(存在格位)

 

모든 개체(個體)에는 반드시 각자의 존재위치(存在位置)가 주어져 있다. 개체에게 주어져 있는 위치를 존재격위(存在格位)라고 한다. 그리고 한 개체는 다른 개체와 더불어 주체와 대상의 관계, 즉 수수의 관계를 맺는데 이 때 주체와 대상의 격위에 차이가 생긴다.

 

  (1) 연체(聯體)로 본 존재격위(存在格位)

 

그런데 한 개체는 개성진리체인 동시에 연체(聯體)이기 때문에 대상(對象)의 位置(대상격위)에 있으면서 동시에 주체(主體)의 位置(주체격위)에도 있게 된다. 그 결과 수많은 개체가 上下, 전후(前後), 좌우(左右)로 연결되면서 位置(격위)의 계열(系列)이 이루어진다. 이 위치의 계열이 질서이다. 이같은 주체격위와 대상격위의 계열, 즉 연 체의 계열은 원상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의 격위가 三차원의 공간(空間)의 세계인 피조세계에 전개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있으나 그것들은 모두 연체이기 때문에, 격위의 차이를 통하여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일대(一大) 질서체계(秩序體系)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우주질서는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를 닮은 존재(存在)의 2단구조(構造)가 연속적, 단계적으로 확대되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연체는 또 이중목적체(二重目的體)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주는 一大 유기체이기도 하다. 이같은 유기체 질서의 최상위에 인간이 위치하고 있고 인간의 상위에 하나님이 위치한다.

 

  (2) 종적질서(縱的秩序)와 횡적질서(橫的秩序)

 

그런데 우주의 질서에는 종적인 질서와 횡적인 질서가 있다. 우주의 종적질서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달(위성)과 지구(혹성)가 대상과 주체(主體)의 관계로 수수작용을 하고 있다. 또 지구는 태양과 수수작용을 하여 다른 혹성과 함께 태양계를 형성하고 있는 바, 이 때 지구는 대상이고 태양이 주체이다. 다음에 태양은 다른 많은 항성과 더불어 은하계의 중심에 있는 핵항성계와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은하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때 태양은 대상이고 은하계의 중심인 핵항성계(核恒星系)는 주체이다. 또 은하계는 다른 많은 은하계와 더불어 우주의 중심부와 수수작용을 하여 우주전체(宇宙全體)를 형성하고 있다. 그 때 은하계는 대상이고 우주의 중심부가 주체이다. 이러한 달(衛星), 지구(惑星), 태양(恒星), 핵항성계, 우주의 중심으로 이어지는 계열이 우주(宇宙)의 종적(縱的)인 질서이다.

 

다음은 우주의 횡적질서(橫的秩序)의 예를 들어보자. 태양계를 보면 태양을 중심으로하여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등 아홉 개의 혹성이 횡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태양을 중심으로 한 이들 혹성간의 배열이 태양계에 있어서의 횡적인 질서이다. 이러한 횡적질서가 다른 항성계(恒星系)에도 나타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태양계의 태양 중심의 종적질서와 횡적질서를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2-8과 같다.

 

   

 

  (3) 우주질서(宇宙秩序)와 가정질서(家庭秩序)

 

가정(家庭)도 본래는 우주와 같은 질서체계(秩序體系)를 이루는 것이 그 본연의 모습이다. 가정에는 손자, 자녀,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라는 종적인 질서와, 부모를 중심한 자녀(子女)들인 형제자매의 서열(序列)로서 횡적인 질서가 있다. 가정의 종적질서(縱的秩序)와 횡적질서(橫的秩序)를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2-9와 같다.

 

  

                      그림 2-9 가정의 종적인 질서와 횡적인 질서

 

통일사상에 의하면 구성요소(構成要素)로 볼 때 인간은 소우주(小宇宙)이며 우주의 축소체(縮小體)이다. 그리고 질서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정은 우주의 축소체이다. 그리고 우주는 가정의 확대형이다. 한 은하계 안에는 태양계와 같은 혹성계가 무수히 있다고 하며, 또 대우주에는 은하계가 또한 무수히 있다고 한다. 따라서 우주는 무수한 천체가정(天體家庭)의 집합체(集合體)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주는 원만한 수수작용에 의해서 그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태양계는 태양을 중심으로 한 아홉 개의 혹성이 태양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각각 일정한 궤도(軌道)를 돌면서 원반형(圓盤形)을 유지하고 있다. 은하계는 약 2천억 개로 추산되는 항성(恒星)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며, 이 항성들은 그 중심인 핵항성계(核恒星系)와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각각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돌면서 전체가 볼록렌즈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또 우주에는 약 2천억 개의 은하계가 있으며, 각각의 은하계는 역시 우주의 중심과 수수작용을 하면서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돎으로써 우주 전체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우주의 질서가 가정(家庭)에도 적용됨으로써, 가정도 본래는 각 격위(格位)間의 원만한 수수작용에 의해서 질서가 유지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천체(天體) 상호간의 원만하고 조화로운 수수작용(천도(天道))에 의해서 우주의 질서와 평화가 유지되듯이 가정에 있어서도 조화로운 수수작용의 법칙(法則) 즉 사랑의 도리(道理)에 의해서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 사랑의 도리가 바로 윤리이며 천도에 대응하는 가정의 규범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 때문에 가정은 본래의 질서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가정윤리가 파탄됨으로써 불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따라서 가정의 연장(延長)이요, 확대형인 사회에도 끊임없는 혼란이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5. 우주(宇宙)의 법칙(法則)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법칙(法則)(진리)을 천도(天道)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주체와 대상의 원만한 수수작용을 말한다. 우주(宇宙)의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에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개의 특징(特徵) 또는 소법칙(小法則)이 있다.

 

  (1) 상대성(相對性)(의 법칙(法則))

 

모든 존재는 그 자체(自體) 내부(內部)에 주체와 대상이라는 상대적 요소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 다른 존재와도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이 상대성(相對性)이다. 이와 같은 상대성을 갖지 않으면 만물은 존재하거나 발전할 수 없다.

 

  (2) 목적성(目的性)과 중심성(의 법칙(法則))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요소는 반드시 공동목적을 갖고 있으며(目的性), 그 목적을 중심으로(中心性) 수수작용을 하고 있다.

 

  (3) 질서성(秩序性)과 위치성(位置性)(의 法則)

 

모든 개체에는 각자가 존재하는 위치 즉 격위가 주어져 있으며(秩序性), 그러한 격위(位置性)에 의하여 일정한 질서가 유지된다.

 

  (4) 調和性(의 法則)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은 원화성(圓和性)이며 조화(調和)的이어서(조화성(調和性)), 거기에는 대립이나 투쟁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그 곳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5) 개별성(個別性)과 關係性(의 法則)

 

모든 개체는 개성진리체이면서 동시에 연체(聯體)이다. 따라서 각 개체는 고유한 특성(개별성)을 지니면서 다른 개체와 일정한 關係(授受關係)를 가지고(關係性)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6)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과 發展性(의 法則)

 

모든 유기체(有機體)는 일생을 통하여 변치않는 본질(本質) 즉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성장과 더불어 변화하고 발전하는 면(面) 즉 발전성을 가지고 있다. 우주도 일종(一種)의 유기체로서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7) 원환운동성(圓環運動性)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대상은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돌고 있으며, 시간적(時間的) 또는 공간적(空間的)으로 원환운동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우주(宇宙)의 小법칙(法則)들은 로고스의 작용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미 원상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는 법칙이면서도 심정을 터로 한 이성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 로고스의 배후에는 사랑이 작용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주를 로고스로 창조하실 때 심정과 사랑을 동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문선명 선생(文鮮明 先生)은 우주에는 물리적인 힘뿐만 아니라 사랑의 힘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 우주의 법칙이 개인에게 적용되면 도덕이 되고, 가정에 적용되면 윤리가 된다. 즉 우주의 법칙과 가정의 윤리법칙은 대응(對應)관계(關係)에 있다. 따라서 가정을 확대한 것이 사회이므로 사회에도 천도(天道)에 대응하는 사회윤리가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우주의 법칙을 위반(違反)하면 개체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태양계의 혹성(惑星) 中의 하나가 궤도(軌道)를 이탈하면 그 혹성은 자체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태양계에는 일대 異變이 일어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정이나 사회에 있어서도 사람들이 윤리법칙을 위반하면 파괴(破壞)와 혼란(混亂)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혼란된 사회를 구하기 위해서는 윤리법칙(法則)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緊要)한 과제이다.

 

그런데 종래의 종교나 사상(思想)에 근거한 윤리론(倫理論)은 논리적인 설명이 없기 때문에 분석적(分析的)이요 이성的인 현대인에게는 설득력이 없으며, 오늘날은 옛부터 전해 내려온 윤리관이 대중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고 있다. 통일사상은 윤리법칙이 인간이 자의(恣意)로 만든 법칙이 아니라 우주의 법칙(자연법칙)에 대응하는 필연적인 법칙임을 밝히고, 윤리와 도덕의 실천의 당위성(當爲性)을 가르치고 있다. 윤리와 도덕의 내용에 관해서는 가치론(價値論)이나 윤리론(倫理論)에서 구체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우주법칙에 관한 공산주의(共産主義)의 견해를 검토해 보자. 공산주의의 우주관은 변증법적(辨證法的)인 우주관(宇宙觀)이므로 우주의 운동, 변화, 발전은 사물에 내재(內在)하는 모순(矛盾) 또는 대립물(對立物)의 투쟁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쟁(鬪爭), 즉 계급투쟁이 필요하다고 한다. 레닌은 철학(哲學)노트에서 대립물(對立物)의 통일(一致, 同一性, 균형)은 조건적, 일시적, 경과적, 상대적이다. 서로 배제(排除)하는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 운동이 절대적인 것처럼 절대적(絶對的)이다."13)라고 말하고 발전은 대립물의 `투쟁(鬪爭)'에 의해서이다."14)라고까지 단언(斷言)하고 있다. p. 224

 

이와 같이 공산주의는 대립물의 투쟁에 의해서 사물이 발전한다고 했으나 실제로 우주에는 그러한 현상을 발견할 수 없다. 우주는 오늘날까지 조화(調和)를 이루면서 발전해 온 것이다. 과학자(科學者)가 우주를 관찰해 볼 때, 별의 폭발과 같은 현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분적인 파괴현상일 뿐 결코 우주의 전체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체에 있어서 낡은 세포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포가 출현(出現)하는 현상과 같은 것으로서, 새로운 별의 탄생을 위해서 낡은 별이 소실(消失)되는 과정인 것이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이므로 동물계에 한해서만은 대립물의 투쟁(鬪爭)이론이 맞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 생길는지 모른다. 예컨대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는다. 공산주의는 이런 사실을 가지고 인간사회의 투쟁이론을 합리화하려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뱀과 개구리나, 고양이와 쥐의 경우는 서로 종(種)이 다른 동물끼리의 싸움이다. 분류학상(分類學上)으로 볼 때, 생물은 계문강목과속종(界?門?綱?目?科?屬?種)으로 분류된다. 고양이와 쥐의 경우, 목(目)에 있어서 고양이는 식육류(食肉類, 육신동물)에 속하고, 쥐는 설치류에 속한다. 고양이와 쥐는 목(目)에서부터 다른 것이다. 뱀과 개구리의 경우, 강(綱)에 있어서 뱀은 파충류에, 개구리는 양서류에 속한다. 뱀과 개구리는 강(綱)에서부터 다른 것이다.

 

즉 한 동물이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경우, 그 두 동물은 분류학상(分類學上) 최소한 종(種)의 단위가 다르다. 그런데 자연계에 있어서 같은 종에 속하는 동물들끼리는 싸우더라도 죽이는 일은 극히 드물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지만 고양이끼리는 죽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뱀은 개구리를 잡아먹지만 같은 뱀은 잡아먹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서 같은 종(種)에 속(屬)해 있으면서도 인간들끼리 서로 빼앗거나 죽이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계에서의 약육강식의 현상을 가지고 인간사회의 투쟁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사자의 집단사회내에 새로운 숫(雄)사자가 들어가면 그 집단의 두목과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보스(두목)를 결정하기 위한 싸움이며, 질서의 중심을 세우기 위한 싸움이다. 일단 강약(强弱)이 결정되면 약자는 바로 강자 앞에 굴복하고 싸움은 끝난다. 이러한 싸움은 인간이 인간을 살해하는 따위의 투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와 같이 자연계에는 인간사회의 투쟁을 합리화하는 현상은 전혀 없다.

 

인간들끼리 서로 빼앗고 죽이는 행위는 인간이 타락(墮落)한 결과, 그 성향(性向)이 자기(自己)중심적(中心的)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면, 인간사회에서 투쟁은 볼 수 없게 될 것이며,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만물(萬物, 자연)의 주관주(主管主)가 되어서 자연계를 사랑으로 주관했을 것이다.15) 공산주의(共産主義)가 말한 것처럼 자연계가 발전하는데 있어서 모순(矛盾)의 법칙(法則)이나 대립물(對立物)의 투쟁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도리어 상대물(相對物)(주체(主體)와 대상(對象)) 간의 조화로운 수수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제3장 (第3章) 본성론

Theory of the Original Human Nature

 

본성론(本性론)이란 인간의 본연의 모습 즉 타락하지 않은 본성적(本性的) 인간을 다루는 철학부문이다. 이미 원상론과 존재론(存在論)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 왔다. 특히 오늘날 우리들은 공산주의 소멸후의 새로운 혼란과, 남북문제(南北問題, 선진국과 개도국의 격차문제)를 위시하여 인종분쟁, 종교분쟁, 영토분쟁, 부정부패의 확산,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로 인한 각종 범죄의 만연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대립과 갈등, 투쟁과 전쟁으로 연결되면서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역사의 현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존재(存在)의 문제(問題)와 관계(關係)의 문제(問題)로 대별(大別)되게 된다. 인간이 안고 있는 이러한 존재(存在)의 문제(問題)와 관계(關係)의 문제(問題)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한편 역사 속에 왔다간 많은 성현(聖賢)들이나 사상가(思想家)들은 `현실인간(現實人間)'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막연하게나마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보곤 했다. 그들이 바로 종교가((宗敎家)요 철학자(哲學者)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어떻게 해야 본래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가를 추구(追求)해 왔던 것이다.

 

기원전(紀元前) 5세기경 인도의 가비라성에서 태어난 석가는 수도(修道)와 고행(苦行)의 생활을 통하여 득도(得道)함으로써 인간은 본래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번뇌(煩惱)에 싸여서 고통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수도생활을 통하여 본성(本性)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수님도 30여 생애동안 인생문제(問題)를 깊이 탐구한 결과 인간은 죄인(罪人)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예수자신)을 믿음으로써 거듭나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유대민족을 향해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객지(各地)를 돌면서 가르침을 펴기에 全力을 다했으나 기득권을 쥐고 있던 당시의 정치, 종교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십자가형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폴리스(polis)사회(社會)의 말기적(末期的)인 혼란상을 직시하다가, 참된 知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참된 생활이라고 하면서 너 자신(自身)을 알라!고 외쳤다. 그리고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이 최고의 생활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이성이며 인간의 덕(德)은 폴리스에서의 공동생활(共同生活)에서 실현(實現)된다고 생각하고 인간을 사회적동물(폴리스的 動物)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인간관(人間觀)은 대체적으로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며 인간의 이성을 충분히 활용(活用)하면 인간은 이상적(理想的)인 모습이 된다는 것이었다.

 

중세시대(中世時代)는 기독교(基督敎)가 서구사회의 인간 정신을 지배하던 때였다. 이 기독교(基督敎)의 인간관은 인간을 죄인으로 보았으며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구원과 참된 평화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近代에 이르러 다시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사조가 나타났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이성적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으로써만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命題)를 남겼다. 그리고 칸트는 인간을 실천이성(實踐理性)이 명하는 도덕적 의무(義務)의 소리(聲)를 따라서 사는 인격적 존재(存在)로 보고, 인간은 유혹(誘惑)이나 욕망(欲望)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설(說)하였다.

 

헤겔도 역시 인간을 이성적(理性的) 존재(存在)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역사는 이성이 세계속에서 자신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며,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이성의 본질인 자유가 실현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헤겔의 논리에 의하면 근대국가(近代國家, 理性國家))의 성립과 더불어 인간과 세계는 합리적(合理的)인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 있어서의 실제의 인간은 인간다움을 도리어 상실(喪失)한 상태(狀態)에 머물러 있고 세계도 그대로 비합리적(非合理的)인 모습을 지속(持續)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극단적(極端的)인 이성주의(理性主義)에 반기를 든 사람이 키에르케고르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세계의 발전과 더불어 합리적(合理的)인 존재(存在)가 된다는 설(說)을 반대했으며, 인간은 현실사회(現實社會)에서 참다운 인간성을 잃어버린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대중으로부터 떠나서, 단독자(單獨者)로서 주체적으로 인생을 헤쳐 나갈 때 비로소 참다운 인간성이 회복(回復)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현실적 인간을, 본성(本性)을 잃어버린 인간으로서 파악하고 주체적(主體的)으로 인간성을 되찾으려고 하는 생각(思考方式)이 그 이후 실존주의사상(實存主義思想)으로서 전개되었다. 이에 관하여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또 헤겔의 이성주의(理性主義)에 반대하고 인간을 감성적(感性的) 존재로서 파악한 사람이 포이엘바하(L. A. Feuerbach(1804~72)독일의 유물론 철학자)였다. 포이엘바하에 의하면 인간은 유적본질(類的本質)인 이성과 의지(意志)와 心情(사랑)을 가진 유적존재(類的存在)로서, 이 유적본질(類的本質)을 자기로부터 분리(分離)한 후 대상화(對象化)해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숭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 인간의 본성(類的本質)을 되찾는 길은 대상화(對象化)한 하나님을 부정할 때, 즉 종교를 부정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헤겔의 자유의 실현(實現)의 사상(思想)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진정한 해방(解放)을 주장한 사람이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 당시의 초기 자본주의사회(社會)에 있어서의 노동자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그들은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했으며 게다가 최저(最低)의 생활을 유지하기도 힘들 정도의 임금(賃金)밖에 받지 못했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질병과 범죄가 만연(蔓然)하게 되었고 그들의 인간성은 박탈당하고 있었다. 한편 자본가(資本家)는 풍족(豊足)한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억압(抑壓)함으로써 그들도 본래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하였다. 인간 해방을 부르짖던 마르크스가 처음에는 인간에 의한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포이엘바하의 인간주의(人間主義)에서 출발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인간은 유적존재(類的存在)일 뿐만 아니라, 생산활동을 하는 사회적, 물질적, 역사적존재이며, 인간의 본질은 노동의 자유라고 파악하게 되었다. 자본주의(資本主義)사회(社會)에 있어서 노동자는 노동생산물을 모두 자본가에게 빼앗겼으며, 노동 그 자체가 자기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자본가의 뜻에 따라서 좌우(左右)되고 있었다. 여기에 노동자의 인간성 상실(喪失)이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노동자(勞動者)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사회(資本主義社會)를 타도(打倒)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가도 인간성을 회복(回復)할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물론(唯物論)의 입장에서, 인간의 의식(意識)을 규정(規定)하고 있는 것은 사회의 토대(土臺)인 생산관계라고 주장하고, 자본주의의 경제체제를 폭력적(暴力的)으로 변혁(變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라 혁명을 일으켜서 세운 공산주의 국가(國家)는 자유의 억압(抑壓)과 인간성(人間性)의 유린이 심한 독재주의사회가 되었고, 인간은 더욱 더 본래의 모습을 상실(喪失)하고 말았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인간소외의 원인의 파악에 있어서, 그리고 인간소외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소외는 지난날의 공산주의(共産主義)社會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도, 개인주의(個人主義)와 물질(物質)중심주의(中心主義)가 만연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이 만연되어서 더욱 더 인간성(人間性)이 상실되어가고 있다.

 

한편 인간학이 모든 학문(學問)과 사상(思想)의 근본(根本)이라고 생각한 막스셀러는 인간과 역사속에서 제시한 인간관 중에서 인간은 사고(思考)하는 인간 (homo sapiens), 도구(道具)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공작인(工作人; homo faber)으로 표현하였다. 그 외에 인간은 경제인(homo economicus), 종교인(homo religious), 자유인(homo liberalis), 국가인(homo nationalis)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표현도 인생의 참된 의미를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무엇이며 人生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역사 개시 이래 수많은 종교가나 철학자들에 의해서 그 해석이 시도(試圖)되었으나 모두가 실패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인생을 바르게 살려다가 인생의 의미를 몰라서 허무(虛無)한 인생을 비관(悲觀)하고 자살한 사람도 허다(許多)하다. 한국의 윤심덕(尹心悳), 일본의 후지무라(藤村操夫)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미해결된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根本的)으로 해결(解決)하려고 생애를 바쳐 걸어오신 분이 계신다. 그 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文鮮明 先生)이시다. 그 분은 통일원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이 비록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하찮은 존재처럼 되어 버렸지만 본래의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참자녀라고 선언(宣言)하신 것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시조(人間始祖)의 타락에 의해서, 하나님과는 무관(無關)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본장(本章)에서는 인간의 타락의 문제나 인간성 회복의 방법에 대해서는 論하지 않고(그것에 관해서는 원리강론의 타락론과 복귀원리의 項目을 參照) 다만 본래의 인간은 어떠한 모습인가 하는 것만을 논(論)하고자 한다.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신상을 닮은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이며 신성(神性)을 닮은 신성적존재(神性的存在)이다. 그리고 또 원상의 격위성(格位性)을 닮은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이다. 다음에 이에 관하여 상론(詳論)하고자 한다.

 

                  一.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

 

원상(原相)이 성상-형상, 양성-음성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지니고 있듯이, 이러한 원상을 닮은 본연의 인간도 예외없이 성상-형상, 양성-음성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존재를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라고 한다. 먼저 성상과 형상을 닮았다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다.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統一體)

 

인간이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인간이 마음과 몸의 이중체(二重體), 즉 성상-형상의 통일체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성상과 형상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로 인간은 우주(宇宙)를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다. 즉 인간은 성상과 형상에 있어서 각각 동물, 식물, 광물의 성상과 형상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 둘째로 인간은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이중적존재(二重的存在)이다. 셋째로 인간은 마음과 몸이 통일을 이루고 있는 심신통일체(心身統一體)이다. 그리고 넷째로 인간은 이중(二重)의 마음, 즉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이중심(二重心)의 통일체로서 이중심적(二重心的) 존재(存在)이다.

 

여기서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는 관점에서 볼 때, 넷째의 생심과 육심의 이중심적(二重心的) 존재(存在)라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그리하여 본항(本項)에서 다루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는 바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통일체와 같은 뜻이 된다. 여기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모두 마음(성상(性相))인데도 불구하고,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관계를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로 표시하는 것은, 생심(生心)은 영인체(靈人體)(성상(性相))의 마음이요, 육심(肉心)은 육신(形狀)의 마음이어서, 생심과 육심의 관계는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에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기능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생심(生心)의 기능(機能)은 진선미(眞善美)와 사랑의 생활, 즉 가치생활(價値生活)을 추구한다. 여기서의 사랑은 생명의 원천인 동시에 진(眞)-선(善)-미(美)의 기반이 되고 있다. 따라서 사랑을 중심으로한 진선미(眞善美)의 생활이 가치의 생활이다. 인간의 가치생활에는 인간 자신이 가치를 추구하면서 기뻐하는 면도 있으나 가치를 실현하여 타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 보다 더 본질적(本質的)인 면이다. 따라서 가치생활이란 위하여 사는 사랑의 생활, 즉 가정을 위하고, 민족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고, 인류를 위해서 사는 사랑의 생활이다. 그리고 궁극적(窮極的)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한편 의식주(衣食住)나 성(性)의 생활, 말하자면 물질적(物質的)인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육심(肉心)의 기능이다. 물질생활은 개인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은 본래,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다. 여기서 생심(生心)이 주체요 육심(肉心)이 대상이다. 영인체가 주체요, 육신이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육심이 생심을 따르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생심과 육심이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만, 생심이 주체, 육심이 대상의 관계에 있을 때의 인간의 마음이 본심이다. 육심이 생심을 따른다는 것은, 가치(價値)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생활을 제1차적인 것으로 하고, 물질을 추구하는 생활을 제2차적인 것으로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가치(價値)의 생활이 목적이고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은 그 목적실현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육심(肉心)이 생심(生心)을 따르고 생심(生心)이 제 기능(機能)을 잘 하면 영인체와 육신은 서로 공명한다. 이 상태가 인격(人格)을 완성(完成)한 상태이며 곧 본연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墮落)했기 때문에,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본래의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상(對象)이 되어야 할 육심이 주체의 입장에 서게 되었고, 주체가 되어야 할 생심이 대상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이 목적이 되었고, 가치의 생활은 그 의식주를 위한 수단처럼 되어서 2차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즉 사람을 사랑한다거나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는 행위는 부(富)를 얻는다든가, 지위를 얻는다는 목적 때문에 행하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일상적인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가치의 생활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치생활을 자기중심의 물질생활을 위한 수단(手段)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육심(肉心)이 주체, 생심(生心)이 대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심과 육심의 본래의 관계가 역전(逆轉)되어 버린 것이 오늘의 실정(實情)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回復)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거꾸로 된 관계를 본래의 관계로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인간이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해야 할 필연적(必然的)인 이유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모든 종교는 먼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勝利)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예컨대 공자(孔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강조했고,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으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자기(自己)와의 싸움에 이기기 위하여 사람들은 금식(禁食, 단식), 철야(徹夜) 등의 수도(修道)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육심을 생심에 굴복시켜서 진선미(眞善美)의 생활을 앞세우고,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을 뒤세운 채 살아가는 것이 생심과 육심의 통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육심이 생심을 누르고 자기중심적인 의식주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苦痛)과 불행(不幸)이 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본심(本心)(마음)이란, 요컨대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수수작용을 해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상(性相)內의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를 닮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본심(本心)의 선차적(先次的)인 기능은 생심(生心)에 의한 사랑의 생활이며 진선미(眞善美)의 가치(價値)를 추구(追求)하는 생활이다. 따라서 인간은 바로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인 것이다. 이런 가치의 생활이 바로 진실(眞實)의 생활이며, 윤리적(倫理的)와 도덕적(道德的)생활이며 예술적 생활이다. 그리고 본심의 후차적(後次的)인 기능은 육심(肉心)에 의한 의식주(衣食住)의 생활, 즉 물질적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다.

 

  (2)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조화체(調和體)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은 성상과 형상의 속성(屬性)이지만 이 본성론에서 말하는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은 각각 양적실체(陽的實體), 음적실체(陰的實體)로서의 부부(夫婦)를 말한다. 부부(夫婦)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가정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중요한 문제가 되어 왔다.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모두 양음의 결합에 의해서 존재하고 번식한다. 만물이 이러하기 때문에 인간의 양음의 결합 즉 부부(夫婦)의 결합도 단순한 남녀의 육체적 결합으로만 보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는 것은, 부부(夫婦)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면 오늘날 선진제국(先進諸國, 선진국들)에서처럼 남녀가 결혼했더라도 쉽게 갈라지곤 함으로써 결혼의 신성성(神聖性)이나 영원성(永遠性)은 상실되기 쉽게 된다. 이것은 본래의 부부의 모습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왜 존재(存在)하며, 결혼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참된 해답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일생을 독신(獨身)생활로 일관(一貫)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통일사상은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다.

 

첫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하나님의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 중의 1성(一性)을 대표(代表)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부부의 결합은 양성-음성을 지닌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의미한다. 부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횡적(橫的)으로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종적(縱的)인 사랑이 거기에 임(臨)하게 되어서 여기에 사랑의 상승작용(相乘作用)에 의한 생명(生命)의 창조가 이루어지게 된다. 둘째로, 본연의 부부의 결합은 하나님의 창조과정의 最後의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우주 창조의 완료(完了)를 의미한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아담 해와의 완성과 더불어 우주의 창조는 완료되었을 것이다.

 

우주 창조의 최종적인 목표는 만물의 주관주인 인간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부의 완성은 우주 창조의 완료를 의미한다. 그러나 부부(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주 창조는 완료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창조(再創造)의 섭리를 계속해 오신 것이다. 재창조란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개체(個體)를 완성시키고 더 나아가서 부부로서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로 창조되었으나 남자만으로 혹은 여자만으로는 주관주가 될 수 없다. 부부로서 완성할 때 비로소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우주창조가 완료되는 것이다.

 

셋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인류의 절반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부부의 결합은 인류의 통일을 의미한다. 즉 부부에 있어서 남편은 전인류(全人類)의 남성을 대표하고, 아내는 전인류의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총인구(總人口)는 약 66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각각 33억을 대표한 가치(價値)를 지니고 있는 것이 그 남편이고 그 아내이다.

 

넷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가정의 절반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부부의 결합은 가정의 완성을 의미한다. 가정에서 남편은 모든 남성을 대표하고 아내는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以上과 같은 측면에서 볼 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가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과 우주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며 인류의 통일과 가정의 완성(完成)을 의미한다. 이처럼 부부의 결합은 실로 신성(神聖)하고도 존귀(尊貴)한 결합인 것이다.1) p. 237

 

그런데 부부의 조화는 가정적사위기대의 형성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가정적사위기대의 형성이란, 창조 때에 인간에게 허락한 제2축복(第二祝福)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同사위기대(四位基臺)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인격적으로 완성한 남편과 아내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사랑과 미를 주고 받음으로써 형성된다. 그런데 이 때의 부부의 결합은 원상내(原相內)의 주체와 대상의 조화를 닮게 된다. 즉 원상의 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를 닮는 것이다. 그리고 부부의 자녀 번식은 하나님의 인간창조를 닮고 있다. 이것은 원상의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를 닮는 것이다. 이때 부부는 각각 본심(本心)대로 살면서 서로 조화(調和)를 이루게 된다.

 

본심대로 산다는 것은 원상의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를 닮는 것이요,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원상의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를 닮는 것이다. 부부가 각각 원상(原相)의 모습을 완전히 닮아서 인격자로 성숙한 다음,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서로 사랑을 주고 받는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 임재하게 된다. 가정은 부부의 횡적사랑과 하나님의 종적사랑이 맞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완성된 가정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더 나아가서 국가, 세계를 이 地上에 세우게 되면 그것이 곧 지상천국(地上天國)이요,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원상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세계란 본연의 질서를 통하여 실현(實現)되는 사랑의 世界를 말한다. 여기서 질서와 사랑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인간은 우주의 축소체이지만 가정도 우주의 축소체이다. 이때 인간은 구성요소(構成要素)로 본 우주의 축소체이며 가정은 질서로 본 우주의 축소체인 것이다. 가정이 질서로 본 우주의 축소체라는 말은 우주의 종적질서(縱的秩序)와 횡적질서(橫的秩序)를 닮아서 가정에도 축소된 형태로서의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있게 됨을 뜻한다. 가정에 있어서의 종적질서란 조부모(祖父母)(父母)→부모(父母)→子女→손녀(孫子)로 이어지는 질서를 말하며 횡적질서(橫的秩序)는 부부간 및 부모중심의 형제자매간의 질서를 말한다. 사랑은 이러한 질서를 통해서 실현(實現)된다. 그리하여 사랑에는 종적 사랑과 횡적 사랑이 있게 된다. 종적사랑이란 부모의 자녀에 대한 내리사랑(下向愛)과 자녀의 부모에 대한 올리사랑(上向愛)이며 횡적사랑이란 부부간의 사랑, 자녀상호간의 사랑 등의 가로사랑(水平愛)이다.

 

이러한 사랑의 기본형을 토대로 하여 종적 가치와 횡적 가치의 기본이 되는 가정윤리가 성립된다. 종적 가치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인 자애(慈愛)요,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인 효성(孝誠)이다. 횡적 가치란 부부간의 사랑인 화애(和愛)요, 자녀 상호간의 사랑인 우애(友愛)이다. 이리하여 윤리는 가정을 기반으로 한 가족구성원 상호간에 지켜야 할 행위의 규범(規範)이 되는 것이다(이에 관해서는 윤리론에서 상세히 논할 것임). 이러한 가정윤리를 사회(社會), 기업(企業), 학교(學校) 등으로 확대(擴大)시킨 것이 사회윤리요, 기업윤리요, 학교윤리이며 이웃사랑(愛), 민족애(民族愛), 원수에 대한 사랑, 자연보호운동 등도 모두 가정적윤리를 터로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본성(本性)으로 본 인간관(人間觀)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애적인간(愛的人間)(homo amans)이라 하겠다. 그런데 타락에 의해서 인간은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완성을 보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미완성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해와는 본연의 부부가 될 수 없었다. 즉 부부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부는 하나님마저 상실해 버렸다. 그리하여 우주(宇宙) 창조(創造)의 未완료(完了) 상태가 그대로 오늘에까지 지속(持續)되어온 것이다. 오늘날 가정문제(家庭問題)나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부부의 모습이 모두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그 때문에 가정과 사회가 어지러워졌고 국가와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부가 화애(和愛)로써 조화(調和)를 이루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세계의 통일과 직결(直結)되는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의 전제조건이 된다. 따라서 부부의 화애(和愛)의 문제는 사회문제와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개성체(個性體)

 

하나님은 우주(宇宙)의 창조(創造)에 있어서 먼저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구상하시고,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실체대상으로 전개한 것이 피조세계이다. 따라서 피조만물은 원인자되시는 하나님의 원상(原相)을 상징적으로 닮은 개성체(個性體)요, 인간은 원상(原相)을 형상적으로 닮은 개성체이다. 개성체(個性體)란 원상의 개별상을 닮은 개성진리체라는 의미로서 인간은 우선 하나님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함께 닮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다.

 

그런데 그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를 다룸에 있어서 개별상(個別相)에 중점(重點)을 두고 다룰 때의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를 개성체라고 한다. 개성체(個性體)로서의 인간의 개별상(個別相)은 동물이나 식물과는 달리 각개인(每個人)마다 그 개별성(個別性)이 현저(顯著)하며, 그 얼굴이나 성격 등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즉 동물이나 식물에 있어서는 종류별(種類別)의 개별상이지만 인간에 있어서는 개인별(個人別)의 개별상(個別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특히 인간에게 개인마다 독특한 개별상을 준 것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면서 특유의 자극적(刺戟的)인 기쁨을 얻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특유의 개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최고의 기쁨을 돌려드리는 최고의 가치(價値)를 지닌 존재로서 이러한 개별상도 인간의 본성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상(個別相)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인간의 특성(特性)으로 나타난다. 첫째의 특성이 용모상의 특징이다. 세계에 65억의 인간이 있지만 같은 용모나 체격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둘째의 특성은 행동상의 특징이다. 인간의 행동양식(行動樣式)은 사람마다 다르다. 행동은 마음의 직접적인 표현이므로, 용모를 형상적인 특성이라고 한다면, 행동은 성상적인 특성의 표현(表現)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의 특성은 창작상(創作上)의 특징이다. 예술의 창작(創作) 뿐만 아니라, 창조성을 발휘하는 모든 활동은 모두 창작의 개념에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면서 하루를 살았다면 그 1일의 생활의 발자취는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창작 또한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뿐만 아니라 인간 일생의 발자취도 하나의 작품(作品)(生의 작품)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기뻐하시고, 행동을 보고 기뻐하시고, 또 그 작품(作品)을 보고 기뻐하시게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개개의 인간을 보고 기뻐하신다는 것은 개개의 인간이 용모나 행동이나 창작으로써 하나님께 고유한 美를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성미((個性美)이다. 따라서 개성미(個性美)란 용모상의 개성미요, 행동상의 개성미요, 창작상의 개성미이다.

 

부모(父母)가 자식을 대할 때, 특성에 있어서 어떤 자식이라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자식은 부모의 표현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을 대할 때, 그 인간의 용모나 행동에서 그리고 창작생활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개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즉 신래성((神來性)의 것이기 때문에 존귀하다. 인간이 인간의 개성(個性)을 귀히 여기고 상호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오늘날까지 인간의 개성(個性)은 무시되고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독재사회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때까지의 공산주의(共産主義)사회(社會)가 그 현저(顯著)한 예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개성을 유물론(唯物論)에 근거하여 환경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이를 경시(輕視)한다. 우리는 인도주의(人道主義)(humanism)가 인간의 개성을 존중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인간의 개성이 존중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해답이 인도주의(人道主義)에는 없기 때문에 철학을 가진 공산주의의 비판을 견뎌내지 못하곤 하였다. 이에 대해서 통일사상은 인간의 개성은 우연적(偶然的)인 것도 환경의 산물(産物)도 아니며, 하나님의 개별상에서 유래(由來)된 것이기 때문에 즉 신래성(神來性)이기 때문에 존귀하다고 하는 확고한 신학적,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二. 신성적존재(神性的存在)

 

인간은 또 하나님의 신성(神性)도 닮고 있다. 하나님의 신성(神性)에는 전지(全知), 전능(全能), 심정(心情)(사랑), 무소부재(無所不在), 생명(生命), 진(眞)-선(善)-미(美), 정의(正義), 로고스, 창조성(創造性)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 중요한 것 3가지만을 다루고자 한다. 이 세 가지는 현실문제 해결에 특히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심정(心情), 로고스, 창조성(創造性)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의 신성(神性)을 닮고 있다는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볼 때 인간은 심정적(心情的) 존재(存在)요, 로고스적 존재요, 창조적 존재이다. 이에 관해서 다음에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1)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

 

여기의 심정(心情)은 원상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이다. 심정(心情)은 사랑의 원천이며 사랑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정적(情的)인 충동이기도 한 것으로서 원상(原相)의 핵심(核心)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성상(性相)의 핵심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정은 하나님에 있어서 인격(人格)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8)고 하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人格), 즉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닮으라는 가르침이다. 인간에 있어서도 심정은 인격의 핵심이 되게 되어 있었다. 인간에 있어서 인격의 완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인격(人格)을 완성한 인간이 바로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계속적으로 체휼하면 드디어 하나님의 심정을 완전히 상속받게 된다. 그러한 인간은 사람이나 만물을 사랑하고 싶어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도리어 마음이 괴롭기 때문이다. 타락인간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어렵게 느끼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일치된 자리에 이르게 되면 생활 그 자체가 사랑의 생활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있으면, 가진 자(者)는 갖지 못한 者에게 베풀면서 살게 된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부(貧富)의 차(差, 차이)나 착취 등은 자연히 소멸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효과(效果)는 사랑의 평준화(平準化)작용(作用)에 기인한다. 이와 같이 인간이 심정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이 사랑의 생활을 하는 존재(存在)임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이 되는 것이다.

 

심정(心情)은 인격의 핵심이 되기 때문에, 인간이 심정적존재라는 말은 인격적 존재임을 또한 뜻한다. 그것은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원만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게 됨을 뜻하며 또한 심정을 중심으로 지-정-의의 기능이 균형적(均衡的)으로 발달하게 됨을 의미한다.

 

타락(墮落)한 인간에 있어서는 생심(生心)의 기능이 약해서 생심(生心)이 육심(肉心)에 주관당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이성(知的能力)이 대단히 발달해 있으면서도 정적(情的)으로 미숙(未熟)하거나 선(善)을 행하려고 하는 의지력이 부족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받아서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가 되면 지-정-의는 균형적(均衡的)으로 발달하고, 또 생심(生心)이 주체의 입장에서 육심(肉心)을 주관하면서 육심과 함께 원만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행하게 된다.

 

심정은 또 성상(性相)의 핵심으로서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知)-정(情)-의(意)는 각각 진(眞)-선(善)-미(美)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기능이기도 하다. 즉 지(知)는 인식하는 능력으로서 眞의 가치를 추구하며, 정(情)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는 능력으로서 美의 가치를 추구하며, 의(意)는 결의(決意)하는 능력으로서 선(善)의 가치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 추구는 모두 심정을 동기로 하고 이루어지고 있다. 지적활동(知的活動)에 의해서 진리를 추구할 때 그 성과는 과학, 철학 등의 학문으로 나타나며, 정적활동(情的活動)에 의해 미(美)를 추구할 때 그 성과는 예술로 나타나며, 의적활동(意的活動)에 의해 선(善)을 추구할 때, 그 성과는 도덕(道德)-윤리 등으로 나타난다.

 

정치, 경제, 법률, 언론, 스포츠 등도 모두 지(知)-정(情)-의(意)의 활동의 성과인 것이다. 따라서 심정은 지(知)-정(情)-의(意)를 중심한 전체 문화활동의 원동력(原動力)이 되고 있으며, 특히 예술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의의 활동의 성과의 총화(總和)가 바로 문화이며, 본연(本然)의 세계에 있어서는 심정적(心情的) 인간(사랑의 인간)이 문화활동의 주역이 된다. 이 내용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3-1과 같다.

 

 

 

이와 같이 심정(心情)은 본래 문화활동(文化活動)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룩했어야할 문화는 본래 심정문화(心情文化)였다. 이것이 참다운 문화이며 하나님이 아담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했던 아담문화이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심정문화(心情文化)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기심(利己心)을 기반으로 한 문화, 즉 지적활동(知的活動), 정적활동(情的活動), 의적활동(意的活動)이 통일을 이루지 못한 문화, 따라서 분열(分裂)된 문화가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예컨대 경제생활(經濟活動)에 있어서 인간은 오늘날까지 돈 버는 것만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본연의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가난한 생활을 하는데, 자기만이 유복(裕福)한 생활을 하게 되면 마음에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 때문에 돈을 많이 모으면 이웃이나 사회에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즉 기업활동(企業活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領域)에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여기에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가 세워지게 된다. 이때 지적활동, 정적활동, 의적활동은 사랑을 중심하고 통일되게 된다. 이것이 통일문화이다. 따라서 사랑의 문화는 바로 통일문화이다.

 

오늘날까지 인류는 참다운 문화, 항구적(恒久的)인 문화를 실현하려고 수없이 시도했으나 결국은 실패(失敗)로 끝나고 말았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여러 문화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참다운 문화, 항구적(恒久的)인 문화가 어떠한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중국(中國)에 있어서 공산주의식 문화운동인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도 그 일례(一例)였다. 유물변증법을 근거로 하여 노동을 기반으로 한 문화가 참된 문화인 줄 알고 일으킨 문화혁명이었으나, 그 결과는 인간성(人間性)의 억압(抑壓)과 근대화의 지연(遲延)과 경제의 파탄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참다운 문화란 심정을 중심으로 한 문화 즉 심정문화(心情文化)로서, 문선생님이 주창하고 계시는 신문화혁명은 바로 심정문화의 건설운동인 것이다.

 

여기서 문화와 문명(文明)의 개념에 관해서 살펴보자. 지(知)-정(情)-의(意)의 활동에 대한 성과의 총화를 과학과 기술 등의 물질적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을 문명(文明)이라 하고, 특히 종교, 예술 등의 정신적(精神的)측면에서 볼 때 그것을 문화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의 성과를 정신적(精神的)인 면과 물질적인 면으로 명확히 구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문화와 문명(文明)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통일사상에 있어서도 일반의 예(例)에 따라서 문화와 문명을 동일한 뜻으로 사용할 때가 많다.

 

  (2) 로고스的 존재(存在)

 

로고스라는 말은 원상론에서 밝힌 대로 원상내(原相內)에 있어서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한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의 산물, 즉 신생체(新生體)를 의미한다. 여기의 창조목적은 심정(心情)(혹은 사랑)을 터로 하고 있기 때문에 로고스도 심정이 그 터가 되고 있다.

 

우주(宇宙)는 이러한 로고스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로고스에 따라 운행하고 있으며, 이 로고스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다. 인간도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고 로고스에 따라서 살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로고스的 존재이다.

 

로고스란 이미 언급한 대로 원상(原相)의 성상(性相)에 있어서 목적을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수수작용을 하여 생긴 신생체(新生體)로서, 내적성상(內的性相)속의 이성과 내적형상(內的形狀)속의 법칙이 특히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에 로고스는 이성과 법칙의 통일체(統一體), 즉 이법(理法)이 된다. 따라서 인간이 로고스적 존재라 함은 인간이 이법적존재(理法的存在)임을 뜻한다. 여기서 이성과 법칙의 특성은 각각 자유성(自由性)과 필연성(必然性)이므로 로고스적 존재라는 말은 자유성과 필연성을 통일적으로 갖고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意志)에 따라 행동하는 이성적 존재이면서 또한 法則(規範)에 따라 살아가는 규범적 존재이다.

 

오늘날, 인간은 자유성을 갖고 있으므로 法則(規範)에 따르는 것을 일종(一種)의 속박(束縛)으로 알고 거부하는 사고방식(思考方式)이 만연되어 있다. 그러나 참다운 자유는 법칙을 따르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지키는 데에 있다. 법칙(法則)을 무시한 자유는 방종(放縱)이어서 파멸을 가져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차는 궤도(軌道)위에 있으므로 빨리 달리거나 늦게 달리거나 할 수도 있고, 또 전진(前進)하거나 후진(後進)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궤도(軌道)를 벗어나면 기차는 전혀 달릴 수 없게 된다. 즉 기차는 궤도 위에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며, 궤도를 떠나면 기차 자체도 파괴되고, 인간이나 가옥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규범(規範)에 따라 살 때에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에서 70이 되니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더라도 법도(法道)를 넘는 일이 없었다.2)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70세가 되어서 드디어 자유의지와 법칙이 통일된 완전한 로고스적 존재가 될 수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p. 248

 

인간은 로고스的 존재이므로 법칙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인간이 지켜야 할 법칙이란 우주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 즉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을 말한다. 그런데 원상(原相)에서 로고스가 형성될 때, 그 동기는 심정(心情)이다. 따라서 우주의 법칙은 사랑(心情)이 그 동기가 되었고 사랑의 실현이 그 목적이 되었던 것이다. 존재론(存在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정은 우주의 질서체계의 축소체이다. 즉 우주에 종적(縱的)?횡적(橫的)인 질서가 있는 것과 같이, 가정에 있어서도 종적(縱的)-횡적(橫的)인 질서가 있다.

 

종적질서와 횡적질서에 대응하는 가치관이 종적규범(종적가치관)과 횡적규범(횡적가치관)이다. 가정에서의 종적가치관이란 부모(父母)와 子女間에 있어서의 규범이며, 횡적가치관이란 형제자매(兄弟姉妹)의 관계 및 부부의 관계에서의 규범(規範)이다. 또 인간에게는 개인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관 즉 개인적(個人的) 규범(規範)도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인격(人格)을 완성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규범이다(이들 종적규범, 횡적규범, 개인적규범에 대해서는 가치론과 윤리론에서 상세히 설명하고자 함).

 

가정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규범(規範)은 사회나 국가에 그대로 확대 적용된다. 결국 가정의 규범은 사회나 국가가 지켜야 할 규범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로고스적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사회도 국가도 혼란상태(混亂狀態)에 놓여지게 되었다. 인간이 로고스적 존재로서의 본성(本性)을 회복할 때, 비로소 가정도 국가도 본래의 질서(秩序)를 갖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3) 창조적존재(創造的存在)

 

하나님은 그의 창조의 능력(能力) 즉 창조성(創造性)으로써 우주를 창조했으며 그 창조성(創造性)을 인간에게도 부여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부여받은 이 창조성을 발휘하여 오늘날까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여기의 창조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하나님의 창조성은 심정(心情)을 기반으로 한 창조의 능력이다. 이미 원상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주 창조에 있어서 원상내부(原相內部)에는 다음과 같은 2단계(二段階)의 수수작용이 행하여졌는바, 그 첫째는 내적수수작용이요 둘째는 외적수수작용이었다.

 

내적수수작용은 심정에 의해 세워진 목적을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 사이에 벌어진 수수작용으로서 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로고스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외적수수작용은 동일한 목적을 중심하고, 同로고스와 형상(본형상(本形狀)) 사이에 벌어진 수수작용으로서 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피조물이 生成되었던 것이다. 이 2단계(二段階)의 수수작용(授受作用)은 바로 2단계(二段階)의 발전적사위기대의 형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이란 결국 이 2단계(二段階)의 발전적사위기대 형성의 능력, 즉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및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만들 때 먼저 목적을 세우고 설계를 하거나 구상을 한다. 즉 내적수수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 구상에 따라 물건을 만들게 된다. 즉 외적수수작용을 행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성(創造性)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심정을 터로 한 사랑으로써 만물을 주관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주관이란 物的對象(自然萬物, 자연), 재화(財貨) 등)과 인적대상(人的對象)을 다루거나 다스리는 것을 뜻하며, 특히 만물 주관은 물질을 다루는 것, 즉 물질의 취급, 관리, 처리, 보존 등을 의미한다. 산업활동(産業活動)(一次産業, 二次産業, 三次産業), 정치(政治), 경제(經濟), 과학(科學), 예술(藝術) 등 물질을 취급하는 일절(一切)의 활동이 모두 이러한 만물주관에 포함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이러한 주관활동을 하는 것이 본연(本然)의 주관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계승(繼承)했더라면 이들 활동은 모두 하나님의 심정이나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영위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라(창1:28), 즉 주관(主管)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물을 주관(主管)하려면 만물(萬物, 자연)을 주관할 수 있는 주관주(主管主)로서의 자격(資格)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大주관주(主管主)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주관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창조성(創造性)을 갖추고 계신 것과 같이, 인간도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주관주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성(創造性)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서 성장기간(成長期間)을 두시고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완성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성장과정(成長過程)을 통하여 완성됨으로써만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받아 가지고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3) p.250

 

그런데 주관은 본래 자기가 만든 것(자기 것)만을 주관하게 되어 있지, 타인(他人)이 만든 것(타인 것)을 함부로 주관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인간은 만물 창조가 끝난 뒤에 지음받았기 때문에 만물을 주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식은 자라서 부모의 권한(權限)을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로 하여금 주관권을 상속받을 수 있는 조건(條件)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면서 성장하도록 명령(命令)하셨던 것이다. 그 조건(조건(條件))이란, 인간도 우주의 창조위업(創造偉業)에 가담한 것과 동일한 가치의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인간(아담과 해와)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하에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을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며, 소우주이기 때문에 인간 한 사람의 가치는 우주의 가치에 맞먹는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책임분담으로 자기를 완성(完成)시킨다면 그 노력은 우주를 완성시킨 것(창조한 것)과 동일(同一)한 가치(價値)의 노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책임분담을 다하게 하신 이유였다. 즉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도 하나님의 창조위업에 가담했다는 조건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 책임분담에 의해서 완성토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理由)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성장기간 동안에는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원리강론 1987, p. 85:性的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계명(誡命)을 주신 이후,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일체 간섭(干涉)하지 않으셨다. 만일 간섭하게 되면 인간 책임분담(責任分擔)을 하나님 스스로 무시하는 입장이 되며, 미완성한 아담과 해와로 하여금 만물을 주관하게 하는 모순을 초래(招來)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 해와는 그 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만물을 주관하는 자격(資格)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계승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자기(自己)중심적(中心的)인 이성에 의한 창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개인(個人)레벨의 창조일 경우에는 자기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가정레벨의 창조일 경우에는 자기가정의 이익(利益)만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국가레벨의 경우에는 자기 국가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창조활동(創造活動)은 거의 자기중심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또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사고방식을 지속(持續)해 왔다. 그 결과 자연파괴나 공해, 살육병기(殺戮兵器)의 개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심정을 중심으로 한 본래의 창조성(創造性)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정이 창조성의 기반이 된다는 것은 사랑을 동기로 하여 창조가 이루어져야 함을 뜻하며 올바른 가치(價値)觀에 따라 창조활동이 행하여져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과학자는 과학자이기 전에 먼저 가치적인 인간, 즉 인격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윤리가 자연과학의 기반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이후(近代以後), 과학자(科學者)들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탐구(探求)하면서 일체의 가치관을 배제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혼란상태(混亂狀態)가 오게 되었다. 국제과학통일회의가 개최될 때마다 문선생님이 과학자들에게 가치관을 다루도록 강조한 것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참다운 창조성(創造性)을 회복(回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자연(自然)을 사랑하고 인간의 가치(價値)를 재검토(再檢討)하고, 인간 상호간의 사랑 그리고 사랑의 근본(根本)인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참된 창조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4) p. 252

 

                  三.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

 

한편 인간은 원상(原相)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성을 닮아서 주체격위와 대상격위를 지니게 되어 있다. 인간은 먼저 부모 앞에 대상으로서 출생(出生)하며, 성장한 다음에는 부모(父母)가 되어서 자식을 낳고, 그 子息에 대하여 주체의 위치에 서게 된다. 또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하위의 대상의 직급에서 출발하여 점차 상위의 주체의 직급으로 올라간다. 따라서 인간은 먼저 대상격위에 머물러 있다가 점차로 주체격위로 옮아가게 된다.

 

  (1) 대상격위(對象格位)와 주체(主體)

 

대상격위는 주체의 주관을 받는 입장(格位)인 동시에 주체에게 기쁨을 돌려주는 데에 그 존재의 의의(意義)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으로 지음받았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대상격위에 있는 인간생활의 제1차적인 의의(意義)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대상의 위치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여러 대신(代身) 위치에 대해서도 대상격위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대신 위치란 예컨대 다음과 같다. 즉 백성에 대한 대통령이나 국왕, 자식에 대한 부모, 제자에 대한 스승, 부하에 대한 상관, 그리고 개인에 대한 전체 등이 그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대상(對象)인 것처럼, 국민(百姓)은 대통령이나 국왕의 대상이요, 자식은 부모의 대상이며, 제자는 스승의 대상이요, 부하는 상관의 대상이며, 개인은 전체의 대상인 것이다.

 

인간은 여러 주체들과 연관을 맺으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대상격위(對象格位)에 있는 인간은 주체의 주관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대상으로서 주체에 대한 일정한 심적태도(心的態度)가 요구된다. 이것이 대상의식이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대상의식은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 즉 시봉심(侍奉心) 혹은 충성심(忠誠心)이며, 국가에 대한 국민의 대상의식도 충성심(忠誠心)이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대상의식은 효성심(孝誠心)이며,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대상의식은 존경심(尊敬心) 혹은 복종심(服從心)이다. 또 상관에 대한 부하의 대상의식은 복종심(服從心)이며, 전체(全體)에 대한 개인의 대상의식은 봉사심(奉仕心)이다. 여기에서 각각의 주체에 대한 대상들의 공통적인 대상의식은 온유와 겸손, 그리고 위하고자 하는 마음(爲他心)인 것이다.

 

그런데 타락세계에 있어서는 역사상, 많은 독재자(獨裁者)가 나타나서 대중들의 대상의식을 이용(利用)하여 마치 참다운 주체인 것 같이 행동함으로써 국민의 존경(尊敬)이나 지지(支持)를 받아 왔다. 예컨대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차우체스크(Ceausescu 루마니아 독재자)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거짓 주체들이 비록 일시적으로 대중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대중의 지지(支持)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子女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봉(侍奉)하고, 충성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대상의식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대상의식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고자 하는 마음까지를 유발(誘發)하게 된다. 종교인들의 순교(殉敎)정신(精神)이 바로 그 예이다. 위대한 지도자의 추종자(追從者) 중에 때때로 그 지도자를 위해서라면 생명(生命)까지 기꺼이 바치는 예가 가끔 있음을 보는데, 이러한 예들은 참주체(하나님 대신입장)에 대한 대상의식이 극한적으로 발로(發露)된 예이다. 그런데 일반대중은 누가 참주체인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독재자(獨裁者)와 같은 거짓주체를 참 주체(主體)로 착각하고 그를 맹목적(盲目的)으로 따름으로써 인류사회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결과를 낳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이리하여 참된 주체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필요(必要)한 일이다.

 

대상의식(對象意識)은 윤리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오늘날 대상의식이 거의 마비됨으로써 주체의 권위가 무시를 당하고 여기에 주체와 대상의 질서가 사라져서 그로 말미암아 사회가 혼란상태(混亂狀態)에 빠지게 되어 윤리부재(倫理不在)의 상태가 되고만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윤리의 확립을 위해서는 확고한 대상의식을 앞세우게 하는 의식의 개혁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2) 주체격위(主體格位)와 대상(對象)

 

주체격위는 대상을 주관하는 위치이다. 본래 인간이 성장하여 완성하면 만물에 대해서 주체의 위치 즉 주체격위에 서게 된다. 즉 만물을 주관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데 여기의 주체격위는 인간 대 인간관계(關係)에 있어서의 주체의 위치를 말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생활에 있어서 주체의 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주체이며,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에 대하여 주체이다. 사회(社會)에서 상사(上司)는 부하(部下)에 대하여 주체(主體)이며, 국가에서 정부(政府)는 국민(國民)에 대하여 주체이다. 또 전체는 개인에 대하여 주체이다.

 

그런데 주체가 대상을 주관하는데 있어서도 일정(一定)한 심적태도(心的態度)가 요구된다. 이것이 주체의식이다. 그것은 첫째로, 대상에 대해서 부단한 관심을 갖는 일이다. 그 동안 인간 소외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되어 왔는데, 그것은 여러 주체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말단(末端)의 대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데에 기인한 것이다. 대상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주체가 그 대상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대상은 주체에게 불신(不信)을 품게 되고, 그 주체를 따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주체는 주관의 대상에 대하여 망각지대(忘却地帶)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주체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상관이 부하(部下)에게 명령하거나 대상을 지배하는 것이 주체의식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참주관(主管)은 대상을 능동적(能動的)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행복(幸福)과 이상(理想), 기쁨과 생명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주체(主體)가 대상(對象)을 사랑할 때 대상은 주체에게 충성하고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대상인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주체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셋째로, 주체는 적당한 권위(權威)를 지녀야 한다. 주체가 사랑을 가지고 부하를 주관(統率)할 때, 일정한 권위가 없이 동정심(同情心)만 베푼다면 부하는 믿음직한 상관(上官)이라는 이미지가 흐려짐과 동시에 긴장감(緊張感)이 풀어져서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저하된다. 따라서 주체는 적당한 권위를 지니면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에는 봄날과 같은 따뜻한 사랑도 있으나 겨울의 차가움과 같은 엄격(嚴格)한 사랑도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權威)를 갖춘 엄격한 사랑은 대상들의 주체에 대한 신뢰도(信賴度)와 소속감을 제고(提高)시키며, 상관(上官)에의 복종심과 일에 대한 의욕(意欲)을 앙양시킨다. 여기의 권위를 갖춘 엄격한 사랑이란 사랑을 내포(內包)한 엄격한 명령(命令)을 말한다.

 

이와 같이 주체에게는 일정한 권위가 필요하나, 과다한 권위의식은 도리어 금물이다. 그런 권위에는 사랑이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권위가 지나치게 강하게 작용하면 부하는 위축되어 창조성(創造性)을 발휘하기가 어렵게 된다. 상사가 부하를 꾸짖어도 부하가 감사함을 느끼면서 그 질책(叱責)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권위가 참권위(權威)이며, 바로 사랑을 내포한 권위(權威)인 것이다.

 

하나님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권위의 하나님이시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비둘기와 양과 암소의 헌제에 실패하였을 때, 그의 자식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순종(順從)하여 이삭을 헌제로 바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5)고 하셨다. 이것은 이때까지 너는 내가 두려운 권위의 하나님인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네 아들을 제물로 바치도록 한 것이다라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해서, 안이(安易)하게 생각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며 도리어 두렵게 여기는 것을 원(願)하고 계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권위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물에 대한 인간의 주체격위(主體格位)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은 심정(心情)을 터로 하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완성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相續)받으면, 심정을 터로 한 하나님의 창조성을 발휘(發揮)하여 만물을 주관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사랑(참사랑)을 가지고 만물을 주관(主管)하게 된다. 그 때, 인간은 참된 의미에서 만물에 대한 주체격위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마르크스主義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을 국유화(國有化)하고 계획경제를 실시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에 대한 참다운 의식적(意識的)인 주인이 된다6)고 하였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主義)는 인간이 계획경제를 실시함으로써 만물주관의 주체격위(主體格位)에 서게 된다고 보고 있음을 뜻한다.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의 개혁(계획경제의 실시)에 의해서 인간이 만물주관의 격위(格位)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소련(蘇聯)이나 중국(中國) 등에서 경제정책이 실패하고, 생산성의 정체(停滯) 등으로 경제가 파탄된 것은 공산주의가 만물주관에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主義의 물질주의적(物質主義的) 인간관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물질적인 인간은 만물에 대해서 참다운 주체격위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연체의식(聯體意識)과 민주주의(民主主義)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실제로는 주체격위와 대상격위에 함께 서있다. 이것은 인간이 연체(聯體)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주체격위와 대상격위를 겸비(兼備)한 존재, 즉 이중격위(二重格位)를 가진 존재이다. 이것을 연체격위(聯體格位)라고 한다. 연체격위는 이중(二重)목적, 즉 전체(全體)목적과 개체(個體)목적을 지닌다. 예컨대 어느 직장에 있어서 한 부서(部署)의 장(예: 과장, 부장)은 부하(部下)에 대하여 주체격위에 있으나 동시에 상사(上司)에 대하여 대상격위에 처해 있다. 그 회사에 있어서 최고의 주체입장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상격위에 있으므로 인간은 누구나 엄격히 말해서 모두 연체격이(聯體格位)에 있는 것이다. 연체격위에 있어서 취해야할 마음의 자세는 대상의식과 주체의식을 겸비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연체의식(聯體意識)이라고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인간은 먼저 대상격위에 있다가 다음에 주체격위에도 서게 된다. 따라서 연체의식에 있어서는 대상의식이 우선(優先)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주체의식은 대상의식의 기반위에 세워지는 것이 본연의 모습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에 있어서 인간이 주체의 위치에 설 때, 대체로 주체의식을 우선(優先)하게 된다. 그 전형적(典型的)인 예가 독재자(獨裁者)들이다. 독재자들은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대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본연의 사회에서의 지도자는 비록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하나님 앞에 대상의 위치에 있음을 의식하고 겸손성(謙遜性)을 잃지 않는다.

 

다음에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연체의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는 다수결주의(多數決主義)와 권리평등(權利平等)의 사상으로서 이 권리평등의 사상은 로크(J. Locke, 1632~1704)의 `자연권(自然權)의 평등'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홉스(T. Hobbes, 1588~1679)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연상태는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鬪爭)이었으나 로크는 자연상태(自然狀態)에 있어서 자연법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 있다고 언명(言明)하면서, 자연상태에 있어서의 인간은 자연(自然)의 권리(權利)-생명(生命), 자유, 재산(財産)에 대한 평등한 권리(權利)-를 가진다고 하였다.7) 이 자연권(自然權) 사상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고대(그리스시대)로부터의 자연법 사상이었다. 이 자연법 사상에 근거한 권리평등의 사상이 근대민주주의(近代民主主義) 원칙의 성립의 동기가 되었다. 여기의 권리평등이란 개인 개인의 권리(權利)의 평등을 뜻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자연법에 근거한 권리평등의 사상을 정확히 말한다면 기독교의 하나님 앞에서의 平等의 사상에서 온 것이다. 즉 존 로크의 자연권(權利平等)사상은 인간의 平等한 자연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평등권사상(平等權思想)이 근대민주주의 성립의 참된 근거였다. 따라서 평등사상(平等思想)은 하나님앞에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평등을 뜻하는 것으로서 본래 평등사상은 대상의식의 사상(思想)이며, 따라서 질서의식의 사상이었다. 즉 민주주의는 본래 대상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출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발달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은 점점 대중의 관심권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개인의 권리주장(權利主張)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대상의식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 개인은 본래대로의 대상의식이나 연체의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주로 주체의식만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주체의식(主體意識)만을 지닌 인간의 관계, 즉 주체와 주체의 관계로 변질(變質)되었으며 이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질서부재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주체와 주체의 관계는 본질(本質)상 상극적(相剋的)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민주주의는 그 성립(成立)된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에는 비교적 건전한 발전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기독교 정신에 의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대상의식(對象意識)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후, 과학의 발달과 유물사상(唯物思想)의 확산(擴散)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는 세속화되어 갔으며, 따라서 인류의 정신지도의 능력(能力) 또한 사라져 갔던 것이다. 게다가 사회는 급속히 산업사회로 화하였고 가치관은 다원화(多元化)되어 갔다.

 

이러한 사회환경의 변천과 함께 민주주의의 권리평등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서의 대상(對象)의 평등에서 法 앞에서의 주체의 권리평등사상으로 변질(變質)되어 갔으며, 그 결과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민주주의의 모순 즉 주체와 주체의 상극적(相剋的)인 요인이 드디어 표면화되면서 여러 가지의 사회적 혼란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체와 주체의 상호관계는 서로 상극(相剋)의 관계이다. +전기와 +전기가 서로 배척(排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주체)의 권리평등의 사상은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조절기능이 없는 한 필연적(必然的)으로 상충현상을 빚어내기 마련이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紛爭), 충돌(衝突), 전쟁(戰爭), 상호증오(相互憎惡) 등을 비롯하여 갖가지의 불화현상은 모두 이 주체와 주체간의 상극작용의 표현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민주주의의 권리평등(權利平等) 사상은 시초부터 상극요인을 안고 출발하였으며, 따라서 때가 이르면 그 상극작용은 반드시 표면화(表面化)될 숙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때가 당도하자 잠재(潛在)해 왔던 상극작용이 표면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전체 민주주의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殺人), 강도(强盜), 방화(放火), 테러, 파괴, 마약중독, 부정부패, 性도덕(道德)의 퇴폐, 이혼율(離婚率)의 증대, 가정(家庭)의 붕괴, 에이즈(AIDS)의 확산, 성범죄(性犯罪)의 만연 등도 실은 모두 이 민주주의의 상극적 요인(要因)을 바탕으로 하고 일어나고 있는 가치관의 붕괴현상의 결과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사회의 가치관의 붕괴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인간의 머리에 다시 본래의 대상의식(對象意識)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인류의 참된 주체인 하나님을 다시 맞아들여야 하며 민주주의가 출발할 때의 본래의 정신(精神) 즉 인간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합리적(合理的)으로 증명(證明)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게 되면 자기의 상위자를 존경하게 되고, 또 상위자는 하위자를 사랑으로 지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국민을 사랑하게 되고, 국민은 정부에게 충성을 다하게 된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렸던 민주주의가 하나님을 중심한 민주주의가 될 때,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병폐(病弊)는 근본적으로 해결되게 된다. 통일사상은 하나님을 중심한 민주주의를 천부(天父) 중심의 형제주의 라고도 한다. 이것을 간단히 천부주의 또는 형제주의라고도 부른다. 부모없는 형제가 있을 수 없고 형제를 떠난 부모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전인류(全人類)는 참부모(父母)인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하고 사랑의 형제자매(兄弟姉妹)가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만물에 대한 인간의 주관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3대축복(三大祝福)의 하나로서 만물주관을 명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만물의 주관격위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만물주관이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이 만물을 단순히 지배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제1차, 2차, 3차산업)활동을 위시한 모든 경제활동과 제조활동, 기술활동이 모두 이 주관에 속한다. 그러면 이러한 만물주관에 대한 인간의 심적태도(心的態度)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만물에 대해서 사랑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만물에 대한 사랑이란, 온정(溫情)을 가지고 만물을 소중히 다루면서 위해 주는 것이다. 즉 사랑을 터로 하고 만물을 다루고 다스리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은 천도(天道)에 따르는 주관이기 때문에 만물(萬物, 자연)도 기뻐한다.

 

                  四. 결론(結論)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요, 신성적존재(神性的存在)요,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이다. 이것이 고래(古來)로부터의 철학적인 물음,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통일사상의 대답인 것이다. 결론으로서 이상의 인간 본성(本性)에 관한 이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신상을 닮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統一體)이다. (2) 인간은 신상을 닮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조화체(調和體)이다. (3) 인간은 신상을 닮은 개성체(個性體)이다. (4) 인간은 신성(神性)을 닮은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이며, 사랑을 실천(實踐)하는 인격(人格)的 존재(存在), 즉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이다. (5) 인간은 신성(神性)을 닮은 로고스的 존재(存在)요, 천도(天道)에 따라 사 는 규범(規範)的존재(存在)이다. (6) 인간은 신성(神性)을 닮은 창조적존재(創造的存在)요, 심정(心情)을 중심으로 한 만물의 주관주이다. (7) 인간은 이중(二重)목적과 연체의식(聯體意識)을 지닌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이다.

 

위와 같이 엄청난 내용을 가진 귀(貴)하고 성(聖)스러운 존재(存在)가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본질(本質)적인 인간의 본성을 든다면, 그것은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이다.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인간관(人間觀)으로서는 이성을 인간의 본성(本性)이라고 하는 지성인(지성(知性)人)(homo sapiens)이나 도구(道具)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인간의 본성(本性)으로 하는 공작인(工作人)(homo faber)등이 있었다. 전자(前者)에 속하는 인간관(人間觀)이 그리스철학이나 근대 합리주의 철학(哲學)이며 후자(後者)에 속하는 인간관(人間觀)이 마르크스주의나 프래그머티즘이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인간의 본질(本質)이 심정(心情) 또는 사랑이라는 뜻의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五. 통일사상에서 본 실존주의(實存主義) 인간관(人間觀)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추구(追求)한 대표적인 철학자들이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들이다. 실존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현실사회 속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절망하거나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러한 절망이나 불안에서 해방(解放)될 수 있는가를 생애(生涯)를 바쳐서 찾았던 것이다. 여기서 5명의 대표적인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哲學者)들의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통일사상의 인간관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성론의 이해를 보다 깊게 할 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 키에르케고르

 

   1)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人間觀)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自問)하고 인간은 정신(精神)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관한 하나의 관계이다.'8)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관계를 조정(措定)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기 이외의 제3자(第三者)가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을 곧 신(神)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본래적인 자기란 신(神) 앞에 서있는 자기(自己)이다.

 

그런데 본래 신(神)과 관계를 맺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이 신(神)으로부터 떠나버렸다. 그 경위는 불안(不安)의 개념(槪念)이라는 책속에서 성서 창세기의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처음에 아담은 평화와 안식의 상태에 있었으나 동시에 불안(Angst)한 상태에 있었다. 신(神)이 아담에게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을 때, 아담속에 자유의 가능성이 자각(自覺)되었으며 이 자유의 가능성이 아담을 불안(不安)에 빠뜨렸다. 그리고 아담이 자유의 심연(深淵)을 들여다 봄으로써 현기증(Schwindel)을 느껴 자기(自己)에게 집착(執着)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원죄(原罪)가 성립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자신(自己自身)에 대한 관계 속에 분열이 일어나 절망(絶望; Verzweifelung)에 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인간은 이 절망을 위로부터 자기를 내리 누르는 어떤 무엇인 것처럼 착각하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 절망을 제거(除去)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으로는 결코 절망이 제거되지 않는다. 신앙에 의해서 신(神)과의 관계를 회복(回復)함으로써만 본래의 자기의 관계를 되찾을 수가 있고, 절망에서 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공중(公衆)은 일절(一切)이며, 무(無)이다. 모든 세력중에서 가장 위험(危險)한 것, 그리고 가장 무의미한 것이다."9)라고 하면서 대중(大衆)의 무책임성과 양심(良心)이 없음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참다운 인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인간적(非人間的)인 대중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단독자로서 단지 홀로 신(神)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본래的인 자기에로 돌아가는 단계를 실존(實存)의 3단계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p. 265

 

첫째의 단계는 미적(美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단지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감성적(感性的)인 욕구(欲求)에 따라 기지(機智)를 가지고 살려고 하며, 이 단계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목적은 향락(享樂)이다. 이것은 에로스적 사랑을 추구하는 심미가(審美家), 유혹자(誘惑者)의 입장이다. 그러나 향락의 순간은 계속해서 반복되기 어려우며, 결국은 권태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좌절(좌절(挫折))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결단에 의해 다음의 단계로 옮아간다.

 

둘째의 단계는 윤리적(倫理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양심(良心)을 선악(善惡)의 판단기준으로 삼고 살려고 한다. 즉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선량(善良)한 시민으로서 살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努力)해도 전적으로 양심에 따라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다시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새로운 결단에 의해 다음의 단계로 넘어간다.

 

셋째의 단계는 종교적(宗敎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신앙을 가지고 신(神) 앞에 홀로 서는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 비로소 인간은 참다운 실존(實存)이 된다. 이 단계에 이르려면 비약(飛躍)이 필요하다. 그것은 지성(知性)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역설(逆說)(Paradox)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예컨대 인륜(人倫)에 반하는 신(神)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식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신앙이나, 영원(永遠)한 신(神)이 유한(有限)한 시간(時間)속에서 수육(受肉, 육신을 쓰고)하여 인간(예수)이 되어 나타났다고 하는 비합리적(非合理的)인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을 그는 역설(逆說)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약을 통하여 비로소 신(神)과의 관계를 회복(回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인륜(人倫)에 반하는 신(神)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복종하여 자식 이삭을 제물로서 바치려고 한 행위를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인 삶의 전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神)을 중심으로 한 실존(實存), 즉 본래의 자기가 된 인간이 자기(自己)를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신(神)을 매개(媒介)로 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을 주고 받을 때, 그와 같은 사랑의 행위에 의해서 참된 사회가 성립(成立)될 수가 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人間觀)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신(神)에서 떠남으로써 자기자신(自己自身)에 관한 관계에 분열이 생겨서 불안과 절망에 빠졌다고 하였는데, 자기자신에 관한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그는 밝히지 않고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이것은 마음과 몸 또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관계라고 가상(假想)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이 가상을 전제로 하고 그의 자기(自己) 자신에 관한 관계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러면 이런 전제(前提)에서 볼 때, 자기 자신에 관한 관계에 분열(分裂)이 생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신(神)을 떠남으로써 마음과 몸이 분열된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본래적인 자기에 있어서는 신(神)을 중심으로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 타락으로 마음과 몸이 갈라졌음을 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인간의 생심과 육심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회복하여 원만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가능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단독자(單獨者)로서 신(神) 앞에 서게 될 때, 절대자(神)에 대하여 절대적인 관계에 선다고 하였다. 이 단독자는 통일사상에서의 인간본성의 개성체(個性體)에 해당하는 개념(槪念)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자가 왜 절대적인가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인간의 개성체(個性體)가 절대적인 것은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의 개별상(個別相)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관계성과 단독성은 통일사상의 마음과 몸의 통일적관계(統一的關係)와 개성체(個性體)의 개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이러한 이해(理解)는 인간본성(本性) 전체에 대한 이해는 아니다. 인간 본성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은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이다. 또 인간이 단독자로서 즉 개성체(個性體)로서 신(神) 앞에 선다고 보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파악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夫婦)로서 신(神)앞에 설 때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된다. 인간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조화체(調和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 로고스적 존재이며 창조적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주체성(主體性)과 대상성(對象性)을 함께 구비한 격위적 존재이기도 하다. 단독자로서 홀로 신(神)앞에 선다는 그의 인간관은 진지(眞摯)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인간은 고독하고 쓸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왜 신(神)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이 명백해지지 않는 한 본래의 자기 즉 신(神)의 지음을 받은 대로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담이 자유의 가능성(可能性)에서 오는 불안 때문에 죄(罪)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통일원리에 의하면 자유나 불안이 타락의 원인은 아니다. 인간 시조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천사장(天使長)의 유혹에 의하여 사랑의 방향성(方向性)을 잘못 잡았던 것이다. 즉 그들은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에 의해서 타락한 것이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탈선(脫線)하려고 할 때 그들의 본심의 자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데 대한 불안감을 일으켰으며, 이 불안감은 오히려 그들이 탈선(脫線)하지 않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이 불안감을 누르고 그들로 하여금 타락(墮落)線을 넘게 하였다. 이 타락의 결과로 인류는 신(神)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계명을 어긴 데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의 단절(斷切)로 인하여 불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타락의 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신(神)의 사랑에 관한 개념도 막연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정(溫情)을 가지고 대상을 무한히 위해 주고자 하는 정적(情的) 충동인 심정으로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지상(地上)에 나타날 때에는 방향성(方向性)을 갖추고 나타난다. 즉 먼저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형제의 사랑과 같은 분성적(分性的)인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다시 여러 방향으로 확대되어서 인류애(人類愛), 민족애(民族愛), 린인애(隣人愛, 이웃사랑), 동물(動物)에의 사랑, 자연에의 사랑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구체적인 내용과 방향성이 있으며, 막연한 사랑을 신(神)의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回復)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허위(虛僞)와 싸워서 신(神)에게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쳤다. 이것은 사회의 박해(迫害)와 조소를 참으면서 신(神)을 뵈려고 한 그 자신의 발걸음을 반영(反映)한 것이며,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도록 당시의 종교인(宗敎人)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려는 충고이기도 한 것으로서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그는 27세때 레기네 오르센과 약혼(約婚)하였으나 결혼으로 그녀를 불행(不幸)에 빠뜨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또 연애보다도 차원이 높은 이상적(理想的) 사랑을 실현해 보고자 일방적(一方的)으로 약혼을 파기(破棄)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통일사상으로 볼 때 그는 무의식중에 인격(人格)을 완성한 터 위에서, 신(神)을 중심한 참다운 남녀(男女)의 사랑을 실현할 것을 원했다고 볼 수 있다. 본래의 인간상(像)을 찾아 나아가는 키에르케고르의 방향성(方向性)은 기본적으로 통일사상의 입장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2) 니 체

 

   1) 니체의 인간관(人間觀)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신(神)앞에 설 때 본래的자기(自己)가 된다고 하였으나 니체(Nietsche, Friedrich Wilhelm, 1844~1900)는 그와 반대로 신(神)에 대한 신앙에서 해방될 때, 인간은 비로소 본래적 자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니체는 당시 유럽사회에서의 인간의 수평화(水平化), 왜소화(矮小化)를 개탄(慨歎)하고, 그 원인이 기독교의 인간관에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生(生命)을 부정하고 금욕주의(禁慾主義)를 주장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피안(彼岸)에 두었다. 또 만인은 신(神)앞에 평등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인간의 활발한 생명력(生命力)을 소실(消失)시키고 강(强)한 인간을 끌어내리어 인간을 평균화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신(神)은 죽었다(Gott ist tot)라고 선언(宣言)하면서 기독교를 공격(攻擊)했다. 기독교의 도덕은 신(神)이나 영혼(靈魂)이라는 개념으로 生과 육체를 억압하고, 生의 현실을 부정적(否定的)으로 봄으로써 강한 인간에의 길을 막았으며, 약자(弱者)나 고생하는 자를 후원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도덕을 그는 노예도덕(奴隷道德))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사랑의 생활, 정신적(精神的)인 생활을 물리치고 본능에 의한 생활, 생명이 욕구하는 대로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긍정(肯定)하였다.

 

생명(生命)이란 성장(成長)하려고 하는 힘이며, 발전하려는 힘이다. 그는 대체로 살아 있는 자를 발견하는 곳에서 나는 권력에의 의지도 발견하였다. 그리고 복종(服從)하며 봉사하는 자의 의지 속에서도 나는 주인이 되려고 하는 의지를 발견하였다"10)라고 하였으며, 인간의 모든 행위의 근저(根底)에는 보다 강대해지고자 하는 권력(權力)에의 의지(意志)(Wille zur Macht)가 존재(存在)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노예도덕(奴隷道德)을 대신하여 권력의 크기를 가치기준으로 하는 군주도덕(英雄道德)을 수립했다. 그는 선(善)과 악(惡)의 기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善)이란 무엇인가?-권력(權力)의 감정을, 권력에의 의지(意志)를, 권력자체를 인간에게 높이는 모든 것이다. 악(惡)이란 무엇인가?-나약으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것이다. 행복(幸福)이란 무엇인가?-권력이 성장한다는 것, 저항(抵抗)을 이겨낸다는 것의 감정(感情),... ... ... 약자(弱者)나 잘못된 것 등은 철저(徹底)하게 몰락(沒落)해야 한다. 이것이 즉 우리들의 인간愛의 제일명제(第一命題)이다. 그리고 그들의 철저한 몰락(沒落)을 도와 주어야 한다. 어떠한 배덕(背德, 배은망덕)보다도 유해(有害)한 것은 무엇인가? 모든 잘못된 것과 모든 약자에 대하여 아주 불쌍히 여기는 것, 이것이 기독교이다.11)

 

그의 군주도덕(君主道德)에 의한 이상적 인간상(像)은초인(超人)(Ubermensch)이다. 초인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극한(極限)에까지 실현한 존재로서 권력의지(權力意志)의 체현자(體現者)이다. 초인의 가능성은 모든 生의 고통을 견디고 生을 절대적으로 긍정(肯定)하는데 있다. 生을 절대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은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있다"12라는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사상, 즉 세계는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이 영원히 반복(反復)한다는 사상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운명(運命)도 이를 인내(忍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 운명(運命)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하면서 운명애(運命愛)(amor fati)를 주장하였다. p.271

 

   2) 통일사상에서 본 니체의 인간관(人間觀)

 

기독교의 극단적(極端的)인 내세주의(來世主義)에 의하여, 인간은 현실의 생활을 존중(尊重)할 수가 없게 되어서 약체화(弱體化)하였다고 니체는 생각하였으나, 인간의 본성(本性)을 회복(回復)하려고 고뇌(苦惱)한 그의 진격(眞擊)한 노력은 그 나름대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니체의 주장은 기독교에 대한 하나의 참소요, 경고였다. 즉 기독교가 그 본래의 정신(精神)에서 이탈(離脫)하고 있다고 니체는 생각하였다. 니체가 본 기독교의 하나님은 높은 곳에 앉아서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는 사후(死後)의 부활(復活)을 약속하고,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벌(罰)을 준다는 심판의 신(神)이고, 피안(彼岸)的인 신(神)이었다. 그러나 니체가 비난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고 예수의 가르침을 피안주의(彼岸主義)로 변화시킨 바울이었다.13)

 

통일사상에서 보면, 하나님은 현세(現世)를 부정하고 높은 곳에만 계시는 피안적인 신(神)만은 아니다. 신(神)의 창조목적은 사후(死後)의 세계에 있어서의 천국이 아니라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실현이었다. 그리고 지상에 천국이 실현되었을 때, 지상에서 천국생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사후(死後)에 천상천국(天上天國)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使命)도 본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실현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울이 피안주의(彼岸主義)로 변질시켰다고 하는 니체의 주장에는 일리(一理)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태민족(猶太民族)의 불(不)신앙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구원(救援)은 영적(靈的)인 구원이 되었고 현세에 있어서의 인간은 항상 악(惡)의 주체인 사탄의 침입(侵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을 비난(非難)한 나머지 기독교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신(神)의 죽음까지 선언(宣言)한 것은 잘못이었다.

 

다음은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에는 권력의지(權力意志)가 있다는 니체의 주장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라하는 축복(祝福)을 주셨다. 즉 신은 인간에게 주관성(主管性)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지배욕(주관욕) 그 자체는 신(神)으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본성의 하나이다. 이 지배(주관)의 위치는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의 하나인 주체격위(主體格位)에 해당한다. 그런데 주체격위의 항목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래의 주관(主管)은 사랑에 의한 주관이지 힘에 의한 주관은 아닌 것이다. 즉 주관성을 발휘(發揮)하는 전제조건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여 인격(人格)을 완성하고 가정생활에 있어서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기대위에서 참다운 주관성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그와 같은 기반을 무시(無視)하고 단지 권력의지(權力意志)만을 전면(前面)에 내세웠으니 거기에 니체의 또 하나의 잘못이 있다 하겠다. p.273

 

니체는 기독교의 도덕(道德)이 강자(强者)를 부정하는 약자(弱者)의 도덕이라고 하였으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참다운 주관성을 발휘(發揮)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참사랑을 가르쳤으며, 또 가르쳐야만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육신의 본능적 욕망을 통하여 작용하는 악(惡)의 힘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육신의 본능적(本能的) 욕망(欲望) 그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타락인간은 육신을 주관해야 할 영인체(靈人體)의 심령기준이 미완성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이 육신의 본능적 욕망에 따라 살면 악(사탄)의 힘에 지배(支配)되고 만다. 영인체의 심령기준이 높아져서 육신을 주관하게 될 때, 즉 생심(生心)이 육심(肉心)을 주관하게 될 때 비로소 육신의 움직임은 선(善)하게 된다.

 

그런데 니체는 정신(精神), 사랑, 이성을 무시하고 육체(肉體), 본능(本能), 생명(生命)을 중시(重視)하라고 외쳤다. 이것은 인간의 영인체를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인간에게서 영인체를 무시할 경우 무엇이 남을 것인가. 동물적인 육신만이 남는다. 즉 니체는 인간을 동물의 격위에까지 격하(格下)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해서 강대해지라고 하는 것은 맹수가 되라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神)이 창조하려고 한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인간을 본래의 모습으로 인도(引導)하고자 한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지만 그 방법이 전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로서 성상이 주체요 형상이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니체는 인간의 형상적인 면만을 중시(重視)하고 성상적인 면을 무시(無視)했던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기독교人들이, 예수님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실현코자 오셨던 사실을 망각하고 지상의 생활을 자칫 경시(輕視)하려는 경향에 대해서 경고를 발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도 좋을 것이다.

 

  (3) 야스퍼스

 

   1) 야스퍼스의 인간관(人間觀)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에 있어서의 실존(實存)이란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은 자아(自我)를 말한다. 그는 실존(實存)이란 결코 객관(客觀)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내가 그것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또 행동하는 근원(根源)이며…… 실존(實存)이란 자기자신에 관련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초월자(超越者)에 관계하는 것(그 무엇)이다"14)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사고방식(思考方式)이다.

 

그는 초월자(Transzendenz) 또는 포괄자(包括者; Das Umgreifende)를 아직 만나지 아니한 실존 즉 본래적 존재를 찾아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실존을 가능적 실존(mogliche Existenz)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가능적(可能的) 실존(實存)이며, 그러한 상황에 대처해 가면서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죽음(Tod), 고뇌(苦惱)(Leiden), 투쟁(鬪爭; Kampf), 부채(負債; Schuld) 등 우리들이 넘을 수도 없고 변경(變更)할 수도 없는 상황이 존재(存在)한다'15)라고 지적하고 이것을 한계상황(限界狀況)(Grenzsituation)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영원(永遠)히 사는 것을 원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죽음은 자기의 존재의 부정이다. 또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고통, 질병, 노쇠, 기아 등의 고뇌가 있다. 또 인간이 살아있는 한 투쟁은 피할 수 없으며, 자기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고 하는 빚(負債)을 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상황(限界狀況)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절망하거나 좌절(挫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 이 좌절(挫折)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결정된다. 한계상황을 도피하지 않고 좌절을 직시(直視)하며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그것을 수용(受容)할 때, 존재세계(世界存在)를 넘어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그 무엇)이 느껴지게 된다'16)는 것이다.

 

즉 그 때까지 무의미(無意味)한 것으로 생각되던 자연의 배후에, 역사의 배후에, 철학의 배후에, 예술의 배후에 초월자 즉 신(神)이 있어서 우리들을 포옹(抱擁)하고,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홀연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 초월자는 직접적(直接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암호로써 나타난다. 초월자는 자연이나 역사, 철학이나 예술 등을 통하여 암호(暗號)로 나타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 오는 것이다. 그리고 한계 상황 속에서 좌절을 체험한 자가 그 암호를 풀 수가 있다. 이것을암호해독(暗號解讀)(Chiffredeutung)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하여 인간은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다만 혼자서 초월자를 향하여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참된 자기의 실존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만난 다음부터 인간은 타인과의 사귐(交際)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한다. 서로 대등(對等)한 입장에 서서 각자(各自)의 자립성(自立性)을 인정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본래 인간의 삶이며, 타인과의 교제를 통하여 실존(實存)이 완성되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절(一切)의 목적의 의미에 최종적인 근거를 주는 철학의 목적, 즉 존재(存在)를 내적으로 각지(覺知, 지각)하고 사랑을 개명(開明)하며 평안을 완성한다는 목적은 사귐에 있어서만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17) 실존(實存)의 사귐은 긴장(緊張)의 관계이며 사랑의 싸움이다."18)

 

   2) 통일사상에서 본 야스퍼스의 인간관(人間觀)

 

야스퍼스는, 인간은 보통 초월자(超越者)를 발견하지 못한 가능적실존(可能的實存)이지만 한계상황을 통과함으로써 초월자에 관계되는 실존(實存), 즉 본래의 자기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왜 인간은 보통, 가능적 실존으로서 초월자로부터 떨어지게 되었는가? 또 왜 인간은 한계상황을 통과할 때에 초월자를 만나게 되는가? 야스퍼스는 이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는 한, 본래의 자기는 무엇인가, 또 어떻게 해야 본래의 자기를 회복(回復)하는가 하는 것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통일원리(統一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목적을 완성하도록 지음받았다. 창조목적의 완성이란 삼대축복(三大祝福)의 완성, 즉 인격의 완성, 가정의 완성, 주관성의 완성을 뜻한다. 그런데 인간시조(人間始祖)인 아담과 해와는 성장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인격이 미완성한 채 타락했으며 비원리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부부(夫婦)가 되어 가지고 죄(罪)의 자녀를 번식(繁殖)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인류(全人類)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비원리적인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는 것이, 본래적인 자기를 회복하는 길이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창조목적을 실현할 때 나타나게 되어 있다. 야스퍼스는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自己自身)에 관계하면서 초월자에 관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실존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통일사상으로 볼 때 3대축복(三大祝福)중의 제1축복(第一祝福)인 인격완성만을 다룬 입장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통일사상이 말하는 인간본성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에 해당한다. 야스퍼스는 타인과의 사귐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이 사랑 역시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막연하다.

 

참된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온정(溫情)을 가지고 대상을 한없이 위해 주고자 하는 정적인 충동으로서, 이 사랑이 가정을 통하여 4대상(四對象)을 향하는 사랑(부모(父母)에 대한 子女의 사랑, 부부(夫婦)의 사랑, 子女에 대한 부모(父母)의 사랑, 자녀 상호간의 사랑)으로서 분성적으로 나타난다. 이 4대상(四對象)에의 사랑을 기본으로 할 때 타인과의 교제에 있어서의 사랑이 원만해지게 된다. 야스퍼스는 실존(實存)의 사귐은 긴장(緊張)의 관계이고 사랑의 싸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랑의 본질은 기쁨이다. 따라서 본래의 사랑은 긴장이나 싸움으로 표현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다음의 문제는 왜 한계상황을 통과함으로써 인간이 초월자를 만날 수 있게 되는가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좌절을 직시(直視)하고 성실히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만난다고 했다. 그러나 한계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좌절을 성실하게 받아들인 사람 중에는, 니체와 같이 신(神)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사람도 있고, 키에르케고르처럼 신(神)에게 더욱 가까워진 사람도 있다. 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가 야스퍼스의 철학에서는 명백하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렸으며 악(惡)의 주체인 사탄의 주관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무조건(無條件)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속죄(贖罪)의 조건-탕감(蕩減)조건(條件)-을 세우고서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스퍼스의 한계상황(限界狀況)에서의 절망과 좌절은 탕감조건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 조건을 뜻 맞게 세움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한계상황에 있어서 고통(苦痛)을 견디어 내면서도 救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마태 7:7)라고 한 것같이 자기중심을 버리고 절대적인 주체(하나님)를 찾으려고 하는 대상의식(對象意識)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自己)중심적(中心的)인 주체의식만을 가지고 있거나, 원념(怨念, 원한)이나 복수심을 품고 있는 한, 아무리 한계상황을 통과해도 신(神)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좌절의 암호(暗號)를 해독함으로써 인간은 초월자를 만난다고 하였으나, 암호해독(暗號解讀)으로 알려진 신(神)은 상징적인 신(神)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만으로는 신(神)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신(神)의 창조목적과 인간타락(墮落)의 사실을 알고,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할 수가 있고 참다운 실존(본연의 자아(自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4) 하이데거

 

   1) 하이데거의 인간관(人間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99~1976)는 인간을 현존재(現存在)(Dasein)라고 규정했으나 근대 철학이 말한 인간 처럼 세계를 향해 서있는 자아(自我)로 보지는 않았다. 그것(現存在)은 현재(現在) 거기에 있는 개개의 인간의 존재(Sein)를 의미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 있으면서 다른 존재자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관심을 가지고 자기의 주변을 살피고 타인(他人)에게 마음을 쓰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現存在)의 이와 같은 근본적인 존재방식(存在方式)을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In-der-Welt-Sein)라고 하였다. 세계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주사위처럼 세상 속에 던져져 있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이 지상에 태어나려고 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주사위처럼 이 세상에 던져져 있음을 깨닫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상태(狀態)를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또는 사실성(事實性)(Faktizitat)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보통 일상생활에 있어서, 주위의 의견이나 사정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동안에 자기의 주체성을 상실(喪失)하게 된다. 이것이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이른바 속인(俗人)(Das Man)의 입장이다.19) 속인(俗人)은 일상생활에서 잡담으로 소일하거나 호기심(好奇心)에 사로잡혀서 애매함속에 안주하고 있다. 이것을 현존재(現存在)의 퇴락(頹落; Verfallen)이라고 한다.

 

이유도 없이 세계 속에 던져져 있는 현존재는 불안(不安; Angst)속에 있으나 그 불안의 유래(由來)를 더듬어 보면 결국 죽음에의 불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불안속에서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어차피 죽음에의 존재(存在)(Sein zum Tode)임을 적극적(積極的)으로 인정하고 진지하게 미래를 향하여 결의(決意)하고 살아갈 때, 본래의 자기를 지향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자기자신을 던지게 된다. 즉 자신의 미래를 기획(企劃)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투기(투기(投企); Entwurf)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존재(現存在)의 성질을 실존성(實存性; Existenz)이라고 한다.

 

이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던지는 것일까. 그것이 양심의 소리이다. 양심의 소리(Ruf)란 퇴락(頹落)한 자기에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갈 것을 바라는 내적인 호소이다. 하이데거는 양심의 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소리는 틀림없이 세계속에서, 나와 함께 있는 타인(他人)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양심(良心)의 소리는 나의 속에서 그러면서도, 나를 넘은 곳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20) p.280

 

하이데거는 또 인간의 현존재(現存在)의 존재의 의미를 시간성(時間性; Zeitlichkeit) 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현존재(現存在)의 존재방식은 던진다는 면(앞으로 기획(企劃)한다는 면)에서 보면 자기(自己)에 앞서 있음(未來에 있음)이며 던져져 있다는 面(과거에 이미 던짐을 받았다는 면)에서 보면 이미 속에 있음(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며 관심을 가지고 환경을 살피며 타인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面에서 보면 존재자(存在者)의 옆에 있음이다. 이들 세 가지 계기(契機)를 시간성에 비추어보면 각각 미래(未來; Zukunft), 기존(旣存)(과거(過去; Gewesenheit), 현재(現在; Gegenwart)에 해당한다.

 

인간은 세계에서 떠난, 고립(孤立)된 자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인수(引受)하면서 현재의 퇴락(頹落)에서 자기를 구제하기 위하여, 미래의 가능성을 향하여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시간성(時間性)에서 본 인간관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하이데거의 인간관(人間觀)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이며,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속인(俗人)이며 그 특성은 불안(不安)이라 하였다. 그러나 왜 인간은 본래의 자기를 상실하였는가, 또 본래의 자기는 어떤 것인가를 그는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있다. 본래의 자기를 향하여 자신을 던진다고 하나 그 목표로 삼아야 할 인간상(像)이 불분명(不分明)하면, 똑 바로 본래의 자기로 향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가 없다. 그는 양심(良心)의 소리가 인간에게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도록 인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인간이 양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며, 이 상식적인 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한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神)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결국 니체와 같이 본능적(本能的)인 생명에 따라 사느냐, 하이데거와 같이 양심(良心)에 따라 사느냐의 어느 한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양심에 따라 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不充分)하다. 인간은 본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양심은 각자가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양심의 기준이 다르다. 따라서 양심에 따라 살 때 그것이 본래의 자기를 지향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아무도 확언(確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는 본심(本心)에 따라 살 때, 인간은 비로소 본래의 자기를 향하여 가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막연히 미래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미래를 향하여 결의(決意)할 때, 불안(不安)에서부터 구제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래의 자기모습이 명백하지 않은데 어떻게 불안(不安)에서 구제될 수가 있을 것인가. 통일사상에서 보면 불안의 원인은 신(神)의 사랑에서 떠난 데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신(神)께로 되돌아가서 신(神)의 심정(心情)을 체휼하여 심정적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불안에서 해방되고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죽음도 결의(決意)된 죽음으로서 받아들일 때, 죽음에의 불안을 초월(超越)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을 해결했다고는 할 수 없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인간은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통일체, 즉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이며, 육신을 토대로 하여 영인체가 성숙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지상의 육신생활을 통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면 성숙된 영인체(靈人體)는 육신의 死後, 영계에서 영원히 산다. 인간은 죽음에의 존재(存在)가 아니고 영생(永生)의 존재(存在)이다. 따라서 육신의 죽음은 곤충의 탈피(脫皮)에 해당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죽음의 불안은 죽음의 의의(意義)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자기의 미완성을 의식적(意識的)으로나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느끼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 인간(현존재(現存在))이 시간성을 가진다고 하였다. 즉 인간은 과거(過去)를 인수받고 현재의 퇴락(頹落)에서 떠나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명백하지 않다. 통일원리(統一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아담과 해와의 타락이래(墮落以來) 혈통적으로 원죄(原罪)를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상이 범한 유전죄(遺傳罪)나, 인류나 민족이 공통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는 연대죄(連帶罪)를 짊어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죄(罪)를 청산하기 위한 조건(條件, 탕감조건)을 세우면서 본래의 자기와 본래의 세계를 복귀하는 과업을 사명으로서 부여(附與)받고 있는 것이다.

 

이 과업은 인간 1대(一代)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자자손손(子子孫孫) 바톤을 계승하면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과거의 조상들이 다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탕감조건을 인수(引受)해서 현재의 내가 그것을 청산하고 또 미래의 자손에게 복귀(復歸)의 터전을 물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통일사상에서 바라본, 인간이 시간성을 가진다는 것에 대한 참된 의미이다.

 

  (5) 사르트르

 

   1) 사르트르의 인간관(人間觀)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일 하나님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신(神)의 실존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출발했다. 하이데거는 신(神)이 없는 실존을 주장했지만 사르트르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神)을 부정하는 실존(實存)을 말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실존(實存)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써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인간은 우선 존재하고 세계 속에서 만나고, 세계 내에 별안간 모습을 나타내고 그 후에 정의(定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가 생각하는 인간이 정의(定義) 불가능한 것은, 인간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후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인간은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그의 본성(本性)을 생각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1)

 

도구(道具)는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그 제작자(製作者)에 의해서 그 용도(用途)나 목적, 즉 본질이 결정된다. 따라서 본질이 존재에 선행(先行)한다. 마찬가지로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관념(觀念)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인간에 있어서도 본질이 존재(存在)에 선행(先行)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르트르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본질에서가 아니라 無에서 출현한 것이다.

 

다음에 그는 실존(實存)은 주체성(主體性)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無에서 출현한 우연적존재(偶然的存在)이며 누구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방식(存在方式)을 계획(計劃)하고, 자신을 선택(選擇)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주체성의 의미이다. 즉 공산당원(共産黨員)이 되거나 기독교도가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와 같은 실존(實存)의 근본적 성격을 불안(不安)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선택하나 그것은 동시에 각인(各人)은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전인류(全人類)를 선택한다"22)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전인류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을 뜻하며 여기에 우리들의 불안(不安)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안(不安)은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행동의 조건(條件) 그 자체이며, 행동 그 자체의 일부라고 한다.

 

인간은 또 자유로운 존재이다.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서는 인간은 무엇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으며, 어떠한 일도 허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일체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무거운 짐이며, 인간은 자유로워지도록 저주받고 있는 것"23)이다. 즉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 만일 한편에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正當化)하는 가치나 명령을 눈앞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배후에도, 또 전방(前方)에도, 명백한 가치의 영역(領域)에 정당화를 위한 이유도, 핑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들은 핑계도 없어 고독(孤獨)하다. 그것을 나는 인간이 자유의 刑에 처해져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24) p.284

 

인간이 주체성(主體性)이라고 하면 인간은 그 주체성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받아야 할 대상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존재에는 즉자존재(卽自存在)(etre-en-soi)〕와 대자존재(對自存在)(etre-pour-soi)가 있다. 즉자존재(卽自存在)는 그 자체로서 있는 만물이며, 대자존재(對自存在)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주체성을 발휘함에 있어서 즉자존재(卽自存在)(만물)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대자존재(對自存在)(인간)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주체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타인(他人)도 또한 주체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고 있을 때, 그 인간존재(存在)를 대타존재(對他存在)'(etre-pour-autrui) 즉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대타존재(對他存在)의 근본적구조(상호관계)는 視線을 보내는 者가 되거나 시선을 받는 者가 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나의 대상이거나 내가 다른 사람의 대상이거나 하는 관계이다.25) 즉 인간관계는 끊임없는 상극관계(相剋關係)가 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존재는 타인(他人)을 초월하거나 혹은 타인(他人)에 의해 초월되거나 하는 이 딜레마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의식개체(意識個體)의 상호간의 관계의 본질은 공동(共同) 존재(存在)(Mitsein)가 아니고, 상극(相剋; conflict)이다."26)

 

   2) 통일사상에서 본 사르트르의 인간관(人間觀)

 

사르트르는 인간에 있어서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신을 만든다고 하였다. 하이데거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그의 경우에 있어서의 양심(良心)의 소리는 막연하지만 인간을 본래의 자기에게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경우에 있어서 본래의 자기라는 것은 완전히 부정되어 버린다. 이것은 신(神)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린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만일 사르트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에 있어서 선악(善惡)의 기준은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자기의 책임으로 결단했다면 그것만으로 합리화(合理化)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사회는 윤리부재(倫理不在)의 사회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르트르는 또 인간은 주체성(主體性)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인간은 주체성인 동시에 대상성(對象性)이다라는 것, 즉 인간의 본성은 주체격위(主體格位)인 동시에 대상격위(對象格位)라는 것을 주장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주체성이란 자유로이 자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말하며 또 다른 사람을 대상화(對象化)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이 말하는 주체성은 사랑으로써 대상을 주관하는 능력을 말한다. 참다운 주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먼저 대상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먼저 대상격위에 서있으면서 대상의식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대상격위의 단계를 거쳐서 성장 또는 승진하여 드디어 주체격위에 서서 주체성(主體性)을 발휘하게 된다. 또한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주체성과 주체성의 상극의 관계 혹은 자유와 자유의 상극의 관계이다. 이것은 홉스의 만인(萬人)의 만인(萬人)에 대한 투쟁(鬪爭)에 통하는 사상으로서 분명히 잘못된 주체관이며 잘못된 자유관이다. 이러한 주체관이나 자유관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민주주의(民主主義)사회(社會)의 혼란을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은 주체성과 대상성의 양면(兩面)을 갖추어야 하며, 동시에 그 양면(兩面)의 기능이 원만한 수수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때에 비로소 평화의 세계가 실현되는 것이다.

 

또한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자유란 저주받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원리(原理)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원리(原理)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규범(規範)인 것이다. 따라서 참된 자유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자유인 동시에 규범 안에서의 자유이다. 규범을 떠난 자유는 실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放縱)이다.

 

                제4장 가치론 (第4章 價 値 論)

 

Axiology

 

오늘의 시대는 대혼란(大混亂)의 시대요, 大상실(喪失)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전쟁과 분쟁은 그칠 줄 모르며 테러, 파괴, 방화, 납치, 살인, 마약중독, 알콜중독, 性도덕(道德)의 퇴폐(頹廢), 가정(家庭)의 붕괴(崩壞), 부정부패(不正腐敗), 착취, 억압, 모략, 사기, 중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악덕현상(惡德現象)들이 세계를 뒤덮고 있다. 이와 같은 대혼란(大混亂)의 와중에서 인류의 귀중한 정신적 유산들은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다. 인격(人格)의 존엄성(尊嚴性)의 상실, 전통의 상실, 생명(生命)의 존귀성의 상실, 인간 상호간의 신뢰성(信賴性)의 상실, 부모(父母) 및 교사(敎師)의 권위상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혼란(混亂)과 상실이 오게 된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전통적인 가치(價値)觀의 붕괴 때문이다. 즉 진(眞)-선(善)-미(美)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觀念)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선(善)에 대한 관념이 사라지면서 윤리?도덕관이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가치관의 붕괴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배제(排除)하고 종교를 경시(輕視)해 왔기 때문이다. 전통적 가치관의 대부분은 종교적 기반 위에서 성립된 것인데, 이 기반이 무너지니 가치관은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 밖에 없었다.

 

둘째로, 유물론(唯物論)이나 무신론(無神論) 특히 공산주의 이론의 침투에 의한 가치관의 파괴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두 계급(階級)으로 구분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립(對立)을 선동(煽動)하고 불신감(不信感)을 증대시키면서 철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곤 하였다. 공산주의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봉건적(封建的)이라든가 체제유지를 위한 도구라고 비판하면서 가치관의 붕괴를 기도(企圖)해 왔다.

 

셋째로, 종교(宗敎) 상호간의 대립이나 사상(思想) 상호간의 상충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對立)이나 상충이 가치관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가치관은 종교나 사상의 기반 위에서 세워지기 때문에, 종교나 사상에 대립과 상충이 있게 되면, 사람들은 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게 되며, 따라서 일정(一定)한 가치관을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넷째로, 중세(中世) 이후(以後) 전해 내려온 전통적(傳統的)인 종교(유교, 불교, 기독교, 회회교 등)의 덕목(德目)들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현대인들을 설득하는데 실패(失敗)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 속에는 비과학적인 내용들이 적지 않으며, 따라서 과학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信賴)를 갖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종교적 가치관은 수용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의 원인(原因)을 이와 같이 분석(分析)할 때, 여기에 필연적(必然的)으로 새로운 가치(價値)觀의 정립(定立)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定立) 없이는 앞으로 도래(到來)하게 될 미래(未來)의 이상사회를 대비(對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새로운 가치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먼저 기존의 모든 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모든 사상의 가치관을 함께 포괄(包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유물론(唯物論)이나 무신론(無神論)을 극복할 수 있는 가치관이어야 하며, 과학을 포용(包容)하고 지도할 수 있는 가치관이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지닌 가치관이란 절대자(絶對者)인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한 절대적 가치관이다. 이것이 바로 미래사회(未來社會)의 대비(對備)를 위하여 오늘날 절실히 요구되는 새로운 가치관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대비해야 할 미래사회는 구체적(具體的)으로 어떠한 사회인가를 살펴보자. 미래사회는 본연(本然)의 인간에 의해서 건설되는 사회이다. 본연의 인간이란 하나님의 심정(心情), 하나님의 참사랑을 지닌 인격(人格)의 완성자를 말한다. 여기서 인격(人格)이란 심정(心情)을 中心하고 균형적으로 발달한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을 터로 한 인품(品格)을 말한다. 따라서 미래사회는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중심하고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 조화(調和)롭게 발달된 인간들로써 구성된 사회이기 때문에, 여기의 새로운 가치관의 가치란 본래의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에 대응(對應)하는 가치를 말한다.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은 각각 진(眞)-미(美)-선(善)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가치의 추구를 통하여 진실사회(眞實社會), 예술사회(藝術社會), 윤리사회(社會)가 실현되게 된다. 여기서 진실사회(眞實社會)는 眞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실현되는, 거짓이 없는 참의 사회(社會)를 말하며, 예술사회(藝術社會)는 美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실현되는 美의 사회를 말하며, 윤리사회(社會)는 선(善)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실현되는 선(善)의 사회를 말한다. 진실사회(眞實社會)를 실현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필요한 것이 교육론(敎育論)이요, 예술사회(藝術社會)를 실현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필요한 것이 예술론(藝術論)이며, 윤리사회(社會)를 실현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필요한 것이 윤리론(倫理論)이다. 그리고 가치론은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총합적으로 다루는 부문이므로 가치론은 이들 세 가지 이론의 총론(總論)이 되는 셈이다.

 

미래사회는 이와 같이 진(眞)-선(善)-미(美)의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경제는 고도의 성장을 이룩함으로써 경제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풍요한 사회가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주로 가치를 실현하면서 그 가치를 즐기는 생활이 되기에 이른다. 심정(心情)을 중심하고 진(眞)-선(善)-미(美)의 가치가 실현된 사회가 바로 심정문화(心情文化)의 사회요, 통일문화의 사회이다. 이상으로 미래사회(未來社會)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는 데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가치관은 미래사회에의 대비(對備)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오늘의 현실세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오늘의 현실세계는 여러 요인들로 인하여 가치관이 총체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데, 이것을 수습하기 위하여 건전한 가치관의 재정립(再定立)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관은 문화의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오늘의 세계의 혼란(混亂)을 궁극적으로 수습하기 위해서는 여러 전통문화의 통일이 또한 필요하다. 그런데 여러 문화는 각각 일정한 종교 또는 사상을 터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나 사상은 일정한 가치관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문화통일을 위해서는 여러 가치관의 통일, 예컨대 기독교(基督敎)가치관(價値觀), 불교가치관(佛敎價値觀), 유교가치관(儒敎價値觀) 등의 통일이 요구되며 또한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가치관의 통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여기에도 모든 가치관을 포섭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의 제시(提示)가 요구된다.

 

               一. 가치론(價値論) 및 가치의 뜻

 

새로운 가치관이란 통일원리(統一原理)에서 본, 가치에 대한 견해를 말하는데 새 가치관을 제시함에 앞서서 가치론과 가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1) 가치론(價値論)의 뜻

 

가치론(價値論)은 일반적(一般的)으로 경제학, 윤리학 등의 분야에서도 다뤄지지만, 철학에서는 주로 가치철학을 가리킨다. 즉 가치일반(價値一般)에 관한 이론을 다루는 철학부문이다. 가치론이 근대에 이르러 철학체계의 한 부문(部門)이 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비록 단편적이나마 古代에서도 발견되며(후술), 칸트가 사실문제와 가치문제를 구별하고 사실의 부문과 가치의 부문을 구분한 이후 가치론은 철학상의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특히 로체(Rudolph H. Lotze, 1817~1881)가 존재(存在)와 가치(價値)를 분리한 후 존재의 세계에 가치의 세계를 대치시키는 동시에, 존재의 세계는 지성(知性; Verstand)에 의해서 파악되지만 가치의 세계는 감정(感情)에 의해서 파악된다고 주장하면서, 철학(哲學)上에 가치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가치철학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2) 가치(價値)란 무엇인가

 

가치(價値)라는 말은 본래 경제적 생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주로 경제적 가치를 의미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이 말이 일반화(一般化)하여 사회, 정치, 법률, 도덕, 예술, 학문, 종교 등 인간생활의 거의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는 가치(價値)를 크게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로 구분한다. 물질적가치란 상품가치와 같이 생활자료의 가치를 뜻하며, 정신적 가치는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에 대응(對應)하는 진(眞)-미(美)-선(善)을 말한다. 본 가치론(價値論)에서는 그 중 정신적가치(精神的價値)만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치(價値)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定義)하기가 불가능1)하기 때문에 가치현상(價値現象)을 통하여 분석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본 가치론에서는 주체(主體, 主觀)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對象)의 성질을 가치라고 규정한다. 즉 어떤 대상이 있어서, 그것이 한 주체의 욕망이나 소원을 충족시켜 주는 성질을 가질 때, 그 주체(主體)가 인정하는 그 대상(對象)의 성질을 가치(價値)라고 한다. 즉 가치는 주체가 인정하는 대상가치(對象價値)이며, 주체에게 인정되지 않으면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예컨대 여기에 아름다운 꽃이 있다고 하자. 주체가 이 꽃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꽃의 가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가치(價値)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주체가 대상의 성질을 인정(認定)하면서 평가(評價)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3) 욕망(欲望)

 

가치란 이미 언급한 대로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의 성질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치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가치(價値, 物質的價値)를 포함)를 다루어 온 많은 사상가(思想家)들은 인간의 욕망의 문제를 배제하고 그 가치의 현상만을 객관적으로 취급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관은 뿌리없는 나무나 토대없는 건축물과 같이 취약성(脆弱性)을 면할 수가 없다. 뿌리없는 나무는 시들 수밖에 없고 토대없는 건축물은 곧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존(旣存)의 사상체계(思想體系)는 여러가지 사회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그 무력성(無力性)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물질적 가치를 취급하는 경제이론까지도 현재의 경제혼란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거의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노사관계가 기업 실적에 미치는 영향 등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왜 이러한 결과가 올까. 그것은 종래의 경제학자들이 인간의 욕망을 올바르게 분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경제활동의 동기가 욕망인 것을 알면서도 그 욕망을 분석하지 않음으로 해서 결국, 그들의 이론은 토대가 없는 건축물과 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나타난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욕망(欲望)의 분석에서부터 접근하고자 하지만, 이에 앞서 먼저 가치론의 통일원리적 근거를 다루고자 한다.

 

                  二. 가치론(價値論)의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

 

가치론의 통일원리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통일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성상(性相)-형상(形狀)의 통일체(統一體)이면서 목적과 욕망(欲望)을 갖고 있다. 욕망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창조본성(創造本性)(원리강론, 1987, p. 97)이다. 그리고 목적도 욕망도 각각 이중(二重)性을 띠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통일가치론이 성립하게 된다.

 

  (1) 성상(性相)-형상(形狀)과 二性목적

 

창조된 인간에게는 일정(一定)한 피조목적(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피조목적을 지닌 인간은 이성성상의 중화체(中和體)요 통일체(統一體)이다(즉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이중체요, 생심과 육심의 이중심적(二重心的) 존재(存在)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피조목적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인간의 성상(性相)에도 목적이 주어져 있고 형상(形狀)에도 목적이 주어져 있음을 뜻한다. 전자(前者)를 성상적목적(性相的目的)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형상적목적(形狀的目的)이라고 한다. 이 양자를 합해서 이중목적(二性목적)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성성상에 대응하는 목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가치론에 있어서, 성상은 바로 생심(生心)을 뜻하며 형상은 바로 육심(肉心)을 뜻하기 때문에 성상적목적이란 생심이 지닌 목적이며, 형상적목적이란 육심이 지닌 목적이다. 따라서 성상적목적이란 생심의 목적인 진(眞)-선(善)-미(美)-애(愛)의 생활을 영위(營爲)하는 것을 뜻하며, 형상적목적이란 육심의 목적인 의(衣)-식(食)-주(住)-성(性)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뜻한다.

 

  (2) 성상(性相)-형상(形狀)과 2성욕망(二性欲望)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성상-형상의 통일체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이중심적(二重心的) 존재(存在)이기 때문에 목적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욕망에도 성상적욕망(性相的欲望)과 형상적욕망(形狀的欲望)이 있게 된다. 이것을 이중욕망(二性欲望)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2성목적(二性目的)과 마찬가지로 이성성상에 대응하는 욕망이라는 뜻인 것이다. 성상적욕망이란, 생심(生心)의 욕망으로서 진(眞)-선(善)-미(美)-愛의 생활에 관한 욕망이요, 형상적욕망이란 육심(肉心)의 욕망으로서 의(衣)-식(食)-주(住)-성(性)의 생활에 관한 욕망이다.

 

  (3) 이중목적(二重目的)과 이중욕망(二重欲望)

 

원리(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또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라는 이중목적을 지닌 연체(聯體)이다(원리강론, 1987, p. 52). 이것은 성상(生心)도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라는 이중목적(二重目的)을 지니고 있고, 형상(육심(肉心))도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성상적목적(생심의 목적)에도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 있고, 형상적목적(육심의 목적)에도 전체목적 및 개체목적이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욕망이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려는 마음의 충동이다. 따라서 욕망에는 전체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과 개체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이 있게 된다. 전자(前者)를 가치실현욕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가치추구욕이라 한다. 이 양자를 합해서 이중가치욕(二重價値欲)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성상적욕망과 형상적욕망이 각각 이중목적(二重目的)을 실현하기 위한 이중욕망(二重欲望) 즉 가치실현욕과 가치추구욕의 이중욕망을 포함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성상적욕망에도 가치실현욕과 가치추구욕이 있으며, 형상적욕망에도 가치실현욕과 가치추구욕이 있다. 여기서 이중목적 및 이중욕망과 관련해서 이중가치에 대하여 살펴보자. 목적에 이중목적이 있고, 욕망에 이중욕망이 있는 것처럼 가치에도 이중가치가 있다. 그것이 실현가치(實現價値)와 추구가치(追求價値)이다. 가치실현욕에 의해서 실현코자 하는 가치(價値) 또는 실현된 가치가 실현가치요, 가치추구욕에 의해서 추구코자 하는 가치 또는 추구된 가치가 추구가치이다. 따라서 이중목적(二重目的)과 이중욕망(二重欲望)과 이중가치(二重價値)는 서로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다.

 

  (4) 욕망(欲望)의 유래와 창조목적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창조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창조목적이란 하나님에 있어서는 대상(인간과 만물)으로부터 기쁨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피조물의 입장에서 보면, 이 창조목적은 피조목적(被造目的)을 의미하게 된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께 미(美)를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創造)하신 목적 즉 인간의 피조목적은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繁盛)하여 만물을 주관하라는 3대축복(三大祝福)을 성취함으로써 달성된다. 따라서 인간의 창조목적(被造目的)이란 곧 3대축복(三大祝福)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목적만을 주고 욕망을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기껏해야 다만 창조목적(創造目的)이 있다거나, 3대축복(三大祝福)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실천의 당위성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충동적(衝動的)인 의욕(意欲) 즉 하고 싶다거나, 얻고 싶다는 마음의 충동성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충동성이 욕망이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창조목적(피조목적), 즉 삼대축복을 달성하고자 하는 내적인 충동을 느끼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터전이 심정이다. 인간은 이미 언급한 대로 전체(全體)목적과 개체(個體)목적이라는 이중목적을 지닌 연체(聯體)이다. 따라서 창조목적의 실현은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을 실현하게 된다. 인간의 전체목적이란 참사랑을 실현하는 것, 즉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 그리고 궁극적(究極的)으로는 인류의 부모인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것이며, 인류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체목적이란 개체가 그 자체의 성장과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도 모두 전체를 위하는 목적과 개체를 위하는 목적의 이중목적(二重目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창조목적의 이중성(二重性), 즉 피조목적의 이중성(二重性)이다. 만물과 인간은 창조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그 방법이 다르다. 무기물(無機物)은 법칙에 따라서, 식물은 자율성(自律性, 生命)에 따라서, 그리고 동물은 본능(本能)에 따라서 각자의 창조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욕망에 따라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고 자기 책임으로 창조목적을 달성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욕망이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이었다. 따라서 목적에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의 이중목적이 있는 것처럼, 이에 대응해서 욕망에도 가치실현욕과 가치추구욕의 이중욕망이 있다. 그리고 이 이중목적과 이중욕망에 대응하는 가치가 실현가치와 추구가치의 이중가치였다. 以上을 二性목적, 二性욕망(欲望), 二性價値와 관련지어서 서로의 관계를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4-1과 같이 된다.

 

 그림 4-1 이중욕망, 이중목적과 가치 

 

                  三. 가치(價値)의 종류(種類)

 

  (1) 성상적(性相的) 가치(價値)

 

가치란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의 성질이었다. 성상과 형상의 이중적(二重的) 존재(存在)인 인간의 욕망에는 성상적욕망과 형상적욕망이 있으므로 상술한 바와 같이 가치에도 성상적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상적(性相的)가치(價値)와 형상적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의 성질(가치), 즉 형상적가치(形狀的價値)가 있다(도표 4-1). 성상적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상적가치는 진(眞)-미(美)-선(善)과 사랑이다(사랑은 사실은 가치 그 자체라기보다는 진(眞)-미(美)-선(善)의 가치의 기반이다). 진(眞)-미(美)-선(善)이란 마음의 三기능(機能)인 지(知)-정(情)-의(意)에 대응하는 가치이다. 즉 주체가 대상이 가지는 가치적 요소를 평가할 때, 지(知)-정(情)-의(意)의 三기능(機能)에 따라 다르게 판단한 것이 각각 진(眞)-미(美)-선(善)이다.

 

  (2) 형상적(形狀的) 가치(價値)

 

한편, 형상적욕망을 충족시키는 가치는 의(衣)-식(食)-주(住)의 생활자료의 가치, 즉 물질적가치(상품가치)를 말한다. 물질적가치는 육신생활을 위한 가치이며, 육심(肉心)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가치이다. 육신생활은 영인체(靈人體)를 성장시키고 3대축복(三大祝福)을 완성시키기 위한 토대가 되기 때문에 형상적가치는 성상적가치의 실현에 있어서 필수조건이 된다.

 

여기서 사랑이 진(眞)-미(美)-선(善)의 가치의 기반이 된다는데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주체가 대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또 대상이 주체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주체에 있어서 그 대상은 한층 참되고 아름답고 선(善)하게 보인다. 예컨대 부모(主體)가 자식(對象)을 사랑할수록, 또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수록, 부모에 있어서 자식은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자식이 아름답게 보이면, 부모는 자식을 보다 더 사랑하고 싶게 된다. 진(眞)과 미(美)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을 사랑할수록 그 자식은 더 참되고 선하게 보인다. 즉 사랑을 터로 하고 진(眞)-선(善)-미(美)가 세워진다. 사랑 없이도 진(眞)-선(善)-미(美)가 느껴질 때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이때에도 실은 무의식중에 주체의 잠재의식(潛在意識) 속에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은 가치의 원천이며 기반이 된다. 사랑이 없으면 참된 가치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하고 사랑의 생활을 하게 되면 오늘날까지 경험한 것 보다 훨씬 더 빛나는 가치를 체험하거나 실현할 수가 있게 된다. 이상에서 가치에는 성상적가치와 형상적가치가 있음을 밝혔는데 本 가치론(價値論)에서는 주로 성상적가치만을 다루기로 한다.

 

                  四. 가치(價値)의 본질(本質)

 

  (1) 가치의 본질적 요소와 현실적가치

 

가치에는 대상(對象)이 지니고 있는 성질로서의 가치와,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결정되는 가치의 두 가지가 있다. 전자(前者)를 잠재적가치라 하고 후자(後者)를 현실적가치라고 한다. 위에서 주체(主體)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의 성질(性質)이 가치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잠재적(潛在的)가치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가치는 현실적으로 반드시 평가되는 것이며, 이 때의 평가(評價)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 평가(授受作用)에 의해서 결정되는 가치가 현실적가치이다. 그런데 잠재적가치, 즉 대상이 지닌 성질이란 가치의 본질적요소(本質的要素)로서, 대상이 지닌 내용, 속성(屬性), 조건(條件) 등을 말한다. 즉 미(美)나 선(善)이나 진(眞)의 가치는, 그 자체로서 대상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치가 될 수 있는 요소(본질적요소)로서 대상의 내부(內部)에 잠재(潛在)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상이 지니고 있는 잠재적 가치이다.

 

  (2) 잠재적(潛在的)가치(價値, 본질적요소(本質的要素)

 

그러면 가치의 본질 즉 대상의 본질적요소(내용, 속성, 조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것은 대상이 지닌 창조목적과 대상속에 있는 상대적요소 상호간의 조화이다. 모든 피조물에는 반드시 만들어진 목적, 즉 창조목적(創造目的, 被造目的)이 있다. 예컨대 꽃에는 美로써 인간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창조목적이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예술(藝術)작품이나 상품의 경우에도 반드시 제작된 목적이 있다.

 

그리고 상대적 요소(要素)의 조화(調和)란 주체적요소와 대상적요소의 조화를 말한다. 만물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기 때문에 원상을 닮아서 반드시 그 내부에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 주요소(主要素)와 종요소(從要素) 등의 주체적요소와 대상적요소의 상대적요소가 깃들어 있다. 이 상대적요소 사이에는 반드시 수수작용에 의한 조화가 나타난다. 이 때의 수수작용은 대비형(對比型)의 수수작용이다. 이리하여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상대적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가치의 본질이다.

 

                  五. 현실적가치(現實的價値)의 결정과 가치기준(價値基準)

 

  (1) 가치(價値)의 決定

 

가치는 주체인 인간과 대상인 만물과의 상대적 관계에서, 즉 수수작용에 의하여 결정 또는 평가되는 것으로서, 대상이 구비해야 할 조건, 즉 대상적조건(對象的條件)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목적 중심한 상대적요소 상호간의 조화이다. 한편, 주체(主體)에도 주체가 구비해야 할 조건 즉 주체적조건(主體的條件)이 있다. 먼저 주체가 가치추구욕(價値追求欲)과 대상에의 관심(關心)을 가지는 것이 가치결정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리고 가치결정을 좌우하는 요소는 주관(主觀)的 요인(要因)으로서 주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 취미, 개성, 교양, 인생관, 역사관, 세계관 등이 있다. 주체의 이 주관적요인과 가치추구욕 및 관심 등은 모두 주체가 지녀야 하는 주체적 조건들이다. 현실적가치는 이 주체적조건과 대상적조건과의 상대적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그림 4-2) p. 303

 

   

 

  (2) 주관작용(主觀作用)

 

상술한 바와 같이 가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주관적 요인들이 크게 작용한다. 즉 주체의 사상, 세계관, 취미, 개성, 교양 등의 주체적조건이 대상에 반영되어서(또는 대상적조건에 첨가되어서) 그 주체만이 느끼는 특유한 현실적가치(現實的價値)가 결정된다.

 

이와 같이 주체적조건과 대상적 조건이 성립할 때, 거기에 수수작용이 행해짐으로써 구체적인 가치가 결정된다. 구체적인 가치(價値)가 결정된다는 것은 가치의 실제의 양(量)과 질(質)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의 양(量)이란 꽃의 경우 매우 아름답다라든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와 같이 가치평가의 양적(量的)인 측면을 말한다. 또 가치에는 질적인 측면도 있다. 예컨대 예술론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후술(後述)) 美에는 우아미(優雅美)라든가 외경미(畏敬美), 장엄미(莊嚴美), 익살미 등 여러 가지 차이미(差異性)의 美가 있는데, 그것은 질적인 측면의 차이를 보이는 美(가치)이다.

 

그런데 같은 달(月)도 어떤 사람에게는 슬프게 보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또 같은 사람이 보아도 슬플 때 보면 달도 슬프게 보이고, 기분이 좋을 때 보면 달도 아름답게 보인다. 주체의 마음가짐에 따라 美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것은 미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선(善)이나 眞의 가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은 상품가치에 관해서도 말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주관(主觀)이 대상에 반영됨으로써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치의 차이가 생기는데 이러한 주체적조건의 작용을 주관작용(主觀作用)이라고 한다. 즉 주체의 주관이 대상에 반영되는 작용이 주관작용(主觀作用)이다.

 

이것은 미학(美學)에 있어서 맆스(T. Lips)의 감정(感情)의 이입(移入)(empathy, Einfuhling)에 해당한다 하겠다. 감정의 이입(移入)이란, 자연풍경을 볼 때나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자기의 감정이나 구상을 대상에 투사(投射)해서 그것을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주관작용의 예를 한 두 가지 더 들어보자. 먼저 문선생님의 말씀中에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예수님)이 당신에게 손수건을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손수건은 돈보다도 귀하고, 생명(生命)보다도 가치가 크다고 할 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귀한 가치를 지녔다고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신은 어떤 보잘 것 없는 곳에서 살고 있더라도 거기는 궁전(宮殿)이나 마찬가지로 느낄 것이다. 그때는 의복(衣服)이 문제가 아니며, 거처하는 집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왕자들이기 때문이다.2) p.305

 

이 말씀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각(自覺)을 가지면 오막살이 집도, 그대로가 궁전(宮殿)같이 휼륭하게 보인다는 뜻으로서 주관작용(主觀作用)의 적절한 예인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누가 17:21)는 성구(聖句, 성경구절)가 있는데 이 역시 주관작용(主觀作用)의 예이다. 또 불교에는 삼계유심소현(三界唯心所現)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三界, 즉 세계 전체의 모든 현상은 마음의 나타남이라는 뜻이다.3) 모두가 주관작용의 예인 것이다.

 

  (3) 가치(價値)의 기준

 

   1) 상대적(相對的) 기준

 

상술한 바와 같이 주관작용으로 인하여 가치결정(評價)의 결과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주체적조건에 공통성이 많을 때에는 가치평가에도 일치점(一致點)이 많아지고, 따라서 같은 종교나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의 가치평가의 결과는 거의 일치한다. 예컨대 유교의 덕목인 부모(父母)님께의 효도(孝道)는, 유교사회에서는 언제나 일치(一致)되게 평가되는 보편적인 선(善)이다.

 

이것은 종교나 사상을 같이 하는 사회에서는 가치관의 통일이 가능함을 뜻한다. 로마의 평화(平和, Pax-Romana)시대에는 스토아 철학이 일반화(一般化)되어 있었기 때문에, 극기적정신(克己的精神)과 세계시민주의(世界市民主義)는 그 당시의 지배적인, 통일된 가치관이었다. 또 중국의 당나라시대나 한반도의 통일신라시대 때에는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불교적인 덕목이 중심적인 가치관이었다. 또 기독교국가인 미합중국(美合衆國, USA)에 있어서는 오래도록 기독교(新敎)의 도덕관이 미국민의 통일된 가치관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의 배경을 가진 사회 사이에서는 가치관의 차이가 나타난다. 예컨대 힌두교에서는 쇠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나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또 공산주의가 말하는 평화관(平和觀)과 자유주의세계가 말하는 평화관(平和觀)은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즉 공통된 종교나 공통된 사상이 시행되고 있는 지역(地域)이나 사회에서의 가치관은 국민간에 대개 일치(一致)하지만 종교나 사상이 서로 다를 때에는, 가치관의 일치(一致)는 일정(一定)한 범위 내에 머물게 된다. 이와 같이 공통되는 가치평가의 기준이 일정한 범위에 국한될 때, 이러한 가치평가(價値評價)의 기준을 상대적 기준이라고 한다.

 

   2) 절대적(絶對的) 기준

 

가치의 상대적 기준으로 전인류의 가치관을 통일할 수는 없다. 가치관의 차이에 의한 대립이나 투쟁을 무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인류(全人類)의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차이, 문화적인 차이, 사상적인 차이, 민족적인 차이 등을 극복할 수 있는 평가기준(評價基準), 즉 전인류에 공통되는 가치평가(價値評價)의 기준이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가치평가의 기준이 절대적(絶對的) 기준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절대적 기준은 어떻게 해서 세워질 수 있을까.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종교, 모든 문화, 모든 사상, 모든 민족 등을 있게 한 근원자가 하나임을 밝히고 그 근원자로부터 유래된 여러 공통성들을 발견하면 된다. 존재론(存在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주 만물은 천태만상(千態萬象)이지만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질서정연하게 운행되고 있으며, 또 모든 만물은 공통적인 속성(屬性)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주 만물이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여러 종교, 문화, 사상, 민족은 각각 그 가치관이 다른 것이 보통이지만, 그것들을 발생시킨 근원자는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근원자로부터 유래하는 공통성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종교가 출현하였지만 각각의 교조(敎祖)들이 자기 마음대로 종교를 만든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최종적으로 구하기 위하여 일정한 시대와 일정한 지역에 일정한 교조를 세워서 우선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을 선(善)의 방향으로 인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 언어, 습관, 환경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시대 그 지역에 적합한 종교를 세워서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전개해 오셨음을 뜻한다.

 

따라서 각 종교의 공통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를 세운 근원자(根源者)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주만물의 근원자를 유대교에서는 야훼, 이슬람교에서는 알라, 힌두교에서는 브라만, 불교에서는 진여(眞如), 유교에서는 천(天)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모두 동일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들 각 종교가 근원자의 속성(屬性)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명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유교에서는 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밝히지 못하고 있으며, 불교에서의 진여(眞如)나 힌두교의 브라만도 그러하다. 또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유대교의 야웨, 이슬람교의 알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각 종교의 근원자가 왜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도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있으며, 비참한 인류를 왜 하루 속히 또 일시에 구할 수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와 같이 각 종교의 근원자는 베일에 감추어져 있어서 막연하게만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각 종교의 근원자에 관한 설명들은 그 근원자의 일면(一面)만을 파악한데 불과했기 때문에 각 종교를 세운 근원자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여지기까지 하였다.

 

이들 각 종교의 근원자(根源者)가 결국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 근원자가 어떠한 분인가를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의 속성(屬性), 창조목적(創造目的), 우주창조(宇宙創造)의 법칙(로고스) 등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각 종교는 동일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兄弟의 종교(宗敎)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겪어온 대립(對立)과 투쟁(鬪爭)의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문화, 사상, 민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문화, 사상, 민족을 발생시킨 근원자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 그 문화의 공통성, 사상의 공통성, 민족의 공통성 등도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가치평가(價値評價)의 절대적기준이 될 수 있는 공통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사랑(絶對사랑)과 하나님의 참진리(절대진리)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얻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기독교의 아가페, 불교의 자비(慈悲), 유교의 인(仁), 이슬람교의 자애(慈愛) 등으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모든 종교의 사랑은 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가정을 통하여 부모(父母)의 사랑, 부부(夫婦)의 사랑, 子女의 사랑이라는 삼대상(三對象)의 사랑으로서 나타난다(여기의 자녀의 사랑은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과, 자녀 상호간(형제자매간(兄弟姉妹間)의 사랑을 말한다.) 기독교의 이웃사랑의 실천, 불교의 자비(慈悲)의 실천, 유교의 仁의 실천, 이슬람교의 慈愛의 실천 등은 그 내용이 전부 이 삼대상(三對象)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영원성을 지닌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주의 운행을 지배하는 진리(眞理, 이법(理法))는 영원불변(永遠不變)한 것이다. 우주에 공통되는 보편적인 사실(事實)은 우주의 모든 존재자가 자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전체를 위해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선악(善惡)의 기준은 타인(他人, 인류)을 위해서 사는가, 자기중심적으로 사는가에 따라 좌우된다.4)

 

   3) 절대적(絶對的) 기준(基準)과 인간의 개성 p.309

 

이렇게 해서 가치결정의 절대기준이 세워진다. 즉 하나님의 참사랑과 참진리에 의해서 세계 만민의 가치판단(價値判斷; 決定)이 一致되게 된다. 그러면 그때 인간의 개성(個性)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가치결정이 일치화(一致化)된다고 해서 인간의 개성이 무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치판단은 개인의 주관적(主觀的)인 요소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개성에 따라서 가치평가에 반드시 차이(差異)가 생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기준하에서 가치결정이 일치화(一致化)된다면 개인(個人)의 개성(個性)은 무시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에서 가치판단이 일치화(一致化)한다 할지라도 개성은 무시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편상(공통성)과 개별상(특수성)을 닮고 있으며, 또 연체(聯體)이기 때문에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가치평가의 절대적 기준은 보편상(성상, 생심, 심정, 로고스)과 전체목적에 근거한 평가기준이요, 주관작용은 개별상 및 개체목적에 기인한다.

 

따라서 아무리 절대적 기준에 의해 절대적가치가 결정된다 할지라도 주관작용에 의한 개인차는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절대가치란 개인차를 포함한 보편가치이다. 그것은 마치 개성진리체가 개별상을 포함한 보편상을 지닌 개체인 것과 같다. 따라서 전체목적을 우선시키면서 개체목적을 추구하고, 보편상을 지니면서 개성(개별상)을 나타내는 것이 인간이다. 절대적 기준에 있어서 가치평가를 함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인간의 개성에 따른 주관작용(主觀作用)을 피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공통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차이성(差異性)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차이성(差異性)에 의한 가치관의 혼란(混亂)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때의 차이(差異)는 질적(質的)차이가 아니라 양적(量的)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善)의 판단의 경우 가난한 사람(貧者)을 돕는다는 것은 종교나 사상여하(思想如何)를 막론하고 선(善)으로 판단된다. 그것을 악(惡)으로 판단(질적판단)하는 사람은 이상세계(理想世界)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판단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선(善)이 크게 선(善)하다 중간쯤 선(善)하다 보통으로 선(善)하다 등과 같이 양적(量的)인 평가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美나 참(眞)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치판단의 절대적 기준이란 요컨대 질적판단(質的判斷)의 일치(一致)를 말하는 것이다(그런데 타락사회는 이기주의(利己主義) 사회(社會)이기 때문에 질적 차이마저 생기게 되어서 그 결과 가치관에 혼란이 일어나기 일쑤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및 가치관의 통일이 가능하게 된다. 즉 가치관의 개별성을 살리면서 가치평가의 기준을 절대진리(絶對眞理), 절대애(絶對愛)를 중심하고 일치화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관이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절대적 진리를 기반으로 한 가치관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가치관의 가치가 바로 절대적 가치이다.5) 이러한 절대가치로 모든 가치관을 조화(和合), 조화(調和)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가치관의 통일이다. 이러한 가치관의 통일에는 하나님의 속성, 창조목적, 심정, 사랑, 로고스 등에 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종교(宗敎)통일, 사상(思想)통일도 가치관의 통일로써 가능하다.

 

            六. 종래의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가치관(價値觀)의 붕괴의 원인의 하나는, 종래의 가치관-주로 종교적 가치관-이 설득력을 상실(喪失)한 데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종래의 가치관이 설득력을 잃어버렸는가, 여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기독교(基督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기독교에는 다음과 같은 성구(聖句)를 통하여 훌륭한 덕목(德目)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 22:39),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4),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산상수훈, 마태 5장).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慈悲)와 선량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 5:22~23).

 

그런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라고 되어있는 바와 같이 덕목(德目)의 기초가 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하나님은 사랑이다.(요한 4:7~8)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근대(近代)에 이르러 니체, 포이엘바하, 마르크스, 러셀, 사르트르 등에 의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否定)되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러한 사상에 대해서 기독교는 효과적으로 대처(對處)할 수 없었다. 즉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의 이론적 대결에 있어서 기독교는 패배(敗北)만을 거듭해 왔다. 그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무신론의 포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또 기독교 가치관(價値觀)에 대한 공산주의의 의도적인 도전이 있었다. 공산주의는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적 사랑이나 인류애(人類愛)를 부정하고, 진정한 사랑은 계급애(階級愛) 또는 동지애(同志愛)라고 주장한다. 이해가 대립하고 있는 사회속에서 계급을 넘은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프롤레타리아트 측에 서거나 부르주아 측에 서거나 양자택일(擇一)을 해야 한다. 따라서 인류애를 부르짖는 것은 말뿐이며, 실제로는 인류애(人類愛)를 실천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계급사회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을 얼른 들으면 확실히 계급애가 현실적이고, 기독교의 사랑은 관념적(觀念的)인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종래와 같은 기독교의 신관(神觀, 사랑觀)에 설득력이 있을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최근에 이르러 제3세계(第三世界)에 해방신학(解放神學)과 종속이론(從屬이론)이 대두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해방신학에 의하면, 예수는 그 시대의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고, 혁명가였다는 것이며, 따라서 참다운 기독교인은 사회혁명을 위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인의 가난한 사람에의 동정은 공산주의의 계급애(階級愛)와 부합하는 것이니, 현실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공산주의와 제휴(提携)할 필요조차 있다고 하는 주장까지 있었다.6)

 

종속이론(從屬理論)도 제3세계(第三世界)의 빈곤은 선진제국(先進諸國)과 제3세계(第三世界)와의 구조적 모순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제3세계(第三世界)가 빈곤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제3세계(第三世界)는 선진제국(先進諸國) 즉 자본주의 제국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해방신학과 마찬가지로 종속이론도 공산주의와의 제휴를 도모했다.7) 해방신학(解放神學)이나 종속이론(從屬理論)은 공산주의와 같은 확고한 철학, 역사관, 경제이론이 없으므로 결국은 공산주의에 휩쓸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를 강구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2) 유교(儒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유교에는 다음과 같은 덕목(德目)이 있다.

 

① 오륜(五倫)……… 고래(古來)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 인륜(人倫)의 기초가 되었으며 맹자(孟子)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

 

② 4덕(四德)……… 맹자는 仁義禮智의 四德을 강조했다. 후에 한(漢)의 동중서(董仲舒)는 여기에 信을 더하여 仁義禮智信이라는 오상(五常)의 道를 세웠다.

 

③ 사단(四端)………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히 여겨서 언짢아 하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사양할 줄 아는 마음), 是非之心;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을 4단(四端)이라 하여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기본으로 삼았다.

 

④ 8조목(八條目)……… 격물(格物)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8)

 

⑤ 충효(忠孝)

 

그런데 유교(공자)의 덕목(德目)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인(仁)이며, 仁의 기초는 天이었다.9) 그런데 유교에 있어서 天이란 무엇인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p.314

 

공산주의자들은 토대(土臺)와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유교의 가르침은 봉건시대에 있어서 지배계급이 일반대중을 순순히 복종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계급지배(階級支配)의 합리화(合理化)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오늘날의 권리(權利) 평등(平等)과 다수결원칙을 취지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유교를 비판하였다. 그 결과, 유교의 덕목(德目)들은 오늘날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였으며, 더구나 사회가 도시화되고 가정이 핵가족화 함으로써 유교적가치관은 더욱 붕괴해 가게 되었고, 그 결과 사회의 무질서(無秩序)와 혼란은 가중(加重)되어 갔던 것이다.

 

  (3) 佛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불교의 근본적인 덕목(德目)은 자비이지만,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수행(修行)생활이 필요하다고 한다. 인간은 수행생활을 통하여 성문(聲聞; 부처의 설법을 듣고 4제(四諦)의 이치를 깨달아 스스로 阿羅漢의 제자가 되기를 이상으로 하는 佛道修行者), 연각(緣覺;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깨달아 자유경에 도달한 성자)을 통과하고, 보살(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으로서 위로는 부처를 따르고 아래로는 일체의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의 버금되는 성인), 佛陀(스스로 불교의 大道를 깨달은 성인)에 이르게 되며, 자비는 보살, 불타의 단계에서 이를 실천하게 된다.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과정에서는 아직 자비를 실천하는 단계가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는 것, 즉 무상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현실생활에 집착하고 있다. 이것이 苦의 원인이다. 따라서, 고(苦)를 없애기 위해서는 수행(修行)생활을 통하여 집착(執着)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집착에서 떠나고, 고(苦)에서 해방되는 것이 곧 해탈(解脫)이다. 이처럼 해탈하여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가야 비로소 참된 자비(慈悲)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의 사상을 체계화한 것이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다. 사제(四諦)란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말한다. 고제(苦諦)란 현세에서의 삶은 모두 고통이다라는 가르침이다. 집제(集諦)는 고(苦)의 원인은 끝없는 집애(執愛, 渴愛)에 있다라는 가르침이다. 멸제(滅諦)는 열반의 경지를 이상으로 한다는 내용으로서 苦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도제(道諦)는 열반에 이르는 데는 올바른 수행(修行)의 길이 있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그 길이 팔정도(八正道)인 바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의 항목(要目)이 있다. 사성제

 

① 정견(正見)... 모든 편견을 버리고 만물의 진상을 바르게 판단하라

 

②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라

 

③ 정업(正業)... 살생이나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④ 정명(正命)... 正法에 따른 바른 생활을 하라

 

⑤ 정념(正念)... 잡념을 떠나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언제나 잊지 말라

 

⑥ 정정(正定)... 번뇌로 인한 어지러운 생각을 털어버리고 바르게 정신을 집중시켜 마음을 안정시켜라

 

⑦ 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하라

 

⑧ 정정진(正精進)... 一心으로 노력하여 아직 발생하지 아니한 악을 낳지 못하게 하고 선(善)을 발생하게 하라.

 

그리고 인간에게서 괴로움이 생긴 원인을 추구하고, 12事項의 계열(系列)을 세운 것이 12인연(因緣; 12緣起)의 가르침이다. 그것에 의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괴로움의 근본원인은 갈애(渴愛)로서 그 안쪽에 무명(無明)이 있다고 한다. 무명(無明)이란 진여(眞如)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데, 고통이나 번뇌는 본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서, 이 無明에서 일체의 번뇌가 생긴다는 것이다.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보살이 되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여섯 가지의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다음과 같은 육바라밀(六波羅密)(六波羅密多)이다.

 

① 보시(布施)……… 자비심으로 남에게 조건없이 베풀어 주는 것

 

② 지계(持戒)……… 계율을 잘 지키는 것

 

③ 인욕(忍辱)……… 고통을 참는 것

 

④ 정진(精進)……… 불도(佛道)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

 

⑤ 선정(禪定)……… 정신통일을 하는 것

 

⑥ 지혜(智慧)……… 옳고 그른 것, 선악(善惡)과 시비를 판단하는 것

 

이상의 팔정도(八正道)나 육바라밀(六波羅密) 등의 덕목의 근본이 되는 것은 자비(慈悲)이다. 그리고 자비의 기초가 되는 것이 우주의 본체로서의 진여(眞如)이다.10)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불교의 가치관도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불교 가치관의 설득력이 약화(弱化)된 원인은 불교의 교리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주(宇宙)의 본체라고 하는 진여(眞如)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이 분명치 않다는 것, 제법(諸法, 宇宙萬象)이 어떻게 생성(生成; 연기(緣起))되었는가 하는 것이 분명치 않다는 것, 무명(無明)은 왜 생겼는가에 대한 근본적 해명이 없다는 것, 현실문제(人生문제(問題), 사회(社會)문제(問題), 역사문제(問題))의 근본적 해결이 수도(修道)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수도생활이 현실문제의 해결과 연결되어 있지않다는 것 등이다.

 

그 외에 공산주의에 의한 도전이 또한 있어 왔다. 공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공격(攻擊)하곤 했다. 현실사회에는 착취, 억압, 빈부의 격차 등 사회악이 충만해 있는데 그 원인은 無明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사회의 체제적(體制的) 모순(矛盾)에 있다. 불교의 수행은 개인의 구제(救濟)를 위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요, 문제해결의 회피인 것이다. 현실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이와 같이 공격(攻擊)해 올 때 불교(佛敎)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유효(有效)한 반론(反論)을 제시하지 못했다.

 

  (4) 이슬람교(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豫言者) 중에서 마호멧이 가장 위대하며, 경전 중에서 코란이 가장 완전하다고 믿고 있으며,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을 마호멧과 같은 예언자로 믿고 있다. 그리고 코란 이외에 모세5경, 다윗의 시편(詩篇), 예수의 복음서(福音書)도 경전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교의 덕목에는 유대교나 기독교의 덕목과 공통되는 점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11) 이슬람교에는 6신(六信)과 5행(五行)이라는 믿음과 실천의 가르침이 있다.

 

육신(六信)이란 신(神), 천사(天使), 경전(經典), 예언자(豫言者), 말세(末世), 천명(天命)에 대한 믿음을 말하며, 오행(五行)이란 신앙고백, 예배, 금식, 희사(喜捨), 순례를 말한다. 신앙의 대상은 알라신(神)이며, 알라는 절대유일하며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지배자이다. 알라는 어떠한 신(神)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이슬람교의 신학자들은 99가지의 속성을 들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속성(屬性)으로서 깊은 자비(慈悲), 넓은 자애(慈愛)를 들고 있다.12) 따라서 이슬람교의 덕목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자비(慈悲) 또는 慈愛라고 말한다. p. 318

 

이와 같이 이슬람교의 가치관에는 본래, 타종교의 가치관과의 공통성, 조화성(調和性)을 지니고 있으나 현실에 있어서는 오늘날까지 이슬람교 내부에서의 교파간의 싸움, 타종교와의 전쟁 등 심각한 대립을 많이 보여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대립에 편승(便乘)하면서 공산주의가 침투하곤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인류애(人類愛)는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다. 이슬람 교파간의 싸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계급사회에 있어서는 계급애(階級愛)가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이슬람교와 타종교와의 대립을 이용하면서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一部)를 친공(親共) 또는 용공(容共)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내적으로 교파간에 대립을 보일 뿐 아니라 외적으로 他宗敎(예컨대 유대교, 기독교)와도 오래 전부터 심각한 대립관계에 있어 왔던 것이다. 같은 종교 내의 교파끼리, 그리고 다함께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는 타종교(他宗敎)와 이같은 심각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일반인(一般人)에게 대해서 이슬람교의가치관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5) 인도주의(人道主義)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인도주의(人道主義)(humanitarianism)는 휴머니즘(humanism,人本主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인도주의(人道主義)와 휴머니즘은 구별된다. 휴머니즘이 인간의 해방을 목표로 삼고 인격(人格)의 자주성(自主性)을 추구해 온 사조(思潮)인데 비하여, 인도주의는 윤리적인 색채가 강하며, 인격의 존중(尊重), 박애주의(博愛主義),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등을 주장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른 인간다움이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연한 사고방식이 인도주의이다. 그러나 인도주의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본문제가 명확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인도주의(人道主義)는 공산주의의 공격에 대해서 약점을 노출시켜 왔던 것이다. 예컨대 인도주의적인 어느 경제인이 있다고 하자. 공산주의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인간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공산주의자가 와서 그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공부하고 있는가. 자기의 출세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국 부르주아를 위하여 봉사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우리들은 人民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비판할 때 양심(良心)的인 청년(靑年)들은 반론하기 어려울 것이며,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더라도 마음 속으로는 공산주의 이론에 일리(一理)가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주의(人道主義)的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의 공격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다. 이리하여 과거 적지 않은 인도주의(人道主義)者들이 공산주의로 넘어가기도 했다(공산주의가 무너진 오늘날에 와서 물론 그들은 공산주의가 결국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지만).

 

이상으로 종래의 여러 가치관들이 오늘날에 와서 그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가치관을 회복(回復)하는 길은, 확고(確固)한 신관(神觀)의 터 위에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定立)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七.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定立)

 

새로운 가치관이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절대적인 가치관을 의미한다. 가치관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나, 상대적 가치관을 가지고서 그 붕괴현상을 방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즉 절대적 가치관이 아니면 안 된다. 절대적 가치관은 절대자인 하나님이 어떤 속성(屬性)을 갖고 있으며, 또 어떤 목적(創造目的)과 법칙(法則, 로고스)를 가지고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을 명백히 밝힌 기반 위에서만 세워지는 가치관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자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또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 인간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절대적가치(絶對的價値)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절대적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세워진 진(眞)-선(善)-미(美)의 가치, 즉 절대적인 진(眞), 절대적 선(善), 절대적 美를 말한다. 새로운 가치관이란, 이와 같이 절대적인 사랑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한다는 견해(見解)이다.

 

그런데 가치관의 통일이란 가치(특히 善의 가치)의 판단기준(判斷基準)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의 덕목(德目)이 절대적가치의 여러 표현형태(表現形態)라는 것, 따라서 모든 덕목은 절대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가치관(價値觀)은 종래의 기독교, 유교, 불교, 이슬람교 등의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하고 새롭게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종래의 가치관의 기반이 붕괴되었으므로, 다시는 붕괴되지 않는 확고한 것으로, 그리고 과거의 여러 가치관들을 다시 소생(蘇生)시킬 수 있는 것으로서 세워진 것이 새로운 가치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가치관이 그 절대성(絶對性)을 보증받기 위해서는 同가치관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神學的), 철학적(哲學的), 역사적(歷史的)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1) 신학적(神學的)근거(根據)의 제시

 

신학적(神學的)근거(根據)의 문제는 우주의 절대자, 즉 기독교의 하나님, 유교의 천(天), 불교의 진여(眞如), 이슬람교의 알라 등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상호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가 풀리기 위해서는 절대자인 하나님이, 왜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하는, 종래의 종교에서 밝히지 못했던 미해결의 문제가 먼저 해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상론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은 바로 심정(心情)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심정이란 사랑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이었다. 그 충동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우주를 만드신 것이다. 즉 하나님을 `심정의 하나님'으로 규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우주창조에 대한 필연적인 이유가 합리적(合理的)으로 설명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서 완성하기를 원하셨으며,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기쁨은 최고에 이르게 된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3대축복(三大祝福)을 내려주신 것이다. 즉 인간이 인격을 완성하고, 가정을 완성하고, 주관성을 완성하게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인간이 3대축복(三大祝福)을 완성함으로써 성취되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종교의 덕목(德目)은 삼대축복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실현하는 데에 그 덕목의 취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2) 철학적(哲學的)근거(根據)의 제시

 

다음은 철학적근거의 제시에 관해서 살펴보자. 기독교나 유교, 불교, 이슬람교의 가치관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기원후 7세기에 걸쳐 나타났다. 당시는 군주의 명령을 백성들이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였다. 살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이론적 비판력이라곤 태무(殆無)했기 때문에 권위(權威)앞에 무조건적인 순종은 당연지사(當然之事)였다. 따라서 석가, 예수, 마호멧 등 권위있는 분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백성들은 무조건 따르는 사회였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가치관을 현대의 합리적(合理的), 논리적(論理的)인 사고방식(思考方式)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의 지성인(知性人)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 방식을 통하여 그들의 가치관을 현대인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인(現代人)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이란 어떠한 것일까? 그것도 자연과학적 방법이다. 아무리 윤리적(倫理的) 덕목(德目)이라 하더라도 그 덕목(德目)이 과학적인 법칙의 뒷받침을 받게 된다면 그러한 덕목은 현대의 지성인(知性人)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자연을 연구하여 거기에서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발견하다는 것은, 古代 그리스에서나 동양에서 흔히 행해져 온 방법이었다. 예컨대 주자(朱子)는 자연법칙이 그대로 인간사회에 있어서 윤리법칙이 된다고 함으로써 자연법칙과 윤리법칙의 대응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연법칙을 잘못 인식하기는 했지만, 역시 주자(朱子)와 같이 자연법칙과 사회법칙(사회생활의 규범)의 동일성(同一性)을 고집하면서, 사회도 자연변증법에 의해서 발전해 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데 있어서도 자연이나 우주의 관찰을 통하여 거기에 작용하고 있는 근본적인 법칙을 발견한 후 거기에서 가치관(價値觀)을 도출(導出)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으며, 뿐만 아니라 우주를 꿰뚫고 있는 일관(一貫)된 법칙, 즉 천도(天道)가 인륜(人倫)의 도덕(道德)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이것이 곧 철학적근거의 제시이다.

 

여기서 자연법칙과 윤리법칙은 과연 대응(對應)하는가, 즉 자연법칙을 그대로 윤리법칙에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통일사상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양 측면을 통일적으로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성상면의 법칙인 윤리법칙과 형상면의 법칙인 자연법칙에는 대응관계(對應關係)가 있다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도출(導出)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을 어떻게 올바르게 인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미 존재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主義)의 변증법은 대립물의 투쟁에 의하여 자연이 발전한다고 봄으로써 자연을 잘못 파악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에 대한 잘못된 파악(把握)의 터 위에 세워진 투쟁(鬪爭)하는 인간상(像)은 그릇된 인간상이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우주(宇宙, 자연)에 작용하고 있는 근본법칙은 변증법(辨證法)이 아니고 수수법(授受法)(수수작용의 법칙)이다. 그리고 존재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수법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즉 상대성(相對性), 목적성(目的性)과 중심성(中心性), 조화성(調和性), 질서성(秩序性)과 위치성(位置性), 개별성(個別性)과 관계성(關係性),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과 발전성(發展性), 원환운동성(圓環運動性) 등이다. 여기에서 우주의 법칙에 따라 새로운 가치관(統一價値觀)을 논하고자 한다.

 

우주(宇宙)에는 종적(縱的)인 질서와 횡적(橫的)인 질서가 있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태양계는 은하계의 중심핵을 중심으로 돌고, 은하계는 우주의 중심을 중심하고 돌고 있다. 이것이 우주에 있어서의 종적인 질서이다. 한편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수성(水星), 금성(金星), 지구(地球), 화성(火星), 수성(水星), 토성(土星), 천왕성(天王星), 해왕성(海王星), 명왕성(冥王星)이 일정한 궤도(軌道)를 그리며 돌고 있다. 이것이 우주에서의 횡적인 질서체계의 하나이다. 이것들은 모두 조화(調和)로운 질서체계이며 모순(矛盾)이나 투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우주의 질서체계를 축소한 것이 가정질서이다. 따라서 가정에도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성립된다.

 

가정의 종적질서에서 종적가치관이 성립된다. 가정에 있어서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慈愛)를 베풀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한다. 이것이 가정에서의 종적(縱的)가치관(價値觀)이다. 이것을 사회, 국가에 적용하면 여러 가지의 종적 가치가 도출된다. 군주의 국민 또는 신하에 대한 긍휼(矜恤)이나 선정(善政), 국민 또는 신하의 군주에 대한 충성(忠誠),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도(師道), 제자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복종, 연장자(年長者)와 연소자(年少者)에 대한 애호(愛護), 연소자(年少者)의 연장자(年長者)에 대한 존경(尊敬), 상관(上官)의 부하(部下)에 대한 권위와 명령, 부하의 상관에 대한 복종 등이 그것이다.

 

가정의 횡적질서에서 횡적(橫的)가치관(價値觀)이 성립된다. 가정에는 부부간(夫婦間)에 화애(和愛), 형제자매간에는 우애(友愛)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동료, 이웃, 동포, 사회, 인류 등에 대한 가치관으로 확대하고 전개된다. 그리하여 화해, 관용, 의리, 신의, 예의, 겸양(謙讓), 연민(憐憫), 협조, 봉사, 동정 등의 덕목이 횡적가치로서 성립(成立)하게 된다.

 

이와 같은 종적(縱的) 및 횡적(橫的)인 가치가 잘 지켜지면 사회는 평화를 유지(維持)하고 건전하게 발전하나, 그렇지 못할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가치관은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봉건사회의 유물이나 잔재가 결코 아니며 인간이 영원히 지키지 않으면 안될 보편적인 인간 행위의 규범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법칙이 영원하듯이 인간사회의 법칙도 이 우주의 법칙에 대응(對應)해서 영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의 법칙에는 개별성의 법칙이 있는데 이에 대응한 것이 개인적 가치관이다. 우주의 모든 개체는 각자의 특성을 지니면서 우주의 질서에 참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에 있어서도 각 개인은 고유한 인격을 형성하면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개인적 가치관에는 순수(純粹), 정직(正直), 정의(正義), 절제(節制), 용기(勇氣), 지혜(智慧), 극기(克己), 인내(忍耐), 자립(自立), 자조(自助), 자주(自主), 공정(公正), 권면(勤勉), 청결(淸潔)등이 있다. 이것들은 전부 개인으로서 자기를 수양하기 위한 덕목(德目)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적가치관(縱的價値觀), 횡적가치관(橫的價値觀), 개인적 가치관이 덕목으로서는 특별히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공자, 석가, 예수, 마호멧 등이 이미 가르쳤던 내용들이다. 단지 종래의 가치관은 철학적 근거가 막연함으로 인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그 설득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확고한 철학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전통적인 가치관까지도 소생될 수 있게 된다.

 

  (3) 역사적(歷史的)근거(根據)의 제시

 

다음은 역사적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가치관은 역사적(歷史的)으로도 실증될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자연현상이 투쟁에 의해 발전하듯이 인류(人類)역사도 역시 투쟁(계급투쟁)에 의해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역사는 투쟁에 의해서 발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역사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주체와 대상(지도자와 대중)의 조화적인 수수작용에 의해 이루어져온 것이다.

 

역사상에 투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계급투쟁은 아니었다. 보다 선(善)한 세력과 보다 악(惡)한 세력과의 싸움이었다. 가치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가치관과 가치관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천도(天道)에 보다 가까운 편의 가치관(선(善)편)과, 천도(天道)에서 보다 먼 편의 가치관(악(惡)편)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일시적(一時的)으로는 선(善)편이 악(惡)편에 패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결국은 천도(天道)에 가까운 선(善)편이 승리해 왔다. 맹자(孟子)도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선악의 투쟁은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역사를 보다 선의 방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제8장 歷史論을 참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의 여러 주권들이 흥망(興亡)을 반복해온데 비하여 선(善)을 표방했던 종교는 계속하여 오늘날까지 존속(存續)해 왔다. 또 성인(聖人)이나 의인(義人)들이 비록 악(惡)의 세력들에 의하여 희생되는 수가 많았지만 그 대신 그 성인(聖人)이나 의인(義人)들의 가르침과 업적은 후세 사람들의 삶에 교훈(敎訓)과 귀감(龜鑑)이 되곤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천도가 그대로 살아서 역사에 작용해왔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역사는 어떤 주권자라도 이 천도(天道)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과 만일 천도(天道)를 거역하게 되면 그 거역한 자가 비운(悲運)에 쓰러지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역사의 법칙은 역사의 출발점에서 이미 목표가 세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우주(宇宙)는 목적(創造目的)을 중심하고 이법(理法, 로고스)에 따라 창조되었다. 생물의 성장을 보아도 종자(種子, 또는 알)속에 이미 이법(理法)이 내재(內在)해 있고, 그 이법(理法)에 따라 종자는 성장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역사,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도 역시 출발점에 일정한 이념이 있었고, 그것을 목표로 하여 역사는 발전해 온 것이다. 즉 역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역사의 출발점에 이미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신화(神話)나 설화(說話) 등에 상징적으로 표시된 인류나 민족의 이상(理想), 건국(建國)의 이상(理想)이었다.

상징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류역사는 죄악사(罪惡史)로서 출발했으나, 하나님은 복귀해야 할 창조이상의 세계상을 상징(象徵)과 비유(比喩)가 섞인 일종(一種)의 신화형식으로 인간에게 알리곤 하셨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의 사건의 내용이나, 이사야서나 계시록 내의 예언적(豫言的) 기사, 그리고 한민족(韓民族)의 경우의 단군신화(檀君神話) 등이 그 예이다. 대개 오늘날까지의 인류의 이상(理想), 민족의 이상(理想)이란 선(善)하고 밝고 평화로운 세계, 행복한 세계의 실현이었다. 그것이 바로 천도(天道)에 맞는 세계의 구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의 출발점에 이미 역사의 목표(目標, 天道 세계의 실현)가 세워져 있음을 하나님은 신화(神話)나 예언(豫言)의 형식으로 가르쳐 주곤 하셨다. 따라서 역사가 목표로 삼고 있는 미래의 세계는 천도에 부합된 세계이며 가치관이 확립된 세계이다. 이상으로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근거의 제시를 마친다.

 

            八. 가치관의 역사적(歷史的) 변천(變遷)

 

종래의 서양 가치관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자. 이것은 절대적가치를 탐구(探究)하던 그리스철학과 기독교가치관이 상대적인 가치관에 압도(壓倒)되어 결국은 무력화되어 버린 역사적인 과정을 파악(把握)하기 위해서이며, 새로운 가치관(절대적 가치관)에 의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세계적인 혼란을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1) 그리스시대의 가치관

 

   1) 유물론적(唯物論的) 가치관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식민지(植民地)였던 이오니아지방에 유물론적(唯物論的)인 자연철학이 출현(出現)했다. 그 당시 그리스는 씨족사회로서 신화를 중심한 시대였으나,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와 인생을 자연법칙을 통하여 설명하고자 했다.

 

이오니아지방에는 밀레토스라는 도시가 있었으며, 그곳은 무역이 왕성하여 상인들은 지중해의 전역에 걸쳐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적이고 행동적이었다.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신화적(神話的)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무역도시 밀레토스에 기원전 6세기(世紀)경부터 유물론적(唯物論的)인 철학자들이 출현(出現)하였다. 이들을 밀레토스학파(學派)라 하며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이 그 대표자였다. 이들은 주로 만물의 근원(根源; arche)에 대해서 물음을 던졌던 것이다.

 

만물(萬物, 자연)의 근원(根源)에 관하여 탈레스(Thales, 624~546 B. C.)는 그것을 물(水)이라고 설명하였고,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611~547 B. C.)는 무한자(無限者, apeiron),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5~528 B. C.)는 공기(空氣)라고 하였으며, 그 외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5~475 B. C.)는 불(火)이라고 하였고,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460~370 B. C.)는 원자(原子)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연철학(유물론)과 더불어 객관적(客觀的), 합리적(合理的)인 사고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2) 자의적가치관(恣意的價値觀, 궤변적가치관(詭辯的價値觀)

 

기원전(紀元前) 5세기경, 그리스에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여 민주정치가 발달하였다. 청년들은 입신출세(立身出世)을 위하여 지식을 배우려 하였고, 그 때문에 특히 변론술(辯論術)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변론술을 가르쳐서 일정한 보수를 받는 학자들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소피스트라고 불렀다.

 

그때까지 그리스철학은 자연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으나, 자연철학만으로는 인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인간사회의 여러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법칙은 객관성(客觀性)을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인간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법(法)이나 도덕(道德)은 나라에 따라 다르고, 또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법(法)이나 도덕에는 어떤 객관성(客觀性)이나 보편성(보편성(普遍性))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사회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사람들은 주로 상대주의(相對主義) 혹은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예컨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1~411 B. C.)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尺度)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진리의 기준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며, 따라서 이것은,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상대주의를 표시하는 말이다.

 

소피스트들의 활동은 처음에는 민중(民衆)을 각성시키는 일종의 계몽적(啓蒙的)인 효과를 주었다. 그러나 점차로 회의론(懷疑論)의 입장을 취해가면서 진리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변론(辯論)의 방법만을 중시하고, 궤변을 해서라도 논쟁에 이기려고만 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궤변가(詭辯家)라고도 불려지게 되었다.

 

   3) 절대적(絶對的) 가치관

 

    ① 소크라테스

이러한 상황하에 소크라테스(Socrates, 470~339 B. C.)가 나타나서 이같은 현상을 크게 개탄하였다. 그는 소피스트는 아는 척하나 실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인간은 먼저 자기가 무지(無知)하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지적하면서 인간은 먼저 자신이 무지함을 아는 것이 참다운 知에 이르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도덕의 근거는 인간의 내면에 내재(內在)하는 신(神)(다이모니온)에서 구했으며 따라서 도덕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덕(德)이란, 진실하게 살기 위한 知의 애구(愛求)를 의미하며 德이 知이다라는 것이 그의 핵심사상이었다. 또 그는 덕(德)을 안다면 반드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참다운 지(知)를 얻을 수 있을까. 참다운 知는 타인(他人)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며, 또 자기자신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다. 타인과의 대화(문답)를 통해서만 자기와 타인이 함께 납득할 수 있는 보편적진리(普遍的眞理, 참다운 知)에 도달할 수 있다고 스크라테스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덕(德)을 확립함으로써 아테네를 사회적 혼란에서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② 플라톤

플라톤(Platon, 427~347 B. C.)은 변화(變化)하는 현상계(現象界, 感覺界)의 배후에 변치 않는 본질의 세계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이데아계(叡知界)라고 불렀다. 그런데 인간은 혼(魂)이 육체에 갇혀 있기 때문에 보통 감각계(感覺界)를 참된 실재(實在)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본래 인간의 혼이 육체에 깃들기 전에는 이데아界에 있었으나 육체에 깃들게 되면서 이데아界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의 혼(魂)은 항상 참된 실재인 이데아界를 동경(憧憬)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의 인식(認識)이란 흔히 이전에 알고 있던 것을 상기(想起)하는 일에 불과(不過)하다. 윤리적(倫理的)인 이데아에는 정의(正義)의 이데아, 美의 이데아, 선(善)의 이데아가 있으나 그중에서 선(善)의 이데아가 최고의 이데아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가져야 할 덕(德)으로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네 가지 덕(德)을 들었다. 특히, 국가를 통치하는 자는 지혜의 덕(德)을 가진 철학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바로 선(善)의 이데아를 인식한 사람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선의 이데아는 모든 가치의 근원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계승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탐구(探究)했던 것이다.

 

  (2) 헬레니즘의 로마시대의 가치관

 

헬레니즘시대란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 C.)이 페르시아제국을 멸한 후부터 로마군이 이집트을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를 통일할 때까지의 약 3세기 간을 말한다. 이 시대는 오로지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하는, 개인주의 풍조가 지배하던 때였다. 폴리스 국가의 붕괴로 국가를 중심으로 한 가치관은 소용이 없게 되었고 그리스人들은 불안정한 사회정세하(社會情勢下)에서 부득이 개인의 생활방식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cosmopolitanism)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은 스토아학파(學派), 에피쿠로스학파(學派), 회의학파(懷疑學派)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인주의의 사조(思潮)속에서 인간은 자기의 무력성(無力性)을 통감(痛感)하게 된다. 그러다가 로마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인간이상의 위치에 있는 어떤 존재에 의지하기를 원하게 되면서 점차로 종교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드디어 신플라톤주의(主義)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1) 스토아학파(學派)

 

宇宙(萬物)에는 로고스(法則, 이성)가 깃들어 있으며 우주는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운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로고스가 깃들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알고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주장이었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정욕(情欲)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정욕을 떠나 아파테이아(apatheia)-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 완전히 평정(平靜)한 마음의 상태(離欲狀態)-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면서 금욕(禁欲)을 주장하였다. 즉 아파테이아가 최고의 덕(德)이었다. 그리스人이거나 동방인(東方人)이거나 전부 우주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스토아학파에 있어서의 로고스는 신(神)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포인 것이다. 이리하여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cosmopolitanism)가 세워지게 되었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는 키프로스의 제논(Zenon, 336~264 B. C.)이었다.

 

   2) 에피쿠로스학파(學派)

 

금욕(禁欲)을주장한 스토아학파와는 반대로 쾌락(快樂)을 선(善)으로 설명한 사람들이 에피쿠로스(Epikuros, 341~270 B. C.)를 창시자(創始者)로 하는 에피쿠로스학파이다. 에피쿠로스는 현세에서의 개인적 쾌락만이 그대로 덕(德)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이 쾌락은 육체적(肉體的)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육체(肉體)에 있어서 고통이 없는 것과 영혼(靈魂)에 있어서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이 없는 평안(平安)한 마음의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이고상태(離苦狀態)-라고 부르고, 이것을 최고의 경지로 삼았다.

 

   3) 회의학파(懷疑學派)

 

인간은 사물에 대해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즉 어떻게든지 판단(判斷)하려 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로 마음의 平安을 얻으려면 일절(一切)의 판단(判斷)을 정지(停止)하라고 엘리스의 퓌론(Pyrrhon, 356~275 B. C.)은 말했다. 이것을 판단중지(判斷中止, 에포케, epoche)라고 한다. 인간에 있어서 진리(眞理)는 인식(認識)할 수 없으므로 일체의 판단을 그만두는 것이 소망스럽다고 회의학파(懷疑學派)는 주장했다.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도, 에피쿠로스학파의 아타락시아도, 회의학파(懷疑學派)의 에포케도 모두 개인적인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때에 이르러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탐구(探求)했던 가치의 절대성은 의문시되기 시작한다.

 

   4) 新플라톤주의(主義)

 

헬레니즘시대(時代)에 이어지는 로마시대에 있어서도 그리스철학(哲學)은 그대로 계승되었으나 헬레니즘의 로마시대의 철학이 궁극에는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의 新플라톤主義에 당도(當到, 도달)했던 것이다. 플로티누스는 일체의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流出)되었다고 하는 유출설(流出說)을 주장했다. 즉 처음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가까운 누스(nous, 理性), 다음에 영혼(靈魂), 그리고 가장 불완전한 물질(物質)이라는 식으로, 단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유출(流出)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래 그리스철학은 신(神)과 물질이 대립한다는 이원론(二元論)的인 입장이었으나 플로티누스는 하나님이 전체라고 함으로써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했다.

 

인간의 혼(魂)은 한편으로는 감성적인 물질세계로 흘러감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누스에서 하나님으로 되돌아 가고자 한다. 그래서 인간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떠난 후 하나님을 직관(直觀)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최대의 덕(德)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무아(無我, 엑스타시스, ecstasy)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고 하면서 그것을 최고의 경지라고 하였다. 그리스풍의 철학은 플로티누스와 더불어 종언을 고했지만, 新플라톤주의(主義)는 다음에 나타나는 기독교철학(哲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3) 中世의 가치관(價値觀)

 

   1)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신앙을 철학적으로 기초를 세운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였다. 그에 있어서 하나님은 영원(永遠), 불변(不變), 전지(全知), 전능(全能)하고, 최고의 선(善), 최고의 사랑, 최고의 미적(美的) 존재이며 우주의 창조주였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의 세계는 그 자체로서 독립된 세계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데아를 하나님의 정신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모든 것은 이데아를 원형(原型)으로 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유출(流出)된 것이라고 하는 新플라톤主義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재료(材料)도 사용하지 않고 완전한 無에서 자유로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창조론(創造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면 인간은 왜 죄(罪)의 존재인가. 인간시조(人間始祖) 아담이 자유를 악(惡)用한 후 하나님을 배반(背反)하여 타락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恩寵)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여 믿음, 소망, 사랑의 세 가지 덕(德)을 권하였다.

 

   2) 토마스 아퀴나스

 

기독교신학(基督敎神學)을 확립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덕(德)으로서 신학적인 것과 윤리적(倫理的)인 것을 들었다. 신학적인 덕은 기독교의 三元德, 즉 믿음, 소망, 사랑이며, 윤리적(倫理的)인 덕(德)은 그리스철학의 4원덕(四元德),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이다. 신학적인 덕은 인간을 지복(至福)으로 인도하는 바, 그 중에서도 사랑이 궁극적인 것이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인간은 지복(至福)을 받기에 합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윤리적(倫理的)인 덕(德)은 이성의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다. 윤리덕은 신학적(神學的)인 덕(德)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看做)되었다.

 

  (4) 근세(近世)의 가치관(價値觀)

 

중세가 지나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이렇다 할 새로운 가치관이 나타나지 않았다. 근세의 가치관은 그리스철학이나 기독교 가치관의 연장 또는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종래의 모든 가치관을 의심(疑心)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소위 회의주의(懷疑主義)는 아니며 회의(懷疑)를 통하여 보다 더 확실한 것을 알고자 하는 시도(試圖)였다. 그 결과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근본원리(根本原理)에 도달하였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여기에 인간은 이성에 의해 정념(情念)을 지배하면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행위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도덕관(道德觀)이 생겨났다.

 

파스칼(B. Pascal, 1623~1662)은 인간을 위대함도 갖고 있고, 어리석음도 갖고 있는 모순(矛盾)的 존재(存在)라고 보았다. 그것을 그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는 가장 약하나 생각함으로써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참 행복은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며 신앙에 의해서, 즉 심정(心情)에 의해서 하나님께 이르는 데에 있다고 주장했다.13) p.337

 

칸트(I.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비판批判),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에서 각각 진(眞)-선(善)-미(美)가 어떻게 해서 성립하는가를 논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 3개의 비판에서, 인간은 이러한 각각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특히 선(善), 즉 도덕에 있어서 인간은 실천(實踐)이성으로부터 오는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무조건적인 명령-정언명법(定言命法)-에 따라 행위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벤담(J. Bentham, 1748~1832)은 고통이 없는 쾌락의 상태를 행복이라 하면서 최대다수(最大多數)의 최대행복(最大幸福)이라는 원리를 세웠다. 이것이 그의 공리주의(功利主義)이다. 그는 쾌(快)와 고(苦)를 양적(量的)으로 계산함으로써 인간 행위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벤담의 공리주의(功利主義)는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생긴 가치관으로서 형상적(形狀的)인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은 미적(美的) 실존(實存)단계, 윤리적(倫理的)실존(實存)단계를 거쳐서 종교적실존단계(宗敎的實存段階)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실존의 3단계를 주장했다. 즉 인간은 쾌락속에서만 사는 것(美的단계)은 아니며, 또 윤리를 지키면서 양심적으로 사는 것(윤리적 단계)만으로도 불충분하며,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종교적 단계)고 역설(力說)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참다운 기독교의 가치관을 부흥시키려고 애썼던 것이다.

 

니체(F. Nietzsche, 1844~1900)는 19세기말의 유럽을 모든 가치(價値)가 붕괴되어 가는 니힐리즘의 시대라고 보았다. 그에 있어서, 기독교는 강자를 물리치고 인간을 평균화한 노예도덕(奴隷道德)이며, 니힐리즘을 초래한 최대의 원인자였다. 그래서 그는 권력(權力)에의 의지(意志)를 기준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세계에서 강력(强力)하게 살자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었다.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통일적으로 다루면서 가치를 철학의 중심문제로 취급한 사람은 新칸트학파(學派)의 빈델반트(W. Windelband 1948~1915)였다. 칸트는 사실문제와 권리문제를 구별하였으나 이것을 이어 받은 빈델반트는 사실판단(事實判斷)과 가치판단(價値判斷)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철학의 임무는 가치판단을 취급하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판단(事實判斷)은 사실을 개관적으로 인식한 명제(命題)이며, 가치판단(價値判斷)은 사실에 대하여 주관적인 평가를 내린 명제(命題)이다. 예컨대, 이 꽃은 붉다라든가, 그는……… 을 하였다라는 것은 사실판단이며, 이 꽃은 아름답다라든가, 그 행위는 선(善)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치판단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이 다루어 온 것은 사실판단(事實判斷)이고, 철학이 다루어 온 것은 가치판단(價値判斷)이라고 하면서 사실과 가치를 완전히 분리해서 다루었던 것이다.

 

금세기에 이르러 언어(言語)의 논리적(論理的) 분석(分析)을 철학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분석철학이 생겨났다. 분석철학은 가치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① 가치는 직각(直覺)에 의해 알 수밖에 없다. ② 가치판단이란 발언자의 도덕적인 찬성(贊成)이나 혹은 불찬성(不贊成)이라는 감정의 표명에 불과하다. ③ 가치론(價値論)은 가치언어의 분석에만 의의(意義)가 있다. 이리하여 분석철학은 대체적으로 철학에서 가치관을 배제하려고 하였다.

 

듀이(J. Dewey, 1859~1952)에 의해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은 생활에 대한 유용성(有用性)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진(眞)-선(善)-미(美)와 같은 가치(價値)개념(槪念)도 사물을 유효하게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요,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있어서,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며 비록 동일인물(同一人物)에 있어서도 때에 따라 달라진다. 이같은 듀이의 입장은 상대적(相對的)인 가치다원론(價値多元論)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의 가치관(價値觀)을 살펴보자.

 

공산주의의 가치관으로서는 예컨대 투가리노프(B. P. Tugarinov, 1898~)의 다음과 같은 정의(定義)가 있다. 가치(價値)란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 또는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 현실의 것으로서 또는 목적 내지 이상으로서 유용하고 필요한, 자연 및 사회의 현상이다."14) 즉 공산주의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유용하다는 것이 가치의 기준이었다. 여기에서 부르주아的 가치관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존의 종교적 가치관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 공산주의 가치관의 전제(前提)가 되고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도덕이란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집단생활을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헌신, 복종(服從), 성실, 동지애, 상호부조 등이 그 내용이다.

 

  (5) 새로운 가치관(價値觀)의 출현(出現)의 필요성(必要性)

 

이와 같이 역사상에 많은 가치관들이 나타났으나, 그것은 절대적 가치를 수립하려고한 시도들이 모두 붕괴되어 온 역사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참다운 지(知)를 추구함으로써 절대적인 가치(價値)를 수립코자 하였다. 그러나 폴리스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그리스철학의 가치관도 붕괴되어 버렸다. 다음에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중심으로 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결국 기독교의 가치관은 중세사회를 지배하였으나, 중세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점차 힘을 잃고 말았다.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나 칸트는 그리스철학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중심으로 한 가치관을 수립했으나 가치관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파악이 애매함으로 인하여 그 가치관은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였다. 한편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르는 참다운 기독교의 가치관을 부흥시키려 했지만, 확고한 가치관을 수립하지는 못하였다.

 

新칸트학파(學派)는 가치의 문제를 철학상의 주요문제로서 다루었으나 가치를 취급하는 철학(哲學)과 사실을 취급하는 자연과학(自然科學)을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과학자들이 가치를 도외시하고 사실만을 연구한 결과, 인류를 대량으로 살육(殺戮)하는 병기의 개발, 자연환경의 파괴, 공해문제 등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공리주의(功利主義)나 프래그머티즘은 물질적인 가치관으로서 완전히 상대적인 가치관이 되었으며, 분석철학(分析哲學)은 가치부재(價値不在)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니체의 철학이나 공산주의는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반가치(反價値)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철학이나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가치관은, 오늘날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으며, 전통적인 가치관은 취약화(脆弱化)되면서 자연과학에서 분리(分離)되어 드디어는 철학의 영역(領域)에서도 배제(排除)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오늘의 사회(社會)혼란(混亂)은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여기에 전통적인 가치를 소생시키면서 절대적 가치를 수립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의 출현이 절실히 요청된다. 따라서 새로운 가치관은 유물론(唯物論)을 극복하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과학을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치(價値)와 事實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사물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이 통일되어 있는 것과 같이, 가치와 사실도 본래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고자 출현한 것이 本가치론(價値論)이다.

 

                제5장 교육론(敎育論)

 

Theory of Education

 

오늘날 청소년의 탈선(脫線), 性도덕(道德)의 퇴폐(頹廢), 폭력사건(暴力事件)의 빈발(頻發) 등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은 위기(危機)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혼란을 구할 수 있는 교육이념은 발견되지 않은 채 오늘의 교육은 방향감각(方向感覺)을 잃고 있으며, 사제(師弟)의 도(道)마저 붕괴되고 있다. 즉 학생은 스승을 존경하지 않으며, 스승은 권위(權威)와 정열(情熱)을 상실하고 있다. 그 결과 일부의 스승은 지식을 팔고 학생은 지식을 사는 것같은 관계가 되어 학교는 지식의 매매장(賣買場)으로 전락되어 버린 경향마저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대학가(大學街)에 침투(浸透)하여 학내(學內)를 광란(狂亂)의 장(場)으로 삼았으며, 교육이념(敎育理念) 부재(不在)의 상황속에서 공산주의의 공세를 강화(强化)시키곤 하였다.

 

민주주의의 교육이념(敎育理念)이란, 주권재민(主權在民), 다수결주의(多數決主義), 권리평등(權利平等) 등의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타인(他人)의 권리를 존중하고 자기의 책임을 다한 터 위에서 자기의 권리(權利)를 주장하는 시민(市民), 즉 민주적시민(民主的市民)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교육이념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공격(攻擊)하곤 했다. 계급사회에서 지배층이 노동자, 농민들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는가. 계급사회에서 의무(義務)와 사명(使命)을 다 한다는 것은 권력층의 충실한 종이 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참다운 민주주의가 아니다. 참다운 민주주의란 인민대중인 노동자(勞動者)나 농민(農民)들을 위한 민주주의, 즉 인민민주주의(人民民主主義)여야 한다. 따라서 참된 민주주의교육은 인민을 위한 교육이어야 하며, 참된 교육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사회를 타도(打倒)하고 사회주의사회(社會主義社會)를 건설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선전한다.

 

공산주의의 이와 같은 참소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착취, 억압, 부정, 부패 등의 사회적(社會的) 구조(構造)악(惡)이 남아있는 한, 설득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와 같은 사회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운동이 전개되어야 하며, 새로운 교육이념(敎育理念)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교육이념(敎育理念)은 인간의 성장에 대하여 본래 하나님이 원했던 기준을 근거로 해서 세워져야 한다. 그것은 혼미한 오늘의 교육에 방향성을 제시하고 미래사회에 대하여 교육의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즉 다가오는 미래의 이상사회(理想社會)를 대비하기 위한 교육론이어야 한다. 本 교육론(敎育論, 통일교육론(敎育論))은 바로 이와 같은 교육론으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敎育)이론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교육의 이념(理念), 목표(目標), 방법(方法) 등에 관한 것으로서 소위 교육철학(敎育哲學)이 이에 해당하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교육현상을 취급하는 측면으로서 교육과학(敎育科學)이 이에 해당한다. 교육과학(敎育科學)은 교육과정(敎育課程, 커리큘럼), 교육평가(敎育評價), 학습지도(學習指導), 학생지도(學生指導), 교육행정(敎育行政), 교육경영(敎育經營) 등을 연구하는 측면이다.

 교육에 있어서의 이 두 가지 측면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교육철학은 성상적교육(性相的敎育)이고, 교육과학은 형상적교육(形狀的敎育)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적(科學的) 교육학(敎育學)이 과학 존중의 조류(潮流)속에서 크게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철학은 경시(輕視)되어 쇠퇴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육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곧 교육철학의 부재(不在)를 뜻한다. 따라서 오늘날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새로운 교육철학의 확립이며, 통일교육론(敎育論)은 바로 그러한 교육철학(敎育哲學)에 해당하는 것이다.

 

               一. 통일교육론(敎育論)의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

 

  (1) 하나님에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과 3대축복(三大祝福)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으며(창세기1:27), 창조가 끝난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만물을 주관하라(창세기1:28)는 축복(三大祝福)을 내리셨다. 이것이 교육의 근거(根據)가 된다. 즉 교육이란 하나님을 닮도록 자녀를 양육(養育)시키는 것이며,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도록 인도하는 노력인 것이다.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신상과 신성(神性)을 닮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신상(성상-형상, 양성-음성, 그리고 개별상)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주 극히 미숙(未熟)한 상태에 있으며, 성장하면서 점차로 하나님의 신상을 닮아간다. 신성(神性)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성장하면서, 신상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성상(性相)-형상(形狀), 양성(陽性)-음성(陰性), 개별상(個別相)을, 그리고 신성(神性)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정(心情), 이법(理法), 창조성(創造性) 등을 온전히 닮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생육(生育)하고 번성(繁盛)하여 만물을 다스리라는 3대축복(三大祝福)을 주셨다. 즉, 生育하라(be fruitful)는 말은 개체의 인격(人格)을 완성하라는 뜻이며,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말은 부부(夫婦)가 되어 자손을 번식(繁殖)하라는 의미이고 땅을 정복(征服)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는 말은 만물을 주관(主管)하라는 의미이다. 이 3대축복(三大祝福)을 성취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신상과 함께 하나님의 신성(神性), 즉 심정(心情), 이법(理法), 창조성(創造性)을 계승하여 완전성(完全性), 번식(繁殖)性, 주관성(主管性)에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닮게 되는 것이다(그림 5-1). 다음에 완전성, 번식성, 주관성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이 3대축복(三大祝福)에서 교육의 이념(理念)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p. 346

 

   

                     그림 5-1 하나님에의 닮기와 3대축복

   1) 完全性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8)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으라는 뜻이다. 완전성이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을 말한다. 하나님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심정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원만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를 이루고 있다. 이 상태가 완전성(完全性)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성(完全性)을 닮는다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도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성상과 형상이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성상-형상에는 존재론(存在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네 가지의 유형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을 말한다. 그래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생심(生心)이 주체, 육심(肉心)이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생심이 육심을 주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심은 진선미(眞善美)의 가치를 추구하고, 육심은 의식주(衣食住) 및 性을 추구한다. 따라서 생심과 육심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진선미(眞善美)의 생활을 제1차적으로,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을 제2차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의 중심은 심정(心情)이며 사랑이다. 결국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진선미(眞善美)의 생활을 중심으로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이 영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완전성(完全性)을 닮는다는 뜻이다. 인간이 어렸을 때는 진선미(眞善美)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지만 성장함에 따라 점차 심정이 발달하여 사랑을 중심한 참된 생활, 선(善)한 생활, 아름다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점차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아가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이중적 존재이므로 인간의 성장에는 영인체의 성장과 육신의 성장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육(生育)하라'라는 제1축복(第一祝福)은 육신의 성장의 의미도 있으나, 주로 영인체의 성장, 즉 심령기준(心靈基準)의 향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록 영인체(靈人體)의 성장이라 하더라도, 육신을 터로 하고서만, 즉 성상(영인체)과 형상(육신)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해서만 영인체가 성장한다. 이렇게 해서 다 성장하여 하나님의 완전성을 상속받으라는 뜻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1(第一)의 예약축복(豫約祝福)이다.

 

   2) 번식성(繁殖性)

 

인간은 하나님의 번식성(繁殖性)을 닮으라는 것, 즉 인간이 자녀번식의 단계에까지 성장(成長)하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양성(陽性), 음성(陰性)의 조화체이듯이 이 하나님의 양성(陽性)-음성(陰性)의 조화를 닮으라는 뜻이다. 인간에 있어서의 양성-음성의 조화란 부부의 조화를 말한다. 하나님의 속성인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수수작용(통일)과, 양성(陽性)-음성(陰性)의 조화에 의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번식성(繁殖性)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도 마음과 몸의 통일과 양성(陽性)-음성(陰性)(남성과 여성)의 조화에 의하여 자녀를 번식하게 된다.

 

하나님의 번식성(繁殖性)을 닮으라는 말은, 하나님과 같이 양성(陽性)-음성(陰性)이 원만한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결혼을 하여 자녀를 번식하는 자격을 구비하도록 성장하라는 의미이다. 즉 남성(男性)은 남성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고 여성(女性)은 여성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남편으로서의 도리(道理), 아내로서의 도리(道理)를 다 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성장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자격을 갖춘 후 결혼하여 자녀를 번식(繁殖)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2(第二)의 예약축복(豫約祝福)이 된다.

 

   3) 주관성(主管性)

 

그리고 또 인간은 하나님의 주관성을 닮지 않으면 안 된다. 주관성(主管性)을 닮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는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성이란 심정(心情)(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대상(新生體)을 만드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창조성을 가지고 인간 및 만물을 창조하고 주관하고자 한다. 본래, 인간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받아서 심정(心情)을 중심으로 하여 만물을 주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인간이 완성하면 그와 같은 능력을 구비하게 되며, 이것이 제3(第三)의 예약축복(豫約祝福)이다.

 

예컨대, 모든 산업활동은 일종의 만물주관에 해당한다. 농민이 논밭을 경작하는 것은 토지에 대한 주관이요, 노동자가 공장에서 기계를 사용하여 원료를 제품으로 만드는데, 이것은 기계나 원료에 대한 주관이다. 또 어업(漁業)은 바다나 물고기에 대한 인간의 주관이요, 임업(林業)은 산이나 나무에 대한 인간의 주관이다.

 

만물을 주관한다는 말은, 만물에 대하여 창조성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창조성은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측면에서 보면,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와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를 형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농업에 있어서 농민은 새로운 아이디어(창조성)를 가지고 창의적(創意的)으로 보다 많은 수확을 올리고자 노력하게 된다. 상업에 있어서도 아이디어와 창의력(創意力)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요컨대 농업, 광업, 공업, 상업, 임업, 어업 등은 모두 인간의 창조성(創造性) 발휘의 대상이며 만물의 주관이다. 과학이나 예술도 만물주관의 범주(範疇)에 들어가며, 사회를 주관하는 것 즉 정치하는 것도 만물주관 속에 속한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성을 계승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성은 심정을 중심한 창조성인데 타락으로 인하여 심정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자기 즉 이기심(利己心)을 중심한 창조성이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창조성을 가지고 사회나 자연에 피해(被害)를 끼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전쟁무기의 생산(生産)이라든지 공해증대(公害增大)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학생을 지도함에 있어서 교사들은 새로운 교육론의 입장에서 학생들이 심정을 중심한 창조성을 발휘하도록, 즉 하나님의 주관성을 닮도록 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인간의 성장과정(成長過程)

 

인간은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으나, 태어나면서 곧바로 하나님을 닮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는 일정한 성장기간이 없어서는 안 된다. 피조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소생(蘇生), 장성(長成), 완성(完成)의 3단계에 걸쳐 성장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을 닮게 된다. 닮되 완전성(完全性), 번식성(繁殖性), 주관성(主管性)을 닮게 된다. 따라서 성장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으로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측면과 하나님의 양음(陽陰)의 조화의 측면,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닮아 나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3대축복(三大祝福)이란, 인간이 완성한 후, 하나님의 완전성, 번식성, 주관성을 상속받는다는 의미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3대축복은 3대예약축복(三大豫約祝福)이다. 그런데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이 3대축복은 성취되지 않았다. 이 3대축복은 창세기에 있는 대로 ...... 하라는 따위의 명령형식(命令形式)의 축복이다. 비록 인간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명령(命令)은 취소된 것이 아니며, 명령(命令, 축복) 그 자체는 오늘날까지 유효(有效)하다. 이것은 천의(天意)가 인간의 잠재의식(潛在意識)을 통하여 3대명령(命令), 즉 3대축복을 성취하도록 작용해 온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은 무의식중에도 3대축복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게 된다. 즉 타락사회에 있으면서도 인간은 모두 자기도 모르게 그와 같은 천의(天意)에 따라 비록 서툴기는 하지만 인격적(人格的)으로 성장하여, 좋은 상대를 찾아서 가정을 만들고 자연을 지배하거나 사회를 개선하고자 노력해 왔던 것이다. 인간에게 성장욕(成長欲), 결혼욕(結婚欲), 지배욕(支配欲), 개선욕(改善欲) 등이 있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망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달성되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인간시조의 타락 때문이었다.

 

여하 간에 본연(本然)의 세계에 있어서, 인간은 3대축복을 완성하기 위하여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 이외의 만물도 성장한다. 그런데 만물은 원리자체(原理自體)의 자율성과 주관성에 의해 성장한다. 즉 생명(生命)이 지향하는 대로 맡겨두면 자연히 성장하는 것이다. 원리자체의 자율성(自律性), 주관성(主管性)이란 바로 생명(生命)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육신은 만물과 마찬가지로 원리자체의 자율성(自律性)과 주관성(主管性)에 의해 성장하지만, 영인체의 성장은 그렇지 않다. 영인체는 책임분담을 완수할 때에만 성장하게 되어 있다. 인간에게 책임분담(責任分擔)이 부과된 것은 그 때문이다. 책임분담(責任分擔)에 의한 성장이란 인간이 자신의 책임과 노력에 의해 인격을 향상(向上)시켜 나아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의사로써 규범원리(規範原理)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체험)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인류시조(人類始祖)인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계명(戒命)을 지키면서 성장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한 다음, 부부가 되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는 전인류를 대표하는 최초의 인류의 조상이 되어야 했으므로 그들에게는 자기의 책임분담 뿐만 아니라 후손(後孫)의 대부분의 책임분담까지도 메워져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干涉)하시지 않는다.

 

아담과 해와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와 같은 무거운 책임분담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완수하게 되면, 그 자손들은 지극히 적은 분량(分量)의 책임분담만으로도, 즉 부모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르기만 하면, 완성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아담과 해와의 경우, 이 3대축복을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순전히 자신들의 책임만으로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완성한 뒤, 자녀들이 그 부모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른다는 말은 부모의 가르침 즉 부모의 교육을 자식들이 받아야 함을 뜻한다.

 

여기에 부모(父母)의 자녀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생긴다. 바꾸어 말하면 子女가 해야 할 책임분담을 위해서 부모의 교육이 필요하다. 여기에 교육의 이념(理念)이 세워진다. 즉 부모가 자녀들을 가르쳐서 3대축복을 완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교육의 근본이념(根本理念)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본래의 장소는 부모가 상주(常住)하는 가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정보량이나, 교육내용이 증대(增大)하게 되어 현실적으로 부모만으로는 불가능하므로, 교육의 장소는 필연적(必然的)으로 가정에서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로 옮겨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대신 학교에서 스승이 부모를 대신하여 교육하게 된다. 따라서 교사는 부모의 심정(心情)으로 부모를 대신해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본래의 교육의 모습이다.

 

  (3) 교육(敎育)의 3대이념(三大理念)

 

이리하여 통일교육론에 있어서의 교육(敎育)의 목표는 피교육자(被敎育者)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성, 번식성, 주관성을 닮게 하는데 있다. 이것이 통일교육론의 교육의 이념(理念)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 것을 개체완성(個體完成, 개성완성(個性完成))이라 한다. 개체완성은 제1축복(第一祝福)의 완성으로서 인격의 완성을 의미한다. 또 번식성을 닮는 것을 가정완성(家庭完成)이라 한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 장차 결혼하여 부부의 조화(調和)를 나타내면서 원만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즉 제2축복(第二祝福)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관성을 닮는 것을 주관성완성이라 한다. 이것은 만물의 주관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곧 제3축복(第三祝福)의 완성을 뜻한다. 이리하여 통일교육론에 있어서의 교육의 3대이념은 제1축복완성(第一祝福完成)을 위한 개체완성(個性完成)과 제2축복완성(第二祝福完成)을 위한 가정완성과 제3축복완성(第三祝福完成)을 위한 주관성완성인 것이다.

 

               二. 교육(敎育)의 3형태(三形態)

 

이와 같은 이념(理念)을 기반으로 할 때, 인간에게는 어떤 형태의 교육이 필요할까. 개체완성(個體完成)을 위해서는 심정교육(心情敎育)이 필요하고, 가정완성을 위해서는 규범교육(規範敎育)이 필요하고, 주관성완성을 위해서는 기술교육(技術敎育), 지식교육(知識敎育), 체육(體育) 등의 주관교육(主管敎育)이 필요하다. 다음에 이 세 가지 교육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심정교육(心情敎育)

 

   1) 개체완성(個體完成)을 위한 교육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게 하는 교육이 심정교육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성을 닮는다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수수작용을 하여 하나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에 있어서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은 심정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통일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생심과 육심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과 같은 심정(心情)이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심정(心情)이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중심이 되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서, 개인의 중심이 되는 그 심정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一致)되어야 한다. 개인의 심정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一致)하도록 하는 교육을 심정교육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심정교육(心情敎育)은 개체완성(個體完成)을 위한 교육이 된다.

 

심정교육(心情敎育)이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피교육자(被敎育者)로 하여금 만민과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기르는 교육이다. 그와 같은 인간으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피교육자(被敎育者)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학생(피교육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2)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표현 형태

 

하나님의 심정은 창조와 복귀섭리의 과정을 통하여 세 가지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즉 소망의 심정, 슬픔의 심정, 고통의 심정이 그것이다.

 

    ① 소망(所望)의 심정(心情)

소망의 심정이란, 우주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으로서, 무한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가장 사랑하는 최초의 자녀, 아담과 해와를 얻는다는 기대(期待)와 소망에 찬 기쁨의 감정을 말한다. 이 소망의 심정이 달성되었을 때 말할 수 없는 만족에 찬 기쁨을 느낀다. 실제로 아담과 해와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기쁨은 표현할 길이 없는 만족에 찬 기쁨이었던 것이다.

 

최근 물리학에 의하면, 150~200억년이라는 오랜 기간 전에 우주가 생성(生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은 통일원리로 볼 때 150~200억년 전에 우주가 창조(創造)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오랜 기간을 두고 우주를 창조하신 이유(理由)가 무엇일까.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자녀인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한 자녀를 얻기 위한 한 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와 같은 오랜 기간을 걸쳐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희망에 찬 하나님은 우주 창조의 과정이 아무리 길고 어렵더라도 그것이 길다거나 괴롭다고는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기쁜 결과를 바라보면서 일을 준비할 때는, 그 일이 아무리 어려운 것같이 예견(豫見)되더라도 실제로 부딪혀 보면 그렇게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간은 속히 흘러간다. 그것은 머지않아 기쁨이 다가온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그와 같은 기쁨에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훨씬 큰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담과 해와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기쁨은 비할 바 없이 크고 깊은 것이었다.

 

    ② 슬픔의 심정(心情)

슬픔의 심정이란,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여 사망권내(死亡圈內, 사탄의 지배하)에 떨어졌을 때의 하나님의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서 자식(子息)을 잃고 슬퍼하는 부모(父母)의 감정과 같은 하나님의 감정을 뜻한다. 초창기때 선생님의 설교 말씀이 아담과 해와의 타락에 미치게 되면, 그 때의 하나님의 그 슬픈 심정을 소개하면서 슬피 통곡하시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그리고 아담과 해와의 타락 직후부터 복귀섭리를 시작한 후에도 장차 뜻이 이루어질 미래의 기쁨과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섭리를 진행시키셨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그 섭리를 아랑곳 하지않고 퇴폐(退廢)와 난폭(亂暴)만을 일삼고 있었으니, 이 광경(光景)을 바라보시면서 그때마다 또 다시 탄식하시고 슬퍼하시곤 하셨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역사를 섭리해 오신 하나님은 슬픔의 하나님인 동시에 한(恨)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즉 창조할 때의 기대(期待)와 소망(所望)이 너무 컸기 때문에 타락에 의해 초래(招來)된 하나님의 실망의 슬픔은 그 만큼 더 컸던 것이다.

 

속세(俗世)에서도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父母) 특히 그 어미(母)는 심히도 애통(哀痛)해 한다. 비록 자식의 병이 위중해서 불치(不治)의 병이라고 선고되었더라도, 실제로 숨이 끊어지면 슬퍼서 어쩔 줄 모르는 모정(母情)이 적지 않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했을 때의 하나님의 슬픈 심정과, 감옥과 같은 사탄세계에서 고생하는 아담과 해와와 그 후손들의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슬픔의 심정은, 자식을 잃은 세속적(世俗的)인 부모의 슬픔과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것이었다. 역사 이래 하나님처럼 슬픈 인간은 일찍이 이 세상(世上)에 없었다는 것이 문선생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심정의 모습의 하나였다.

 

    ③ 고통(苦痛)의 심정(心情)

 고통의 심정이란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섭리역사의 중심인물들이 사탄과 그 앞잡이들로부터 박해(迫害)를 당하면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실 때의 하나님의 아픈 감정을 말한다. 즉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되살리기 위해서 선지선열(先知先烈)과 성현(聖賢)들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박해하고 때로는 학살(虐殺)까지 하는 광경을 바라보실 때마다 하나님의 가슴은 못이 박히고 창에 찔리는 듯이 아프셨던 것이다. 타락세계의 인간들을 기어이 살리시기 위해서 보내신 성현(聖賢)들이나 의인(義人)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당하는 멸시(蔑視)와 조소(嘲笑), 박해(迫害)와 천대(賤待)는 바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멸시와 조소로 느끼셨으며,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박해와 천대로 느끼신 것이다. 이리하여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또 하나의 심정은 고통의 심정이었다.

 

   3)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이해(理解)

 

심정교육(心情敎育)을 위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세 가지 심정을 피교육자(被敎育者, 학생)들에게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복귀노정에서의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로 아담가정(家庭), 노아가정(家庭), 아브라함가정(家庭), 모세노정(路程), 예수님노정(路程) 등의 복귀노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은 문선생께서 소개하신 하나님의 심정(心情)에 관한 내용이다. p. 357

 

    ① 아담가정(家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소망 가운데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한없는 소망과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으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한없이 비통해 하셨다. 그래서 아담가정을 구하기 위하여 아담과 해와의 자식인 가인과 아벨에게 헌제(獻祭)를 시켰으며,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의 헌제(獻祭)가 성공할 것이라는 큰 소망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임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므로 아담과 해와나 가인?아벨이 실패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탄하고 슬퍼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비록 인간이 타락할 수도 있으리라는 가능성(可能性)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심정의 하나님이요, 따라서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타락의 가능성(可能性)에 대한 예지(豫知)에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헌제(獻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헌제에 걸었던 하나님의 기대(期待)는 엄청나게 컸던 것이다. 헌제에 건 하나님의 소망이 이처럼 강했기 때문에 헌제의 실수(失手)의 가능성(可能性)에 대한 예지(豫知)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계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심정(心情)(사랑)과 이성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심정의 충동력 그 자체는 이성을 압도하리만큼 강력(强力)한 것이다.

 

이리하여 아담과 해와 때도 가인?아벨 때도 하나님의 심정은 성공만을 원하신 소망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도, 가인?아벨도 실패하고 말았으므로 그 슬픔이 비길 데 없이 컸음은 상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 슬픔을 외부로 표현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런 장면(場面)마다 항상 사탄이 함께 있어서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슬픔을 외부에 나타내면 슬픔에 젖은 그 하나님의 모습이 사탄에게는 위신도 권위도 없는, 하나님답지 않은 초라한 모습으로만 비쳐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누르면서 비장(悲壯)한 얼굴로 그곳을 떠나가신 것이다. 이것이 초창기에 문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아담가정에서의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② 노아가정(家庭)에서의 하나님의 심정

아담가정을 떠난 하나님은 160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광야(曠野)의 길을 걸으시면서 지상의 협력자를 찾아 헤매셨다. 그동안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에게 등을 돌릴 뿐, 누구도 하나님을 맞이하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世上에는 하나님이 머물 수 있는 한 채의 집도, 설 수 있는 한치의 땅도, 상대할 수 있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천애(天涯)의 고독단신(孤獨單身)의 처량한 신세가 되어서 쓸쓸한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나님은 한 사람의 협력자(協力者)인 노아를 만나셨다. 하나님의 기쁨은 비할 데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섭리적 사정 때문에 사랑하는 노아에게 엄한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노아는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120년간 방주를 지었다.

 

노아는 단지 하나님 앞에 세워진 종이요, 의인(義人)이었을 뿐,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종일지라도 그와 같은 노아를 만난 것이 그렇게도 기뻐서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종의 입장으로 내려와 노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런데 홍수심판을 거친 뒤에 노아의 아들 함이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홍수(洪水)심판에서 살아남은 유일(唯一)한 가정이었던 노아가정에 다시 사탄이 침범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그 때 하나님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같은 아픔과 슬픔을 느끼면서 또 다시 쓸쓸한 모습으로 노아가정을 떠나신 것이다.

 

    ③ 아브라함가정(家庭)에서의 하나님의 심정

그 후, 4백년만에 아브라함을 찾아 세웠다. 아브라함노정(路程)에 있어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祭物)로 바칠 때였다. 비둘기와 양과 암소를 바치는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한 아브라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그 때 아들을 살릴 것인가, 천명(天命)에 따라 자식을 바칠 것인가, 즉 인륜(人倫)을 따를 것인가 천륜(天倫)을 따를 것인가를 두고 아브라함은 고민했다. 자기의 아들을 바치는 대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싶을 정도로, 이삭을 살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인륜(人倫)을 끊고 천륜(天倫)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모리아산(山)을 향해 가는 3일간의 기간은, 아브라함에 있어서 천륜(天倫)이냐, 인륜(人倫)이냐를 택일해야 하는 고뇌의 시간이었다. 그 때 하나님은 멀리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를 바쳐라라는 엄한 명령을 내리시고는, 아브라함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아니 그 이상으로 괴로워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아山에서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자식 이삭을 제물(祭物)로 바치기 위해 칼을 들고 죽이려 했을때, 하나님은 드디어 그를 죽이지 말라고 황급히 말리시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창세기 22:12)고 말씀하셨다. 그 때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심정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과 충성은 이미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삭을 죽이지 않아도 죽인 것과 같은 조건(條件)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 죽이는 것을 中止시키고, 대신에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했다. 여기에 이제야………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그동안 아브라함에 대해 느끼셨던 하나님의 섭섭함과, 이삭헌제(獻祭)에서 보인 아브라함의 충성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함께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④ 모세노정(路程)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애급의 왕자로서 성장하던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민족이 받고 있는 고통의 현장을 목격한 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복귀(復歸)시키기로 작정하고 천신만고 끝에 그들을 광야로 인도했으나,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지도자인 모세에 대해 반역(反逆)을 하곤 했다. 한 번은 모세가 시내山에서 40일간의 금식(禁食, 단식)을 마친 후, 두 개의 석판을 받아 가지고 山에서 내려오면서 보니 이스라엘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빌고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 불신(不信)의 행위를 보고 크게 화를 내면서 석판(石板)을 던져버렸다. 그 때 하나님은 내가 이 백성(百姓)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애급 32:9~10)고 하셨다.

 

그 때의 모세의 심정(心情)은 어떠하였을까. 이스라엘백성들의 불신이 괘씸은 했으나 이 백성을 내가 진멸하겠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할 때, 순간적으로 그의 애족(愛族), 애국(愛國)의 심정이 솟구쳤다. 그리하여 그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해도 이 민족(民族)을 살리고 싶었으며, 할 수만 있으면 함께 가나안땅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 (출세기 32:12)라고 하면서 민족을 살려달라고 간구했다. 하나님은 모세의 그 애족심(愛族心)어린 호소의 기도를 용납하셔서 드디어 이스라엘민족을 진멸코자 했던 뜻을 철회하신 것이다.

 

그런데 40년간 광야(曠野)를 유랑(流浪)한 후,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백성들은 마실 물조차 없다면서 모세를 또 원망하였다. 그 때 모세는 불신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 대한 노여움 때문에 한 번 쳐야할 바위를 두 번 쳐버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짓이었다. 그 후 하나님은 비스가 山上에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백성이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을 보여 주면서 너는... ...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신명기 32:52)라고 하신 것이었다. 80 노구를 이끌고 40일 금식을 두 번씩이나 했던 모세, 불신하는 민족을 붙들고 40년간이나 신광야에서 고생했던 모세였다. 사실상 출애급의 주역인 모세를 가나안 땅에 인도하고 싶은 하나님이었지만 사탄의 참소 때문에 할 수 없이 눈앞에 있는 그 곳을 환상으로만 보여 주시고는 그를 버릴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슬픔과 아픔과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이다.

 

    ⑤ 예수노정(路程)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구약성서에 기록된 대로(이사야 9:6) 예수님은 지상(地上)에 메시아로 오셨다. 온 땅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으면 안될 구세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릴 때부터 배척(排斥)당하였다. 가족들이 예수를 몰랐고 유대교가 예수를 불신했으며, 결국 이스라엘백성들이 예수님을 쫓아낸 것이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던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노정을 포함해서 33년간 쓸쓸하고 고독(孤獨)한 생애를 보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人子)는 머리둘 곳이 없도다(누가 9:58)라고 하면서 그 고독한 심정을 토로(吐露)했으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눈물지으시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은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누가 19:41~44)고 하면서 저주하기도 했다. 때로는 갈릴리 해변을 거닐면서 또는 선민(選民)이 아닌 사마리아여인(女人)과 말을 나누면서(요한 4:7~26) 외로움을 달랬으며, 유대인의 지도자들보다 세리(稅吏)들과 창녀(娼妓)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마태 21:31)고 하면서 구세주이신 자신을 몰라주는 교단들에 대한 섭섭함을 고백하기도 하셨다. 이 때 하나님도 고독한 예수님과 더불어 고독한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신 독생자(獨生子) 예수님의 그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겠는가. 너무나 참혹한 모습을 하나님은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내려 놓을 수 없는 사정을 한탄하시면서 얼굴을 돌리셨다. 그 장면이 세 시간의 어둠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十字架刑)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 이상의 것이었다.

 

   4)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소개

 

이상은 모두 초창기에 선생님께서 설교때마다 흐느껴 우시면서 소개하신 내용들이다. 곧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노정(路程)을 통하여 보여준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나 이민족(異民族)에 있어서의 성현(聖賢), 의인(義人)들의 수난의 노정 배후에도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심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심정교육에 있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부모(父母) 혹은 교사(敎師)들이 학생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직접 말씀으로써 들려줄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비디오 등의 매스컴이나 소설, 연극, 회화 등의 작품을 통해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5) 실천(實踐)을 통한 심정교육(心情敎育)

 

하나님의 심정을 말로 알릴 뿐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직접 보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진실로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먹이고 입히고 거처를 제공하고, 잠을 재우고 하는 일, 예절을 가르치는 일 등 가정에서 자식(子女)들을 보살핌에 있어서 항상 지성어린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참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부모가 계속해서 자식들에게 보인다면, 자식들은 그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하면서 효도하게 되는 것은 물론 자식들 상호간에도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이 부모의 참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자식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사는 말과 행동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사랑을 보여야 한다. 매 학과마다 정성을 다해서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아동 하나 하나에 대해서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내 자식처럼 정성을 다하여 보살펴 주어야 한다. 학교교육은 가정교육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상의 言語와 행동(行動)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공사간(公私間)의 생활에 있어서의 선생의 말 한마디, 행동의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이 피교육자(被敎育者)에게는 모두 배움의 교재가 되고 인격 형성의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에 넘친 학교교육을 받는 동안 아동들은 깊은 감동을 받게 되며, 그 스승을 존경하고 따르게 될 뿐 아니라, 드디어 그 스승을 닮게 됨으로써 참사랑의 실천자가 되는 것이다. 이상이 가정과 학교에 있어서의 실천을 통한 심정교육이다.

 

  (2) 규범교육(規範敎育) p. 364

 

   1) 가정완성(家庭完成)을 위한 교육(敎育)

 

가정완성을 위한 교육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夫婦)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양음(陽?陰)의 조화를 닮을 수 있게 하는 교육으로서 본연의 부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하는 교육이 다. 인간타락이 규범(規範)(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데 있었으므로, 이 교육은 우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 규범교육인 것이다. 남성(男性)은 남편으로서의 도리(道理)가, 여성(女性)은 아내로서의 도리(道理)가 몸에 배도록 배워 익히게 한다. 또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녀의 본연적(本然的) 자세나 형제자매(兄弟姉妹)의 자세도 규범교육에 포함된다.

 

규범교육에 있어서 특히 중요한 것은 性의 신성성(神聖性), 신비성(神秘性)에 대하여 가르치는 일이다. 性은 결혼을 통하여 비로소 체험하는 것이므로 그 때까지는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일깨우는 일이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善惡)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어서는 안 된다(창세기 2:17)고 하셨다. 선악과는 해와의 성적(性的)사랑(원리강론 1987, p. 85)을 의미하기 때문에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性(性的器官)은 신성한 것이므로 성적영역(性的領域)을 범함으로써 성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계명은 아담과 해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有效)하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영원히 유효(有效)한 하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인 것이다. 이것은 또 남녀가 결혼(結婚)한 뒤에도, 다른 이성(異性)과의 탈선(脫線)행위가 결코 허락되지 않는 지상명령이기도 하다. 따라서 규범교육(規範敎育)이란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양음(陽陰)의 조화를 닮도록 하는 교육, 즉 부부의 자격을 갖추도록 하는 부부(夫婦) 자격교육인 것이다.

 

   2) 이법적(理法的) 존재(存在)가 되게 하는 교육(敎育)

 

인간은 logos(이법(理法))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규범교육(規範敎育)은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로고스的 존재, 이법적(理法的) 존재(存在)가 되도록, 즉 천도(天道)를 따를 수 있게 하는 교육으로서 이법(理法)교육(敎育)이라고도 한다. 천도(天道)란 우주를 꿰뚫고 작용하고 있는 법칙으로서 수수작용의 법칙을 말한다. 그런데 이 천도에서 두 종류의 법칙, 즉 자연법칙(自然法則)과 가치법칙(價値法則)이 도출되는데 이 중의 가치법칙이 바로 규범이다. 우주에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있는 것처럼 가정에도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있다. 그리하여 가정에는 이 두 질서에 대응하는 가치관이 성립한다. 즉 종적가치관과 횡적가치관이 그것이다. 그 밖에 개인적 가치관이 있는 바, 그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가치론(價値論)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규범교육(規範敎育)은 심정교육과 병행하여 실시(實施)되어야 한다. 규범교육 그 자체는 의무만을 강요하기 쉽기 때문이다. 규범(規範)이란, ... ... 해서는 안 된다 라든가, ... ...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그 규범은 형식화(形式化)되거나 율법적(律法的)인 것이 되기 쉽다. 따라서 규범교육은 사랑의 분위기속에서 실시(實施)되어야 한다. 심정교육이 병행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규범(規範)없이 무턱대고 하는 사랑을 일반적으로 익애(溺愛)라고 한다. 그와 같은 사랑으로 자식을 대하면 자식은 마침내 분별력이 없어지고 부모나 교사를 경시(輕視)하게 된다. 부모의 사랑이나 교사의 사랑에는 어딘지 모르게 권위(權威)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사랑은 로고스를 터로 한 사랑이 아니면 안되며, 또 사랑은 적게 베풀고 규범만을 강조하면, 아동들은 구속감(拘束感)을 느껴서 부모나 교사를 싫어하게 된다. 사랑은 규범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그 위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자식이나 아동이 비록 규범을 한 두번 지키지 않았더라도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랑과 규범(規範)은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원만하고(둥글고) 규범은 직선적(直線的)이기 때문에 사랑과 규범이 통일된 인간은 원(圓)과 직선(直線)을 통일적으로 지닌 인격자가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수용(受容)하려 하지만, 규범은 엄하게 규제(規制)하고자 하기 때문에 규범교육은 심정교육과 통일되어야 한다. 즉 가정과 학교내에 사랑의 분위기가 충만된 가운데서 아동의 규범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규범 때문에 사랑이 냉각되면 그 규범은 형식화(形式化)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자란 가장 원만하면서도 엄격한 면을 갖춘 사람, 즉 양면성(兩面性)을 통일적으로 구비한 사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인격을 가진 인간은 어떤 때는 대단히 엄하고, 또 어느 때는 매우 온화(溫和)하며, 때와 장소에 따라 언제든지 어울리는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3) 주관교육(主管敎育)(지식교육(知識敎育), 기술교육(技術敎育), 체육(體育))

 

   1) 주관성(主管性)완성(完成)을 위한 교육

 

마지막으로 주관교육은 주관성완성을 위한 교육이다. 주관성완성을 위해서는, 먼저 주관의 대상에 대한 정보(情報), 즉 지식(知識)을 습득(習得)해야 하는 바, 이것을 위해서 첫째로 지식교육(知識敎育; 知育)이 필요하다. 다음은 대상을 주관하는데 필요한 창조성을 개발하기 위해서 기술을 습득(習得)하는 교육도 필요하다. 이러한 교육이 기술교육(技術敎育; 技育)이다. 그리고 주관(主管)을 잘 하려면 주관의 주체인 인간은 체력을 증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위한 교육이 체육(體育)이다. 이상(以上)의 지육(知育), 기육(技育), 체육(體育)을 합해서 주관교육(主管敎育)이라고 한다. 한편 지육(知育)에 있어서 주관에 필요한 지식과 학문은 주관(主管)의 대상의 영역(領域)에 따라서 자연과학을 위시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광범위한 分野에 걸치게 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분야 등의 활동도 모두 만물주관의 개념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기육(技育)에 있어서의 기술은 만물주관의 직접적인 수법(手法)으로서 주관교육의 중심이 되며, 체육(體育)에 있어서의 체위(體位)의 향상과 체력의 증진도 만물주관에 긴요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기술교육(技術敎育)이나 체육에도 다시 세분된 전문분야가 있다. 그리고 예술에 관한 교육, 즉 예능교육(藝能敎育)도 일종의 기술교육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주관교육은 창조성을 발휘하기 위한 수단 배우는 것이다. 창조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으로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천적(先天的)인 가능성으로서 구비하고 있지만 이것을 현실적으로 발휘(發揮)하기 위해서는 주관교육이 필요하다.

 

   2) 창조성(創造性)의 개발과 2단구조(構造)의 형성

 

창조성의 개발이란, 요컨대 하나님의 창조의 2단구조(構造)를 본받아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을 증진시키고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숙련도를 높인다는 뜻이다.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이란 로고스의 형성 능력, 즉 구상(構想)의 능력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교육(知識敎育)을 통하여 지식을 많이 獲得하여 내적형상(觀念, 槪念) 등)의 내용을 질적, 양적으로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얻은 지식(情報)이 많을수록 구상이 풍부(豊富)해진다. 로고스를 형성(구상(構想))한다는 것은 소위 아이디어의 개발을 뜻하며, 산업(産業)에 있어서의 기술혁신(innovation)도 부단(不斷)한 로고스형성(구상(構想))의 반복(反復)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다음에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을 양성한다는 것은 일정한 구상에 따라 도구나 재료를 사용하여 구상을 실체화하는 능력을 높이는 것, 즉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 手技)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교육이 필요하다. 또 신체적 조건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체육에 의한 체력의 증진도 필요하다.

 

   3) 보편교육(普遍敎育)을 기반으로 한 주관교육(主管敎育)

 

주관교육은 심정교육 및 규범교육을 기반으로 하되 그것들과 병행하여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교육(知識敎育)이나 기술교육이나 체육은 심정(心情, 사랑)과 규범에 근거해야 비로소 건전한 것이 되고 창조성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은 전인류가 모두 공통적으로 받아야 할 교육이므로 보편교육(普遍敎育)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주관교육은 개인(個人)의 자질에 따라 배우는 영역으로서 어떤 사람은 자연과학(自然科學), 어떤 사람은 文學, 또 어떤 사람은 경제학을 전공하는 등 원칙적으로 개별교육(個別敎育)이 된다.

 

여기에서 보편교육(普遍敎育)과 개별교육(個別敎育)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은 정신적 교육, 즉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며, 주관교육은 만물을 주관하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교육(普遍敎育, 심정교육(心情敎育), 규범교육(規範敎育))과 개별교육(個別敎育, 주관교육(主管敎育))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병행하여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균형교육(均衡敎育; balanced education)이다(그림 5-2).

 

   

 

그리스시대나 중세(中世), 근세(近世)에도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사랑의 교육이 있었고, 윤리?도덕(道德)교육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것들이 거의 무시(無視)되기에 이르렀으며, 교육은 거의 전부가 지식편중(知識偏重), 기술편중(技術偏重)의 소위 불균형교육(不均衡敎育)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인간성의 건전한 성장이 지장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여기에 새로운 교육론이 나타나서 새로운 차원에서 참된 사랑의 교육 특히 윤리?도덕교육을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 지식교육(知識敎育)과 기술교육(技術敎育)이 행해져야 하며 이러한 균형교육(均衡敎育)이 시행될 때 비로소 과학기술(科學技術)이 보다 선한 방향으로 지향(指向)해 나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공해문제(公害問題)나 자연의 파괴 등의 문제도 자연히 해결되어 갈 것이며 교사들도 이와 같은 교육을 통하여 교사로서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부언(附言)하거니와 교육의 원점(原點)은 가정교육(家庭敎育)에 있다. 가정교육이 연장, 확대, 발전한 것이 학교교육이다. 따라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이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교육으로서의 심정교육(心情敎育)과 규범교육(規範敎育)이 제대로 시행(施行)되기 어렵게 되며, 따라서 교육의 통일성은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三. 피교육자(被敎育者)의 이상상(理想像)

 

역사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여러 교육론이 발표되었으며, 또한 각자의 교육이념(敎育理念)에 의해서 양육하려는 나름대로의 인간상(像)이 있었다. 통일교육론에 있어서도 역시 교육에 의해서 양성(養成)해 내려는 이상적(理想的) 인간상이 있다. 통일사상의 교육론에서 규정하는 피교육자의 이상상은, 첫째 인격자(人格者), 둘째 선민(善民), 셋째 천재(天才)이다. 이것은 각각 심정교육, 규범교육, 주관교육에 대응하는 이상상(理想像)이다. 따라서 교육을 이상적 인간상(像)이라는 면에서 볼 때, 심정교육은 인격자교육(人格者敎育), 규범교육(規範敎育)은 선민교육(善民敎育), 주관교육(主管敎育)은 천재교육(天才敎育)이라고 할 수 있다.

 

  (1) 인격(人格)者 교육(敎育)

 

인격자(人格者)란, 심정교육에 의해서 형성되는 인간상이다. 따라서 인격자 교육은 피교육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여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천하도록 지도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인격자가 되게 하는 교육이다. 심정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랑의 원천(源泉)이며, 인격의 핵심(核心)이다. 심정(사랑)이 결여(缺如)되면 아무리 지식(知識)을 많이 가진 자라 해도 또 아무리 체력이 좋고 막강한 권력(權力)을 가진 자라 해도 인격자가 될 수는 없다. 세속적(世俗的)인 개념(槪念)으로서의 인격이란 일정한 덕성(德性)과 지식(知識)과 건강(健康)을 갖춘 인간을 말하지만, 통일사상에 있어서의 인격자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면 이상적(理想的)인 인격자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심정(心情,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 균형적으로 발달한 전인적 인격(全人的 品格)을 지닌 완성한 인간을 말한다. 인격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면서 살기 때문에 만인(萬人)과 만물(萬物, 자연)에 대하여 언제나 참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충효(忠孝)의 정성으로 그 슬픔과 고통을 위로해 드리며,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는 공적인 적개심, 즉 공분심을 지니면서도 원수까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 참사랑을 이어받아서 눈물을 머금고 그 원수를 용서한다.

 

평소에는 항상 온유겸손의 덕(德)과 온정이 넘치는 자세를 갖추고 종적 횡적 가치관을 실천한다. 법도(法道)와 사랑의 실천자이므로 타인(他人)에 대해서는 가장 부드러우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가장 엄격하다. 對人관계(關係)에 있어서는 사랑과 법도의 통일을 생활화한다. 법도 없는 사랑은 아동들을 懦弱(나약)하게 하며, 사랑없는 법도는 구속감(拘束感)만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심정교육에 의해서 형성되는 인격자의 모습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격자란 만인(萬人)과 만물(萬物, 자연)에 대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2) 선민교육(善民敎育)

 

선민(善民)이란 성품이 선(善)한 국민이라는 뜻으로서 규범교육에 의해서 형성되는 인간의 이상상(理想像)이다. 규범교육은 보통 학교에서 행해지지만 그 기반은 가정에 있다. 가정은 우주질서의 축소체(縮小體)로서 사회, 국가, 세계는 가정의 질서체계를 확대한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규범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사회, 국가, 세계에서의 규범생활을 잘 지킬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람은 선(善)한 가정인 이면서 선한 사회인이고, 선한 국가인이면서, 선한 세계인이 되는 것이다. 즉 규범교육을 통해서 선한 가정인이 되면 사회, 국가, 세계 등 어느 장소에 처하더라도 그때그때의 규범에 맞게 행동하게 된다.

 

또한 지상에서 선민(善民)으로서 생활하면 영계(靈界)에 가서도 마찬가지로 선(善)한 영계(靈界)人이 된다. 지상에서나 영계에서나 동일한 선(善)한 생활을 하게 되므로 이러한 선민(善民)은 바로 선(善)의 우주(天宙)人인 것이다. 가정, 사회, 국가, 세계, 천주에서의 선민(善民)의 생활이 바로 천국생활이다.

 

  (3) 천재교육(天才敎育)

 

주관교육(主管敎育)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의 이상상(理想像)은 천재(天才)이다. 천재(天才)란 창조성이 풍부한 사람을 말하는데, 인간은 본래 모두 천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거의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받은 창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天才'라는 말 자체가 하늘이 준 재능(才能)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받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능성(可能性)으로서의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附與)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천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주어진 창조성을 100% 발휘하면 그대로 천재가 된다. 그러나 창조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 교육이 바로 주관교육(主管敎育)이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주관교육은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을 기반으로 하고 병행된다. 즉 주관교육은 균형교육(均衡敎育)의 일환(一環)으로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창조성이 나타난다. 심정교육이나 규범교육이 불충분하거나, 또는 전혀 행하여지지 않는다면 창조성은 충분히 발휘되지 않는다. 예컨대 음악적인 창조성을 가진 아동이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부모가 항상 불화(不和)하고 그 아동을 냉대하거나 학대하는 일이 잦을 경우, 그 아이는 심정적(心情的)으로 상처를 받으면서 학교에 다니게 될 것이며, 피아노를 쳐도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감정이 불안(不安)한 상태에서 피아노를 치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동은 아무리 훌륭한 음악가적 창조성을 가능성으로서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창조성의 발로(發露)는 불화(不和)한 가정환경에 의해서 지장을 받게 된다.

 

인간에게는 개성이 주어져 있으므로 창조성에는 특성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적(音樂的)인 창조성이, 어떤 사람에게는 수학적(數學的)인 창조성이, 어떤 사람에게는 정치적(政治的)인 창조성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업적(事業的)인 창조성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인(各人)이 자기에게 주어진 창조성을 충분히 발휘하면, 음악의 천재가 되고, 수학(數學)의 천재가 되고, 정치의 천재가 되고, 기업경영의 천재가 될 것이다. 즉 각 사람은 개성(個性)에 맞는 특유한 천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창조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으며, 천재가 되기 어려운 여건 속에 머물게 되었다. 현실은 수만 명중(數萬名中) 한 사람이 천재(天才)가 될 수 있을 정도일 뿐, 대부분의 인간은 거의 범재(凡才)에 머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타락한 사회에서의 주관교육의 한 단면(斷面)이다.

 

천재교육(天才敎育)에 있어서는 영계의 협조를 얻을 수 있게 됨은 물론이다.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균형교육(均衡敎育)을 실시하게 되면, 선영(善靈)들이 영적으로 협조하기 때문에 아이의 천재적(天才的) 소질은 빠르게 발휘(發揮)되는 것이다.

 

               四. 종래의 교육관(敎育觀)

 

다음에는 종래의 대표적인 교육관의 요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종래의 교육관(敎育觀)과 통일교육론을 비교함으로써 통일교육론의 역사적인 의의(意義)가 보다 더 뚜렷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리스의 교육관(敎育觀) 플라톤의 敎育觀)

 

플라톤(Platon, 427~347 B.C.)에 의하면, 인간의 혼(魂)은 정욕적부분(情慾的部分), 기개적부분(氣槪的部分), 이성적부분(理性的部分)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정욕적부분의 덕(德)을 절제, 기개적부분의 덕(德)을 용기, 이성적부분의 덕(德)을 지혜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덕(德)을 조화시킬 때 나타나는 덕(德)을 정의(正義)라고 하였다. 국가에는 이 혼(魂)의 세 부분에 대응하는 세 가지 계급이 있다. 농공상(農?工?商)의 서민은 정욕적부분(情慾的部分)에 대응하는 하층계급(下層階級)이며, 군(軍)?관료(官僚)는 기개적부분(氣槪的部分)에 대응하는 중간계급이며, 철학자는 이성적부분(理性的部分)에 대응하는 상층계급(上層階級)이다.

 

그리고 선(善)의 이데아를 인식(認識)한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할 때, 비로소 이상국가(理想國家)가 실현된다고 하였다. 플라톤에 있어서의 교육의 당면 목적은 사람들을 이데아의 세계에로 이끄는 것이었다. 그것은 소수(少數)의 지배계급인 철학자를 양성하는 교육이었으며, 이상적 인간상은 `愛智者(철학자)'이며, 동시에 심신(心身)이 조화하고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4덕(四德)을 겸비한 `조화적인간(調和的人間)'이었다. 그리고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善)의 이데아가 실현된 이상국가(理想國家)를 이룩하는 것이다.

 

  (2) 중세(中世)의 기독교적 교육관(敎育觀)

 

그리스시대의 교육이 사회에 봉사하는 선(善)한 인간을 목표로 한데 대하여 중세(中世)의 기독교사회에 있어서는 기독교를 이상으로 하는 인간의 육성(育成)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종교적인간(宗敎的人間)이 이상적(理想的) 인간상(像)이었다. 특히 수도원에서 이러한 인간상(像)을 위한 엄격한 교육이 행해졌으며, 그것은 순결(純潔), 청결(淸貧), 복종(服從)을 덕으로 삼고 완전한 영적생활(靈的生活)을 영위하게 하는 교육이었다. 즉 교육의 목적은 기독교적 인간의 육성인 동시에 내세(來世)의 생활에 대한 준비였다.

 

  (3) 르네상스시대(時代)의 교육관(敎育觀)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오면서 복종(服從)이나 금욕(禁慾)을 덕으로 하는 신본주의(神本主義)의 세계관을 타파하고 인간성의 존중(尊重)을 중시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세계관이 출현했다. 인본주의의 교육관을 대표하는 사람은 에라스무스(D. Erasmus, 1466~1515)로서 그의 교육의 목적은 본성적(本性的)으로 자유인인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인간성의 완전한 발달을 이루게 하는 것이며, 개성적(個性的)인 풍부한 교양을 몸에 지니게 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문학, 미술, 과학 등의 인문적 교양(人文的 敎養)을 강조했으며 중세시대에 무시되었던 체육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르네상스시대의 이상적(理想的) 인간상(像)은 심신이 조화적으로 발달한 만능(萬能)의 교양인이었다. 에라스무스의, 인간 본성(本性)에의 복귀 사상은 코메니우스와 루소에로 계승(繼承)된다.

 

  (4) 코메니우스의 교육관(敎育觀)

 

코메니우스(J. A. Comenius, 1592~1670)에 있어서 인생(人生)의 구극(究極, 궁극)의 이상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내세(來世)에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며, 현세(現世)의 생활은 그 준비였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첫째, 모든 사물을 알고 둘째, 사물 및 자기를 통제할 줄 아는 자(者)가 되며 셋째,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지적교육(知的敎育), 도덕적교육(道德的敎育), 종교적교육(宗敎的敎育)의 3교육(三敎育)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것을 가르치는 것이 코메니우스의 교육론의 주제였기 때문에 그의 교육사상을 범지주의(汎知主義; pansophism)1)라고 불리운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교육이 달성(達成)되는 소질이 본래 인간에게 내재(內在)하고 있으며, 이 내재(內在)하는 소질(素質), 즉 자연(自然)을 이끌어 내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였다. 코메니우스는 또 교육은 본래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렇게 안될 경우에 부모를 대신해서 학교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이상적(理想的) 인간상(像)은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에 관한 참된 지식의 모든 것을 아는 범지인(汎知人)이며, 교육의 목적은 모든 것을 아는 실천적인 그리스도人을 육성하여 기독교에 의한 세계의 평화(平和)통일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5) 루소의 교육관(敎育觀)

 

계몽시대(啓蒙時代)의 인물(人物)인 루소(J. J. Rousseau, 1712~1778)는 에밀이라는 교육소설을 저술(著述)하고, (인간은) 만물을 만드는 者(창조주(創造主))의 손을 떠날 때는 모든 것이 선(善)하지만 인간의 손에 넘어오면서 모든 것이 악(惡)하게 된다.'2)고 하면서 자식을 자연 그대로 교육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본래 내재(內在)하는 자연의 선성(善性)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그대로의 모습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인간의 자연능력의 개발에 방해가 되는 요인-기성(旣成)의 체계적(體系的) 문화나 도덕적(道德的)?종교적(宗敎的) 관념의 주입(注入)-을 제거하면서 인간을 자연 그대로 성장시켜 간다는 것이 루소가 주장하는 교육이다. 그런데 현실의 타락한 사회에서 자연 그대로의 인간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적(理想的)인 공화제사회(共和制社會)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인간과 사회속의 시민이 양립(兩立)한다고 생각하고, 사회인(社會人) 교육(敎育)의 필연성도 주장했다.

 

루소의 교육관(敎育觀) 서의 이상적 인간상(像)은, 자연인(自然人)이며, 교육의 목적은 자연인을 육성하고, 자연인이 시민이 되는 이상적(理想的)인 공화제사회(共和制社會)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루소의 교육관은 칸트, 페스탈로치, 헤르바르트, 듀이 등으로 계승되어 갔다.

 

  (6) 칸트의 교육관(敎育觀)

 

칸트(I. Kant, 1724~1804)는 인간은 교육받지 않으면 안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3) 인간은 교육에 의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4)라고 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力說)하였다. 교육의 사명은 인간의 자연적 소질을 조화적으로 발달시켜 도덕률에 따르면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을 양성(養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루소의 영향이 있었다. 또 칸트는, 교육은 특정한 사회에 순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며, 일반적으로 인간 그 자체의 완성을 목표로 삼으며, 세계주의적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칸트는 인간의 본성(本性)에 근본(根本)악(惡)이 있음을 인정하였으며 악(惡)이란 도덕율(道德律)을 자기애(自己愛)에 종속(從屬)시킴으로 해서 성립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적인 전환(轉換, 回心)에 의해서 도덕률을 상위(上位)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으며, 의무(義務)가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도덕의 존중과 과학에의 신뢰(信賴) 그리고 하나님에의 경외(敬畏)가 칸트의 교육관?인간관의 특징이다. 칸트에 있어서 이상적 인간상은 선인(善人)이며, 교육의 목적은 세계주의적인 인간성의 완성이며, 구극적으로는 국제적인 영구 평화(永久 平和)의 확립이었다.

 

  (7) 페스탈로치의 교육관(敎育觀)

 

페스탈로치(J. H. Pestalozzi, 1741~1827)는 루소의 영향을 받아 자연(自然)에 입각(立脚)한 교육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에 내재(內在)하고 있는 고귀한 소질인 인간성을 해방하려고 하였다. 단순한 것, 순수한 것을 기초로 하면서 근본원리(根本原理)를 직감함으로써 인간은 선(善)한 행위를 하게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교육은 가정에서의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하면서 가정교육이 교육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페스탈로치는 인간성을 구성하는 데는 세 가지의 근본(根本)된 힘, 즉 정신력(精神力), 심정력(心情力), 기술력(技術力)에 있다고 보고, 이것은 각각 머리, 심장, 손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정신력의 교육이 지식의 교육이며, 심정력(心情力)의 교육이 도덕?종교교육이며, 기술력의 교육이 기술교육(체육을 포함)이라고 하였다. 이것들을 통일하는 내적인 힘이 사랑이다. 사랑은 심정력(心情力)의 기본이며, 도덕?종교교육의 추진력이다. 따라서 도덕?종교교육을 중심으로 이 세 가지 교육은 조화(調和)롭게 통일된다고 주장하였다.5)

 

페스탈로치가 생각한 이상적(理想的) 인간상은 세 가지의 근본된 힘이 조화(調和)롭게 발달한 인간, 즉 全人이었다. 그는 사랑과 신앙을 중심으로 한 전인격적교육(全人格的敎育)을 주장한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성을 도야(陶冶)하여 도덕적?종교적인 국가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p.379

 

  (8) 프뢰벨의 교육관(敎育觀)

 

페스탈로치를 신봉(信奉)하며 페스탈로치의 인간교육을 체계적(體系的)으로 구성한 사람이 프뢰벨(F. Frobel, 1782~1852)이다. 프뢰벨에 의하면, 자연과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통일되고,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 신성(神性)이 만물의 본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본성을 표현하고, 계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만물의 사명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에 내재(內在)하는 신성(神性)을 생활속에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며, 교육은 그런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적(神的)인 것의 표현이야말로 바로 모든 교육, 모든 생명의 목적인 동시에 노력(努力)의 목표이며 인간의 유일한 사명(使命)이다."6)

 

프뢰벨은 특히 유아교육(幼兒敎育)과 가정교육(家庭敎育)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아를 자연 그대로 성장시키는 장소는 가정이며, 교사는 부모이다라는 것이 프뢰벨이 주장하는 교육의 기본이다. 그리고, 페스탈로치와 마찬가지로 그도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했다. 또 가정교육을 보충하기 위하여 유치원(Kindergarten)이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유치원의 창립자가 되었다.

 

루소가 주장한 선성(善性)을 가진 자연인(自然人)은 페스탈로치에 이르러 고귀(高貴)한 인간성을 가진 全人이 되었는데, 프뢰벨에 있어서의 이상적 인간상은 신성(神性)을 가진 인간이 되었다.

 

  (9) 헤르바르트의 교육관(敎育觀)

 

헤르바르트(J. F. Herbart, 1776~1841 독일 관념론적 철학자, 교육학자)는 교육학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자 하였으며, 이 때 윤리學과 심리학(心理學)을 기초과학으로 채택하고자 시도하였다. 즉 윤리학을 기초로 하여 교육의 목적을 세우고, 심리학을 기초로 하여 교육의 방법을 수립코자 했던 것이다.

 

먼저, 헤르바르트는 칸트에 따라서 이상적 인간상을 선인(善人)으로 하고, 교육의 목적을 도덕적 품성의 도야(陶冶)라고 하였다. 그 다음 심리학(心理學)의 입장에서 교육의 방법을 추구하였다. 헤르바르트는 인간의 정신생활의 기초(基礎)를 이루는 것은 표상(表象)이며, 표상의 집합(集合)인 사상권(思想圈; Gedankenkreis)을 도야(陶冶)함으로써 도덕적 품성이 도야된다고 생각하였다. 즉 지식(知識)을 교수(敎授)하고 그것으로 도덕적 품성을 형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헤르바르트는 표상(表象)의 형성에 있어서 가르침 즉 교수(敎授; Unter\richt)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교수의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헤르바르트의 이론을 나중에 수정한 헤르바르트학파(學派)에 의하면, 교수의 과정은 예비(豫備), 제시(提示), 비교(比較), 총괄(總括), 응용(應用)의 五단계였다.

 

  (10) 듀이의 교육관(敎育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美國)에서는, 행동을 인생의 중심에 두는 프래그머티즘의 인생관이 생겨났다. 듀이(J. Dewey, 1859~1952)는 지성(知性)은 행동에 유용(有用)한 도구(道具)이며, 사고(思考)는 인간이 환경을 통제(統御)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발전한다고 주장하면서 도구주의(道具主義, instrumentalism)를 주창하였다.

 

듀이는 교육(敎育)은 성장하는 것과 전적으로 일체(一體)이며, 그것은 그 자체를 초월하는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7)라고 말하고, 미리 제시(提示)할 수 있는 교육의 목적을 부정하고, 성장(成長)으로서의 교육을 주장하였다. 교육이란 생활上의 통신(communication)에 의한 전달(transmission)이며,8) 체험(體驗)을 부단히 재조직(再組織, reorganization) 혹은 개조(改造, reconstruct -ion)하는 것"9)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달은 직접(直接), 성인(成人, 敎師)으로부터 아이들에게 行하는 것이 아니며 환경이라는 매개물(媒介物)을 통하여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교육에 의하여 사회는 발전해 가는 것이다. 듀이가 의도(意圖)한 것은 사회의 개조를 목표로 하는 실천적인 기술교육(技術敎育)이었다. 그의 교육관에 있어서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행동적(行動的) 인간이었다.

 

  (11) 공산주의(共産主義)의 교육관(敎育觀)

 

마르크스나 레닌은 자본주의사회의 교육을 다음과 같이 예리(銳利)하게 비판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부르주아지 사회의 교육정책은 우민화정책(愚民化政策)이며,10) 교사들은 기업가의 치부(致富)를 위해서 아동의 두뇌(頭腦)를 가공하는 생산노동자이다."11) 레닌에 의하면, 자본주의 교육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적인 지배의 도구(道具)"12)이며, 부르주아지를 위해서 순종적이며 약삭빠른 종복(從僕), 자본의 의지(意志)의 집행자, 자본의 노예(奴隷)"13)를 기르는 일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에 대하여 레닌은, 사회주의사회에 있어서 학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獨裁)의 도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14)고 주장하고, 교사는 노동자 대중에게 공산주의의 정신(精神)을 심는 군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15)고 하였다. p.382

 

공산주의교육의 목적은, 소련의 국민교육기본법(國民敎育基本法)(1973년)의 전문(前文)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소련방(蘇聯邦)의 국민교육의 목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상으로 길리움을 받고 소비에트법(法)과 사회주의 질서의 존중, 노동에 대한 공산주의적 태도의 정신으로 양육된 높은 교양을 가지고, 전면적으로 발달한 공산주의사회의 적극적(積極的)인 건설자의 육성(育成)에 있다."16) 즉, 교육의 목적은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에 헌신적(獻身的)인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 인간상은 전면적으로 발달한 인간"17)이다. p. 382

 

그러면 공산주의교육은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있을까. 먼저 개별적(個別的)인 기술교육에 반대하고 총합(總合)기술교육(技術敎育)(polytechnism)을 중시한다. 그리고 총합기술교육은 노동과 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회주의사회에 있어서 개인과 집단에는 이해의 대립이 없으며, 또 집단을 떠난 개인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집단주의교육(集團主義敎育)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총합기술교육을 체계화한 사람이 크루프스카야(N. K. Krupskaya, 1869~1939)이며, 집단주의교육(集團主義敎育)을 체계화한 사람이 마카렌코(A. S. Makarenko, 1888~1939)였다.

 

  (12)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교육관(敎育觀)

 

민주주의의 교육이념(敎育理念))이란, 민주주의사상에 기초를 둔 교육관으로서 민주주의교육관의 형성에는 듀이의 교육관이 20세기의 전반을 통하여 큰 역할(役割)을 다 하였다. 여기서는 제2차 세계대전(第二次 世界大戰) 후의 민주주의의 교육이념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미국 교육사절단보고서(美國 敎育使節團報告書)"18) 에서 인용코자 한다. 同 보고서는 먼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民主主義)란 종지(宗旨)가 아니며, 인간의 해방된 힘을 모든 다양성(多樣性)속에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유효(有效)한 수단이다. 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빛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멀리있는 저 편의 목표(目標)로서가 아니라 현존(現存)하는 모든 자유의 침투적(浸透的)인 정신으로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은 이러한 자유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의무는 권리가 서로 상살(相殺)하는 것을 방지한다. 나눠진 권리에 대해서든지 메워진 의무에 대해서든지 평등한 취급(取扱)의 음미(吟味)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다."19)

 

그리고, 민주주의교육(民主主義敎育)에 대하여 同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 생활에 적응하게 하는 교육제도(敎育制度)는 개인의 가치와 존엄과의 인식(認識)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의 능력과 적성에 따라서 교육의 기회(機會)가 주어지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교과(敎科)내용과 방법을 통하여 그것은 학문의 자유, 비판적인 능력의 훈련을 중요시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 다른 발달단계에 있는 생애(生涯)의 능력의 범위내에서 사실적 지식에 관한 광범(廣範)한 토론을 장려할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학교의 일이 미리 규정(規定)된 교과(敎科) 과정이나, 각교과(各敎科)에 관하여 하나만이 인정된 교과서에 한정(限定)되어서는(이들의 목적은) 수행될 수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교육의 성공은 획일성(劃一性)이나 표준화(標準化)에 의해서 측정될 수 없다. 교육은 개인을, 사회의 책임있는, 협력적인 일원(一員)이 되도록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20)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교육이념(敎育理念)은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준수(遵守)하면서, 그리고 자아(自我)의 인격완성을 지향(指向)하면서 타인(他人)의 인격을 존중(尊重)하며,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 다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 즉 민주적 시민(民主的 市民)을 양성(養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육의 목적은 인격을 완성시키고 사회의 책임있는 성원(成員)으로 육성(育成)하는데 있으며, 민주주의 교육의 이상적 인간상은 `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 인격자(人格者)'인 것이다.

 

           五. 통일사상에서 본 종래의 교육관(敎育觀)

 

그러면 종래의 교육론을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평가해 보자. 플라톤은 선(善)의 이데아를 인식(認識)한 철학자를 이상적 인간상이라 하고, 그와 같은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하면 이상국가(理想國家)가 실현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시대에 있어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철학자는 출현하지 않았고, 또 선(善)의 이데아는 국가(國家, 폴리스)에서 실현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헬레니즘시대에 이르러, 폴리스의 붕괴와 더불어 이데아의 사상도 붕괴되어 버렸다. 선(善)의 이데아사상(思想)이 막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는 한, 선(善)의 기준은 정해질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이상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중세(中世)의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도록 교육한다고 했으나 그러한 사랑은 아가페的인 사랑으로서 십자가상(十字架上)의 예수님의 희생(犧牲)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은 희생의 사랑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도대체 인간은 왜 사랑해야 하는가가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기독교의 교육관으로는 인간성에 눈뜬 근대인(近代人)들을, 확신(確信)을 가지고 인도(引導)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르네상스시대(時代)의 교육은 억압(抑壓)되어 왔던 인간성을 해방한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될 만하지만, 16세기 중엽부터는 고전(古典)을 학습하는 일에 국한(局限)되면서 교육은 형식화되어 갔다. 또 인간중심에 치우쳤기 때문에 피교육자는 종교적(宗敎的)인 도덕성을 점차 잃게 되었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인간에 내재(內在)하고 있는 소질(素質, 자연(自然))을 이끌어내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고 하였지만, 그 내재(內在)한다는 소질이 어떤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았다. 또 참된 지식을 얻으면 그것이 그대로 덕(德)과 신앙으로 연결된다고 하는 범지주의(汎知主義)에 문제가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참된 지식교육은 심정교육(心情敎育)과 규범교육(規範敎育)을 기반으로 할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가 주장한 세 가지 교육은 통일교육론의 심정교육, 규범교육, 주관교육에 통하는 바 있다고 볼 수 있다.

 

루소도 인간을 자연 그대로 성장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그가 말하는 인간의 `자연(自然)'도 애매하였다. 인간의 성질을 무조건 선(善)으로 규정한 데도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심정(心情, 사랑)을 중심으로 한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을 행하지 않는 한, 아무리 자연 그대로 기른다 하더라도 본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칸트는 도덕교육(道德敎育)에 중점을 두었으나 그의 도덕교육에는 확고한 기반이 없었다. 도덕(道德)의 기반이 되어야 할 하나님은 요청(要請)될 뿐인 존재(存在)에 불과해서 실존(實存)하고 있는지 없는지 애매했다. 또 칸트에 있어서는 개인적규범으로서의 도덕만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인간 상호간의 규범으로서의 윤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페스탈로치는 지식교육, 도덕과 종교교육, 기술교육의 세 가지가 사랑에 의해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통일사상에서 말하는 심정교육을 기반으로 한 규범교육, 주관교육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을 닮고 있다(페스탈로치의 지식교육과 기술교육은 통일사상의 주관교육에 해당하고, 도덕과 종교교육은 규범교육에 해당한다 하겠다). 또 전인격적(全人格的) 교육(敎育)이라는 생각과, 가정이 교육의 기반이라는 생각도 통일교육론과 일치한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이 3대축복(三大祝福)의 완성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또 도덕과 종교교육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에 관한 이해가 불충분(不充分)하였다. 그 때문에 페스탈로치의 교육이념(敎育理念)도 확고한 것이 되지는 못하였다.

 

페스탈로치의 교육론을 계승(繼承)한 프뢰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뢰벨은 이상적(理想的) 인간상을 신성(神性)을 가진 인간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닮도록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라고 하는 통일교육론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헤르바르트는 관념(觀念, 표상)과 그 상호관계가 감정이나 의지 등의 모든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근원(根源)이라고 생각하여 사상권(思想圈)을 도야함으로써 도덕적품성(道德的品性)이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상의 도야로 도덕성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심정(心情,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선(善)의 가치를 추구하고 규범(規範)을 지킴으로써 도덕성이 실현되는 것이다.

 

듀이는 교육(敎育)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성장과 진보를 강조했다. 그런데 목적을 명확히 설정하지 않은 채 성장이나 진보를 주장한다고 해서 인간 본성의 소외나 사회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실제로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오늘날 듀이의 교육방법을 실시(實施)해 온 바로 그 미국사회에서, 많은 사회적인 병폐가 나타나고 있다. 듀이가 목표로 한 실천적(實踐的)인 기술교육은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 한(限), 건전한 인간과 사회를 형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主義)가 말하는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지배의 도구(道具)로서의 자본주의교육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도구(道具)로서의 사회주의교육은, 계급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사회를 본 교육관에 불과하다.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이나 유물사관(唯物史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의 터 위에 세워진 공산주의 교육관도 잘못된 것이다. 또,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전면적(全面的)으로 발달한 인간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 균형적으로 발달한 인격(人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노동도 할 수 있도록 노동자의 노동의 능력을 전면적(全面的)으로 발달시킨다는 의미이다. 또 노동과 결부된 총합(總合)기술교육(技術敎育)을 주장했지만 노동에 중점을 두고 있는 교육이기 때문에 총합기술교육(總合技術敎育)은 단순한 노동기능의 교육이 되어버렸다. 또 집단주의교육(集團主義敎育)은 개성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억압(抑壓)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끝으로 민주주의의 교육은 개인의 가치나 존엄성을 기본(基本)으로 한 것이긴 하지만, 개인의 권리를 존중한 나머지 개인주의(個人主義), 이기주의(利己主義)의 풍조를 낳았다. 또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입각하여 인간성을 주장함으로써 가치관이 상대화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의 혼란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터로 한 심정교육(心情敎育)과 규범교육(規範敎育)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이 확고한 것이 되며, 사회의 조화(調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제6장 윤리론 (第6章 倫 理 論)

 

Ethics

 

오늘날의 세계를 볼 때, 가장 개탄(慨嘆)스러운 것은 도덕관념(道德觀念)이나 윤리관념(倫理觀念)이 급속히 소멸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반도덕적(反道德的)인 사고방식이 급속히 증대하고 있으며,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가고 있다. 그 결과 각종 사회범죄(社會犯罪)가 속출하고 있으며,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는 대혼란(大混亂)의 와중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혼란의 원인의 하나는 인간의 의식이 물질위주의 방향으로 흐른 데에 있고, 또 하나는 종래의 가치관(價値觀), 윤리관의 붕괴에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사회적인 대혼란을 수습하고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여기에 새로운 윤리관(倫理觀)이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미래사회(未來社會)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윤리론(倫理論)이 요청된다. 미래사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진(眞)-선(善)-미(美)의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진실과 예술과 윤리가 혼연일체화(渾然一體化)가 된 영원한 사랑의 세계이다. 따라서 미래사회는 진실사회(眞實社會)인 동시에 예술사회(藝術社會)요 윤리사회(社會)이다. 그 중 윤리사회는 선(善)을 실천하는 선(善)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이다. 선(善)을 실천하는 선(善)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윤리론(倫理論)이 수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기존 가치관의 결점을 보완하면서 새로운 윤리관을 대안(代案)으로 제시하여 혼란된 윤리관을 바로잡는 동시에 새로운 윤리생활을 보여줄 수 있는 이론체계(理論體系)가 요구된다.

 

미래의 윤리사회(倫理社會)는 또한 전인류(全人類)가 하나님을 부모로 모신 가운데 서로 형제자매(兄弟姉妹)의 관계를 맺고 사는 사회이며,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사회이다. 그러한 사회속에서 사랑의 실천방안이 되는 것이 윤리론(倫理論)이다. 한편 인간은 지상세계(地上世界)와 영계(靈界)의 화동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미래의 윤리사회는 지상세계 뿐만 아니라 영계(靈界)까지 포함하는 윤리사회이다. 따라서 새로운 윤리론이 제시하는 규범(規範)은, 지상세계의 혼란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영계의 혼란까지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역할(役割)을 다 하고자 세워진 것이 본(本) 통일윤리론(倫理論)이다.

 

            一. 통일윤리론(倫理論)의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

 

통일원리 가운데 본(本) 윤리론(倫理論)의 성립의 근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참사랑이며, 둘째는 가정적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의 이론이며, 셋째는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의 개념이다. 이에 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의 첫번째는 하나님의 참사랑이다. 참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그 사랑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이 완성한 후, 하나님의 심정과 함께 사랑을 상속(相續)해서 일상생활을 통하여 그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眞)-선(善)-미(美)의 가치의 터전이 된다. 진(眞)-선(善)-미(美)에 각각 대응하는 학문인 교육론(敎育論), 윤리론(倫理論), 예술론(藝術論)의 성립의 근거도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특히 윤리론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사랑은 윤리론(倫理論)의 성립에 있어서 궁극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원리적(原理的) 근거의 두번째는 가정적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이다. 하나님의 참사랑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가정적사위기대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현실적으로는 가정적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하나님-父=母-子女의 4위치)를 통하여 나뉘어져서 분성적(分性的) 사랑(또는 分性愛), 즉 부모(父母)의 사랑, 부부(夫婦)의 사랑, 子女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을 중심하고 볼 때, 부모나 부부나 자녀는 모두 하나님의 대상이 된다. 부모는 하나님의 제1대상(第一對象)이 되고, 부부는 하나님의 제2대상(第二對象)이 되고, 자녀는 하나님의 제3대상(第三對象)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중심한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합쳐서 삼대상(三對象)사랑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본(本) 윤리론(倫理論)은 가정내의 4위치를 중심한 사랑의 관계를 전적으로 다루게 된다.

 

원리적(原理的) 근거의 세번째는 삼대상(三對象)목적이다. 완성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부부(夫婦)가 되어 서로 사랑할 때,1) 하나님을 닮은 자녀가 출생한다. 그 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父(夫, 남편)와 母(婦, 아내), 그리고 자녀라는 네 위치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가정적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가 형성되는데, 이 때 조부모(祖父母)가 있을 때는 그 조부모가 가정에서 하나님을 대신한 위치에 서게 되어서 祖부모(父母)를 중심으로 父와 母 그리고 자녀에 의한 가정적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가 형성된다. p.391

 

그런데 조부모(祖父母) 중심의 가정적사위기대에 있어서 각각의 위치(位置)는 세 개의 대상(對象)을 대하게 된다. 즉 조부모(祖父母)는 父-母-子女를 그 대상으로 대하고, 父는 조부모(祖父母)-母(妻)-자녀를 그 대상으로 대한다. 그리고 母는 조부모(祖父母)-父(夫)-子女를, 子女는 조부모-父-母를 각각 그 대상(對象)으로 대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가정적사위기대의 네 위치는 각각 삼대상(三對象)을 대하게 되는데 가정에 있어서 인간의 피조목적은 이 3대상을 대함으로써(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때의 창조목적(피조목적)을 삼대상(三對象)목적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사위기대(四位基臺)의 각 위치에서 3대상을 사랑할 때 3대상목적이 달성되게 된다.2)

 

삼대상(三對象)목적의 실현은 세 대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코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絶對的)인 것이지만 가정적사위기대에 있어서의 위치와 방향성에 따라 분성화(分性化, 또는 분리(分離))되어 분성적(分性的) 사랑(分離愛)으로 나타난다. 분성적(分性的) 사랑은 기본적으로 부모(父母)의 사랑, 부부(夫婦)의 사랑, 子女의 사랑이라는 세 종류의 사랑, 즉 삼대상(三對象) 사랑인 것이다(이미 말한 바와 같이 3대상이란 하나님의 제1대상(第一對象)인 부모와 제2대상(第二對象)인 부부와 제3대상(第三對象)인 자녀를 뜻한다. p.392

 

부모의 사랑은 부모로부터 자녀로 향하는 하향성(下向性)의 사랑(내리사랑)이고, 부부의 사랑은 부부간의 횡적(橫的)인 사랑(가로사랑)이며, 자녀의 사랑은 자녀에게서 부모로 향하는 상향성(上向性)의 사랑(올리사랑)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분성적(分性的) 사랑이 하나님의 삼대상(三對象)의 사랑인 동시에 가정적사위기대의 4위치에서 각각 삼대상(三對象)을 상대로 하는 사랑이기도 하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에는 12개의 방향성(方向性)이 있다. 그 결과 가정애(家庭愛)에는 색조(色調)가 다른 여러가지의 사랑이 있게 되며, 각각의 사랑의 실현에 있어서 여기에 걸맞는 덕목(德目)이 필요하게 된다.

 

이상을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이란 인간이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며 가정적사위기대를 완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윤리론(倫理論)의 목적은 가정적사위기대를 기반으로 하는 사랑의 덕목(德目)을 다루는데 있다.

 

                  二. 윤리와 도덕(道德)

 

  (1) 윤리와 도덕(道德)의 정의(定義)

 

가정에 있어서 각 구성원은 개인(個人), 즉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로서 내부에 마음과 몸, 또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수수작용에 의한 사위기대(四位基臺)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이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이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 상호간에도 수수작용에 의한 4위기대가 형성된다. 이것이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이다.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내적사위기대가 형성될 때, 생심(生心)은 주체, 육심(肉心)은 대상(對象)이 된다. 그러나 인간 조상의 타락이후 인간의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관계는 역전(逆轉)되었다. 즉 육심이 주체가 되어서 생심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육심의 목표인 의(衣)-식(食)-주(住)의 생활과 性생활이 선차적(先次的)인 것이 되었고, 생심(生心)에 의한 가치의 생활은 2차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생심과 육심의 관계를 복원(復元)하는 노력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온 것이다. 여러 성현들에 의해서 강조되어온 수도생활(修道生活), 인격도야(人格陶冶)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완성을 위한 노력이지만, 한편 가정의 완성 즉 가정적사위기대의 완성을 위한 노력도 역사를 통하여 꾸준히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여기에서 윤리와 도덕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려보자. 윤리란 가정에서 가정의 구성원이 지켜야 할 행위의 규범(規範)이다. 즉 가정을 기반으로한 인간행위의 규범이요, 가정에 있어서 사랑 중심의 수수법(授受法)을 따르려는 인간행위의 규범이며, 가정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를 형성할 때의 규범이다. 따라서 윤리는 연체(聯體)로서의 규범인 동시에 제2축복(第二祝福) 즉, 가정완성을 위한 규범이기도 하다.

 

도덕(道德)이란 개인이 지켜야 할 행위의 규범이다. 즉 개인생활에 있어서의 인간행위의 규범이요, 내적으로는 개인의 내면생활에 있어서 심정(心情) 中心의 수수법을 따르려는 행위의 규범이며, 가정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를 형성할 때의 규범이다. 따라서 도덕은 개성진리체로서의 규범인 동시에 제1축복(第一祝福) 즉 개성완성을 위한 규범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주관적(主觀的) 규범(規範)인 반면에 윤리는 객관적(客觀的) 규범(規範)임을 알 수 있다.

 

  (2) 윤리와 질서(秩序)

 

가정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의 일정한 위치에서 일정한 목표를 향한 행위-삼대상(三對象)(三方向)으로 향하는 행위-의 규범이 윤리임을 이미 밝혔다. 이때의 행위의 내용은 물론 사랑이다. 따라서 윤리는 바로 사랑의 위치, 즉 질서 위에서 성립한다. 다시 말하면 윤리는 질서를 떠나서 세워질 수가 없다. 그런데 오늘날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간의 질서, 부부간의 질서, 형제자매간의 질서가 경시(輕視) 내지 무시(無視)되고 가정에서의 질서가 흐트러지고 있는데, 이것이 사회질서 붕괴의 주요(主要)한 원인이 되고 있다. 본래 사회의 질서체계(秩序體系)의 근거지여야 할 가정이 오늘날에는 질서 붕괴(秩序 崩壞)의 시발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랑의 질서는 性의 질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윤리는 사랑의 질서인 동시에 性의 질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회 풍조는 性의 질서가 심히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性의 질서란 성적결합(性的結合)의 질서, 즉 남녀(男女) 쌍(雙)의 질서를 말한다. 부모의 쌍(雙)과 자식의 쌍(雙) 사이에 질서가 있음은 물론이요, 兄의 부부와 동생의 부부 사이에도 질서가 있어야 한다. 즉 동생이 형수(兄嫂)를 성적(性的)으로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이요, 형이 제수(弟嫂)를 성적(性的)으로 사랑해도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남녀(男女)의 불윤(不倫)한 性관계는 더욱 더 가속화(加速化)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적질서(性的秩序)의 파괴를 가져온 원인중의 하나는 기존(旣存) 가치관(價値觀)의 붕괴로 인해서 형성된 동물적 인간관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관능적(官能的) 性문화를 조장하는 일부 매스컴 때문이다. 이 때문에 性의 신성성(神聖性)은 사라지게 되었고, 性의 퇴폐현상은 오늘날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해와가 천사장(天使長)의 유혹에 의해 천사장(天使長)과 불윤(不倫)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랑의 질서와 동시에 性의 질서가 파괴된 상태와 흡사한 것이다. 가정을 본연(本然)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관(價値觀)이 요청되는데, 그것은 사랑의 질서와 性의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면 안 된다. 통일윤리론(倫理論)이 제시된 이유(理由)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윤리-도덕(道德)과 천도(天道)

 

인간은 우주의 구성요소를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요, 우주를 축소한 소우주(小宇宙)인 것같이 가정은 우주의 질서체계를 축소한 소우주(小宇宙) 체계(體系)이다. 따라서 가정의 규범, 즉 윤리는 우주의 법칙(이법(理法))이 축소되어 나타난 것이다. 즉 가정윤리는 바로 천도(天道)이다.

 

우주(宇宙)는 예컨대 태양계의 경우, 달-지구(地球)-태양(太陽)-은하계(銀河系)의 중심-우주의 중심이라는 종적질서(縱的秩序)와, 태양계에 있어서 태양을 중심으로 한 수성(水星)-금성(金星)-지구(地球)-화성(火星)-목성(木星)-토성(土星)-천왕성(天王星)-해왕성(海王星)-명왕성(冥王星)의 횡적질서(橫的秩序)가 있는 것같이, 가정에도 손자(孫子)-자녀(子女)-부모(父母)-조부모(祖父母)-증조부모(曾祖父母)로 연결되는 종적질서(縱的秩序)와, 형제자매와 같은 횡적질서(橫的秩序)가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질서에 대응하는 것이 조부모(祖父母) 및 부모의 자녀에 대한 자애(慈愛), 자녀의 부모에 대한 효성(孝誠)?효행(孝行) 등의 종적(縱的)인 덕목이고, 부부의 화애(和愛), 형제(兄弟)의 우애(友愛), 자매애(姉妹愛)와 같은 횡적(橫的)인 덕목들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윤리는 연체(聯體)로서 가족 상호간에 지켜야 하는 규범인데 대하여, 도덕(道德)은 가정에 있어서 개인이 단독으로 즉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로서 지켜야 하는 규범이다. 따라서 도덕도 천도(天道) 즉 우주의 법칙을 닮은 것이다.

 

우주내의 모든 천체(天體)(개체(個體))는 일정한 위치에서 반드시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를 형성하고 있다. 즉 그 내부의 주체와 대상간에 반드시 원만한 수수작용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개인으로서 일정한 위치에서 반드시 내적으로 생심(生心, 主體)과 육심(肉心, 對象) 間에 원만한 수수작용이 벌어짐으로써 내적사위기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내적사위기대를 형성할 때의 행위의 규범이 도덕이다. 따라서 도덕(道德)도 천도(天道)인 것이다. 이 내적인 수수작용은 하나님의 심정(心情) 또는 창조목적을 중심한 수수작용임은 물론이다. 도덕상의 덕목(德目)은 순진(純眞), 정직(正直), 정의(正義), 절제(節制), 용기(勇氣), 지혜(智慧), 극기(克己), 인내(忍耐), 자립(自立), 자조(自助), 공정(公正), 권면(勤勉), 청결(淸潔) 등이 있다.

 

  (4) 가정(家庭)윤리의 확대적용(擴大適用)으로서의 사회(社會)윤리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는 가정의 가족관계가 그대로 확대된 것이다. 예컨대 연장자(年長者)와 연소자(年少者)가 있어서, 그 연령(年齡)의 차가 30세 또는 그 이상(以上)일 경우, 연장자(年長者)는 연소자(年少者)를 자녀와 같이 사랑하고, 연소자(年少者)는 연장자(年長者)를 부모와 같이 존경해야 한다. 또 그 연령(年齡)의 차이가 10세 이내일 경우, 연장자(年長者)는 연소자(年少者)를 동생과 같이 사랑하고 연소자(年少者)는 연장자(年長者)를 형이나 누님과 같이 존경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가정윤리는 모든 윤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가정윤리를 사회에 적용하면 사회윤리가 되고, 기업에 적용하면 기업윤리가 되고, 국가에 적용하면 국가윤리가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덕목(德目) 또는 가치관(價値觀)이 성립하게 된다.

 

국가에 있어서 대통령이나 정부는 부모의 입장에서 국민을 사랑하고 국민에게 선(善)한 정치를 펴야 하며, 국민은 대통령이나 정부를 부모(父母)처럼 존경해야 한다. 또 학교에서 스승은 부모와 같은 입장에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학생을 가르치고, 학생은 스승을 부모처럼 존경해야 한다. 또한 사회에서 연장자(年長者)는 연소자(年少者)를 애호하고, 연소자(年少者)는 연장자(年長者)를 존경하지 않으면 안되며, 회사에서 상사(上司)는 부하(部下)를 잘 지도하고, 부하는 상사(上司)를 잘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들은 가정에 있어서의 종적(縱的)인 가치관(덕목(德目))이 확대 적용된 것이다.

 

가정에 있어서 형제자매간의 사랑의 범위가 동료, 이웃, 사회, 국가, 세계에로 확대될 때 그 사랑은 화해(和解), 관용(寬容), 의리(義理), 신의(信義), 예의(禮義), 겸양(謙讓), 연민(憐憫), 협조(協助), 봉사(奉仕), 동정(同情) 등의 횡적인 덕목(德目)(가치관)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대혼란상태(大混亂狀態)에 빠져 있으며 좀처럼 수습(收拾)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혼란상태가 계속되는 근본원인은 사회윤리, 국가윤리의 기반이 되는 가정윤리가 쇠퇴(衰退)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혼란상태(混亂狀態)에 빠진 오늘의 사회를 구하는 길은 새로운 가정윤리를 확립하는 것, 즉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가정을 파탄에서 구하는 동시에 세계를 혼란에서 구제(救濟)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가 형성된 이래 약 2백여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항상 문제가 된 것이 계급적 착취와 억압의 문제였으며, 노사간(勞使間)의 분쟁의 문제였다.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출현한 것도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폭력혁명(暴力革命)에 의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 결과는 완전한 실패로 나타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자체가 지상에서 소멸(消滅)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착취(搾取)와 억압(抑壓)의 문제나, 노사(勞使)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가정윤리에 입각한 기업(企業)윤리가 확립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통일윤리론(倫理論)의 입장이다.

 

                  三. 질서(秩序)와 평등(平等)

 

  (1) 오늘날까지의 질서(秩序)와 평등(平等)

 

근대(近代) 이후 민주주의는 중세(中世) 이래의 신분제도와 그 제도에 수반된 여러 특권들을 폐지(廢止)하고, 법(法) 앞에서의 평등과 정치참여에 있어서의 평등(平等), 즉 보통선거 제도를 실현했다. 그러나 법 앞에서의 평등은 실현되었지만 경제적인 평등은 실현되지 않았으며, 계층간의 빈부(빈부(貧富))의 차(差)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다. 이 빈부(貧富)의 격차가 해소되지 않는 한, 법(法) 앞에 평등이 실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명목상(名目上)의 평등일 뿐, 실질적인 평등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사유재산(私有財産)의 폐지와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革命) 후 70여년간 공산주의를 실시해 본 결과는 새로운 특권계급(特權階級)의 출현으로 인한 새로운 형태의 빈부(貧富)의 격차가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역사개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평등을 희구해 왔지만 아직도 참다운 평등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서 질서와 평등의 문제가 제기된다. 모든 인간이 권리에 있어서 완전히 평등하다면, 통치자(統治者)와 피통치자(被統治者)라는 권리의 차를 인정하지 않게 되어, 사회는 무정부의 무질서 상태가 되어 버릴 것이다. 또 한편 질서를 중시(重視)하면 평등이 손상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본심(本心)이 희구하는 참다운 평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질서와 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의 평등은 경제적 평등이 아니라, 권리평등(權利平等)을 뜻한다. 이 권리평등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의 하나가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의미의 평등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질서의 개념과 상반관계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즉 평등을 강조하다 보면 질서가 무시되기 쉽고,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다 보면 평등이 무시되기 쉽다. 이것이 오늘까지의 질서(秩序)와 평등(平等)에 관한 일반적 견해였다.

 

  (2) 원리적(原理的)인 질서(秩序)와 평등(平等)

 

통일사상에서 볼 때, 원리적(原理的)인 평등은 사랑의 평등이며, 인격의 평등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진심으로 희구하는 평등이란,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 아래에서의 자녀의 평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양의 빛이 만물을 평등하게 비치는 것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만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평등이다. 따라서 원리적인 평등이란 주체인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대상인 인간이 마음대로 취득(取得)할 수 있는 그러한 평등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정에서 질서를 통하여 분성적(分性的)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랑의 평등은 질서를 통한 평등이다. 질서를 통한 사랑의 평등이란 사랑의 충만도(充滿度)의 평등이다. 즉 모든 개인의 위치와 개성에 맞도록 사랑이 충만될 때 주어지는 평등이 사랑의 평등이다. 사랑의 충만이란 만족이며, 기쁨이며, 감사이다. 따라서 원리적인 평등은 만족의 평등이며, 기쁨의 평등이며, 감사의 평등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은 인간이 완전한 대상의식(對象意識) -하나님을 시봉(侍奉)하는 마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 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느껴지게 된다. 대상의식을 가지지 않는 한,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 커도 충족감을 느낄 수 없고,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권리평등(權利平等)의 권리는 프랑스혁명 때의 로크의 자연권(自然權)(생명, 자유, 재산을 지키기 위한 권리)을 위시해서 인권선언(人權宣言)(1789), 미국의 독립선언서(1776),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1948)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은 자연권을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직위상의 권리와 직위상의 평등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직위에는 반드시 직책(職責)과 의무(義務)가 부여됨과 동시에 각 직위에 부합하는 권리가 주어지기 때문에 직위상의 권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평등일 수가 없다. 그러나 본연의 세계에 있어서는 이러한 직위상의 권리의 차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차별을 초월한 평등의 측면이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평등, 인격의 평등, 만족의 평등인 것이다.

 

여기서 남녀평등에 관해서 살펴보자. 역사 개시 이래 여성(女性)은 남성(男性)에 비해서 지위, 권리, 기회라는 측면에서 항상 뒤떨어져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남성의 지배를 받아 왔다. 이 사실을 의식적(意識的)으로 자각하고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여성 해방운동이라는 이름하에 태동(胎動)하기 시작한 이 운동은 프랑스혁명 때부터였다.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이 자연권(自然權;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의 평등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혁명과 함께 여성들의 자연권의 평등에 대한 주장은 지극히 합리적(合理的)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운동이 그 후, 여러 가지의 사회운동과 표리일체(表裏一體)가 되어서 꾸준히 전개되어 오다가 드디어 제2차 세계대전(第二次 世界大戰) 후부터는 여성 해방 운동의 요구조건들이 전면적(全面的)으로 자유국가들의 법률에 반영되기에 이르렀다. 그 주요한 것이 바로 지위(地位)의 평등, 권리의 평등, 기회의 평등이었다. 이러한 여성의 평등의 요구를 법률이 보장한 것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여성 해방 문제가 새롭게 대두(擡頭)하였다. 남녀평등은 법률상으로만 보장되었을 뿐, 실제에 있어서의 남녀평등은 부분적(部分的)으로만 실시될 뿐만 아니라 많은 영역에서는 여전히 남녀불평등 관계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법률적으로 남녀평등을 보장한 결과는 남녀가 권리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사고방식이 확산되면서 부부사이의 가정불화는 다반사가 되기에 이르렀으며, 그 때문에 갖가지의 비극(悲劇)과 가정파탄이 속출(續出)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권리에 관한 한, 기본적으로 완전한 남녀평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리란 사명(使命)을 수행하기 위한 요건이기 때문이다. 생리적으로 남녀는 사명이 다르다.

 

남자의 근골(筋骨)의 발달, 둔부(臀部)의 협소(狹小)와 벌어진 양 어깨 등은 남자의 사명이 대외적인 억센 활동에 있음을 보이는 것이요, 여자의 연약한 근골(筋骨), 둔부(臀部)와 유방의 발달, 양 어깨의 협소(狹小) 등은 여자의 사명이 가정에서의 생산과 양육에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리적 조건을 무시하고 권리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남녀의 사명의 동일성(同一性)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자가 여자의 생산과 포유(哺乳)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여자도 남자의 역할인 억센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뱁새가 황새 걸음을 할 수 없고 황새가 뱁새 걸음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면 男女(夫婦) 사이에 평등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다. 남녀(夫婦)사이에도 평등이 필요한데 그것은 권리평등이 아니라 사랑의 평등(平等)이요, 인격(人格)의 평등이요, 기쁨의 평등인 것이다. 부부(夫婦)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주고 받을 때, 차별감이나 불평등감이 사라지고 동위권(同位圈)에 서 있음을 자각하게 됨과 동시에 충만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지위의 평등에 관해서 언급해 보자. 여성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지위(地位)를 누릴 수 있다. 여성으로서 학교 교장도 될 수 있고, 회사의 사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남녀의 동등권(權)의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학교나 회사는 가정의 확대형이기 때문에 가정에서 모성(母性)이 부성(父性)을 대신해서 가장(家長)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회사에서도 그 회사의 어머니격(格)으로서 사장이 될 수도 있고, 학교의 어머니격(格)으로서 학교의 교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세계 평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여성들이 도리어 앞장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가정에 있어서 평화의 주역(主役)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세계의 참된 평화를 위해서는 억센 공격적(攻擊的)인 일에 적합한 남성보다도, 체질적으로 평화의 일에 적합한 모성(母性; 여성)들이 앞장서는 것이 필요하기 조차한 것이다. 이상으로 남녀평등에 관한 원리적 견해를 밝혔다.

 

         四. 통일윤리론(倫理論)에서 본 종래의 윤리관

 

마지막으로 기존(旣存)의 윤리관 중에서, 근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칸트와 벤담의 윤리관을, 또 현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분석철학(分析哲學)과 프래그머티즘의 윤리관의 요점을 소개하고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그 내용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칸트

 

   1) 칸트의 윤리관

 

칸트(I. Kant, 1724~1804)는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에서 참다운 도덕률은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라라는 가언명법(假言命法; hypothetischer Imperativ)이어서는 안되며, 무조건적으로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정언명법(定言命法; kategorisher Imperativ)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컨대 훌륭한 사람으로 불려지기 위해서는 정직(正直)하라라는 조건부의 명법(命法)이 아니라, 정직(正直)하라라고 하는 무조건적인 명법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정언명법(定言命法)은 실천(實踐)이성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이 실천이성이 우리들의 의지에 명령하는 것이다(이와 같은 실천(實踐)이성을 입법자(立法者)라고 한다). 이 실천(實踐)이성의 명령을 받은 의지가 선의지(善意志)이다. 그리고 이 선의지가 행동을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p.403

 

칸트는 도덕의 근본법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즉 네 의지의 격율(格率)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하도록 행위하라가 그것이다.3) 여기서 격률(格率; Maxime)이란 개개인이 주관적으로 정하는 실천의 원칙(原則)을 말하는 것으로서 칸트에 의하면, 그와 같은 주관적인 원칙(즉 格率)이 보편성을 띤 것이 되도독 행동하라는 것이었다. 칸트는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모순(矛盾)이 없는 보편타당한 것을 선(善)으로, 그렇지 않는 것을 악(惡)으로 규정했다.

 

칸트는 인간 안에 있는 도덕률은 의무(義務)의 소리로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의무(義務)여, 네 숭고하고 위대한 이름이여, 이 이름을 띤 너는 아첨하며 여러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아무도 갖고 있지 않는데도 오로지 복종(服從)을 요구한다. ...... 자연히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서 싫어도 정의를 획득(獲得)할 수 있는 법칙을 세우는 것뿐이다.'4)와 같이 칸트가 주장한 도덕은 의무(義務)의 도덕이었다. p.404

 

또 칸트는 선의지(善意志)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유가 요청되지 않으면 안되며, 불완전한 인간이 선(善)을 완전히 실현코자 하는 한 영혼의 불멸(不滅)이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완전한 선(善) 즉 최고선을 추구할 때, 그것이 행복과의 일치가 가능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요청해야 한다고 했다. 이리하여 칸트는 영혼(靈魂)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를 실천(實踐)이성의 요청(Postulat)으로서 인정하였다.

 

   2) 통일사상에서 본 칸트의 윤리관 p.404

 

칸트는 純粹理性(이론이성)과 실천(實踐)이성을 구별했다. 순수이성이란 인식을 위한 이성이며, 실천이성이란 의지를 규정하고 행위를 인도하는 이성이다. 칸트에 있어서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언명법(定言命法)에 의한 행위가 왜 선(善)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행위가 선(善)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경우, 그 행위의 결과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칸트는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정언명법(定言命法)에 따른 행위라야 선(善)이라고 하였다.

 

가령 A라는 사람이 노상(路上)에서 육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B라는 사람을 만나 `B를 도우라'는 내부로 부터의 정언명법(定言命法)에 의하여 A는 그 B를 병원으로 데려가고 싶어 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B는 남에게 신세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일 경우도 있으며, 따라서 B는 그 도움을 사양하고 단독으로 병원에 가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움을 주고자 하는 A는 실천(實踐)이성이 내린 정언명법(定言命法)에 의해서 행동하고 있으므로 그것으로써 만족할 것이다. 즉 A의 행동은 A에게는 무조건 선(善)이 되겠지만, B에게는 달갑지 않은 친절이 되어서 선(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동기만 좋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이 칸트의 입장이어서, 상식적인 선(善)의 개념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칸트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즉 인식과 실천을 분리했기 때문에 생긴 아포리아(難点)이다. 사실상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은 둘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이성은 하나이며, 그 하나의 이성에 따라서 결과를 확인하면서 행동하는 것이 실제의 실천인 것이다.

 

또 칸트의 도덕률(道德律)에 있어서 주관적인 격률(格率)을 보편화시키는 경우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보편화가 가능한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또 칸트는,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도덕적인 인간이 되면 그것으로 행복이 실현될 것이라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가언적(假言的)이므로 선(善)이라고 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인간이 행복을 희구(希求)하고 있음을 알면서 행복을 목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요청(要請)하여 완전히 선(善)을 행하면 그 상태가 행복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칸트의 여러 문제점들은 모두 그가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모르는데 기인(基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목적이라면 무조건 자애적(自愛的), 이기적(利己的)인 것으로만 생각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창조목적에는 전체(全體)목적과 개체(個體)목적이 있고, 인간은 전체목적을 앞세우면서 개체목적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목적이라면 모두 개체목적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모든 목적을 否定해 버렸고, 그의 도덕률(道德律)은 그 기준이 애매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편으로, 칸트는 도덕률(道德律)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영혼(靈魂)의 불멸과 하나님의 존재가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신(神)이나 영혼(靈魂)은 감각적 내용이 없으므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이들을 배제(排除)해 버렸다. 여기에도 칸트철학(哲學)의 아포리아가 있다. 칸트는 하나님을 요청(要請)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가정적(假定的)인 신(神)일 뿐, 참다운 신(神)이거나 실존(實存)하는 신(神)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신(神)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칸트는 실천(實踐)이성에 근거하는 의무감만을 선(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의무 그 자체는 차가운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말한 선(善)의 세계는 차가운 의무의 세계, 냉랭한 규율만을 지켜야 하는 병영(兵營)과 같은 세계인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의무나 규율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목적은 참된 사랑의 실현에 있으며, 의무나 규율은 참사랑의 실현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벤담

 

   1) 벤담의 윤리론(倫理論)

 

벤담(J. Bentham, 1748~1832)의 선악관(善惡觀)은 다음과 같은 전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자연(自然)은 인류를 고통(苦痛)과 쾌락(快樂)이라는 두 주권자(主權者)의 지배 아래에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지시하고, 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쾌락(快樂)과 고통(苦痛) 뿐이다."5) 이 전제에서 벤담은 쾌락(快樂, pleasure)과 고통(苦痛)(pain)을 선악(善惡)의 기준으로 하는 `공리성의 원리(功利性 原理, principle of utility)‘를 주창하였다. p.407

 

벤담은 쾌락과 고통을 양적(量的)으로 계산하여, 가장 많은 쾌락을 가져오는 행위를 선(善)으로 보고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最大多數의 最大幸福); 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을 그 원리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쾌락과 고통을 가져오는 것으로 네 개로 구별되는 원천(源泉)이 있으며 그것들은... ... 물리적(物理的), 정치적(政治的), 도덕적(道德的) 및 종교적(宗敎的)인 원천이라고 불려지고 있다"6)고 하였고,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물리적인 원천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물리적인 쾌락과 고통만이 객관적으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균등(均等)하게 물질적인 부(富)를 얻는 것을 가장 소망스럽게 생각하였다. p.407

 

칸트는 목적이나 물질적 이익에 구애되지 않는 순수한 선(善)을 주장했지만, 벤담은 선(善)의 행위는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특히 물질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적극적(積極的)으로 긍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사상은 영국의 산업혁명(産業革命)을 그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사회주의운동가(社會主義運動家) 로버트 오웬(R. Owen, 1771~1858) 등에 영향을 주었다. 오웬은 벤담이 말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最大多數의 最大幸福)'을 자기의 사상의 기초로 삼으면서, 프랑스의 계몽주의사상(啓蒙主義思想)과 유물론(唯物論)의 영향 하에 환경의 개선운동을 전개하였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므로 환경을 좋게 하면 인간의 성격은 선량(善良)하게 되고 행복한 사회가 실현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해서 미국의 인디애나주에 `뉴 하모니 평등(平等)村'을 건설했지만, 그의 노력은 동료들 간의 내부분열(內部分裂)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사회주의운동의 영향하에서 공리주의자(功利主義者)들은 사회개혁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선거법(選擧法)의 개정, 빈민법(貧民法)의 개정, 소송수속(訴訟手續)의 간소화, 곡물조례(穀物條例)의 폐지, 식민지의 노예해방(奴隷解放), 참정권의 확대,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의 개선 등등의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자본주의사회의 모순(矛盾)의 개혁에 크게 기여(寄與)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벤담의 윤리관

 

벤담은 칸트가 주장한 `의무(義務)로서의 선(善)'이 아니라 선(善)의 행위 그 자체가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선(善)을 주장했는데, 그 점에 관한한 통일사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을 물질적인 쾌락에 있다고 본 그의 견해는 통일사상과 다르다. 물질적인 쾌락에 의해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이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선진국(先進國)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스스로 행복(幸福)하다고 자인하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왜냐하면 물질적 번영과 함께 사회혼란과 각종 범죄가 증대하고 있어서,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리주의(功利主義)에 의해 참된 행복이 실현될 수 없음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본 벤담의 사상은 환경복귀(環境復歸)를 위한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사회(理想社會)의 실현을 위해서는 인간 복귀와 함께 환경 복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섭리적으로 볼 때, 재림(再臨)의 때가 가까워 옴에 따라서 이와 같은 사상의 출현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벤담과는 대조적(對照的)으로 칸트의 경우는, 인간 복귀를 위한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공리주의사상(功利主義思想)도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불충분한 것이어서 인간의 행복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 후 나타난 공산주의도 환경 복귀를 위한 사상(思想)이었으나 폭력혁명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 결과 행복한 사회가 실현되기는 커녕 오히려 비참(悲慘)한 사회를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정신적(精神的) 행복과 물질적(物質的) 행복이 통일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안고 있는 정신적문제와 물질적문제를 통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선(善)의 기준이 세워질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은 실현(實現)될 수 있는 것이다.

 

  (3) 분석철학(分析哲學)

 

   1) 분석철학(分析哲學)의 윤리관

 

철학의 임무(任務)는 일정한 세계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언어의 논리적분석(論理的分析)을 통하여 철학을 일종의 과학적인 학문으로 삼고자 한 것이 분석철학이다. 무어(G. E. Moore, 1873~1958), 러셀(B. Russell, 1872~1970),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 등의 케임브리지 분석학파와 슈릭(M. Schlick, 1882~1936), 카르납(R. Carnap, 1891~1971), 에이어(A. J. Ayer, 1910~1971) 등의 빈학파(學派) 혹은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 logical positivism), 그리고 현대 영국의 일상언어학파(日常言語學派) 등을 총칭한 것이 분석철학(分析哲學)이다.

 

분석철학중에서 윤리학설의 대표적인 것들을 들자면 무어의 직각설(直覺說; intuitionism)과 슈릭, 에이어의 정서설(情緖說; emotive theory) 등이 있다.

 

무어에 의하면, 선(善)이란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善)이란 황금(黃金)이 단순한 관념인 것과 같이 역시 단순한 관념이라는 것, 그리고 황색(黃色)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이미 황색(黃色)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도 설명할 수(도, 대답할 수도)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善)이란 무엇인 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도, 대답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7) 그리고, 그는 선(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의 대답(對答)은 선(善)이란 선(善)이다라는 것이고, 그것으로 끝이다"8)라고 하여 선(善)이란 직각(直覺; intuition)에 의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무어에 있어서의 가치판단은 사실판단과 완전히 독립한 것이었다. p.410

 

또, 슈릭이나 에이어에 의하면 선(善)이란 주관적(主觀的)인 정서(情緖)를 표현하는 말에 불과하고 객관적(客觀的)으로 검증할 수 없는 의사개념(疑似槪念)이었다. 따라서, `돈을 훔치는 것은 나쁘다'고 하는 윤리적(倫理的)명제(命題)는 발언자의 도덕적 불찬성의 감정(感情) 혹은 기분(氣分)의 표명에 지나지 않고, 참도 거짓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분석철학(分析哲學)의 윤리관

 

첫째로, 분석철학자들의 윤리관의 특징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분리(分離)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실판단이나 가치판단은 어느 쪽이나 객관적인 것으로서 일체(一體)가 되어 있다고 본다. 단지 사실판단은 누구나 감각(感覺)에 의해 인정할 수 있는 현상에 관한 판단이므로 쉽게 객관성(客觀性)이 인정되는데 대하여, 가치판단은 한정된 종교나 철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된 것이므로 일반적으로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주관적(主觀的)인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심령기준(心靈基準)이 높아져서 우주에 일관(一貫)되게 작용하고 있는 가치법칙을 만인이 정확히 파악하게 된다면 가치판단(價値判斷)도 보편타당성을 띠게 될 것이다.

 

자연과학은 오늘날까지 사실판단(事實判斷)만을 다루어 옴으로써 사물의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추구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자연과학자들은 인과관계(因果關係)의 추구로는 자연현상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점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자연현상의 의미나 그 이유를 의문으로 삼게 됨으로써 사실판단과 더불어 가치판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사실(事實)과 가치(價値), 즉 과학(科學)과 윤리는 통일된 과제로서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통일사상의 견해이다.

 

둘째로 분석(分析)철학자(哲學者)들의 윤리관의 특징은 선(善)이란 정의할 수 없는 것, 혹은 의사개념(疑似槪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선(善)은 명확히 정의할 수 있다. 즉 인간은 가정적사위기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한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목적에 적합한 사랑의 행위를 마음의 의적기능(意的機能)으로 평가한 것이 선(善)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선(善)은 현실적인 사실(행위)에 대한 평가이므로 가치와 사실은 분리(分離)할 수 없는 것이다.

 

  (4) 프래그머티즘

 

   1) 프래그머티즘의 윤리관 p.412

 

형이상학(形而上學)을 배제하고 경험적(經驗的), 과학적(科學的) 인식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프래그머티즘도 분석철학과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퍼어스(C. S. Peirce, 1839~1914)에 의해서 제창된 프래그머티즘은 제임스(W. James, 1842~1910)에 의해서 일반화되었다.

 

제임스는 유효(有效)한 것(It works)이 진리이다라고 했다. 예컨대 누군가가 현관에 와서 계십니까하고 기척을 낼 때, 주인은 방안에서 그를 보기 전에 그 찾는 음성만을 듣고서 그가 K씨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그리고 나서 현관에 나가 보고 그가 실제로 K씨였음이 확인되었다면, 주인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진리(眞理)라고 간주하게 된다. 즉 행위를 통하여 검증된 지식(知識)이 진리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진리란 작업가치(作業價値; working value)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개념(槪念)에 대한 진리란 그 개념에 내속(內屬)해 있는 고정(固定)된 성질이 아니다. …… 사건(일의 결과)에 의해서 참(眞)이 되는 것이다. 진리의 참(眞)이성은 사실에 있어서 하나의 사건, 하나의 과정인 데에 있다. 즉 진리(眞理性)가 자기 자신을 진리화해 가는 과정, 진리의 진리화의 과정인 데에 있다. 진리의 효력(效力)이란 진리의 효력화(效力化)의 과정인 것이다.9) p.412

 

이와 같이 진리의 기준 그대로가 가치의 기준, 선(善)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어떤 윤리적 명제는 이론적으로 논증(論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만족이나 평안함을 준다는 점에서 진리이며, 또 선(善)이다. 따라서 선(善)이란 절대불변의 것이 아니며, 인류전체의 경험에 의해서 날마다 새로이 수정(修正), 개선(改善)되어 가는 것이다.

 

프래그머티즘의 완성자는 듀이(J. Dewey, 1859~1952)였다. 듀이는 지성(知性)은 미래의 경험에 대해서 도구적(道具的)으로 작용하는 것, 즉 지성(知性)은 여러 문제를 유효하게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도구주의(道具主義; instrumentalism)를 주장했다. 제임스의 경우는 종교적인 진리도 인정했지만, 듀이는 일상생활의 입장에 서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사고를 완전히 배제(排除)하였다.

 

이와 같은 듀이의 사고방식은 인간을 하나의 생명체(生命體) 또는 유기체(有機體)로 보는 인간관에서 유래(由來)한다. 생명체(生命體)는 항상 환경과 상호작용하에 있으나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면, 거기에서 벗어나서 안정된 상태로 옮아가고자 한다. 그 때, 도구(道具)로써 활용되는 것이 지성(知性)이며, 이러한 지성을 터로 하고 풍요(豊饒)한 사회,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선(善)한 행위라고 보았다.

 

듀이는 과학적인식과 가치인식을 동질적(同質的)인 것으로 보았다. 지성을 사용하여 합리적(合理的)으로 행동하기만 하면 반드시 좋은 상태가 도래(到來)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사실과 가치의 분열(分裂)은 없다. 선(善)이란, 욕망이 충족(充足)되도록 생활의 요구에 따라 한 걸음 한걸음(一步一步) 인식을 성장시키면서 실현해 가는 것으로서, 일거(一擧)에 인식되는 것 같은 궁극적(究極的)인 선(善)을 부정했다. 선(善)의 개념도 문제를 유효하게 처리하기 위한 도구(道具)요, 수단에 불과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덕적(道德的) 원리(原理)란 일정한 방법으로 행동을 하라든가, 행동하는 것을 보류(保留)하라는 식의 명령(命令)은 아니다. 원리는 어떤 특별한 상황을 분석하기 위한 도구이며, 정사(正邪; 바르고 어긋남)는 규제 그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상황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다.10) p.414

 

   2) 통일사상에서 본 프래그머티즘의 윤리관

 

제임스는 유효(有效)한 것, 유용한 것이 진리이며 가치라고 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 지식이나 가치를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일상적인 의(衣)?식(食)?주(住)의 생활에 지식이나 가치를 종속(從屬)시키는 것은 전도(轉倒)된 사고방식이다. 의식주의 일상생활은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기준으로 해야 하며,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는 창조목적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창조목적이란 참된 사랑(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목적에 일치하는 행위가 선(善)이 되는 것이지, 생활에 유용한 행위가 반드시 선(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생활에 유용한 행위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적합(適合)하면 선(善)이 된다. 제임스는 생활에 유용(有用)한 것을 진리와 선(善)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생활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라는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듀이에 의하면, 선(善)의 개념을 포함한 지성(知性)은 도구(道具)이다. 그러나 지성이 도구라는 주장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통일사상에서 보면 심정(心情, 사랑) 혹은 목적을 중심으로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수수작용함으로써 로고스(사상)가 형성된다. 내적성상은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고, 내적형상은 관념, 개념, 수리, 원칙 등이다. 여기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으므로, 내적형상은 내적성상의 도구(道具)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내적성상인 지(知)-정(情)-의(意)의 기능도 사랑의 실현을 위한 도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듀이의 경우, 지성(知性)도 선(善)의 개념도 모두 사회개량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

 

듀이가 말하는 도구설(道具說)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일상생활의 풍부(豊富)함을 목적으로 하는 한, 그것은 옳지 않다. 선(善)의 개념들 속에는 생활의 목적은 될지언정 그 수단으로는 될 수 없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善)의 개념(槪念)은 바로 생활의 수단이 아니고 목적인 것이다.

 

또, 듀이는 사회를 개선(改善)하기 위하여 과학을 발전시키면, 그것은 그대로 가치와 일치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이 그대로 가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창조목적의 실현-하나님의 사랑의 실현-을 목표로 하게 될 때 비로소 사실과 가치는 일치하게 된다.

 

           제7장 예술론 (第7章 藝 術 論)

 

Theory of Art

 

일반적(一般的)으로 넓은 의미의 문화는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사상, 철학, 과학, 예술 등 모든 인간활동의 총화(總和)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藝術)이다. 즉 예술은 문화의 정수(精髓)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유주의사회이거나 구 공산주의사회(舊 共産主義社會)이거나 간에 또 선진국이나 후진국을 막론하고 예술은 계속 저속화(低俗化)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퇴폐(頹廢)한 예술은 퇴폐한 문화를 낳는 법이다. 오늘의 저속화(低俗化)의 상태가 이대로 지속되면 세계의 문화는 일대(一大) 위기(危機)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신문화의 창건(創建)을 위해서는 참다운 예술사회가 세워져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예술론(藝術論)이 절실히 필요하다.

 

과거(過去)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때마다 예술은 항상 지도적(指導的)인 역할(役割)을 다 해왔다. 예컨대 15세기(世紀)경의 르네상스시대에 있어서도 그 시대의 선구자적(先驅者的)인 역할(役割)을 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었다. 또 일찍이 공산주의혁명에 있어서도 예술가들의 공헌(貢獻)은 적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혁명에 있어서 고르키의 작품이, 또 중국혁명에 있어서 노신(魯迅)의 작품이 혁명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신문화 창건에 있어서도 참다운 예술활동이 전개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구소련(舊蘇聯)을 중심한 공산주의의 예술은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이라고 불리웠다. 공산주의자들은 예술을, 혁명을 위한 중요한 무기(武器)의 하나로 여겼으며, 예술을 통하여 자본주의사회의 모순(矛盾)을 폭로하고 인민대중(人民大衆)을 혁명의 대열로 몰아 세우곤 하였다. 오늘날 공산주의사회의 소멸(소멸(消滅))과 함께, 아니 그 이전(以前)에 이미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사라져 버렸지만, 한 때 공산세계의 예술계(藝術界)를 휩쓸었던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과 유물사관(唯物史觀)이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에 의한 예술론이었으며, 철학적 근거가 희박(稀薄)한 자유주의사회의 예술론은 이에 비해서 취약성(脆弱性)을 드러내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주의리얼리즘이 비록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극복(克服)되지 않은 채 사라졌기 때문에 그 소멸(消滅)은 표면상(表面上)의 소멸(消滅)일 뿐이며, 다시 재현(再現)할 가능성(可能性)을 전연 배제(排除)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재현(再現)의 가능성(可能性)까지도 완전(完全)히 일소(一掃, 한 번에 청소)하기 위해서는 同리얼리즘의 철저한 극복(克服)이 반드시 요구(要求)된다. 즉 사회주의리얼리즘의 극복을 위한 새로운 예술론(藝術論)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여기에 그 새로운 예술론(藝術論)으로서 통일사상의 예술론, 즉 통일예술론(藝術論)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상(以上)을 바꾸어 말하면, 통일예술론은 오늘날의 예술의 저속화(低俗化) 현상(現象)을 방지(防止)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비판하고 극복하면서 새로운 철학(神學)에 근거한 대안(代案)을 제시코자 한다. 그것은 新문화사회(社會)의 창건에 공헌한다고 보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섭리(攝理)로 볼 때 미래사회는 진실사회(眞實社會)요 윤리사회(社會)일 뿐 아니라, 예술사회(藝術社會)이기 때문에 새로운 예술론(藝術論)의 제시(提示)는 더욱 필요한 것이다.

 

            一. 예술론(藝術論)의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

 

새로운 예술론(藝術論)은 물론 통일원리(統一原理)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통일원리적 근거 가운데 제일 주요한 부문(部門)은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과 창조성(創造性), 기쁨과 닮기의 창조, 수수작용 등에 관한 이론이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창조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하나님의 우주창조의 목적은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실현(實現)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기쁨의 대상(對象)으로서 우주를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은 위대한 예술가(藝術家)이고, 우주는 하나님의 작품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쁘기 위해서 우주(宇宙)를 창조했다는 말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인간을 기쁨의 대상으로 지으시고, 그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기쁨의 대상으로 만물(萬物, 자연)을 창조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인간중심으로 볼 때에는 만들어진 목적 즉 피조목적(被造目的)이며, 그것이 곧 전체(全體)목적과 개체(個體)목적이다. 전체목적은 하나님 또는 전체(민족, 국가, 인류 등 개인에 대한 전체)에 대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며, 개체목적은 타인(他人) 또는 전체(全體)로부터 자신이 기쁨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피조목적을 인간이 달성하게 하기 위해서 욕망(欲望)을 부여하셨다. 그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또는 전체(全體)를 기쁘게 하면서 자신도 기뻐하고자 하는 충동(욕망)을 항상 갖고 있다. 인간의 예술활동은 하나님의 우주창조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창작(創作)活動은 전체목적 즉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하게 되고, 감상활동은 개체목적 즉 자신이 기쁨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창조성은 원상론에서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와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 능력, 즉 창조의 2단구조(構造)의 형성 능력이었다(원상론의 신성(神性)을 참조).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의 형성이란 로고스(구상(構想))의 형성을 의미하고,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이란 로고스에 따라 형상(形狀)인 질료(質料)를 사용하여 직접 만물을 만듦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창조과정이 그대로 인간의 예술활동에 있어서의 창작의 2단구조(構造)의 형성(形成)으로 나타난다. 즉 먼저 구상을 세우고, 다음에 재료를 사용하여 구상을 실체화함으로써 작품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은 기쁨과 닮기의 창조에 관하여 살펴보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기쁨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만물을 지으셨다. 주체의 기쁨은 자체의 성상(性相)-형상(形狀)을 닮은 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을 통하여 얻어진다.1)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도록 형상적 실체대상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상징적 실체대상으로 만물을 지으신 것이다.2) 이것을 예술론에 적용하면, 창작(創作)하는 예술가는 기쁨을 얻기 위하여 자기의 성상과 형상을 닮도록 작품을 만들며, 감상자는 작품을 통하여 자기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相對的)으로 느낌으로써 기뻐한다는 논리(論理)가 되는 것이다. p.420

 

마지막으로 수수작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하나님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相對的) 관계하(關係下)에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합성체(合性體) 또는 번식체(繁殖體)를 이룬다.3) 번식체(繁殖體)를 이룬다는 말은 만물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원상내(原相內)의 이러한 수수작용을 예술론에 적용하면 창작(創作)은 주체(藝術家)와 대상(素材)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감상도 주체(鑑賞者)와 대상(作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창작에 있어서나 감상에 있어서 주체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대상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라는 양면(兩面)이 요구된다. 그것은 가치론(價値論)에서 말한 것처럼 가치(價値)(진(眞)-선(善)-미(美))는 주체적 조건과 대상적 조건과의 상대적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二. 예술(藝術)과 미(美)

 

  (1) 예술(藝術)이란 무엇인가 p.421

 

예술(藝術)이란 미(美)를 창조하거나 감상하는 인간 활동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지(知)-정(情)-의(意)라는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 각각의 기능에 의한 활동으로 인하여 문화활동의 여러 분야가 형성(形成)된다. 지적(知的)인 활동에 의하여 철학이나 과학 등의 분야(分野)가 형성되고, 의적(意的)인 활동에 의하여 도덕과 윤리 등의 실천적 분야(分野)가 형성되고, 정적(情的)인 활동에 의하여 예술분야가 세워진다. 따라서 예술이란 미(美)를 창조하고 감상하는 정적(情的)인 활동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 예술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은 대상을 사랑함으로써 기쁨을 얻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대상인 작품을 창작 또는 감상하는 것도 기쁨을 얻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예술이란 미(美)의 창작과 감상에 의한 기쁨의 창조활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영국의 미술평론가(美術評論家) 허버트 리드(H. Read, 1893~1968)는 모든 예술가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의욕(意欲)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예술이란...... 마음의 즐거움의 형식을 만드는 시도이다.'4)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통일사상의 예술의 정의(定義)와 거의 같은 예술관인 것이다.

 

  (2) 예술(藝術)과 기쁨

 

앞에서 말한대로 예술(藝術)이란 미(美)의 창조(創造), 곧 기쁨의 창조(創造)이다. 그러면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 원리강론(原理講論)에 「무형(無形)이거나 실체(實體)이거나 자기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대로 전개된 대상(對象)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극(刺戟)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상대적으로 느낄 때 비로소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1987, p. 52)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에 었어서, 대상(對象)의 성상(性相)-형상(形狀)과 주체(主體)의 성상(性相)-형상(形狀)이 서로 닮았을 때에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존재론(存在論)과 인식론(認識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우주를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므로 그 몸 안에는 우주의 모든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잠재적(潛在的)으로 지니고 있다. 가령 꽃의 경우 그 꽃의 色, 形, 부드러움 등의 원형(原型)이 內界(몸속)에도 있는 바, 그 원형(原型)과 현실의 꽃에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통하여 합치(合致)되는 체험이 바로 인식(認識)이며 그 일치에서 기쁨의 감정은 솟아난다. 따라서 대상(對象)의 미(美)를 감지(感知)하려면 먼저 그 원형(原型)이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 원형(原型)이 어떻게 하면 떠오르는가? 첫째로 필요(必要)한 것은 심령(心靈)의 맑음이다. 심령(心靈)이 맑아지면 원형(原型)은 스스로 직관적(直觀的)으로 떠오른다. 다음은 교양(敎養)이다. 미(美)의 여러 가지 형태를 체험으로나 이론적으로 배움으로써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있던 원형(原型)이 인식할 때에 쉽게 자극되어서 표면화되기 쉽게 된다.

 

   l) 성상(性相)의 상사성(相似, 서로 닮음性)

 

이러한 「닮음」에 있어서 성상적(性相的)으로 닮는다는 것은 사상, 구상, 개성, 취미, 교양, 심정 등의 일부 또는 전부가 주체(主體) 및 대상(對象)간에 서로 닮는것을 뜻한다.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사상(思想)이다. 대상(對象) 속에서 자기와 같은 사상(思想)을 발견할 때 아름답게 보인다. 따라서 사상(思想)을 풍부하고 깊게 찾고 있으면 그만큼 기쁨의 법위가 넓어지고 또한 깊은 감동을 받게된다.

 

그러므로 사(思)상을 넓고 깊게 가진다는 것은 미(美)를 감(感)수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이 성상(性相)의 상사성(相似性)이란 대상(작품)속에 있는 작자의 심정, 사상 등의 성상적(性相的)인 측면과 주체(主體)(감상者)의 심정 사상 등의 성상적인 측면이 서로 닮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형상(形狀)의 상사성(相似, 서로 닮음性)

 

형상(形狀)에 속하는 것은 事物의 형태, 色, 音, 냄새 등 오관으로 느끼는 요소들이다. 이리한 것이 우리들의 몸속에 있는 원형(原型)과 일치될 때 아름다음이 느껴지면서 기쁨의 감정이 솟아난다. p.423

 

인식론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외적 세계(世界)는 인간의 몸을 확대시켜 전개한 것이어서, 외계(外界)의 모든 요소들은 원형적(原型的)으로 內界(인간의 몸)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즉 事物(만물, 작품)의 모양, 색, 소리, 냄새 등의 형상적(形狀的) 요소는 원형적으로 즉 축소된 형태로서 인체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바, 이것이 곧 형상(形狀)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이다. 이 닮은 요소들이 인식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면서 情을 자극(刺戟)할 때 기쁨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기쁨의 내용인 상이성(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에는 상보성(相補性)이란 일면도 있다. 즉 주체는 대상 속에서 자기에게 부족된 특성을 보고 기뻐하는 일면이 있다. 男性은 女性속에서 자기에게 부족된 부드러움이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한다.

 

그것은 첫째, 인간은 단독으로는 전일자(全一者)가 아니며, 신(神)의 양성(陽性)을 그 속성(屬性)으로 지니는 남성(男性)과, 신(神)의 음성(陰性)을 그 속성(屬性)으로 지니는 여성(女性)으로 분립(分立)되었다가, 그 양자가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함으로써 신의 이성성상의 중화(中和)의 모습을 완전히 닮도록 만들어진 까닭이다. 그런데 이 상보성(相補性)이 一종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으로 보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자기의 부족(不足)한 부분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영상(映像)올 찾고 있어서 현실적으로 그 映상대로의 대상올 다하게 될 때 그 부족(不足)한 부분이 실제로 채워져서(相補性)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 때의 그 대상(對象)은 감상자의 마음속에 지녔던 영상(映像)과 같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 상보성(相補性)은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의 성격도 지니게 된다.

 

그리고 둘째는 신(神)의 하나 하나의 개별상(個別相)을 나누어 갖고 있어서 자기(自己)에게 부족한 면을 서로 타인을 통하여 발견하여 그것을 서로 주고 받음으로써 기뻐하도록 창조된 까닭이다. 미(美)의 이러한 측면도 상보성(相補性)이라고 하며, 넓은 의미의 상대성(相對性)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 신(神)에 있어서 하나인 것이 둘(陽과 陰) 혹은 다수의 개별성(個別性)으로 분립, 전개된 것이어서 그들이 합하여 보다 완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책상과 의자와 같이 서로 상보(相補)함으로써 둘이 하나의 완전한 것으로 되는 경우도 허다(許多)하다. 보다 완전한 것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창조목적(創造目的)이 보다 더 많이 실현됨을 의미하므로 거기에 만족과 기쁨이 생겨나는 것이다. 단 상보성(相補性)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근저(根底)에 보다 깊은 차원에서의 상대성(相對性)이 있어야 한다. 공동(共同)목적이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과 같은 공통성(共通性)이 없는 단순한 차이(差異)에서는 미(美)나 기쁨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5)

 

  (3) 미(美)란 무엇인가

 

「원리강론(原理構論)」에 의하면, 사랑이란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이고, 美란 「대상이 주체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자극)이다.6) 대상이 광물이나 식물일 경우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은 물질적인 힘이지만, 주체(인간)는 그것을 정적(情的)인 자극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비록 대상이 주체에게 자극(힘)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주체가 그것을 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 이러한 자극은 정적인 자극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오는 요소(要素)를 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느냐 혹은 받아들이지 않느냐하는 점에 있다. 대상으로부터 오는 요소를 주체가 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그 자극은 정적인 자극이 된다. 따라서 미(美)란 대상이 주체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인 동시에 정적인 자극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미(美)는 진(眞)이나 선(善)과 더불어 가치의 하나이므로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미(美)는 정적(情的) 자극으로서 느껴지는 대상가치(對象價値)인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힘을 사랑이라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주는 정적인 자극을 미(美)라고 했는데, 실제의 경우 인간끼리는 주체와 대상이 다 같이 사랑과 미를 서로 주고 받는다. 즉 대상도 주체를 사랑하고, 또 주체도 대상에게 미를 준다. 왜냐하면 주체와 대상이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면 미(美)에도 사랑이, 사랑에도 미(美)가 내포되기'7) 때문이다. 주체에서 대상으로 혹은 대상에서 주체로 정적(情的)인 힘이 전달될 때, 보내는 측에서는 그것을 사랑으로서 보내고, 받는 측에서는 정적(情的)인 자극 즉 미(美)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상으로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미(美)를 정의했는데 종래의 철학자(플라톤과 칸트)들에 의한 미(美)의 정의를 다음에 소개한다.

 

플라톤은 대상속에 존재하는 미(美) 그 자체 즉 미(美)의 이데아를 미(美)의 본질로 보았으며, 인간이 느끼는 미(美)에 대해서는 미(美)란 청각과 시각을 통하여 주어지는 쾌감(快感)이다'8)라고 하였다. 칸트는 미(美)를 대상의 주관적 합목적성(合目的性) 혹은 대상의 합목적성(合目的性)의 형식이라고 설명하였다.9) 이것은 자연의 대상에는 만들어진 목적이 없지만, 인간이 주관적으로 거기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 후, 그것으로부터 쾌감이 얻어지면 인간에게 그 쾌감을 주는 것이 미(美)라는 의미이다. p.425

 

  (4) 미(美)의 決定

 

미(美)는 어떻게 해서 결정되는 것일까. 원리강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개성체(個性體)의 창조본연의 가치는 그 자체내에 절대적인 것으로 내재(內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성체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하고 어떠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대하는 인간 주체의 창조본연의 가치추구욕(價値追求欲)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결정된다…… 예를 들면, 꽃의 미(美)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 꽃을 창조하신 목적과 인간의 미(美)에 대한 창조본연의 추구욕이 합치(合致)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에 입각(立脚)한 인간의 미(美)에 대한 추구욕이 그 꽃으로부터 오는 정적(情的)인 자극으로 말미암아 충당(充當)되어 인간이 완전한 기쁨을 느낄 때, 그 창조본연의 미(美)가 결정된다.10) p. 426

 

미(美)는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가치추구욕을 가진 주체가 대상과 수수작용할 때에 결정된다. 즉 대상으로부터 오는 정적인 자극을 주체가 정적(情的)으로, 주관적으로 판단함으로써 미(美)가 결정되는 것이다.

 

  (5) 미(美)의 요소(要素)

 

미(美)는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느껴지는 것이다. 대상 속에 있는 요소가 주체에게 정적인 자극을 주어서 그것이 미(美)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면 주체를 정적으로 자극하는 요인이 된 것, 즉 미(美)의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상의 창조목적과 물리적 제요소간(諸要素間, 여러 요소)의 조화이다. 즉 회화(繪畵)에 있어서 선(線), 형(形), 색채(色彩), 공간(空間)과, 음악(音樂)에 있어서 음(音)의 고저(高低), 장단(長短) 등의 물리적 제요소가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잘 조화하고 있을 때에, 목적중심(目的中心)의 조화(調和)가 주체에게 정적인 자극을 주게 되면, 주체는 그것을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미(美)로서 느끼게 된다. 주체에 의해 판단된 미(美)가 바로 현실적인 미(美)이다.

 

조화에는 공간적(空間的) 조화(調和)와 시간적(時間的) 조화(調和)가 있다. 공간적 조화란 공간적인 배치(配置)에 의한 조화이고, 시간적 조화란 시간적 흐름을 통하여 생기는 조화이다. 공간적 조화를 지닌 예술에는 회화(繪畵), 건축(建築), 조각(彫刻), 공예(工藝) 등이 있고, 시간적 조화를 가진 예술에는 문예(文藝), 음악(音樂) 등이 있다. 이것들을 각각 공간예술, 시간예술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연극, 무용 등의 예술이 있는 바, 이러한 예술은 시간적 조화와 공간적 조화를 함께 나타냄으로써 시공간적(時空間的) 예술(藝術) 혹은 종합예술이라고도 한다. 여하간에 조화가 미(美)의 감정을 일으키는 요인인 것이다. p.427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形而上學)에서 미(美)란, 질서와 균형과 피한정성(被限定性; 한정된 크기를 갖는 것) 속에 있다고 하였으며,11) 리드는 예술작품에는 중력(重力)의 중심으로 비유할 만한 상상적(想像的)인 어떤 조합점(照合點)이 있어서 이 점을 둘러싸고 선(線), 면(面), 부피가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안정되도록 배정되어 있다. 모두 이와 같은 방식의 구성상(構成上)의 목적은 조화이며, 조화는 바로 우리들의 미감(美感)의 만족이다'12)라고 하였다. 양자 모두가 미(美)의 요소가 조화에 있다는 점(點)에서 일치하고 있다.

 

         三. 예술활동(藝術活動)의 이중목적(二重目的)과 창작(創作) 및 鑑賞 p.428

 

예술활동에는 창작과 감상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예술활동의 이러한 두 측면은 분리된 별개의 측면이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의 활동의 두 측면이다. 즉 창작에 있어서도 감상이 뒤따르게 되고, 감상에 있어서도 주관작용(主觀作用)에 의한 부가창조(附加創造, 後述)가 뒤따르게 된다. 즉 창작과 감상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의 예술활동에 창작과 감상이라는 두 측면이 있을까. 창작은 무엇 때문에 필요하며 감상은 또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왜 창작과 감상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關係)에 있는가. 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창작과 감상은 두 가지 욕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실천활동(實踐活動)이다. 즉 창작은 가치실현욕(價値實現欲)에 근거하여 행해지며, 감상은 가치추구욕에 근거하여 행해진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이 두 가지 욕망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중목적(二重目的)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즉 가치실현욕은 전체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그리고 가치추구욕은 개체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추진력(推進力), 충동력(衝動力)으로서 인간에게 욕망을 부여하셨던 것이다.

 

전체목적은 비록 인간에게 자각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잠재의식(潛在意識) 속에 깃들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목적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욕망이, 아울러 잠재의식 속에 주어져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진실되게 살고, 선(善)한 행위를 하고, 미(美)를 창조하면서 인류에게 봉사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창작은 이와 같은 전체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가치실현욕)에 기인한다. 인간은 또 자기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대상에서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기쁨을 얻고자 한다. 이것이 가치추구욕이다. 감상이라는 행위는 이 가치추구욕에서 유래된다. 이와 같이 감상은 개체목적을 수행하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하고 있다.

 

그런데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은 기쁨을 얻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창조목적이지만 인간 측에서 말하자면 피조목적이다. 이 목적에 하나님과 전체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전체(全體)목적과 자기도 기쁘고자 하는 개체(個體)목적의 두 가지가 있다.

 

이와 같이 창작은 작가(作家)가 대상의 입장에서 주체 즉 하나님과 인류 등 전체를 위하여 가치(미(美))를 나타내는 행위이며, 감상은 감상자가 주체의 입장에서 대상인 작품으로부터 가치(美)를 향수(享受)하는 행위이다. 어느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유래(由來)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그와 같은 본연의 입장을 떠나서 자기중심적인 예술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안타까운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장차 창작과 감상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면 예술가는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본연의 예술활동을 영위(營爲)할 수 있게 될 것이다.

 

                  四. 창작(創作)의 요건(要件)

 

예술에 있어서 창작활동(創作活動)의 측면을 이해하려면 창작의 요건(要件)을 바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창작에는 창작의 주체(作者)가 갖추어야 할 요건, 즉 주체의 요건과 대상(작품)이 구비해야 할 요건, 즉 대상의 요건이 있다. 그 외에 창작의 기교(技巧), 소재(素材), 양식(樣式) 등도 창작에 있어서의 주요한 요건이 된다. 먼저 주체의 요건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주체(主體)의 요건(要件)

 

주체의 요건으로서는 모티브, 주제(主題), 구상(構想), 대상의식(對象意識), 개성(個性) 등이 다루어지게 된다.

 

   1) 모티브, 주제(主題), 구상(構想)

 

예술작품의 창작에는 먼저 창작의 동기 즉, 모티브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 모티브에 따라서 일정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창작목적이 세워진다. 다음에 그 목적에 따라서 주제(테마)가 세워지고 또 구상이 세워진다. 주제란 창작할 때에 다루어지는 중심적(中心的)인 과제를 말하며, 구상은 그 주제에 부합되도록 작품이 갖추게 되는 내용이나 형식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뜻한다.

 

예컨대 한 화가(畵家)가 가을 풍경을 보고 아름다움에 감동되어 그림을 그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때의 감동이 모티브이며, 그 동기에 의해서 가을의 경치를 그림으로 나타내겠다는 목적이 세워지며 그 목적을 터로 하고 주제(主題)가 세워진다. 예컨대 특히 단풍나무에서 받은 인상이 강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가을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가을의 단풍 따위의 주제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주제가 결정되면 산, 나무, 강, 하늘, 구름 등은 어떻게 배치하며 색은 어떻게 칠할까 하는 등 구체적인 구상이 세워지게 된다.

 

하나님에 있어서 피조세계의 창조도 예술가의 창작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즉 먼저 창조의 동기로서 모티브가 있게 된다. 그것이 사랑을 통하여 기뻐하고자 한다라는 정적(情的)인 충동 즉 하나님의 심정이다. 그리고 그 자신을 닮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만물을 창조하고자 하는 창조목적이 세워진다. 그리고 인간 아담과 해와라는 주제가 정해지고 그로부터 인간과 만물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 즉 로고스가 세워진다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상(性相) 내부에서는 심정을 터로 한 목적을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 知情意)과 내적형상(內的形狀; 관념, 개념, 법칙 등)이 수수작용을 하여 구상(로고스)이 형성되는데, 이러한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形成)은 그대로 작가들의 창작의 경우에도 이루어진다. 즉 예술가는 모티브(목적)를 중심으로 하여 주제(主題)를 세우고 그 주제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수수작용을 한다. 이것이 구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형성(形成)에 해당한다(그림 7-1).

 

   

 

로댕(Rodin, 1840~1917)의 작품의 하나인 생각하는 사람은 단테(Dante, 1265~1321)의 신곡(神曲)중 지옥편(地獄篇)에 근거하여 구상된 것으로서 지옥(地獄)의 문(門) 상단 중앙에 앉아있는 시인(詩人)의 상(像)이다. 이것은 불안과 공포와 격앙 속에서 신음(呻吟)하는 지옥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명상(冥想)에 잠겨 있는 한 시인(詩人)의 모습으로서,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 때의 로댕의 모티브는, 단테의 신곡(神曲)(地獄篇)을 읽고 지옥의 고통을 면하려면, 지상에서 인간은 누구나 선(善)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강한 충격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주제는 생각하는 사람일 따름이며 웅크리고 앉아서 깊이 명상하고 있는 男子의 모습은 바로 그의 구상(構想)의 소산(所産)이다.

 

그런데 주제가 똑같은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신라시대 때의 작품으로 알려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 있다. 이것은 로댕의 작품과는 전연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석존(釋尊)의 가장 우수한 제자였다는 미륵(彌勒)이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민중의 마음이 모티브가 되었으며, 그 입가에는 중생(衆生)의 구제(救濟)에 대한 자신감에 넘치는 듯한 미소(微笑)가 감돌고 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는 지적(知的)인 고민(苦悶)의 면을 강하게 풍기고 있으나, 미륵보살(彌勒菩薩)의 경우는 정화된 정(情)이 중심이 됨으로써 대단히 고귀(高貴)하고 성스러운 상(像)으로 표현되었다. 동일(同一)한 주제하(主題下)의 이러한 양자의 차이는 동기와 구상의 내용이 다른데 기인(基因)한 것이다.

 

   2) 대상의식(對象意識)

 

창작(創作)이란, 예술가가 하나님이나 전체 앞에 대상의 입장에 서서 미(美)의 가치를 나타냄으로써 주체인 하나님이나 전체(인류, 국가, 민족)를 기쁘게 하는 활동이므로, 작가는 먼저 대상의식이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최고의 주체인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세가 대상의식의 극치(極致)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로, 인류역사를 통하여 슬퍼해 오신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위로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기쁨을 얻기 위하여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창조성까지 주셨다. 따라서 인간의 본래의 존재목적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며, 창조활동도 먼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행해야 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의식(意識)을 잃어버렸다. 이 사실이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슬픔으로 남아져 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먼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역사적인 슬픔을 위로해 드리는 입장에 서야 한다.

 

둘째로, 예술가는 하나님과 더불어 복귀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비롯한 수많은 성인이나 의인들을 위로하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을 위로한다는 것은 그들과 더불어 괴로움과 슬픔을 같이 해온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예술가는 과거와 현재의 선(善)한 사람들, 의로운 사람들의 행위를 작품(作品)에 표현코자 하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예술가는 죄악세계(罪惡世界)의 사람들에 의해 박해(迫害)받아 왔고, 지금도 핍박받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의 행위를 작품에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협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넷째로, 예술가는 다가올 이상세계(理想世界)의 도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예술가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해야 한다.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榮光이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예술가는 자연의 미(美)와 신비(神秘)를 표현함으로써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쁨 때문에 자연을 지으셨으나,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미(美)를 통하여 기쁨을 얻는 부분이 적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하나님의 속성(屬性)의 표현인 자연에 대하여 외경(畏敬)의 심정을 지니면서 자연의 깊고도 오묘한 미(美)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神秘)를 찬미(讚美)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예술가가 이와 같은 대상의식을 가지고 창작에 전력을 투입(投入)할 때,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恩惠)와 영계(靈界)로부터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거기에 참된 예술작품이 생겨나게 되며, 그렇게 될 때 그 작품(作品)은 예술가와 하나님과의 공동작품(共同作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르네상스시대(時代)의 예술가들 중에는 그와 같은 대상의식을 가지고 창작활동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등이 그러했다. 고전주의음악(古典主義音樂)의 완성자 베토벤(L. Beethoven, 1770~1827)도 그와 같은 대상의식을 가지고 작곡(作曲)을 했다.13)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불후(不朽)의 명작이 된 것이다.

 

   3) 개성(個性) p.434

 

인간은 하나님의 개별상(個別相)의 하나 하나를 닮도록 지어진 개성체(個性體)이다. 따라서 창작에 있어서도 예술가의 개성이 작품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한다. 창작은 작가의 개성-신래성(神來性)의 개별상(個別相)-의 예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개성을 발휘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한다. 실제로 위대한 예술작품에는 작가의 개성이 충분히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작품에는 베토벤의 전원교향곡(田園交響曲)이라든가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未完成交響曲)과 같이 작가의 이름이 붙게 된다.

 

  (2) 대상(對象)의 요건(要件)

 

작가의 모티브(목적), 주제(主題), 구상(構想) 등의 성상적조건이 작품 속에 잘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 대상인 작품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성상적조건을 나타내는데 가장 적합한 재료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재료를 사용하여 창작할 때 작품에서의 물질적요건(物理的要件; 構成要素)이 최고의 조화를 나타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형상적조건(形狀的條件)이다.

 

예술작품 속에서 물리적요소(構成要素)가 잘 조화되어야 한다는 말은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많은 예술가나 미학자(美學者)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했다. 즉 물리적요소의 조화란 선(線)의 율동(律動), 형태(形態)의 집합의 조화, 공간의 조화, 명암의 조화, 색채의 조화, 음률의 조화, 회화에서의 양감(量感)의 조화, 선분분할(線分分割)의 조화, 무용에서의 동작의 조화 등을 말한다. 예를 들면 선분분할(線分分割)의 조화에는 옛부터 알려져 있는 황금분할(黃金分割)이 있다. 그것은 주어진 선(線)에 있어서 선분(線分)의 단변(短邊)과 장변(長邊)의 비(比)가 장변(長邊)과 전체의 비(比)에 동등하게 되도록 자르는 것이며, 대개 5대8의 비율로 나누는 것이다. 이 비율을 사용하면 형태적(形態的)으로 안정감을 주어 미(美)를 느끼게 된다. 회화에 있어서 지평선(地平線)의 상하공간(上下空間)의 관계, 전경과 배경의 관계를 그와 같은 비율로 한다면 조화가 이루어지게 되며, 피라밋이나 고딕사원(寺院)의 첨탑에 있어서도 이러한 분할방식(分割方式)이 적용되고 있다.

 

                  五. 창작(創作)의 기교(技巧), 소재(素材), 양식(樣式)

 

다음은 창작의 요건(要件)과 관련된 창작의 기교(技巧), 소재(素材), 양식(樣式)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1) 기교(技巧)와 소재(素材)

 

원상(原相)에 있어서 창조의 2단구조(構造)란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수수작용함으로써 로고스가 형성되고, 다음에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로고스(본성상(本性相))가 형상(본형상(本形狀))과 수수작용함으로써 피조물이 만들어진다는 2단계(二段階)의 구조를 말한다. 인간의 창조활동도 모두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컨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든다든가, 농민(農民)이 논밭을 경작하는 것, 혹은 학자가 연구하거나 발명하는 것 등은 모두 창조의 2단구조(構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예술창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에 있어서 주체의 요건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대로, 모티브(목적)를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知情意)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수수작용을 하여, 구상이 만들어지는 것이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 과정이다. 또한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구상에 따라, 소재를 사용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이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 과정이다. 즉 외적사위기대는 모티브(목적)를 중심으로 한 성상(구상(構想))과 형상(素材)의 수수작용으로 형성된다. 외적사위기대의 형성에 있어서는 특수한 기술(技術) 또는 능력이 필요한데 이것을 창작에서의 기교(技巧)라고 한다.

 

다음은 작품을 만들 때 필수요소가 되는 소재에 대해서 살펴보자. 소재(素材)에는 성상적인 소재 즉 표현대상으로서의 소재(素材)와, 형상적인 소재 즉 표현수단으로서의 소재가 있다. 성상적(性相的)인 소재를 제재(題材; subject)라고 한다.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가공(架空)의 것이든 혹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건 간에 작품 가운데 묘사(描寫)되는 행위나 사건을 제목(題材)라 하는데, 회화의 경우 인물이나 풍경 등을 말한다. 따라서 제재는 주제(主題)의 내용을 뜻한다.

 

형상적(形狀的)인 소재 즉 물리적인 소재를 매재(媒材; medium)라고 한다. 조각에 있어서는 연장이나 대리석, 목재, 브론즈 등의 소재가 필요하며 회화(繪畵)에 있어서는 회구(繪具)나 캔버스 등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작품을 만드는데 있어서 이와 같은 물리적소재의 질(質)과 양(量)을 결정한 후에 구체적으로 창작을 시작하게 된다. 즉 창작(創作)은 먼저 구상을 한 다음 일정한 소재를 사용하여 구상을 작품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창작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14) 창작에서의 2단구조(構造)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그림 7-2와 같다. p. 437

 

   

          그림 7-2. 창작의 이단구조

 

  (2) 창작(創作)의 양식(樣式)과 유파(流派)

 

창작의 양식(樣式)이란 예술적 표현의 방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요컨대 창작의 2단구조(構造)를 어떠한 방법으로 형성해 가는가라는 문제이다. 그 중에서 특히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을 어떻게 하는가라는 것, 즉 구상의 양식(樣式)이 기본적인 것이 된다. 내적사위기대는 모티브(목적)를 중심으로 하여 내적성상(內的性相)(知情意)과 내적형상(內的形狀, 主題)이 수수작용을 하여 형성된다. 따라서 모티브(목적)가 다르면 작품은 완전히 다르게 표현된다.

 

모티브(목적)가 같더라도 내적성상이 다르면 작품은 다르게 표현된다. 또 내적형상이 달라도 작품은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즉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中의 3위치에 세워지는 정착물(定着物)이 달라짐에 따라서 결과(구상)는 다르게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이 세가지 정착물중에서 하나라도 다르면, 형성되는 구상은 다르게 되고 그 결과 작품도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생기는 창작의 다양성(多樣性) 속에서 여러 가지 창작의 양식(樣式)(style)이 형성된다. 유파(流派; school)도 그 한 예이다.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대표적인 유파(流派)를 살펴보자.

 

   1) 이상주의(理想主義; Idealism)

 

이것은 인간 또는 세계를 이상화(理想化)하여 조화가 이룩된 이상적인 미(美)를 표현코자 하는 입장이다. 16세기 르네상스시대 예술가의 대다수가 이상주의적(理想主義的)이었으며 라파엘로가 그 대표자라 할 수 있다.

 

   2) 고전주의(고전주의(古典主義); Classicism)

 

그리스-로마 예술의 표현형식(表現形式)을 규범으로 하는 17~18세기의 예술경향을 말하는 것으로서 형식의 통일성(統一性)과 균형(均衡)을 중시했다.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서는 괴테(J. W. Goethe, 1749~1832)의 파우스트가 있으며, 화가로서는 다비드(J. David, 1748~1825), 앵그르(J. Ingres, 1780~1867) 등을 들 수 있다.

 

   3) 낭만주의(浪漫主義)(Romanticism)

 

형식(形式)을 강조한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생긴 것이 낭만주의이며, 인간의 내면적(內面的)인 정열을 단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던 18~19세기의 예술 경향을 말한다. 작가 유고(V. Hugo 1802~1885), 시인(詩人) 바이런(G. Byron, 1788~1824), 화가 드라크르와(Delacroix, 1798~1863) 등을 들 수 있다.

 

   4) 사실주의(寫實主義)(Realism)?자연주의(自然主義)(Naturalism)

 

사실주의(寫實主義)는 현실주의(現實主義)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나타난 것으로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描寫)하려고 하였으며, 19세기 중반경에서 후반에 걸쳐 나타났다. 화가 고로(J. Corot, 1796~1875), 밀레(F. Millet, 1821~1875), 끄루베(G. Courbet, 1819~1877), 작가인 플로베르(G. Flaubert, 1821~1880)가 그 대표자이다. 사실주의는 더욱 더 실증주의적(實證主義的), 과학주의적(科學主義的)인 경향을 띠고 발전했는데, 그 후 자연주의로 이행하였다. 자연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졸라(Zola, 1840~1920)를 들 수 있으며, 미술상에 있어서의 사실주의(寫實主義)와 자연주의(自然主義)는 크게 구별이 없었다.

 

   5) 상징주의(象徵主義; Symbolism)

 

상징주의(象徵主義)는 현실주의(現實主義), 혹은 자연주의(自然主義)에 대한 반발로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나타난 것으로, 종래의 전통이나 형식을 버리고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문학의 일파(一派)이다. 시인(詩人) 랭보(A. Rimbaud, 1854~1891)가 그 대표라 할 수 있다.

 

   6)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

 

이것은 순간적으로 포착한 모습이야말로 사물의 진실(眞實)된 모습이라고 하여 개별적(個別的), 순간적(瞬間的)인 형태나 색채를 포착하려고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으로서 마네(E. Manet, 1832~1883), 모네(C. Monet, 1840~1926), 르노아르(Renoir, 1841~1919), 드가(Degas, 1834~1917) 등이 그 대표적인 화가이다.

 

   7) 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

 

인상주의(印象主義)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상을 묘사한데 대하여 반대로 인간 내부의 감정을 외부로 표현코자 한 것이 표현주의(表現主義)이다. 20세기 초엽에 인상주의(印象主義)에 대한 반발로서 출현했으며, 화가 칸딘스키(V. Kandinsky, 1866~1944), 마르크(F. Marc, 1880~1916), 작가 웨펠(F. Werfel, 1890~1945) 등이 대표자이다.

 

   8) 입체주의(立體主義; Cubism)

 

20세기 초엽의 미술운동으로서 그 특색은 기하학적 형체(幾何學的 形體)를 단위로 하는 구성에 있으며, 대상을 일단 단순한 형체로 분해한 후, 그것을 자기의 주관에 의하여 재구성(再構成)코자 하였다. 그 대표적인 화가가 피카소(P. Picasso, 1881~1973)이다.

 

   9) 통일주의(統一主義; Unificationism)

 

그러면 통일예술론(藝術論)의 창작태도는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이상주의(理想主義)와 현실주의(現實主義)가 통일된 것으로서 이것을 통일주의라 한다(그림 7-3).

 

   

                그림 7-3. 통일주의 창작양식

 

통일주의(統一主義)는 지상천국의 실현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현실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현실주의(現實主義)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에 살면서도 본연의 세계를 복귀한다는 이상(理想)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상주의(理想主義)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실과 이상의 통일이 원리적인 창작태도이다. 예컨대 현실의 죄악세계(罪惡世界)속에서 창조이상세계를 동경하면서 고난을 극복해가는 희망에 찬 인간상을 그리는 것이 통일주의(統一主義)이다. 통일주의는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한 심정주의(心情主義)이다. 따라서 통일주의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이상적인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거기에는 낭만주의적인 요소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종래의 낭만주의(浪漫主義)를 그대로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남녀의 사랑을 그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 인류의 참부모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형제자매로서의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남녀의 사랑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상기(上記)의 여러 양식(樣式)이나 유파(流派)를 대별(大別)하면, 넓은 의미에 있어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로 나눌 수가 있다. 이 때의 현실주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描寫)한다는 뜻의 현실주의가 아니고 그 당시의 현재에 유행(流行)하던 유파(流派)라고 하는 뜻의 현실주의이며, 이상주의는 인간이나 세계를 이상화(理想化)해서 묘사한다는 뜻의 이상주의가 아니라 그 당시의 현재의 유파에 반대하고 미래(未來) 지향적(指向的)으로 새로이 대두(擡頭)하고자 하는 유파라는 뜻의 이상주의인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유파는 어느 것이거나, 처음에는 이상주의였다가 나중에는 모두 현실주의의 입장이 되어 버리곤 했다. 통일주의는 이와 같은 의미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와의 통일을 뜻하는 창작양식(創作樣式) 또는 창작태도(創作態度)이다. 그런데 이 통일주의적인 양식(樣式)은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창조목적을 중심한 하나님의 창조방식을 닮은 양식이기 때문에 작가의 개별적인 차이가 나타나면서도 양식(樣式) 자체(自體)는 영원불변이다. 以上으로 창작(創作)의 요건(要件)의 항목(項目)을 전부 마치고 다음은 감상(鑑賞)의 요건(要件)을 다루고자 한다.

 

                  六. 감상(鑑賞)의 요건(要件)

 

예술작품의 감상도 수수작용의 한 가지 형태로서, 여기에도 주체(감상자)와 대상(작품)이 각각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건이 있다. 먼저 주체가 갖추어야 할 요건을 살펴보자.

 

  (1) 주체(主體)의 요건(要件)

 

먼저 성상적(性相的)요건(要件)으로서 감상자는 첫째로, 작품에 대하여 적극적(積極的)인 관심을 갖는 일이다. 이 적극적 관심을 터로 하고 미(美)를 향수(享受; enjoyment)하려고 하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작품을 관조(觀照; intuition), 또는 정관(靜觀; contemplation)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잡념(雜念)을 버리고 맑은 심경으로 작품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조화를 이루는 것, 즉 생심과 육심이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게 된다.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진선미(眞善美)의 가치의 추구를 일차적(一次的)으로 하고, 물질적인 가치의 추구를 2차적으로 함을 뜻한다.

 

다음으로 감상자는 일정한 교양, 취미, 사상, 개성 등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작품을 만든 작가의 성상면(性相面) 즉 모티브(目的), 주제(主題), 구상(構想)이나 작가의 사상, 시대적-사회적 환경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감상자가 자기의 성상(性相)을 작품의 성상에 맞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상자는 작품과의 상사성(相似, 서로 닮음性)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밀레의 작품을 깊이 감상하고자 한다면 그 당시의 사회적 환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47년의 2월혁명 당시, 프랑스는 사회주의운동(社會主義運動)의 분위기 속에 싸여 있었으나 밀레는 그러한 분위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농민(農民)들의 순박한 모습에 매우 마음이 끌려서 농민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표현코자 했다.15) 그와 같은 밀레의 심경(心境)을 알게 되면 그의 그림에 대한 미(美)가 한층 더 깊게 느껴지게 될 것이다.

 

또한 감상자는 작품과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을 보다 높이기 위하여, 감상하면서 주관작용(主觀作用; Subject Effect)에 의한 부가창조(附加創造)를 병행한다. 주관작용이란 감상자가 자기의 주관적인 요소를 대상(작품(作品))에 부가하고, 작가가 만든 가치요소(價値要素)에 새로운 가치(要素)를 주관적으로 더 첨가하여, 그 합쳐진 가치를 대상가치로서 향수(享受)하는 것을 말한다. 주관작용은 립스(T. Lipps, 1851~1914)의 감정이입(感情移入; Einfuhlung, empathy)에 해당한다.

 

예컨대 연극이나 영화에 있어서, 배우는 연기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우는 척한다. 그러나 그 때 관객은 배우가 정말로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함께 우는 일이 가끔 있다. 관객이 자기의 감정을 배우에게 투영(投影)하여 주관적으로 대상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감정이입(感情移入) 즉 주관작용(主觀作用)의 한 예이다.16) 주관작용에 의해서 감상자는 작품과 보다 강하게 일체화(一體化)하고 한층 더 깊은 기쁨을 얻게 된다. p.444

그리고 감상자는 관조(觀照)에 의해서 발견된 여러 가지 물리적요소들의 조화를 총합하고, 그 전체적인 통일적조화와 작품속에 있는 작가의 성상(性相)(構想)을 결부시킨다. 즉 작품에 있어서의 성상과 형상의 조화를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주체(主體)(감상자)의 형상적요건(形狀的要件) 즉 신체적요건(身體的要件)에 대해서 살펴보자. 감상자는 건전한 시청각의 감각기관(感覺器官, 神經, 大腦) 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이므로 성상적인 미(美)의 감상에 있어서도 건전한 신체적조건(身體的條件)이 필요한 것이다.

 

  (2) 대상(對象)의 요건(要件)

 

다음은 대상의 요건에 관하여 살펴보자. 대상(作品)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란, 먼저 미(美)의 요소 즉 물리적 여러 요소(構成要素)가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작품의 성상(모티브, 목적, 주제, 구상)과 형상(물리적 제요소)도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감상에 있어서 작품은 감상자 앞에 놓여진 완성품(完成品, 완제품)이므로 이와 같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조건을 감상자가 마음대로 변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감상자는 주관작용(主觀作用)에 의하여 작품과의 사이에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을 높일 수 있다. 또 감상에 보다 적합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하여 작품의 전시(展示)에 있어서 위치, 배경, 조명(照明) 등의 환경을 적절히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3) 미(美)의 판단(判斷)

 

다음은 미(美)의 판단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가치는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수수작용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라는 원리에 의해 이상과 같은 감상의 조건을 구비한 주체(鑑賞者)와 대상(作品)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미(美)가 판단(判斷)(결정)된다. 즉 감상자의 미(美)에 대한 추구욕이 작품에서 오는 정적자극(情的刺戟)으로 채워짐으로써 미(美)가 판단되고 결정되는 것이다. 작품에서 오는 정적자극이란 작품 속의 미(美)의 요소가 주체의 정적기능(情的機能)을 자극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미(美) 그 자체는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작품 속에 있는 어떤 미(美)의 요소가 감상자의 정적기능을 자극하여, 감상자에 의해서 아름답다고 판단되어야 비로소 그 요소가 현실적인 미(美)가 된다.

 

다음에 미(美)의 판단과 인식에 있어서의 판단의 차이에 대하여 언급해 보자. 인식에 있어서의 판단은 주체(내적요소-원형)와 대상(외적요소-감각적내용)의 조합(照合)에 의해 이루어진다. 미적판단(美的判斷)도 마찬가지로 주체와 대상의 조합에 의해 성립된다. 이 조합(照合)의 단계에서 지적기능이 작용하면 인식이 되고 정적기능(情的機能)이 작용하면 미적판단(美的判斷)이 된다. 즉 대상이 가지는 물리적요소의 조화를 지적(知的)으로 포착하면 인식이 되고 정적(情的)으로 포착하면 미적판단(美的判斷)이 되는 것이다(그림 7-4). 그런데 지(知)와 정(情)의 기능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므로 미적비판(美的批判)에도 인식을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이 꽃은 아름답다라는 미적판단(美的判斷)은 이것은 꽃이다라는 인식을 동반하게 된다. 이 관계를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7-4와 같다. p. 441

 

   

                                그림 7-4 미적판단과 인식

 

               七. 예술(藝術)의 통일성(統一性)

 

다음은 예술의 통일성(統一性)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예술활동에는 몇 가지의 상대적인 두 측면(요소(要素))이 있다. 예컨대 上記의 창작(創作)과 감상(鑑賞)을 위시해서 내용과 형식, 보편성과 개별성, 영원과 순간 등의 각각(各各)의 통일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대적(相對的)인 측면(요소)은 본래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의 예술활동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상대적인 요소를 분리하거나 한편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통일예술론에서는 이들의 상대적측면(相對的側面)의 통일성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1) 창작(創作)과 감상(鑑賞)의 통일

 

보통 창작은 예술가가 하고, 감상은 일반 사람들이 한다는 식으로 분리(分離)해서 생각해 왔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양자는 주관활동(主管活動)의 두 가지 계기에 불과하다. 만물을 주관하기 위해서는 인식과 실천이라는 상대적인 두 측면이 필요한데, 정적기능(情的機能)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인식과 실천이 바로 예술에 있어서의 감상과 창작에 해당한다. 인식과 실천은 각각 주체(人間)와 대상(萬物, 자연)의 수수작용의 두 가지 회로(回路)의 일방(一方)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인식이 없는 실천은 있을 수 없고, 실천이 없는 인식도 있을 수 없다. 창작과 감상에 있어서도 창작이 없는 감상은 있을 수 없고 감상이 없는 창작 또한 있을 수 없다.

 

예술가는 창작을 하면서 자기의 작품을 감상한다. 또 감상자도 작품을 감상하면서 창작을 하게 된다. 감상에 있어서의 창작이란, 앞에서 말한 주관작용에 의한 부가창조(附加創造)를 말한다.

 

  (2) 내용과 형식(形式)의 통일

 

오늘날까지 형식을 중시(重視)하는 고전주의(古典主義)와 이러한 형식을 무시하고 내용을 중시하는 유파(流派)가 있었으나, 예술작품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의 관계는 성상과 형상의 관계이므로 본래는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모티브, 목적, 주제, 구상 등의 성상적인 내용과 소재를 사용하여 내용을 작품으로 표현할 때, 형식이 잘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한 미학자(美學者)는 형식(形式)이란 실은 내용의 형식이며 내용이란 다름 아닌 형식의 내용이다'17)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내용과 형식은 통일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p.448

 

  (3) 보편성(普遍性)과 개별성(個別性)의 통일

 

모든 피조물(被造物)은 보편상과 개별상이 통일되어 있는 것처럼 예술에도 보편성과 개별성의 통일이 나타난다. 먼저 예술가 자신이 보편성과 개별성의 통일이다. 예술가는 각각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그는 일정한 유파(流派)에 속하거나 일정한 지역적(地域的), 시대적(時代的)으로 공통된 창작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개별성(個別性)이고 후자는 보편성(普遍性)이다.

 

이와 같이 예술가 자신이 보편성과 개별성을 통일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도 필연적으로 보편성과 개별성의 통일로서 나타내게 된다. 즉 작품에는 개별적인 미(美)와 보편적인 미(美)가 통일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문화에 있어서도 보편성과 개별성이 통일되어 나타난다. 즉 어떤 지역의 문화는 그 지역의 특성을 지니면서 그 문화가 속해 있는 보다 넓은 지역의 문화와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한국의 석굴암(石窟庵)의 불상은 신라 문화의 대표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 중에는 그리스예술과 불교문화를 융합(融合)시킨 국제적인 간다라미술(美術)의 요소가 함께 포함되어 있음도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즉 석굴암의 불상(佛像)은 민족적인 요소(신라예술)와 초민족적인 요소(간다라美術)의 통일, 즉 개별성과 보편성의 통일이다.

 

여기에서 민족문하(民族文化)와 통일문화와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각 민족은 각각 전통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는데, 앞으로 통일문화가 형성되는데 있어서 전통적인 민족문화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예술의 당파성(黨派性)과 상부구조론(上部構造論)을 주장하던 마르크스주의 예술론은 전통적인 민족문화를 무시하였으나 통일주의(統一主義)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통일주의는 각 민족의 민족문화를 보존하면서 통일문화를 형성한다. 즉 개성(個性)이 다른 민족문화의 정수(精髓)를 보존하면서 한층 더 차원 높은, 보편적인 종교와 예술로써 통일문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4) 영원(永遠)과 瞬間의 통일

 

모든 피조물은 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 靜的四位基臺)와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 動的四位基臺)의 통일체이므로 불변과 변화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의 불변은 영원을 뜻하며, 변화는 순간 순간의 변화이기 때문에 바로 순간을 뜻한다. 따라서 피조물이 불변과 변화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말은, 바로 피조물이 영원과 순간의 통일을 이루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에 있어서도 영원적인 요소와 순간적인 요소가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밀레의 만종(晩鐘)에는 교회와 기도하는 농부와 그의 아내, 시골풍경 등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서도 영원적인 요소와 순간적인 요소의 통일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나 기도하는 모습 등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에 속하는 것이지만, 시골의 풍경이나 부부가 입고 있는 의복 등은 그 시대 즉 순간에 속하는 것들이다.

 

또 하나의 예로서 수반(水盤)에 꽂혀 있는 꽃을 들 수 있다. 수반에 꽂혀 있는 꽃 그 자체는 옛날부터 꽂혀온 것이지만, 꽃을 꽂는 방법(方法)이나 수반(水盤)은 시대마다 특유하다. 따라서 꽃꽂이에도 영원과 순간의 통일이 나타나 있다. 작품을 감상할 때도 이와 같이 영원속의 순간 혹은 순간속의 영원을 느끼면서 감상한다면 미(美)는 한층 돋보일 것이다.

 

                  八. 예술(藝術)과 윤리

 

최근(最近)에 이르러 예술의 저속화(低俗化)가 자주 지적된다. 이것은 예술과 윤리의 관계가 문제가 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술은 만물(萬物, 자연)주관(主管)의 한 형식이다. 본래 인간은 소생, 장성, 완성이라는 3단계의 성장과정을 거쳐서 완성한 후에 만물을 주관 하게 되어 있다. 완성이란 사랑의 완성, 인격(人格)의 완성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먼저 사랑의 인간, 즉 윤리人이 된 후 만물을 주관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예술가는 동시에 윤리人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과 미(美)의 관계에서 윤리와 예술의 관계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사랑은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이고, 미(美)는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받는 정적(情的)인 자극이다. 따라서 사랑과 미(美)는 표리일체(表裏一體; 겉과 속이 일체가 되는 것)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취급하는 윤리와 미(美)를 취급하는 예술은 불가분(不可分)의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참다운 미(美)는 참다운 사랑을 기초(基礎)로 하여 성립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예술가들은 그와 같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예술가들도 윤리성(倫理性)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고한 철학적(哲學的) 근거(根據)가 예술가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 특히 문예작가(文藝作家)들은 사랑을 테마로 삼아 작품활동을 해왔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랑은 타락(墮落)한 세계의 비원리적인 사랑이었다.

 

예술지상주의자(藝術至上主義者)로 알려진 오스카 와일드(O. Wilde, 1854~1900)는 예술상(藝術上)의 탐미주의(耽美主義)를 주창하면서 동성애(同性愛)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실의(失意)와 궁핍(窮乏) 속에서 지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또 낭만주의(浪漫主義) 시인인 바이런(G. G. Byron, 1788~1824)도 방탕한 여성편력(女性遍歷)을 계속하면서 창작하고, 유랑(流浪) 생활을 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다름 아닌 그들의 타락한 사랑을 표현하거나 혹은 그 고뇌(苦惱)를 그린 것이다.

 

한편 참사랑을 표현한 작가도 있었다. 톨스토이(L. N. Tolstoi, 1828~1910)가 그러하다. 그는 러시아의 타락한 상류사회(上流社會)의 생활상을 폭로하면서 참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즉 그의 작풍(作風)은 한편에서는 현실을 묘사하는 리얼리즘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주의(理想主義)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톨스토이와 같이 참사랑을 표현한 작품을 남기거나, 참다운 사랑을 추구하면서 창작활동(創作活動)을 하고 있는 예술가는 그리 흔치 않은 것이다.

 

                  九. 미(美)의 유형

 

다음은 미(美)의 유형을 다루고자 한다. 종래의 미학(美學)이 미(美)의 유형을 다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의미에서 이같은 제목을 다루려는 것이다.

 

  (1) 통일사상에서 본 사랑과 미(美)의 유형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미(美)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보는 사람(주체)에 따라 결정되는 미(美)는 달라지고, 또 대상(예술작품, 자연물)의 종류에 따라서도 미(美)는 달라진다. 그와 같이 미(美)에는 무한한 다양성(多樣性)이 있으나 비슷한 미(美)를 한 데 모음으로써 미(美)의 유형이 정해질 수 있다. 종래의 학자들 중에는 이러한 미(美)의 유형을 제시한 학자(學者)도 있었던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랑은 미(美)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고, 미(美) 또한 사랑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부모(父母)가 자식을 사랑하면 할수록 자식은 그만큼 아름답게 보이는 것처럼 사랑이 양적(量的)으로 증대하면 미(美)도 양적(量的)으로 크게 느껴진다. 사랑과 미(美)는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상대적인 회로(回路)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주체와 대상이 사랑을 주고받을 때, 주는 편은 사랑을 주고, 받는 편은 그것을 미(美)로써 받는다. 이와 같이 사랑과 미는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미(美)의 유형을 생각하려면 먼저 사랑의 유형을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정을 통하여 분성적(分性的)으로 나타난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그리고 형제자매(兄弟姉妹)의 사랑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형태(形態)의 분성적인 사랑이 바로 사랑의 기본형이다. 이 기본형의 사랑은 다시 1)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2)남편의 사랑, 아내의 사랑 3)아들의 사랑, 딸의 사랑으로 구분된다.

 

3대 분성적(分性的) 사랑이 다시 양성(兩性)으로 분화(分化)되어 여러 가지의 편측적(片側的)인 사랑(片側愛)이 된다. 그리고 이 6종의 편측애는 각각 다시 세분(細分)되어서 더욱 다양(多樣)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아버지는 엄격성(嚴格性), 아량성(雅量性), 광활성(廣闊性), 장중성(莊重性), 심오성(深奧性), 경외성(畏敬性) 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은 엄한 사랑, 아량있는 사랑, 넓은 사랑, 장중한 사랑, 깊은 사랑, 외경의 사랑 등으로 나타나며, 어머니는 온화(溫和)하고 평화로운 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은 우아(優雅)한 사랑, 고상(高尙)한 사랑, 따뜻한 사랑, 섬세한 사랑, 부드러운 사랑, 다정(多情)한 사랑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남편(男便)의 사랑은 남성적인 것으로서 아내에 대해서 적극적인 사랑, 믿음직한 사랑, 비장(悲壯)한 사랑, 과단성(果斷性)있는 사랑 등으로 나타난다. 아내의 사랑은 여성적인 것으로서 남편에 대하여 소극적(消極的)인 사랑, 내조적(內助的)인 사랑, 유순(柔順)한 사랑, 알뜰한 사랑 등으로 나타난다.

 

또 자녀의 사랑은 부모에 대하여 효성(孝誠)스러운 사랑, 복종(服從)하는 사랑, 의지(依支)하는 사랑, 어리광스러운 사랑, 익살스런 사랑으로서 나타난다. 그 외에 형(兄)의 남동생이나 여동생에 대한 사랑, 누나의 남동생이나 여동생에 대한 사랑, 동생의 형이나 누나에 대한 사랑, 여동생의 오빠나 언니에 대한 사랑도 있는 바, 이것들은 모두 자녀(子女) 상호간의 사랑으로서 역시 자녀의 사랑의 개념에 포함된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사랑의 기본형(基本型)이 편측화(片側化)되고 다시 다양화(多樣化)되어 무수한 색깔의 사랑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유형에 대응하여 (美)의 유형이 나타난다. 먼저 사랑의 3형태(三形態)에 대응하여 부모(父母)美, 부부(夫婦)美, 子女美라는 3형태(三形態)의 미의 기본형이 세워진다. 그것이 또 1)父性美, 母性美 2)남편美, 아내美 3)子息美, 女息美의 여섯 가지의 편측애(片側愛)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또 다시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진 미(美)로서 세분화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부성미(父性美)......엄격미(嚴格美), 아량미(雅量美), 광활미(廣闊美), 장중미(莊重美), 심오미(深奧美), 경외미(畏敬美)

 

모성미(母性美)......우아미(優雅美), 고상미(高尙美), 온정미(溫情美), 섬세미(纖細美), 유화미(柔和美), 다양미(多情美)

 

남편(男便)의 美......남성미(男性美), 적극미(積極美), 신뢰미(信賴美), 비장미(悲壯美), 과단미(果斷美), 용감미(勇敢美), 신중미(愼重美)

 

아내의 美......여성미(女性美), 소극미(消極美), 내조미(內助美), 순종미(順從美), 비애미(悲哀美), 상냥미(明朗美), 알뜰美

 

자식미(子息美).....남아적(.男兒的)인 특성을 지닌 효성미(孝誠美), 복종미(服從美), 의지미(依支美), 유약미(幼若美), 익살미(滑稽 美), 어리광美 등의 남성미(男性美)

 

여식미(女息美).....여아적(.女兒的)인 특성을 지닌 효성미(孝誠美), 복종미(服從美), 의지미(依支美), 유약미(幼若美), 익살美(滑稽 美), 어리광美 등의 여성미(女性美)

 

아버지는 자식에 대하여 언제나 따뜻한 사랑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식이 옳지 못한 일을 할 때는 엄하게 꾸짖기도 한다. 그 때, 자식은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나 후에는 감사한다. 봄과 같은 따뜻한 사랑뿐만 아니라 겨울과 같은 엄한 사랑도 사랑의 한 형태인 것이다. 그와 같은 엄한 사랑도 자식에게는 美로서 느껴지게 된다. 이것이 엄격미(嚴格美)이다.

 

또한 자식(子息)이 어떤 잘못을 크게 저지른 다음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으로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다고 하자. 그런데 아버지는 괜찮다고 용서해 줄 때가 있을 것이다. 자식은 그 때 아버지에게서 바다와 같은 넓은 미(美)를 느끼게 된다. 그것이 아량미(雅量美)이다. 즉 아버지로부터 여러 가지의 사랑을 받으면 거기에 따라 자식은 여러가지 색조(色調)의 미(美)를 느끼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과 다르다. 어머니의 사랑은 대단히 온화(溫和)하고 평화(平和)스럽다. 그와 같은 어머니로부터의 사랑을 자식은 우아미(優雅美), 유화미(柔和美) 등으로 느끼게 된다.

 

남편의 사랑은 아내에게 있어서 남성다움, 늠름성 등으로 느끼게 된다. 그것이 곧 남성미(男性美)이다. 그리고 아내의 사랑은 남편에게 있어서 여성다움, 부드러움, 상냥함 등으로 느끼게 된다. 그것이 여성미(女性美)이다.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자식의 본성(本性)이다. 자식은 공부를 잘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는 것 등을 통해서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한다. 그것이 자녀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을 부모는 미(美)로써 귀엽게 느끼게 된다. 혹은 익살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익살미라고 한다. 게다가 자식이 성장함에 따라 연령(年齡)에 상응한 미를 부모는 느끼게 된다. 이러한 미(美)는 같은 자녀(子女)라 하더라도 남아(男兒)에게서 느끼는 미(美)와 여아(女兒)에게서 느끼는 미(美)가 또한 다르다. 전자(前者)는 자식미(子息美)요 후자(後者)는 여식미(女息美)이다. 자녀들끼리 즉 형제자매(兄弟姉妹)사이에도 형제 및 자매의 사랑에 대응하여 특유한 미(美)가 나타난다. 즉 형제미 및 자매미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어렸을 때, 가정에서 성장하는 동안에 다양한 미(美)의 감정(感情)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양한 미(美)의 감정이 복합되거나 분리(分離) 또는 변형되면서 천태만상(千態萬象)의 미(美)를 느끼게 된다. 자연이나 예술작품을 대할 때에 느껴지는 미(美)의 감정은 그 유래가 모두 이와 같이 가정에서 형성된 미(美)의 유형에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기반으로 한 인간관계에서 형성되는 여러 가지 형태의 미(美)가 자연으로 옮겨지고 작품으로 옮겨진 것이 자연미(自然美), 작품미(作品美) 등의 미의 유형이다.

 

예컨대 험준(險峻)한 산이나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보게 될 때 장엄(莊嚴)한 미(美)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부성미(父性美)의 연장이요 변형이다. 조용한 호수나 화창한 평야(平野)에서 느끼는 미(美)는 모성(母性美)의 연장이요 변형이다. 또 동물의 새끼나 식물의 싹이 돋아 나올 때의 귀여움은 자녀미(子女美)의 연장이요 변형이다. 예술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모(聖母)마리아의 그림이나 상(像)은 모성미(母性美)의 표현이며 고딕양식(樣式)의 건축은 여성미(女性美)의 연장 혹은 변형으로 볼 수 있다.

 

  (2) 종래의 미(美)의 유형

 

미학(美學)中에 있어서 기본적인 미(美)의 유형이 된 것은 우미(優美; Grazie)와 숭고미(崇高美; Erhabenheit)이다. 우미(優美)란 아주 긍정적이고 직접적으로 쾌감(快感)을 주는 미(美)이고, 균형이 잡힌 조화의 미(美)이다. 한편 숭고미(崇高美)란 높이 솟은 산이나 소용돌이치는 성난 파도와 같이 경이(驚異)의 감동, 경외(畏敬)의 감정 등을 주는 미(美)이다.

 

칸트는 또한 美(優美)에는 자유美(Freie Schonheit)와 부용미(附庸美; anhangende Schonheit)가 있다고 하였다. 자유미란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미(美)로서 어떤 특정한 개념에 의해서도 구속되지 않는 미(美)를 말한다. 부용미(附庸美)란 입는 데 어울린다거나, 사는 데 어울리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 같은, 어떤 목적(혹은 개념(槪念))에 의존하는 미(美)를 말한다.

 

그 밖에 일반적으로 예술론에서 거론(擧論)되고 있는 것으로서 순수미(純粹美; Reinschone), 비장미(悲壯美; Tragische), 익살미(Komische) 등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래의 미(美)의 유형은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분류되는지 애매하다. 거기에 대하여 통일예술론(藝術論)에서의 미(美)의 유형은 위에서 말한 대로 명확한 원리에, 즉 사랑의 유형에 근거하고 있다.

 

            十.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 비판(批判)

 

  (1)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

 

공산주의의 혁명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중의 하나가 예술 활동이었으며, 그 창작 방법은 사회(社會)主義리얼리즘이었다. 그러면 사회주의리얼리즘이란 어떠한 것일까. 레닌은, 예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서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술(藝術)은 인민(人民)의 것이다. 예술의 가장 깊은 근원(根源)은 광범위한 노동자(勞動者)계급(階級)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그들의 감정(感情), 사상(思想)의 요구를 기초로 하며, 또 그들과 더불어 성장해야 한다.18)

 

문학(文學)은 당(黨)에 속해야 한다. ...... 비당적문학가(非黨的文學家)를 매장하라! 초당문학가(超黨文學家)들을 매장하라! 문학의 일은 전 프롤레타리아트의 일거리의 일부(一部), 전 노동자계급의 모든 의식적(意識的)인 전위(前衛)에 의해서 운전(運轉)되는, 하나의 위대한 사회민주주의적(社會民主主義的) 기계의 `톱니바퀴와 나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19)

 

또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 고르키(M. Gorky, 1868~1936)는 사회주의리얼리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p.457

 

우리들 작가는 자본주의의 더러운 범죄적(犯罪的)인 모든 것, 그 비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의도(意圖)의 모든 것을 명백히 간취(看取)할 수 있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영웅적인 활동의 위대성의 모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는 그 높은 관점에 - 오로지 그 관점에 서는 것이, 생활에 있어서나 창작에 있어서나 필요하다.20)

 

현대에 있어서 작가는 동시에 두 가지 역할 즉 〔사회주의(社會主義)에 대한〕 조산부(助産婦)의 역할과 〔자본주의에 대한〕 무덤파기꾼의 역할을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21)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주요한 목표(目標)는 사회주의적인 그리고 혁명적인 세계관(世界觀) 즉 세계감각을 고취(鼓吹)하는데 있다.22)

 

즉 시(詩)를 짓는 것, 소설을 쓰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등등은 자본주의의 범죄(犯罪)를 폭로하고 사회주의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읽는 사람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감(正義感)에 불타면서, 혁명을 위하여 떨쳐 일어나도록 작품을 창작(創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p.458

 

1932년, 스탈린의 지도하에서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소련 예술가들에 의해 공식화(公式化)되면서 문학, 연극, 영화, 회화, 조각, 음악, 건축 등의 모든 예술분야에 적용되게 되었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의 측면에서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정확히 묘사할 것. ②예술적 표현과 사회주의정신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의 혁명(革新) 및 노동자(勞動者)들의 교육이라는 과제(課題)와 일치(一致)시킬 것.

 

그러면 이와 같은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성립시킨 이론的 근거(根據)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르크스의 토대(土臺)와 상부구조(上部構造)에 관한 이론이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비판(經濟學批判) 서언(序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산(生産) 諸관계(關係)의 총체(總體)는 사회의 경제적 기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이 현실의 토대가 되어서 그 위에 법률적(法律的), 정치적(政治的)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세워지며, 또 일정한 사회적 의식(意識) 제형태(諸形態, 여러 형태) (예술을 포함(包含))는 이 현실의 토대에 대응(對應)하고 있다.23)

 

또한 스탈린은 토대(土臺)와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생겨나면 그것은 최대의 능동적인 힘이 되어서 자기의 토대가 강하게 되도록 능동적으로 협력하며...... , 상부구조가 토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토대에 봉사하기 위해서이며, 토대가 형성되고 강하게 되는 것은 능동적(能動的)으로 돕기 위해서이며, 수명이 다한 토대를 낡은 상부구조와 함께 근절시키려고 능동적으로 싸우기 위해서인 것이다.24)

 

상부구조(上部構造)는 어떤 경제적 토대가 살아서 일하는 한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사는 기간은 길지 않으며, 한 경제적 토대의 근절(根絶)과 함께 근절되고 소멸(消滅)한다.25)

 

이상을 총합(總合)하여 요약하면 공산주의예술은 자본주의 제도와 그 상부구조인 정치, 법률, 예술 등을 근절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공산주의사회(사회주의사회)에서 노동자들을 교육하면서 그 경제체제의 유지(維持)?강화(强化)에 적극적으로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은 이론을 근거로 하여 사회주의리얼리즘이 세워진 것이다.

 

  (2)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에 대한 비판

 

문학은 당(黨)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레닌의 말, 작가는 인간정신의 기사(技師)라는 스탈린의 말, 작가는 사회주의의 조산부(助産婦)요, 자본주의의 무덤파기꾼이다라는 고르키의 말처럼 예술가나 작가에게는 당(黨)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만이 요구되며, 예술가나 작가의 개성(個性)이나 자유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혁명 이후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지기까지 소련의 예술가, 작가들은 감시와 억압속에서 살아 왔다. 그리고 특히 스탈린이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추진(推進)한 1930년대의 후반에는 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이단(異端)의 이름으로 체포(逮捕)되고 숙청(肅淸)되었던 것이다.26) 스탈린의 사후(死後)에도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상당한 기간 동안 예술이론으로서 군림(君臨)해 왔지만, 그러는 동안에 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반체제(反體制)로 돌아서게 되었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비판한 미술평론가(美術評論家) 리드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지적(知的) 또는 독단적인 목적을 예술에 쓸데없이 억지로 밀어 넣으려는 기획(企劃)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27)

 

스탈린상(賞)을 수상(受賞)했다가 나중에 스탈린 비판자로 돌아섰던 소련의 작가 이리아 에렌부르그(I. Ehrenburg, 1891~1967)는 방직공장(紡績工場)의 여직공을 그린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이며 인간의 감정(感情)이 아니라 생산과정에 불과하다'28)라고 하면서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 그려지는 인간상(像)을 혹평했던 것이다. 예술평론가 조요한(趙要翰)도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있어서의 인간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p.460

 

그들(소련(蘇聯)의 작가... 필자)이 묘사한 농민과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일말(一抹)의 불안(不安)도 엿볼 수 없는 희한한 주인공(主人公)들이었다. 그것은 무갈등(non-conflict)의 이론이 유포(流布)되면서 더욱 그러하였다. 즉 인간적인 깊은 고민(苦悶)과 관련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자기의 독특한 생활이 없는 주인공들이다. 그러니 거기에 인간의 내적세계(世界)가 표현될 리가 만무하다.29)

 

1986년 4월, 소련 우크라이나공화국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그것과 관련하여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원전(原電)의 참사(慘事) 원인이 소련의 관료주의에 책임이 있음을 확인하고 비극이다. 참사도 문제였지만 우리 사회에 관료주의가 이처럼 뿌리깊게 박혀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더욱 슬픈 일이다라고 개탄하였으며, 당(黨)과 정부(政府) 차원에서 시도했다가 실패한 관료주의의 청산(淸算) 노력을 작가들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6월말(1986)의 제8차 소련 작가동맹전국대회에 즈음하여 관리(官吏)의 위선을 풍자한 고르키의 본을 받아서 여러 작가들은 관리에 대해서 더욱 비판적인 글을 써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일부 작가들은 그렇다면 문학작품의 사전 검열을 폐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소련의 예술가, 작가들은 오랫동안 사회주의리얼리즘이라는 이름아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직전에 백가쟁명정책(百家爭鳴政策)의 일환으로 한 때 문화인들에게 자유가 주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대부분의 문화인들은 사회주의정책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 후 등소평이 집권한 후 실용주의(實用主義)를 채택하여 문화인들에게 자유를 조금씩 허락해 주었더니, 중공의 저명한 이론가 王若水는 사회주의에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소외(疎外)가 있음을 폭로하였다.

 

이상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한 예술, 그리고 당(黨)의 방침에 순응(順應)해야 하는 예술로서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완전히 거짓된 예술임을 알았을 것이다.

 

  (3) 작가(作家)에 의한 공산주의(共産主義)의 고발

 

공산주의의 지도자들은 예술가나 작가들에 대하여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입장에서 공산주의를 찬미(讚美)할 것을 강요했지만, 참다운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나 작가들은 오히려 공산주의시대에도 공산주의의 허위(虛僞)를 신랄하게 고발했다.

 

그 전까지 공산주의에 매혹(魅惑)되어 있던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Gide, 1869~1951)는, 1936년 고르키의 장례식에 초청되어 참석한 후, 약 일개월간 소련을 여행(旅行)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그가 실제로 본 소련사회에 대한 실망을 소비에트 기행기(紀行記)에서 솔직히 표현하였다. 그는 서언(序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년 전 나는 소비에트연방(聯邦)에 대한 나의 감탄과 사랑을 감히 선언했다. 그 나라에서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실험이 시도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희망(希望)으로 부풀게 했고 또 거기에 대하여 우리들은 무한(無限)한 진보(進步)와 인류를 이끌어 갈 만한 비약을 기대하였던 것이다.……우리들의 마음과 정신(精神)속에서 우리들은 미래의 문화 그 자체를 소비에트연방의 빛나는 운명에 연결시키고 있었다.30)

 

그런데 그는 1개월간(一個月間)의 여행도중 소련의 민중들과 접촉해 본 감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비에트에 있어서는 어떤 일이든지, 그리고 모든 것에 일정한(한 가지) 의견(意見) 이외의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전부터, 그리고 확고하게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러시아인과 말하고 있어도 마치 러시아人 전체와 말하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든다.31)

 

그리고 드디어 그는 소련사회(蘇聯社會)를 다음과 같이 심하게 비난(非難)하였다.

 

오늘날 소비에트에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수락(受諾)하는 정신(精神)이며, 순응주의(順應主義)이다.……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어떤 나라에서도, 예컨대 히틀러시대의 독일에서 마저 인간의 정신이 이렇게까지 不자유하고, 이렇게까지 억압(抑壓)되어 있고, 공포(恐怖)에 떨며 종속(從屬)되었을까.32)

 

소련의 작가 파스테르나크(B. L. Pasternak, 1890~1960)는 아무도 모르게 닥터 지바고를 써서 러시아혁명에 대한 환상(幻想)을 토로하고 사랑의 사상을 호소했었다. 그 책은 소련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외국에서 출판되어 대단한 호평(好評)을 받았으며 그것으로 그에게는 노벨문학상이 수여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는 국내(國內)의 작가동맹으로부터 제명(除名)되었고, 반동적(反動的) 반소작가(反蘇作家)로서 비난받게 되었다. 파스테르나크는 그 책속에서 그 자신의 양심(良心)을 상징(象徵)하는 지바고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p.463

 

마르크스주의(主義)가 과학(科學)이라구요? ……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 분야이기에는 너무도 자제(自制)가 부족(不足)하다고 생각해요. 과학은 보다 더 균형적(均衡的)일 것이라고 보아요. 마르크스主義가 객관적(客觀的)이라구요? 나는 마르크스주의보다 사실에서 더 유리(遊離)되어 있고 더 자기폐쇄적(自己閉鎖的)인 사상(思想)은 없다고 봅니다.33)

 

그는 또 혁명가(革命家)가 지식인들에게 취한 태도를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훌륭했지요. 일을 성실하게만 해 주시면 대환영이지요. 사상(思想) 특히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면 더욱 좋구요. 환영(歡迎)은 당연지사(當然之事)지요. 잘 해 주어요. 일에 전념하고, 투쟁심을 갖고 탐구(探求)해 주어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일거리를 잡고보면 사상이라는 것은 단순한 겉치레일 뿐이며, 실제로는 혁명과 권력의 좌(座, 자리)에 있는 者를 구가(謳歌)하는 말씀의 액세서리(부속품)에 불과하였지요.34)

 

  (4) 통일사상에서 본 공산주의예술론의 오류(誤謬) p.464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오류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원인은 예술을 작가(作家)의 개성(個性)을 살리면서 전체를 위한 창작 또는 자신을 위한 감상과, 미(美)와 기쁨의 창조활동으로 보지 않고, 당(黨)의 방침에 순응하면서 인민을 교육하는 어용수단(御用手段)으로서의 예술로 본 데 있다. 예술가는 작품속에서 개성(個性)을 최대한 발휘(發揮)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인류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는 개성(個性)을 박탈하고 작품을 획일화(劃一化)시켜 버렸다. 따라서 거기에서 참다운 예술작품이 생길 리가 없는 것이다.

 

둘째 원인은 하나님을 부정함으로써 예술활동의 근본 기준을 상실(喪失)해 버린 데 있다. 그 대신 당의 방침에 입각한 제멋대로의 기준을 세워서 예술가, 작가를 그 기준에 일치하도록 강요(强要)했던 것이다. 셋째 원인은 미(美)와 사랑이 표리(表裏)의 관계이기 때문에 예술과 윤리도 표리(表裏)의 관계여야 함을 모르는 데에 있다. 공산주의사회는 사랑의 윤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예술은 사랑이 없는 예술 또는 공산당의 인민지배(人民支配)의 도구로서의 예술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넷째 원인은 예술이 결코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예술을 상부구조로 본 데에 있다. 그 때문에 예술은 경제체계(經濟體系(土臺))의 시녀(侍女)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예술은 경제체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 자신도 경제학비판(經濟學批判)의 마지막 부분의 서설(序說)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곤란(困難)한 것은 그리스의 예술이나 서사시가 사회적인 발전형태에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곤란한 것은 그것들이 우리들에게 아직도 예술적인 즐거움을 주고, 어떤 점에서는 규범(規範)으로서 그리고 도달(到達)할 수 없는 이상(理想)으로서의 의의(意義)를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있다.35)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의하면, 그리스의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일부인 예술이나 문학이 지금쯤(마르크스 當時)은 형태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야 하며,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것에 아무런 흥미(興味)도 느낄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예술이나 일리아드(Iliad), 오디세이(Odysseia)와 같은 서사시(敍事詩)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뿐만 아니라, 생활의 규범(規範)으로까지 삼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유물사관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곤란을 느낀다고 실토(實吐)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마르크스 자신이 토대(土臺)와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이론의 오류를 자증(自證; 스스로 인증)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욕망(基本的 欲望)이 있다. 이 욕망은 아무리 타락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그리고 어느 시대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이다. 따라서 작품중에 진(眞)-선(善)-미(美)의 가치가 나타나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만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그리스의 예술이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음은 그것에 크건 작건 간에 인간이 바라는 영원(永遠)한 진(眞)-선(善)-미(美)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거의 동시대에 소련사회의 부패를 다같이 고발하였지만, 작풍(作風)에 있어서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작가, 고르키와 톨스토이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고르키는 폭력(暴力)에 의하여 자본주의사회를 타도(打倒)하고자 공산주의에 동조(同調)하면서, 예술가의 사명(使命)은 혁명을 고무(鼓舞)하는데 있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예술가였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운동(革命運動)을 미화(美化)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고르키의 작품인 어머니는 사회주의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한 노동자의 무학(無學)의 어머니가 혁명운동으로 투옥(投獄)된 외아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일념(一念)에서, 계속해서 그 아들을 설득하려다가 도리어 그 아들에게 설득당하여 사회의 모순성(矛盾性)을 자각하고 드디어 혁명운동의 적극적(積極的)인 참가자가 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한편 톨스토이는 당시의 사회악(社會惡)을 고발하면서 그 해결의 길은 사랑에 의한 참다운 인간성(人間性)의 회복에 있다고 설파(說破)하였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의 하나가 부활(復活)이다. 배심원(陪審員)으로서 법정에 선 한 귀족청년이, 자기가 젊었을 때 한 순간의 잘못으로 유혹(유혹(誘惑))한 하녀가 범죄하여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실을 본다.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고민하던 끝에 회개하여 그녀를 구할 결심을 한다. 드디어 그녀는 갱생(更生)되고 그 청년도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다는 내용이다.

 

고르키가 택한 것은 외적인 사회혁명의 길이고, 톨스토이가 택한 것은 내적인 정신적(精神的) 혁명(革命)의 길이었다. 어느 것이 올바른 길이었을까. 고르키가 택한 폭력혁명에의 길은 그 후 사회주의사회의 실태가 보여준 바와 같이 인간성의 억압(抑壓)과 관료주의(官僚主義)의 부패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톨스토이가 택한 길은 비록 사회전체를 구한다는 점에서는 성공치 못한 점이 있지만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점에서는 올바른 방향(方向)의 길이었다.

 

통일사상은 인간과 사회가 다 같이 본연의 모습으로 개혁(改革)되는 가장 올바른 길을 추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인간과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정확히 앎으로써 본래의 인간의 모습, 본연의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방향(方向)을 향하여 인간과 사회를 개혁해 가면 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통일사상이 주장하는 새로운 예술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사랑)을 중심으로하여 이상주의(理想主義)와 현실주의(現實主義)가 통일된 통일주의예술이다. 그것은 본연의 인간과 본연의 사회라는 이상(理想)을 향하여 현실을 개혁(改革)해 나아가는 예술인 것이다.

 

         제8장 역사론 (第8章 歷 史 論)

 

Theory of History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역사론(歷史論)은, 사실(史實)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류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어 어떠한 법칙(法則)에 의해서 흘러 왔으며, 어떠한 방향(方向)으로 흘러 가고 있는가 하는 것 등 역사 해석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일종의 역사철학으로서 통일사상에 근거한 역사 해석을 말한다. 그리하여 이 역사론을 통일역사론 또는 통일사관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역사론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미래상(未來像)을 확립함으로써 역사의 올바른 방향성(方向性)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문제(現實問題)를 해결하는 방안이 도출(導出)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의 복잡한 세계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명확한 비전을 가진 확고한 역사관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늘날까지 많은 역사관이 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되었으나 공산주의의 역사관, 즉 유물사관처럼 영향력이 있는 사관(史觀)은 없었다. 유물사관은 인류사를 계급투쟁(階級鬪爭)의 역사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계급투쟁(階級鬪爭), 즉 혁명에 의해서 무너지고 공산주의사회가 필연적으로 도래(到來)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 나름의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유물사관은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신념의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와의 대결은 역사관과 역사관의 대결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자유주의세계에는 유물사관에 대처할 수 있는 기존(旣存)의 역사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자유주의세계는 그동안 끊임없이 공산주의의 공세(攻勢)와 위협(威脅)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유물사관도 결국은 쓰러지고 말았으니, 이것은 바로 文총재님의 통일역사론(統一歷史論)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통일역사론은 새로운 신관(神觀)에 근거한 사상인 바 지금까지 수십년동안 공산주의와의 이론的 대결에 있어서 유물사관의 허구성(虛構性)을 신랄(辛辣)하게 폭로해 왔다. 통일역사론은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통일된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세계를 향하여 흘러왔음을 역사적 사실로써 실증적(實證的)으로 해석하는 역사이론인 것이다.

 

               一. 통일사관(統一史觀)의 기본입장(基本立場)

 

통일사관의 기본입장은 통일원리중의 복귀원리를 근거로 한 입장이다. 그런데 복귀원리(復歸原理)에 근거해서 통일사관은 역사를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첫째는 죄악사(罪惡史)로서, 둘째는 재창조(再創造)역사로서, 셋째는 복귀(復歸)역사로서 역사를 해석한다. 그리고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역사에 법칙이 작용했는가 하는 문제와, 역사의 시원(始元)이나 방향(方向)의 문제도 제기되곤 하기 때문에, 이러한 제문제도 본항(本項)에서 함께 다루고자 한다.

 

  (1) 죄악사(罪惡史)

 

먼저 통일사관(統一史觀)이 보는 죄악사(罪惡史)에 관해서 살펴보자. 역사는 인간 조상의 타락에 의해서 출발한 죄악사(罪惡史)이다. 그 때문에 인류역사는 원리적이고도 정상적인 역사로 출발할 수 없었고, 따라서 역사는 대립(對立)과 갈등(葛藤), 전쟁(戰爭)과 고통(苦痛), 슬픔과 참상(慘狀) 등으로 얽혀진 혼란의 역사로서 이어져 왔다. 이것이 역사가 죄악사(罪惡史)란 말의 뜻이다. 따라서 역사상에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이러한 타락문제의 해결없이는 불가능하다.

 

  (2) 재창조(再創造)역사

 

다음은 인류역사가 재창조역사(再創造歷史)라고 하는데 대해서 살펴보자. 인류 시조의 타락으로 인류는 본연의 인간과 본연의 세계를 상실했다. 즉 본연의 인간은 영적(靈的)인 죽음의 상태에 떨어지게 되었고, 본연의 세계는 파괴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인간을 재창조하고 세계를 재건설하는 섭리를 하시게 되었다. 이러한 섭리의 역사가 재창조역사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 적용(適用)되었던 법칙(法則)(창조의 법칙)과 말씀이 그대로 역사의 섭리에도 적용(適用)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말씀(로고스)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재창조도 말씀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재창조라 하여 우주를 다시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타락은 인간만이 하였기 때문에 재창조는 인간만의 재창조이다. 즉 인간만을 말씀으로 재창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인(聖人), 의인(義人), 예언자(豫言者) 등 정신적 지도자를 세운 후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진리(말씀)를 전해서 그들을 영적(靈的)으로 인도해 오셨다.

 

  (3) 복귀(復歸)역사

 

다음은 복귀역사(復歸歷史)에 관하여 살펴보자. 인간 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본연의 세계(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본연의 인간상을 잃었으며, 非본연(本然)의 모습 또는 비원리적(非原理的)인 모습이 되어서 비원리적(非原理的)인 세계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연의 세계와 본연의 인간상은 다시 회복해야 할 이상(理想)으로 남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창조가 실패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비원리적인 세계와 인간을 본연의 상태로 복귀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인류역사의 시작과 동시에 죄악(罪惡)의 인간과 죄악(罪惡)의 세계를 본연의 상태로 복귀하는 섭리(復歸攝理)를 하시게 된 것이다. 인류역사가 복귀섭리역사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리의 하나님이고, 인간의 타락은 인간이 일정한 조건(條件)을 지키지 않은데 있었으므로, 복귀섭리에는 일정한 법칙이 작용되게 된다. 이것이 복귀의 법칙이다.

 

  (4) 역사의 법칙성(法則性)

 

역사관을 세움에 있어서 역사 속에서 법칙을 발견한다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조건의 하나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역사의 법칙을 제시(提示)한 종교가나 학자는 거의 없었다. 예컨대 기독교의 섭리사관을 두고 볼 때, 설득력이 있는 법칙은 제시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기독교의 사관(史觀)은 오늘날 과학(사회과학)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학문분야에서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근세에 이르러 헤겔은 역사의 설명에 변증법(辨證法; 觀念辨證法)을 적용하여, 인류역사는 절대정신(理性)이 변증법적으로 자기자신을 외부세계에 전개해 나온 변증법적 발전의 과정으로서, 최후에는 자유가 완전히 실현된 이성국가(國家)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헤겔이 이상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프러시아는 자유가 실현되지 않은 채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 버렸다. 헤겔이 말한 역사법칙은 현실에서 유리(遊離)된 것이었다. 또 20세기에 들어와 토인비가 방대(尨大)한 문명사관(文明史觀)을 수립하여 문명의 발생(發生), 성장(成長), 붕괴(崩壞), 해체(解體)의 과정을 상세히 분석했지만 거기에서도 명확한 역사의 법칙은 제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은 역사의 법칙을 명시했으며, 그것을 과학적인 역사관이라고까지 자칭(自稱)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통일사관은 역사에 법칙이 작용해 왔음을 인정함은 물론, 그 법칙에 창조의 법칙과 복귀의 법칙의 두 가지 법칙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법칙이야말로 실제로 역사에 작용한 참된 법칙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법칙이 제시됨으로써 유물사관의 허구성이 여실히 폭로되었던 것이다. 유물사관이 주장하는 법칙이란 실은 사이비(似而非) 법칙이며, 독단적(獨斷的)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통일사관은 신학적 입장이면서도 훌륭히 역사법칙을 정립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비과학적이라고 간주(看做)해 왔던 신학적 역사관도 이를 사회과학으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5) 역사의 시원(始元)과 방향(方向)과 목표(目標)

 

역사가 언제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역사의 시원(始元)에 관해서, 통일사관은 인간의 창조와 타락을 그 시원으로 본다. 이것은 기독교의 섭리사관(攝理史觀)과 같은 입장이다. 또 인류의 시조(始祖)에 관하여 일원론(一元論)(monogenism)이냐 다원론(多元論; polygenism)이냐 하는 문제가 있으나, 통일사관은 인류의 시조가 아담과 해와 뿐이라고 하는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한다. 창조는 하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창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의 목표는 높은 차원에서의 창조이상세계로의 복귀(復歸)이며, 역사의 방향은 이 복귀의 방향이다. 따라서 역사의 목표와 방향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 목표에 도달하는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섭리하에서 인간이 -특히 섭리적인 중심인물(중심인물(中心人物))들이- 책임분담을 다 하게 될 때, 그때그때의 섭리의 뜻은 성공적으로 달성(達成)되게 된다. 따라서 역사가 흘러가는 과정이 직행(直行)이냐 우회냐, 단축이냐 연장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즉 역사의 과정은 비결정적이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특히 섭리적 인물들이 주어진 사명을 훌륭히 다 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을 책임분담수행(責任分擔遂行) 또는 그냥 책임분담(責任分擔)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역사의 목표는 결정적이지만 그 과정이 비결정적이라고 보는 입장, 즉 역사의 진행(進行)과정이 인간의 책임분담 혹은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견해를 책임분담론(責任分擔論; theory of responsibility, responsibilism)이라고 부른다.

 

                  二. 창조(創造)의 법칙(法則)

 

위에서 말한 역사의 법칙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류역사는 재창조역사인 동시에 복귀섭리역사이다. 따라서 역사의 변천(變遷)에는 창조의 법칙과 복귀의 법칙이 작용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창조의 법칙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창조의 법칙에는 (1)상대성(相對性)의 법칙 (2)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 (3)상극(相剋)의 법칙 (4)중심(中心)의 주관(主管)의 법칙 (5)3단계완성(完成)의 법칙 (6)6수기간(期間)의 법칙 (7)책임분담(責任分擔)의 법칙 등이 있다.

 

  (1) 상대성(相對性)의 법칙(法則)

 

피조물 하나하나는 모두 내적으로 서로 상대적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요소를 지니고 있다. 주체적 요소와 대상적 요소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개체는 외적으로도 다른 개체와의 사이에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고서 존재하고 운동한다. 이러한 관계 하에서 생물들은 생존(生存)하고 번식(繁殖)하고 발전(發展)한다. 여기서 주체와 대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양자가 서로 마주 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주체와 대상이 마주 대함에 있어서, 공동목적(共同目的)을 중심하고 대할 때와 공동목적(共同目的)없이 대할 때가 있다. 여기의 주체와 대상이 공동목적을 중심하고 서로 마주 대하는 것, 즉 상대적 관계를 맺는 것을 특히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한다라고 말한다.

 

여하간에 이와 같이 한 개체가 반드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상대성(相對性)의 법칙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회(歷史)가 발전하기 위한 필수조건(必須條件)은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의 모든 분야에서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요소(相對物)가 상대관계를 맺는 일이다. 이러한 상대적관계가 형성되지 않고는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요소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 주요소(主要素)와 종요소(從要素; 主個體와 從個體)를 말한다.

 

그 예로서 정신과 육체, 마음과 몸, 이데올로기와 경제적조건(物質的條件), 정신(精神)문화와 물질문명, 정부와 국민, 경영자와 노동자, 노동자와 생산용구, 기계의 주요부분과 종속부분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이와 같은 상대적요소(相對的要素)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상호간에 작용이 벌어져서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모든 영역에서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2)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

 

사물의 내부에서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인 두 요소가 상대적관계를 맺으면 이때에 일정한 요소 또는 힘을 주고 받는 작용이 벌어진다. 주체와 대상간의 이와 같은 상호작용을 수수작용(授受作用)이라고 한다. 이 수수작용(授受作用)이 행해지는 곳에서 발전이 이루어진다. 역사의 발전도 이러한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다. 즉 역사에 있어서 모든 사회분야에서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요소(相對物)가 상대적 관계를 맺은 후 공동목적을 중심하고 원만 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각 분야(分野)의 발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예컨대 국가가 존재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국민이 국가의 번영을 공동목적으로 하여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맺고 원만한 수수작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기업에 있어서도 기업의 번창을 위해서는 자본가(資本家), 경영자(經營者), 노동자(勞動者), 기술자(技術者), 기계(機械) 등이 서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이루어 원만한 수수작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상대성(相對性)의 법칙(法則)과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法則)은 표리일체(表裏一體)의 관계에 있으며, 이 두 법칙을 합쳐서 광의(廣義, 넓은 의미)의 수수작용의 법칙이라고 한다.

 

수수작용은 조화적이지, 결코 대립적(對立的)이거나 상충적(相衝的)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물사관은 대립물의 투쟁으로 역사가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투쟁은 발전을 위한 하나의 계기(契機)가 될 수는 있어도, 투쟁이 행해지는 동안 발전은 오히려 정지(停止)하거나 후퇴(後退)한다. 그러므로 발전에 관한 한 유물사관의 주장은 전혀 잘못된 것으로서 계급투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위장이론(僞裝理論)에 불과했던 것이다.

 

  (3) 상극(相剋)의 법칙(法則)

 

수수작용은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요소 또는 상대적(相對的) 개체(個體)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주체와 주체(혹은 대상과 대상)는 서로 배척한다. 이와 같은 배척현상을 상극작용(相剋作用)이라고 한다. 상극작용은 본래 자연계에 있어서는 잠재적(潛在的)인 것일 뿐 표면화되지 않으며,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을 강화 또는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컨대 자연계에서 양전기와 양전기(혹은 음전기와 음전기)는 서로 배척한다. 이것은 주체(陽電氣)와 대상(陰電氣)의 수수작용을 강화?보강하기 위한 작용이며, 그 자체로서 표면화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연계에서는 이와 같은 상극작용으로 말미암아 질서가 교란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주체와 주체의 상극작용은 두 지도자간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혁명시에 새로운 지도자와 과거의 지도자와의 대립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은 상극작용에 있어서 두 주체(보수파의 주체와 개혁파의 주체)는 각각의 대상층(인민대중)과 수수작용을 하여 각각의 세력을 형성한다. 그 결과 두 세력이 대결하게 된다. 이 때, 두 주체(지도자)중의 한편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향에 보다 가까운 입장에 서게 되고 다른 한편은 보다 먼 입장에 서게 된다. 전자(前者)를 선(善)편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악(惡)편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회에 있어서 주체와 주체의 상극작용은 선악의 대결 또는 선악(善惡)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이 투쟁에서 선(善)편이 승리하면 역사의 진행방향은 조금씩 선(善)의 방향으로 전환(轉換)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타락한 사회라 할지라도 상극작용은 그 본래의 수수작용의 보완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국가와 국가 또는 민족과 민족간에 평화적으로 경쟁하면서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경우가 그것이다.

 

  (4) 中心의 주관(主管)의 법칙(法則)

 

다음은 중심의 주관의 법칙에 대하여 설명한다.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주체는 중심이 되고, 대상은 주체의 주관을 받게 된다. 그 결과 대상은 주체를 중심으로 원환운동(圓環運動)을 하게 된다. 자연계에 있어서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전자가 핵을 중심으로 도는 것과 같이, 물리적인 원환운동이 벌어진다. 그러나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주체의 마음과 대상의 마음과의 관계이므로, 대상의 마음이 주체의 명령, 지시, 부탁 등에 쾌히 따른다는 의미에서의 원환운동이 벌어진다.

 

복귀역사에서 하나님은 중심인물을 세운 후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적합한 방향, 즉 선(善)의 방향으로 역사를 인도해 가지만, 그 경우 사회 환경을 먼저 조성하여 놓은 다음, 중심인물(中心人物)로 하여금 그 환경을 하나님의 섭리에 맞는 방향으로 수습하게 한다. 따라서 중심인물에게는 항상 환경을 수습(주관)해야 하는 책임분담이 주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있어서 중심인물이 사회환경을 주관하는 것을 중심의 주관의 법칙이라 한다. 이것은 선민(選民)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에도 적용되는 법칙이다.

 

하나님은 인류역사의 중심사로서, 구약시대(舊約時代)에는 이스라엘 민족사를, 예수 이후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신약시대(新約時代)에는 서양사를 섭리해 나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중심사(中心史)를 섭리함에 있어서 중심인물(中心人物)을 세워 나오셨다. 구약시대의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열왕(列王)들, 예언자들 그리고 신약시대의 어거스틴, 여러 교황들, 루터, 칼빈 등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프랑크왕국의 찰스대제(大帝), 영국의 헨리 8세, 미합중국(美合衆國, USA)의 워싱턴, 링컨 등의 정치적지도자들도 각 시대에 세워진 중심인물들이었다.

 

한편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妨害)해온 사탄도, 자기를 중심으로 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사탄편의 중심인물을 세운 후,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면서 사회 환경을 주관해 나왔다. 汎게르만주의(범게르만主義)를 주창하면서 세계를 제패(制覇)하려고 한 카이젤(빌헬름2세)이나 히틀러, 공산주의사상을 확립한 마르크스, 공산주의혁명을 지도한 레닌, 스탈린, 모택동 등이 그와같은 인물들이다. 그들의 사상이나 지도력이 없는 전체주의(全體主義)의 대두(擡頭)나 공산주의혁명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토인비는 문명의 성장은 창조적(創造的) 개인(個人) 혹은 창조적(創造的) 소수자(少數者)에 의해서 성취(成就)되는 사업이다.'1)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수자(多數者)인 대중은 창조적 개인 또는 창조적 소수자의 지도를 받아서 그들을 따른다고 하였다. 토인비의 이러한 주장은 바로 역사에 중심의 주관의 법칙이 작용해 왔음을 말해 준다. p. 479

 

유물사관은 유물론의 입장에서 지도자보다도 환경(사회환경)을 더 중시함으로써, 사회환경의 기층(基層)인 인민대중이 사회발전에서 결정적(決定的)인 역할(役割)을 다 해왔으며, 지도자는 다만 일정한 사회적 조건의 제약을 받으면서 활동을 해왔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정신이 물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정신이 물질의 제약을 받는 것처럼, 지도자의 정신은 물질적환경인 사회환경의 제약을 받는다는 유물론을 근거로 한 사고방식이 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는 사회환경(人民大衆)을 물질적 개념으로, 중심인물(지도자)을 정신적인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지도자는 주체이며, 인민대중은 대상으로서 지도자는 그 종교적 혹은 사상적인 이념을 가지고 대중이나 사회를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

 

  (5) 3단계완성(完成)의 법칙(法則)

 창조원리에 의하면, 모든 사물의 성장이나 발전은 소생, 장성, 완성의 3단계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식물은 씨에서 싹이 나는 단계, 줄기가 자라고 잎이 생겨나는 단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단계를 통하여 그 성장을 완성한다. 이 법칙이 역사에도 적용되어서 3단계의 과정을 통하여 재창조(再創造)의 섭리가 이루어져 왔다. 즉, 어떤 하나의 섭리적인 행사가 실패로 끝나면 비슷한 섭리가 3차(三次)까지 되풀이되면서 3단계에서는 반드시 완성하곤 하였다.

 

예컨대 복귀섭리의 기대(基臺)를 세우시려던 섭리가, 가인과 아벨의 헌제(獻祭)실수로 인하여 아담가정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노아가정을 거쳐 아브라함가정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으며, 또 아브라함가정에 있어서도 아브라함의 代에 이루려던 복귀기대조성의 섭리가 아브라함의 제물실수(祭物失手)로 이삭의 대(代)를 거쳐서 3대(三代)째인 야곱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메시아(後아담)의 강림(降臨)도 마찬가지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은 제2의 아담으로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러나 십자가형(十字架刑)으로 인하여 예수님마저 창조목적을 완전히 이룰 수 없게 되자, 제3의 아담으로서 재림주(再臨主)를 강림케 하신 것이다.

 

재림주(再臨主)를 맞기 위한 준비기간인 근세(近世)에 있어서 헤브라이즘 복고운동(復古運動)과 헬레니즘 복고운동(復古運動)도 각각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전개되었다. 헤브라이즘 복고운동이란 신본주의운동(神本主義運動), 즉 종교개혁을 말하며, 루터, 칼빈을 중심으로 하는 제1차 종교개혁에 이어 웨슬레, 폭스 등에 의한 제2차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날 통일교회를 중심하고 제3차 종교개혁(第三次 神本主義運動)이 전개되고 있다.

 

한편 헬레니즘 복고운동(復古運動)이란 인본주의운동(人本主義運動)을 말한다. 제1차 인본주의운동인 르네상스에 이어 제2차 인본주의운동으로서 계몽사상운동(啓蒙思想運動)이 일어났고, 이어서 제3차 인본주의운동인 공산주의운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어 왔다.

 

헤브라이즘 복고운동(神本主義運動)은 하나님편의 복고운동(復古運動)으로서 전개되었으며, 헬레니즘 복고운동(復古運動)은 인본주의운동으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인본주의운동은 인간을 점차 하나님으로부터 분리(分離)시키는 사탄편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마침내 무신론(無神論)(공산주의)으로 흐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신본주의운동(神本主義 運動)이 3단계를 통하여 성공하면, 사탄편의 사상운동인 인본주의운동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편의 3단계완성의 법칙은 사탄편에 있어서 3단계 필멸(必滅)의 법칙이 되는 것이다. 즉 제3차 신본주의운동인 통일교회운동의 성공과 제3차 인본주의운동인 공산주의운동의 멸망은 모두 필연지사(必然之事)이다.

 

  (6) 6수기간(期間)의 법칙(法則)

 

성서(聖書)에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이어서 아담의 창조까지 6일이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아담의 창조는 6수기간을 앞에 두고 개시되었는데, 이 기간은 아담을 만들기 위한 준비기간(準備期間)이었다. 마찬가지로 재창조(再創造)역사에 있어서도 제2아담인 메시아(예수) 강림(降臨)의 6수기간前 즉 6세기전(世紀前)부터 하나님은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신 것이다.

 

기원전 6세기경(世紀頃)에 유대민족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여 그들의 不신앙을 회개토록 하신 것은 6세기후(世紀後)에 강림할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였다. 기원전 6세기경 중국에서는 공자(孔子)(551?~479 B.C.)가 나와서 유교를 세웠으며, 공자이후 6세기에 걸쳐서 제자백가(諸子百家)로 알려진 여러 사상가들이 나타나 중국사상의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이루었다. 인도에도 B.C. 6세기경 석가(釋迦; 565~485. B.C.)가 나타나 불교를 세웠으며, 또 비슷한 시기를 전후하여 우파니샤드((upanisad)'는 '가까이(upa)'와 '다가앉다(nisad)'의 합성어로, 1대1로 은밀히 전수되는 비의를 뜻한다))라고 불리우는 고대 인도철학서(古代 印度哲學書)가 출현하였다. 같은 시기에 중동지방(中東地方)에서는 조로아스터교(敎)가 일어났으며, 그리스에서는 철학, 예술, 과학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전부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였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각 지역의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선(善)한 방향으로 인도하여, 그들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哲學者) 야스퍼스는 기원전(紀元前) 5백년경을 전후하여 중국, 인도, 이란, 팔레스타인, 그리스 등에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이 정신적 지도자들(종교의 開祖나 哲人)이 나타난 것에 주목하고 그 시대를 추축시대(樞軸時代)라고 불렀다.2) 거의 같은 시대에 그와 같은 정신적 지도자들이 서로 약속이나 하듯이 세계의 객지(各地)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역사적인 비밀(秘密)이요, 풀 수 없는 수수께끼3)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6수기간(數期間)의 법칙을 이해함으로써 풀려지게 된다.

 

재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제3아담인 재림(再臨)메시아를 맞이할 때에도 메시아재림의 6수기간전(數期間前)부터 하나님은 재림맞이 준비를 시작하셨다. 그것이 14세기경부터 태동(胎動)하기 시작하여 16세기에 이르러 본격화(本格化)되었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文藝復興) 운동이다.4) 18세기말에 일어난 산업혁명(産業革命), 그리고 그 후의 과학과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도 역시 이 재림(再臨)을 위한 준비였다. 복귀섭리(復歸攝理)역사에 의하여 하나님은 20세기에 재림(再臨)메시아를 지상에 보내시기 위하여 이와 같은 준비를 해오신 것이다.

p. 483

예수를 맞이하기 위하여 6세기전(世紀前)에 나타난 종교가나 철학자들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가진 천사장(天使長)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한 사랑과 진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部分的)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만이 참사랑을 실천하며 참진리를 밝힐 수 있으며, 그 사랑과 진리를 통하여 비로소 그때까지의 종교나 사상의 모든 미해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의 교리나 철학의 내용은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가르친 불완전한 사랑이요, 불완전한 진리이기 때문에 메시아강림 때가 되면 어차피 미해결의 문제들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그때까지의 종교는 무력화(無力化)하게 된다. 이 때 메시아가 강림해서 종래의 무력화(無力化)한 종교나 사상을 절대적인 참사랑과 참진리로써 보완(補完)하여 소생시킨 후 종교통일, 사상통일을 이루면서 통일세계(統一世界)를 실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통일세계는 실현되지 못한 채 그 사명(使命)은 재림주에게로 인계되었으며, 따라서 유교, 불교, 동양철학, 그리스철학(哲學) 등도 통일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재림때까지 남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초림(初臨) 때에 이루어야 했던 종교통일, 사상통일의 과업을 재림 때에 비로소 완성하게 된다. 즉 재림주는 이때까지의 종교나 사상의 미해결의 문제를 하나님의 참사랑과 참진리로써 해결한 후, 종교통일?사상통일을 이루어서 통일세계를 실현하게 된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재림주를 맞기 위한 6세기전(世紀前)부터의 준비기간은 메시아초림시(初臨時)의 6세기전(世紀前)과 같이 굳이 새로운 종교나 철학을 세울 필요가 없으며, 기존(旣存)의 종교나 철학을 잔존(殘存)시키면 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불교 등이 남아져 왔던 것은 그 때문이다. 단, 중동(中東)에 있어서의 조로아스터敎는 선악(善惡)의 2신(二神)의 종교였기 때문에 7세기경에 유일신교(唯一神敎)인 이슬람교에 의해서 대치(代置)되었던 것이다.

 

  (7) 책임분담(責任分擔)의 법칙(法則)

 

인간시조 아담과 해와에게는 하나님도 간섭(干涉)할 수 없는 책임분담(責任分擔)이 주어져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우주의 주관주(主管主)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책임분담의 터 위에서 아담과 해와가 자신들에게 부여된 인간으로서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만물에 대한 주관주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재창조(再創造)의 섭리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특히 攝理的인 중심인물(中心人物))의 책임분담이 완전히 합쳐짐으로써 同 재창조(再創造)의 섭리가 완성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이란, 인간(섭리적 인물)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신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해서, 책임을 지고 완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섭리적 인물들이 자신의 지혜(智慧)와 노력(努力)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책임분담을 다 하면 복귀섭리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지만, 만일 그 인물이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하면 그를 중심으로 한 섭리는 실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섭리는 연장되고 일정한 수리적 기간을 경과한 후에 하나님은 새로운 인물을 소명(召命)하여 동일한 섭리를 다시 반복하시는 것이다.

 

인류역사가 죄악역사(罪惡歷史)로서 오늘날까지 연장되어온 것은, 섭리적 인물들이 계속해서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 달림으로써 통일세계(統一世界)를 실현하지 못한 것은 세례요한이나 제사장, 율법학자 등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공산주의가 전세계를 혼란(混亂)에 빠뜨린 이유도 산업혁명 이후 기독교국가의 지도자들이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현시점에 있어서도 민주주의국가의 지도자들은 대오각성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의 참말씀과 참사랑으로 공산주의국가 사람들까지 인도하여, 하나님편에 서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참된 세계평화와 함께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실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三. 복귀(復歸)의 법칙(法則)

 

인류(人類)역사는 재창조(再創造)역사인 동시에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창조이상세계를 회복하기 위한 복귀역사이다. 여기에 창조의 법칙과는 다른 개별(別個)의 법칙들이 역사에 작용해 왔다. 이것이 일련의 복귀의 법칙이다. 이 법칙에는 (1)탕감(蕩減)의 법칙 (2)분립(分立)의 법칙 (3)4수복귀(四數復歸)의 법칙 (4)조건적섭리(條件的攝理)의 법칙 (5)거짓과 참의 先後의 법칙 (6)종(縱)의 횡적전개(橫的展開)의 법칙 (7)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 등이 있다.

 

  (1) 탕감(蕩減)의 법칙

 

타락이란 인간이 본래의 위치와 상태를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복귀란 그 잃어버린 본래의 위치와 상태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의 위치와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條件)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복귀를 위한 그 조건을 탕감조건이라고 한다.

 

인간이 세워야 할 이 탕감조건은 첫째로 믿음의 기대(基臺)요, 둘째로 실체기대(實體基臺)이다. 믿음의 기대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中心人物)를 만나서 그를 중심하고 일정한 수리적(數理的) 탕감기간(蕩減期間)을 거쳐서 일정한 조건물을 세우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에게 죄(罪)의 인간들이 순순히 따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죄악사회(罪惡社會)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게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박해(迫害)했다. 따라서 의인(義人)이나 성현(聖賢)들이 걷는 길은 항상 고난의 노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의인(義人)들의 고난을 제물적인 탕감조건으로 삼아서 죄악세계의 사람들을 굴복시켜 하나님 편으로 복귀해 오시곤 하셨다. 즉 의인(義人)들의 고난을 조건으로 하여 하나님은 죄인(罪人)들을 회개(悔改)시키곤 하셨다. 이것이 탕감의 법칙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예수의 십자가(十字架)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많은 죄악세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罪)를 자각(自覺)하고 회개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공산주의자는 많은 종교인(宗敎人), 의인(義人), 선량(善良)한 사람들을 박해(迫害)하고 살해(殺害)해 왔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의 수난을 조건으로 하여 공산 독재정권을 굴복시킴으로써 공산세계의 인민(人民)들을 해방(解放)으로 인도해 오셨다. 따라서 탕감(蕩減)의 법칙으로 보아 공산주의의 멸망(滅亡)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2) 분립(分立)의 법칙

 

창조주는 하나님뿐이기 때문에 창조본연의 인간은 항상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러나 타락에 의해 아담은 사탄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담은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상대(相對)하면, 사탄도 아담을 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비원리적(非原理的)인 입장에 놓인 아담을 통하여 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담으로 하여금 두 아들을 낳게 하여 각각 하나님편과 사탄편으로 분립(分立)하였는데, 하나님편에는 아우인 아벨을, 사탄편에는 형인 가인을 세웠던 것이다.5) p.487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 굴복함으로써 가인과 아벨을 함께 하나님편으로 복귀(復歸)하고자 하셨다. 하나님편에 있던 인간(아담)이 사탄의 유혹(誘惑)에 굴복하여 타락했으므로, 탕감복귀를 위해서는 사탄편 입장의 가인이 하나님편 입장의 아벨에게 순종굴복해야 하는 것이 원리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祭物)을 드릴 때 사탄편입장인 가인은 제물을 직접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었으며, 아벨을 통하여 바쳐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인은 제물을 하늘앞에 직접 드렸을 뿐 아니라 끝내는 아벨을 살해(殺害)하였다. 그 결과 역사는 죄악(罪惡)역사로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6) 그러나 하나님편 입장으로 분립(分立)된 아벨이 끝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충성을 다 한 심정의 터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하여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사탄세계에서 선(善)편의 인간을 분립(分立)할 수 있게 되었다.7) p.488

 

하나님은 선(善)편의 개인을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선(善)편의 가정, 씨족, 민족, 국가, 세계를 分立하면서 점차 선(善)편의 판도를 확대해 오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항(對抗)하던 사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앞서 악(惡)편의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악(惡)편의 가정, 씨족,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어 나오면서 악(惡)의 판도를 확대해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해 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선(善)편의 인간들(聖賢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악(惡)편의 인간들에게 전하곤 하였으나, 악(惡)편 인간들이 듣지 않고 도리어 물리적으로 박해(迫害) 또는 공격(攻擊)을 가하곤 했다. 그래서 하나님편은 그에 응전(應戰)하는 입장에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는 선(善)편의 개인과 악(惡)편의 개인, 선(善)편의 가정과 악(惡)편의 가정, 선(善)편의 씨족과 악(惡)편의 씨족, 선(善)편의 민족과 악(惡)편의 민족, 선(善)편의 국가와 악(惡)편의 국가, 선(善)편의 세계와 악(惡)편의 세계 사이에 싸움이 전개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따라서 역사는 선악투쟁(善惡鬪爭)의 역사로 점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 편이 선(善)이고 다른 한 편이 악(惡)이라 하더라도, 복귀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완전한 선(善)이나 완전한 악(惡)은 있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보다 가까운 측이 선(善)편으로, 보다 먼 측이 악(惡)편으로 분립되었던 것이다.

 

얼마전까지 세계는 선(善)편과 악(惡)편의 2대진영(二大陣營)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자유세계와 공산세계로서 종교(특히 기독교)를 인정하는 국가군과 종교를 부정하는 국가군이었다.

 

하나님이 세계를 선(善)편과 악(惡)편으로 분립하신 목적은, 악(惡)편이 선(善)편에 굴복함으로써 악(惡)편도 구원(救援)하여 하나님편으로 복귀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 양진영(兩陣營)의 투쟁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마지막에는 선편이 승리하게 되어 있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제 최종적으로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통일이 메시아를 맞이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아담의 불신(不信)으로 가인과 아벨이 분립(分立)되었으므로 후아담인 메시아에 의해서 가인편과 아벨편의 통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3) 4수복귀(四數復歸)의 법칙(法則)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가정적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 즉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장하고 완성했더라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부부(夫婦)가 된 후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여 子女를 번식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아담(夫)=해와(妻)-자녀로 구성된 가정적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가 이루어져서,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종적(縱的)인 사랑)이 충만한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적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사탄을 중심한 가정적사위기대가 형성됨으로써 전피조세계가 사탄주관권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적인 사랑을 중심한 가정적사위기대를 복귀하는 것이 복귀역사의 중심적인 목적이었던 것이다.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먼저 4수(四數)의 기간을 가지고 상징적(象徵的), 조건적(條件的)인 섭리를 해오셨다. 이것을 4수복귀(四數復歸)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 때의 4수기간(四數期間)은 가정적사위기대를 수리적(數理的)으로 회복하는 탕감조건이다. 4수기간이란 40일, 40년, 400년 등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기간은 사탄에 의해서 혼란(混亂)이 벌어지는 기간이며, 그 기간동안 하나님편의 인간들은 고통을 받게 된다.

 

그 예가 노아의 40일 홍수, 모세의 광야노정(曠野路程) 40년, 기독교도에 대한 로마제국 박해시대 400년 등이다. 이 탕감기간이 지나면 조건적으로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했다는 의미에서 혼란은 수습(收拾)되고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곤 하였다. 4수복귀(四數復歸)의 법칙은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타민족이나 국가의 역사에 적용되기도 했다.

 

토인비는 4백년간의 혼란기(動亂時代)를 거친 후에 통일이 달성된 세계국가의 예를 들고 있다. 예컨대 그리스?로마문명시대(文明時代)에 있어서 펠로폰네소스전쟁(戰爭)으로부터 로마의 통일까지의 4백년(B. C. 431~31),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춘추전국시대로부터 진(奏)?한제국(漢帝國)에 의한 통일까지의 약 4백년(B. C. 634~221), 일본(日本)의 역사에서 鎌倉?足利時代의 봉건적(封建的) 무정부상태(無政府狀態)에서 토요토미(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고 도쿠가와(德川幕府)의 성립에 이르기까지의 약 4백년(1185~1597) 등의 예가 그것이다. 그러나 토인비는 왜 이와 같은 4백년기간이 나타나는가를 밝히지 못하였다.8)

 

그 외에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기간 40년(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에서 1945년의 한국 해방까지)도 그 한 예이다.

  (4) 조건적섭리(條件的攝理)의 법칙(法則)

 

조건적섭리의 법칙이란, 섭리적인 어떤 사건에 있어서 중심인물(中心人物)이 하나님의 뜻에 적합하도록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섭리시대(攝理時代)의 성격이 결정됨을 말한다. 섭리적인 사건은 그 자체(自體)만으로 복귀섭리의 과정에서 그때그때의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후에 일어나는 섭리적인 사건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조건을 짓기도 한다. p.491

 

예컨대 구약시대의 섭리에 있어서, 모세가 광야에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낸 사건이 있었다(민수기 20장). 모세의 행위 그 자체는 그 때의 현실적인 사정상, 즉 광야에서 목이 마른 백성에게 물을 먹여야 한다는 상황에서 필요한 행위였다. 그러나 동시에, 장차 예수님의 강림시(降臨時) 하나님의 섭리의 내용을 상징적(象徵的)으로 조건 짓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관하여 원리강론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의 글을 적고 있다.9)

 

반석이란 아담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모세가 치기 전에 물을 내지 않는 반석은 첫째 아담을, 그리고 모세가 한 번 쳐서 물이 나오게 된 반석은 제2아담인 예수를 상징(象徵)한다. 왜냐 하면 물은 생명(生命)을 상징하고 있으므로 타락에 의해 영적(靈的)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제1(第一) 아담은 물을 내지 않는 반석(盤石)에 비유되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오시는 제2(第二) 아담인 예수님은 물을 내는 반석(盤石)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세는 불신(不信)하는 이스라엘민족에 대한 노여움에서 한 번 더 쳐버렸다. 그 결과 장차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게 되면, 사탄은 반석(盤石)의 실체되신 예수를 칠 수가 있다고 하는 조건이 성립(成立)(底線…… 筆者)된 것이다.

 

그런데 실제(實際)로 예수님은 이스라엘민족의 불신(不信) 때문에 십자가(十字架)에 달렸는데, 이것은 모세의 반석 2타(二打)가 메시아강림 후의 섭리를 조건 지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성서(舊約聖書)에 기록된 사실(史實)의 한 예에 불과하지만, 그 밖에 섭리적으로 의의(意義)있는 역사적 사건에도 마찬가지로 이 법칙이 적용되어 왔다. 즉 섭리적사건은 우발적(偶發的)인 사건이 아니며, 그 이전(以前)의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하여 어느 정도 조건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시대의 섭리적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따라서 그 후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의 성격이 조건 지워진다. 이러한 내용을 조건적 섭리의 법칙이라 한다.

 

  (5) 거짓과 참의 선후(先後)의 법칙(法則)

 

이것은 참된 것이 나타나기 전에 거짓된 것이 먼저 나타난다는 법칙이다. 사탄은 인간 시조를 타락시킴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점유(占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탄이 하나님에 앞서서 하나님이 하시는 섭리를 흉내내면서 원리형의 비원리세계를 만들어 나왔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아담이 책임분담을 다 하지 않고 타락했기 때문에 사탄의 이 비원리적인 세계의 조성을 허락(許諾)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사탄의 뒤를 좇아오면서 사탄이 만든 비원리세계를 원리의 세계로 돌려놓는 섭리를 해오신 것이다. 사탄에 의한 비원리세계는 비록 번영(繁榮)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에 번영(繁榮)은 일시적이며, 하나님의 섭리가 진전(進展)함에 따라 반드시 붕괴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복귀섭리(復歸攝理)의 구극(究極)의 목적은 지상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창조이상이 실현된 세계, 즉 전세계가 하나로 통일된 국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대신한 인류의 참부모)을 최고의 주권자로 모시는 하나님의 나라요, 지상천국(地上天國)으로서 그것은 메시아가 강림(降臨)함으로써 비로소 실현(實現)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먼저 훔쳐다가 메시아강림(降臨 또는 再 降臨) 이전에 사탄편의 메시아적인 인물을 세워서 사탄편의 이상세계(理想世界)를 만들려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거짓 메시아에 의한 거짓 통일세계가 먼저 나타나곤 하였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나타난 로마제국(帝國)이 그 좋은 예이다. 로마에 카이사르(율리우스 시이저)가 나타나서 全갈리아를 정복하여 속국으로 만듦으로써 로마의 통일을 성취하였다(B. C. 45년). 그런데 그가 암살되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내란(內亂)을 수습하고(B. C. 21년), 전 지중해(全地中海)를 통일하여 문자 그대로의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로마제국의 번영(繁榮)은 로마의 평화(平和)(Pax Romana)라고 하여 약 2세기(二世紀)동안 계속되었다.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는 사탄편의 메시아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참된 메시아(예수)가 강림(降臨)하여 영원한 사랑과 평화와 번영의 통일세계(統一世界)를 이루기에 앞서, 거짓된 평화와 번영의 통일세계를 만들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十字架)에 달려서 돌아가셨으므로 참된 통일세계, 참된 이상세계(理想世界)는 실제로 출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재림(再臨)때에도 이 법칙에 따라서 거짓 재림주(再臨主)와 거짓 통일세계가 재림의 섭리에 앞서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스탈린과 공산주의 세계였다. 사실상 스탈린은 당시 인류의 태양(太陽)으로 자처하고 메시아와 같이 숭배되었으며 공산주의에 의한 세계통일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스탈린은 1953년에 죽었으나 섭리적으로 보면, 그 때가 재림섭리(再臨攝理)의 공식노정이 출발한 때였다. 국제공산주의의 그 후의 분열은, 거짓된 통일世界의 붕괴와 메시아에 의한 참된 世界통일의 실현의 진척(進陟)을 보이는 증거였다.

 

  (6) 종(縱)의 횡적전개(橫的展開)의 법칙(法則)

 

이것은 종적(縱的)인 역사적 사건들을 복귀역사의 종말기에 횡적(橫的)으로 다시 전개시킨다는 법칙이다. 종(縱)이란 시간의 흐름을 말하고, 횡(橫)이란 공간적 넓이를 말한다. 즉 종(縱)은 역사이고 횡(橫)은 현실세계를 뜻한다. 따라서 종의 횡적전개란 역사상의 모든 섭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종말시대(終末時代)에 세계적으로 재현시켜서 섭리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섭리역사에 있어서 섭리적인 인물들의 실패로 말미암아 제때 제때에 미해결로 끝난 여러 가지 섭리적 사건들을 끝날에 한꺼번에 뜻맞게 마무리해서 복귀섭리역사를 완결(完結)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의 2000년간(年間)의 복귀섭리에 있어서, 사탄의 침범으로 잃어버린 종적인 탕감조건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3대(三代)로써 탕감복귀했다. 그러나 그것은 조건적이었다. 즉 아담가정의 섭리와 노아가정의 섭리가 모두 미해결로, 즉 실패로 끝났지만 아브라함 가정에서는 일단 조건적으로나마 섭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 예수 때에 하나님은 아담에서 예수까지의 4000년의 역사에 있어서, 사탄의 침입(侵入)으로 실패로 끝난 여러 섭리적 사건들을 횡적(橫的)으로 전개하여 그것들을 한꺼번에 탕감복귀하고자 하였으나, 십자가형(十字架刑)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재림(再臨)의 섭리가 시작될 때에는 아담이후(以後) 재림주님 때까지 6000년 기간동안 사탄에게 침범당했다가 조건적으로만 마무리되었던 모든 사건들을 횡적(橫的)으로 다시 전개하여, 그것들을 재림주(再臨主)를 중심하고 총체적으로 또 근본적으로 탕감복귀하여 죄악(罪惡)역사의 섭리를 완결짓는다. 이와 같이 역사상의 사건들이 미해결인 채 남아져 있는 한 지상의 참된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역사상의 이 모든 사건들을 끝날에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만, 현실적인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게 되어서 여기에 비로소 참된 평화의 세계가 실현되게 된다.

 

예컨대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제국(諸國)의 대립은 그것이 비록 오늘의 문제이긴 하지만 근원을 따져보면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이스라엘민족(民族)과 주변민족(周邊民族)과의 싸움이 오늘날 재현된 성격의 싸움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과의 대립(對立)을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로만 파악해서는 그 해결이 불가능하다. 즉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 근본적인 원인을 발견하여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스라엘과 아랍과의 대립은 종식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종말시대가 오면 종적인 역사상의 여러 사건들이 재현(再現)하게 되므로 여러 가지의 예상(豫想)하지 않았던 사태가 빈발하게 되며, 그 때문에 세계는 대혼란(大混亂)에 빠지게 된다. 종(縱)의 횡적전개의 법칙에 의하여 끝날에 이와 같이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므로 성경에는 이런 상황(狀況)을 큰 환난으로 표시하면서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태 24:21)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은 오로지 인류가 재림주를 맞이하여 그분의 참말씀과 참사랑의 가르침을 따를 때에만 근본적(根本的)으로 해결되게 된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역사의 여러 사건(諸事件)을 종말시에 재현시켜서, 그것들을 재림주님을 통하여 근본적으로 해결하도록 섭리하시는 것은 첫째로, 6000년의 죄악(罪惡)역사를 인간이 실수하지 않고 꾸려 나왔다고 하는 승리의 조건을 세움으로써, 역사상의 수많은 비참한 사건의 기억을 하나님과 인류의 마음에서 영원히 불식하기 위함이요, 둘째로 사탄의 참소조건을 일소(一掃) 고 사탄을 완전히 굴복시켜서 사탄까지도 영원히 구원하기 위함인 것이다.

 

  (7) 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

 

과거의 역사에 있었던 일정한 섭리적 사건들이 시대마다 반복(反復)되어 나타나는 것을 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이라 한다. 동시성의 관계에 있는 섭리적 시대는 중심인물(中心人物), 사건(事件), 수리적기간(數理的期間) 등에 있어서 흡사한 양상(樣相)을 나타낸다. 이것은 섭리역사에서 어떤 섭리적 중심인물이 그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했을 때 그 인물을 중심으로한 섭리의 한 시대는 끝나게 되고 일정한 기간을 경과한 후에 유사한 다른 인물이 세워져서 전시대의 섭리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같은 섭리역사(攝理役事)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복귀섭리의 연장과 더불어 탕감조건이 점차로 가중되어 나타나므로, 완전히 전시대와 똑 같이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차원을 높인 형태로 반복한다. 그 결과, 역사는 나선형(螺旋形)을 그리면서 발전하게 된다.

 

그러면 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은 어떻게 역사에 적용되었는가.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의 2000년간기간(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의 가정을 중심으로 한 복귀섭리가 실패함으로써 메시아가 강림(降臨)할 수 없었으므로, 거기에 대한 동시성섭리로서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의 2000년동안 이스라엘민족(民族)을 중심으로 한 복귀섭리(복귀섭리시대)가 동시성섭리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또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2000년간 이스라엘民族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예수의 십자가형으로 또 실패했으므로, 예수님이후 오늘날까지 2000년간의 기독교를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복귀섭리연장시대)가 다시 이에 대한 동시성섭리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이후 예수까지의 2000년과 예수이후 오늘날까지의 2000년의, 두 시대에 있어서의 동시성의 내용을 정리하면 그림 8-1과 같이 된다.

 

   

                   그림 8-1. 복귀섭리시대와 복귀섭리연장시대에 있어서의 섭리적 동시성

 

역사속에서 동시성(同時性)을 발견한 사람은 슈펭글러였다. 그는 모든 문화는 동일한 형식에 의하여 발전하게 되며, 따라서 두 문화사이에는 대응(對應)하는 유사(類似)한 사상(事象)이 나타나며, 대응(對應)하는 사상(事象)을 동시성(同時性)이라고 하였다.10) p.497

 

슈펭글러와 거의 같은 때에 역사의 동시성을 발견한 사람이 토인비였다. 토인비는 투키디데스를 강의(講義)하면서, 고대 그리스 역사와 근대서양사가 동시대적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14년이라는 해가 옥스퍼드대학(大學)에서 고전(古典) 그리스사(史)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붙들었다. 1914년 8월, 기원전(紀元前) 5세기의 역사가(家) 투키디데스는 지금 내가 붙들린 것과 같은 경험(經驗)을 그는 이미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내 마음 가운데 떠오르게 되었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속해 있는 세계가 정치적으로 분할(分割)됨으로써 여러 국가간(國家間)에 발생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대전쟁으로 지쳐 있었다. 투키디데스는 당시의 대전쟁이 당시의 세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음을 예견(豫見)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의 경과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證明)해 주었다. 나는 지금 고대 그리스사와 근대 서양사가 경험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동시대적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 두 개의 코스는 평행(平行)하고 있으며 이것들을 비교연구(比較硏究)할 수 있다.11)

 

이와 같이 토인비는 고대 그리스역사와 근대 서양사를 동시성(同時性)으로 다루었는데, 통일사관에서 보면, 고대 그리스시대는 메시아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이며, 근대 서양사는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再降臨準備時代)여서 다 함께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시대(準備時代)라는 점에 있어서 동시성의 본질적(本質的)인 의의(意義)가 있다는 것이다. p.498

 

                     四. 역사의 변천(變遷)

 

이상 열거한 창조의 법칙과 복귀의 법칙은 모두가 역사의 변천(變遷)에 작용된 법칙들이지만,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 상극(相剋)의 법칙, 탕감(蕩減)의 법칙, 분립(分立)의 법칙이다. 그 중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法則)은 역사의 변천에서의 발전(發展)의 법칙이 되고, 다른 셋은 합쳐서 전환(轉換)의 법칙이 된다. 전환(轉換)의 법칙은 선악(善惡)의 투쟁(鬪爭)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역사가 수수작용에 의하여 발전해 온 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즉 정신과 물질, 인간과 환경(자연, 사회), 정부와 국민, 단체와 단체, 개인과 개인, 인간과 기계 등의 여러 가지 주체와 대상간에 수수작용이 원만히 행해짐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발전이 이루어져 온 것이다.

 

발전이란 성장, 발육, 향상 등을 말한다. 또한 새로운 質의 출현을 뜻하며, 이것들은 모두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전진운동이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인 요소가 공동목적을 중심으로 조화로운 수수작용을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에 반하여 투쟁은 서로 목적이 다르고 이해가 다른 주체와 주체간에 생기는 것이다. 투쟁이 일어날 때 발전은 정지(停止)되거나 또는 오히려 후퇴(後退)한다. 따라서 역사상에 나타난 어떠한 종류의 발전도 예외없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주체와 주체는 상극(相剋)의 법칙에 따라 대립하고 투쟁하는데, 역사상에 있어서의 주체와 주체의 상극이란 지도자와 지도자의 대립을 말한다. 예컨대 프랑스혁명(革命)에 있어서 중산시민층(부르주아지)의 지도자와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귀족(王黨派貴族)들, 즉 새로운 지도자와 낡은 지도자와의 투쟁이 그 예이다. 양자는 분립의 법칙에 따라 상대적으로 선(善)편의 입장(하나님의 섭리(攝理)에 적합한 입장)과 악(惡)편의 입장(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입장)으로 분리(分離)된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주체가 대상인 대중을 서로 자신편에 끌어들임으로써(따라서 이때 大衆은 二分 됨) 선(善)편의 진영(陣營)과 악편의 진영을 형성하여 싸우게 된다. 지도자 중 어느 쪽이 선(善)이고 어느 쪽이 악(惡)의 입장인가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섭리에 기여(寄與)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대체로 낡은 사회의 지도자들은 자기 중심으로 기울어짐으로써 전제적(專制的) 지배를 일삼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악(惡)편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이 때에 하나님은 섭리의 진행에 보탬이 되는 새로운 지도자를 선(善)편의 입장에 세워서 그를 통하여 섭리하시곤 했다.

 

선악(善惡)의 투쟁에서 선편이 이기면 역사의 진행방향(進行方向)은 보다 선(善)한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 후 역사가 일정한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이때까지의 지도자는 다시 악(惡)편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보다 선(善)한 지도자가 또 다시 나타난다. 여기에 다시 선악(善惡)의 투쟁이 벌어진다. 여기에서 선편이 이기면 역사의 방향은 더욱 선한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며, 드디어는 완전한 선(善)의 단계, 즉 창조이상세계가 실현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 때 비로소 선악의 투쟁은 종말(終末)을 고한다. 이와 같이 투쟁은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다만 역사발전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구실을 다할 뿐이다.

 

선(善)편의 주체와 악(惡)편의 주체와의 투쟁에 있어서 악편이 강력할 경우, 하나님은 탕감의 법칙을 통하여 악편을 굴복시키곤 하셨다. 즉 선(善)편의 지도자로 하여금 악(惡)편 세력의 박해 또는 공격을 받으면서 고난과 역경의 길을 걷게 함으로써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악편의 지도자를 자연굴복시켰던 것이다. 만일 그래도 악(惡)편의 지도자가 굴복하지 않을 때는 선(善)편의 지도자의 수난(受難)을 조건으로 전체대중을 감화시켜서 악(惡)의 지도자를 고립시킨다. 이렇게 되면 악(惡)편의 지도자는 결국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선악투쟁(善惡鬪爭)의 법칙의 내용이다. 따라서 이 법칙을 맞고 빼앗는 법칙 또는 맞고 빼앗는 전술(戰術)이라고도 부른다. 오늘날까지 종교(宗敎)가 박해를 받으면서 전세계에 전파(傳播)된 것은 바로 이러한 맞고 빼앗는 법칙에 의한 것이었다.

 

선악(善惡)의 투쟁에 있어서 선(善)편 인물들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악편이 승리할 경우, 역사는 물론 선한 방향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그대로 연장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 일정한 기간이 경과하면 하나님은 보다 선한 지도자를 다시 세워서 악(惡)편을 굴복시킨다. 그리하여 결국은 역사가 선편 방향으로 전환되도록 하나님은 배후에서 부단히 섭리해 나오신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의 인류(人類)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해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선악(善惡)의 투쟁(鬪爭)에 의해서 변천되어 왔다.

 

이와 같이 역사는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발전해 왔으며, 선악의 투쟁에 의해서 방향이 전환(轉換)되어 왔다. 즉 역사는 발전과 전환이 반복되는 가운데에서 변천(變遷)되어 왔던 것이다. 역사변천의 과정을 도형(圖形)으로 표시하면 그림 8-2와 같다.

 

   

그림 8-2. 역사의 변천

 

이상으로 역사는 두 가지의 방향을 향하여 변천(變遷)해 왔음을 알게 된다. 하나는 발전(進展)의 방향이며, 다른 하나는 복귀(轉換)의 방향이다. 발전이란 과학이나 경제, 문화가 발달하는 것을 의미하고 복귀란 잃어버린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사랑과 평화의 세계-를 회복(回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역사에 두 방향이 생긴 것은, 인류역사가 재창조(再創造)역사임과 동시에 복귀섭리(復歸攝理)역사기 때문이다. 미래세계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의 세계임과 동시에 고도의 윤리사회(社會)로서 과학문명의 세계는 발전에 의해서 도달되고 윤리사회(社會)는 복귀에 의해서 도달하게 된다.

 

복귀(復歸)는 선악(善惡)의 투쟁(鬪爭)에 의해서 이뤄지기는 하지만 반드시 물리적(物理的)인 투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악(惡)편이 선(善)편에 순순히 굴복하면 평화적인 전환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선악의 투쟁을 종결짓는 최후의 투쟁, 즉 메시아가 직접 사탄을 굴복시키는 투쟁은 이름이 투쟁일 뿐, 사실은 참사랑을 가지고 평화적으로 사탄을 자연굴복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는 발전과 복귀라는 두 방향을 향하여 나선형(螺旋形)을 그리면서 변천(變遷)해 왔다. 그런데 발전은 영원히 계속하는데 대하여 복귀는 창조이상세계(善의 세계)가 회복되면 그것으로 끝나고, 그 이후에는 평화와 참사랑의 이상세계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역사의 법칙과 변천의 내용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五. 종래의 역사관(觀)

 

다음은 종래의 대표적인 역사관의 요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종래의 역사관(觀)과 통일사관(統一史觀)과의 비교에 참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순환사관(循環史觀)(운명(運命)史觀)

 

그리스인들은 춘하추동(春夏秋冬)이 해마다 반복되고 순환되는 것처럼 역사도 순환적으로 변화(變化)한다고 생각하였다. 역사적인 사건의 발생과 소멸은 운명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는 의미(意味)도 목표(目標)도 없다고 보는 입장이 순환사관(循環史觀) 또는 운명사관(運命史觀)의 입장이다. 대표적인 역사가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면서 역사(Historiai)를 쓴 헤로도토스(Herodotos, B. C. 484~425)와 펠로폰네소스전쟁사(戰爭史)를 쓴 투키디데스(Thukydides, B.C. 460~400)이다. 운명론자(運命論者)인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전쟁(戰爭)의 줄거리를 이야기식으로 서술했으며,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전쟁(戰爭)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충실히 사실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양자에 다같이 공통적인 것은, 역사는 반복한다는 사고방식(思考方式)이었다.12)

 

순환사관(循環史觀)은 역사의 경과(經過)를 필연적(運命的)인 것으로만 이해하였으며, 인간의 노력(努力) 여하에 따라서 역사의 동향(動向)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또 역사에는 목표가 없으므로 미래상(未來像)도 제시될 수가 없었다. p.503

 

  (2) 섭리사관(攝理史觀)

 

역사는 처음도 끝도 목표도 없으며, 순환운동을 반복할 뿐이라고 보는 그리스의 역사관에 대하여, 기독교는 역사에는 처음이 있으며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직선적(直線的)으로 진행한다는 등 순환사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사관을 제시했다. 즉 역사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으로부터 시작하여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구원의 역사이며,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신(神)의 섭리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섭리사관 또는 기독교사관이라고 한다.

 

기독교사관(基督敎史觀)을 체계화(體系化)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쓴 신국론(神國論; The City of God)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신국(神國; Civitas Dei)과 악마에 유혹(誘惑)된 사람들이 사는 지상국(地上國; Civitas terrena)과의 투쟁의 역사로 보았으며, 끝날에 가서는 신국(神國)이 승리하여 영원한 평안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의 진행은 하나님이 미리 정한 계획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타락(墮落)에서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역사를 다음의 여섯 단계로 구분했다. (1)아담에서 노아홍수까지 (2)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3)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4)다윗에서 바빌론포로까지 (5)바빌론포로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6)그리스도의 초림(初臨)에서 재림(再臨)까지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섯번째의 최후의 기간이 얼마나 계속되는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독교사관에 의하여 역사는 목표를 지향하는 의미있는 역사로 비춰지고 있으나,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는 도구적(道具的) 존재(存在)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역사관의 내용은 신비적(神秘的)인 것을 내포하고 있고, 논리성이나 법칙성이 결여(缺如)되어 있어서, 오늘날에 이르러 사회과학으로서 받아들이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3) 정신사관(精神史觀; 진보사관(進步史觀))

 

르네상스시대(時代)에 들어오면서 신학적(神學的)인 역사관은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되었으며, 18세기(世紀)의 계몽주의시대에 이르러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신(神)의 섭리가 아니고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역사관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역사가 인간의 정신(精神)의 진보에 따라 거의 일직선(一直線)으로, 그리고 필연적(必然的)으로 진보해 간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사관(史觀)을 정신사관(精神史觀) 또는 진보사관(進步史觀)이라고 한다.

 

비코(G. Vico, 1668~1744)는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했으나 세속의 세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역사는 하나님의 의지(意志)를 가지고서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역사의 파악에 있어서 하나님은 역사의 배후(背後)에 숨게 되고 인간이 전면에 나오게 되었다.13)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역사에 작용한 신(神)의 힘을 배제(排除)했다. 즉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신(神)이 아니고 높은 교육을 받은 자들로서 과학을 받아들인 사람들 즉, 계몽사상가들이라고 하였다.

 

콩도르세(Condorcet, 1743~1794)는, 인간의 이성이 각성하면 역사는 과학적으로나 윤리적(倫理的)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진보(進步)한다고 주장했다. p.505

 

칸트(I. Kant, 1724~1804)는, 역사의 목적은 인간의 모든 고귀(高貴)한 재능의, 여러민족(諸民族)의 결합체(結合體)에서의 실현이라고 하면서, 세계시민적(世界市民的) 의도(意圖)에 있어서의 인류의 역사를 제언(提言)하였다.

 

낭만주의(浪漫主義)의 철학자 헤르더(J. G. Herder, 1744~1803)는 인간성의 발전이 역사의 목표라고 하였다.

 

헤겔(Hegel, 1770~1831)은 역사를 정신(精神)의 자기실현(自己實現) 혹은 이념(理念)의 자기실현(自己實現)으로 보았다.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사는 이성적(理性的)으로 진행한다는 견해로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성을 그는 세계정신이라고 불렀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성은 인간을 조종하면서 활동하고 있다고 보고 이것을 이성의 간계(奸計)라고 하였다. 헤겔의 역사관은 특히 정신사관(精神史觀) 또는 관념사관(觀念史觀)이라고도 불리운다.

 

헤겔은 프러시아에서 자유의 이념이 실현된 이성국가(國家)가 도래한다고 보고 있었으나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았고 도리어 착취나 인간소외(疎外) 등의 反이성적(理性的)인 사회문제가 심화(深化)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역사철학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 마르크스의 유물사관(唯物史觀)이었다.

 

  (4) 유물사관(唯物史觀)

 

헤겔은 이념(理念)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정신사관을 주장한데 대하여 마르크스는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원동력(原動力)은 물질적인 힘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물사관(唯物史觀; 革命史觀이라고도 함)을 제시하였다.

 

유물사관에 의하면,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념(理念)이나 정신(精神)의 발전이 아니라 생산력의 발전이다. 생산력의 발전에 상응(相應)하여 일정한 생산관계가 성립되며, 생산관계가 일단 성립되면 그것은 곧 고정화(固定化)됨으로써 드디어는 생산력의 발전에 대해서 질곡화(桎梏化)한다. 여기에서 낡은 생산관계를 유지(維持)하려고 하는 계급(支配階級)과 새로운 생산관계를 희구(希求)하는 계급(被支配階級)과의 사이에 계급투쟁이 전개된다. 따라서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가 될 수 밖에 없으며,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계급투쟁이 그 극에 달하여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를 타도(打倒)함으로써 드디어 계급이 없는 자유의 왕국(王國) 곧 공산주의사회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 유물사관이 잘못이었다는 것은 오늘의 공산주의의 종언(終焉; 끝났음)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론的인 면에서 보더라도 유물사관의 법칙이라는 것은 전부 독단적(獨斷的)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예컨대 유물사관은 생산력의 발전을 물질적인 발전으로 보았는데, 생산력이 어떻게 해서 발전하는가에 대해서는 유물변증법적인 해명이 되어 있지 않다. 또 인류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한 사회변혁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말 뿐이며, 실제로 계급투쟁에 의해서 사회가 변혁(變革)된 예는 한번도 없었다. 이와 같이 유물사관의 이론은 전부가 허구(虛構)의 이론이었던 것이다.

 

  (5) `생(生)의 철학(哲學)'의 사관(史觀)

 

딜타이(W. Dilthey, 1833~1911)와 짐멜(T. Simmel, 1858~1918)은 生의 성장(成長)과 더불어 역사는 성장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生의 철학(哲學)'의 사관이라고 한다. 딜타이에 의하면, 생(生)이란 인간적인 체험이며, 체험은 반드시 표현되어서 외부 세계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나타난 것이 역사의 세계요 문화의 세계이다. 따라서 종교, 철학, 예술, 과학, 정치, 법률 등의 인간의 문화체계(文化體系)는 生이 객관화된 것이다.

 

짐멜도 마찬가지로 역사란 生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生이란 무한히 계속되는 유동(流動)이다. 그리고 `生(精神的인 生)'의 생성(生成)의 흐름이 역사가 된다.14) 그런데 `生의 철학(哲學)'의 사관은, 역사상에 나타나는 인간의 고통이나 불행은 生의 성장(成長)에 부수적(附隨的)으로 나타나는 불가피(不可避)한 현상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 고통이나 불행에서 해방되는가 하는 문제는, 이 철학으로써는 해결할 수 없게 되어 있다. p.507

 

  (6) 문화사관(史觀)

 

제1차 세계대전 전(世界大戰 前)까지 유럽에 있어서 역사의 진보(進步)나 발전(發展)에 대한 신뢰(信賴)는 기본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있었으며, 역사는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와 같은 직선적(直線的)이며 유럽 중심적인 역사상(像)을 깨뜨린 사람이 슈펭글러(O. Spengler, 1880~1936)였다.

 

슈펭글러는 역사의 기초를 문화라고 하면서 문화사관을 주창하였다. 그는 문화를 유기체(有機體)로 보았으며, 유기체인 이상(以上) 탄생과 함께 성장하고는 멸망(滅亡)하게 되어 있어서 문화의 사멸은 불가피(不可避)한 운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로마의 몰락에 대응(對應)하는 몰락의 징후(徵候)를 서양문명에서 발견하여 서양의 몰락을 예언했다. 이러한 서양의 몰락을 예지(豫知)하면서도 페시미즘에 빠지거나 불가피(不可避)한 운명(運命)에 움추리지 말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것을 역설(力說)했다. 거기에는 니체와의 강한 연결이 있었다. 슈펭글러의 역사관은 결정론적이다.

 

슈펭글러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獨自的)인 문화사관을 수립(樹立)한 사람이 토인비(A. J. Toynbee, 1889~1975)이다. 토인비에 의하면, 세계사를 구성(構成)하는 구극(究極)적인 단위는 지역도 민족도 국가도 아니며 개개의 문명이었다. 그리고 문명은 출생(出生; genesis), 성장(成長; growth), 좌절(挫折; breakdown), 해체(解體; disintegration), 소멸(消滅; dissolution)의 단계를 거친다고 하였다.

 

문명발생(文明發生)의 원인은 자연환경(自然環境)이나 사회환경으로부터의 도전(挑戰; challenge)에 대한 인간의 응전(應戰; response)에 있다. 창조적(創造的) 소수자(少數者)가 대중을 인도하면서 문명을 성장시켜 가지만, 머지 않아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성을 상실(喪失)하게 되어서 문명은 좌절한다. 이때 창조적 소수자는 지배적 소수자로 전화(轉化)하며, 문명의 내부에서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변에는 외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생겨서 지배적 소수자에게서 이반(離反)한다. 그리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면서 혼란기를 맞게 되지만, 머지않아 지배적 소수자 중의 최강자에 의해 세계국가(世界國家)가 수립되면서 혼란기는 끝난다. 세계국가에 의한 압정하(壓政下)에서 내적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등종교(高等宗敎)를 키우고, 외적 프롤레타리아트(주변의 만족(蠻族)는 전투집단(戰鬪集團)(침략세력)을 형성한다. 그리하여 세계국가(世界國家), 고등종교(高等宗敎), 전투집단(戰鬪集團)의 3자(三者)가 정립(鼎立)한다. 얼마 안가서 고등종교는 지배층을 개종시킴으로써 세계종교가 되지만, 세계국가는 곧 붕괴되고 그와 더불어 문명은 죽음을 맞게 된다.

 

이리하여 하나의 문명이 소멸한 후, 외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침입(侵入)하는데, 이 외적 프롤레타리아트가 고등종교로 개종됨으로써 다음 대(次代)의 문명을 탄생시킨다. 이 문명의 계승(繼承)을 친자관계(親子關係)라고 한다. 세계사속에서 발생하여 충분히 성장한 문명은 21개인데, 현존(現存)하는 문명은 모두 그 3대(三代)째에 속하며 기독교문명(서양과 그리스正敎 圈)), 回敎문명(文明), 힌두교문명, 극동문명의 네가지 系譜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토인비가 주장한 3대에 걸친 문명의 계승은 통일사관에서의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 복귀섭리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라는 三代의 섭리적동시성(攝理的同時性)에 대응(對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토인비의 역사관의 특징은 결정론(決定論)을 배제하고, 비결정론(非決定論), 자유의지론(意志論)을 주장한데 있다. 즉 도전(挑戰)에 대하여 어떻게 응전(應戰)하는가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나아갈 길은 결코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인간이 미래(未來)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토인비는 인류역사의 미래상(未來像)으로서 명백히 신국(神國; Civitas Dei)을 그리고 있으나, 비결정론(非決定論)의 입장에서 신(神)의 나라냐 어둠의 나라냐 하는 미래의 선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存在)의 법(法)인 사랑의 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자기희생은 인간 앞에 영적완성(靈的完成)이라고 하는 이상을 목표로 세워 놓고 인간에게 도전(挑戰)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에 있어서 이 도전(挑戰)을 수용할 것인가, 혹은 거부할 것인가는 완전히 자유인 것이다. 사랑의 법(法)은 인간이 죄인(罪人)이 될 것인가, 성인(聖人)이 될 것인가를 인류의 자유에 맡기고 있다. 즉 사랑의 법(法)은 인간의 개인적(個人的) 및 사회적(社會的) 생활을 하나님의 나라로의 전진 방안으로 삼든지 어둠의 나라로의 전진 방안으로 삼든지, 그 선택은 인류의 자유에 일임(一任)하고 있는 것이다.15)

 

토인비 역사관의 또 하나 특징은 근대사회가 망각(忘却)한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을 역사관속에 다시 도입(導入)했다는 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역사란,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섭리에 의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의, 희미하고도 불완전한 영상(影像)에 불과하다고 본다.16)

 

  (7) 역사관(觀)의 변천(變遷)과 통일사관(統一史觀) p.510

 

이상으로 종래 역사관의 개요(槪要)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여기서 종래의 역사관과 통일사관을 비교(比較)하여, 통일사관이 종래의 역사관을 통일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첫째로, 역사를 원환운동으로 보는가 직선운동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스의 순환사관(循環史觀), 슈펭글러의 문화사관(文化史觀)은 역사를 원환운동으로 파악했으며, 기독교사관(基督敎史觀)이나 진보사관(進步史觀), 유물사관(唯物史觀)은 역사를 직선운동으로 파악했다. 한편 生의 철학사관(哲學史觀)은 유동(流動)하는 生의 성장과 더불어 역사는 발전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진보사관의 변형(變形)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직선운동(直線運動)으로 파악하면 역사의 발전에 희망을 가질 수 있으나, 인류역사에 있어서의 좌절(挫折)과 부흥(復興)의 의미(意味)를 이해할 수가 없다. 한편, 역사를 원환운동으로 파악할 때, 국가나 문화의 멸망은 운명적인 것이 되어 희망을 발견할 수가 없다.

 

통일사관은 재창조(再創造)와 복귀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역사를 전진운동과 원환운동이라는 양면(兩面)을 가진 나선형운동(螺旋形運動)으로서 파악한다. 즉 역사는 목표(目標)-창조이상세계의 실현-를 향하여 발전해 간다는 전진적성격(前進的性格)과 더불어, 섭리적인물을 세워서 탕감법칙에 따라 잃어버린 창조이상세계를 복귀한다는 원환운동의 성격을 함께 지닌 나선형운동(螺旋形運動)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로, 결정론(決定論)이냐 비결정론(非決定論)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역사는 운명에 따라 필연적으로 운동한다는 그리스의 운명사관(運命史觀)과 슈펭글러의 문화사관(文化史觀)은 결정론(決定論)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진행한다는 섭리사관도 결정론이다. 이성 또는 세계정신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헤겔의 정신사관(精神史觀)이나, 역사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공산주의사회에 도달한다고 하는 유물사관도 결정론이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을 초월(超越)한 어떤 힘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하는 견해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론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언제나 역사의 힘이나 법칙에 끌려다니는 피동적(被動的) 존재(存在)에 불과하며,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에 의해서 역사를 개혁(改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한편 토인비는 자유의지론(意志論)의 입장에서 비결정론(非決定論)을 주장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역사가 가는 길이 선택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토인비의 비결정론(非決定論)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의 미래상은 불분명(不分明)하며, 따라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이에 대해서 통일사관은, 역사의 목표는 결정적(決定的)이지만 섭리적인 사건의 성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책임분담 외에 인간의 책임분담 수행(遂行)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역사의 과정은 비결정론이라고 본다. 즉 통일사관은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양(兩)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이론을 책임분담론(責任分擔論)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종래의 역사관과 통일사관을 비교해 볼 때 종래의 역사관은 각각 통일사관의 한 측면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통일사관이 총합적(總合的), 통일적(統一的)인 역사관이라는 것도 알게된다. 그런데 토인비의 역사관에는 통일사관을 닮은 내용이 많이 있다. 섭리적으로 볼 때, 토인비의 역사관은 통일사관이 출현하기 위한 전단계를 준비한 史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토인비의 사관은 종래의 역사관과 통일사관을 연결하는 교량의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六. 섭리사관(攝理史觀)과 유물사관(唯物史觀)과 통일사관(統一史觀)의 비교

 

끝으로 종래의 사관(史觀)중에서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섭리사관(기독교사관)과 유물사관, 그리고 통일사관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 보고자 한다(그림 8-1 참조). 즉 역사의 시작(始作), 성격(性格), 발전의 원동력(原動力), 변천(變遷)의 법칙(法則), 투쟁(鬪爭), 종말(終末)의 현상?사건(事件), 종말(終末)을 고(告)하는 역사, 이상세계 등의 항목(項目)을 가지고 비교해 보려는 것이다. 서로 비교해 봄으로써 각각의 사관(史觀)의 특징을 보다 단적(端的)으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1) 역사의 시작(始作)

 

섭리사관은 창조된 인간의 타락에서부터 역사가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인류역사는 죄악사(罪惡史)로서 출발하였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유물사관은 인간이 동물계에서 분리(分離)된 후 인류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최초의 사회는 원시공동체사회라고 하였다. 통일사관은 섭리사관과 마찬가지로 창조된 인간의 타락에서 역사가 시작됨으로써 인류역사는 죄악사(罪惡史)로서 출발했다고 본다.

 

  (2) 역사의 성격(性格)

 

섭리사관은 역사를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역사로 보며, 유물사관은 계급투쟁사(階級鬪爭史)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관은 재창조역사(再創造歷史)와 복귀역사(復歸歷史)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역사를 파악한다.

 

  (3)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력(原動力)

 

섭리사관에 의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다. 섭리사관에 있어서는,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력(原動力)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유물사관에 있어서는, 물질적인 힘인 생산력의 발전이 역사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관(統一史觀)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분담이라고 본다. 기독교의 섭리사관에 의하면, 하나님이 역사 전체를 섭리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상의 모든 비참(悲慘)한 사건도 하나님이 이러한 사건을 용인(容認)하였다는 논리가 성립되게 된다. 그러나 통일사관에서 보면,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역사상의 모든 비참(悲慘)한 사건의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다.

 

  (4) 역사변천(變遷)의 법칙(法則)

 

섭리사관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자(者)들의 신국(神國)과 악마(惡魔)를 따르는 者들의 지상국(地上國)이 싸워서 마지막으로 신국(神國)이 승리한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역사의 법칙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유물사관은 유물변증법을 역사에 적용하여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인간의 의지(意志)로부터 독립한 일정한 생산관계를 맺는다,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일정(一定)한 발전단계에 대응(對應)한다, 생산관계가 토대(土臺)이고 의식(意識)의 여러 형태(諸形態)는 상부구조(上部構造)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存在)가 의식(意識)을 결정한다,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대하여 질곡화(桎梏化, 족쇄가 됨)할 때 혁명이 일어난다 등을 유물사관의 법칙으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관은 역사에 작용한 법칙으로서 창조의 법칙과 복귀의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

 

  (5) 종말(終末)에 나타나는 투쟁(鬪爭)

 

섭리사관에 있어서는, 섭리역사가 종말(終末)에 이르게 되면 신국(神國)과 지상국(地上國)사이에 최후의 투쟁이 벌어진다고 한다. 성서(聖書)에 의하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봉사하는 천사(天使; 미가엘)와 악마가 싸운다고 되어 있다. 유물사관에 의하면 역사의 최후의 계급사회인 자본주의사회에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치열한 계급투쟁이 벌어진다고 되어 있다. 통일사관에 있어서 역사는 선악(善惡)의 투쟁사이며, 종말기에서의 선악(善惡)의 투쟁은 세계적인 규모(規模)로 전개되는 바, 민주주의세계와 공산주의세계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이 투쟁에서 공산주의가 패배(敗北)하고 자유세계가 승리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메시아에 의하여 양편(兩便)의 화해가 이루어져서 통일(統一)되게 된다.

 

  (6) 종말(終末)의 현상(現象)

 

성서(聖書)에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태 24:29)고 한 기록에 근거하여 섭리사관은 종말에 이르러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난다고 한다. 유물사관에서는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빈곤(貧困), 억압(抑壓), 예속(隷屬), 타락(墮落), 착취(搾取)가 더욱 더 증대하고 경제(經濟)破綻과 사회혼란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사관(統一史觀)은, 역사가 종말에 이르게 되면 기존(旣存)의 모든 가치관이 무시되고 붕괴되어서, 특히 성도덕(性道德)의 퇴폐가 극에 달하여서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大混亂)에 빠진다고 본다.

 

  (7) 종말(終末)의 사건(事件)

 

섭리사관에 의하면, 종말에 최후(最後)의 심판(審判)이 벌어진다. 즉 성서에 의하면, 끝날의 심판때에 양(羊)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마태 25:32) 양(羊)편에 속한 자, 즉 하나님을 따르는 者들은 축복(祝福)을 받을 것이며(마태 25:34), 염소 편에 속한 자, 즉 악마를 따르는 者는 영원한 불속에 던져진다고 기록되어 있다(마태 25:41). 유물사관에 의하면, 폭력혁명(暴力革命)으로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를 타도(打倒)함으로써 인류의 前史는 끝난다고 되어 있다. 통일사관은 종말에 있어서 세계적인 규모(規模)로 선편과 악편이 분립된 후 선편이 악편에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전함으로써 악편을 자연굴복(自然屈伏)시킨다고 보고 있다.

 

  (8) 종말(終末)을 고(告)하는 역사

 

이 항목에서는 끝날에 무엇이 끝나는가 즉 종말(終末)의 때에 어떠한 역사가 끝나는가?를 다루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종말 때에 죄악사(罪惡史)가 끝난다고 한다. 즉 섭리사관(攝理史觀)에 의하면, 신국(神國)이 지상국(地上國)에 승리함으로써 죄악사(罪惡史)가 종말을 고한다. 유물사관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타도(打倒)함으로써 계급투쟁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다. 그러나 통일사관에 있어서는, 선(善)편이 참사랑으로 악(惡)편을 자연굴복시켜서 장자권(長子權)을 복귀함으로써 죄악사(罪惡史)와 선악투쟁사(善惡鬪爭史)가 종말을 고하게 된다.

 

  (9) 도래(到來)하는 이상세계(理想世界)

 

역사가 종말(終末)을 고한 뒤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 것인가? 섭리사관에 의하면, 역사의 종말의 심판이 끝난 뒤에는 새 하늘 새 땅의 시대(時代)가 도래한다고 되어 있다(계 21:1~2). 그러나 그 새 하늘, 새 땅의 시대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시대인가는 전연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유물사관에 의하면, 혁명후에는 계급이 없는 자유의 왕국인 공산주의사회가 실현된다고 한다. 통일사관에서는, 전인류가 참부모 되시는 메시아를 맞이하여 한가족세계(一家族世界)를 이루는 창조이상세계, 즉 지상천국(地上天國)이 실현된다고 본다.

 

이상의 세 가지의 사관(史觀)에 관한 9가지의 항목의 요점을 일괄(一括)하여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8-3과 같다.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독교사관은 신비적이고 비합리적(非合理的)이어서 오늘날에 이르러 설득력을 가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는 있으나, 법칙이 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왼편의 염소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준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또 끝날의 새 하늘과 새 땅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유물사관(唯物史觀)은 기독교사관에 비하여 도리어 현실성과 합리성을 지니고 있고 설득력도 있어서 최근까지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그리고 한 때는 세계의 거의 절반을 적화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공산주의사회가 자유의 왕국도, 부(富)가 넘치는 사회도 아닐 뿐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였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나서, 이제 그 사회는 이 지상(地上)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본래 공산주의는 토인비의 말과 같이 기독교가 그 사명을 다 하지 못하고 세속화(世俗化)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사탄편으로부터의 참소장, 고발장으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물사관은 마치 기독교사관을 뒤집어 놓은 것같은 외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에 관련하여 칼 뢰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적유물로(史的唯物論)이 이상적 토대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유대人의 낡은 메시아 사상과 예언자 주의(主義), 그리고 유대적인 끈질기고도 절대적인 정의(正義)의 고집이다.공산당선언은 과학적 예언이라는 전도(顚倒)된 형식으로 `희

망을 거는 者에 대한 확신'이라는 신앙의 특징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적대하는 두 진영 즉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최종적인 적대가, 역사 최후의 시기에 있어서의 기독교와 반기독교와의 최후의 싸움에 대한 신앙과 일치(一致)하고 있으며,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가 선민(選民)의 세계사적 사명과 유사(類似)한 것은 하등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피억압(被抑壓) 계급의 세계적 구원의 역할은 십자가부활(十字架復活)과의 종교적 변증법에 일치하며, 필연의 王國이 자유의 왕국으로 변하는 것은 옛 에이온(old aion)이 새로운 에이온(new aion)으로 변하는 것과 일치(一致)한다.

 

공산당선언에 서술되어 있는 것같은 역사의 전과정은, 역사가 뜻있는 최종목표를 향하는 섭리에 의하여 구원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유대교=기독교적인 해석의 일반적 도식(圖式)을 반영하고 있다.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은 정치, 경제학의 용어를 사용한 구원사(救援史)인 것이다.17)

 

통일사관은 기독교사관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 나타난 것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사관의 신비성(神秘性)과 비합리성(非合理性)을 극복하고 현실적이고도 합리적인 역사관으로 제시된 것으로서, 공산주의의 기독교사관에 대한 참소를 극복(克服)할 수 있는 유일(唯一)한 사관이다. 기독교사관은 악마를 따르는 지상국(地上國) 사람들이 영원히 벌을 받는다고 했으며, 유물사관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들을 폭력的으로 타도(打倒)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통일사관은 선(善)편이 악(惡)편을 참사랑으로 자연굴복시켜 악(惡)편도 선(善)편으로 복귀시킴으로써 전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참된 이상세계(理想世界)에서는 전인류가 모두 행복(幸福)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통일사관이야 말로 그것을 보장(保障)하는 것이다.

 

또 유물사관은 기독교사관을 미신(迷信) 또는 신화(神話)라고 공격(攻擊)하면서, 유물사관 자체는 법칙성(法則性)을 가진 과학적인 역사관이라고 자랑하고 있으나, 유물사관이 제시한 법칙은 사실상 역사적사실에 맞지 않는 허구의 법칙에 불과하며, 혁명을 합리화(合理化)하기 위한 자의적(恣意的)인 가짜 법칙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관의 법칙은 예외없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一致)하는 문자 그대로의 법칙들인 것이다.

 

         제9장 인식론 (第9章 認 識 論)

 

Epistemology

 

인식론(認識論)은 인식(認識; Erkenntnis)에 관한 여러가지 근본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철학(哲學)의 한 부문으로서 객관(客觀)에 대한 지식(知識)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가, 또 어떻게 해야 올바른 지식(知識)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을 말한다. 즉 인식(認識)의 기원(起源)과 대상(對象)은 무엇이며, 인식의 방법(方法)과 발전(發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 등을 밝히는 이론이다.

 

인식론의 영어인 Epistemology는 그리스어의 지식(知識)을 의미하는 episteme와, 학문을 의미하는 logia를 결합시킨 말로서 페리어(J. F. Ferrier, 1808~1864)가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 독일어(獨逸語) Erkenntnistheorie는 라인홀트(K. L. Reinhold, 1758~1823)에 의해 사용된 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인식론은 이미 고대(古代) 및 중세철학(中世哲學)에도 존재(存在)하고 있었으나, 근세(近世)에 이르러 인간성의 회복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주관(主管)이 제고(提高)되면서 철학의 중심적인 과제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존재론과 더불어 철학의 주요한 부문(部門)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통일사상은 많은 현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준(基準)을 갖고 있다. 특히, 오늘날에 이르러 인식론에 대한 연구열이 점차(漸次) 식어가고 있으며, 인식에 관한 문제는 철학계에서 의학계로 넘겨진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의학이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의학이 인식의 과정에 대한 생리학적 기초를 확립(確立)했다는 점에서, 인식에 관한 문제점의 해결에 공헌(貢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학적인 인식의 이론에도 아직 해결되지 아니한 점이 있다. 이와 같이 미해결의 문제를 포함하여 종래의 일체의 인식(認識)上의 문제를 일괄적으로 해결한 것이 본 인식론이다.

 

인식론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라는 본체론적(本體論的)인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또 인식은 실천활동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올바른 인식론을 확립하지 않는다면 현실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종래의 인식론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론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그와 같은 요청에 보답하기 위해서 제시된 것이 통일사상에 근거한 본 통일인식론이다.

 

먼저 종래의 주요한 인식론에 대해서 그 요점을 소개하고, 그것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다음에 통일인식론을 소개한 후 종래의 인식론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본(本) 인식론에 의해서 훌륭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것과, 종래의 모든 인식론의 핵심이 본 인식론에 모두 포함되어 있어서, 본(本) 인식론은 문자 그대로의 통일인식론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끝으로 본 통일인식론도 다른 부문(部門)과 마찬가지로 문선명선생(文鮮明先生)의 지도하에 체계화(體系化)되었음을 밝혀둔다.

 

               一. 종래의 인식론

 

인식론에 관한 연구는 이미 고대로부터 행해져 왔으며, 그것이 철학의 중심과제(中心課題)로서 제기된 것은 근세(近世)에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인식론을 처음 체계적(體系的)으로 설명한 사람은 로크(J. Locke, 1632~1704)로서 그의 인간오성론(悟性論)은 획기적인 노작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상(對象)을 올바르게 인식하는데 있어서 종래의 인식론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데, 그 측면이 바로 인식의 세 가지 논점(論點)이다. 그리고 하나의 논점에 각각 두 가지의 입장이 있다. 인식의 세 가지 측면의 논점(論點)이란 첫째로 인식의 기원(起源)에 관한 것이며, 둘째로 인식의 대상(對象)에 관한 것이며, 셋째로 인식의 방법(方法)에 관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각각의 논점(論點)에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의 입장이 있다. 인식의 기원에 있어서는 인식이 감각(感覺)에 의해 얻어진다는 경험론(경험론)과 생득관념(生得觀念)에 의해 얻어진다는 이성론(理性論; 또는 合理論)의 두 입장이 대립해 왔고, 인식의 대상에 관해서는 대상이 객관적(客觀的)으로 실재한다는 실재론과 인식의 대상은 주관(主體)의 관념 또는 표상만이라는 주관적관념론의 두 입장이 대립해 왔으며, 인식의 방법에 있어서는 주로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과 변증법적방법(辨證法的方法) 등이 주장되었다.

 

경험론(經驗論)과 이성론(理性論)의 대립에 있어서 경험론은 나중에 회의론(懷疑論)에 빠졌고, 이성론은 독단론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칸트는 이 양자를 비판적방법(批判的方法) 또는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에 의해서 종합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1) 이것이 인식의 대상은 주관에 의해 구성(構成)된다고 하는 선천적종합판단(先天的綜合判斷) 이론이다. p.523

 

그 후, 헤겔의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표절한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유물변증법적 방법에 의한 인식론이 바로 마르크스주의 인식론 즉 변증법적 인식론이다. 이것은 인식의 내용과 형식(形式; 思考形式)이 외계의 사물의 반영이라고 보는 공산주의의 반영론(反映論) 또는 모사설(模寫說)이다.

 

여기서 특히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본항목(本項目)에서 종래의 인식론을 다루는 것은 종래의 인식론의 내용을 구체적, 학술적으로 소개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통일인식론이 종래의 인식론이 지녔던 미해결(未解決)의 문제점(問題點)들을 해결해냈다는 것을 참고로 보이기 위해서, 그 문제점과 관련된 사항을 간단히 소개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본(本) 통일인식론 그 자체(自體)만을 이해하는 데는 종래의 인식론의 항목을 생략(省略)해도 좋을 정도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아울러 밝혀둔다.

 

 1. 인식(認識)의 기원(起源)

 

모든 지식(知識)은 경험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보는 것이 경험론이며, 거기에 비해서 참다운 인식은 경험으로부터 독립한 이성의 작용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보는 것이 이성론 또는 합리론(合理論)이다. 양자 모두 17~18세기(世紀)에 나타났는데, 영국의 철학자들은 경험론을 옹호하였고, 대륙의 철학자들은 이성론을 옹호하였다.

 

  (1) 경험론

 

   1) 베이컨

 

경험론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은 프란시스 베이컨(F. Bacon, 1561~1626)이다. 그의 저명한 노작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 1620)에서 그는 전통적인 학문은 무용(無用; 쓸데없는)한 말의 연속에 지나지 않으며, 내용적으로는 공허(空虛)하다고 하면서 올바른 인식은 자연의 관찰과 실험에 의해 얻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 때 올바른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선인적(先入的)인 편견(偏見)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 편견으로서 네 가지의 우상(偶像; Idola)을 들었다.

 

첫째는, 종족(種族)의 우상(偶像; Idola Tribus)이다. 이것은 사람의 지성(知性)은 평평하지 않은 거울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사물의 본성(本性)을 왜곡해서 반사하기 쉽다고 하는, 인간이 일반적으로 빠지기 쉬운 편견을 말한다. 예컨대 자연을 의인화(擬人化)시켜서 보는 경향이 그것이다.

 

둘째로, 동굴(洞窟)의 우상(偶像; Idola Specus)이다. 이것은 마치 동굴(洞窟)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같이, 개인(個人)의 독특한 성질이나 습관(習慣), 좁은 선입관(先入觀) 등에 의해서 생기는 편견을 말한다.

 

셋째는, 시장(市場)의 우상(偶像; Idola Fori)이다. 이것은 지성(知性)이 언어에 의하여 영향받는 데서 오는 편견을 말한다. 그 때문에 전혀 존재(存在)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공허(空虛)한 논쟁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극장(劇場)의 우상(偶像; Idola Theatri)이다. 이것은 권위나 전통에 의지하려는 데서 오는 편견(偏見)을 말한다. 예컨대 권위있는 사상이나 철학에 무조건 의지하려 하는 데에서 오는 편견(偏見) 따위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우상(偶像)을 제거한 후, 우리들은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개개의 현상(現象)속에 있는 본질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베이컨은 귀납법(歸納法)을 제시하였다.

 

   2) 로크

 

경험론을 체계화(體系化)한 사람은 로크(J. Locke, 1632~1704)이며, 그는 주저(主著; 주요저서)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에서 그의 주장을 상세히 전개하였다. 그는 먼저 인식에 있어서 생득관념(生得觀念)을 배격했다. 생득관념(生得觀念)이란, 인간이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인식에 필요한 관념을 말한다. 그는, 인간의 마음은 본래 백지(白紙; tabula rasa)와 같은 것이며, 백지에 글씨나 그림을 그리면 그대로 남는 것처럼, 마음에 들어간 관념(觀念)은 마음의 백지(白紙)에 그대로 적혀진다(인식된다)고 하였다. 즉 그는, 인식은 외부에서 마음에 들어오는 관념(觀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2)고 본 것이다. p.526

 

그런데 이 관념은 두 가지의 방향에서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데, 하나는 감각(感覺; sensation)의 방향이며, 또 하나는 반성(反省; reflection)의 방향이다. 이것이 로크의 인식의 기원(起源)이다. 즉 로크에 있어서는, 인식의 기원은 관념을 받아들이는 감각과 반성(反省)에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로크의 경험론은 감각이나 반성을 통한 경험이 인식의 기원(起源)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감각(感覺)이란, 감각기관(感覺器官)에 비치는 대상의 지각(知覺)을 말한다. 즉 황(黃), 백(白), 열(熱), 냉(冷), 유(柔), 견(堅), 고(苦), 감미(甘味) 등의 관념을 말한다. 반성이란, 마음의 작용을 말하며 생각한다, 의심한다, 믿는다, 추리한다, 의지한다 등이 그것이다. 이 반성(反省) 때에도 관념(觀念)이 얻어진다.

 

그런데 관념(觀念)에는 단순관념(單純觀念; simple idea)과 복합관념(複合觀念; complex idea)이 있다고 한다. 단순관념(單純觀念)이란 감각과 반성에 의해서 얻어진, 따로 따로 떨어진 관념(觀念)이며, 그것들이 오성(悟性)의 작용에 의해 결합(結合), 비교(比較), 추상(抽象)됨으로써 보다 고차적인 관념을 이룬 것이 복합관념(複合觀念)이다.

 

그리고 단순관념(單純觀念)에는 고체성(固體性; solidity), 연장(延長; extension), 형상(形象; figure), 운동(運動; motion), 정지(靜止; rest), 수(數; number)와 같이 대상자체(對象自體)에 객관적으로 구비(具備)되어 있는 성질과, 색(色; color) 냄새(smell) 맛(taste) 소리(sound)와 같이 주관적(主觀的)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성질이 있다고 하면서 전자(前者)를 제일성질(第一性質), 후자(後者)를 제2성질(第二性質)이라고 불렀다.

 

복합관념(複合觀念)에는 양상(樣相; mode), 실체(實體; substance), 관계(關係; relation)의 세 가지가 있다. 양상(樣相)이란, 공간의 양상(거리, 평면, 도형 등), 시간의 양상(계기, 지속, 영원 등), 사유(思惟)의 양상(지각, 상기, 추상), 수(數)의 양상, 힘의 양상 등, 사물의 상태나 성질 즉 속성을 나타내는 관념들이다. 실체란 단순관념을 일으키는 물자체(物自體)를 말하며, 여러 성질(性質)을 지니고 있는 기체(基體; substratum)에 대한 관념이다. 그리고 관계란, 인과(因果)의 관념과 같이 두가지의 관념을 비교함으로써 생기는 관념(동일, 차이, 원인, 결과 등)을 말한다.

 

로크는 인식(認識)이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관념의 결합(結合)과 일치(一致) 또는 불일치(不一致)와 배반(背反)의 지각(知覺)'3) 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대개 진리(眞理)란 관념의 일치(一致), 불일치(不一致)를 그대로 언어로 표기한 것이다'4) 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관념을 분석함으로써 인식의 기원(起源)의 문제에 답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p.527

 

로크는 직각적(直覺的)으로 인식되는 정신과 논리적으로 인식되는 신(神)의 존재를 확실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외계(外界)에 있어서의 물체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감각적으로밖에는 알 수 없으므로 확실성을 지닐 수는 없다고 하였다.

 

   3) 버클리

 

버클리(G. Berkeley, 1685~1753)는 로크가 말한 물체(物體)의 제1성질(第一性質)과 제2성질(第二性質)의 구별을 부정하고, 제1성질도 제2성질과 마찬가지로 주관적이라고 하였다. 예컨대 거리(距離)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연장(延長)), 즉 第一성질(性質)의 관념처럼 보이지만 그것도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거리의 관념은 다음과 같이 얻어진다는 것이다. 즉 우리들은 일정한 거리의 저편에 있는 어떤 사물을 눈으로 보고, 다음에 그곳까지 발바닥으로 땅을 밟으며 걸어가서, 손으로 만져본다. 그러한 과정을 반복할 때, 어떤 종류의 시각(視覺)은 이윽고 어떤 종류의 촉각(觸覺; 예컨대 걸을 때의 발바닥의 촉각)을 수반한 것이라고 미리 예상하게 된다. 거기에 거리의 관념이 생긴다. 즉 우리들은 연장(延長)으로서의 거리를 그대로 객관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버클리는 로크가 말한 여러 성질(性質)의 담하체(擔荷體)로서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사물은 관념의 집합(集合; collection of ideas)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존재(存在)하는 것이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버클리는 물체라는 실체(實體)의 존재를 부정했으나, 지각(知覺)하는 실체로서의 정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4) 흄

 

경험론을 궁극에까지 추구한 사람이 흄(D. Hume, 1711~1776)이었다. 그는 우리의 지식(知識)은 인상(印象; impression)과 관념(觀念; idea)에 근거한다고 생각하였다. 인상(印象)이란 감각과 반성에 의한 직접적인 표현을 말하며, 관념(觀念)이란 인상이 없어진 후에 기억 또는 상상에 의해 마음에 나타나는 표상(表象)을 말한다. 그리고 인상과 관념의 양자를 총칭하여 지각(知覺; perception)이라고 불렀다.

 

그는 단순관념(單純觀念)의 복합에 있어서 유사(類似; resemblance), 접근(接近; contiguity), 인과성(因果性; cause & effect)을, 세 가지의 연상법칙(聯想法則)으로 들었다. 여기서 유사와 접근에 관한 인식은 확실한 것이어서 문제는 없으나 인과성에 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인과성(因果性)에 관한 예로서, 번개가 친 뒤에 우레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면, 이때 보통 사람들은 번개가 원인이고 우레 소리는 그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흄은 단순한 인상(印象)으로서의 양자를 원인과 결과로서 결합시킬 이유는 아무 데도 없다고 하면서, 인과성(因果性)의 관념은 주관적인 습관이나 신념에 의해 성립(成立)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닭이 울고 난 후 잠깐 있다가 태양이 뜬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누구나 알고 있는 현상이지만, 이 때 닭이 우는 것이 원인이고, 태양이 올라오는 것이 그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인과성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인식은 그와 같이 주관적인 습관이나 신념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경험론은 흄에 이르러 회의론(懷疑論)에 빠져 버렸다. 그는 또 실체성(實體性)의 관념에 대해서도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물체라는 실체의 존재를 의심(疑心)하였다. 또한 그는 정신(마음)이라는 실체의 존재까지도 의심하였으며, 정신이란 지각(知覺)의 묶음(束 : bundle of perceptions)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2) 이성론

 

이와 같은 영국의 경험론에 대해서, 감각(感覺)에 의해서는 올바른 인식(認識)이 불가능하며 이성에 의한 연역적(演繹的), 논리적(論理的)인 추리에 의해서만 올바른 인식이 얻어진다고 보는 입장이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볼프 등을 중심한 대륙의 이성론(合理論)이다.

 

   1) 데카르트

 

이성론의 시조(始祖)로 알려지고 있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참된 인식에 이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의심(疑心)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것이 소위 그의 방법적 회의(方法的 懷疑; methodical doubt)이다.

 

그는 먼저 감각이 우리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감각적(感覺的)인 것을 의심하였다. 왜 이러한 방법을 취하였을까. 그것은 참된 진리를 얻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즉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의심해 보고, 그리고서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실(眞實)이며, 진리(眞理)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한 모든 것을 의심(疑心)해 보고 또 의심해 보았다. 그 결과 한가지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음을 그는 깨달았다. 그것이 내가 의심한다(思惟한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存在)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命題)를 세웠던 것이다. 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存在)한다라는 명제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철학의 제1원리(第一原理)로서,5) 이 명제(命題)가 틀림없이 확실한 것은 이 인식이 명석(明晳; clear)하고 판명(判明; distinct)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우리들이 극히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되는 것은 모두 참(眞)이다'6) 라는 일반적규칙(一般的規則)(第二原理)이 도출된다. p.530

 

여기에서 명석(clear)이란, 사물이 정신에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을 의미하고 판명(判明; distinct)이란 명석하면서 다른 사람과 확실히 구별되어 혼동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7) 명석의 반대가 애매(曖昧; obscure)이며, 판명의 반대가 혼동(混同; confused)이다. 이 규칙에 따라 사유를 속성으로 하는 정신과, 연장을 속성으로 하는 물체의 존재가 확실한 것으로서 인정되는 것이다. 이 제1원리와 제2원리에서 데카르트의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이 성립된다. 그것은 제1원리에서 마음(思惟)의 실제(實在)가, 그리고 제2원리에서 물질(연장)의 실재가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석하고 또 판명한 인식이 확실한 것으로 보증되기 위해서는, 악령(惡靈)이 몰래 사람을 속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가 필요하다. 성실한 하나님이 인간을 속인다는 일은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면 인식에 잘못이 생길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신(神)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첫째, 하나님의 관념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득관념(生得觀念;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관념, 本有觀念)이지만, 그 관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원인이 없어서는 안 된다.

 

둘째, 불완전한 우리가 완전한 존재(存在)(하나님)의 관념을 가진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입증된다.

 

셋째, 가장 완전한 존재자(하나님)의 개념은 그 본질로서의 실체가 필연적(必然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포함(包含)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가 입증된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인 무한(無限), 전지(全知), 전능(全能)이 명백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로서 성실성(誠實性; veracitas)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명석-판명한 인식에 확실한 보증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하나님과 정신(精神)과 物體(물질)의 존재를 확실한 것으로 인정했지만 그 중에서 참다운 의미에서의 독립적인 존재는 하나님뿐이며, 정신과 물체(物體)는 하나님에 의존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정신과 물체는 각각 사유와 연장을 그 속성으로 하는, 서로 전적으로 독립한 실체라고 하면서 그는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한 인식이 틀림없이 확실하다는 것을 논증하였는데, 그는 그것으로써 수학적 방법을 터로 하는 합리적인 인식의 확실성까지도 주장하였던 것이다.

 

   2) 스피노자

 

스피노자(B. de Spinoza, 1632~1677)도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엄밀한 논증(論證)에 의해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특히 기하학적 방법(幾何學的 方法)을 철학에 사용하여 논리적인 이론전개(理論展開)를 하려고 하였다.

 

이성에 의해서 일체의 진리를 인식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스피노자 철학의 전제(前提)이다. 즉 이성에 의해 영원(永遠)한 상(相) 아래에서 사물을 파악하고 또한 하나님과의 필연의 관계에서 전체적, 직각적(直覺的)으로 사물을 파악할 때 참다운 인식이 얻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원한 상(相) 아래서 사물을 본다는 것은 모든 것을 그 필연(必然)의 과정에서(필연의 연속에서) 이해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모든 사물을 바라볼 때 인간은 덧없는 사물(事物), 흘러가는 현상에 집착해서 마음을 쓰지 않아도 좋게 되며, 오히려 지금까지 덧없는 것으로 알았던 사물이나 현상,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들까지도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의 표현으로서 귀(貴)한 것으로 파악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참다운 생명(生命)을 얻게 되고 완전에 도달하며, 무한(無限)한 기쁨, 참다운 행복(幸福)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의 상(相) 아래에서 사물을 파악한다는 말의 뜻이다.

 

또한 이것은 명석-판명한 이성과 영감(靈感)에 의하여 얻어지는 자각(自覺)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식을 감성지(感性知), 이성지(理性知), 직각지(直覺知)의 셋으로 나누었다. 그 중, 지성(知性)에 의한, 질서가 없는 감성지(感性知)는 불완전한 것이며, 이성지(理性知)와 직각지(直覺知)에 의해서 참다운 인식이 성립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말하는 직각지(直覺知)란, 어디까지나 이성(理性)에 근거한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질을 각각 사유(思惟)와 연장(延長)을 그 속성으로 하는, 서로 독립된 실체라고 생각한데 대하여, 스피노자는 실체는 하나님 뿐이며, 사유(思惟)와 연장(延長)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자연의 관계를 능산적(能産的) 자연(自然; natura naturans)과 소산적(所産的) 자연(自然; natura naturata)의 관계로 보았으며, 양자는 분리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자연이다라고 하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사상(思想)을 전개하였다.

 

   3)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G. W. Leibniz, 1646~1716)도 수학적방법(數學的方法)을 중요시하고 소수의 근본원리에서 모든 명제(命題)를 이끌어 내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는 인간이 인식하는 진리(眞理)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즉 첫째로, 순수(純粹)하게 이성에 의해 논리적으로 파악(把握)되는 것, 둘째로 경험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나누어서 전자(前者)를 영원의 진리 또는 이성의 진리라고 부르고, 후자를 사실의 진리 또는 우연의 진리라고 불렀다. 이성의 진리를 보증하고 있는 것은 동일률(同一律)과 모순률(矛盾律)이며, 사실의 진리를 보증하는 것은 어떠한 것도 충분한 이유(理由)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충족이유률(充足理由律)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진리의 구별은 인간의 지성(知性)에 대해서만 해당되며, 인간에 있어서 사실의 진리로 간주되는 것도, 하나님은 논리적(論理的) 필연성에 의해 인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에 있어서는 궁극적(究極的)으로 이성적인 인식이 이상적인 인식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는 또 참다운 실체는, 우주를 반영하는 우주(宇宙)의 살아있는 거울(鏡)로서의 모나드(monade, 單子)라고 하였다. 모나드는 지각(知覺)과 욕구의 작용을 가진 비공간적인 실체이며, 무의식적인 미소지각(微小知覺; petite perception)에서 그 집합(集合)으로서의 통각(統覺; apperception)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나드에는 물질적 차원의 잠든 모나드, 감각과 기억을 가진 동물차원의 혼(魂)의 모나드(또는 꿈꾸는 모나드), 보편적인식을 가진 인간 차원의 정신(精神)의 모나드라는 3단계의 모나드가 있으며, 최고 차원의 모나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4) 볼프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기조(基調)로 하면서, 이에 더하여 이성적(理性的)인 입장을 체계화한 사람이 볼프(C. Wolff, 1679~1754)이다. 그런데 그의 이론의 체계화 과정에서 라이프니츠의 참정신이 희미해졌거나 왜곡되었으며, 또한 라이프니츠의 주요 부분이 그의 이론체계에서 빠졌던 것이다. 특히, 라이프니츠의 모나드論이나 예정조화론은 왜곡(歪曲)되었다. 칸트는 처음에 이 볼프학파에 속해 있었지만 후에 그를 합리주의적(合理主義的)인 독단론의 대표자라고 하면서 예리하게 그를 비판했다. 또한 볼프는 근본원리에 있어서 논리적 필연성에 의해 인도되는 이성적(理性的)인 인식이야말로 참다운 인식이라고 하면서, 모든 진리는 同一律(모순율(矛盾律))에 의해서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실에 관한 경험적 인식의 존재도 인정하고 있으나, 이성적인식(理性的認識)과 경험적인식(經驗的認識)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으며, 경험적인식은 참다운 인식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대륙의 이성론은 사실에 관한 인식을 경시(輕視)하고, 모든 것을 이성에 의해서 합리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결국 볼프에 이르러 독단론에 빠지게 되었다.8) p.535

 

 2. 인식대상(認識對象)의 본질(本質)

 

다음은 인식대상의 본질을 무엇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이다. 인식의 대상은 주체에서 독립하여 객관적(客觀的)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 실재론(實在論)이며, 인식의 대상은 객관세계(客觀世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체의 의식속에 관념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주장이 주관적관념론(主觀的觀念論)이다.

 

  (1) 실재론

 

실재론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즉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 과학적실재론(科學的實在論), 관념적실재론(觀念的實在論), 그리고 변증법적(辨證法的) 유물론(唯物論)등이 그것이다. 첫째의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은 자연적 실재론이라고도 하며, 물질로 되어 있는 대상이 주관에 대하여 독립해 있다는 입장으로서,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사물이 존재한다는 상식적인 견해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지각(知覺)은 대상을 정확하게 모사(模寫)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두 번째의 과학적실재론(科學的實在論)은 다음과 같다. 즉 대상은 주관과 독립하여 존재하고 있지만, 감각적인식 그대로는 객관적인식이 될 수 없으며, 감각(感覺)을 초월한 오성(悟性)의 작용에 의해서 대상으로부터 얻은 경험적 사실에 과학적인 반성을 가함으로써 실재를 바르게 알 수 있다는 견해이다. 예를 들면, 색채는 시각적 현상이지만, 과학은 여기에 과학적 비판을 가하여 색채(예를 들면 빨강)는 일정(一定)한 파장을 가진 전자파(광선)에 대한 주관적 감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또 시각상의 번갯불과 청각상의 천둥은, 과학적으로는 공중에서 일어나는 방전현상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상식적인 실재관에 과학적인 반성을 가한 이론이 과학적 실재론이다.

 

세 번째의 관념론적실재론(觀念論的實在論)은 객관적관념론이라고도 한다. 대상의 본질은 인간의 의식을 초월한 정신적, 객관적인 것이라는 견해를 말한다. 즉 정신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출현하기 전부터 세계의 근원(根源)으로서 존재하였으며, 이 근원적인 정신이야말로 세계의 참된 실재(實在)로서 우주의 원형이며, 만물은 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예컨대 플라톤은 사물의 본질인 이데아를 참된 실재(實在)로 생각하면서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헤겔은 세계는 절대정신의 자기전개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변증법적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에 있어서, 대상은 의식에서 독립하여 존재하며, 의식에 반영된 객관적실재라고 보기 때문에 역시 실재론이다. 이것은 사물이 거울에 비치는 것과 같이, 외부의 만물이 인간의 의식(뇌수(腦髓)에 반영된 것이 인식이라고 보는 입장으로서, 공산주의의 인식론이다. 그러나 반영된 내용 그 자체가 반드시 그대로는 진실(眞實)이 아니며, 실천(實踐)(검증)에 의해서 그 진실성이 확인될 때 비로소 객관적으로 진실이 된다. 이와 같이 검증에 의해서 확인될 때 비로소 진리가 된다고 보는 입장을 변증법적 인식론이라고 한다.

 

  (2) 주관적(主觀的) 관념론(觀念論) p.536

 

실재론은 상술한 바와 같이 인식의 대상이 물질이냐 관념이냐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주관과 독립해서 존재한다고 보고 있는 반면에, 인식대상이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해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는데 있어서만 그 존재가 인정된다고 보는 것이 주관적관념론(主觀的觀念論)이다. 버클리가 그 대표자이며, 실재(實在)는 곧 지각(知覺)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명제(命題)가 그 주장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 자아(自我)의 작용을 떠나서 비아(非我; 대상)가 존재하는지 어떤지는 전혀 말할 수 없다고 한 피히테(J. G. Fichte, 1762~1814)나, 세계는 나의 표상(表象)이다(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라고 말한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1788~1860)도 똑 같은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이다.

 

 3. 방법(方法)에서 본 인식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식의 기원(起源)을 경험으로 본 경험론은 나중에 회의론(懷疑論)에 빠지게 되었고, 인식의 기원을 이성에 있다고 본 이성론은 나중에 독단론(獨斷論)에 빠졌다. 그와 같은 결과가 벌어지게 된 이유는 경험이 어떻게 해서 인식되어지는가, 그리고 이성에 의해서 어떻게 인식이 성립되는가 하는 문제, 즉 인식의 방법을 고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식의 방법을 중시(重視)하고 이것을 본격적으로 다룬 것이 칸트의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과 헤겔?마르크스의 변증법적방법이다. 여기서는 칸트와 마르크스의 방법에 대해서 그 요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칸트의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

 

영국의 경험론은 회의론(懷疑論)에, 대륙의 합리론(合理論)은 독단론에 빠졌지만 이 두 가지 입장을 종합하여 새로운 견해를 세운 사람이 칸트(I. Kant, 1724~1804)이다. 경험론은 인식의 기원(起源)을 경험으로 보고 이성의 작용을 무시함으로써, 그리고 이성론은 이성을 만능의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양자가 모두 오류에 빠졌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그래서 칸트는 올바른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경험이 어떻게 해서 인식이 될 수 있는가 하는데 대한 분석(分析)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작용의 검토, 즉 비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의 세가지 비판서를 저술하였는데, 각각 진리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선(善)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미(美)는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라는 진(眞)-선(善)-미(美)의 가치의 실현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중 인식론에 관한 것을 다룬 부분이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이다.

 

   1)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의 요점

 

칸트는, 지식(知識)은 경험을 통하여 증대한다는 사실(事實)과, 올바른 지식은 보편타당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경험론과 이성론을 통일하려고 하였다. 경험에 의해서 비로소 인식능력이 작용하는 것은 자명(自明)하지만, 여기에서 칸트가 찾아낸 것은 인식하는 주관속에 선천적(先天的)인 인식의 형식(관념(觀念))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즉 대상에서 오는 감성적(感性的)내용(감각적질료, 감각의 다양, 감각적소재라고도 한다)이 주관의 선천적형식(先天的形式)에 의해서 질서가 세워짐으로써 인식의 대상(경험의 대상)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종래의 경험론이나 이성론이 모두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한다고 한 데 대하여, 칸트는 인식의 대상이 주관에 의해 구성(構成)된다고 하였으며, 자신의 이러한 착상을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라고 자찬하였다. 칸트의 인식론은 이와 같이 대상 그 자체의 인식을 목표로 삼지 않고 객관적 진리성은 어떻게 해야 얻어지는가를 명백히 하고자 한 것으로서, 이것을 선험적(先驗的; 또는 초월적, transzendental)방법(方法)이라고 불렀다.

 

칸트에 의하면, 인식(認識)은 판단이다. 판단은 명제(命題)인 것으로서 거기에는 주어와 술어가 있다. 따라서 인식을 통하여 지식이 증가한다는 것은, 판단(命題)에 있어서 주어의 개념 속에 없던 새로운 개념(槪念)이 술어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칸트는 그와 같은 판단을 종합판단(綜合判斷)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어의 개념 속에 술어의 개념이 이미 포함되어 있는 판단을 분석판단(分析判斷)이라고 한다. 결국, 종합판단에 의해서만 새로운 지식(知識)이 얻어지는 것이다.

 

칸트가 들고 있는 분석판단(分析判斷)과 종합판단(綜合判斷)의 예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물체(物體)는 연장을 가지고 있다라는 판단은 물체의 개념 속에 이미 연장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분석판단(分析判斷)이다. 한편 직선(直線)은 두점간(二點間)의 최단의 선(線)이다라는 판단은 종합판단(綜合判斷)이다. 직선이라는 개념은 장단(長短)이라는 양(量)을 포함하지 않고 단지 똑바르다는 성질을 가리키고 있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최단이라는 개념은 전혀 새로이 첨가(添加)된 것이다.

 

그러나 종합판단(綜合判斷)에 의해서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고 하여도 그 지식이 보편타당성(普遍妥當性)을 갖지 않으면, 그것은 올바른 지식이 될 수 없다. 지식이 보편타당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은 단순한 경험적인식(經驗的認識)이어서는 안되며, 경험에서 독립된 先天的(아프리오리)인 요소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종합판단(綜合判斷)이 보편타당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은 선천적(先天的)인 인식 즉 선천적 종합판단(先天的 綜合判斷)이 아니면 안 된다. 그래서 칸트가 부딪혔던 문제는선천적(先天的)인 종합판단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9)하는 것이었다.

 

   2) 내용과 형식(形式)

 

칸트는 내용과 형식의 통일로써 경험론과 이성론을 종합하려고 하였다. 내용이란, 외계의 사물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우리의 감성(感性)에 주어지는 표상(表象) 즉 의식 내용을 말한다. 내용은 인식의 소재(Stoff) 또는 질료(質料; Materie)로서 외래적인 것이므로 후천적(後天的), 경험적(經驗的)인 요소이다.

 

한편 형식(形式)이란 질료(質料) 즉 다양한 감각의 내용을 종합 통일하는 한정성(限定性)이며 테두리이다. 즉 감각적단계에서 형성된 각종의 질료를 통일하는 뼈대이다. 이 형식이야말로 선천적인 것이며, 그 감성적내용에 통일성을 주는 테두리이다. 이 선천적(先天的)인 형식(形式)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감각의 다양(多樣)한 내용을, 직감적으로 시간적?공간적으로 한정(限定)하는 테두리로서의 직관형식(直觀形式)이며, 또 하나는 오성(悟性)의 사유(思惟)를 한정(限定)하는 사유형식(思惟形式)이다. 이러한 후천적(先天的)인 형식(形式)에 의해서 보편타당성을 지닌 종합판단이 가능하게 된다고 하였다.

 

시간적(時間的), 공간적(空間的) 개념으로서의 직관형식(直觀形式)은 감성적단계에서 감각의 다양한 내용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파악하는 직감적(直感的)인 틀(形式)이다. 그러나 감성적(感性的) 단계에서의 직감만으로는 인식이 성립(成立)되지 않는다. 인식이 성립(成立)되려면 대상이 오성(悟性)에 의해 사유(思惟)되는 과정이 필요하며, 따라서 오성단계에 있어서의 사유(思惟)를 한정하는 테두리로서의 선천적인 형식(形式), 즉 선천적인 개념으로서의 사유형식(思惟形式)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직관형식(直觀形式)으로 포착한 내용과 사유형식(개념)의 결합에 의해 인식이 성립한다고 하였다. 그것을 칸트는 내용없는 사유(思惟)는 공허하며,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말로 표현하였다.10) p.541

 

칸트는 오성(悟性)에 있어서의 선천적인 개념(思惟形式)을 순수오성개념(reiner Verstandesbegriff) 또는 카테고리(Kategorie, 범주(範疇))로 불렀다. 그리고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일반논리학에 있어서의 판단(判斷)의 형식(悟性形式)을 정리해서 다음과 같은 12가지 카테고리를 도출(導出)하였다. p.541

 

1.분량(分量; Quantitat)... ... ... 단일성(單一性; Einheit) 다수성(數多性; Vielheit) 총체성(總體性; Allheit)

 

2.성질(性質)(Qualitat)... ... ... 실재성(實在性; Realitat) 부정성(否定性; Negation) 제한성(制限性; Limitation)

 

3.관계(關係)(Relation)... ... ... 실체성(實體性; Substanz) 인과성(因果性; Kausalitat) 상호성(相互性; Gemeinschaft)

 

4.양상(樣相; Modalitat)... ... ... 가능성(可能性)(Moglichieit) 현실성(現實性; Wirklichkeit) 필연성(必然性; Notwerdigkeit)

 

이와 같이 칸트는 대상의 감성적내용(感性的內容)이 직관형식을 통하여 직감되고 사유형식(思惟形式)(카테고리)을 통하여 사유됨으로써 인식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감각적단계에 있어서의 감성적(感性的)내용(직관적 내용)과 오성적단계에 있어서의 사유형식(思惟形式)은 자동적으로 종합되는 것이 아니다. 감성과 오성은 같은 인식능력의 일부분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이질적인 것이다. 여기에 兩요소(要素)를 공유하는 제3의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구상력(構想力; 想像力, Einbildungskraft)이며, 이 구상력에 의해서 직관적(直觀的) 내용과 사유형식(思惟形式)이 통일되어서 다양한 질료의 단편(端片)들이 종합-통일되게 된다. 이와 같이 감각적(感覺的)단계의 직관적(直觀的)내용과 오성적(悟性的)단계의 사유형식(思惟形式)이 구상력에 의해 종합-통일되어 생긴 구성물(構成物)이 바로 칸트에 있어서의 인식(認識)의 대상(對象)이다. 따라서 칸트에 있어서의 인식의 대상은 객관적으로 외계(外界; 외부세계)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과정에서 구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의 인식의 대상은 경험론의 후천적인 요소와 이성론의 선천적인 요소가 하나로 통일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때 인식하는 우리들의 의식(意識)은 경험적, 단편적인 의식이어서는 안 되며, 경험적인 의식의 근저(根底)에 통일력을 지닌 순수의식(純粹意識)이어야 한다. 칸트는 그것을 의식일반(意識一般; Bewusstsein Uberhaupt), 순수통각(純粹統覺; reine Apperzeption) 또는 선험적통각(先驗的統覺; transzend entale Apperzeptio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감성(感性)과 오성(悟性)의 작용이 어떻게 결부되는가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칸트는 구상(構想)力이 그 매개의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3) 형이상학(形而上學)의 부정과 물자체(物自體)

 

이리하여 현상세계에 있어서의 인식, 즉 자연과학이나 수학에 있어서, 어떻게 해서 확실한 인식이 성립(成立)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논한 후에, 칸트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지 아니한가를 검토하였다. 감각적(感覺的)인 내용이 없는 형이상학은 감성적직관(感性的直觀)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식될 수가 없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작용(作用)은 悟性만에 관한 것이어서 감성과는 직접 관계하지 않으므로, 현실로 존재하지 않은 것을 마치 존재하고 있는 것같이 착각(錯覺)하는 경우가 있다. 그와 같은 착각을 칸트는 선험적가상(先驗的假象; transzendentaler Schein)이라고 불렀다. 선험적가상(先驗的假象)에는 영혼(靈魂)의 이념(理念), 우주(세계)의 이념(理念), 그리고 신(神)의 이념(理念)11)의 세 가지가 있다. p.543

 

그 중 우주의 이념 즉 우주적가상(宇宙的假象)을 순수이성의 이율배반(二律背反; Antinomie)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성이 무제약자(無制約者; 무한한 우주)를 추구할 때, 동일한 논거에서 두 개의 전혀 相反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세계는 시간적으로 시작이 있고, 공간적으로 한계가 있다(定立), 세계는 시간적으로 시작이 없고, 공간적으로 한계가 없다(反定立)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명제(命題)가 그 예이다. 이것은 감성(感性)에 주어진 내용을 그대로 세계 전체로서 파악하려고 하는 데서 오는 오류라고 하였다.

 

칸트는 대상에서 오는 감성적(感性的)내용이 주관의 선천적인 형식에 의해서 구성되는 한에 있어서 인식이 성립되는 것이며, 대상 그 자체, 즉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는 결코 인식될 수 없다고 하였다. 물자체의 세계란 현상적(現象的) 세계의 배후에 있다고 보는 세계이며, 예지계(叡智界)라고도 한다. 그러나 칸트가 물자체의 세계를 부정(否定)해 버린 것은 아니었다.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에서 그것은 도덕을 실현하기 위하여 요청되는 세계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지계(叡智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자유와 영혼의 불사(不死)와 신(神)의 존재가 요청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2) 마르크스주의(主義)의 인식론(認識論)

 

다음은 유물변증법에 근거한 인식론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유물변증법에 의한 인식론은 마르크스主義 인식론 또는 변증법적유물론의 인식론이라고 불려진다.

 

   1) 반영론(反映論, 模寫說)

 

유물변증법에 의하면, 정신의식(精神意識)은 뇌의 산물 또는 기능이다.12) 그리고 객관적 실재가 의식에 반영됨(模寫됨)으로써 인식이 이루어 진다고 보고 있다. 이것을 반영론 또는 모사설(teoriya otrazhenia, copy theory)이라고 한다. 그것을 엥겔스는 우리들은……… 다시 유물론적으로, 우리들의 두뇌(頭腦) 속의 개념을 현실의 사물의 모사라고 이해하였다'13)고 말하고, 레닌은 인간의 의식은(인간의 의식이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 거기에서 독립하여 존재하고 있고, 또 발전하고 있는 외계(外界)를 반영한다'14)고 하였다.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에 있어서는 칸트가 말하고 있는 감성적내용이 그대로 객관적실재의, 의식에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사유형식(思惟形式)도 객관세계의 실재형식의 의식에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다.

 

   2) 감성적인식(感性的認識), 이성적인식(理性的認識), 실천(實踐) p. 544

 

인식은 단순히 객관적세계의 반영이 아니다. 반영된 내용은 반드시 실천을 통하여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레닌은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생생한 직관(直觀)으로부터 추상적사고(抽象的思考)로, 그리고 이것에서 실천으로…… 이것이 진리인식의, 즉 객관적실재의 인식에 대한 변증법적인 과정이다'15).

 

유물변증법적 인식의 과정을 더욱 구체적(具體的)으로 설명한 것이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뚱)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식은 실천을 터로 하고 얕은 곳으로부터 깊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인식의 발전과정에 관한 변증법적유물론의 이론이다……… 즉 인식은 낮은 단계에서는 감성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며, 높은 단계에서는 논리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어느 단계거나 모두 하나의 통일적인 인식과정의 단계이다. 감성(感性)과 이성이라는 두 가지 성질은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기초 위에서 통일되고 있는 것이다.16)

 

인식과정의 제1보(第一步)는 외계의 사물에 접촉하기 시작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감각(感覺)의 단계이다 [감성적인식의 단계]. 제2보(第二步)는 감각된 재료를 종합하여 정리하고 개조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개념(槪念), 판단(判斷) 및 추리(推理)의 단계이다 [이성적(理性的) 인식(認識)의 단계].17) p.545

 

이와 같이 인식은 감성적인식에서 이성적인식(또는 논리적인식)으로, 그리고 이성적인식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인식과 실천은 일회만(一回限)의 것이 아니다. 실천, 인식, 재실천(再實踐), 재인식(再認識)이라는 형식이 순환왕복(循環往復)하여 무한히 반복되며, 그리고 각 순환마다 실천과 인식의 내용이 보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18)는 것이다. p.545

 

칸트는 주관(主觀)이 대상을 구성하는 한에 있어서만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현상의 배후에 있는 물자체(物自體)는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함으로써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는 현상(現象)을 통해서만 사물의 본질이 인식되어지며, 실천에 의하여 사물을 완전히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현상에서 유리(遊離)된 물자체(物自體)의 존재는 부정했다. 엥겔스는 칸트에게 반론(反論)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칸트의 시대에는 자연의 물체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이 극히 단편적이었으므로, 칸트도 그 자연물에 대해서 우리들의 얼마 안되는 지식의 배후에 무엇인가 아직 신비한 물자체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놀라운 진보(進步)에 의해서 이러한 알기 어려웠던 것들이 차례차례로 파악되고 분석되었다. 그뿐 아니라 재생산(再生産; reproduce)되기까지에 이르렀다. 적어도 우리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을 우리들이 인식할 수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19)

 

그런데 인식과 실천의 과정에 있어서 실천이 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모택동은 변증법적유물론의 인식론은 실천을 제일의 지위에 놓으며, 인간의 인식은 조금도 실천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20)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실천이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작용이나 인간의 여러가지 사회활동을 말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경우에는 그 중에서도 혁명을 최고의 실천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인식의 최종적인 목적은 혁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식의 능동적 작용은, 감성적 인식으로부터 이성적 인식으로의 능동적인 비약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더욱 이성적 인식으로부터 혁명적 실천으로 라는 비약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21)

 

여기서 논리적인식(理性的認識)에 있어서의 사유형식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논리적인식은 개념을 매개로 하는 판단, 추리 등의 사유활동을 말하지만, 그 때 사유형식은 중요한 역할을 다 하고 있다. 반영론(反映論)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는 사유형식이 객관세계에 있어서의 제과정의 의식에의 반영, 즉 존재형식의 의식에의 반영이라고 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의 카테고리(實在形式)?사유형식(思惟形式)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22)

 

물질(物質)      한도(限度)         

운동(運動)      모순(矛盾)         

공간(空間)      개별(個別)과 보편(普遍)    

시간(時間)      원인(原因)과 결과          

의식(意識)      필연성(必然性)과 우연성(偶然性)    

유한(有限)과 무한(無限) 가능성(可能性)과 현실성(現實性)    

양(量)  내용과 형식(形式)          

질(質)  본질(本質)과 현상(現象) 

 

    

   3) 절대적진리(絶對的眞理)와 상대적진리(相對的眞理)

 

인식과 실천의 반복에 의해서 지식이 발전해 가는데, 지식의 발전이란 지식의 내용이 풍부(豊富_해지는 것과 지식의 정확도가 한층 더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에 지식(知識, 眞理)의 상대성과 절대성이 문제가 된다. 마르크스주의는 객관적실재(客觀的實在)를 정확히 반영한 것이 진리라고 한다. 즉 우리들의 감각, 지각, 표상, 개념, 이론이 객관세계와 일치하며, 그것을 올바르게 반영한다면 그것들은 참[眞]이다 라고 한다. 또 참된 언명(言明), 판단(判斷) 또는 이론을 진리라고 부른다'23)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마르크스주의는 실천-결국은 혁명적 실천-이 진리의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즉 인식이 참인가 아닌가는 실천을 통하여 현실과 비교하며, 인식이 현실에 일치하고 있는가 있지 않은가를 확인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마르크스는실천속에서 인간은 그 사고의 진리를, 다시 말하면 그 사고의 현실성과 힘(力), 차안성(此岸性)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24)고 했고,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사람들의 사회적 실천만이 외계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이 진리인가 아닌가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25)고 하였다. 결국 혁명적실천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시대의 지식은 부분적(部分的)이고 불완전해서 상대적진리에 머물지만, 과학의 발전에 의해서 지식은 완전한 절대적진리에 한없이 가까워진다고 하면서 절대적진리의 존재를 승인한다. 그러므로 상대적진리(相對的眞理)와 절대적진리(絶對的眞理)의 사이에 넘기 어려운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26)라고 레닌은 말했다. 그리고 상대적인 진리속에 절대적으로 참다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것이 부단히 축적(蓄積)되었을때 절대적진리가 된다'27) 고 하였다. 以上으로종래의 인식론의 항목을 전부 마친다.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이상(以上)은 종래의 인식론의 요점을 참고로 소개했을 뿐이며, 따라서 통일인식론의 이해를 위해서 꼭 필요한 부분(部分)은 아니라는 것을 거듭 밝혀둔다.

 

                           二. 통일인식론

 

이상(以上)에서 종래 인식론의 개요(槪要)를 살펴 보았는데, 다음은 통일사상에 의한 인식론 즉 통일인식론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통일인식론은 통일원리중 인식에 관련된 개념과 문선명 선생(文鮮明 先生)의 설교, 강연중에서 이에 관련된 내용 및 저자의 질문에 대한 문선생님의 답변 등을 근거로 하여 세운 인식에 관한 이론체계(理論體系)'28)이며 문선생님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p.548

 

 1. 통일인식론(통일인식론)의 개요(槪要)

 

통일인식론은 종래의 인식론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성격(性格)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종래의 인식론이 다룬 문제, 예컨대 인식의 기원, 인식의 대상, 인식의 방법 등을 다루면서 통일인식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인식(認識)의 기원(起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인식의 기원이 경험에 있다고 보는 경험론과 이성에 있다고 보는 이성론(合理論)이 형성되었으나, 경험론은 흄에 이르러 회의론(懷疑論)에 빠졌고, 합리론은 볼프에 이르러 독단론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칸트는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에 의해 경험론과 합리론의 통일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물자체(物自體)를 불가지(不可知, 알 수 없는)의 세계에 남겨놓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통일인식론의 입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날까지의 인식론은 인식의 주체(人間)와 인식의 대상(萬物)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과 만물의 관계를 명확히 몰랐기 때문에, 이성론과 같이 인식의 주체에 중점을 두고 이성(또는 悟性)이 추론하는 대로 인식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거나, 경험론과 같이 대상에 중점을 두고 감각을 통하여 대상을 그대로 파악함으로써 인식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던 것이다.

 

칸트는 대상으로부터 오는 감각적요소와 주체가 갖고 있는 사유형식이 구상력에 의하여 종합?통일되어 인식의 대상이 구성(構成)됨으로써 인식이 성립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주체(인간)가 지닌 요소와 대상(만물)이 지닌 요소와의 종합에 의해 인식이 이루어짐을 뜻한다. 그러나 그는 양자(주체와 대상)의 필연적인 관계를 몰랐기 때문에, 주체의 카테고리라고 하는 테두리 내에서밖에 인식할 수 없다는 논리(論理)가 되어서 결국 물자체는 불가지(不可知)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헤겔은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에 있어서, 이념이 자기를 외부에 소외(疎外)시켜서 자연(自然)이 되었다가 나중에 인간의 정신을 통하여 본래의 자기(自己)를 회복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연은 인간의 정신이 발생하기까지의 하나의 과정적(過程的) 존재(存在)에 불과하며, 항구적(恒久的)인 존재로서의 적극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는, 인간과 자연은 서로 대립(對立)하는 우연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인식의 주체(인간)와 인식의 대상(만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과 만물과의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 우주는 저절로 생겨났다고 하는 우주생성설(宇宙生成說)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인간과 만물은 서로 우연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과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때 비로소 인간과 만물은 필연적인 관계가 확인(確認)되게 된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인간과 만물은 모두 피조물(被造物)로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다. 즉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主管主), 즉 주관의 주체이며, 만물은 인간에 대하여 기쁨의 대상이요 미(美)의 대상이며, 따라서 주관의 대상이다. 주체와 대상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다. 예를 들면, 기계에 있어서의 원동기(原動機)와 작업기(作業機)의 관계와 같다. 원동기가 없는 작업기는 있을 필요가 없고, 또 작업기가 없는 원동기도 있을 수 없다. 양자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필연적인 관계를 맺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만물도 주체와 대상이라는 필연적인 관계를 맺도록 창조된 것이다.

 

인식이란, 인간주체가 기쁨의 대상이요, 미(美)의 대상이요, 주관(主管)의 대상인 만물을 판단하는 행위이다. 그 때 인식 즉 판단에는 `경험(經驗)'이 수반되는 동시에, 판단 그 자체는 `이성'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식에는 경험(經驗)과 이성이 동시에 필요하다. 이와 같이 통일인식론에 있어서 경험(經驗)과 이성은 양자가 다같이 필수적인 것이며, 양자가 통일됨으로써 인식이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과 만물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으므로, 인간은 만물을 완전히 또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2) 인식(認識)의 대상(對象)

 

통일사상은 우선 인간의 외부에 만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즉 실재론을 인정한다. 인간은 만물에 대하여 주체이므로, 만물을 주관하고(栽培-育成하거나, 취급 가공 이용하거나 하는 것 등) 만물을 인식한다. 그것을 위하여 만물은 인식의 대상으로서, 또 주관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독립하여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통일인식론은 또, 인간은 만물의 총합실체상으로서 우주의 축소체 즉 소우주이기 때문에, 인간은 만물의 구조(構造), 요소(要素), 소성(素性)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몸을 표본으로 하여 상징적(象徵的)으로 인간과 비슷하게 창조된 것이 만물이다. 따라서 인간의 몸과 만물은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에 있어서 몸은 마음을 닮도록 지어진 것이다.

 

인식은 반드시 판단을 동반하는데, 판단이란 일종의 측정작용(測定作用)이라고 볼 수 있다. 측정에는 기준(척도)이 필요한 바, 인식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觀念)이며, 그것을 `원형(原型)'이라고 한다. 원형(原型)은 마음속에 있는 영상(映像)이며, 내적인 대상이다. 이 마음속의 영상(映像)(내적영상(映像))과 외계의 대상에서 오는 영상(외적영상(映像))이 조합(照合)됨으로써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실재론은 인간속에 있는 선재성(先在性)의 관념(觀念)을 무시하고 외계의 존재만을 주장했다. 반영론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가 그 대표이다. 또 그와 반대로 인간의 의식에 나타나는 관념만이 인식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주장이, 버클리에 의해 대표되는 주관적관념론(主觀的觀念論)이다. 그런데 통일인식론에 있어서는 이 실재론과 관념론(觀念論, (주관적관념론))이 통일되고 있는 것이다.

 

  (3) 인식(認識)의 방법(方法)

 

통일인식론의 방법은 칸트의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이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적방법과는 다르다. 수수법(授受法), 즉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의 원리가 통일인식론의 방법이다. 따라서 방법에서 볼 때 통일인식론은 수수법적인식론(授受法的認識論)이 되는 것이다. 인식은 주체(主體)(인간)와 대상(만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그 주체와 대상에는 각각 지니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이 있다. 마치 예술의 감상에 있어서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이 각각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었던 것과 같다. 작품을 감상할 때 주체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대상에의 관심(關心)과 가치추구욕 및 주관적요소 등이며, 대상이 갖추어야 할 조건(條件)은 창조목적과 상대적요소의 조화(調和)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식(認識)에 있어서도 주체와 대상에 조건이 필요하다. 주체적 조건은 주체가 원형(原型)과 관심(關心)을 갖는 것이며, 대상적 조건은 대상이 속성(屬性)(내용)과 형식을 구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수작용에는 존재의 2단구조(構造)의 원칙에 따라 내적수수작용(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과 외적수수작용(外的四位基臺)이 있다.

 

인식은 먼저 외적수수작용이 행해지고 이어서 내적수수작용이 행해짐으로써 성립된다. 이와 같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이론을 수수법적(授受法的) 인식론이라고 한다. 즉 관심을 가진 주체(인간)와 대상적 조건을 구비한 만물과의 사이에 수수작용이 행해진다. 이 때 먼저 감성적 단계의 마음(감성(感性))에 대상의 속성(내용)과 형식(存在形式)이 반영되어서, 영상(映像)으로서의 내용(감성적(感性的)내용)과 형식(감성적(感性的)형식(形式))이 형성된다. 이것을 외적영상(外的映像)이라고 한다. 외적수수작용(또는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에서 나타나는 영상(映像)이기 때문이다. 이 내용 및 형식(외적영상(映像))과, 주체가 전부터 가지고 있던 원형(原型)(내용과 形式: 내적映像)과의 사이에 또 수수작용(대비형의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이것이 내적수수작용(또는 내적四位基臺 形成)이다. 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비로소 인식이 성립된다.

 

여기서 통일인식론의 방법(方法)과 칸트의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 및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방법과의 차이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한다. 칸트에 있어서의 내용(感性的내용)은 外界(대상)에서 수용된 것이며, 형식 즉 직관형식(直觀形式)과 사유형식(思惟形式)은 주체가 지닌 선험적(先驗的)이며 주관적(主觀的)인 요소이다. 따라서 내용은 대상에 속하고 형식은 주체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물자체(物自體)를 불가지(不可知, 알 수 없는)의 세계로 넘겨버렸기 때문에, 그의 감성적 내용은 실체(實體)가 없는 내용, 즉 주체(주관)에만 속하는 내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칸트에 있어서는 내용도 형식도 모두 주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칸트가 관념론자(觀念論者)라고 자주 불려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수수법적(授受法的) 방법에 있어서는 내용과 형식(形式)이 주체에도, 대상에도 속해 있다. 즉 주체도 내용과 형식을 구비하고 있고, 대상도 내용과 형식을 구비하고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辨證法的) 방법에 있어서는 내용과 형식이 모두 객관적(客觀的) 실재(實在)인 대상에만 속해 있고, 주체의 의식은 단지 그것을 반영(反映)할 뿐이다. 이렇게 볼 때, 통일사상의 수수법적(授受法的) 방법(方法)은 선험적(先驗的) 방법과 변증법적(辨證法的) 방법을 함께 구비하는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통일인식론에 있어서 외적수수작용에 반영론적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내적수수작용에 선험적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통일인식론에 있어서 변증법적방법(反映論)과 선험적방법이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2. 인식(認識)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形式)

 

일반적으로 내용과 형식을 말할 때, 사물속에 있는 것을 내용이라고 하고, 외부에 나타난 모양을 형식(形式)이라고 하지만, 인식론에서 다루는 내용이란 사물의 속성(屬性)을 말하고, 형식이란 그 속성이 규제(規制)되어서 나타나는 일정한 틀을 말한다(즉 속성이 일정(一定)한 틀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 틀을 형식(形式)이라고 한다).

 

  (1) 대상(對象)의 내용과 주체의 내용

 

인식의 대상은 만물 또는 사물이므로, 대상의 내용이란, 만물(事物)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속성 즉 형태, 중량, 길이, 운동, 빛깔, 소리, 냄새, 맛 등을 말한다. 따라서 대상의 내용은 물질적 내용 즉 형상적인 내용이다. 한편 인식의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에 주체의 내용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여러 속성을 말하는데, 그 속성도 만물(事物)의 속성과 같이 형태, 중량, 길이, 운동, 빛깔, 소리, 냄새, 맛 등의 물질적 내용인 것이다.

 

보통 인간의 속성(屬性)이라고 하면 이성, 자유, 영성(靈性) 등을 말하는 경우가 많으나 인식론에서는 내용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대상(만물)과 동일한 속성을 다룬다. 인간은 우주의 축소체(小宇宙)이며 만물의 총합실체상이므로, 인간은 만물이 가지고 있는 구조(構造), 요소(要素), 소성(素性) 등을 모두 통일적(축소적)으로 구비하고 있다. 즉 인간은 만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인간)와 대상(만물)이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인식에 있어서의 수수작용은 성립(成立)되지 않는다. 인식은 일종의 사유현상(思惟現象)이기 때문에, 내용은 주체의 마음에도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주체의 마음속에 있는 이 내용이 원형(原型)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원형속의 내용 부분으로서, 원의식(原意識, 생명체가 가지는 潛在意識... ... 후술) 속에 나타나는 원영상(原映像)을 말한다. 이 원영상은 인간의 몸의 속성에 대응하는 심적영상(心的映像)으로서, 이것은 외계의 만물의 속성(물질적 내용)에 대응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심적영상(心的映像) 즉 원영상(原映像)은 물질적 내용에 대응하는 心的내용 즉 성상적(性相的) 내용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몸의 속성은 만물의 속성(물질적 내용)에 대응하고 인간의 심적영상(心的映像, 原映像)은 인간의 몸의 속성에 대응한다. 따라서 결국 인간의 심적영상(心的映像)은 만물의 속성에 대응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인식에 있어서 주체(인간)의 心的내용 즉 원영상(原映像)과, 대상(만물)의 물질적 내용(감성적 내용)이 서로 대응하게 되어, 주체와 대상사이에 수수작용(授受作用)이 벌어져서 이때 인식이 이루어진다.

 

  (2) 대상(對象)의 형식(形式)과 주체(主體)의 형식(形式)

 

인식의 대상인 만물(사물)의 속성은 반드시 일정한 틀(framework)을 가지고 나타난다. 이 일정한 틀이 존재형식(存在形式)이다. 존재형식은 사물의 속성의 관계형식이기도 하다. 이 존재형식 또는 관계형식이 인식에 있어서의 대상의 형식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우주의 축소체(縮小體, 소우주)이며 만물의 총합실체상이므로, 인간의 몸은 만물이 지니고 있는 존재형식과 같은 존재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식에 있어서의 형식은 마음속의 형식, 즉 사유형식이 아니면 안 된다. 이것은 몸의 존재형식이 원의식(原意識)속에 반영된 것, 즉 형식상(形式像; 또는 관계상)이며, 원형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3) 원형(原型)의 구성요소(構成要素) p.556

 

인식에 있어서 판단의 기준(尺度)이 되는 주체속의 심적영상(心的映像)을 원형(原型)이라고 하며, 원형(原型)은 다음과 같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첫째로, 원영상(原映像)이다. 이것은 인체의 구성요소인 세포나 조직의 속성이 원의식에 반영된 영상이다. 즉 원의식(原意識)이라는 거울에 비춰진 세포나 조직의 속성의 영상이 원영상인 것이다.

 

원형(原型)을 구성하는 둘째 요소는 관계상 즉 사유형식(思惟形式)이다. 원의식(原意識)에는 인체의 세포나 조직의 속성 뿐만 아니라 속성의 존재형식(存在形式, (關係形式)도 원의식(原意識)에 반영되어서 영상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관계상(關係像)으로서, 이 관계상이 현재의식의 사고작용에 일정한 제약을 주는 사유형식이 되고 있다. 이상의 원영상(原映像)과 관계상(關係像, 사유형식)은 경험과는 관계가 없는 관념(觀念) 즉 선천적(先天的)인 관념으로서, 원형에는 그 외에 과거 및 인식(認識)의 직전(直前)까지 경험에 의해 부가(附加)되는 후천적(後天的)인 관념(觀念)도 있다. 즉 인식에 앞서서 그때까지의 경험에 의해서 얻어진 관념(觀念; 경험적관념(經驗的觀念)은 그 후의 인식에 있어서 원형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한번 경험한 사물과 동일한 사물을 대하였을 때, 쉽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형(原型)은 원영상(原映像), 관계상(關係像, 思惟形式), 경험적관념(經驗的觀念)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이 원형(原型)은 경험에 앞서는 선천적(先天的)인 요소와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 요소, 즉 경험적요소로 되어 있다. 선천적요소(先天的要素)란 본래의 의미의 원형(原型)을 말하며, 원의식(原意識)에 나타난 원영상(原映像)과 관계상(關係像)을 말한다. 이것은 경험(經驗)과는 관계없는 선천적(先天的)인 원형이다. 이것을 원초적(原初的) 원형(原型)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경험적요소(經驗的要素)란 일상생활의 체험에 있어서 마음속에 영상으로 나타나는 경험적(經驗的) 관념(觀念)을 말하며, 일단 나타나면 그 이후 원형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경험(經驗的) 원형(原型)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선천적(先天的) 원형(原型)과 경험적(經驗的) 원형(原型)이 결합된 원형을 복합원형(複合原型)이라고 한다.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원형은 모두 복합원형(複合原型)인 것이다.

 

  (4) 원형(原型)의 선재성(先在性)과 그 발달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원형에는 선천적(先天的)인 요소(要素)와 경험적(經驗的)인 요소(要素)가 있기 때문에 어떤 순간의 판단은 그 이전에 형성된 원형(複合原型)이 그 판단의 기준(척도)이 된다. 이와 같이 인식에 있어서 그 인식의 판단기준(原型)은 반드시 미리 갖춰져 있게 마련이다. 이 사실을 원형(原型)의 선재성(先在性)(priority)이라고 한다. 칸트는 인식의 주체가 가지는 형식을 선천적(先天的; a priori)이라고 주장했는데, 통일인식론에서는 주체가 지니는 원형의 선재성(先在性)을 주장한다.

 

그런데 인간이 출생하면서 가지고 있던 원형(原映像, 關係像)은 출생 직후의 유아의 경우 세포, 조직, 기관, 신경, 감각기관, 뇌 등의 미발달 때문에 아직 불완전하다. 따라서 인식은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아(幼兒)가 성장함에 따라 신체(身體)의 발달과 더불어 원영상이나 관계상은 점차로 명료해진다. 여기에 경험에 의해서 얻어진 새로운 관념이 계속 첨가된다. 이리하여 원형은 질적(質的)으로나 양적(量的)으로 발달한다. 이것은 곧 기억량의 증대 또는 새로운 지식(知識)의 증대를 의미하는 동시에 경험적 원형의 발달, 더 나아가서 복합원형(複合原型)의 발달을 의미한다.

 

 3. 원의식(原意識), 원의식상(原意識像) 및 범주(範疇)

 

  (1) 원의식(原意識) p.558

 

원리강론(原理講論)에는 피조물은 원리 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해 성장한다'29)라고 되어 있다. 여기의 주관성이나 자율성은 생명력(生命力)의 특징을 말한다. 생명이란, 생물체의 세포나 조직에 들어있는 잠재의식을 말하며, 잠재하고 있는 감지력(感知力), 각지력(覺知力), 합목적적(合目的的)인 능력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이란, 감지성, 각지성, 합목적성을 지닌 잠재의식이다. 여기서 감지성이란 사물에 관한 정보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각지성은 알고 있는 상태를 지속하는 능력을 말하며, 합목적성은 일정한 목적을 지니면서 그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력(意志力)을 말한다. 원의식(原意識)이란, 근본이 되는 의식이라는 뜻으로서, 그것은 세포나 조직속에 들어 있는 생명(宇宙意識)을 말한다. 마음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볼 때 원의식(原意識)은 저차원의 마음이다.30) 따라서 그것은 세포속에 들어간 저차원의 우주심 또는 저(低)차원의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원의식(原意識)은 동시에 또 생명이다. 우주의식이 세포나 조직에 들어가서 개별화된 것이 원의식이며, 생명이다. 즉 세포나 조직속에 들어온 우주의식이다. 마치 전파가 라디오에 들어가 음성을 내고 있는 것처럼, 우주의식이 세포나 조직속에 들어가서 그것들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31) 결국 원의식이란 생명이며, 그것은 감지성(感知性), 각지성(覺知性), 합목적성(合目的性)을 가진 잠재의식이다. 통일사상에 의하면, 하나님은 로고스로써 우주를 창조하실 때, 생물의 각 개체의 계대(繼代)를 위해서, 즉 번식에 의한 종족보존(種族保存)을 위해서 그 개체에 고유한 모든 情報(즉 로고스)를 물질적 형태의 기록(암호)으로 세포속에 봉인(封入)해 두었다고 본다. 그 암호가 바로 DNA(디옥시리보핵산(核酸))의 유전정보로서, 아데닌(adenine), 구아닌(guanine), 티민(thymine), 사이토신(cytosine)이라는 4종류의 염기(鹽基)의 일정한 배열인 것이다.

 

창세기 2장 7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되어 있다. 만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흙으로 세포를 만들고 생명을 불어넣으시니 세포는 산 세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포에 취입(吹入)된 우주의식이 원의식이며 생명이다. 우주의식이 세포, 조직에 취입(吹入)됨으로써 생물체는 살아있는 개체가 된 것이다.

 

  (2) 원의식(原意識)의 기능(機能)

 

다음은 원의식의 기능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원의식(原意識)의 기능은 다양하다. 즉 유전정보(暗號)의 해독(解讀)과 정보의 지시사항(指示事項)의 수행(遂行), 그리고 정보의 전달 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주의식이 먼저 세포에 스며들어 가서 원의식(原意識)이 되면 먼저 거기에 들어 있는 DNA의 유전정보를 해독한다. 그리고 원의식은 그 정보의 지시(指示)에 따라 세포나 조직을 활동시킨다. 그리고 또 생체(生體)의 성장에 따라 세포조직의 증대, 신기관(新器官)의 형성과 성장, 각 세포간 및 조직간의 상호관계의 형성 등을 실현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한편 필요에 따라서 각 세포나 조직에 새로이 발생(發生)하는 정보를 말초신경(求心神經)을 통하여 중추신경에 전달하고, 중추는 다시 말초신경(遠心神經)을 통하여 세포나 조직에 새로운 지령(指令((情報))을 내리는데, 이 때 그 정보를 역시 원의식(原意識)이 전달한다. 이와같이 세포나 조직과 중추와의 사이에서 정보(情報)를 주고 받는 전달자의 역할(役割)도 원의식이 맡아 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원의식의 기능(機能)이다. 이러한 기능은 모두 원의식(潛在意識)의 감지성(感知性), 각지성(覺知性), 합목적성(合目的性)에 기인한다. 원의식이 이와 같은 기능을 발휘하는 동안에 원영상(原映像)이나 관계상(關係像)이 발달하게 된다.

 

  (3) 원의식상(原意識像)의 형성

 

생물체속의 잠재의식 즉 원의식은 감지성(感知性)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원의식은 직감적(直感的)으로 세포나 조직의 구조, 성분, 특성 등을 감지한다. 더욱이 세포나 조직의 상황변화(狀況變化)까지도 원의식은 감지하게 된다. 그 때 원의식(原意識)이 감지한 내용, 즉 원의식에 반영된 영상이 원영상(原映像)이다.

 

원의식에 원영상이 생긴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물체가 거울에 비치는 것, 또는 필름의 노출에 의해 물체가 그 필름에 비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의식은 또 각지성(覺知性)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감지(感知)한 상태를 지속하는 것, 즉 원영상을 파지(把持; 감지한 상태를 지속하는 것)하는 것이어서 파지성(把持性)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세포, 조직, 기관 등 체내의 여러 요소(要素)는 각각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 및 연체(聯體)로서, 내적 또는 외적인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존재하고, 작용하며, 성장한다. 예컨대 어떤 하나의 세포의 경우, 그 세포내의 제요소(핵과 세포질)간에 벌어지는 수수작용이 내적수수작용이며, 그 세포와 타(他)세포와의 사이에 벌어지는 수수작용이 외적수수작용이다. 그 때의 수수의 관계가 성립하는데, 필요한 여러 조건을 관계형식(關係形式)이라고 하며, 만물은 예외없이 그러한 조건을 갖춘 상황하(狀況下)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관계형식은 존재형식(存在形式)이라고도 한다. 이 존재형식은 만물이 존재하는데 있어서 짜여지게 되는 틀(framework)이기도 한 것이다.

 

이 존재형식이 원의식에 반영되어서 이루어진 영상을 관계상(關係像) 또는 형식상(形式像)이라고 한다. 원의식은 이와 같이 원영상(原映像)과 관계상(형식상)을 지니고 있는데, 원영상과 관계상을 합친 것을 원의식상(原意識像)이라고 한다.

 

  (4) 사유형식(思惟形式)의 형성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식주체(認識主體, 인간)가 갖고 있는 내용에는 물질적내용(형상적내용)과 심적내용(성상적내용)이 있는데 물질적내용은 대상(사물)의 속성과 같은 것이며, 심적내용(心的내용)은 원영상이다. 여기에서 물질적내용이 심적내용의 대응원(對應源)이 되는 것이다. 여기의 대응원(對應源)이란 1 대(對) 1의 대응관계에 있는 두 요소(要素)중 원인적 관계에 있는 요소를 말한다. 예컨대 물체와 그림자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서, 물체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그에 따라 움직이고, 물체가 정지하면 그림자도 정지한다. 이 때 물체(物體)는 그림자의 대응원(對應源)이라고 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관계에 있어서 몸이 건강할 때 마음이 건강해지고 몸이 약할 때 마음도 약해진다고 하면, 이때 몸은 마음의 대응원(對應源)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식의 주체가 지닌 물질적(物質的)형식(形式, 형상적 형식)과 심적형식(心的形式, 성상적 형식)에 있어서 물질적 형식이 심적형식의 대응원(對應源)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물질적형식은 바로 대상(사물)의 존재형식이다.

 

이미 누차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몸은 만물의 총합실체상(總合實體相)이기 때문에, 만물의 속성 그대로가 몸의 속성이 되고, 몸의 속성이 원의식(原意識)에 반영되어서 원영상(原映像), 즉 심적(心的)내용이 되듯이, 만물의 존재형식도 그대로가 몸의 존재형식이 되고, 그것이 그대로 원의식에 반영되어서 심적형식(心的形式), 즉 관계상(關係像)이 된다. 심적형식이란 바로 사유형식(思惟形式)이다. 즉 사유형식의 뿌리는 존재형식이다. 따라서 존재형식(存在形式)은 사유형식의 대응원(對應源)이 되는 것이다.

 

세포나 조직에 있어서의 관계형식(關係形式, 존재형식)이 원의식에 반영되어서 관계상이 되는데, 이 원의식의 관계상은 일종의 정보가 되어서 대뇌의 중추에 전달되는 바, 먼저 수많은 관계상은 말초신경을 지나서 하위중추를 거친 다음 대뇌의 상위중추(皮質中樞)에 모인다. 그 과정에서 여러 관계상들이 정리되고 분류되면서 사유형식이 확정되어 피질중추에 도달된다고 본다. 즉 외계의 존재형식에 대응하는 심적 형식으로서의 사유형식이 심리(心理)속에 형성되는 것이다.

 

이 사유형식이 인간이 사고할 때에 그 사고가 따라야 하는 틀이 된다. 즉 인간의 사고(思考)는 사유형식(思惟形式)에 따라서 행해진다. 이렇게 되는 것을 사유형식이 사고를 규정한다고 말한다. 사유형식은 가장 근본적이고 일반적인 기본개념(基本槪念)을 의미하는 범주(範疇, 카테고리)와 동일한 것이다.

 

  (5) 존재형식(存在形式)과 사유형식(思惟形式)

 

사유형식의 대응원이 존재형식이므로 사유형식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형식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개체와 개체(또는 요소와 요소)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때의 형식 즉 관계형식이 곧 존재형식인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가장 기본적인 존재형식으로서 다음의 10가지가 있다.

 

존재(存在)와 힘........ 모든 개체가 존재할 때, 반드시 거기에는 힘이 작용한다. 존재를 떠난 힘은 없고, 힘을 떠난 존재도 없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원력이 만물에 작용하여 만물을 존재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성상(性相)과 형상(形狀)......... 모든 개체는 내적인 무형(無形)의 기능적요소와 외적인 유형의 질량(質量), 구조(構造), 형태(形態)로 되어 있다.

 

③양성(陽性)과 음성(陰性)......... 모든 개체는 성상과 형상의 속성으로서 양성과 음성을 지니고 있다. 양성과 음성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언제나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음양(陽陰)의 조화에 의해서 미(美)가 나타난다.

 

④주체(主體)와 대상(對象)......... 모든 개체는 그 자체 내부의 상대적(相對的) 요소(要素) 사이에, 또는 그 개체와 다른 개체와의 사이에,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맺고 수수작용을 하면서 존재한다.

 

⑤위치(位置)와 정착(定着)......... 모든 개체는 일정한 위치에 정착한 후 존재한다. 즉 각 위치에는 거기에 적합한 개체가 자리잡고 있다.

 

⑥불변(不變)과 변화(變化)......... 모든 개체는 반드시 변하는 면과 변하지 않는 면을 가지고 있다. 피조물은 모두 자동적사위기대(정적사위기대)와 발전적사위기대(동적사위기대)의 통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⑦작용(作用)과 결과......... 모든 개체에 있어서,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相對的)요소(要素)가 수수작용을 하면 반드시 거기에 결과가 나타난다. 즉 수수작용에 의해 합성체(合性體)를 이루거나 신생체(新生體)가 생긴다.

 

⑧시간(時間)과 공간(空間)......... 모든 개체는 시간과 공간속에 존재하는 시공적(時空的)존재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사위기대(공간적 기대)를 형성하면서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시간적 작용)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⑨수(數)와 원칙(原則)......... 모든 개체는 수적존재(數的存在)인 동시에 법칙적존재이다. 즉 수는 반드시 법칙 또는 원칙과 일치(一體)가 되고 있다.32)

 

⑩유한(有限)과 무한(無限)......... 모든 개체는 유한적(순간적)이면서 무한성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 p.564

 

이상은 통일원리의 사위기대(四位基臺), 수수작용(授受作用),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을 기반으로 하여 세워진 가장 기본적인 존재형식이다. 이것은 인식의 대상인 만물의 존재형식인 동시에, 인식의 주체인 인간 육신의 구성요소(構成要素)의 존재형식이다.

 

이들 존재형식에 대응하는 심적(心的)인 형태가 사유형식(思惟形式)이다. 즉 ①존재와 힘 ②성상과 형상 ③양성과 음성 ④주체와 대상 ⑤위치와 정착 ⑥불변과 변화 ⑦작용과 결과 ⑧시간과 공간 ⑨수와 원칙 ⑩유한과 무한 등이 그대로 사유형식이 된다. 존재형식은 물질적인 관계형식이며, 사유형식은 관념의 관계형식으로서 기본적(基本的) 개념(槪念)이다.

 

물론 이 외에도 존재형식이나 사유형식은 더 있을 수 있지만, 여기에 열거(列擧)한 것은 통일사상에서 본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다. 칸트가 주장한 것 같이 사유형식이 존재와 무관계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것같이 외계의 실재형식(實在形式)이 반영되어 사유형식이 된 것은 더욱 아니다. 인간자신은 원래부터 외계의 존재형식에 대응하는 사유형식을 갖추고 있다. 예컨대 인간자신은 원래부터 시간성과 공간성을 갖춘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사유형식(思惟形式)을 가지고 있으며, 원래부터 주체성과 대상성을 갖춘 존재이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의 사유형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10개의 존재형식에 정확히 대응하는 사유형식이 인간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4. 인식(認識)의 方法

 

  (1) 수수작용(授受作用)

 

원리강론에는 주체와 대상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면 생존(生存)과 번식(繁殖)과 작용(作用) 등을 위한 힘을 발생한다'33)고 되어 있다. 여기서 번식(繁殖)이란, 넓은 의미에서 출현, 발생, 증대, 발전을 의미한다. 또 작용(作用)은 운동, 변화, 반응 등을 의미한다. 인식은 지식의 획득(獲得)이나 증대를 의미하므로, 수수작용에 의한 번식의 개념에 포함된다. 따라서 인식은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라는 명제(命題)가 세워진다. p.566

 

인식에 있어서의 주체는 일정한 조건 즉 대상에 대한 관심(關心)과 원형(原型)을 갖춘 인간을 말하고, 대상은 내용(屬性)과 형식(存在形式)을 갖춘 만물(事物)을 말한다. 이 양자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은 반드시 목적을 중심하고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수수작용의 결과로서 인식이 성립(成立)된다. 따라서 인식은 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그림 9-1) p.566

 

   

 

사위기대(四位基臺)는 중심, 주체, 대상, 결과라는 4개의 위치에 의하여 성립(成立)된다. 다음에그각각의위치에대하여설명하고자한다.

 

   1) 중심(中心)

 

수수작용의 중심이 되는 것은 목적이며, 목적에는 원리적(原理的)인 목적과 일상적이자 현실적(現實的)인 목적이 있다. 원리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지으신 창조목적으로서, 피조물의 입장에서 보면 그 피조물의 존재목적 즉 피조목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심정(心情; 사랑)이 그 동기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도 사랑을 동기로 하여 만물을 인식하는 것이 본래의 인식의 자세이다. 창조목적(피조목적)에는 성상적(性相的)목적과 형상적(形狀的)목적이 있으며 이 각각의 목적에는 다시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 있다. 인식에 있어서 인간의 전체목적이란 이웃, 사회, 국가, 세계에 봉사하기 위하여 지식을 얻는 것이고, 개체목적이란 개인의 의식주(衣食住)의 생활과 문화생활을 위하여 지식을 얻는 것이다. 한편 대상인 만물의 전체목적은 인간에게 지식과 미를 주거나 인간에게 주관되어서 인간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개체목적은 인간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墮落) 때문에 만물은 그와 같은 창조목적(피조목적)을 完遂할 수가 없어서 만물은 탄식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롬 8:22).

 

일상적인 목적(또는 현실적인 목적)이란, 원리적인 목적을 토대(土臺)로 한 개별적인 목적, 즉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각 개인의 목적을 말한다. 예컨대 식물학자가 자연(自然)을 볼 때는, 식물학도의 입장에서 자연계의 식물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할 것이다. 화가(畵家)가 같은 자연을 대할 때는 미(美)의 추구를 위한 지식을 얻고자 할 것이다. 또 경제인이 자연을 대할 때는 그 자연을 개발하여 사업을 일으킨다는 입장에서 자연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함은 모두 기쁨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기쁨을 얻고자 하는 원리적인 목적은 같지만, 각 개인의 일상적인 목적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千差萬別)이라 할 수 있다.

 

   2) 주체(主體)

 

인식에 있어서 주체가 대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주체가 지녀야 할 요건의 하나이다. 관심이 없다면 주체와 대상 사이에 상대기준이 성립되지 않게 되어서 수수작용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길을 걷다가 친구와 마주쳤다고 하자. 그가 무슨 일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길을 걷고 있었다면, 관심이 그 일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릴 것이다. 또 등대(燈臺)지기의 부인(夫人)이 잠을 자고 있을 때, 파도소리 때문에 잠을 깨지는 않으나, 파도소리보다도 작은 자신의 어린아이 울음소리에는 잠을 깰 수가 있다. 이것은 파도소리에는 관심이 없으므로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에는 항상 관심이 있으므로 작은 소리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연히 사물을 인식하는 경우도 많다. 예상치도 않았는데 갑자기 번갯불을 보고 천둥소리를 듣는 경우가 그 뚜렷한 예이다. 그와 같은 경우는 주체에 관심이 없어도 인식이 가능한 것같이 생각되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무의식적(無意識的, 잠재의식적)으로나마 반드시 관심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렸을 때 모든 것에 대하여 놀라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대했던 일들을 기억할 것이다. 이 놀라움과 호기심이 바로 관심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인간은 외국땅에 처음 갔을 때에도 모든 사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대하게 된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또는 여러 번 외국여행을 해봄에 따라서 관심은 습관화되고 잠재의식화하게 된다. 그것은 관심이 없어져버린 것이 아니고 잠재의식 속에서 관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주체가 가져야 할 또 하나의 요건(要件)은 원형(原型)을 지니는 것이다. 아무리 대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다 해도 원형(原型)이 없다면 인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처음으로 외국어를 듣는 경우 그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모른다. 또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은 낯설은 얼굴로 비치지만, 과거에 만난 적이 있다면 비록 잊어버렸더라도 왠지 모르게 낯익은 얼굴로 느껴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인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주체속에 판단(判斷)의 기준이 되는 원형이 반드시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3) 대상(對象)

 

인식의 대상에는 자연의 만물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에서의 사물이나 사건, 인물 등도 있다. 통일원리에 의하면, 만물은 인간의 대상으로서, 인간은 만물의 주체(주관주)로서 지어졌기 때문에 주체인 인간은 대상인 만물을 사랑으로 주관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 때 인간은 만물을 감상(鑑賞)하거나 인식(認識)하면서 주관하게 된다. 따라서 만물은 미(美)의 대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내용으로서의 만물의 속성과 형식으로서의 존재형식(存在形式, 관계형식)이다. 이와 같은 내용과 형식은 만물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긴 하지만, 실은 만물 자체가 스스로 구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 만물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총합실체상(總合實體相)이요 우주의 축소체이므로, 만물이 가지고 있는 내용과 형식에 대응(對應)하여 축소된 형태로서 역시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4) 결과

 

목적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하면 반드시 결과가 나타난다. 여기서 결과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성격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상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위기대에는 내적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 외적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의 4종류가 있다.

 

인식은 기본적으로 주체의 내용-형식과 대상의 내용-형식이 수수작용을 통하여 조합(照合)함으로써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해 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때에는 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가 형성된다. 한편 창조나 주관의 경우에는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가 형성된다. 그런데 인식은 주관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인식없는 주관도, 주관없는 인식도 모두 完全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인식과 주관은 인간과 만물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상대적인 회로(回路)를 이룬다. 즉 인식의 과정은 수수작용에 있어서 대상에서 주체에로 향하는 회로(回路)이며, 주관의 과정은 주체에서 대상으로 향하는 회로(回路)이다. 여기에서 주관에 있어서의 발전적사위기대와 인식에 있어서의 자동적사위기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주관이란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므로 주관의 사위기대는 창조의 사위기대와 같은 것이다.

 

원상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창조의 2단구조(構造) 즉 내적발전적사위기대(로고스의 형성)와 외적발전적사위기대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이들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에 있어서 먼저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가 형성되고, 다음에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즉 내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에서 외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로라는 순서에 따라서 만물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식을 위한 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는 먼저 외적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가 형성되고, 다음에 내적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가 형성된다. 즉 외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에서 내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로라는 순서에 따라서 인식이 이루어진다. 인식은 이 내적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가 형성됨으로써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바, 직접적으로는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요소의 조합(照合)에 의해서 성립된다. 그러면 그 인식의 과정(過程)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다음의 인식의 과정에서 명백해질 것이다.

 

 5. 인식(認識)의 과정

 

인간이 인식을 통해서 충분한 지식(知識)을 얻는 데는 일정(一定)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이 소생-장성-완성의 3단계로서 감성적(感性的)단계-오성적(悟性的)단계-이성적(理性的)단계가 그것이다. 만물이 성장하는데 있어서 소생-장성-완성의 3단계를 거치는 것과 같다.

 

  (1) 감성적단계(感性的단계)의 인식

 

이것은 인식과정의 소생적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먼저 외적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가 형성된다.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주체(인간)와 대상(만물)간의 수수작용이 행해지고, 대상의 내용과 형식이 주체의 감각중추(感覺中樞)에 반영되어서 영상 또는 표상을 형성한다. 이것이 감성적(感性的)내용과 감성적(感性的)형식(形式)인데, 이것을 감성적인식상(感性的認識像)이라고 한다(그림 9-2).

 

   

 

이 단계가 인식의 감성적단계이다. 이 때 주체는 관심과 원형을 갖추고 있지만 이 감성적단계에서의 원형은 아직 인식작용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감성적(感性的)단계에서 형성되는 감성적내용이나 감성적형식은 단편적인 영상(映像)들의 집합(集合)일 뿐, 대상을 닮은 통일적인 영상(映像)을 이루지는 못한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대상이 구체적(具體的)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2) 오성적단계(悟性的단계)의 인식

 

이 단계는 인식의 장성적(長成的)단계이다. 이 오성적(悟性的)단계에 있어서는 내적인 자동적수수작용(自同的授受作用)에 의해서 내적인 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가 형성되며, 이 때 감성적단계에서 전달된 단편적인 영상들이 통일된다.

 

이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의 중심이 되는 목적은 감성적단계의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때의 목적과 동일하며, 원리적 및 현실적목적이 그 중심(中心)이 된다. 이 때 주체의 위치에 오는 것이 내적성상(內的性相) 즉 마음의 기능적부분으로서, 인식에 있어서 그것은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체인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합성체로서 인간의 본심이며, 이것은 동물의 본능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식에 있어서 생심(生心)의 기능은 가치판단을 주관하고, 육심(肉心)의 기능(機能)은 感覺을 주관하며, 양자가 합해서 기억을 주관한다. 따라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합성체인 본심(本心)은 인식에 있어서 가치(진(眞)-선(善)-미(美))를 지향(指向)하면서 감각을 통괄하고 기억을 주관한다. 그리하여 인식에 있어서 마음(본심(本心))의 이러한 기능적부분을 특히 영적통각(靈的統覺)이라고 부르고자 한다.34) 이리하여 인식에 있어서 내적성상은 통각력(統覺力) 및 대비력(對比力)과 가치판단력 및 기억력(記憶力)으로써 작용하며, 실천에 있어서는 주체성으로서의 가치실천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p.573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대상의 위치 즉 내적형상에는, 먼저 감성적단계의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에서 형성된 감성적인식상 즉 감성적내용과 감성적형식이 이 단계로 옮겨져 온다. 그러면 이 감성적내용과 감성적형식에 대응(對應)하는 원영상(原映像)과 사유형식, 즉 원형이 영적통각(靈的統覺)에 의해 기억속에서 인출(引出)된다. 이 두 가지 요소 즉 감성적인식상과 원형이 함께 내적형상(內的形狀)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하(狀況下)에서 수수작용이 행해지게 되는데, 이 때의 수수작용은 대비형(對比型)의 수수작용이다. 주체인 영적통각이 원형과 감성적인식상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대비(對比, 對照)하여 그 일치 또는 불일치를 판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9-3과 같다.

 

 

 그림 9-3. 내적자동적사위기대의 형성 

 

이 대비에 의해서 인식이 이루어지며, 이러한 대비를 통일인식론에서는 조합(照合; collation)이라고 한다. 여기서 인식은 조합(照合)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결론이 성립한다. 따라서 통일인식론을 방법에서 보면 조합론(照合論)이 된다. 이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은 반영론(反映論)이고, 칸트의 인식론은 구성론(構成論)이었다.

 

그러나 오성적(悟性的)단계에서 이루어지는 한 번의 인식(내적수수작용)으로는 인식이 불충분하거나 성립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35) 그 때에는 새로운 지식을 얻을 때까지 실천(실험, 관찰, 경험 등)과 병행하면서 내적수수작용을 계속해 나아가는 것이다. p.574

 

  (3) 이성적(理性的)단계의 인식

 

이 단계는 인식의 과정에 있어서 완성적단계이다. 여기의 이성(理性)이란, 개념(관념)에 의한 사유(思惟)의 능력을 말한다. 이성은 오성적단계의 인식에 있어서는 판단력, 개념화의 능력으로서 작용하였으나, 이성적단계의 인식에 있어서는 오성적단계에서 얻어진 지식(知識)을 자료로 하여 사유작용(思惟作用)에 의해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된다.

 

결국 이성적(理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인식이란 사고(思考)이다. 이것은 원상에 있어서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에 의한 구상(로고스)의 형성에 해당된다. 마음속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사고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것은 대비형의 수수작용이다. 즉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내적형상(內的形狀)중의 여러 요소(관념, 개념, 수리, 원칙 등)들 가운데 필요한 것을 골라서 내적성상(內的性相)이 그것들을 연합, 분리, 분석, 종합함으로써 여러 관념(개념)들을 이렇게 저렇게 조작한다. 관념(觀念, 槪念의 操作이란 內的性相이 내적형상의 여러 관념이나 개념들을 여러 가지로 對比함으로써, 즉 對比型의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새로운 관념(개념)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여러 관념중에서 아버지라는 관념과 아들이라는 관념을 대비해서 합당하다고 느껴지면, 이 두 관념을 결합해서 父子라는 새로운 관념을 얻는다.

 

또 하나의 예로서, 여러 개념중에서 사회(社會)라는 개념과 ‘제도(制度)라는 개념을 대비해서 합당하다고 느껴지면 이 두 개념을 합해서 사회제도(社會制度)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든다. 이와 같이 여러 관념이나 개념들 중에서, 대비를 통하여 필요한 것을 가려낸 후 결합시켜서 새로운 관념이나 개념을 만드는 것을 관념(개념)의 조작(操作)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관념(觀念, 개념)의 조작을 반복하면서 지식은 증대해 간다. 이 내적인 수수작용에 있어서 내적성상은 역시 영적통각(靈的統覺)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된다. 이성적(理性的)단계의 인식은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의 형성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그림 9-4).

 

   

 

이성적(理性的)단계의 인식에 있어서 새로운 지식의 획득은 매번마다의 판단의 완결을 동반하면서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일단 얻어진 새로운 지식(완결한 판단)은 사고의 자료로 내적형상(內的形狀)속에 옮겨져서 다음 단계의 새로운 지식의 형성에 이용된다. 이리하여 지식(思考)은 발전해 간다. 즉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형성을 반복하면서 지식은 발전해 간다(그림 9-5).

 

   

 

이와 같은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발전은 실천을 병행하면서 행해지게 되는데, 실천을 통하여 얻어진 결과(신생체(新生體))가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내적형상에 옮겨져서 새로운 지식의 획득에 이용된다. 새로운 지식이 얻어지면 다시 새로운 실천을 통하여 그 진위(眞僞)가 검증된다. 이와 같이 하여 반복적인 실천 즉, 반복적인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形成)이 인식을 위한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의 형성(形成)과 병행하여 이루어지게 된다(그림 9-6).

 

   

 

 6. 인식과정(認識過程)과 신체적(身體的) 조건(條件)

 

통일인식론은 통일원리 또는 통일사상을 근거로 한 인식론이므로, 종래의 인식론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통일인식론의 주장이 과학적 견해에 반한다든지 그것과 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통일인식론도 과거의 인식론과 마찬가지로 주창자(主唱者)의 단순한 주장으로 끝나서, 보편타당성이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

 

종래의 인식론 즉 경험론이나 이성론, 칸트의 선험적(先驗的)인식론이나 마르크스주의 인식론은 모두 과학적인 견해와 무관계한 이론이었거나, 또는 오늘날의 과학적 견해와 일치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 있어서 그것들은 거의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통일인식론은 과학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타당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이제부터 논술(論述)하고자 한다.

 

  (1) 심리작용(心理作用)과 생리작용(生理作用)의 병행성

 

통일사상은 이성성상인 원상(原相)을 닮아서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모든 존재는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인간은 마음과 몸의 이중적존재(二重的存在)이며,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 조직, 기관 등도 모두 심적요소(心的要素)와 물질적요소(物質的要素)의 통일체인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이나 작용도 이중적(二重的)이어서, 거기에는 반드시 심리작용과 생리작용이 통일적으로 병행하게 된다. 따라서 통일사상에서 보면 인식작용도 반드시 심리적과정과 생리적과정이 병행하고 있다. 예컨대 마음과 뇌의 수수작용에 의해 정신작용(의식작용)이 나타난다(그림9-7). 여기의 마음이란 생심(生心, 靈人體의 마음)과 육심(肉心, 육신의 마음)의 합성체인 것이다.

 

   

 

뇌(腦) 연구(硏究)의 세계적 권위자인 펜필드(W. Penfield, 1891~1976)는 뇌(腦)는 일종(一種)의 컴퓨터이며 마음은 그 컴퓨터를 조작하는 프로그래머(programmer)와 같다는 의미의 말을 하였다.36) 마찬가지로 저명한 뇌(腦) 연구학자인 엑클스(J. C. Eccles, 1903~)도 마음과 뇌(腦)는 별개의 것이며, 마음과 뇌(腦)의 상호작용으로서 심신(心身)문제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37) 그들의 주장은 마음과 뇌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정신작용이 영위된다는 통일사상의 견해와 일치한다. 이것은 통일인식론이 주장하는 바가 과학적 견해(見解)와 일치한다는 실례(實例)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그림 9-7).

 

  (2) 원의식(原意識), 원영상(原映像)의 대응원(對應源) p.579

 

다음은 통일인식론에 있어서의 독특한 개념인 원의식(原意識)과 원영상(原映像)에 대하여, 그것을 입증할 만한 과학자들의 견해를 살펴 보자.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원의식은 세포나 조직에 스며든 우주의식 또는 생명이며, 원영상은 이 의식(意識)의 필름에 찍힌 영상이다. 여기서 원의식은 목적의식이며, 원영상은 정보이다. 이것은 세포가 목적의식을 가지면서 정보에 따라 일정한 기능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사이버네틱스이론에 의하여 원의식과 원영상을 검증(檢證)해 보고자 한다.

 

사이버네틱스란 기계에 있어서의 정보의 전달과 제어(制禦)의 자동화방식(自動化方式)을 말한다. 생물에 있어서는 정보가 감각기관(感覺器官)을 통하여 중추에 전달되고, 중추신경이 그것을 통합하여 적절한 지령(指令)을 말초신경을 통하여 효과기(效果器; 근육)에 보내게 되는데, 이 현상은 자동기계의 자동조작과 같은 것이어서 생물에 있어서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현상이라 불리운다. 그러나 생물의 경우, 그 자동현상은 문자 그대로의 자동조작이 아니라 그 생물이 지닌 자율성(自律性)에 의한 자율적인 조작이다.

 

이러한 사이버네틱스 현상은 한 개의 세포에서도 볼 수 있다. 즉 세포질로부터 핵으로의 정보의 전달과, 이에 대한 핵의 반응이 끊임없이 자율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세포의 생존(生存), 증식(增殖) 등이 행해진다. 이러한 사이버네틱스 현상을 통하여 한개의 세포에서도 자율성이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 세포에 있어서의 자율성이 바로 생명이며, 원의식이다. 예컨대, 프랑스의 생리학자(生理學者) 앙드레 구도-페로(Andree Goudet-Perrot)는 그가 저술한 생물의 사이버네틱스 속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포의 정보원(情報源), 즉 암호를 가지고 있는 세포핵이 세포질의 작은 기관(mitochondria, Golgi complex등)에 명령을 하면서 세포의 생활에 필요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있다.38) 여기서 세포의 암호란 생물의 해부학적 형태 및 본질적기능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말한다.39)

 

그런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당연히 생기게 될 것이다. 첫째로, 암호는 해독되고 기억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 해독과 기억의 주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둘째로, 세포의 생활에 필요한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위하여 세포핵이 명령을 하려고 할 때, 세포핵은 세포 내부의 상황을 정확히 각지(覺知)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각지(覺知)의 주체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p.580

 

이에 대하여 현상 면만을 취급하고 있는 과학(生理學)의 입장에서는 대답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성성상이라는 이론을 가진 통일사상은 거기에도 성상(性相)으로서의 합목적적(合目的的)인 요소 즉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가 있다. 세포 속에 있는 이 의식이 바로 원의식이며, 정보가 원영상인 것이다.

 

  (3) 인식(認識)의 3단계의 대응원(對應源)

 

이상으로 인식에 있어서의 삼단계인 감성적단계, 오성적단계, 이성적단계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뇌생리학(大腦生理學)은, 대뇌피질(大腦皮質)에 이와 같은 인식의 3단계에 대응하는 생리과정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대뇌피질(大腦皮質)은 크게 나누어 감각기로부터 신호를 받는 감각야(感覺野, 감각분야), 수의운동(隨意운동(運動); 의도에 따라 움직임)에 관계되어 신호를 내보내는 운동야(運動野), 그리고 그 이외의 연합야(聯合野)로 나누어진다. 연합야는 앞머리연합야(前頭聯合野), 두정연합야(頭頂聯合野), 옆머리연합야(側頭聯合野)로 구분되는데, 전두연합야는 의지(意志), 창조(創造), 사고(思考) 등의 기능에 관계되고, 두정연합야는 지각(知覺), 판단(判斷), 이해(理解) 등의 기능에 관계되며, 측두연합야는 기억의 메카니즘에 관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먼저 빛, 소리, 맛, 향기, 촉감(觸感) 등의 정보가 말초신경을 통하여 각각 시각(視覺), 청각, 미각, 취각, 피부감각(체성감각) 등의 감각야에 전해진다. 여기의 감각야에 있어서의 생리적과정(生理的過程)이 감성적(感性的)단계의 인식에 대응하는 것이다. 다음에 감각야의 정보는 두정연합야에 모여져서 거기에서 지각되고 판단(이해)되는데, 이것이 오성적(悟性的)단계의 인식에 대응하는 생리적 과정이다. 그리고 이 이해, 판단을 터로 하고 전두연합야에서 사고가 이루어지고, 이어서 창조활동이 행해지게 되는데, 이것이 이성적(理性的)단계의 인식에 대응하는 과정이다. 이와 같이 삼단계의 인식에는 각각 대뇌(大腦)의 생리적인 과정이 대응하고 있다.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9-8과 같다.40)

 

   

                      그림 9-8. 인간의 대뇌피질의 분업체제

 

  (4) 정보전달에 있어서의 심리적 과정(心理的 過程)과 생리적 과정(生理的 過程)의 대응관계

 

인체(人體)는 항상 몸의 외부나 내부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받아들인 후 이것을 처리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작용이 행해진다. 눈, 귀, 피부 등의 수용기(感覺器)가 받아들인 자극은 임펄스(impulse)가 되어서 신경섬유의 구심로(求心路)를 통하여 중추신경에 이른다. 중추신경은 그 정보를 처리하여 지령(指令)을 방출(放出)하는데, 그 지령이 임펄스로서 신경섬유의 원심로(遠心路)를 통하여 근육, 분비선(分泌腺) 등의 효과기에 전달되어 반응을 일으킨다 (그림 9-9).

 

 

 

 어떤 자극을 받을 경우, 무의식중(無意識中)에 즉 상위중추(上位中樞)와는 관계없이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반사(反射)라고 한다. 이 경우 척수(脊髓), 연수(延髓), 중뇌(中腦) 등이 그와 같은 반사중추가 되어서 자극에 대하여 적절한 지령을 보내곤 한다. p.582

 

여기서 수용기(受容器)를 통해 들어온 정보가 어떻게 해서 전해지는가를 알아보자. 수용기에 들어온 정보는 거기에 있는 신경세포에서 전기적(電氣的)인 신경임펄스로 변한다. 신경임펄스란, 신경섬유의 흥분부위와 흥분하지 않은 부위와의 사이의 막전위(膜電位)의 변동을 말하는데, 그것이 신경섬유를 따라 이동하게 된다. 그때 생기는 전위의 변화를 활동전위(活動電位)라고 한다. 신경섬유의 막(膜)이 정지(靜止)한 상태에서는 그 막의 내측이 負(-)의 전기를 띠고 있으나, 임펄스가 통과할 때 전하(電荷)가 역전(逆轉)되어 내측(內側)이 正(+)으로 대전(帶電)한다. 이것은 나트륨이온이 내측(內側)에 유입(流入)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어서 칼륨 이온이 외측(外側)에 유출(流出)됨으로써 하전(荷電)은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 이와 같이 하여 막전위(膜電位)의 변동이 일어나서, 이것이 이동하게 된다(그림 9-10).

 

 출전(出典:J. C. Eccles. The Understanding of the Brain (New York:McGraw\Hillook Company, 1972), p. 23.

 

다음은 신경세포의 연결부 즉 시냅스(synapse)에 있어서 신경임펄스는 어떻게 전달되는 것일까. 시냅스는 체액(體液)이 들어 있는 공간으로서 이 시냅스에 이르러 전기적인 임펄스가 화학적인 전달물질로 변환(變換)되어서 시냅스의 간극(間隙; 틈새)을 이동한다. 그리고 그 화학물질이 다음의 신경섬유에 도달하게 되면 거기서 다시 전기적임펄스로 변환(變換)된다. 즉 한 신경세포의 신경섬유를 흐르는 전기적(電氣的)인 신호가 시냅스에서는 화학적인 신호(化學物質)로 변하고, 그 화학적신호가 다음의 신경세포의 신경섬유에 도달하면 다시 전기적인 신호로 변하게 된다. 시냅스에 있어서의 전달물질은, 전기 임펄스가 흐르는 신경이 운동신경이나 부교감신경의 경우에는 아세칠콜린(acetylcholine)이며,교감신경의경우에는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e)임이 밝혀졌다. 이상에서 설명한 정보전달의 메카니즘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9-11과 같다. p. 585

 

   

 

이상이 정보전달에 대한 생리적과정(生理的過程)인데, 통일사상에서는 이 생리적과정의 배후에 반드시 의식과정이 병존(竝存)하고 있다고 본다. 즉 신경섬유에 있어서의 활동전류나, 시냅스에 있어서의 화학물질의 이동의 배후에 원의식이 작용하고 있으며, 이 원의식이 정보의 내용을 각지(覺知)하면서 정보를 중추에 전달하고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원의식을 정보의 전달자로 간주할 수가 있다. 그래서 신경섬유에 있어서의 활동전류나 시냅스에 있어서의 화학물질의 출현은, 정보의 전달자인 원의식에 의해서 생겨나는 생리적(物理的現象)으로 보는 것이다.

 

  (5) 원형(原型)의 형성에 있어서의 대응관계(對應關係)

 

앞에서 원영상(原映像)과 관계상(關係像)의 대응원이 각각 세포나 조직의 내용과 요소의 상호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는데, 그것들을 각각 말단원영상(末端原映像)과 말단관계상(末端關係像)으로 부르고자 한다. 이에 대하여 인식의 오성(悟性)단계에서 나타나는 원영상과 관계상을 중추(中樞)원영상과 중추(中樞)관계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말단원영상이 신경로(神經路)를 통하여 상위중추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 중추신경계의 각 중추(中樞)에서 선별되고 또 복합(複合) 연합(聯合)되어서 중추원영상이 된다. 말단관계상의 경우도 중추신경계의 각(各) 중추(中樞)에서 선별되고, 또 복합(複合) 연합(聯合)되어서 중추관계상이 되는데, 이 중추(中樞관계상이 대뇌피질(大腦皮質)에 이르러 사유형식이 된다. 또한 그 때, 대뇌피질에 있는 지각중추의 중추신경계 各 위치(位置)는, 각각 그 위치에 있어서의 원영상과 관계상을 보관하고 있게 된다.

 

인식의 원형(原型)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원영상(原映像)과 사유형식 외에 경험적영상(經驗的映像) 또는 경험적관념(經驗的觀念)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이것은 그때까지의 경험에서 얻어진 영상(관념(觀念))이 기억중추에 보관되어 있다가, 그 후의 인식에 있어서 원형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 때 원영상(原映像)과 사유형식을 선천적원형(先天的原型)(또는 원초적원형(原初的原型))이라 하고 경험적영상을 경험적원형(經驗的原型)이라고 한다.(전술(前述)) 중추신경계에 있어서, 정보가 하위(下位)에서 상위(上位)로 이행함에 따라 정보의 수용량(入力)과 방출량(出力)이 증대함과 동시에, 정보의 처리방법은 보다 더 포괄(包括)化되고 보편화된다. 이것은 한 국가의 행정에 있어서 행정조직이 위로 올라갈수록 취급하는 정보량이 증대하고, 정보의 처리방식도 보다 포괄적, 보편적으로 되는 것과 같다.

 

가장 상위의 중추 즉 대뇌(大腦)피질에 있어서, 정보의 수용(受容)은 바로 인식이며, 정보의 보관은 곧 기억이다. 그리고 정보의 방출(放出)은 바로 구상(思考)과 창조와 실천이다. 이와 같은 대뇌피질의 통합작용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하위중추(下位中樞)의 통합작용도 그 방식은 대뇌피질의 그것과 동일하며, 이러한 의식에 의한 합목적적(合目的的)인 통합작용이 각각의 중추에서 행해지고 있다. 여기의 합목적적(合目的的)인 통합작용(統合作用)이란 생리적 통합작용과 의식적(정신적) 통합작용의 통일을 말한다. 그리하여 중추신경의 각 위치에 있어서, 생리적인 통합작용과 의식적인 통합작용이 병행되면서 통일적으로 행해진다. 즉 중추신경의 정보(神經임펄스)의 전달이라는 생리과정에는 반드시 판단, 기억, 구상 등의 심리과정이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상(關係像; 형식상(形式像)의 전달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同정보가 하위의 중추에서 상위의 중추로 이행함에 따라, 그 다양한 정보가 처리를 통하여 점차 단순화되는데, 이것은 말단의 개별적인 관계상이 상위로 이행함에 따라 점차로 보편화되고 일반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뇌피질(大腦皮質)에 이르면 완전히 개념화되어서 사유형식 즉 범주가 된다. 이것은 마치 행정시책(行政施策)이 행정조직의 말단(末端)으로 갈수록 보다 더 개별성(個別性), 특수성(特殊性)을 띠게 되고 중앙(中央)으로 갈수록 일반성(一般性), 보편성(普遍性)을 띠는 것과 같다 하겠다.

 

  (6) 원형(原型)과 생리학(生理學) p.587

 

원형(原型)이란, 인식에 있어서 주체가 미리 가지고 있는 관념이나 개념을 의미하며, 이것을 다른 말로 기억(記憶)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앞에서 인간은 선천적(先天的)인 원형과 경험적인 원형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는데, 이것에 대하여 생리학자(生理學者)의 표현을 빌린다면, 유전적기억과 경험에 의한 획득기억에 해당한다고 하겠다.41) 생물체로서의 인간의 세포나 조직에 관한 정보인 유전적기억(遺傳的記憶)은, 대뇌변연계(大腦邊緣系)-대뇌(大腦)의 신피질(新皮質)에 싸여져(包圍되어) 있는, 구피질(舊皮質)로 된 부분- 등에 축적되어 있다고 뇌생리학(腦生理學)은 보고 있다. 그러면 획득기억(獲得記憶)은 의학적으로 볼 때 어떻게 해서 어디에 축적되어 있을까.

 

기억에는 수초간(數秒間) 지속되는 단기(短期)의 기억과 수시간에서 수년간에 걸쳐 지속되는 장기(長期)의 기억이 있다. 단기의 기억은 전기적(電氣的)인 반복회로(反復回路)를 터로 한다고 되어 있다. 한편 장기의 기억에 대해서는 뉴론회로설(回路說)과 기억물질설(記憶物質說)의 두 가지 설(說)이 주장되어 왔다. 뉴론회로설(回路說)은, 개개의 기억은 접합부(시냅스)에 변화가 이루어진 특수한 뉴론의 회로망(回路網)에 축적된다고 하는 입장이고, 기억물질설은 개개의 기억에 대해서 RNA나 펩티드 등의 기억물질이 관계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억물질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42) 장기(長期)의 기억의 자리(座)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추측된다. 대뇌(大腦) 내부의 대뇌변연계(大腦邊緣系)에는 해마(海馬)로 불려지는 부분이 있다. 이 해마가 정보 기억의 역할을 다하고, 그 후 기억은 대뇌신피질(大腦新皮質; 측두엽)에 영속적으로 축적된다고 되어 있다.43) 즉 기억은 해마(海馬)를 통하여 측두엽(側頭葉)에 축적된다고 보고 있다.

 

인식에 있어서 이와 같은 기억(축적되어 있는 지식)이, 감각기관(感覺器官)을 통하여 들어온 외계로부터의 대상의 정보와 조합(照合)되어 판단된다는 것을 구도-페로(Andree Goudot-Perrot)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감각수용기(感覺受容器)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정보-이들 정보는, 대뇌피질 감각중추에 의해서 획득되어 `기억(記憶)'속에 저축되어 있는 지식과 조합(照合)되어 판단된다.‘44) 이러한 판단관(判斷觀)은, 외계에서 들어온 정보(외적영상(映像))가 원형(내적영상(映像))과 조합된 후 일치 또는 불일치가 판단되는 것이 인식이라고 하는, 통일인식론의 주장과 일치(一致)하는 견해인 것이다.45)

 

  (7) 관념(觀念)의 기호화(記號化)와 기호(記號)의 관념화(觀念化) p.589

 

마지막으로 기호(記號)의 관념화와 관념의 기호화(記號化)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주체인 인간이 대상을 인식할 때, 대상의 정보가 감각기에 도달하면 그것은 임펄스가 되어서 감각신경을 타고 상위중추(上位中樞)에 도달하며, 대뇌피질의 감각중추에서 임펄스(일종(一種)의 기호)는 관념화되어서 의식의 거울에 일정한 영상(映像; 觀念)으로 비쳐진다. 이것이 기호(記號)의 관념화(觀念化)이다. 이에 대하여, 실천(實踐)의 경우 어떤 일정한 관념에 따라 행동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때 그 관념이 임펄스가 되어서 운동신경을 통하여 효과(效果)器(근육)에 이르러서 이것을 움직인다. 이것이 관념(觀念)의 기호화(記號化)이다. 임펄스는 일종(一種)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대뇌생리학(大腦生理學)에 의하면, 인식에서 생긴 관념이 기억으로서 뇌의 일정한 장소에 저장될 때, 그 관념은 뉴론의 특수한 결합의 양식(樣式)으로서 기호화되고, 또 그 기호화된 기억이 필요에 따라서 상기(想起)될 때, 의식(意識)은 기호를 해독하여 관념으로서 이해한다고 한다. 이것은 기억의 저장과 상기(想起)에 있어서도 관념의 기호화와 기호의 관념화가 행해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 예로서 대뇌생리학자(大腦生理學者) 가자니가(M. S. Gazzaniga)와 레두우(J. E. LeDoux)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경험은 매우 많은 특징(特徵)을 가지고 있으므로, 경험의 개개의 특징이 뇌(腦) 안에서 각각 특이하게 부호화(符號化)된다고 간주한다.46)

기억(記憶)의 저장과 부호화(符號化) 및 부호의 해독(解讀)이, 다면적(多面的)인 과정에서 뇌(腦)속에서 다량(多量)으로 수행(遂行)되고 있다는 사실은 금후에 더욱 명백하여 질 것이다.47) p.589

 

이와 같은 관념(觀念)과 기호(記號)의 상호전환은, 마치 1차코일과 2차코일 사이를 유도(誘導)에 의해 전류가 이동하는 것같이, 관념(觀念)을 지니고 있는 성상적인 심적(心的)코일과 기호(記號)를 지니고 있는 형상적(形狀的)인 물질적코일(뉴론)과의 사이에 생기는, 일종의 유도현상(誘導現象)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관념(觀念)과 기호(記號)의 상호전환은, 인식작용이 심적과정과 생리적과정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영위(營爲)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三. 통일사상에서 본 칸트와 마르크스주의(主義)의 인식론

 

다음은 종래의 방법(方法)에서 본 인식론중, 대표적인 칸트의 인식론과 마르크스주의(主義)의 인식론을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비판해 보기로 한다.

 

 1. 칸트의 인식론 비판

 

  (1) 선험적방법(先驗的方法)에 대한 비판

 

칸트는 인식의 주체(주관(主觀))에는 선천적(先天的)인 사유형식(카테고리)이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는 사유형식을 잘 검토해 보면 객관적인 존재형식이기도 하다. 예컨대, 객관세계의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위에서 존재하고, 운동한다. 또 과학자는 객관세계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위에서 일정한 현상을 인위적(人爲的)으로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의 형식은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형식이기도 하다.

 

인과성(因果性)의 형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자는 자연계의 현상속에서 많은 인과관계(因果關係)를 발견하고, 그 인과관계에 따라 같은 현상을 실제로 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은 객관세계에 실제로 인과관계(因果關係)가 있다는 사실을 표시한다.

 

또 칸트는 주관(주체)의 형식과 대상으로부터의 내용이 결합함으로써 인식이 구성(構成)된다고 하였으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주체(인간)도 대상(만물(萬物, 자연))도 내용과 형식을 모두 갖추고 있다. 즉 주체가 갖추고 있는 것은 칸트가 말한 선천적(先天的)인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과 형식이 통일된 선재성(先在性)의 원형(複合原型)이며, 또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은 혼돈(混沌)된 감각의 다양(多樣)이 아니고 존재형식에 의해서 질서가 잡혀진 감성적내용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주체(인간)와 대상(만물)은 상대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주관이 대상을 구성함으로써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체가 가지고 있는 내용과 형식(形式)(원형(原型))과 대상이 지니고 있는 내용과 형식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조합(照合)되어 판단됨으로써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대한 비판

 

칸트는 현상세계에 있어서의 자연과학적인 지식만을 참된 인식이라고 하면서 물자체(物自體)의 세계(叡智界)는 이를 인식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성계와 예지계를 전적으로 분리해 놓았다. 그것은 순수이성(純粹理性과 실천이성(實踐理性)의 분리를 의미하며 과학과 종교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물자체는 사물의 성상(性相)이며, 이에 대하여 감성적내용은 형상(形狀)이다. 사물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통일되어 있으며, 게다가 성상은 형상을 통하여 표현되므로 우리들은 형상을 통하여 그 사물의 성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통일사상에 의하면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이며, 만물은 인간의 기쁨의 대상으로서 인간을 닮도록 창조된 것이다. 만물이 인간을 닮도록 지어졌다는 것은 구조와 요소에 있어서 인간과 만물이 닮고 있다는 것, 따라서 내용과 형식도 닮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식에 있어서 주체(인간)가 지니는 내용과 형식과 대상(만물)이 지니는 내용과 형식은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을 이루고 있어서 서로 조합(照合)될 수 있는 것이며, 게다가 그 내용(感性的내용)을 통하여 물자체(物自體), 즉 대상의 성상이 표현되므로, 주체는 대상의 형상(感性的내용과 형식) 뿐만 아니라 성상(물자체)까지도 완전히 인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과 만물의 원리적(原理的)인 관계를 몰랐기 때문에, 또 인간이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통일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져 버렸던 것이다.

 

 2. 마르크스주의(主義) 인식론의 비판

 

  (1) 반영론(反映論)의 비판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아무리 외계가 의식에 반영된다 하더라도, 판단의 기준(척도)으로서 인식의 주체속에 외계의 사물에 대응하는 원형이 없으면 인식은 성립될 수 없다. 더욱이 인식은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주체가 대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외계의 대상이 주체의 의식에 반영되었다 하더라도 주체가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인식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반영(反映)이라는 수동적인 물질적 과정만으로 인식은 성립되지 않으며, 적극적인 심적과정(대상에의 관심이나 조합의 기능)이 관여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2) 감성적인식(感性的認識), 이성적인식(理性的認識), 실천(實踐)에의 비판

 

마르크스主義 인식론에 있어서의 인식과정은 감성적인식, 이성적인식(논리적인식), 그리고 실천(혁명적실천)의 3단계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뇌(腦)의 산물 혹은 뇌의 기능이면서 객관적실재를 반영한다는 의식이 어떻게 해서 논리적인 인식(추상, 판단, 추리) 등을 행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해서 실천을 지령(指令)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외계를 반영하는 수동적(受動的)인 과정과 논리적인 인식이나 능동적인 실천의 과정과의 사이에는 대단히 큰 갭(gap)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합리적(合理的)인 설명이 없다. 즉 논리가 비약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논리적인 인식이나 실천은, 뇌(腦)에 있어서의 생리적 과정만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인식작용은 마음(정신(精神))과 뇌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논리적인 인식이나 실천은 오성(悟性)이나 이성의 작용을 가진 마음과 뇌가 수수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인식에 있어서의 실천의 역할이다. 레닌은, 인식은 실천으로 이행(移行)한다고 보았으며,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뚱)은 인식과 실천의 불가분성(不可分性)을 주장했는데, 그 점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아무런 이론(異論)이 없다. 만물은 인간의 기쁨의 대상으로서 창조된 것이며, 인간은 창조목적에 따라 만물을 주관(실천)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주관을 위하여 만물을 인식하게 된다. 인식과 실천은 인간과 만물의 수수작용의 상대적(相對的)인 회로를 이루고 있어서(그림 9-12), 실천(實踐)(주관)을 떠난 인식은 없으며, 인식을 떠난 실천(주관) 또한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해온 실천은, 최종적으로는 혁명(革命)을 목표(目標)로 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인식과 실천이 혁명을 목적으로 행해져서는 결코 안 되며, 창조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창조목적의 실현이란,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기뻐하시고, 인간은 만물을 사랑으로 주관함으로써 기쁨을 얻는, 그와 같은 세계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이나 실천도 사랑을 통한 기쁨의 실현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3) 절대적진리(絶對的眞理)와 상대적진리(相對的眞理)에 대한 비판

 

레닌과 모택동은 절대적진리의 존재를 승인하고, 인간은 인식과 실천을 되풀이함으로써 절대적진리에 한없이 가까워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절대적진리에 있어서의 절대(絶對)의 개념은 애매하다. 레닌은 상대적진리의 총화(總和)가 절대적진리라고 했다. 그러나 상대적진리를 아무리 총화(總和)해도 그것은 총화된 상대적진리일 뿐 절대적인 진리는 될 수 없다.

 

절대적진리란 보편적이면서 영원성을 띤 진리를 말한다. 따라서 절대자를 기준으로 하지 않으면 절대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절대적진리는 가치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표리일체(表裏一體)가 되고 있다. 마치 태양에 있어서 빛의 따뜻함과 밝음이 표리일체(表裏一體)여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떠나서 절대적진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할 때 인간은 비로소 만물의 창조목적을 이해하고, 만물에 대한 참다운 지식을 얻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아무리 실천한다고 해도 절대적진리는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제10장 논리학 (第10章 論 理 學)

 

Logic  p. 597

 

논리학(論理學)은 인간의 사고의 법칙이나 형식에 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은 심신(心身)의 이중체(二重體)로서, 마음과 몸은 일정한 형식이나 법칙에 지배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몸은 생리작용(生理作用)에 의해서 건강을 유지하고, 그 생리작용(生理作用)은 일정한 형식이나 법칙의 지배하에 지속된다. 예를 들면, 혈액(血液)은 전신을 순환(循環)하면서 양분(養分)과 산소(酸素)를 말단(末端)의 세포나 조직에 공급한다. 이것은 혈액(血液)이 순환(循環)의 형식을 통하여 양분과 산소를 전신에 공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체의 지각(知覺)이나 운동은 구심신경(求心神經)이나 원심신경(遠心神經)을 통한 신경의 신호를 전달받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은 지각(知覺)이나 운동이 신경(神經)에의 신호전달의 형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인체의 혈액내(血液內)에는 항상 산소의 촉매작용(觸媒作用)에 의해서 화학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바, 이 반응은 일정한 법칙하에 행해진다. 또 혈액내(血管內)의 혈액의 흐름은 유관(流管)의 연속의 법칙의 지배하에 행해진다. 이와 같이 인체의 생리작용(生理作用)은 모두 일정한 형식과 법칙하에서 이루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사고방식(思考方式)도 일정한 형식이나 법칙하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사고만은 법칙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形式論理學의창시자)이후, 형식논리학은 여러 사고(思考)가 지니고 있는 공통된 법칙이나 형식만을 다루어 왔으나,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논리학(변증법)은 사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발전과정에 있어서의 법칙과 형식까지도 다루고 있다. 본장(本章)에서는 먼저 종래의 논리학, 그 중에서도 특히 형식논리학과 헤겔논리학의 요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어서 통일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통일논리학을 소개한 후 통일논리학의 입장에서 종래의 논리학을 검토하고자 한다.

 

                     一. 종래의 논리학(論理學)

 

본(本) 항목에서는 주로,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 헤겔논리학(論理學), 마르크스주의논리학(主義論理學),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 선험적논리학(先驗的論理學)을 다루려 한다. 그 중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은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비교적 충분한 설명을 가할 것이나, 그 외의 것은 간단히 요점만 소개한다. 그 이유(理由)는 인식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서, 단지 종래의 논리학이 지녔던 문제점들에 대하여 통일논리학이 해결해 냈음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그 문제점에 관한 부분(部分)만을 소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헤겔논리학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룬 것처럼 보이는 것은, 통일논리학에서 볼 때 헤겔논리학 전체가 문제 투성이이기 때문에, 문제의 요점만을 다룬다는 것이 좀 길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본(本)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 자체만을 이해하는 데는 본항(本項)인 종래의 논리학(論理學)은 생략해도 좋을 것임은 물론이다.

 

 1.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세워진 논리학(論理學)으로서 순수한 생각(思考; 판단이나 추리)의 형식이나 법칙만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판단이나 추리의 내용과 대상은 일체 취급하지 않고 있다. 칸트는 그런데 논리학이 고대로부터 확실한 길을 걸어온 것은 이 학설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조금도 후퇴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더라도 명백하다…… 더욱이 논리학에 대해서 기이(奇異)한 것은 이 학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진보(進步)를 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이미 자기완료(自己完了)를 이루어 놓은 듯한 인상(印象)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1)라고 말 할 정도로 형식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약 2천년간 거의 변경됨이 없이 계속되어온 것이다. 그것은 그 논리학(論理學)이 사고에 관한 한, 나름대로의 객관적인 진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통일논리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먼저 형식논리학을 소개하는 것은 그 논리학(論理學)의 어느 부분이 진리(眞理)의 면인가를 명백히 함과 동시에 그 불충분한 점도 나중에 지적하기 위함이다. 다음에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의 요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p.599

 

  (1) 사고(思考)의 원리(原理)

 

형식논리학은 사고의 법칙으로서 다음의 네 가지 원리를 들고 있다.

① 동일률(同一律; principle of identity)

② 모순률(矛盾律; principle of contradiction)

③ 배중률(排中律; principle of excluded middle)

④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동일률(同一律)은 A는 A이다라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예컨대 이것은 꽃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것은 현상(現象)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꽃이라는 사실 그 자체는 불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사고 그 자체의 일치성(一致性)도 의미한다. 즉 꽃이라는 개념은 어떠한 경우에도 동일(同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새는 동물이다라는 식으로 두 가지의 개념(새와 동물)이 일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모순률(矛盾律)은 A는 非A가 아니다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동일률(同一律)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이것은 非꽃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것은 꽃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며, 새는 非동물(동물이 아닌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도 새는 동물이다라는 말과 같다. 한 쪽은 긍정(肯定)的인 표현이고, 다른 쪽은 부정적(否定的)인 표현이지만 내용은 같다.

배중률(排中律)은 A는 B이거나 非B이거나의 어느 쪽이다라고 표현된다. 그 의미는 B와 非B라는 두 가지 모순(矛盾)되는 주장 사이에 第三의 주장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은, 라이프니츠에 의해 처음으로 세워진 법칙으로서 모든 사고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존재(存在)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존재(存在)하는 모든 것은 그 존재의 충분한 이유를 가진다라고 하는 인과율(因果律)이 적용된다. 그런데 이 이유(理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하나는 근거(根據)나 논거(論據)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원인(原因)을 의미한다. 근거는 귀결(歸結)에 대한 상대적 개념(槪念)이며, 원인은 결과에 대한 상대적 개념(槪念)이다. 따라서 이 법칙은, 사고에는 반드시 그 논거(論據)가 있고 존재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 여러 가지 법칙(法則; 原理)이 있으나 그것들은 모두 이 네 가지의 근본원리에서 연역(演繹)되어 나온 것이다. 형식논리학은 또 세 가지의 주요한 요소(要素, 사고(思考)의 三요소(要素))-개념(concept), 판단(判斷; judgment), 추리(推理; inference)-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다음에 설명하고자 한다.

 

  (2) 개념(槪念)

 

개념(槪念)이란 사물의 본질적인 특징을 파악한 일반적인 표상(表象)(또는 사고(思考))을 의미하는데, 개념에는 내포(內包)(intension)와 외연(外延;extension)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내포는 각 개념에 공통된 성질을 말하며, 외연(外延)은 그 개념이 적용되는 대상의 범위를 말한다. 이것에 관하여 생물의 예를 들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생물은 동물, 척추동물, 포유류, 영장류, 인류 등과 같이 여러 단계의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다. 생물은 생명을 갖고 있는 존재다. 동물에는 물론 생명(生命)이 있으며, 그 외에 감각기관(感覺器官)이 있다. 척추동물은 거기에 더하여 척추가 있다. 포유류에는 거기에 더하여 포유(哺乳)를 한다는 성질을 갖고 있다.

 

영장류(靈長類)는 그 위에 사물을 쥐는 능력을 더 가지고 있다. 인류에게는 이성(理性)이 더 있다. 이와 같이 각기의 개념을 대표하는 각 단계의 생물은 공통적인 성질을 갖고 있는데, 어떤 개념의 이러한 공통된 성질을 그 개념의 내포(內包)라고 한다.

 

생물에는 동물과 식물이 있고, 동물에는 연체동물(軟體動物), 절지동물(節肢動物), 척추동물(脊椎動物) 등이 있으며, 척추동물에는 파충류, 어류, 포유류 등이 있고, 포유류에는 영장류나 식육류(食肉類) 등이 있으며, 영장류에는 여러 가지 원숭이류와 인류가 있다. 이상은 어떤 개념이 적용되는 대상의 범위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러한 범위를 그 개념의 외연(外延)이라고 하며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10-1과 같다.

 

   

 

어느 두 가지의 개념을 비교할 때, 내포(內包)가 보다 넓고 외연(外延)이 보다 좁은 개념을 종개념(種槪念)(하위개념(下位槪念)이라 하고, 외연(外延)이 보다 넓고 내포가 보다 좁은 것을 유개념(類槪念; 上位槪念)이라고 한다. 예컨대 척추동물과 파충류, 조류, 포유류 등의 개념을 비교하면, 척추동물은 유개념(類槪念)이며, 그 외의 것은 종개념(種槪念)이다. 또 동물이라는 개념과 연체동물, 절족동물, 척추동물 등의 개념을 비교하면 동물은 유개념(類槪念)이고 그 외의 것은 종개념이 된다. 또한 생물이라는 개념과 동물이나 식물의 개념을 비교하면 생물은 유개념(類槪念), 동물 식물은 종개념(種槪念)이 된다. 이와 같은 조작(操作)을 몇번이고 반복해 가면,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최고의 類개념(槪念)에 이르게 되는데, 이 때의 그 최고의 유개념을 범주(範疇)(카테고리, kategorie)라고 한다(그림 10-2).

 

  

 

또 선천적(先天的)으로 이성이 구비하고 있는 순수개념, 즉 경험에 의하지 않는 순수개념도 역시 범주라고 한다. 범주의 종류는 철학자에 따라 다르다. 왜냐하면 철학자의 사상체계에 따라서 자신이 만들어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개념을 범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범주를 처음 확립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며 그는 문법(文法) 을 단서로 하여 다음과 같은 10개의 범주를 세웠다.

 

① 실체(實體; substance)

 

② 양(量; quantity)

 

③ 질(質; quality)

 

④ 관계(關係; relation)

 

⑤ 장소(場所; place)

 

⑥ 시간(時間; time)

 

⑦ 위치(位置; position)

 

⑧ 상태(狀態; condition)

 

⑨ 능동(能動; action)

 

⑩ 피동(被動; passivity) 등이 그것이다.

 

근세(近世)에 이르러 칸트는 다음과 같은 12개(4綱 12目)의 범주를 세웠다. 이 12범주는 칸트의 12의 판단형식(判斷形式)(후술(後述))에서 도출(導出)한 것이다.

 

I. 분량(分量; Quantit?t)……단일성(單一性; Einheit) 다수성(數多性; Vielheit) 전체성(全體性; Allheit)

 

II. 성질(性質)(Qualit?t)……실재성(實在性; Realitt) 부정성(否定性; Negation) 제한성(制限性; Limitation)

 

III. 관계(關係)(Relation)……실체성(實體性; Substanz) 인과성(因果性; Kausalitt) 상호성(相互性; Gemeinschaft)

 

IV. 양상(樣相; Modalit?t)……가능성(可能性; Moglichkeit) 현실성(現實性; Wirklichkeit) 필연성(必然性; Notwerdigkeit)

 

  (3) 판단(判斷)

 

   1) 판단(判斷)이란 무엇인가

 

판단이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어떠하다고 주장하는 일과 두개념이 일치(一致) 또는 불일치(不一致)의 구별을 분명히 단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 판단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명제(命題; proposition)이다.

 

판단(判斷)은 주어개념(主語槪念)(主辭, 主語, subject), 술어개념(述語槪念)(賓辭, 述語, predicate), 그리고 계사(繫辭)(연결사(連結辭; copula)의 3요소로 되어 있다. 사고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 주어개념이며, 그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 술어개념이며, 이 두 개념을 연결하는 것이 계사이다. 일반적으로 주어개념을 S, 술어개념을 P, 계사(繫辭)를 `-'로 표시하여 판단을 S-P로 정식화(定式化)한다.

 

   2) 판단(判斷)의 종류(種類)

 

판단의 종류로서는 칸트의 12가지의 판단형식(4綱 12형식(形式))이 있으며, 이것을 오늘날의 형식논리학에서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칸트의 12가지의 판단형식이란 다음과 같다.

 

                        전칭판단(全稱判斷; allgemeine Urteil)…… 모든 S는 P이다.

분량(分量; Quantitat)           특칭판단(特稱判斷; besondere Urteil)…… 약간(若干)의 S는 P이다.

                        단칭판단(單稱判斷; einzelne Urteil)…… 이 S는 P이다

 

                        긍정판단(肯定判斷; bejahende Urteil)…… S는 P이다.

성질(性質; Qualitat)            부정판단(否定判斷; verneinde Urteil)…… S는 P가 아니다.

                        무한판단(無限判斷; unendliche Urteil)…… S는 非P이다.

 

                        정언판단(定言判斷; kategorische Urteil)…… S는 P이다.

관계(關係; Relation)            가언판단(假言判斷; hypothetischeUrteil)… A가B면C는D이다.

                        선언판단(選言判斷; disjunktive Urteil)…… A는 B거나 C이다.

 

                        개연판단(蓋然判斷; problematische Urteil)…… S는 P일 것이다.

양상(樣相; Modalitat)           실연판단(實然判斷; assertorische Urteil)…… S는 P이다.

                        필연판단(必然判斷; apodiktische Urteil)…… S는 P여야 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칸트의 판단형식(判斷形式)은 4강(綱)인 분량(分量), 성질(性質), 관계(關係), 양상(樣相)의 항목에서 각각 3개의 판단형식(判斷形式)을 세운 것이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건이나 상황에 직면(直面)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사고(思考)한다. 그 사고(思考)의 내용이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千差萬別)인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 사고(思考)의 내용이 비록 천차만별(千差萬別)이라 하더라도 판단(判斷)에 관한 한, 그 사고는 모두 상술한 네가지 항목의 판단의 묶음밖에 안 된다. 즉 분량(分量; 많으냐, 적으냐)에 관한 판단(判斷)과, 성질(性質)(…… 이냐, 아니냐)에 관한 판단(判斷)과, 개념의 상호관계(相互關係)에 관한 판단(判斷)과, 그리고 樣相(확실성이 어떠한가)에 관한 판단(判斷)의 묶음이다.

 

이 네 개의 각각의 항목에서 세 개의 판단형식(判斷形式)이 성립(成立)되는데, 이들의 판단이 대부분 S-P의 정식으로 표시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관계의 항목(項目)下의 가언판단과 선언판단은 각각 두 개의 판단을 연결하여 하나의 명제(命題)를 만들고 있으므로 S-P의 정식(定式)을 사용하지 않고 A-B, C-D 또는 A-B, A-C로 표시한다.

 

   3) 기본적(基本的) 형식(形式)

 

이상의 판단형식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정언판단(定言判斷)으로서, 여기에 전칭(全稱)과 특칭(特稱)의 양(量)에 관한 판단형식과, 긍정과 부정의 질(質)에 관한 판단형식을 조합하면, 다음의 4종류의 판단이 이루어 진다.

 

전칭긍정판단(全稱肯定判斷)              모든 S는 P이다.(A)

 

전칭부정판단(全稱否定判斷)              모든 S는 P가 아니다.(E)

 

특칭긍정판단(特稱肯定判斷)              어떤 S는 P이다.(I)

 

특칭부정판단(特稱否定判斷)              어떤 S는 P가 아니다.(O)

 

그런데, 상기(上記)의 12가지 판단형식中의 선언판단과 가언판단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정언판단(定言判斷)으로 고칠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 정언판단을 질(質)과 양(量)의 입장에서 분류하면 가언판단, 선언판단 이외의 형식은 모두 이상의 4개의 형식(AEIO)에 수렴되게 된다. 그래서 이 4개의 AEIO의 형식을 판단(判斷)의 기본적(基本的) 형식(形式)이라고 한다. 여기의 A, E, I, O라는 기호는, 라틴어의 affirmo(긍정(肯定))와 nego(否定)의 처음과 두번째 모음(母音)에서 각각 취한 것이다.

 

   4) 주연(周延)과 부주연(不周延)

 

정언판단(定言判斷)에 있어서 그 판단(判斷)이 오류(誤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주어와 술어의 외연(外延)의 관계가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판단에 있어서 개념이 대상의 전체 범위에 걸쳐서 적용되는 경우도 있고, 일부분(一部分)에 국한되어서 적용되는 경우도 있다. 주개념(主槪念), 빈개념(賓槪念)이 전칭(全稱)을 표시하는 경우, 그 개념의 적용범위는 그 외연(外延) 전체(全體)에 미치게 되므로 이 경우를 주연(周延) 또는 주연(周延)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개념이 특칭(特稱)을 표시하는 경우 그 개념의 적용범위는 그 외연(外延)의 일부에만 미치게 된다. 이 경우를 부주연(不周延) 또는 부주연(不周延)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주연(周延)과 부주연(不周延)은 판단에 있어서 주개념(主槪念)과 빈개념(賓槪念)의 관계를 아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그 이유는 판단에는 S(主槪念)와 P(賓槪念)가 같이 주연(周延)해도 좋은 경우가 있으며, S와 P가 같이 주연(周延)해서는 안되는 경우도 있고, 또 S와 P중 일방(一方)만이 주연(周延)해야 할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例컨대, 모든 인간(S)은 동물(P)이다에 있어서 S는 주연(周延), P는 부주연(不周延)이다. 이것은 올바른 판단이 된다. 이것은 전칭긍정판단(全稱肯定判斷)(A)의 주빈관계(主賓關係)이다(그림 10-3).

 

   

그림 10-3. 전칭긍정판단

 

또 모든 조류(S)는 포유동물(P)이 아니다라는 판단에 있어서는 주빈개념(主賓槪念)이 다같이 주연(周延)되어 있다. 이것은 전칭부정판단(全稱否定判斷)(E)의 주빈관계이다(그림 10-4).

 

   

그림 10-4. 전칭부정판단

 

어떤 꽃(S)은 붉다(P)에서 S는 不周延, P도 不周延이다. 이것은 특칭긍정판단(特稱肯定判斷(I))의 주빈관계이다(그림 10-5).

 

   

그림 10-5. 특칭긍정판단

 

또, 어떤 새(S)는 육식동물(P)이 아니다라는 판단에 있어서 S의 일부(主槪念의 外延의 일부)가 P(빈개념)의 전범위내(全範圍外)에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즉, S는 부주연(不周延)이며, P는 주연(周延)하고 있다. 이것은 특칭부정판단(特稱否定判斷(O))의 주빈관계이다(그림 10-6).

 

   

그림 10-6. 특칭부정판단

 

이상의 AEIO(전칭긍정판단(A), 전칭부정판단(E), 특칭긍정판단(I), 특칭부정판단(O))의 판단에 있어서 주빈개념(主賓槪念)의 주연(周延)과 부주연(不周延)의 관계는 그대로 규칙(規則)으로 되어 있으며, 이 규칙을 벗어나면 그 판단은 오류(誤謬)에 빠진다. 예컨대, 인자(仁者)는 모두 호산가(好山家)이다라는 판단에서 그러므로 모든 好山家(S)는 仁者이다라는 판단을 이끌어 냈다고 한다면, 不當周延의 허위에 빠지기 때문에 그 판단은 잘못이다. 전칭긍정판단(全稱肯定判斷)에서 S는 주연(周延), P는 부주연(不周延)인데도 불구하고 S도 P도 주연(周延)되고 있기 때문이다.

 

  (4) 추리(推理) p.609

 

추리(推理)란 이미 알려진 판단을 근거로 하여 새로운 판단을 도출(導出)하는 사고를 말한다. 즉 이미 알려진 판단을 이유로 하여 그러므로 ~이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을 추리(推理)라고 한다. 이 경우 이미 알려진 판단을 전제(前提)라고 한다. 이 추리(推理)에는 전제(前提)가 되는 판단이 하나만 있는 경우와, 둘 이상 있는 경우가 있어서 전자(前者)를 직접추리(直接推理), 후자(後者)를 간접추리(間接推理)라고 한다. 간접추리에는 연역추리, 귀납추리, 유비추리가 있다. 여기서는 간접추리중(間接推理中)의 연역추리(演繹推理), 귀납추리(歸納推理), 유비추리(類比推理)만을 간단히 소개한다.

 

   1) 연역추리(演繹推理)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간접추리는 2개이상의 전제(前提)에서 결론을 도출(導出)하는 것인데, 이 때 보편적, 일반적 원리를 가진 전제(前提)에서 특수한 내용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추리를 연역추리(演繹推理) 또는 삼단논법(三段論法)이라고 한다(또는 추론식(推論式)이라고도 한다). 이 삼단논법(三段論法)에 있어서 이유가 되는 전제(前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처음의 전제를 대전제(大前提)라고 하고, 다음의 전제를 소전제(小前提)라고 한다. 그리고 대전제에는 대개념(P)과 중개념(M)이, 소전제에는 소개념(S)과 중개념(M)이 포함되며, 결론(結論)에는 소개념(S), 대개념(P)이 포함되게 된다. 여기서 중개념(M)을 매개념(媒槪念)이라고도 한다. 例를 들면 다음과 같다.

 

대전제(大前提):모든 사람(M)은 죽는다(P)

 

소전제(小前提):모든 영웅(英雄(S))은 인간(M)이다

 

결론(結論): 고로 모든 영웅(S)은 죽는다(P)

 

이것을 부호(符號)만으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모든 M-P……… (M는 P이다)

 

모든 S-M……… (S는 M이다)

 

∴모든 S-P……… (∴ S는 P이다)

 

이 삼단논법(三段論法)에 있어서 대개념(P)의 외연(外延)이 가장 크고, 중개념(M)이 그 다음으로 크며, 소개념(S)의 외연(外延)이 가장 좁다. 이것을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그림 10-7).

 

   

  2) 귀납추리(歸納推理; 귀납법) p. 611

 

간접추리에 있어서 2개이상의 전제(前提)가 특수한 사실을 포함하는 경우, 그 특수한 내용으로부터 보다 보편적(普遍的)인 진리(眞理)를 결론으로 도출(導出)하는 추리 방법을 귀납추리(歸納推理) 또는 귀납법(歸納法)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말, 개, 닭, 소는 죽는다 말, 개, 닭, 소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동물은 죽는다와 같다. 그런데 이 귀납추리(歸納推理)의 결론(그러므로 모든 동물은 죽는다)이 판단형식에서 볼 때 올바른 것일까. 이 결론은 전칭긍정판단(全稱肯定判斷)이다. 따라서 소개념(S)인 동물은 주연(周延)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귀납법에서는 부주연(不周延)이다. 동물의 일부(一部) 뿐이기 때문이다. 그림 10-3과 같이 전칭긍정판단(全稱肯定判斷)이 아니면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림 10-5와 같이 특칭긍정판단(特稱肯定判斷)으로 되어 있다.

 

즉 판단형식에서 보면, 이 간접추리는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자연계에는 소수의 관찰로부터 전체의 성질을 인식하게 하는 제일성(齊一性)의 원리(原理)가 작용하고 있고, 또 자연계에 작용하는 인과율(因果律)이 동일원인(同一原因)으로부터 동일(同一)결과의 상정(想定)을 가능하게 하고 있으므로, 귀납추리는 비록 잘못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대체로 정당하다는 것이 체험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다. 이것이 귀납추리(歸納推理)이다. 다음은 유비추리(類比推理, 類推)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3) 유비추리(類比推理, 유추(類推))

 

추리(推理)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유비추리(類比推理)이다. 지금 여기에 A와 B라는 두 개의 관찰의 대상(對象)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관찰에 의해서 그 A, B가 다 함께 공통적인 성질(例컨대 a,b, c,d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하고, A에는 B에 없는 또 하나의 성질 `e'가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하자. 그리고 B는 이 이상 상세히 관찰(觀察)하기 힘든 조건하에 있다고 한다면, 이 때 관찰자(觀察者)는 A, B가 a,b,c,d의 성질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A가 가지고 있는 `e'의 성질을 B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추리를 유비추리(類比推理, 또는 간단히 유추(類推))라고 한다. 예를 들면, 지구(地球)와 화성(火星)을 비교하여 화성(火星)에도 지구와 같이 생물이 있을 것이라고 추리하는 것이 그것이다.

 

예컨대 양자가 다음과 같이 공통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즉 a)양자가 공히 유성(遊星)이며 자전(自轉)하면서 태양의 주위를 공전(公轉)한다. b)대기를 가지고 있다. c)거의 비슷한 기온을 가지고 있다. d)4계(四季)의 변화가 있고 물도 있다는 등의 특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지구에 생물이 있으므로, 화성(火星)에도 생물이 있을 것이라고 추론(推論)할 수 있다. 이것이 유추(類推), 즉 유비추리(類比推理)이다.

 

그런데 이 유추(類推)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되는 추리이다. 오늘날의 발달된 과학적 지식도 초기에는 이 유추(類推)에 의해 얻어진 것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일상의 가정생활, 단체생활, 학교생활, 기업생활, 창작활동 등에 있어서 이 유추(類推)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유추(類推)의 정확성이 필요하게 된다. 그 정확성의 필요조건은 다음과 같다.

 

i) 비교되는 사물(事物)에 유사점이 되도록 많을 것.

 

ii) 그 유사점은 우연적이 아니고 본질적일 것.

 

iii) 양자의 유사점에 대하여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이 양자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 등이다.

 

이상으로 유추(類推)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형식논리학에는 이 이외에도 직접추리(直接推理) 가언적삼단논법(假言的三段論法) 선언적삼단논법(選言的三段論法) 오류론(誤謬論) 등 취급해야 할 항목이 더 있지만, 여기서는 단지 형식논리학의 요점만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이 정도에서 끝내고자 한다.

 

 2. 헤겔논리학(論理學)

 

  (1) 헤겔논리학의 특징(特徵)

 

헤겔논리학의 특징은 사고(思考) 자체의 법칙과 형식에 관한 이론이 아니고, 사고(思考)의 발전의 법칙과 형식에 관한 이론이라는 점에 있다. 게다가 그 사고(思考)는 인간의 사고(思考)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고(思考)이다. 따라서 헤겔논리학은 하나님의 사고가 어떤 법칙이나 형식에 의해 발전하였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하나님의 사고는 하나님 자체(自體)에 관한 사고로부터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자연에 관한 사고로 발전하고, 이어서 역사에 관한 사고, 국가에 관한 사고로 발전하여, 드디어 예술, 종교, 철학에 관한 사고로까지 발전한다. 이러한 사고의 발전에 관한 법칙과 형식이 바로 헤겔논리학의 특징이다. p.613

 

헤겔자신이 언급한 바와 같이 헤겔논리학은 세계창조 이전의 하나님의 사고의 전개를 다루고 있으며, 天上의 논리(論理) 즉 창조 이전의 영원한 본질(하나님)속에 있는 서술(敍述)이다.2) 그리하여 그것은 형식논리학과 같이 단순히 형식적인 사고의 법칙만을 다룬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고의 전개라고 하면서도 현실적인 것의 가장 보편적인 여러 규정(規定), 여러 법칙(法則)을 다루고자 했던 것이다.

 

  (2) 헤겔논리학의 골격(骨格)

 

헤겔논리학은 [유론(有論)], [본질론(本質論)], [개념론(槪念論)]의 3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세 부문은 또 각각 세분화되어 있다. 즉 [유론(有論)]은 [질(質)], [양(量)], [질량(質量)]으로, [본질론(本質論)]은 [본질(本質)], [현상(現象)], [현실성(現實性)]으로, [개념론(槪念論)]은 [주관적개념(主觀的槪念)], [객관적개념(客觀的槪念)], [이념(理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들은 또 각각 세분화되어 있다. 예컨대 [유론(有論)]의 [질(質)]은 [유(有)], [정유(定有)], [향자유(向自有)]로 되어 있고, 또 [유(有)]는 [유(有)], [무(無)], [성(成)]으로 성립되어 있다.

 

그런데 헤겔에 있어서, 논리전개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이 유(有)-무(無)-성(成)의 변증법이다. 이 삼단계를 통과하여 [유(有)]가 [정유(定有)]로 이행한다. 그리고 [정유(定有)]에도 삼단계가 있어서, 그것을 통과하면 [정유(定有)]는 [향자유(向自有)]로 이행한다. [向自有]에도 삼단계가 있어서 이것을 통과하면[질(質)]이[양(量)]으로 옮겨진다. [양(量)]이 삼단계를 통과하여[질량(質量)]으로 옮겨지고[질량(質量)]이 다시 삼단계를 통과하면 [유(有)]에 관한 이론이 끝난다.

 

다음은[본질(本質)]에 관한 이론인데,[본질(本質)]에서[현상(現象)]으로[현상(現象)]에서[현실성(現實性)]으로 이행한다. 다음은 [개념(槪念)]에 관한 이론이 된다. 개념은 [주관적개념]에서 [객관적개념]으로, [객관적개념]에서 [이념(理念)]에로 이행한다. [理念]中에는[생명(生命)],[인식(認識)],[절대이념]이라는 3단계가 있다. 이렇게 해서 [절대이념]이 논리의 발전에 있어서 최후의 도달점이 된다.

 

다음에 논리의 세계 즉 이념의 세계는, 참된 자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오히려 자기를 부정하고 자연의 영역으로 이행한다. 헤겔은 이것을, [이념자신체(理念自身體)가 다른 것으로 이행해 간다]고 말하고, 자연(自然)은[이념의 자기소외, 자기부정](selbstentfremdung, selbstverneinung der ldee), 또는 타재형식(他在形式)(die form des Andersseins)에 있어서의 이념이라고 하였다. 자연계에 있어서는 역학(力學), 물리학(物理學), 생리학(生物學)의 삼단계를 통과한다. 이와 같이 자기를 부정하고 스스로 밖으로 나타나서 자연계가 되었던 理念은, 다시 자기(자연(自然))를 부정하여 인간이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이 되어서 자기를 회복한 이념이 정신이다. 정신은 주관적정신, 객관적정신, 절대정신의 삼단계를 거치는데 여기의 절대정신은 정신 발전의 최후의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절대정신은 예술, 종교, 철학의 삼단계를 거쳐서 드디어 본래의 자기(自己)(절대이념)로 복귀한다. 헤겔논리학의 체계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그림10-8).

 

   

 

  (3) 유(有)-무(無)-성(成)의 변증법 p.616

 

헤겔논리학에 있어서는 유(有)에서 출발하여 절대이념(絶對理念)에 이르기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이 有는 유론(有論)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바, 이 유론(有論)은 유(有)-무(無)-성(成)의 변증법으로 시작된다. 따라서 헤겔논리학의 성격(性格)을 알기 위해서는 이 유(有)-무(無)-성(成)의 변증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이 헤겔논리학(변증법)의 출발점인 동시에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헤겔논리학은 有에서 시작된다.3) 有는 단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가장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전혀 무규정성(無規定性)의 공허한 사고(思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정적인 것, 즉 無라고 한다. 헤겔에 있어서의 有와 無는 다같이 공허한 개념이며, 양자사이에는 거의 구별이 없다.4) 다음에 헤겔은 有와 無의 통일을 成이라고 하였다. 그에 있어서는, 有도 無도 모두 공허하고 추상적이지만, 양자는 대립의 상태에서 통일을 이룬 다음 최초의 구체적인 사고(思考)를 이루어서 成이 된다.5) 이 有-無-成의 논리를 기본으로 하여, 보통 헤겔의 방법이라고 알려진 정-반-합(正-反-合), 긍정-부정-붖정의 부정(긍정(肯定)-否定-否定의 否定) 또는 定立-反定立-綜合의 변증법적 논리가 성립된다. p.616

 

  (4) 정유(定有)에의 이행과 정유(定有)

 

다음은 정유(定有)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정유(定有)란 일정한 형태를 가진 有이며, 구체적으로 고찰된 有이다. 有가 단지 있다를 의미하는데 대하여 정유(定有)는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有, 無, 成에서 정유(定有)에로의 이행은, 요컨대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成은 그 속에 有와 無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 모순에 의해 成은 자기를 지양하여, 즉 한층 더 높여져서 정유(定有)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유(定有)란 특정한 有, 규정된 有이다. 헤겔은 이 定有의 규정성을 質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록 有가 특정하다 하더라도 여기서 고찰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규정성을 말하며 규정성일반(規定性一般)에 불과하다.

 

有를 정유(定有)로 만드는 규정성은, 한편에서는 어떤 것이다라는 긍정적인 내용인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한정된 것 즉 제한(制限)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만드는 質은, 어떤 것이다라는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실재성(實在性)이고, 한정된 것 혹은 다른 것이 아니라는 면에서 보면 부정성(否定性)이다. 따라서 정유(定有)에 있어서는 실재성(實在性)과 부정성(否定性)의 통일, 긍정과 부정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에 정유(定有)는 향자유(向自有)로 이행한다. 향자유(向自有)란, 다른 것과 연관되거나 또 다른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 머무르고 있는 有를 말한다.

 

  (5) 有-본질(本質)-개념(槪念) p. 617

 

헤겔이 유론(有論)에서 논한 것은,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변화의 논리(論理), 생성(生成)?소멸(消滅)의 논리에 관한 것이었다. 다음에 유론(有論)은 본질론(本質論)으로 이행하는데, 거기서는 사물속에 있는 불변한 것(본질(本質)), 그리고 사물의 상호관련성을 논(論)하고 있다. 그 다음에 유론(有論)과 본질론(本質論)의 통일로서의 개념론(槪念論)으로 이행한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으로 변화하면서도 자기라는 것을 버리지 않는 사물의 존재방식, 즉 자기발전(自己發展)이 고찰되고 있다. 이 발전의 원동력을 이루는 것이 개념(槪念)이며, 생명(生命)이다.

 

왜 하나님의 사고가 有-본질(本質)-개념(槪念)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사물을 외측(外側)으로부터 내측(內側)으로 관심(關心)을 옮겨가는, 인간의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예컨대 어떤 꽃을 인식하는 경우, 먼저 외적이고 현상적(現象的)으로 꽃의 존재를 파악한 다음 꽃의 내적인 본질을 이해한다. 그러고나서 꽃의 존재와 꽃의 본질이 하나가 된 꽃의 개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6) 논리(論理)-자연(自然)-정신(精神)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헤겔에 의하면, 자연이란 타재형식(他在形式)에 있어서의 이념(理念), 자기소외(自己疎外)된 이념이다. 따라서 논리학을 正이라 하면 자연철학은 反이 된다. 다음에 이념(理念)은 인간을 통하여 다시 의식(意識)과 자유를 회복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정신이다. 따라서 정신철학은 合이 된다.

 

자연계도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 발전을 하는 바, 그것이 역학(力學), 물리학, 생물학의 삼단계이다. 그러나 이 3단계는 자연계 그 자체가 발전하는 과정이 아니며, 자연계의 배후에 있는 이념이 출현되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먼저 힘의 개념이, 다음에 물리적 현상의 개념이, 그 다음에 생물의 개념이 나타난다는 삼단계 과정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인간이 출현하는 바, 인간을 통하여 정신이 발전한다. 이것이 즉 주관적(主觀的)정신(精神), 객관적정신(客觀的精神), 절대적정신(絶對的精神)의 삼단계의 발전이다. 주관적 정신이란 인간개인의 정신이며, 객관적 정신은 개체를 넘어 사회화된 정신, 대상화된 정신을 말한다.

 

객관적 정신에는 법(法), 도덕(道德), 윤리의 삼단계가 있다. 법(法)이란 국가에 있어서의 헌법(憲法)과 같은 정비된 法이 아니며, 어떤 집단(集團)으로서의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초보적인 형식(形式)을 말한다. 다음에 인간은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도덕적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도 다분(多分)히 주관적인 면(개인적인 면)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지켜야 할 규범(規範)으로서의 윤리가 나타난다.

 

윤리의 첫째 단계는 가정이다. 가정에서는 사랑으로 가족이 서로 결합되어 있고, 자유가 허락되어 있다. 둘째 단계는 시민사회(市民社會)이다. 그런데 시민사회에 이르면 개인의 이해(利害)가 서로 대립(對立)하고, 자유는 구속(拘束)되게 된다. 그래서 셋째 단계로서 가정과 시민사회를 종합하는 국가가 출현하게 된다. 헤겔은 국가를 통하여 이념이 완전히 자기를 실현(實現)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념이 실현된 국가가 이상국가(理想國家)이다. 거기에서는 인간의 자유가 완전히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것이 절대정신인 바, 절대정신은 예술, 종교, 철학의 삼단계를 통하여 자신을 전개한다. 그리고 철학에 이르러 이념(理念)은 완전히 자기를 회복한다. 이와 같이 하여 이념은 변증법적운동을 통하여 원점으로 돌아간다. 즉 자연, 인간, 국가, 예술, 종교, 철학 등의 여러 단계를 거쳐서 드디어 처음의 완전한 절대이념(絶對理念; 신(神))으로 돌아간다. 이 귀환이 이루어짐으로써 발전의 전과정(全過程)은 끝난다.6)(그림 10-8)

 

  (7) 헤겔논리학(論理學)의 골격 p.619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헤겔변증법의 시발점은 有-無-成이라는 Triade(3단계過程)이며, 이 삼단계는 모순(矛盾)(대립물(對立物)에 의한 부정)에 의한 정-반-합(正-反-合)의 삼단계이다. 이와 같은 Triade, 즉 삼단계과정이 레벨을 높여가면서 반복(反復)함으로써 논리학(論理學)-자연철학(自然哲學)-정신철학(精神哲學)이라는 최고의 Triade를 형성한다. 여기의 논리학(論理學)을 구성(構成)하는 3단계과정(過程)은 有-본질(本質)-개념(槪念)이며, 이 개념(絶對理念)의 단계에서 절대정신(絶對精神)(신(神)의 사고(思考))은 理念(이념; ldee) 즉 절대이념이 된다. 그런데 절대정신(絶對精神)은 논리학(論理學)의 단계를 거친 후 절대이념이 되어서 외부에 나타난 다음(外化하여) 자연계(自然界)가 되고(자연철학(自然哲學)), 더욱 발전하여 인간을 통하여 주관적정신(主觀的精神)-객관적정신(客觀的精神)-절대적정신(絶對的精神)이 된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처음 출발하였던 자기 자신, 즉 절대이념(絶對理念)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자연철학(自然哲學)이나 정신철학(精神哲學)이 논리학(論理學)과는 전연 별개의 분야와 같이 생각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논리학은 최고의 3단계과정(過程)의 처음 단계긴 하지만, 그 논리학(論理學)속에 자연자연(自然哲學)이나 정신철학(精神哲學)의 원형(原型)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절대정신(絶對精神)은 有-본질(本質)-개념(槪念)이라는 Triade의 개념의 단계에서 理念(ldea)이 되지만, 이 이념은 자연철학(自然哲學)과 정신철학(精神哲學)의 내용의 전부를 원형(原型)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곧 우주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는 정신(精神)이다. 그래서 실제의 자연철학(自然哲學)이나 정신철학(精神哲學)은 이 이념(理念) 속의 원형이 그대로 외부에 나타난 영상(映像)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영화 필름의 영상(映像)이, 스크린에 비춰진 것이 영화(映畵)인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헤겔의 논리학은 최고의 Triade의 초기(初期)단계이며, 자연철학(自然哲學)이나 정신철학(精神哲學)과는 별개이면서 그것들의 원형(原型)으로서, 전부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헤겔철학체계 전체를 논리학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절대정신의 발전을 다루는, 이와 같은 헤겔의 변증법은 보통 관념변증법(觀念辨證法)으로 불리운다.

 

  (8) 헤겔변증법의 원환성(圓環性)과 법칙(法則)과 형식(形式)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헤겔변증법은 정-반-합(正-反-合)의 삼단계 발전의 반복(反復)을 통하여, 높은 수준에서 원래의 위치에 돌아오는 복귀성(復歸性)의 운동(運動)이며, 원환성(圓環性)의 운동(運動)이다. 이것은 낮은 레벨의 Triade에 있어서나 높은 레벨의 Triade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헤겔변증법의 또 하나의 특징(特徵)은 발전운동(發展運動)이 圓環性(복귀성)임과 동시에 완결성(完結性)이라는 점이다. 절대정신이 자기 내 복귀(自己 內 復歸)를 끝내면 그 이상 발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헤겔논리학에 있어서의 법칙(法則)과 형식(形式)에 대하여 살펴보자.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에 있어서의 법칙은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 등이었다. 그리고 형식(形式)은 판단형식(判斷形式)이나 추리형식(推理形式; 間接推理, 直接推理 등)이었다. 그런데 헤겔논리학의 법칙은 변증법의 내용인 모순(矛盾)의 법칙 양(量)의 질(質)에의 전화(轉化)의 법칙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의 법칙 등이며, 형식(形式)은 변증법의 발전형식인 정-반-합(正-反-合)의 삼단계과정에 의한 발전형식(發展形式)을 의미한다. 즉 헤겔논리학의 그 법칙(法則)은 형식논리학과는 달리 모순(矛盾)의 법칙(法則), 量의 質에의 전화의 법칙, 否定의 否定의 법칙 등이며, 그 형식(形式)은 삼단계발전(三段階發展)의 형식이다. 이와 같이 3단계발전의 형식을 다루는 논리학(論理學)은 보통 변증법적논리학(辨證法的論理學)이라 불리운다. 이상으로 헤겔논리학의 설명을 전부 마친다. p.622

 

 3. 마르크스주의(主義) 논리학(論理學)

 

헤겔에 의하면, 개념이 물질의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 자연이므로 관념(觀念, 개념(槪念))은 객관적존재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반대로 물질이야 말로 객관적인 존재이며, 관념(槪念)은 물질세계가 인간의 의식(意識)에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의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물질의 발전형식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헤겔의 관념변증법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이라고 부른다.

 

이 유물변증법을 근거로 하여 마르크스주의(主義) 논리학이 세워진다. 그런데 유물변증법도 변증법(辨證法), 즉 正?反?合의 3단계과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관념변증법(觀念辨證法)과 동일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논리학도 역시 변증법적논리학(辨證法的論理學))이다. 그 주안점(主眼點)은 본래 형식논리학 특히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을 반대한다는 데에 두고 있다.7) 즉 사물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A는 A인 동시에 非A이다로 되지 않으면 안되며, 사고법칙은 그 반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고의 형식과 법칙을 다루는 형식논리학은, 유물사관의 입장에서 상부구조(上部構造)에 속하는, 계급성을 띤 논리학으로 단정하여 이것을 거부하고 유물변증법에 의한 변증법적논리학을 세웠던 것이다.8)

 

그런데 형식논리학을 거부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즉 형식논리학에서처럼 앞뒤에 모순이 없는, 시종일관(始終一貫)된 바른 사고(思考)를 전혀 할 수 없게 된다는 곤란(困難)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언어학(言語學)도 같은 곤란(困難)에 빠져 있었다. 언어도 상부구조(上部構造)에 속하고 있어서 계급성(階級性)을 지닌다는 주장과 함께, 공산주의(共産主義) 체제하(體制下)에서도 여전(如前)히 상용(常用)되고 있는 러시아어를 대신하는 새로운 소비에트언어(言語) 사용의 필요성이 논의(論議)되었던 것이다.9)

 

그리하여 1950년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언어는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아니며, 계급적인 것도 아니다.라고 천명하였다. 이 논문을 계기로 하여 1950년부터 1년간 소련에서는 형식논리학의 평가를 둘러싸고 대대적인 토론이 벌어졌다. 그 토론에 의하여 형식논리학의 사고의 형식과 법칙은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아니며, 계급성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과 변증법적논리학(辨證法的論理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은 사유의 초등(初等)의 법칙과 형식에 관한 학문이지만 변증법적논리학은 객관적실재와 그 반영인 사유와의 발전적법칙에 관한 고등의 논리학이다.'10)라고 규정하였던 것이다. p.623

 

그런데 유물변증법에 의한 논리학 즉 변증법적논리학은 上記와 같이 형식논리학의 동일률(同一律)과 모순율(矛盾律) 등을 비판했을 뿐, 논리학으로서 체계화(體系化)된 내용은 누구에 의해서도 제시(提示)되지 않고 있다.11)

 

 4.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 p.624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은 형식논리학을 발전시킨 것으로서, 수학적기호(數學的記號)를 사용하여 올바른 판단의 방법을 연구하려고 하는 입장이다. 형식논리학은 개념의 외연(外延)의 포섭관계, 즉 판단에 있어서의 주개념(主槪念)과 빈개념(賓槪念)의 포섭관계를 주제(主題)로 삼아 왔다. 거기에 대하여 기호논리학에서는 개념과 개념, 명제와 명제의 결합관계를 주목하고, 수학적기호에 의해 사고의 법칙이나 형식을 연구하는 것이 그 주제가 되고 있다.

 

명제(命題)의 결합에는 5개의 기본형식이 있는 바 그것은 다음과 같다. (p. q를 임의의 2개의 명제(命題)로 한다).

 

  

 

이 5개의 기본형식의 결합에 의하여 어떠한 복잡한 연역적추리(演繹的推理)도 정확히 표현된다. 예컨대 형식논리학의 기본적인 원리인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 배중률(排中律)은 다음과 같이 기호화된다.

 

   

 

철학은 각기 방대(尨大)한 체계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논리구성이 옳은가 그른가가 문제이다. 그 올바름을 식별(識別)하는 데는 수학적기호를 사용하여 계산해 보면 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입장에서 출현한 것이 기호논리학이다.

 

 5. 선험적논리학(先驗的論理學)

 

선험적논리학(先驗的論理學; 超越的論理學)이란 칸트의 논리학을 말한다. 칸트는, 객관적인 진리성은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직관형식(直觀形式)을 통하여 얻어진 감성적(感性的) 내용을 사유형식(오성형식)과 결합함으로써, 즉 사유함으로써 얻어진다고 하였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고(思考)에는 형식(形式)이 있었다.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의 판단형식(判斷形式)이나 추리형식(推理形式)이 그것이며, 헤겔논리학의 변증법(辨證法)의 삼단계 발전(三段階 發展)의 형식(形式)도 사고의 형식이었다. 마찬가지로 칸트에게도 사고하는데 일정한 형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의 직관형식(直觀形式)과 오성형식(悟性形式, 사유형식(思惟形式))이다. 칸트의 오성형식에는 12가지의 형식이 있는데, 이것은 그의 12가지의 판단형식(判斷形式)을 터로하고 분류(分類)한 것으로서, 칸트는 판단의 종류를 양(量), 질(質), 관계(關係), 양상(樣相)의 4종류로 나누고, 다시 그 각각의 종류를 3가지로 나누어서 12개의 판단형식(判斷形式)을 제시(提示)하였다. 이 12가지의 판단형식에 대응(對應)하는 12가지의 사유형식(思惟形式), 곧 12가지의 카테고리(범주(範疇))를 정립(定立)하였는데, 여기의 카테고리란 우리가 생각할 때 반드시 따르게 되는 근본적인 생각의 테두리를 말한다.

 

그런데 그는, 직관형식(直觀形式)이나 오성형식(悟性形式) 모두 선험적(先驗的)인 개념으로서, 경험(經驗)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논리학을 선험적논리학(先驗的論理學)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인식에 있어서는, 이 선험적형식(先驗的形式) 특히 오성형식(悟性形式) 그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으며, 반드시 외부로부터의 감각적(感覺的)내용과 결합되어 인식(認識)의 대상(對象)을 구성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이 성립(成立)하게 된다. 즉 오성형식은 인식(認識)을 위한 형식이었다. 칸트의 오성형식(悟性形式)은 개념(槪念)이며 범주(範疇)이다. 개념이라는 것은 내용이 없는 텅빈 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 속에 내용이 채워지지 않으면 무의미(無意味)하다. 이것을 비유해서 예를 들면, 동물이라고 할 때, 동물 그 자체는 내용이 없는 단순한 개념일 뿐, 실제로 객관세계에 있는 것은 닭, 개, 말, 고양이, 고등어 등의 구체적인 개물(個物)들이다.

 

그런데 칸트에 있어서 닭, 개 등의 그 자체(물자체(物自體))는, 실제는 불가지(不可知)이다. 실제로는 닭이나 개 등의 물자체(物自體)들이, 그들의 여러 성질(性質)에 기인하는 다양(多樣)한 자극을 발(發)하여서, 그것으로 인간의 감각기(感覺器)의 감성(感性)을 촉발(觸發)하여, 물자체(物自體)의 여러 성질에 대응하는 잡다(雜多)한 영상의 단편(端片)들을 직관(直觀)하게 하는데, 이때의 직관(直觀)된 영상의 단편들을 감각적내용(感覺的內容) 또는 감각적 성질이라고 한다. 이 감각적성질과 마음속의 동물(動物)이라는 개념이 합쳐져서 비로소 현실의 닭이나 개가 되어 인식의(認識)의 대상(對象)이 된다.

 

이 비유의 예와 마찬가지로 오성형식(悟性形式) 그 자체는 내부(內部)가 텅 비어있는 틀에 불과하며, 외부(外部)로부터의 성질에 의하여 채워질 때 비로소 인식의 대상이 구성된다는 것, 그 구성된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이래의 일반논리학(형식논리학)은 인식의 대상과는 관계없이 사고의 일반적형식을 다루어 왔으나 칸트의 논리학은 인식의 대상에 관한 진리를 알아보고 확인하는 인식논리학(認識論理學)이었던 것이다.

 

                  二.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

 

 1. 기본입장

 

  (1) 사고(思考)의 출발점과 방향

 

종래의 논리학은 사고의 법칙이나 형식을 다루고 있지만,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은 먼저 `사고의 출발점'에 대하여 생각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즉 `왜 사고가 필요한가'라는 데서부터 출발하며, 그 다음에 사고의 법칙이나 형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간은 왜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주 창조에 앞서서 먼저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에 앞서, 심정을 동기로 하여 사랑을 실현코자 하는 목적을 세워가지고, 그 목적에 부합되는 내용을 마음속에 구상하신 것이다. 이것이 생각이요, 로고스(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된 인간도 심정(心情)을 동기로 하여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을 세워 놓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생각하는 것이 본연의 생각의 자세이다. 여기의 목적이란, 피조물에 있어서는 피조목적이며, 여기에는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 있다.

 

전체목적이란 사랑을 통하여 가족이나 이웃, 민족, 인류 등 전체에 대하여 봉사하면서 그 전체를 기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하나님께 봉사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고, 개체목적이란 자기의 이기적(利己的)인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이다. 결국 이 두 가지의 목적이 인간이 사는 목적이며, 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 인간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에 있어서 전체목적이 우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思考)는 일차적(一次的)으로 전체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해야 하며, 2차적으로는 개체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해야 한다. 그런데 개체목적도 결국 전체목적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본래 자기이익을 중심으로 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타인(他人)을 사랑하기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래의 사고의 출발점이요 방향이다.

 

  (2) 사고(思考)의 기준(基準)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기준(基準)이 되는 생각일까? 존재론이나 인식론에서도 그러했듯이 통일사상은 어떠한 부문(部門)도 그 논리전개의 근거를 모두 원상(原相)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사고(思考)의 기준도 원상(原相)에 있으며 그것은 원상(原相)의 논리적 구조(構造)이다. 즉 그것은 원상에 있어서 로고스(구상(構想))가 새로 생겨날 때 형성되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이다. 이것은 심정이나 사랑을 기반으로 한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間에 이루어지는 원만하고 조화로운 수수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원상의 논리적구조가 사고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3) 관련분야(關聯分野)

 

통일논리학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또 하나 언급해 두고자 하는 것은 논리학(論理學)의 관련분야(關聯分野)이다. 형식논리학은 다른 분야(領域)와의 관련된 부분을 다루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그 대안으로서 변증법적논리학(辨證法的論理學)이나 인식논리학(認識論理學)이 출현했던 것이다.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에 있어서의 사고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사랑을 터로 하는 창조목적(創造目的)의 실현(實現)에 있고, 그 기준은 원상(原相)의 논리구조(論理構造)에 있기 때문에 관련분야(關聯分野)는 대단히 넓다. 왜냐하면 사고(思考)의 기원(起源)은 하나님의 말씀(構想) 곧 로고스이며, 문화분야(文化分野)치고 어느 것 하나 구상(構想)(思考없이 운영되는 분야(分野)가 없기 때문이다.

 

원상(原相)에 있어서 로고스가 형성(形成)되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는 모든 만물이 창조되는 창조의 2단구조(構造)의 일부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말씀인 동시에 우주(宇宙)의 법칙(法則)으로서, 만물 모두를 망라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로고스(思考)의 학문으로서의 논리학도 모든 다른 영역과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는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와 더불어 창조의 2단구조(構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2단구조(構造)에 있어서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는 논리구조(論理構造)가 되며,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는 인식구조(認識構造)나 주관구조(主管構造)가 된다. 인식구조(認識構造)란 만물로부터 인식(認識)을 얻는 경우의 사위기대로서, 주로 과학(자연과학)연구의 경우에 조성되는 사위기대이며, 주관구조(主管構造)는 생산이나 실천, 즉 산업, 정치, 경제, 교육, 예술 등의 경우에 조성되는 사위기대이다. 따라서 논리구조(論理構造)를 기반으로 하는 논리학(論理學)은 인식구조(認識構造)나 주관구조(主管構造)를 기반으로 하는 모든 문화영역(領域)과 밀접(密接)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4) 원상구조(原相構造)

 

여기서 원상구조(原相構造)에 대해서 좀 더 언급해 보고자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원상구조(原相構造)는 안 밖 2단의 사위기대로 되어 있다. 이것을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이것을 닮은 피조물(被造物)의 이단구조를 존재(存在)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그런데 원상구조(原相構造)에 있어서 안 밖의 사위기대(四位基臺)는 심정중심의 자동성(自同性)과 목적중심의 발전성(發展性)을 각각 지니게 되어 자동적(自同的) 및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가 된다. 이 경우 안 밖의 사위기대(四位基臺)가 모두 발전적기대(發展的基臺)가 되는 경우의 원상구조를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피조물(被造物)은 예외없이 모두 이 2종의 2단구조(構造)를 닮아서 지어졌기 때문에, 각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는 모두 존재(存在)의 2단구조(構造)와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생물의 경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간에 있어서 논리구조(論理構造), 인식구조(認識構造), 존재구조(存在構造), 주관구조(主管構造) 등은 모두 각각 2단구조(構造)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 있어서 인간이 관련된 모든 사위기대(四位基臺)는 반드시 2단의 사위기대(四位基臺), 즉 이단구조(二段構造))이다.

 

이것은 또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에 중점을 두는 영역(領域)과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형성(形成)에 중점을 두는 영역(領域)과는 서로 보완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例를 들면, 내적구조(構造)(사위기대)에 중점을 두는 논리학(論理學)이나 외적구조(構造)에 중점을 두면서 주관활동의 한 분야를 다루는 교육론(敎育論) 등은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인간사회의 모든 2단구조(構造)는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에서 유래하므로 모두 상호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그림 10-10). p. 630

 

   

 

 2. 원상(原相)의 논리적(論理的) 구조(構造)

 

이상으로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의 서론에 해당하는 기본입장의 항목을 마치고 이제부터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의 본론에 들어가고자 한다. 먼저 원상의 논리적구조에 관해서 살펴보자.

 

  (1) 로고스형성(形成)의 구조와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논리학(論理學)은 사고(思考)의 법칙(法則)과 형식(形式)에 관한 학문이다. 그런데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의 근거는 원상의 본성상(本性相內)의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특히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에 있다. 따라서 논리학(論理學)이 사고를 취급하는 학문인 이상, 이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에서 어떻게 사고(思考)가 발생하는가를 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원상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도 원상(原相)의 이와 같은 논리구조(論理構造)를 본받아서, 사랑의 목적을 실현(實現)하기 위한 내적사위기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거기에서 사랑을 지향(指向)하는 사고(思考)가 생겨나게 된다.

 

   

 

  (2) 본래의 인간의 모습

 

따라서 본래 인간의 사고(思考)에 있어서는, 그 사고(思考)의 동기(動機)가 심정(心情) 또는 사랑이 아니면 안 된다. 인간의 사고(思考)는 사랑의 실천(實踐)을 위한 사고(思考)이며, 인간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는 것도 사랑의 실천(實踐)을 위해서인 것이다. 자유를 가지고 악(惡)을 행하거나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자유의 남용(濫用)이다. 사랑의 실현(實現)이란 요컨대 사랑의 세계의 실현(實現)이며,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의 실현이다. 사랑을 지향(指向)하는 사고를 많은 인간이 가지면 가질수록 사랑의 세계(世界)는 보다 빨리 실현(實現)될 것이다.

 

  (3)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

 

창조의 이단구조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언급했지만 여기서는 同 2단구조(構造)와 논리학(論理學)과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란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와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가 연속적으로 형성(形成)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에서 로고스가 형성되는데, 이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가 바로 논리구조(論理構造)이다.

 

그러면 이때의 외적발전적사위기대는 논리학(論理學)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즉 논리학(論理學)에 대하여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는 과연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에 있어서 사고(思考)는 창조목적(創造目的)의 실현(實現) 또는 사랑의 실현을 지향(指向)하며, 따라서 사랑의 실천(實踐)을 전제(前提)로 하기 때문이다. 실천(實踐)한다는 것은 마음에 생각한 것을 외부(外部)에 대하여 실제(實際)로 行하는 것이며, 바로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形成)을 뜻한다. 실천의 대상은 만물이며 인간이다. 즉 사랑의 실천이란 만물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에 있어서 사고(思考)한다는 것은 거기에 반드시 동기(動機)와 목적과 方向이 있으므로, 반드시 실천(實踐)에 연결되고 행동(行動)과 결부되어야한다(그림10-12).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상하시고, 로고스를 만들고, 창조를 개시(開始)하셨다. 그래서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라는 개념(槪念)이 성립한 것이다.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에 있어서는 사고(思考) 그 자체만의 형식(形式)이나 법칙(法則)을 취급하지만, 통일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잘못은 아니더라도 불충분(不充分)한 것이다.

 

보통 지행일치(知行一致)라든가 이론과 실천(實踐)의 통일을 자주 말하는 것은, 그 논리적(論理的) 근거(根據)가 이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에 있었기 때문이다.

 

 3. 사고과정(思考過程)의 2단계(二段階)와 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

 

  (1) 오성적(悟性的)단계와 이성적(理性的)단계

 

인식에는 감성적단계, 오성적단계, 이성적단계의 3단계가 있다. 이것은 인식이 통일원리의 삼단계완성의 법칙에 따르기 때문이다. 감성적단계는 외부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창구이므로 인식의 소생적단계이며, 장성적인 오성적단계와 완성적인 이성적단계에서는 사고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중 오성적단계의 사고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정보에 영향을 받지만, 이성적단계에 이르면 사고(思考)는 외부와 관계없이 자유로이 이루어진다.

 

칸트도 역시 3단계의 인식과정에 대해서 論하고 있다. 외계에서 들어오는 감성적내용을, 직관형식(直觀形式)을 통하여 수용(受容)하는 단계가 감성적단계이며, 다시 사유형식(思惟形式(오성형식))을 가지고 사고하는 단계가 오성적단계이며, 오성적인식을 통일 내지 통제해 가는 과정이 이성적단계이다.12) p.634

 

마르크스주의의 경우에는, 감성적내용이 뇌(腦)에 반영되는 것이 감성적단계이다. 그 다음 단계는 논리적단계 또는 이성적단계로서 거기에서 판단이나 추리가 행하여진다. 또 그 다음 단계로서 실천에 의해서 확인하는 실천의 단계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경우, 사유형식(思惟形式)은 외계의 존재형식이 의식에 반영(反映)된 것이다.

 

대뇌생리학(大腦生理學)의 관점에서 보면, 인식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감성적단계의 인식은 감각중추(感覺中樞)에서, 오성적단계의 인식은 두정연합야(頭頂聯合野)에서, 그리고 이성적단계의 인식은 전두정연합야(前頭聯合野)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오성적(悟性的)단계와 이성적(理性的)단계에서 원상구조와 비슷한 논리구조가 형성된다. 오성적단계에 있어서 사고는 외계로부터 들어오는 감성적요소(내용)에 의해서 규정(規定)된다. 즉 외계의 내용과 내계의 원형(原型)이 조합(照合)되어서 인식이 일단 완결된다. 그 때 인식구조 또는 논리구조로서 내적인 완결적(自同的)사위기대(四位基臺)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성적단계에서는 오성적단계에서 얻어진 지식을 터로 하여, 자유로이 추리를 진행시켜 새로운 구상(構想)(신생체(新生體))을 세우기도 한다. 이때의 사고의 구조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이다.

 

인식에 있어서의 대뇌의 생리과정(生理過程)을, 내객(來客, 손님)을 맞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내객이 처음 들어서는 현관(玄關)은 감각중추(감성(感性))에 해당되고, 주인을 만나는 응접실은 두정연합야(頭頂聯合野(悟性))에 해당되며, 거실이나 서재는 전두연합야(前頭聯合野(이성))에 해당된다. 하인(下人)으로부터 현관에 손님이 왔다는 전언을 받으면, 주인은 응접실에 나와서 그 손님을 맞이한 후 대화를 나눈다. 주인은 손님을 상대하면서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 때 주인은 제멋대로의 생각을 할 수는 없다. 손님과의 대화에 필요한 말을 해야되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은 상대의 말 여하에 좌우된다. 이것은 오성적단계에서 벌어지는 인식의 비유이다. 대화가 끝나면 주인은 손님과 작별한 뒤 자기의 거실이나 서재에서 손님의 말을 참고하면서 자유로이 생각할 수가 있다. 이것이 이성적(理性的)단계의 사고의 비유이다.

 

  (2) 이성적(理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사고(思考)의 발전

 

이성적(理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사고는 어떻게 해서 발전해 가는 것일까. 사고(思考)란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의 수수작용이었다. 그리하여 먼저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제일(第一)단계의 로고스 즉 사고의 결론으로서의 구상(신생체(新生體))이 형성된다. 그것으로 사고가 일단 끝나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 그 사고의 결론(구상) 여하에 따라서는 다음 단계의 로고스(구상(構想))가 필요하게 된다. 그때 第一단계에서 형성된 로고스는 사고의 소재(素材)인 하나의 개념 또는 관념이 되어서, 내적형상속에 비축된 후 2단계(第2段階)의 사고(思考) 때 다른 많은 소재(관념, 개념)와 더불어 동원된다. 이와 같이 하여 2단계(第2段階)의 로고스가 생기게 되며, 그것이 또 필요에 따라서 내적형상에 이행(移行)되어서 다음 사고 때 동원된다. 이리하여 3단계(第3段階)의 로고스가 형성(形成)된다. 같은 방식으로 제4(第四), 제5(第五)의 단계에로 사고가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비록 하나의 사항(事項)에 관한 사고일지라도 일회만(一回限)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수가 많다. 이것이 이성적(理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사위기대 형성의 과정이며, 이것을 사고의 나선형의 발전이라고 한다(그림 10-13).

 

   

 

이와 같이 이성적(理性的)단계에서 사고가 무한히 발전을 계속하는 것은 이 단계가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발전을 계속한다 하더라도, 하나의 사항(事項)에 관한 사고가 일단 끝난 후 새로운 사고가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사고의 발전은 완결적(完結的)인 사위 기대형성의 연속인 것이다. 따라서 사고는 완결적(完結的)단계를 반복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3) 사고(思考)의 기본형식(基本形式) p. 637

 

오성적(悟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사고(또는 인식)는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감성적내용과 원형이 수수작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목적은 먼저 바르게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른 목적이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심정(사랑)을 기반으로 한 창조목적을 말한다. 인식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포나 조직의 원의식(原意識)에서 형성된 원영상(原映像)과 형식상(形式像)이 말초신경을 통하여 하위중추(下位中樞)의 잠재의식에 이르러 통합되어서 그곳에 머물러 있게된다. 이것이 인간이 선천적(先天的)으로 가지고 있는 원형(先天的原型)이다. 그 중에서 형식상이 인식 또는 사고에 일정한 규정을 부여하는 사유형식(思惟形式; 사고형식(思考形式)이 되게 된다.

 

다음은 하위중추(下位中樞)의 잠재의식이 일정한 형식상(形式像)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겠다. 예컨대 맹장염에 걸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원의식을 통합하고 있는 하위중추(下位中樞)에서는 맹장의 고유한 성상과 형상(기능과 구조)에 관한 정보가 수시로 전달되고 있다. 따라서 맹장염에 걸리면 하위중추(下位中樞)는 곧 그 이상(異常)을 안다. 그리고 그 맹장이 본래의 상태를 회복하도록 적절한 지시(指示)를 보낸다.

 

또 위(胃)의 운동이 지나치게 강하게 되면 위경련이 되는 경우가 있고, 너무 약해지면 위하수(胃下垂)가 되는 수가 있는데, 그와 같은 위(胃)의 운동의 강약에 관한 정보도 하위중추(下位中樞)는 알고 있다. 그래서 위(胃)의 운동이 지나치게 강해지거나 약해지면 이것을 적당히 조절한다. 하위중추(下位中樞)의 잠재의식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정보는 양성(陽性), 음성(陰性)에 관한 것이다.

 

세포는 핵(核)과 세포질로 되어 있는데, 핵이 세포질을 컨트롤한다. 핵과 세포질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다. 하위중추(下位中樞)의 잠재의식은 이와 같이 세포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의 정보도 가지고 있다.

 

잠재의식(潛在意識)은 또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 즉 체내(體內)의 어디엔가에 또 어느 일정한 시간에 염증이 있으면 적시에 그곳으로 백혈구를 보낸 후 염증을 고치려고 한다.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관계에 대해서도 잠재의식은 이것을 알고 있다. 예컨대, 적혈구는 어느 일정한 기간동안 생명을 유지하다가 파괴되고 새로운 적혈구가 生成된다. 이와 같이 체내(體內)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포가 생기고 낡은 세포가 소멸되는데, 잠재의식은 그것(有限性)을 알고 있다.

 

또 체내에서는 지속성, 영원성, 순환성을 유지하면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세포나 기관도 있다. 이것은 하위중추(下位中樞)가 그러한 세포(細胞)나 기관의 기능의 무한성을 알고 있는 증거이다. 이와 같이 하위중추(下位中樞)의 잠재의식은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 주체와 대상, 시간과 공간, 유한과 무한 등의 형식을 알고 있는 것이다. 잠재의식에 반영된 이들의 상대적관계의 상(像)이 형식상(形式像)인 바, 그 형식상(形式像)이 결국 대뇌의 피질중추에 보내어진 후 사고에 있어서의 사유형식(思惟形式)이 되는 것이다.

 

사유형식이 사고에서 하고 있는 역할을 축구시합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가 있다. 축구시합을 할 때 선수들은 자기 마음대로 뛰거나 차거나 하지만, 일정한 규칙을 지키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함부로 차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성은 자유로이 사고를 진행시키고 있으나, 형식상의 영향을 받은 사고는 일정한 형식을 취하면서, 즉 규칙을 지키면서 행하게 된다.

 

사유형식(思惟形式)은 범주(範疇)이다. 범주란 최고의 유개념(類槪念) 또는 가장 중요한 유개념을 말하는 것으로서, 통일사상에 있어서는 사위기대 및 수수작용의 원리를 기반으로 하여 범주가 세워진다. 사위기대(四位基臺)와 수수작용(授受作用)이 통일사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10가지의 기본적인 범주가 세워지게 되는데, 개개의 범주의 의미는 인식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지금까지 많은 사상가들이 여러 가지의 범주(範疇)를 세웠지만, 그중에는 통일사상의 범주와 관련된 것도 적지 않다. 예컨대 본질(本質)과 현상(現象)이라는 범주는 통일사상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에 해당한다.

 

그래서 통일사상의 범주(範疇)를 제1범주(第一範疇)와 제2범주(第二範疇)로 구분하고자 한다. 제1범주(第一範疇)는 통일사상의 특유한 10가지의 기본적인 형식이다. 제2범주(第二範疇)는 제1범주(第一範疇)를 기초로 하여 전개한 것으로서, 거기에는 종래 철학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도 포함된다. 제1범주(第一範疇)와 제2범주(第二範疇)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특히 제2범주(第二範疇)의 수(數)는 제한이 없는데 여기서는 그 일부만을 열거하겠다.

  

제1범주

제2범주

①존재와 힘

①질과 양

②성상과 형상

②내용과 형식

③양성과 음성

③본질과 현상

④주체와 대상

④원인과 결과

⑤위치와 정착

⑤전체와 개체

⑥불변과 변화

⑥추상과 구체

⑦작용과 결과

⑦실체와 속성

⑧시간과 공간

:

⑨수와 원칙

:

⑩유한과 무한

:

 

제1범주(第一範疇)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은 제2범주(第二範疇)의 본질(本質)과 현상(現象)이나 내용과 형식(形式)과 비슷한 데도 불구하고, 왜 이와 같이 일반화되지 않은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는가. 통일사상의 기본이 되고 있는 것은 사위기대, 정분합작용, 수수작용 등의 개념이다. 이것들을 빼면, 통일사상은 골격이 빠져버린 것과 같게 된다. 따라서 통일사상의 범주(範疇)로서는 이것들과 관련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범주와 사상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범주를 보면 사상을 알 수 있고, 사상을 보면 범주를 알게 된다. 범주는 사상의 간판(看板, 얼굴)이다. 통일사상은 새로운 사상이므로 거기에 알맞는 새로운 용어의 범주가 당연히 세워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에는 마르크스적인 범주가 있고, 칸트의 사상에는 칸트적인 범주가 있고, 헤겔사상에는 헤겔적인 범주가 있다. 마찬가지로 통일사상의 범주도 통일사상의 특징을 표시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이 제1범주(第一範疇)로서의 10가지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4) 사고(思考)의 기본법칙

 

형식논리학에 있어서 사고의 근본원리는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 배중률(排中律),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이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그보다 더욱 기본적인 법칙이 있다. 그것이 수수법(授受法)이다. 이 수수법(授受法)은 논리학(論理學)의 법칙일 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領域)의 법칙(法則)이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역사, 예술, 종교, 교육, 윤리, 도덕, 언론, 법률, 스포츠, 기업 그리고 모든 자연과학(自然科學)의 학문(學問)(물리학, 화학, 생리학, 천문학 등) 등 실로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법칙(法則)이다.

 

뿐만 아니라 전피조세계, 즉 전지상세계(宇宙)와 전영계(全靈界)를 지배해온 법칙(法則)이다. 그리고 논리학과 직접관계가 있는 인식론의 법칙이기도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수수법(授受法)이 왜 이와같이 광범위하게 작용하느냐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創造)의 법칙(法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근원은 하나님의 속성(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간에 작용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 자신의 속성간의 수수작용을 모방하여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피조세계(被造世界)에 있어서는 그것이 법칙(法則)이 된 것이다.

 

이것은 수수법(授受法)이 모든 다른 법칙까지도 지배하는 가장 기본적(基本的)인 법칙(法則)인 것을 의미한다. 물리적(物理的) 법칙(法則)이나 화학적(化學的) 법칙(法則)이나 천문학적(天文學的) 법칙(法則)도 그 기반이 되고 있는 것은 수수법(授受法)이다. 따라서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을 비롯해서 다른 논리학(論理學)의 법칙(法則)이나 형식(形式)도 실은 그 근거가 이 수수법(授受法)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논리학(論理學)에 있어서도 다른 영역(領域)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 수수법(授受法)은 사고(思考)의 기본법칙(基本法則)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 예로서 3단논법과 수수법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1) 삼단논법(三段論法)과 수수법(授受法)

 

삼단논법(三段論法)은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의 형식(形式)의 하나인 추리형식(推理形式)이다. 수수법(授受法)이 형식논리학의 형식이나 법칙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이 삼단논법을 실례로 들어서 밝히기로 한다.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여기에서 대전제(大前提)와 소전제(小前提)로부터 도출된 결론(結論)은, 목적을 중심으로 한 대전제(大前提)와 소전제(小前提)와의 수수작용(對比)의 결과이다. 즉 여기에 인용(引用)된 삼단논법(三段論法)은 소크라테스의 생사(生死)에 관한 정보를 알고 싶다는 목적이 삼단논법(三段論法)의 배후에 잠재하고 있다.

 

그리고 대전제(大前提)와 소전제(小前提)를 대치시킨 것은, 사람은 죽는다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의 두 명제(命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그림 10-14, 10-15). 마치 미터(meter)와 피트(feet)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을 예를들면, ⓐ 1m는 3.28ft이다. ⓑ 이 책의 세로의 길이는 1ft이다. ⓒ 그러므로, 이 책의 세로의 길이는 0.328meter이다.

 

이 경우의 결론 ⓒ는 ⓐ명제(命題)(의 數字)와 ⓑ명제(命題)(의 數字)를 대비(수수작용(授受作用))하여 얻은 결과(合性體, 數字)이다. 마찬가지로 처음의 삼단논법(三段論法)의 결론도 대전제와 소전제를 대비해서 얻어진 수수작용의 결과이다. 다음은 형식논리학의 법칙중의 하나인 동일률(同一律)과 수수법(授受法)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동일률(同一律)과 수수법(授受法)

 

동일률(同一律)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A는 A이다에서 이 꽃은 장미꽃이다라고 하는 명제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명제(命題)는 이 꽃과 장미꽃을 마음속에서 비교해 보고, 두 꽃이 일치하였으므로 ~은 …… 이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비교한다는 것은 대비형(對比型)의 수수작용을 뜻한다. 따라서 동일률(同一律)도 수수법(授受法)을 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순율(矛盾律)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으로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의 형식(形式)이나 법칙(法則)은 모두 수수법(授受法)의 기반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 명백해 졌으리라 생각한다.

 

   3) 사고(思考)와 자유

 

여기에서 사고와 자유에 대하여 한마디 하고자 한다. 논리학은 사고(思考)의 형식(形式)이나 법칙(法則)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것까지 일일이 법칙(法則)이나 형식(形式)의 간섭(干涉)을 받아야만 하는가?, 법칙(法則)이나 형식(形式)과 같은 까다로운 룰(rule)에 지배받고 싶지 않다,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생각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고(思考)에 규칙(規則)이나 형식(形式)이 있음은, 사실은 사고에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다. 법칙(法則)이나 형식(形式)없이 사고는 한걸음도 전진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철도가 없으면 기차가 조금도 전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의 몸이나 마음은 모두 법칙(法則)에 따라 살 때 비로소 그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維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몸을 볼 때, 몸의 모든 생리작용(生理作用)은 법칙(法則)의 지배를 받고 있다. 호흡도, 소화작용도, 혈액순환(血液循環)도, 신경의 전달작용(傳達作用)도 모두가 일정한 생리(生理)의 법칙(法則)下에서 영위되고 있다. 만일 이들의 생리작용(生理作用)이 법칙(法則)을 이탈하면 즉시 병에 걸린다. 이것은 인간의 사고작용(思考作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A는 A이다라고 하는 동일률에서 ~은 …… 이다의 논리어(論理語)를 사용하지 않고, 예컨대 이 꽃은 장미꽃이다라고 하지 않고 이 꽃, 장미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형식(形式)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전칭긍정판단(全稱肯定判斷)이라는 판단형식(모든 S는 P이다)에 있어서 모든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판단을 예로 들어보자. 이 경우, 모든 ~은 …… 이다라는 형식(形式)을 제거하면 단지 인간, 동물만이 남게 되어 역시 무슨 의미인지 전연 알 수 없다. 타인(他人)이 알 수 없음은 물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자신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사고(思考)에는 반드시 일정한 법칙(法則)과 형식(形式)이 필요하다. 그러면 순수하고도 자유로운 사고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즉 법칙(法則)이나 형식(形式)을 떠난 자유는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역시 사고(思考)에 자유가 있다. 그것은 사고(思考)의 선택의 자유이다. 법칙이나 형식을 따르면서도, 즉 그 법칙이나 형식을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선택(選擇)의 자유가 있다. 가령 사랑의 실현에 관한 사고를 예로 든다면, 사랑의 실현이라는 공통목적 공통방향을 지향하면서도, 그 구체적(具體的) 실현(實現)에 있어서는 개인에 따라서 개별적(個別的)인 목적이나 방향(方向)이 서로 다른 것을 본다. 이것은 선택의 자유 때문이다. 즉 선택의 자유에 의해서 각자가 필요한 목적이나 방향(方向)을 자유로이 결정하는 것이다.

 

목적이나 방향(方向)에 관한 선택의 자유의 경우, 자유로운 사고가 어떻게 해서 행하여지는가 하면, 사고(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에 있어서 영적통각(靈的統覺)이 내적형상(內的形狀)內의 관념(觀念) 또는 개념(槪念)의 복합(複合)이나 연합(聯合)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서, 바로 구상(構想)의 자유이다. 이 구상(사고)의 자유는 이성의 자유성(自由性)에 기인하는 것이다.

 

            三.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에서 본 종래의 논리학(論理學)

 

  (1) 형식논리학(形式論理學)

 

형식논리학 그 자체에 대해서 통일논리학은 반대하지 않는다. 즉 형식논리학이 다루고 있는 사고의 법칙이나 형식에 관한 이론은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에는 형식의 측면 뿐 아니라 내용의 측면도 있다. 또 사고(思考)에는 이유(理由)나 목적이나 방향성이 있고 다른 분야와의 관련성도 있다. 즉 사고(思考)는 사고(思考)를 위한 사고가 아니고 인식이나 실천(주관)을 위한 사고이며, 창조목적 실현을 위한 사고이다. 즉 사고의 법칙이나 형식은 사고가 성립하고 유지되는데 필요한 조건에 불과한 것이다.

 

  (2) 헤겔논리학(論理學)

 

헤겔논리학은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우주를 창조하셨는가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헤겔은 하나님을 로고스 또는 개념(槪念)으로서 이해하고, 이 개념이 우주창조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였다.

 

헤겔은 먼저 개념의 세계에 있어서의 有-無-成의 전개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有 그대로는 발전이 없으므로 有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無를 생각했다. 그리고 有와 無의 대립의 통일로서 成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 헤겔에 있어서 본래 無는, 有의 해석 즉 有의 의미(意味)에 지나지 않으며, 有와 無가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13) 그런데 헤겔은 有와 無를 구별하여 마치 有와 無가 대립하고 있는 것같이 설명했다. 따라서 헤겔철학은 출발점에서부터 벌써 오류(誤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개념(槪念)이 자기발전한다는 점이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원상구조(原相構造)에 있어서의 개념은 내적형상에 속하고,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내적성상인 지정의(知情意)의 기능_특히 知의 기능중의 이성_이 내적형상에 작용함으로써 로고스(구상(構想))가 형성되어, 그것이 새로운 개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로고스나 개념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결과, 신생체(新生體))이지, 그 자체가 자기발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튜빙겐대학 총장 류메린은 헤겔이 주장하는 개념(槪念)의 자기발전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헤겔의 사변적방법(思辨的方法)이 소위 그 창시자 헤겔에 있어서 도대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얼마나 고민했으며, 머리를 괴롭혔는가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주위를 돌아보고 머리를 흔들면서 이렇게 물을 것이다. 도대체 너는 알겠는가.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개념(槪念)은 너의 머리속에서 홀로 움직이는가라고.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사변적인 두뇌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과 별개인 우리들은 유한(有限)한 오성적(悟性的) 카테고리에 있어서의 사고의 단계에 서 있는 데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왜 이 방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았는가 라는 이유를 우리들 자신의 재능의 우둔함에서 찾음으로써, 감히 방법 그 자체의 불명석(不明晳)이나 결여(缺陷)에 있다고 생각할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14)

 

또 헤겔변증법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도 제기된다. 헤겔은 자연을 이념의 자기소외(自己疎外) 또는 이념의 타재형식(他在形式)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원상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범신론(汎神論)-자연을 神 자신의 출현으로 보고 양자에 구별을 두지 않는 견해-에 이를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쉽게 유물론(唯物論)으로 전환될 수 있는 소지(素地)가 되는 것이다. 헤겔변증법에 있어서의 자연은 인간이 발생하기까지의 중간적 과정에 불과하였다. 건물이 완성된 뒤에는, 중간에 세워졌던 발판들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발생한 이후의 자연은 헤겔철학에 있어서 자연 그 자체로는 철학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는 또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인간은 이성의 궤계(詭計)에 조종을 받고 있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인간은 마치 절대정신에 의해 조종받는 인형(人形)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하나님이 일방적(一方的)으로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책임분담과 하나님의 책임분담이 합해짐으로써 역사가 꾸며져온 것이다.

 

또 헤겔의 正-反-合의 변증법은 원환성(圓環性)이며, 귀환성(歸還性)이어서 최종적으로는 완결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하여 헤겔에 있어서 프러시아는 역사의 마지막 완결점(完結點)으로서 나타나는 이성국가(理性國家)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프러시아는 이성국가(國家)가 되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하여 프러시아의 종말과 더불어 헤겔철학도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헤겔철학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는데, 그와같은 잘못을 일으킨 원인은 그의 논리학에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다음에 검토해 보고자 한다. 헤겔은 개념(槪念)의 발전을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적발전으로 파악했다. 개념(槪念, 理念)은 자기를 소외시켜서 자연이 되고, 그 후 인간을 통하여 정신(精神)이 되어서 본래의 자신을 회복한다고 말한다. 한스 라이제강크에 의하면, 이와 같은 헤겔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은 그의 성서연구(聖書硏究)에서 연유된 특유한 방식이라고 했다. 즉 높은 총합(總合)속에 지양되는 헤겔의 대립(對立)의 철학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 者는 죽어도 산다라는 요한복음의 성구(聖句)를 테마로 한 것이라고 한다.15) p.649

 

이러한 입장에서 헤겔은 하나님을 로고스 또는 개념(槪念)으로 파악하였으며, 그러한 하나님이 마치 땅에 뿌려진 씨앗의 생명이 외부(外部)로 자신을 나타내듯이, 자기를 외부(外部)의 세계로 소외시켰다고 보았다. 여기에 헤겔이 범한 오류의 근본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하나님은 심정(心情, 사랑)의 하나님이며, 사랑을 통하여 기뻐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에 의해서 창조목적을 세워놓고, 로고스로써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이 때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마음속에 형성된 창조의 구상일 뿐, 하나님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헤겔의 개념변증법에 있어서, 그의 하나님에서는 심정(心情)(사랑)이나 창조목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그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 아니라 發芽하여 성장하는 일종의 생명체(生命體)였던 것이다.

 

여기서 헤겔논리학과 통일논리학의 주요개념들을 비교해 보면 그 뜻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상응(相應)하는 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 헤겔에 있어서의 로고스는 통일사상에서는 하나님의 구상에 해당된다. 헤겔의 로고스의 변증법이 통일사상에서는 원상(原相)의 수수작용에 해당(該當)한다. 그리고 헤겔의 정반합(正反合)의 형식은 통일사상의 정분합(正分合)의 형식에 대응한다. 헤겔의 귀환적, 완결적인 변증법이 통일사상에서는, 자연계에 있어서 창조목적을 중심으로한 수수작용에 의한 나선형의 발전운동에 해당하며, 역사에 있어서는 재창조와 복귀의 법칙에 해당된다. 헤겔은 자연을 통하여 이념을 찾으려고 했으나, 통일사상은 만물을 통하여 상징적(象徵的)으로 원상(신상과 신성(神性))을 발견한다. 따라서 헤겔의 범신론적(汎神論的)인 성격은 통일사상에 있어서 범신상론(汎神相論)-모든 피조물속에 신상이 나타나 있다는 견해-을 가지고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3) 마르크스주의(主義) 논리학(論理學) p.650

 

전술한 바와 같이 구(舊)소련의 사상계에서 야기된 언어학논쟁을 수습하기 위해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言語學)의 제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同 논문에서 스탈린은 언어는 상부구조(上部構造)에 속하지 않고 계급적인 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형식논리학의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이 드디어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형식논리학의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은 사고의 법칙일 뿐, 객관세계의 발전법칙은 아니었다. 따라서 사고가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을 따른다는 것은 인정하더라도 객관세계에 관한 한, 발전이 모순의 법칙(대립물(對立物)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을 따른다는 논리가 여전히 성립(成立)된다. 왜냐하면 형식논리학은 자연계를 다루지 않고 사고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보니, 사고는 객관세계의 반영(反映)이라는 유물변증법의 본래의 주장은 무너지고 만다고 하는 아포리아(a poria)가 발생하게 된다.16) 즉 스탈린의 논문(論文)이 발표된 뒤 유물변증법에 있어서는, 객관세계의 법칙(모순(矛盾)의 법칙)과 사고(思考)의 법칙(同一律)이 상반(相反)되고 말았는데, 이에 대하여 객관세계에 있어서나 사고에 있어서 발전성(發展性); 변화성(變化性)과 불변성(不變性)은 통일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통일사상의 주장이다.

 

오성적(悟性的)단계의 사고(또는 인식)는 주로 자기동일적이다. 왜냐하면 외계에서 들어온 감성적(感性的)내용과 내부의 원형이 조합(照合)함으로써 인식은 일단 완료(完了)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성적(理性的)단계에 있어서의 사고는 발전적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사고는 단계적으로 발전하므로 각각의 단계에서 완결적인(즉 자기동일적인) 측면을 또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통일사상은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도 당연히 인정하는 입장이다.

 

아무튼 유물변증법에 있어서 형식논리학 즉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본래 유물변증법의 기본적인 주장은 사물을 부단히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으로만 보고 있다가 나중에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비록 사고에 관한 것이기는 하나, 불변성(不變性)을 긍정한 것이 되어서 유물변증법의 변질(變質)을 가져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법의 수정(修正) 내지 붕괴(崩壞)를 의미한다. 동시에 사물을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과 발전성의 통일로서 파악하는 통일사상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4)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

 

사고의 정확성(正確性) 또는 엄밀성을 기한다는 것은 의의(意義)있는 일로서,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에 반대할 이유는 전연 없다. 그러나 수학적 엄밀성만으로는 인간의 사고를 충분히 파악할 수가 없다. 원상(原相)에 있어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수수작용을 하면 로고스가 형성(形成)되는데, 이 때 내적형상(內的形狀)은 원칙과 수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수수작용을 통해서 형성된 로고스도 수리성(數理性)을 띠게 되며, 따라서 로고스에 의해 창조된 만물에는 수리성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로고스를 기준으로 한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에도 당연히 수리성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고는 수리적 정확성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에 기호논리학(記號論理學)이 사고를 수리적으로 연구하는 의의(意義)가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유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과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심정(心情)이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로고스(말씀)의 형성에 있어서 심정이 이성이나 수리보다 상위(上位)에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본래 로고스的 존재(存在)(이성적(理性的), 법칙적(法則的) 존재(存在))일 뿐만 아니라 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파토스的 존재(存在)(심정적, 감정적존재)이다. 즉 사고에 비록 수학적 엄밀성이 없다 하더라도 거기에 사랑 또는 감정이 담겨 있기만 한다면, 발언자의 의향(意向)이 충분히 상대방에게 전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화재를 보고 불이다!라고 외칠 때, 이것은 문법적으로 보면 이것이 불이다라는 의미인지, 지금 화재가 났다라는 의미인지 모른다. 그러나 절박한 경우에 긴급히 도움을 구하는 호소의 감정이 거기에 담겨져 있다면, 그 말에 문법적(文法的)인 정확성이 없더라도 그 의미는 곧 알게 된다.

 

인간은 본래 로고스와 파토스의 통일체(統一體)이다. 로고스만을 따른다면 인간으로서는 반쪽의 가치밖에 없다. 이성적(理性的)인 것만으로는 인간성이 부족하며, 정적(情的)인 측면을 함께 갖춤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인간다움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부정확(不正確)한 언어가 오히려 인간다운 경우도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사고에는 엄밀을 요하는 면도 있으나 반드시 언제나 정확히, 논리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은 세워질 수 없는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성경)을 보더라도 비논리적인 면이 많이 있음을 본다. 그런데 그 말씀이 왜 위대한가. 그것은 그 말씀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가 정확하게 논리에 맞지 않더라도, 그 속에 파토스적인 요소가 적절히 포함되어 있다면, 그 뜻하는 바는 충분히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5) 선험적논리학(先驗的論理學)

 

칸트는 대상으로부터의 감성적(感性的)내용과 인간 오성(悟性)의 선천적인 사유형식이 결합되어 인식의 대상이 구성됨으로써 비로소 인식과 사고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인식의 대상에는 내용(감성적(感性的)내용) 뿐만 아니라 형식(존재형식(存在形式))도 있고, 인식의 주체에도 형식(사유형식(思惟形式)) 뿐만 아니라 내용(내용像)도 있다. 칸트가 말하는 선천적인 형식과 감성적인 내용만으로는 대상에 대한 사고의 진리성(眞理性)이 보증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상에서는 인간과 만물의 필연적 관계에서 사고의 법칙 혹은 형식과 객관세계의 법칙 혹은 형식의 대응성(對應性)이 도출되고, 대상에 대한 사고의 진리성이 보증되는 것이다.

 

  (6) 통일논리학(統一論理學)과 종래의 논리학(論理學)의 비교(比較)

 

마지막으로 통일논리학, 형식논리학, 변증법적논리학, 선험적논리학을 비교하여 그 특징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그림 10-16).

 

   

 

            제11장 방법론 (第11章 方法論)

 

Methodology

p.655

방법론(methodology)이란 인간이 어떻게 해야 객관적(客觀的)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논(論)하는 부문으로서, 방법을 의미하는 영어의 method는 그리이스어(希臘語)의 meta(따라서)와 hodos(길)에서 유래된 말이다. 따라서 method(方法)란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정(一定)한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古代) 그리스시대(時代) 이래 오늘날까지 많은 철학자들은 각각 특유한 방법론을 전개해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해 왔다. 여기서는 우선 종래의 대표적인 방법론의 요점을 소개하고, 다음에 통일사상에 의한 방법론 즉 통일방법론을 제시(提示)한 다음, 종래의 방법론을 통일방법론의 입장에서 논평하고자 한다. 여기서 한가지 첨가하고자 하는 것은, 인식론이나 논리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종래의 방법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혹은 학술적으로 소개코자 함이 아니요, 단지 종래의 방법론들이 지녔던 문제점들에 대하여, 통일방법론이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그 요점만을 소개하려 한다는 것이다.

 

                        一. 사적고찰(史的考察)

 

 1. 헤라클레이토스의 변증법운동(辨證法運動法)

 

헤겔에 의해서 변증법(辨證法)의 창시자라고 불려진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5?~475 B. C.)는, 우주의 근원적(根源的)인 물질(아르케)을 불(火)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항상 변화(變化)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한 만물(萬物, 자연)은 유전(流轉)한다고 함으로써 고정(固定)되고 부동(不動)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생성(生成)과 운동(運動)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싸움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만물의 王이다라는 관점에서, 만물은 대립(對立)과 투쟁에 의해서 생성(生成) 변화(變化)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을 생성(生成), 변화(變化), 유전(流轉)의 측면을 다루었다는 점에 대해서, 헤겔은 그의 방법론을 변증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生成) 변화(變化)속에서도 만물에게는 불변한 것이 있다고 했으며, 그것이 곧 법칙으로서 그는 이것을 로고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만물은 투쟁을 통하여 조화(調和)가 생긴다고도 말했다.

 

이와 같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방법론은 자연의 본연의 존재방식과 자연의 발전에 관한 견해, 즉 사물의 동적(動的)인 측면을 다룬 방법론이기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의 변증법(方法論)을 운동법(運動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 제논의 변증법(辨證法, 靜止法)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과는 반대로 엘레아학파(學派)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40?~480 B. C.)는, 존재는 불생불명(不生不滅)이며, 불변부동(不變不動)이라고 하였다.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엘레아의 제논(Zenon, 490~430 B. C.)은 운동을 否定하고, 단지 정지(靜止)하고 있는 존재만이 있다는 것을 논증(論證)하려고 하였다.

 

물체(物體)는 움직이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論한 네 가지의 증명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킬레스는 거북을 뒤좇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킬레스는 트로이전쟁(戰爭)에서 공로(功勞)를 세운 영웅으로서 대단히 빠른 발을 가지고 있으나, 결코 거북을 앞지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북이가 먼저 출발하여 일정(一定)한 지점에까지 나아간 후, 아킬레스가 그 뒤를 좇아갔다고 하자. 아킬레스가 거북이 있던 곳에 닿았을 때 거북은 이미 조금 앞으로 가있게 된다. 또 아킬레스가 다시 거기에 당도했을 때 거북은 또 조금 전진(前進)해 있게 된다. 따라서 항상 거북은 아킬레스보다 앞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증명(證明)은 날고 있는 화살은 정지(靜止)하고 있다고 하는 비시정지론(飛矢靜止論)이다. A지점에서 C지점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이 있다고 하자. 이 때 화살은 A와 C사이에 있는 무수한 B지점을 통과하게 되는데, B₁, B₂, B₃......... 지점을 통과한다는 것은, 그 점에서 잠깐 정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A와 C간의 거리는 무수한 점의 연속이므로, 난다는 것은 정지의 연속(連續) 즉 정지의 영속(永續)이 된다. 따라서 화살은 운동하지 않고 정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논의 방법(方法)은, 상대방의 주장을 인정할 때 그 주장에 어떠한 모순(矛盾)이 생기는가를 문답식으로 따짐으로써, 상대방의 주장의 오류를 폭로해 가는 대화술(對話術)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변증법(辨證法)의 창시자라고 불렀다.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