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강론

총 서

인간은 누구나 불행을 물리치고 행복을 찾아 이루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개인의 사소한 일로부터 역사를 좌우하는 큰 일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결국 하나같이 보다 행복해지려는 삶의 표현인 것이다. 1

그러면 행복은 어떻게 해서 오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자기의 욕망이 이루어질 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욕망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그 본의(本意)를 흐려서 생각하기 쉽다. 그것은 그 욕망이 선(善)보다도 악(惡)으로 나아가기 쉬운 생활환경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不意)를 맺는 욕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본심(本心)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심은 이러한 욕망이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악을 지향하는 욕망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하는 욕망을 따라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찾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어두움을 헤치고 생명의 빛을 찾아 고달픈 길을 더듬고 있는 인생이다. 불의의 욕망을 따라가서 본심이 기뻐하는 행복을 누려본 사람이 어디에 있었던가? 인간은 누구나 그러한 욕망을 채울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고민하게 된다. 자식에게 악을 가르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제자에게 옳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어디 있을 것인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심의 발로이다.

특히 이러한 본심(本心)이 지향하는 욕망을 따라 선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바로 도인(道人)들의 생활 있지만, 유사이래 그 본심대로만 살다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로마서 3장 10 - 11절)라고 하였으며, 또 인간의 이러한 참경(慘境)에 직면하였던 바울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 7장 22 - 24절)라고 개탄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선한 욕망을 성취하려는 본심의 지향성과 이것과는 반대로 악의 욕망을 달성하려는 사심(邪心)의 지향성이, 동일한 개체 속에서 각기 서로 다른 목적을 앞세우고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간의 모순성(矛盾性)을 발견하게 되었다. 2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안에 모순성을 갖게 될때에는 파멸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모순성을 가지게 된 인간 자체는 바로 파멸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모순성은 당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존재도 모순성을 내포하고서 생성(生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러한 모순성을 지닌 운명적인 존재였다면, 애당초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모순성은 후천적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파멸상태를 일컬어 기독교에서는 타락(墮落)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인간이 타락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누구도 이것을 반박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타락되어 자기 파멸에 이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악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물리치고 본심으로부터 일어나는 선의 욕망을 따라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의 모순성을 제거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궁극(窮極)에 있어서 선과 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을 두고 볼 때 그 중의 어느 하나가 선이라고 하면 다른 하나는 악이 도리 것인데, 우리는 아직까지 이에 대한 절대적인 정설(定說)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구나 인간들은 선의 욕망을 일으키는 본심이 무엇이고 이 본심을 거슬러 악의 욕망을 일으키는 악한 마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모순성을 갖게 하여 파멸을 초래케 한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 등의 문제에 대하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악의 욕망을 물리치고 선의 욕망을 따라 본심이 지향하는 선의 생활을 하기 위하려는 이 무지(無知)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선악(善惡)을 판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타락을 지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이 무지에 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과 몸의 내외(內外) 양면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적인 면에 있어서도 내 외 양면의 지(知)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무지에도 내적인 무지와 외적인 무지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 내적인 무지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영적인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으며, 생(生)의 목적은 무엇이며, 사후(死後)에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내세(來世)와 하나님에 대한 존재 여부, 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선과 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무지란 인간의 육신을 비롯한 자연계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모든 물질 세계의 근본은 무엇이며 그 모든 현상은 각각 어떠한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가 하는 것 등에 대한 무지인 것이다.

인간은 유사이래(有史以來) 오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무지(無知)에서 지(知)에 도달하기 위하여 진리를 찾아 나왔다. 그리하여 내적인 무지에서 내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종교(宗敎)요, 외적인 무지에서 외적인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외적인 진리를 찾아 나온 것이 과학(科學)이다. 이와 같이 알고 보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로부터 양면의 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양면의 진리를 찾아 나온 방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무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가지고 본심의 욕망이 지향하는 선한 방향으로만 나아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하려는, 종교와 과학이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 내 외 양면의 진리가 상통하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의 실제에 있어서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을 두 가지로 대별(大別)햐여 본다면, 첫째는 물질로 된 이 결과의 세계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길이다. 이러한 길을 지상(至上)으로 생각하고 걸어온 사람들은, 극도로 발달된 과학 앞에 굴복하여 과학의 만능과 물질적인 행복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이러한 육신을 중심한 외적인 조건만으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과학의 발달이 아무리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루고 그 속에서 아무리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린다 한들 그것으로써 어찌 속 사람의 정신적인 욕구까지 근본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육신의 낙(樂)을 즐기는 속인(俗人)의 기쁨은 청빈(淸貧)을 즐기는 도인(道人)의 기쁨에 미칠 수 없으리라.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 없는 구도(求道)의 행각을 즐긴 것은 비단 석가뿐이 아닐 것이다. 사람에 있어서 마음이 있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이, 기쁨에 있어서도 마음의 기쁨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몸의 기쁨도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이다. 육신의 낙을 찾아 과학의 돛을 달고 물질세계를 항해하는 사공이 있는가? 그가 이상(理想) 하는 그 언덕에 닿아 보라. 그 곳이 바로 육신을 묻어야 할 뫼인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면 이제 과학(科學)의 갈 곳은 어디일 것인가? 지금까지의 과학의 연구 대상은 내적인 원인의 세계가 아니고 외적인 결과의 세계였으며, 본질(本質)의 세계가 아니고 현상(現象)의 세계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그의 대상은 외적이며 또한 결과적인 현상의 세계에서, 내적이며 또한 원인 적인 본질의 세계에로 그 차원을 높이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오고 있다. 그리하여 그 원인적인 심령세계(心靈世界)에 대한 논리 즉 내적 진리가 없이는, 결과적인 실체세계(實體世界)에 대한 과학 즉 외적 진리도 그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결론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제 과학의 돛을 달고 외적인 진리의 항해를 마친 사공이, 또 하나의 종교의 돛을 달고 내적인 진리의 항로에로 들어오게 될 때, 비로소 그는 본심이 지향하는 이상향(理想鄕)에로 항행(航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이 밟아 온 과정의 그 둘째는 결과적인 현상세계(現象世界)를 초월하여 원인적인 본질세계(本質世界)에서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을 밟아 온 이제까지의 철학이나 종교가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반면에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정신적인 짐을 지워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역사상에 왔다 간 모든 철인(哲人)들과 성현(聖賢)들은 인생의 갈 길을 열어 주려고 각각 그 시대에 있어서 선구적인 개척의 길로 나섰던 것이었으나, 그들이 해 놓은 일들은 모두 오늘의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다.

이제 다시 냉철히 생각해 보자. 어느 철인이 우리의 고민을 풀어 주었으며, 어느 성현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여 우리의 갈 길을 뚜렷이 보여 주었던가? 그들이 제시한 주의(主義)와 사상(思想)이란 것은 도리어 우리들이 해결하고 가야 할 잡다한 회의(懷疑)와 수많은 과제들을 제기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 시대의 많은 심령(心靈)들에게 비쳐 주던 소생(蘇生)의 빛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어느덧 꺼져버리고, 이제는 타다 남은 희미한 불똥만이 그들이 잔해를 드러내고 있다.

온 인류의 구원(救援)을 표방하고 2천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장하여, 오늘날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게 된 기독교(基督敎)의 역사를 들추어 보라. 로마제국의 그 잔학무도(殘虐無道)한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힘찬 생명의 불길을 던져, 로마인들로 하여금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였던 기독정신(基督精神)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이윽고 중세 봉건사회(中世封建社會)는 기독교를 산 채로 매장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무덤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절규하는 종교개혁(宗敎改革)의 봉화는 들렸었으나, 이 불길도 격동하는 어둠의 물결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에클레시아(ecclesia)의 사랑이 꺼지고 자본주의의 재욕(財慾)의 바람이 유럽의 기독사회를 휩쓸어, 기아(饑餓)에 허덕이는 수많은 서민들이 빈민굴에서 아우성을 칠 때, 그들에 대한 구원의 함성은 하늘이 아닌 땅으로부터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共産主義)다.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짖고 나선, 기독교가 그 구호만을 남긴 에클레시아의 잔해로 돌아갔을 때, 거기서 그렇게 무자비한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반기가 들렸던 사실은 있을 만하기도 하다.

이렇게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유물사상(唯物思想)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사회는 유물사상의 온상이 되었다. 공산주의는 이 온상에서 좋은 거름을 흡수하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저들의 실천을 능가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저들의 이론을 극복할 수 있는 진리를 제시하지 못한 기독교는 저들이 바로 자기의 품 속에서 싹트고 자라서 그 판도를 세계적으로 넓혀 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니, 이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뿐 아니라 온 인류가 한 부모의 후예(後裔)임을 교리로써 가르치고 또 그와 같이 믿고 있는 기독교 국가의 바로 그 국민들이, 다만 피부의 빛깔이 다름을 인하여 그 형제들과 자리를 같이할 수 없게 된 현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실천력을 잃어버리고 회칠한 무덤 같이 형식화해 버린 현하(現下) 기독교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비극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서는 끝날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사회악(社會惡)이 또 있다. 음란(淫亂)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교리는 이것을 죄 중의 가장 큰 죄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오늘의 기독교사회가 현세인 들이 몰려가는 이 윤락(淪落)의 길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눈물겨운 실정인가?

이와 같이 오늘의 기독교(基督敎)가 이러한 세대의 흐름 가운데서 혼돈 되고 분열되어, 패륜(悖倫)의 와중(渦中)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생명들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바로 종래의 기독교가 현대인류에 대한 구원섭리(救援攝理)에 있어서 얼마나 무능한 자리에 있는가 하는 사실을 뚜렷이 증명하는 것이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내적인 진리를 찾아 나오던 종교인(宗敎人)들이, 오늘에 이르러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본질세계(本質世界)에 현상세계(現象世界)와의 관계는 비유건대 마음과 몸과의 관계와 같아서, 원인 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그리고 주체적인 것과 대상 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마치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합해야만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본질과 현상의 두 세계가 완전히 합치되어야만 이상세계(理想世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마음과 몸이 그러하듯이, 본질세계를 떠난 현상세계가 있을 수 없고, 현상세계를 떠난 본질세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現實)을 떠난 내세(來世)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육신의 행복이 없이 심령적(心靈的)인 기쁨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宗敎)는 내세를 찾기 위하여 현실을 부정하기에 필사적이었으며, 심령적인 기쁨을 위하여 육신의 행복을 멸시하기에 몸부림쳐 왔다. 그러나 끊어버리려야 끊어버릴 수 없는 현실과, 떼어 버리려야 떼어 버릴 수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육신의 행복욕(幸福慾)은, 끈덕지게 도인(道人)들을 붙들어 오뇌(懊惱)의 골짜기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인들의 도(道)의 생활에도 이러한 모순성이 있는 바로 오늘의 종교인들의 생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자가당착(自家撞着)을 타개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 현대의 종교가 무위화(無爲化)한 주요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제 종교가 이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지성(知性)이 최고로 계발(啓發)된 나머지, 현대인은 모든 사물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종교의 교리에는 그런 과학적인 해명이 전적으로 결여(缺如)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진리가 서로 일치된 해명을 가지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종교(宗敎)의 궁극적인 목적은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앎이 없이는 생길 수 없다. 우리가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것도 결국은 진리를 알아서 믿음을 세우기 위함이요, 예수님이 오셔서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행하심도 그가 메시아 됨을 알려서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곧 인식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간은 논리적이며 실증적인 것 즉 과학적인 것이 아니면 인식할 수도 없게 되어 결국 종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적인 진리에도 논증적인 해명이 필요하게 되어, 종교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통하여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시대를 추구해 나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無知)를 타개하기 위한 사명을 각각 분담하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상충하여 서로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상(樣相)을 보여 왔으며, 인간이 그 양면의 무지를 완전히 극복하여 본심이 요구하는 선(善)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자면, 어느 때든지 과학을 찾아 나온 종교와 종교를 찾아 나온 과학의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주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9

새 진리(眞理)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 신도들에게는 못마땅하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서가 이미 그것만으로써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유일(唯一)하고 영원불변(永遠不變)하며 절대적(絶對的)이다. 그러나 경서란 진리 자체가 아니고 진리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교과서로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로 그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져 온 각 시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를 따라서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교과서 마저 절대시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그 본심(本心)의 지향성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아 선의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방편으로 나오게 된 것이 종교(宗敎)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목적은 동일한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분야와 그를 대하는 민족에 따라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위와 같은 이유로 그 경서를 서로 달리하게 되는 데서 필연적으로 각양각이(各樣各異)의 종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서란 진리의 빛을 밝혀 주는 등잔과 같아서 주위를 밝힌다는 사명은 같지만, 보다 밝은 등불이 나올 때는 그것으로써 낡은 등잔의 사명은 끝나는 것이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오늘의 어떠한 종교도 현대인(現世人) 들을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생명의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새 빛을 발하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실 것은 성서(聖書) 가운데에도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편 제3장 제5절 참조)

2. 새 진리의 필요성과 사명 10

그러면 그 새 진리(眞理)는 어떤한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인가? 이 진리는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 종교가 찾아 나온 내적인 진리와 과학이 찾아 나온 외적인 진리를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내 외 양면의 무지(無知)에서 내 외 양면의 지(知)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사심(邪心)이 지향하는 그 악의 길을 막고 본심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 선의 목적을 이루게 함으로써 선악(善惡) 양면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과 위에서 이미 논한 바 종교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도(道)의 생활의 모순성을 극복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타락인간에 있어 '앎'은 생명의 빛이요 또한 소생의 힘이 된다. 그리고 무지는 사망의 그늘이요 또한 파멸의 요소인 것이다. 무지에서는 어떠한 정서(情緖)도 일어날 수 없으며, 무지와 무정서(無情緖)에서는 어떠한 의지(意志)도 생길 수 없다.

이렇듯 인간에게 있어 지(知)- 정(情)- 의(意)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될 때에는, 거기에 인간다운 인간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實在性)에 대하여는 성서를 보아도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心情)에 대해 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자신을 반역하는 타락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유구(悠久)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구원(救援)하시려고 애써오신 애달픈 심정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11

선과 악의 두 면을 지향하는 인간들의 상충적인 생활로써 형성되어 온 인류 역사는 거의 싸움으로 엮어져 내려왔다. 그 싸움은 바로 재물 빼앗기 싸움, 땅 빼앗기 싸움, 그리고 사람 빼앗기 싸움 등의 외적인 싸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민족이 없이 한데 모여 한 국가를 이루고, 이제는 도리어 전승국가(戰勝國家)들이 식민지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열강(列强)들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여 유엔의 회원국가가 되게 함으로써, 함께 세계정부(世界政府)의 실현을 도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국제관계가 하나의 경제문제를 중심하고 완화되어, 더불어 하나의 공동시장체제를 형성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오늘날 문화면에서는, 각 민족의 전통적인 이질성(理質性)을 극복하고 동서양(東西洋)의 거리를 초월하여,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서로 유통(流通)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이 하나 남아 있으니 그릇이 바로 민주주의(民主主義)와 공산주의(共産主義)와의 내적인 이념(理念)의 싸움이다. 그들은 서로 무서운 무기를 마련하고 외적인 싸움을 겨루고 있으나, 그 실은 내적인 이념의 싸움의 판가리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최종적인 이념의 싸움에 누가 승리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주주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오늘의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를 굴복시킬 수 있는 아무런 이론도 실천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가 완전히 이루어지려면 바로 이 새 진리가 지금까지 민주주의세계에서 주창해 온 유심론(唯心論)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켜 유물론(唯物論)을 흡수함으로써, 온 인류를 새 세계에로 옮겨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진리는 역사 이래의 모든 주의나 사상은 물론, 모든 종교까지도 하나의 길로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12

인간이 종교를 믿지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實在)와 내세(來世)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적(靈的)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만 한다면 믿으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本性)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에다 인생의 궁극의 목적을 세우고 나아가는 그 누구도 마침내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역시 인간의 천성(天性)의 발로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적인 사실에 부딪쳐서 인생의 근본 목적을 현실세계에다 둘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다 두고 가야 할 것임을 깨달을 때에는, 누구나 이 한 길을 통하여 하나의 목적지에서 하나의 형제로서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온 인류가 하나의 진리(眞理)에 의하여 하나의 형제로서 하나의 목적지에서 만나게 된다면, 거기에서 이룩된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 것인가? 이 세계는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인생의 양면의 무지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쳐 온 인간들이, 그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진리의 빛 가운데서 함께 만나 가지고 하나의 대가족(大家族)을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진리의 목적이 선을 찾아 이루려는 데 있고, 선의 본체가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그 진리에 의하여 도달된 이 세계는 바로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서로 형제애(兄弟愛)에 얽혀 사는 세계인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웃을 희생시킬 때에 느껴지는 불의(不義)한 만족감보다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오는 고통의 도(度)가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는, 결코 그 이웃을 해칠 수 없게 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형제애가 솟구칠 때, 도저히 그 이웃에 고통을 끼치는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부모가 되시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그 사회의 인간에 있어 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가 인류 죄악 사를 청산한 새 역사의 시대에서 이루어 놓은 새 세계는,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13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성도(聖徒)들이 범죄를 하게 되었던 것은 실상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어디까지나 관념적이요, 실감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성(存在性)을 실감하는 자리에서 범죄한 인간은 부득이 지옥(地獄)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는 천법(天法)을 안다면, 거기에서 누가 감히 죄를 범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죄 없는 세계를 천국(天國)이라 할진대,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찾아 나온 이 세계야말로 바로 그 천국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천국은 지상의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지상천국(地上天國)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궁극적인 목적이 지상천국을 이루시려는 데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위에서, 인간이 타락(墮落)되었다는 사실과 이 타락은 인간이 생긴 이후에 되어진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거니와, 이제 하나님의 실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인간시조가 타락하기 이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이루려 하셨던 그 세계가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데 대한 답은 너무도 자명(自明)하다. 그에 관해서는 전편 제3장에서 논하겠거니와, 그 세계야말로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이루어진 지상천국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죄악세계(罪惡世界)를 이루어 무지에 떨어졌었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내 외 양면의 진리를 더듬어, 이 무지를 타개하면서 선(善)을 지향하여 분단히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세계인 지상천국을 되찾아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復歸)하여 나아가는 섭리역사(攝理歷史)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새 진리는 타락인간을 그 창조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복귀과정(復歸過程)에 있는 타락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야 된다. 15

그리고 인간은 과연 성서(聖書)가 말하는 문자 그대로, 선악과(善惡果)라는 과실을 따먹고 타락(墮落)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타락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또 완전완미(完全完美) 하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타락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을 창조(創造)하셨고 ,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타락되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왜 그 창조의 권능을 가지고 일시에 죄악인간을 구원(救援)하지 못하시는가 하는 것 등, 실로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혀 온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 15

우리가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비장(秘藏)되어 있는 과학성을 살펴볼 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야말로 과학의 근본이기도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의 역사임이 사실일진데, 그와 같이 모든 법도(法度)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처럼 오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기간을 두시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질서하게 이 역사를 섭리해 나오셨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악역사가 어떻게 출발하여, 어떠한 공식적인 섭리의 과정을 거쳐서 어떠한 모양으로 종결되어, 어떠한 세계에로 들어갈 것인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긴절(緊切)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이러한 근본문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명백하게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명확하게 풀려지게 될 때, 우리는 역사를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어떠한 주체, 곧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더욱 부인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역사적인 사실들이, 바로 타락인간(墮落人間)을 구원하여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새 진리는 오늘날 문화권(文化圈) 형성의 세계적인 사명을 띠고 있는 기독교의 많은 난해(難解)한 문제들을 명백히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지성인들은 누구나 단순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의 구주(求主)라는 정도의 지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뜻을 체득(體得)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신학계(神學界)에서는 많은 논쟁을 벌여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과의 창조 원리적인 관계를 밝혀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 않게 어려운 문제로 되어 있는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해명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救援)은 어찌하여 그 독생자(獨生子)로 하여금 십자가(十字架)에 달려 피를 흘리게 하셔서만 가능하였던가 하는 것도 응당 풀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인하여 분명히 구속(救贖)함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이래 어느 한 사람도 구주의 속죄(贖罪)가 필요없이 천국 갈 수 있는 죄없는 자녀를 낳아 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중생(重生)한 후에도 여전히 원죄를 그 자녀들에게 유전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닐 것인가?이러한 실증적인 사실로 보아, 십자가 대속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상 예수 이후 2천년 기독교 역사의 기간을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피로써 완전히 사죄(赦罪)함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신도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죄 없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를 이루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날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기독정신(基督精神)은 점점 쇠미(衰微)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일진대,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 온 바 십자가 대속(代贖)의 완전 속죄(贖罪)와, 그 결과적 사실의 불일치(不一致)에서 초래되는 모순은 무엇으로써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가 하는 등 우리를 궁지에 빠뜨리고 있는 난문제(難問題)들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대하고 있는 새 진리는 이에 대한 해답도 명백히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진리는 예수님이 왜 재림(再臨)하셔야 하며, 또 그의 재림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과, 그때에 타락인간의 부활(復活)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서 하늘 땅이 불에 소멸되어 없어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 등, 상징과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성서의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이미 예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비사(比辭)로써가 아니고 누구나 공통하게 알 수 있도록 밝히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요한복음 16장 25절). 이러한 진리(眞理)로써만 비유와 상징으로 되어 있는 성구(聖句)를 저마다 각양각이하게 해석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교파 분열의 필연성을 지양(止揚)하고, 그것들을 통일할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이 최종적인 진리는 어떠한 경서(經書)나 문헌에 의한 종합적인 연구의 결과로나, 혹은 어떠한 인간의 두뇌에서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성서(聖書)에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요한계시록 10장 11절)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啓示)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이 땅 위에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한 분을 보내셨으니, 그 분이 바로 문 선명 선생(文鮮明 先生)이시다. 이 분은 수십 성상(星霜)을 두고 역사이래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창망(蒼茫)한 그 무형세계(無形世界)를 헤매시면서 하늘만이 기억하시는 진리 탐구의 피어린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18

인간으로 걸어야 할 최대의 시련의 길을 다 걷지 않고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최종적인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원리를 아셨기에 선생은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영계(靈界)와 육계(肉桂)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樂園)의 수많은 성현(聖賢)들과 자유로이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교(靈交)하는 가운데서 모든 천륜(天倫)의 비밀을 밝혀내신 것이다.

여기에 발표된 말씀은 바로 그 진리(眞理)의 일부로서, 이것은 지금까지 그의 제자들이 듣고 본 범위의 것을 수록한 데 불과한 것이다. 때가 이르는 데로 더 깊은 진리의 부분이 계속 발표될 것으로 믿고 또 고대하는 바이다.

어둠길을 헤매던 수많은 생명들이 세계의 도처에서 이 새로운 진리의 빛을 받아 소생(蘇生)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 어서 속히 이 빛이 온 누리에 가득 차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purple32_next.gif창조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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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인생과 우주에 관한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하여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하여 석연(釋然)한 대답을 해 준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은 본래 인간이나 우주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하는 구체적인 구극(究極)의 원리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보다 더 근본된 선결문제(先決問題)가 남아 있다. 그것은 결과적인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원인적인 존재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과 우주에 관한 문제는 결국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으로 계시는가 하는 것을 모르고서는 풀리지 않는 것이다. 창조원리(創造原理)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광범하게 다루고 있다. 21

1 절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피조세계

. 하나님의 이성성상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피조세계(被造世界)를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로마서 1장 20절)고 기록하였다. 마치 모든 작품은 그 작자의 보이지 않는 성품의 실체적인 전개인 것 같이, 피조세계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그의 실체대상으로 전개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보아 그 작자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것 같이, 이 피조만물(被造萬物)을 보아서 하나님의 신성을 알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을 알기 위하여,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보편적으로 간직되어 있는 공통사실을 찾아 보기로 하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사이에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 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이에 대한 실례를 들어 보면, 모든 물질의 궁극적인 구성요소인 소립자(素粒子)들은 모두 양성 음성 또는 양성과 음성의 중화에 의한 중성(中性) 등을띠고 있는데, 이것들이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원자(原子)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자들도 양성 또는 음성을 띠게 되는데, 이것들의 이성성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물질의 분자(分子)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물질들이 또한 서로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식물 또는 동물에 흡수됨으로써 그것들의 영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식물은 각각 수술과 암술에 의하여 존속하고, 또 모든 동물은 각각 수컷과 암컷에 의하여 번식 생존한다. 인간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남성인 아담을 창조하시고는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창세기2장 18절) 그의 대상으로 여성인 해와를 창조하신 후에야 선하다고 하셨다(창세기 1장 31절).

그리고 전리(電離)된 양이온이나 음이온도 또한 각각 양자(陽子)와 전자(電子)의 결합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과 같이, 수술이나 암술 또는 수컷이나 암컷들도 역시 각각 그 자체 내에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있어서도 남성에는 여성성상(女性性相)이, 여성에는 남성성상(男性性相) 이 각각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삼라만상의 존재하는 모양이 표리(表裏), 내외(內外), 전후(前後), 좌우(左右), 상하(上下), 고저(高低), 강약(强弱), 억양(抑揚), 장단(長短), 광협(廣狹), 동서(東西), 남북(南北) 등과 같이 모두 상대적으로 되어 있는 것도 모든 피조물이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서로 존재하도록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에서 모든 존재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으로 인한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아가 우리는 모든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보다 근본된 또 하나의 이성성상의 상대적인 관계를 알아야 하겠다. 22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외형(外形)과 내성(內性)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 보이는 외형은 보이지 않는 그 내성을 닮아 난 것이다. 따라서 그 내성이 눈에는 보이지는 않으나 반드시 그 어떠한 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 난 그 외형이 눈에 보이는 그 어떠한 꼴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전자을 성상(性相)이라 하고 후자를 형상(形狀)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상과 형상은 동일한 존재의 상대적인 양면의 꼴을 말하는 것이어서, 형상은 제2의 성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틀어서 이성성상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예로서 인간을 들어 보기로 하자. 인간은 몸이란 외형과 마음이란 내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나타나 보이는 몸은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을 닮아 난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어떠한 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을 닮아 난 몸도 어떠한 꼴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관상(觀相)이나 수상(手相) 등 외모로써 보이지 않는 그의 마음과 운명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여기에 있다. 이에 마음을 성상(性相)이라 하고 몸을 형상(形狀)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마음과 몸은 동일한 인간의 상대적인 양면의 꼴을 말하는 것이어서, 몸은 제2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틀어서 이성성상(二性性相)이라고 한다. 이로써 우리는 모든 존재가 성상과 형상에 의한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성상과 형상은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무형(無形)의 내적인 성상이 원인이 되어 그것이 주체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의 형상은 유형(有形)의 외적인 결과가 되어 그의 대상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는 서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 종적인 것과 횡적인 것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다시 인간을 들어 보자. 마음과 몸은 각각 성상과 형상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몸은 마음을 닮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명령하는대로 동(動)하고 정(靜)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 목적을 지향하여 생(生)을 유지한다. 따라서 마음과 몸은 내(內) 외(外), 원인(原因)과 결과(結果), 주체(主體)와 대상(對象), 종(縱)과 횡(橫) 등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떠한 피조물(被造物)에도 그 차원은 서로 다르나, 무형의 성상 즉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같은 무형의 내적인 성상이 있어서 그것이 원인 또는주체가 되어 인간에 있어서의 몸과 같은 그의 형상적인 부분을 움직여서, 그 개성체(個性體)로 하여금 어떠한 목적을 가진 피조물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에게도 인간의 마음과 같은 것이 있어서 이것이 어떠한 목적을 지향하는 주체적인 원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육체는 그 개체의 목적을 위한 생(生)을 영위하게 된다. 식물에도 역시 그러한 성상적인 부분이 있어서, 그것이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 개체는 유기적인 기능을 유지하게 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이 서로 결합하게 되는 것은 그들 속에 각기 마음이 있기 때문인 것과 같이, 양이온과 음이온이 결합하여서 어떠한 물질을 형성하는 것도 이 두 이온들 속에 각각 그 분자(分子) 형성의 목적을 지향하는 어떠한 성상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陽子)를 중심하고 전자(電子)가 회전하여 원자(原子)를 형성하는 것도 역시 그것들 속에 각각 그 원자 형성의 목적을 지향하는 성상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오늘의 과학에 의하면,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는 모두 에너지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에너지가 소립자(素粒子)를 형성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그 에너지에도 그로 하여금 소립자 형성의 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성상적인 부분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와 같이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갖추고 있는 그 에너지를 존재케 함으로써 모든 존재계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한 존재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존재는 바로 모든 존재의 제1원인으로서, 그 모든 것들의 주체적인 성상과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계의 이러한 제1원인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주체적인 성상과 형상을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라고 한다. 25

우리는 이제 바울이 논증한 바와 같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공통적으로 간직되어 있는 사실들을 추궁(追窮)함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中和的 主體)로서 모든 존재계의 제1원인으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二性性相) 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므로 삼라만상의 제1원인 되신 존재인 하나님도 역시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존재해야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으로 보아서도 하나님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도 계시다는 것을 바로 알 수있는 것이다. 26

그러면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이성성상과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이성성상은 서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본래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은 각각 본양성과 본음성의 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양성과 본음성은 각각 본성상과 본형상의 속성(屬性)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성과 음성은 각각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양성과 음성은 내 외, 원인과 결과, 주체와 대상 또는 종과 횡 등의 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남성인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그의 대상으로서 여성인 해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창세기 2장 22절).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에 있어서의 양성과 음성은 각각 남성과 여성이라고 칭한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성된 피조세계(被造世界)는 마치 마음을 중심하고 완성한 인간 하나와 같아서,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움직이는 하나의 완전한 유기체(有機體)인 것이다. 따라서 이 유기체도 성상과 형상을 갖추어야 할 것이니 그의 성상적인 존재가 하나님이시요, 그 형상적인 존재가 피조세계인 것이다. 하나님이 피조세계의 중심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창세기 1장 27절) 하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男性格 主體)로만 계셨기 때문에, 형상적인 여성격 대상으로 피조세계를 창조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 7절에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성구는 바로 이러한 원리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아버지라 불러 그 격위(格位)를 표시하는 것이다.

상술(上述)한 내용을 요약하여 볼 때,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中和的 主體)인 동시에, 본성상적 남성(男性)과 본형상적 여성(女性)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계시며, 피조세계에 대하여는 성상적인 남성격 주체로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7

 

. 하나님과 피조세계와의 관계

위에서 논술한 바에 의하여, 피조물은 모두 무형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 실체로 분립된 하나님의 실체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이러한 실체대상을 우리는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적인실체대상이기 때문에 형상적 개성진리체라 하고,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은 상징적인 실체대상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상징적 개성진리체라고 한다.

개성진리체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 실체로 분립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하나님의 본성상적 남성을 닮은 양성(陽性)의 실체와 그의 본형상적 여성을 닮은 음성(陰性)의 실체로 분립된다.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이 분립된 개성진리체는 모두 하나님의 실체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각기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아서 그 자체 내에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을 갖추게 되며, 그에 따라서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을 함께 갖추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성성상(二性性相)을 중심하고 본 하나님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요약하면, 피조세계는 무형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창조원리에 의하여 상징적 또는 형상적인 실체로 분립된 개성진리체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실체대상이다. 즉 만물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상징적인 실체로 분립된 실체대상이요, 인간은 그것이 형상적인 실체로 분립된 실체대상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피조세계는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같아서 내 외, 원인과 결과, 주체와 대상, 종과 횡 등 이성성상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28

이제 우리는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입각하여 동양철학(東洋哲學)의 중심인 역학(易學)의 근본을 알아보기로 하자.

역학에서는 우주의 근본은 태극(太極, 無極)이며, 그 태극에서 음양(陰陽)이, 음양에서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오행(五行)이, 그리고 오행에서 만물이 생성되었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음양을 `도(道)'라 이르고(一陰一陽之謂道), 그 `도'는 곧 `말씀'(道也者言也)이라고 하였다. 이 내용을 종합하면 태극에서 음양 곧 말씀이 나왔고, 이 말씀에서 만물이 생성되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태극은 모든 존재의 제1원인으로서 음양의 통일적 핵심이며 그 중화적 주체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을 요한복음 1장1절 내지 3절에 기록된 바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이 말씀으로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한 그 내용과 대조해 보면, 음양의 중화적인 주체인 그 태극(太極)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이신 하나님을 표시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창조원리(創造原理)로 보더라도 말씀이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도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음양이 곧 `말씀'이라고 한 역학(易學)의 주장은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역학은 다만 음양을 중심하고 존재계를 관찰함으로써 그것들이 모두 성상과 형상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에, 태극이 음양의 중화적 주체인 것만을 밝혔을 뿐 그것이 본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에 의한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라는 것을 밝히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 태극이 인격적인 신(神)이시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역학에 의한 동양철학의 근본도 결국 창조원리에 의하여서만 해명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근래에 한의학이 점차 그권위를 더해 가게 되는 것도, 그것이 음양을 중심으로 한 창조원리적 근거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절 만유원력과 수수작용 및 사위기대

 

.만유원력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창조주(創造主)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는 절대자(絶對者)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러한 존재로 계시기 위한 근본적인 힘도 영원히 자존하는 절대적인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또 피조물이 존재하기 위한 모든 힘을 발생케 하는 힘의 근본이기도 하다. 이러한 힘의 근본된 힘을 우리는 만유원력(萬有原力)이라고 한다.

 

.수수작용

 

모든 존재를 이루고 있는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이 만유원력에 의해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잘 주고 잘 받으면, 여기에서 그 존재를 위한 모든 힘, 즉 생존과 번식과 작용 등을 위한 힘을 발생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힘을 발생케하는 작용을 수수작용(授受作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유원력과 수수작용의 힘은 각각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으로서의 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만유원력은 종적(縱的)인 힘이요, 수수작용의 힘은 횡적(橫的)인 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만유원력과 수수작용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피조물에 관한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 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그 자체 내에 영존(永存)하는 이성성상(二性性相)을 가지고 계셔서, 이것들이 만유원력에 의하여 상대기준을 이루어 영원한 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이 수수작용의 힘에 의하여 그 이성성상은 영원한 상대기대(相對基臺)를 조성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존재기대 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은 영존하시며, 또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기 위한 모든 힘을 발휘하시게 되는 것이다.

한편 피조물(被造物)에 있어서도,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이성성상(二性性相)이 만유원력에 의하여 상대기준을 이루어 가지고 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수수 작용의 힘에 의하여 그 2성(二性)은 상대기대(相對基臺)를 조성하여 그 개성체(個性體)의 존재기대(存在基臺)를 이룸으로써, 비로소 그 개성체는 하나님의 대상으로 서게 되며, 또 스스로가 존재하기 위한 모든 힘도 발휘하게 된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양자(陽子)와 전자(電子)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원자(原子)가 존재하게 되고, 그의 융합작용 등을 일으킨다. 그리고 양(陽) 음(陰) 두 이온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분자(分子)가 존재하게 되며, 또 화학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한편 양전(陽電)과 음전(陰電)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전기가 발생되며,모든 전기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식물에 있어서도 도관(導管)과 사관(篩管)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식물체의 기능이 유지되며, 그의 유기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암술과 수술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번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동물도 수컷과 암컷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그의 생(生)을 유지하며 또한 번식 한다. 그리고 동식물간에 있어서도 산소와 탄산가스의 교환, 벌과 꽃의 수수작용 등에 의하여 그들은 공존(共存)하고 있다.

천체(天體)를 보아도 태양과 혹성(惑星)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태양계(太陽系)가 존재하면서 우주형성을 위한 운행을 하고 있으며, 또 지구와 달도 서로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일정한 궤도를 유지하면서 공전(公轉)과 자전(自轉)의 운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동맥과 정맥, 호흡작용,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등의 수수작용으로써 그 생을 유지하고 있고, 그 개성체는 몸과 마음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존재하면서 그의 목적을 위한 활동을 한다.

그리고 가정에 있어서는 남편과 아내가, 사회에 있어서는 인간과 인간이, 그리고 국가에 있어서는 정부와 백성이, 더 나아가서 세계에 있어서는 국가와 국가가 서로 수수작용을 하면서 공존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바른 것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그 양심(良心)의 힘만은 뚜렷이 그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힘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으로서, 자기도 모르게 강력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악을 행할 때에는 즉각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만일 타락인간에게 이러한 양심의 작용이 없다면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양심작용(良心作用)의 힘은 어떻게 되어 생기는 것인가? 모든 힘이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서만 생기는 것이라면, 양심도 역시 독자적으로 그 작용의 힘을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양심도 어떠한 주체에 대한 대상으로 서서 그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양심의 주체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타락(墮落)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수수(授受)의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서로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사탄과 수수의 관계를 맺어 그와 일체를 이루게 된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한 수수의 관계를 맺어 일체를 이룬 오직 한 분의 독생자로 오셨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그와 완전한 수수의 관계를 맺어 일체를 이루게 되면 창조본성을 복귀하여 하나님과도 수수작용을 하게 됨으로써 그와 일체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타락인간의 중보(仲保)가 되는 동시에 길이 되고 진리가 되며 또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생명을 바쳐 사랑과 희생으로 모든 것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앞에 믿음을 돌려 드리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한복음 3장 16절).

기독교(基督敎)는 사랑과 희생에 의하여 예수님을 중심하고 인간 사이의 횡적인 수수의 회로를 회복함으로써,하나님과의 종적인 수수(授受)의 회로(廻路)를 복귀시키려고 하는 사랑의 종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은 모두 이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7장 2절)라고 말씀하셨고,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장 12절)고도 하셨으며, 또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태복음 10장 32절)라고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마태복음 10장 41절)라고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장 42절)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삼대상목적을 이룬 사위기대

 

1. 정분합작용

 

만유원력(萬有原力)으로 인하여 하나님 자체 안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수수작용의 힘은 번식작용을 일으키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이성성상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다. 이와 같이 분립된 주체와 대상이 다시 만유원력에 의하여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써 수수작용을 하면, 이것들은 다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여 하나님의 또 하나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정(正)으로 하여 그로부터 분립(分立)되었다가 다시 합성일체화하는 작용을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라고 한다.

 

2. 삼대상목적

 

이와 같이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정(正)을 중심하고 2성(二性)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와 대상과 그리고 그의 합성체(合性體)가 제각기 주체의 입장을 취할 때에는 각각 나머지 다른 것들을 대상으로 세워 삼대상기준(三對象基準)을 조성한다. 그래 가지고 그것들이 서로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여기에서 그 주체들을 중심으로 각각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3. 사위기대

 

이와 같이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정(正)을 중심하고 2성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와 대상과 그리고 그의 합성체가 각각 삼대상목적을 완성하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하게 된다.

사위기대는 4수의 근본이며, 또 그것은 삼대상목적을 완성한 결과이므로 3수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위기대는 정분합작용에 의한 하나님, 부부, 자녀의 3단계로써 완성되므로 3단계 원칙의 근본이 된다.사위기대는 그의 각 위(位)를 중심하고 각각 3대상이 되므로 이것들을 총합하면 12대상이 되기 때문에 12수의 근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 사위기대는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선(善)의 근본적인 기대이므로,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모든 존재와 또 그것들이 존재하기 위한 모든 힘의 근본적인 기대가 된다. 따라서 사위기대는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목적이 되는 것이다. 35

 

4. 사위기대의 존재양상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삼대상목적을 이루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완성한 존재는 무엇이든지 원형(圓形) 또는 구형운동(球形運動)을 하여 입체로 존재한다.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정분합작용에 의하여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각각 그의 실체대상으로 분립된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에 있어서, 그 대상이 주체에 대응하여 상대기준을 조성하면 그 대상은 주체를 중심하고 서로 주는 힘(遠心力)과 받는힘(求心力)으로써 수수작용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대상은 주체를 중심하고 돌아서 원형운동(圓形運動)을 하게 됨으로써 합성일체화한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그 주체는 하나님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아서 그와 합성일체화하고, 또 그 대상이 그러한 주체와 합성일체화하게 될 때, 비로소 그 합성체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실체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그 대상은 그의 주체와 합성일체화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체대상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도 역시 각각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도 똑같은 수수작용의 원리에 의하여 제각기 원형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체대상은 이와 같이 제각기 끊임없는 운동을 하고 있는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원형운동을 하기 때문에 그 원형운동은 이 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그 주체와 대상 자체들의 특수한 운동양상에 따라서는 동일한 평면상의 궤도에서만 일어날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는 그 주체를 중심하고 부단히 그 원형운동 궤도의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원형운동은 드디어 구형운동(球形運動)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위기대를 완성한 존재는 모두 원형또는 구형운동을 하게 되어 그 존재하는 모양은 입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태양계(太陽系)를 들어 보기로 하자. 태양을 주체로 한 모든 유성(遊星)들은 태양의 대상이 되어 그와 상대기준을 조성함으로써 태양을 중심하고 그에 대응하여 원심력과 구심력에 의한 수수작용을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모두 공전(公轉)의 원형운동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되어 원형운동을 하는 태양과 유성들은 합성일체화하여 태양계를 이룬다.그런데 이성성상의 복합체인 지구가 자전(自轉)하고 있을 뿐 아니라, 태양이나 태양을 중심한 다른 유성들도 또한 이성성상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부단히 자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자전하고 있는 태양과 유성들의 수수작용에 의한 태양계의 원형운동은 항상 똑같은 평면상의 궤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하고 부단히 그 궤도의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태양계는 구형운동을 하게 되어 입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와 같이 되어 모든 천체(天體)는 원형 또는 구형운동에 의하여 입체로써 존재하며, 이와 같은 무수한 천체들이 서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하여 이루어지는 우주(宇宙)도 역시 똑같은 원리에 의하여 구형운동을 하게 됨으로써 입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원자(原子)를 형성하고 있는 전자(電子)가 양자(陽子)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양자를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것들은 원형운동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하여 원자를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양자와 전자도 각각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어서 제각기 부단한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양자와 전자의 수수작용에 의한 원형운동도 역시 똑같은 평면상의 궤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중심하고 부단히 그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운동은 드디어 구형운동으로 화하게 된다. 원자 역시 이렇듯 구형운동을 함으로써 입체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전기에 의하여 양과 음 두 극에 나타나는 자력선(磁力線)도 똑같은 원리에 의하여 구형운동을 하게 된다.

다시 이러한 예를 인간을 두고 생각해 보기로 하자. 몸은 마음의 대상으로서 마음과 상대 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게 되면, 몸은 마음을 중심하고 원형운동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다. 그런데 마음이 하나님의 대상이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돌아서 그와 합성일체화 하고 몸이 이러한 마음과 합성일체화하게 되면, 그 개체는 비로소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닮은 실체대상이 되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도 각각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어서 그 자체들도 제각기 부단한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몸과 마음의 수수작용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원형운동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끊임없이 그 각도를 달리하면서 돌아가게 되어, 구형운동으로 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창조 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언제나 구형운동의 생활을 하는 입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무형세계(無形世界)까지도 주관하게 되는 것이다.(본장 제 6 절 참조)

이와 같이 주체와 대상이 주고 받는 평면적인 회로에 의한 원형운동이 다시 입체적인 회로에 의한 구형운동으로 화하는데서 창조의 조화는 벌어지는것이다. 즉 그 회로의 거리와 모양과 상태와 방향과 각도와 그리고 그들이 각각 주고 받는 힘의 속도 등의 차이에 의하여 천태만상의 조화의 미(美)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구형운동(球形運動)에도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의 중심에도 성상적인 중심과 형상적인 중심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자(前者)와 후자(後者)는 성상과 형상의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구형운동의 궁극적인 중심은 무엇일 것인가? 하나님의 이성성상의 상징적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의 중심은 인간이고, 그의 형상적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중심은 하나님이시므로, 피조세계의 구형운동의 궁극적인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제 이에 관한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모든 실체대상(實體對象)에 갖추어진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에 있어서, 그 대상의 중심이 그의 주체에 있으므로, 주체와 대상의 합성체(合性體)의 중심도 역시 그 주체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체의 궁극적인 중심이 하나님이시므로, 그 합성체의 궁극적인 중심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3대상이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그것들의 3중심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되어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완성할 때 비로소 사위기대(四位基臺)가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위기대의 궁극적인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이 사위기대를 완성한 각개 피조물을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한다. 그런데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개성진리체는 형상적 개성진리체(인간)와 상징적 개성진리체(인간 이외의 피조물)로 대별된다. 그리고 피조세계는 무수한 개성진리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저급한 것으로부터 고급한 것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연결되어있으며, 그 중 인간은 그 최고급의 개성진리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성진리체는 모두 구형운동을 하고 있는데, 저급한 개성진리체는 보다 고급한 개성진리체의 대상이 되므로, 이 대상의 구형운동의 중심은 보다 고급위(高級位)에서 그의 주체가 되어있는 개성진리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수많은 상징적 개성진리체의 중심들은 저급한 것으로부터 고급한 것에로 연결되어 올라가, 그 최종적인 중심은 형상적 개성진리체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상고(詳考)해보자. 오늘의 과학은 물질의 최소단위를 소립자로 보고 있는데, 소립자(素粒子)는 에너지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물질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각 단계의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들의 존재목적을 차원적으로 살펴보면, 에너지는 소립자의 형성을 위하여, 소립자는 원자(原子)의 구성을위하여, 원자는 분자(分子)의 구성을 위하여, 분자는 물질의 형성을 위하여, 모든 물질은 우주 삼라만상의 개체들을 구성하기 위하여 각각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의 운동의 목적은 소립자에, 소립자의 목적은 원자에, 원자의 목적은 분자에, 분자의 목적은 물질에, 모든 물질의 목적은 우주형성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주(宇宙)는 무엇을 위하여 있으며 그의 중심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인간에게 피조세계를 주관하라고 말씀하셨다(창세기 1장 28절). 만일 피조세계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피조세계는 마치 보아 줄 사람이 없는 박물관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박물관의 모든 진열품들은 그것들을 감상하고 사랑하며 기뻐해 줄 수 있는 인간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역사적인 유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인연적인 관계가 그것들 사이에 성립되어, 각각 그 존재의 가치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만일 거기에 그 중심되는 인간이 없다면 그것들이 무슨 존재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을 위주로 한 피조세계의 경우도 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즉 인간이 있어 가지고 피조물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의 근본과 그 성격을 밝히고 분류함으로써 비로소 그것들이 상호간에 합목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나아가서는 인간이 있어야만 동식물이나 수륙만상(水陸萬象)이나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성좌(星座)들의 정체가 구분되어 그것들이 인간을 중심하고 합목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질은 인간의 육체에 흡수되어 그의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하게 하는 요소가 되며, 삼라만상은 인간의 안락한 생활환경을 만들어 주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의 피조세계에 대한 형상적인 중심으로서의 관계이지만, 이밖에 또 성상적인 중심으로서의 관계가 있다. 전자를 육적인 관계라고 하면, 후자는 정신적 또는 영적인 관계인 것이다. 물질로 형성된 인간의 생리적 기능이 마음의 지 정 의에 완전히 공명되는것은, 물질도 역시 지(知)- 정(情)- 의(意)에 공명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물질의 성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은 각각 그 정도의 차는 있으나, 모두 정 지 의의 감응체인 것이다. 우리가 자연계의 미(美)에 도취하여 그와의 혼연일체의 신비경(神秘境)을 체험하게 되는것은, 인간은 피조물의 이러한 성상의 중심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 피조세계의 중심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합성일체화한 자리가 바로 천주의 중심이 되는 자리인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면에서 인간이 천주의 중심이 되는 것을 논하여 보자. 상세한 것은 제 6절에서 논하겠지만, 무형 유형 두 세계를 총칭하여 천주라고 하는데, 인간은 이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위에서논한 바에 의하여, 천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피조물은 주체와 대상의 두 가지로 양별(兩別)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시조로 창조되었던 아담이 완성되었더라면 그는 피조물(被造物)의 모든 존재가 갖추고 있는 주체들을 총합한 실체상이 된고, 해와가 완성되었더면 그는 또 피조물의 모든 존재가 갖추고 있는 대상들을 총합한실체상이 되었으리라는 결론을 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주관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가 다 함께 성장하여서, 아담은 피조물의 모든 주관주(主管主)로서 완성되고, 또 해와는 모든 대상의 주관주로서 완성되어 그들이 부부를 이루어 일체가 되었더라면, 그것이 바로 주체와 대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온 피조세계를 주관하는 중심체였을 것이다.

또 인간은 천주의 화동(和同)의 중심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의 이성성상의 실체적인 중심체인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 부부를 이루어 가지고 그들이 서로 화동하여 일체를 이룰 때, 비로소 이성성상으로 창조된 온 천주도 화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담과 해와가 완성된 부부로서 일체를 이룬 그 자리가 바로 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미(美)의 대상인 인간이 일체화하여 창조목적을 완성한 선(善)의 중심이 되는 자리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부모되신 하나님은 자녀로 완성된 인간에게 임재하시어 영원히 안식하시게 된다. 이 때의 이 중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므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영원히 자극적인 기쁨을 느끼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실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가 바로 진리의 중심이 되어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목적을 지향하도록 이끌어 주는 본심의 중심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조세계는 이와 같이 인간이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부부를 이룸으로써 이루어진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중심하고 합목적적인 구형운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피조세계(被造世界)는 인간이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이 중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만물도 탄식하면서 하늘의 뭇 아들들 즉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한 인간들이 나타나서 그의 중심이 되어줄 날을 고대한다고하였다 (로마서 8장 19 - 22절).

 

. 하나님의 편재성

 

위에서 우리는,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에 의하여 삼대상목적을 완성한 사위기대는 하나님을 중심한 구형운동을 일으키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모든 존재의, 그리고 그 존재를 위한 모든 힘의 근본적인 기대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실체로 되어 있는 피조물의 모든 개성체가 다 이와 같이 구형운동을 일으키어 하나님이 운행하실 수 있는 근본적인 기대를 조성하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되어 하나님은 일체의 피조물 가운데 편재(遍在)하시게 되는 것이다.

. 생리체의 번식

생리체(生理體)가 존속하기 위하여는 번식해야 하며, 그 번식은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한 정분합작용으로 인하여 되어진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식물은 꽃씨로부터 꽃의 수술과 암술이 생기고, 그 수술과 암술의 수수작용으로 인하여 다시 많은 씨를 맺어서 번식한다. 동물에 있어서는 그 수컷과 암컷이 성장하여 서로 수수작용을 하면 새끼를 낳아 번식하게 된다. 그리고 동식물의 모든 세포분열도 수수작용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목적을 세워 놓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몸이 실천하여 몸과 마음이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동지가 생기고, 동지들이 서로 잘 주고 잘 받으면 더 많은 동지를 번식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면에서 보면, 피조세계(被造世界)는 무형의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 그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그것이 실체적으로 전개되어 번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모든 존재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는 이유

무엇이든지 존재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어떠한 힘을 요하게 되는데, 그 힘은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서만 생긴다. 그런데 무엇이나 단독적으로는 주고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존재하기 위한 힘을 일으키기 위하여는 반드시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의 이성성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리고 직선상의 운동에는 어느 때고 끝이 올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직선운동을 하고 있는 존재는 영원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영원성을 가지기 위하여는 돌지 않으면 안 되고, 돌기 위하여는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영원성을 가지기 위하여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 계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대상인 피조물도 영원성을 가지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닮아서 이성성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도 주기적인 윤회(輪廻)에 의하여 영원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3 절 창 조 목 적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 44

피조물(被造物)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창세기 1장 4 - 31절),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신 피조물이 선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피조물이 선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피조물이 어떻게 되어야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은 만물세계를 창조(創造)하신 후, 끝으로 자기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대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성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시어 그를 보시고 즐기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창조하시고 나서, 생육하고 번식하여 만물세계를 주관하라(창세기 1장 28절)고 하신 3대 축복(三大祝福)의 말씀에 따라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이루고 기뻐할 때에,하나님도 그것을 보시고 가장 기뻐하실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3대 축복은 어떻게 하여야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창조의 근본 기대인 사위기대가 이루어진 터전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를 완성하고, 3대 축복의 말씀을 이루어 천국을 이룩함으로써 선의 목적을 완성한 것을 보시고 기쁨을 누리시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45

그러므로 인간을 중심한 피조세계(被造世界)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려 드리는 데 있다. 그리고 모든 존재는 이중목적(二重目的)을 지닌 연체(聯體)인 것이다.위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모든 존재의 중심에는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 중심이 지향하는 목적에도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두 가지가 있어서, 그것들의 관계는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성상적인 목적은 전체를 위한 것이고, 형상적인 목적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어서 전자와 후자는 원인적인 것과 결과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 대상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목적을 떠나서 개체적인 목적이 있을 수 없고, 개체적인목적을 보장하지 않는 전체적인 목적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삼라만상의 피조물은 이러한 이중 목적에 의하여 얽혀 있는 하나의 굉대(宏大)한 유기체(有機體)인 것이다.

.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에 관한 문제를 더 상세히 알기 위하여는, 우리가 어떠한 상태에 있을 때에 기쁨이 생기느냐 하는 문제를 먼저 알아야 한다. 기쁨은 독자적으로는 생기지 않는다. 무형이거나 실체거나, 자기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대로 전개된 대상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때 비로소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작가의 기쁨은 그가 가지고 있는 구상 자체가 대상이 되든가 혹은 그 구상이 회화(繪畵)나 조각 등의 작품으로 실체화하여 대상이 되었을 때, 그 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상대적으로 느낌으로써 비로소 생기게 된다. 이에 구상 자체가 대상으로 서게 될 때에는 그로부터 오는 자극이 실체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로 인한 기쁨도 실체적인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성품은 모두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그의 실체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을 상대적으로 느낄 때 비로소 기쁨을 누리시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위기대의 터전 위에서 3대 축복(三大祝福)에 의한 천국이 이루어지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쁨을 느끼실 수 있는 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앞에서 설명하였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되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되는가 하는 것을 알아 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1축복(第一祝福)은 개성을 완성하는데 있다.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려면,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대상으로 분립된 마음과 몸이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함으로써 그 자체에서 하나님을 중심한 개체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을 중심하고 마음과 몸이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룬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되어(고린도전서 3장 16절) 그와 일체를 이루기 때문에(요한복음 14장 20절), 신성(神性)을 가지게 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그의 뜻을 알고 그대로 생활하게 된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한 그 마음의 실체대상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실체대상이 된다. 이에 그 마음이나 하나님은 이러한 실체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제 1 축복을 이루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의 희노애락을 곧 그 자체의 것으로서 느끼게 되어 하나님이 서러워하시는 범죄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타락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2축복(第二祝福)을 이루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각각 개성을 완성한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분립된 아담과 해와가 부부가 되어 합성일체화함으로써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적인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룬 가정이나 사회는 개성을 완성한 사람 하나의 모양을 닮게 되므로, 이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인간의 실체대상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실체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하나님은 이러한 가정이나 사회로부터 그 자체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상대적으로 느끼게 되어 기쁨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제 2 축복을 이루면 그것도 또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3축복(第三祝福) 이루게 되면 그것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선의 대상이 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는 먼저 성상과 형상으로 본 인간과 만물세계와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기 전에 앞으로 창조하시게 될 인간의 성상과 형상을 형상적으로 전개하여 만물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만물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하등동물에서부터 점차적으로 기능이 복잡한 고등동물들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최고급의 기능을 가진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동물의 구조(構造)와 요소(要素)와 소성(素性)도 다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이 어떠한 동물의 소리도 다 낼 수 있다는 것은 곧 어떠한 동물의 발성기(發聲器)의 성능도 다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피조물의 형(形)과 선(善)의 미(美)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화가는 인간의 나체(裸體)를 모델로 하여 화법을 연마하는 것이다. 인간과 식물을 놓고 보더라도 그 구조와 기능에는 차이가 있으나 모두 세포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식물의 구조와 요소와 그의 소성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즉 식물의 잎은 그 모양이나 기능으로 보아 인간의 폐(肺)에 해당된다. 잎이 대기 중에서 탄산가스를 흡수하는 것 같이 폐는 산소를 흡수한다. 식물의 줄기와 가지는 인간의 심장(心臟)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영양소를 전체에 공급한다. 그리고 식물의 뿌리는 인간의 위장(胃腸)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영양소를 섭취한다. 더 나아가 식물의 사관(篩管)과 도관(導管)의 형태와 기능은 인간의 동맥과 정맥에 해당되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물과 흙과 공기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광물질(鑛物質)의 요소도 가지고 있다. 지구도 인체구조의 표시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지구에는 식물로 덮인 지각(地殼)이 있고, 지층(地層) 속에는 지하천(地下泉)이 있으며, 그 밑에 암층(岩層)으로 둘러싸인 용암층(鎔岩層)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솜털로 덮인 피부가 있고, 근육 속에는 혈관이 있으며 그 밑에 골격(骨格)과 골격으로 둘러싸인 골수(骨髓)가 있는 인체의구성과 흡사하다.

하나님의 제3축복(第三祝福)은 만물세계에 대한 인간의 주관성 완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형상적 실체대상인 인간과 그의 상징적 실체대상인 피조세계가 사랑과 미(美)를 주고 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한 주관적인 4위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본장 제 5절 Ⅱ.3 참조).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만물세계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실체로 전개해 놓은 그 대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중심한 인간은 그의 실체대상인 만물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위와 같이 인간과 만물세계가 합성일체화하여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된 피조세계(被造世界)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체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에 대한 자극적인 감성을 상대적으로 느끼심으로써 기쁨을 누리시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듯 하나님의 제3축복(第三祝福)을 이루면, 그것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또 하나의 선(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이루어졌다면 죄의 그림자조차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한 이상세계가 지상에 이루어졌을 것이니, 이러한 세계를 말하여 우리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이라고 하는 것이다. 차후에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원래 인간은 지상천국에서 생활을 하다가 육신을 벗으면, 그와 동시에 영계에 가서 자동적으로 천상천국(天上天國)의 생활을 하도록 창조된 것이었다.

위에서 설명한 바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천국은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대로 개성을 완성한 인간 하나의 모양을 닮은 세계를 말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 마음의 명령이 중추신경(中樞神經)을 통하여 그의 사지백체(四肢百體)에 전달됨으로써 그 인체가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여 동(動)하고 정(靜)하는 것과 같이, 천국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인류의 참부모를 통하여 모든 자녀들에게 전달됨으로써 모두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4 절 창조본연의 가치

 

. 창조본연의 가치의 결정과 그 가치의 기준 50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어떤 대상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그 대상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대하는 인간 주체의 욕구와의 상대적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알아 왔던 일반적인 가치관이었다. 그런데 어떤 개성체의 창조본연의 가치는 그 자체 내에 절대적인 것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성체가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중심하고 어떠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대하는 인간주체의 창조본연의 가치추구욕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결정된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창조본연의 가치를 가지기 위하여는, 그것이 인간 주체와 수수작용에 의하여 합성일체화 함으로써 하나님의 제 3 대상이 되어 창조본연의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면 창조본연의 가치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창조본연의 가치는 어떤 대상(對象)과 인간 주체(主體)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창조본연의 사위기대를 이룰 때 결정되는데, 이 사위기대의 중심이 절대자 하나님이시므로 이 가치의 기준도 절대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자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그에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어떠 대상의 창조본연의 가치도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면,꽃의 미(美)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 꽃을 창조하신 목적과 인간의 미에 대한 창조본연의 추구욕이 합치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에 입각한 인간의 미에 대한 추구욕이 그 꽃으로부터 오는 정적(情的)인 자극으로 말미암아 충족되어 인간이 완전한 기쁨을 느낄 때 그 창조본연의 미가 결정된다. 이와 같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중심하고 그 꽃으로부터 느끼는 기쁨이 완전할 때 그 꽃의 미는 절대적이다. 여기에 그 미의 추구욕이란 인간 자신이 그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그의 대상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느끼려 하는 욕망을 말한다. 그리고 그 꽃의 창조목적과 그 꽃을 대하는 인간의 가치 추구욕이 합치되는 순간 그 대상과 주체는 혼연일체의 상태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가 창조본연의 가치를 가지기 위하여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그와 그를 대하는 인간주체가 혼연일체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제3대상이 되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인 하나님과 상대적으로 결정된 만물들의 창조본연의 가치도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대상의 가치가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상대적이었던 것은, 그 대상과 그것을 대하는 타락인간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수수관계(授受關係)가 하나님을 중심한 것이 아니고 사탄적인 목적과 욕망을 중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창조본연의 지 정 의와 창조본연의 진 미 선 50

 

인간의 마음은 그 작용에 있어서 지(知)- 정(情)- 의(意)의 세 기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인간의 육신은 그 마음의 명령에 감응되어 행동한다. 이것을 보면 그 육신은 마음 곧 지 정 의 의 감응체로서, 그의 행동은 진(眞)- 미(美) 선(善)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마음의 주체이시기 때문에 지 정 의 의 주체이시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실현욕에 의해 마음으로 하나님의 그 본연의지 정 의에 감응하고, 몸으로 이것을 행동함으로써, 비로소 그 행동은 창조본연의 미 진 선의 가치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 사랑과 미, 선과 악, 의와 불의

 

1. 사랑과 미

 

하나님으로부터 분립된 2성(二性)의 실체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려 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제 3 대상으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기 위하여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을 사랑이라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돌리는 정적인 힘을 (美),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힘은 동적(動的)이요, 미의 자극은 정적(靜的)이다.52

하나님과 인간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이시요 인간은 미의 대상이며, 남녀를 놓고 볼때에는 남자는 사랑의 주체가 되고 여자는 미의 대상이 된다. 피조세계에 있어서는 인간은 사랑의 주체가 되고 만믈세계는 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이 합성일체화하면 미에도 사랑이, 사랑에도 미가 내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체와 대상이 서로 돌아서 일체를 이루면 주체도 대상의 입장에, 대상도 주체의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에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윗사람의 사랑에 대하여 아랫사람이 돌리는 미를 충(忠)이라고 하고, 부모의 사랑에 대하여 자녀가 돌리는 미를 효(孝)라고 하며, 남편의 사랑에 대하여 아내가 돌리는 미를 열(烈)이라고 한다. 사랑과 미의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실체로 분립된 양성(兩性)이 사랑과 미를 주고받음으로 합성일체화하여 하나님의 제 3 대상이 됨으로써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창조목적을 이루려는데 있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을 중심하고 그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실체대상으로 완성된 아담과 해와가 일체를 이루어 자녀를 번식함으로써 부모의 사랑(제 1 대상의 사랑), 부부의 사랑(제 2 대상의 사랑), 자녀의 사랑(제 3 대상의 사랑) 등 창조본연의 3 대상(三對象)의 사랑을 체휼해야만,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완성하여 사위기대를 이룬 존재들로서 인간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위기대(四位基臺)의 3대상 사랑에있어서 그 주체적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3대상의 사랑으로 나타나 사위기대 조성을 위한 근본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4위기대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아서 그를 체휼할 수 있는 완전한 미의 대상이요, 또 완전한 기쁨의 대상이기 때문에 창조목적을 완성한 선의 근본적인 기대가 된다.

 

2. 선 과 악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이 사랑과 미를 잘 주고 잘 받아 합성일체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제 3 대상이 되어 사 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을성취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善)이라 하고,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배치(背馳)되는 행위나 그 행위의 결과를 (惡)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중심하고 마음과 몸이 주체와 대상의 자리에서 사랑과 미를 잘 주고 잘 받아 합성일체화하여 개인적인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한 개성체가 되어 하나님의 제 1 축복(第一祝福)을 완성하게 될 때, 그 개성체나 또는 그러한 개성체를 이루기 위한 행위를 선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하고 아담과 해와가 주체와 대상의 입장에서 사랑과 미를 잘 주고 잘 받아 부부를 이루고 자녀를 번식하여 가정적인 사위기대를조성함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한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을 완성하게 될 때, 그 가정이나 또는 그러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행위를 선이라고한다. 또 개성을 완성한 인간이 어떠한 사물을 제2의 자아로서 그 대상의 자리에 세워 놓고 그것과 합성일체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제 3 대상을 이루어 주관적인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제 3 축복(第三祝福)을 완성하게 될때, 그 사물이나 또는 그 사물을 이루기 위핸 행위를 선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위와 같은 하나님의 3대 축복과 반대되는 목적을 이루는 행위나 또는 그 행위의 결과를 악이라고한다.

 

3. 의와 불의

 

선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선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義)라고 하며, 악(사탄)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악을 위한 생활적인 요소를 불의(不義)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필연적으로 의의 생활을 요하게 되는 것으로서, 의가 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5 절 피조세계의 창조과정과 그의 성장기간

 

. 피조세계의 창조과정

 

창세기 1장을 보면, 천지창조(天地創造)는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데서 빛을 창조하신 것으로 출발하여, 먼저 물을 궁창(穹蒼) 위와 아래로 갈라 세우고, 다음에는 육지와 바다를 가르고, 다음엔 식물(植物)을 비롯하여 어류(魚類), 조류(鳥類), 포유류(哺乳類), 인류(人類) 등을 창조하시는데 6일이라는 기간이 소요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창조가 끝날 때까지 6일이라는 시간적인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聖書)에 기록된 창조의 과정이 오늘날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우주의 생성과정과 거의 일치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학자들의 문헌에 의하면, 우주는 처음에는 가스상태로서 무수시대(無水時代)의 혼돈과 공허한 가운데서 천체(天體)를 이루어, 강우(降雨)에 의한 유수시대(有水時代)가 되면서 물로 된 궁창을 형성하였고, 다음에는 화산(火山)의 분출에 의하여 물 속에서 육지가 드러나 바다와 육지가 생겼으며, 다음에는 하등의 식물과 동물에서 시작되어 순차로 어류, 조류, 포유류, 인류가 생성되었다고 하며, 지구의 연령을 수십억년으로 추산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 기록된 이 성경의 천지창조과정이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연구한 것과 거의 부합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우리는 이 기록이 하나님의 계시(啓示)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주는 시간성을 떠나서 돌연히 생성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성될 때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천지창조를 완료하기까지의 6일이란 기실 일출(日出) 일몰(日沒)의 회수로 계산되는 6일이 아니라, 창조과정의 여섯단계의 기간을 표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피조물의 성장기간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창조가 끝날 때까지 6일 즉 여섯 단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은, 곧 피조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각 개성체(個性體)가 완성되는데 있어서도 어느만큼의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의미 한다. 그리고 창세기 1장에 있는 천지창조에 관한 기록을 보면 하루 하루의 창조가 끝날 때마다 그 서수(序數) 일자를 밝힌 것이 있는데, 이 일자 표시에도 우리는 피조물의 완성에 어떠한 기간이 소요되었음을 알게 된다. 즉 하나님은 첫날의 창조를 마치시자 저녁이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니라(창세기 1장 5절)고 말씀하셨다. 저녁으로부터 밤을 지나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둘째날일 것인데 첫째날이라고 한것은, 피조물이 밤이라는 성장기간(成長期間)을 지나 아침이 되어서 완성된 후에야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실현하기 위한 첫 출발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피조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반드시 어느만큼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인 바, 이것은 피조물(被造物)이 창조될 때 일정한 성장기간을 거쳐서 완성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56

 

1.                     성장기간의 질서적 3단계  57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 수리적인 원칙에 의하여 실체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수리성(數理性)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면서 상대적인 이성성상의 중화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3수적인 존재이시다. 따라서 한 하나님을 닮아 난 피조물은(창세기 1장 27절) 그 존재 양상이나 그 운동이나 또는 그 성장기간(成長期間) 등이 모두 3수과정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는 하나님, 아담과 해와, 그리고 자녀 번식의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야 완성된다. 그리고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원형운동을 하려면 반드시 정분합 3단계의 작용을 하여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이루고 3점을 통과해야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 물체가 정착하려면 최소한 3점에서 지지(支持)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이 완성됨에 있어서도 소생기(蘇生期), 장성기(長成期), 완성기(完成期)의 질서적 3단계의 성장기간을 거쳐서야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자연계(自然界)에서 3수로 나타나고 있는 그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자연계는 광물과 식물과 동물로 되어 있고, 물질은 기체와 액체와 고체의 3상(삼상(三相)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식물은 뿌리와 줄기와 잎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고, 동물은 머리와 몸과 사지의 세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또 성서(聖書)에 보여지는 3수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인간은 성장기간의 3단계를 완성하지 못하고 타락됨으로써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목적을 다시 이루는데 있어서도 이 3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3수를 찾는 섭리를 하셨고, 따라서 성서에는 3수를 중심한 섭리의 기록이 많이 있다.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신(聖神)의 3위(삼위(三位)), 낙원의 3층, 누시엘 가브리엘 미가엘의 3천사, 방주(方舟)의 3층, 노아홍수(洪水) 때의 3차의 비둘기, 아브라함의 3제물(三祭物), 이삭 헌제(獻祭)의 3일, 모세 때의 어둠의 재앙(災殃) 3일간, 출애급노정(出埃及路程)을 위한 3일간의 사탄 분립기간과 가나안복귀를 위한 3차의 40년 기간, 요단강을 건너기 전 여호수아를 중심한 사탄분립의 3일 기간, 예수님의 30년 사생애(私生涯)와 3년 공생애, 3인의 동방박사(東方博士), 그들의 3예물, 3 제자, 3대 시험, 겟세마네의 3 차례의 기도와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3차의 부인(否認),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의 세 시간의 어둠과 3일 만의 부활(復活) 등 그 예는 허다하다.

그러면 인간시조는 언제 타락되었는가? 그들은 성장기간(成長期間) 즉 미완성기(未完成期) 에서타락했던 것이다. 인간이 만일 완성된 후에 타락하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全能性)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선(善)의 완성체가 되어가지고 타락하였다면 선 자체도 불완전한 것이 되는 것이요, 따라서 선의 주체이신 하나님도 역시 불완전한 분이시라는 결론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과(善惡果)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하신 말씀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죽을 수도 있었고, 혹은 그 경고를 받아들이어 죽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아직 미완성기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만물세계가 6일이라는 기간을 지나서 완성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도 역시 그러한 원리를 떠나서 창조되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성장기간의 어느 단계에서 타락되었던가? 그것은 장성기(長成期)의 완성급(完成級)에서 타락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 시조의 타락을 전후한 제반 사정과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경위가 실증하는 바로서, 본서의 전후편을 두루 연구하는데서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2. 간접 주관권 59

피조물(被造物)이 성장기에 있을 때에는 원리 자체의 주관성(主觀性) 또는 자율성(自律性)에 의하여 성장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원리의 주관자로 계시면서 피조물이 원리에 의하여 성장하는 결과만을 보아서 간접적인 주관을 하시므로, 이 기간을 하나님의 간접주관권(間接主管圈) 또는 원리결과주관권(原理結果主管圈)이라고 한다.

만물은 원리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하여 성장기간(간접주관권)을 경과함으로써 완성한다. 그러나 인간은 원리자체의 주관성이나 자율성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면서 이 기간을 경과하여 완성하도록 창조되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장 17절)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보면, 인간 시조(始祖)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어 따먹지 않고 완성되는 것이나 그 말씀을 불신하여 따먹고 타락되는 것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완성 여부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만 달려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책임수행(責任遂行) 여하에 따라서 결정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의 창조주(創造主)로서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면서 이 성장기간(간접주관권)을 다 경과함으로서 완성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책임분담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간섭하셔서는 안 되는 것이다. 58

이와 같이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여서만 완성되도록 창조하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까지도 닮게 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위업에 가담케 하심으로써,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이 인간을 주관하시듯이, 인간도 창조주의 입장에서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주인의 권한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창세기 1장 28절). 인간이 만믈과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 받음으로써 천사(天使)를 비롯한 만물에 대한 주관성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완성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간접주관권(間接主管圈)을 두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되어 이러한 주관성을 갖지 못하게 된 인간들도 역시 복귀원리(復歸原理)에 의하여 인간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사탄을 비롯하여 만물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하기 위한 그 간접주관권을 다 통과하지 않으면 창조목적을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가 그처럼 오랜 기간을 두고 연장되어 나온 것은, 복귀섭리를 담당한 중심인물들이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그 자신들의 책임분담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항상 실수를 거듭하여 왔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로 인한 구원(救援)의 은사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인 믿음을 세우지 않으면 그를 찾아온 구원섭리는 무위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부활(復活)의 혜택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이었고, 그것을 믿고 안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인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 에베소서 2장 8절, 로마서 5장 1절).

3. 직접주관권

직접주관권(直接主管圈)이란 어떠한 것이며 또 이것을 두고 창조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어떠한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이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여 4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루어 가지고, 주체의 뜻대로 사랑과 미(美)를 완전히 주고 받아 선(善)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직접주관(直接主管)이라고 한다. 따라서 직접주관권은 곧 완성권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직접주관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이것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주관권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중심하고 아담 해와가 완성되어 가지고 합성일체화하여 가정적인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하나님과 심정(心情)의 일체를이루어, 하나님을 중심한 아담의 뜻대로 서로 사랑과 미를 완전히 주고 받는 선의 생활을 하게 될때, 이것을 하나님의 직접주관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고 그의 뜻을 완전히 알고 실천하게 되므로, 마치 두뇌가 명령 아닌 명령으로 사지백체(四肢百體)를 움직이는 것 같이, 인간도 하나님의 명령 아닌 명령에 의하여 그의 뜻대로 움직여서 창조목적을 이루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만물세계(萬物世界)에 대한 인간의 직접주관은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을 중심하고 완성한 인간이 만물세계를 대상으로 세워 합성일체화함으로써 사위기대를 조성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일체를 이루어서, 하나님을 중심한 인간의 뜻대로 인간과 만믈세계가 사랑과미를 완전히 주고 받음으로써 선의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을 만물에 대한 인간의 직접주관이라고 한다.

 

6 절 인간을 중심한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

 

피조세계(被造世界)는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닮은 인간을 본으로 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마음과 몸으로 된 인간의 기본형을 닮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본장 제 1 절 Ⅱ 참조). 그러므로 피조세계에는 인간의 몸과 같은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마음과 같은 무형실체세계가 또 있다. 이것을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리적인 오관(五官)으로는 그것을 감각할 수 없고 영적 오관으로만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체험에 의하면, 이 무형세계는 영적인 오관에 의하여 유형세계와 꼭 같이 실감할 수 있는 실재세계인 바, 이 유형 무형의 두 실체세계를 합친 것을 우리는 천주(天宙)라고 부른다.

마음과의 관계가 없이는 몸의 행동이 있을 수 없는 것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는 창조본연의 인간의 행동이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무형세계와의 관계가 없이는 유형세계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를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그러므로 마음을 알지 못하고는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인생의 근본 의의를 알 수 없으며, 무형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모르고는, 유형세계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형세계는 주체(主體)의 세계요 유형세계는 대상(對象)의 세계로서, 후자는 전자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히브리서 8장 5절). 유형세계에서 생활하던 인간이 육신(肉身)을 벗으면 그 영인체(靈人體)는 바로 무형세계에 가서 영주(永住)하게 된다. 63

 

.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위치

 

첫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주관자로 창조하셨다(창세기 1장 28절). 피조세계는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감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계를 직접 주관하지 않으시고, 이 세계에 대한 감성을 갖춘 인간을 창조하시어 그로 하여금 피조세계를 직접 주관하도록 하신 것이다.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유형세계(有形世界)를 느껴 그것을 주관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것과 같은 요소인 물과 흙과 공기로 육신을 창조하시고 무형세계(無形世界)를 느껴 그것을 주관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것과 같은 영적인 요소로써 영인체를 창조하시었다. 변화산상(變化山上)에서 예수님 앞에 이미 1,600여년 전에 죽었던 모세와 900여년 전에 죽었던 엘리야가 나타났었는데(마태복음 17장 3절), 이것들은 모두 그들의 영인체들이었다. 이와 같이 유형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육신과 무형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영인체로 구성된 인간은 유형세계와 무형세계를 모두 주관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피조세계의 매개체요 또한 화동의 중심체로 창조하셨다. 인간의 육신과 영인체가 수수작용에 의하여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체대상이 될 때, 유형 무형 두 세계도 또한 그 인간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일으키어 합성일체화함으로써 하나님의 대상세계가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두 세계의 매개체요 또한 화동의 중심체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치 두 음차(音叉)를 공명시키는데 있어서의 공기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또 이와 같이 무형세계(영계)와 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마치 라디오나 텔레비젼과도 같아서 영계의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게 되어 있다.

세째로, 하나님은 인간을 천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나중에 창조하실 인간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실체적으로 전개하시어 먼저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었다. 따라서 영인체(靈人體)의 성상과 형상의 실체적인 전개로서 무형세계(無形世界)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영인체는 무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요, 한편 또 육신(肉身)의 성상과 형상의 실체적인 전개로서 유형세계(有形世界)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육신은 유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니, 흔히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64

그런데 인간이 타락되어 피조세계는 자기를 주관해 줄 수 있는 주인을 잃어버렸으므로, 로마서 8장 19절에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복귀된 창조본연의 인간)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화동의 중심체인 인간이 타락되어 유형 무형 두 세계의 수수작용(授受作用)이 끊어짐으로써 그것들이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분리되었기 때문에, 로마서 8장 22절에는 피조물(被造物)이 탄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인체와 육신을 가진 완성한 아담으로 오셨던 분이었다. 따라서 그는 천주를 총합한 실체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셨다고 말씀하셨다(고린도 전서 15장 27절). 예수님은 타락인간이 그를 믿어 그와 일체가 됨으로써 그와 같이 완성한 인간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구주(求主)이신 것이다.

 

. 육신과 영인체와의 상대적 관계

 

1.                     육신의 구성과 그의 기능

2.       

육신(肉身)은 육심(주체)과 육체(대상)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 육심(肉心)은 육체(肉體)로 하여금 그 생존과 번식과 보호 등을 위한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작용부분을 말한다. 그러므로 동물에 있어서의 본능성은 바로 그들의 육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육신이 원만히 성장하려면 양성의 영양소인 무형의 공기와 광선을 흡수하고 음성의 영양소인 유형의 물질을 만물로부터 섭취하여, 이것들이 혈액을 중심하고 완전한 수수작용을 해야한다.

육신이 선행(善行)하고 악행(惡行)에 따라서 영인체(靈人體)도 선화(善化) 혹은 악화(惡化)한다. 이것은 육신으로부터 영인체에게 어따한 요소를 돌려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육신으로부터 영인체에 주어지는 요소를 우리는 생력요소(生力要素)라고 한다. 우리는 평소의 생활에 있어서 육신이 선한 행동을 할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행동을 할 때는 마음이 언짢은 것을 경험 하거니와, 이것은 그 육신의 행동의 선악(善惡)에 따라 그에 적응하여 생기는 생력요소가 그대로 영인체에 돌아가는 증좌(證左)이다.

 

3.                     영인체의 구성과 그의 기능

 

영인체(靈人體)는 인간의 육신의 주체로 창조된 것으로서 영감(靈感)으로만 감득되며,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고, 또 천사나 무형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무형실체(無形實體)로서의 실존체인 것이다. 영인체는 그의 육신과 동일한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육신을 벗은 후에는 무형세계(영계)에 가서 영원히 생존한다. 인간이 영존(永存)하기를 염원하는 것은 그 자체 내에 이와 같이 영존성을 지닌 영인체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영인체는 생심(生心, 주체)과 영체(靈體, 대상)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생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영인체의 중심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영인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소(生素, 양성)와 육신으로부터 오는 생력요소(生力要素, 음성)의 두 요소가 수수작용을 하는 가운데서 성장한다. 그리고 영인체는 육신으로부터 생력요소를 받는 반면에 그가 육신에게 돌려보내는 요소도 있는 것이니, 우리는 이것을 생령요소(生靈要素)라고 한다. 인간이 신령(神靈)에 접함으로써 무한한 기쁨과 새로운 힘을 얻어서 고질(痼疾)이 물러가는 등 그 육신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은 그 육신이 영인체로부터 생령요소를 받기 때문이다. 66

그리고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서만 성장한다. 그러므로 영인체와 육신과의 관계는 마치 열매와 나무와의 관계와 같다. 생심(生心)의 요구대로 육심(肉心)이 호응하여 생심이 지향하는 목적을 따라 육신이 움직이게 되면 육신은 영인체로부터 생령요소를 받아 선화(善化)되고, 그에 따라 육신은 좋은 생력요소를 영인체에 다시 돌려 줄 수 있게 되어, 영인체는 선(善)을 위한 정상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심(生心)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진리(眞理)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진리로 생심이 요구하는 것을 깨달아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인간 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을 완수해야만 생령요소(生靈要素)와 생력요소(生力要素)가 서로 선(善)의 목적을 위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게 된다.

그런데 생령요소와 생력요소는 각각 성상적인 것과 형상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악인(惡人)에 있어서도 그의 본심이 선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그 생령요소가 항상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선한 생활을 하지 않는 한 그 요소도 육신의 선화(善化)를 위한 것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따라서 생력요소와의 사이에 있어 올바른 수수작용을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인체(靈人體)는 어디까지나 지상의 육신생활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 생심을 중심하고 창조원리에 의한 질서적 3기간을 거쳐서 성장하여 완성하게 되는데, 소생기의 영인체를 영형체(靈形體)라 하고, 장성기의 영인체를 생명체(生命體)라 하며, 완성기의 영인체를 생령체(生靈體)라고 한다. 67

하나님을 중심하고 영인체와 육신이 완전한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함으로써 사위기대를 완성하면,그 영인체는 생령체가 되는데, 이러한 영인체는 무형세계의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영인체에 느껴지는 모든 영적인 사실들은 그대로 육신에 공명되어 생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영적인 사실들을 육신의 오관(五官)으로 느껴서 알게 된다. 생령체를 이룬 인간들이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다가 육신을 벗고 영인으로서 가서 사는 곳이 천상천국이다. 그러므로 지상천국(地上天國)이 먼저 이루어진 후에야 천상천국(天上天國)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영인체의 모든 감성도 육신생활 중 육신과의 상대적인 관계에 의하여 육성되는 것이므로, 인간은 지상에서 완성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체휼해야만 그 영인체도 육신을 벗은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체휼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영인체의 모든 소성(素性)은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에 형성되기 때문에 타락인간(墮落人間)에 있어서 영인체가 악화(惡化)는 육신생활의 범죄행위에 유인(由因)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 영인체가 선화(善化)도 또한 육신생활의 속죄(贖罪)로 인하여서만 이루어진다. 죄악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육신을 쓰고 지상에 오셔야 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에서 선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따라서 구원섭리(救援攝理)의 제1차적인 목적이 지상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문의 열쇠를 지상의 베드로에게 주셨고(마태복음 16장 19절), 땅에서매고 푸는대로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린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18장 18절).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인체가 그 곳에 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인체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완성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호흡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범죄행위로 인하여 생긴 허물로 말미암아 이 사랑을 완전히 호흡할 수 없게 된 영인체는 완전한 사랑의 주체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도리어 고통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영인체는 하나님의 사랑과 먼 거리에 있는 지옥을 자진하여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영인체는 육신을 터로 하여서만 생장(生長)할 수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인체의 번식은 어디까지나 육신 생활에 의한 육신의 번식과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4.                     생심과 육심과의 관계로 본 인간의 마음

 

(生心)과 육심(肉心)과의 관계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과의 관계와 같아서, 그것들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여 합성일체화하면, 영인체와 육신을 합성일체화하게 하여 창조목적을 지향하게 하는 하나의 작용체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은 타락되어 하나님을 모르게 됨에 따라 선의 절대적인 기준도 알지 못하게 되었으나, 위와 같이 창조된 본성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은 항상 자기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니, 이것을 양심(良心)이라고 한다. 그런데 타락인간은 선(善)의 절대적인 기준을 알지 못하여 양심의 절대적인 기준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선의 기준을 달리 함에 따라서 양심의 기준도 달라지게 되어, 양심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흔히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선을 지향하는 마음의 성상적인 부분을 본심(本心)이라하고, 그 형상적인 부분을 양심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무지(無知)에 의하여 창조본연의 것과 그 기준을 달리한 선을 세우게 될 때에도 양심은 그 선을 지향하지만, 본심은 이에 반발하여 양심을 그 본심이 지향하는 곳으로 돌이키도록 작용한다. 사탄의 구애(拘碍)를 당하고 있는 생심과 육심이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지향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작용체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을 우리는 사심(邪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심이나 양심은 이 사심에 반발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사탄을 분립하고 하나님을 상대하게 함으로써, 악을 물리치고 선을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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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타락론 70

인간은 누구나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려는 본심(本心)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어떠한 악의 세력에 몰리어, 본심이 원하는 선을 버리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된다. 이러한 악의 세력 가운데서 인류의 죄악사(罪惡史)는 연면히 계속되고 있다. 기독교(基督敎)에서는 이 악의 세력의 주체를 사탄이라고 한다. 인간이 이 사탄의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는 것은, 사탄이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해서 사탄이 되었는가하는, 그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악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함으로써 인류 죄악사를 청산하고 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는 먼저 사탄이 사탄된 동기와 경로와 그 결과를 밝히 알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타락론(墮落論)을 알아야 한다.

1절 죄의 뿌리

이제까지 인간 속에 깊이 그 뿌리를 박고 쉬임없이 인간을 죄악의 길로 몰아내고 있는 죄의 뿌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기독교 신도들만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인간조상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것이 죄의 뿌리가 된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선악과가 문자 그대로 나무의 과실이라고 믿는 신도들과, 또 성서의 많은 부분이 그러한 것처럼 이것도 그 어떠한 것에 대한 상징이나 비유일 것이라고 믿는 신도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제각기 구구한 해석을 하고 있을 뿐,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완전한 해명이 내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많은 기독교 신도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담과 해와가 따먹고 타락(墮落)되었다는 선악과가 문자 그대로 어떠한 나무의 열매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부모 되시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녀들이 따먹고 타락할 수 있는 과실(果實)을 그렇게도 보기 좋고 탐스럽게 만들어서(창세기 3장 6절), 그들이 손쉽게 따먹을 수 있는 곳에 두셨을 것인가?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태복음 15장 11절)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먹는 것이 어떻게 인간을 타락케 할 수 있었을 것인가? 한편 인간의 원죄(原罪)는 인간의 시조로부터 유전(遺傳)되어 나오고 있는 것인데, 먹는 물건이 어떻게 원죄를 유전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유전은 오직 혈통(血統)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그 무엇을 먹었다고 하여 그 결과가 후손에게까지 유전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선악과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고 믿고 있는 신도들도 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인간에게 사망이 따르는 방법으로써 그렇게 무자비한 시험을 하셨으리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아담과 해와는 그들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으면 정녕코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먹으면 죽을 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을 따먹었다. 기아(棄兒)에 허덕였을 리도 없는 아담과 해와가 먹을 것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렇게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어떠한 물질이 아니고 생명에 대한 애착까지도 문제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자극을 주는 다른 무엇이었음에 틀림없다. 즉 선악과가 이와 같이 물질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무엇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성경(聖經)의 많은 주요한 부분이 상징이나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데, 무엇 때문에 선악과만은 굳이 문자대로 믿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오늘날의 기독교 신도들은 모름지기 성서의 문자에만 붙들려 있었던 지난날의 고루하고도 관습적인 신앙태도를 버려야 하겠다. 선악과를 비유로 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비유하였을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해명하는 방법으로서 세기 2장 9절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에덴동산에 있었다고 하는 '생명나무'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이 '생명나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그와 함께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이라는 것도 바로 알 수 있겠기 때문이다.

1. 생명나무

성서(聖書)의 말씀에 의하면 타락인간(墮落人間)의 소망은 '생명나무'앞으로 나아가 '생명나무'를 이루는 데 있다.잠언 13장 12절을 보면,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도 '생명나무'를 소망의 대상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이고,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의 기록을 보면,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기독교 신도들의 소망도 역시 '생명나무'에 나아가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타락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생명나무'인 것을 보면 타락 전 아담의 소망도 '생명나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복귀과정에 있는 타락 인간은 원래 타락전 아담이 이루려다가 못 이룬 바로 그 소망을 다시 찾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 24절에 아담이 범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화염검(火焰劍)으로써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그의 길을 막아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로 보아도 타락 전 아담의 소망이 '생명나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로 보아도 타락 전 아담의 소망이 '생명나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은 타락으로 인하여 그의 소망이었던 이 '생명나무'를 이루지 못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창세기 3장 24절), 그 '생명나무'는 그 후 한결같이 타락인간의 소망으로 남아져 내려왔던 것이다.그러면 완성될 때를 바라보며 성장하고 있던 미완성(未完成)한 아담에 있어서의 소망이란 무엇이었을 것인가? 그것은 그가 타락되지 않고 성장하여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생명나무'의 내용을 바로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은 곧 완성한 아담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생명나무'는 결국 완성한 아담을 비유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타락되지 않고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 되어서 '생명나무'를 이루었다면, 그의 후손들도 모두 '생명나무'가 되어 지상천국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그의 길을 화염검(火焰劍)으로 막아버리고 말았다(창세기 3장 24절). 그렇기 때문에 '생명나무'는 창조이상을 복귀하려는 타락인간의 소망으로 남아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죄(原罪)가 있는 타락인간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생명나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이 '생명나무'가 되기 위하여는 로마서 11장 17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창조이상을 완성한 한 남성이 이 지상에 '생명나무'로 오셔 가지고 모든 인간을 그에게 접붙이어 하나되게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생명나무'로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3장 12절에 의하면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고대하였던 '생명나무'는 바로 초림(初臨)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24절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화염검으로써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아담의 길을 막았기 때문에, 이것이 걷히지 않고는 인간이 '생명나무'에로 나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 3절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五旬節) 날에 성도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불같은 혀 곧 화염검이 갈라진 후에야 성령(聖靈)이 강림하여, 전 인류가 '생명나무'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그에게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기독교 신도들은 '생명나무'되시는 예수님에게 영적(靈的)으로만 접붙임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또다시 속죄(贖罪)를 받아야 할 죄악의 자식을 낳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나온 원죄를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또 그 자식에게 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전편 제4장 제1절).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상에 '생명나무'로 재림(再臨)하셔서, 온 인류를 다시 접붙이심으로써, 원죄까지 속죄해 주시는 섭리를 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의 말씀대로, 신약성도(新約聖徒)들이 또다시 '생명나무'를 고대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 '생명나무'는 바로 재림 예수 님을 비유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이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창세기 2장 9절)를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의 '생명나무'로서 복귀하시려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이 타락(墮落)하여 창세기 2장 9절의 첫 '생명나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타락인간들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의 후'생명나무'로 재림하셔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린도전서 15장 45절).

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님은 아담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배필로서 해와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동산 가운데에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을 비유하는 나무가 있었다면 그러한 여성을 비유하는 또 하나의 나무도 있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 '생명나무'와 같이 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창세기 2장 9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한 그 나무는 창조이상을 완성할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완성한 해와를 비유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예수님을 포도나무(요한복음 15장 5절) 혹은 감람나무(로마서 11장 17절)로 비유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 타락(墮落)의 비밀을 암시하심에 있어서도 완성한 아담과 해와를 두 나무로 비유하셨던 것이다.

. 뱀의 정체

해와를 꼬여서 범죄케 한 것은 뱀이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창세기 3장 4-5절). 그러면 또 이 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우리는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 내용에 의하여 뱀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하자.성경에 기록된 뱀은 인간과 담화(談話)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적인 인간을 타락시킨 것을 보면 그것도 영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뱀이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더욱 영물(靈物)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을 보면, 하늘에서 큰 용(龍)이 땅으로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魔鬼)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옛 뱀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해와를 꼬인 그 뱀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뱀이 하늘로부터 내쫓겼다고 하였으니, 하늘에 있었던 그 옛 뱀이 영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편 이 뱀을 마귀요 사탄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탄은 인간이 타락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상 인간의 마음을 악(惡)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온 것이 사실이니 그것은 영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사탄이 영물인 것이 사실이라면, 사탄으로 표시된 뱀이 영물임을 말할 것도 없다. 성서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사실로 보아, 해와를 꼬인 뱀은 동물이 아니고 어떠한 영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그러면 이처럼 뱀으로 비유한 영물(靈物)이 과연 창세 전(創世前)부터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것도 피조물(被造物) 중의 하나였던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만일 이 뱀이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대립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존재라면, 피조세계(被造世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 악(善惡)의 투쟁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영속(永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결국 헛수고로 돌아가버리고 말 것이며, 모든 존재가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일원론(一元論)은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뱀으로 비유한 이 영물은, 원래 선(善)을 목적으로 창조되었던 어떠한 존재가 타락되어 사탄이 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과 담화(談話)를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또 그 소재(所在)가 하늘이었고, 한편 또 그것이 만일 타락(墮落)되어 악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심령(心靈)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존재는 과연 무엇일 것인가? 천사(天使) 이외에는 이러한 조건을 구비한 존재가 없으므로 우선 그 뱀은 천사를 비유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2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를 용서치 아니하시고 어두운 지옥(地獄)에 던져두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을 꼬여 가지고 범죄 하였던 뱀을 곧 천사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입증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뱀은 혀끝이 둘로 갈라져 있다. 따라서 그것은 한 혀로 두 말을 하고, 한 마음으로 이중의 생활을 하는 자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또 뱀은 자기의 먹을 것을 몸으로 꼬아서 먹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유혹하는 자의 표상이 된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을 꼬인 천사(天使)를 뱀으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

우리는 위에서 인간을 꼬여 타락케 한 뱀이 바로 천사였으며, 이 천사가 범죄 하여 타락(墮落)됨으로써 사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 다음으로 우리는 천사와 인간이 어떠한 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1. 천사의 범죄

유다서 1장 6절에서 7절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천사가 간음(姦淫)으로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런데 간음이란 혼자서는 행할 수 없는 범행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행하여진 천사의 간음에 있어 그 대상이 되었던 존재가 무엇이었던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인간은 어떠한 죄를 저질렀던가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2. 인간의 범죄

창세기 2장 25절을 보면, 범죄하기 전 아담 해와는 몸을 가리지 않은 채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墮落)한 후에는 벗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무화과(無花果)나무 잎으로 하체(下體)를 가리었다(창세기 3장 7절). 만일 선악과(善惡果)라고 하는 어떠한 과실이 있어서 그들이 그것을 따먹고 범죄를 하였다면, 그들은 필시 손이나 입을 가리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허물을 가리는 것이 그 본성(本性)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손이나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리었었다. 따라서 이 사실은, 그들의 하체가 허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이 하체로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욥기 31장 33절에는 내가 언제 아담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담은 타락한 후 그의 하체를 가리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곧 아담이 가리었던 그의 하체가 허물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담의 하체가 어찌하여 허물이 되었을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담이 하체로써 범죄하였기 때문이다.인간이 타락되기 전의 세계에 있어, 뻔히 죽을 줄 알면서 저지를 수도 있었던 행동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그것은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식하라(창세기 1장 28절)하신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은 사랑으로 인하여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두고 볼 때 사랑은 가장 귀하고 가장 거룩한 것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사랑의 행동을 천시하여 온 것은 그것이 바로 타락의 원인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도 또한 음란(淫亂)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3. 천사와 인간과의 행음

우리는 위에서 밝힌 바 인간이 천사(天使)의 꼬임에 빠져 타락되었다는 사실과, 인간이나 천사는 모두 행음(行淫)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었다는 사실과 그 위에는 피조세계(被造世界)에 있어서 영적인 존재로서 서로 어떠한 정적(情的)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과 천사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등을 결부하여 볼 때, 인간과 천사와의 사이에 행음관계가 성립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8장 44절에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서는 마귀(魔鬼)는 곧 사탄이요 사탄은 곧 인간을 꼬인 옛 뱀이라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성구(聖句)들로 미루어 보면, 인간은 마귀의 후손이요 따라서 사탄의 후손이기 때문에 결국 뱀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그러면 인간은 어떤 경위로 타락한 천사 즉 사탄의 후손이 되었는가? 이것은 인간의 조상이 천사와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사탄의 혈통(血統)에서 태어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혈통이 아니고 사탄의 혈통으로써 태어났기 때문에, 로마서 8장 23절에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친자식이 못되고)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 마태복음 3장 7절에는 세례요한이 유대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 즉 사탄의 자식이라고 질책하였고, 마태복음 23장 33절에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보시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책망하신 기록이 있다.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중심 삼고 볼 때, 우리는 천사와 인간 사이에 행음관계(行淫關係)가 있어서 그것이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선악과

우리는 위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해와를 비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그러면 또 선악과(善惡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해와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목(果木)이 과실에 의하여 번식되는 것과 같이,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한 그의 사랑으로써 선의 자녀를 번식해야 할 것이었는데, 사탄을 중심한 그의 사랑으로써 악의 자녀를 번식하였다. 해와는 이와 같이 그의 사랑으로써 선의 열매도 맺을 수 있고, 또한 악의 열매도 맺을 수 있었던 성장기간(成長期間)을 통하여서 완성되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랑을 선악과라고 하였던 것이며, 그 사람을 말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였던 것이다.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가 그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피와 살이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사랑으로 선과(善果)를 따먹고, 선의 피와 살을 받아 선의 혈통을 번식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사탄을 중심한 악의 사랑으로 악과(惡果)를 따먹고, 악의 피와 살을 받아 악의 혈통을 번식하여 죄악의 사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사탄(천사)을 중심한 사랑에 의하여 서로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창세기 3장 14절을 보면, 하나님은 타락한 천사를 저주하시어 배로 다니고 또 종신토록 흙을 먹으리라고 하셨다. 다리로 다니지 못하고 배로 다닌다는 것은, 천사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활동을 하지 못하하고 비참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흙을 먹는다는 것은 것은 하늘로부터 쫓겨남으로 말미암아(이사야 14장 12절, 요한계시록 12장 9절),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의 요소를 받지 못하고, 죄악의 세계에서 악의 요소를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죄의 뿌리

우리는 성서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여, 죄(罪)의 뿌리는 인간 시조가 과실을 따먹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뱀으로 표시된 천사(天使)와 불륜(不倫)한 혈연관계를 맺은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선의 혈통을 번식하지 못하고 사탄의 악의 혈통을 번식하게 되었던 것이다.한편 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미루어서 인간의 죄의 뿌리가 음란(淫亂)에 있었다는 것을 더욱 명백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죄의 뿌리가 혈연적인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원죄(原罪)는 자자손손(子子孫孫)에게 유전되어 왔다. 그리고 죄를 벗으려고 하는 종교마다 간음(姦淫)을 가장 큰 죄로 규정하여 왔으며, 이것을 막기 위하여 금욕생활(禁慾生活)을 강조하여 온 것이니, 이것도 죄의 뿌리가 음란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의 선민(選民)이 되기 위한 속죄(贖罪)의 조건으로서 할례를 행하였던 것은, 죄의 뿌리가 음란에 의하여 악의 피를 받아들인 데 있었기 때문에, 타락인간의 몸으로부터 그 악의 피를 뽑는다는 조건을 세워서 성별(聖別)하기 위함이었다.수많은 영웅 열사(英雄烈士)와 국가들이 멸망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 음란(淫亂)에 있었던 것은, 음란이란 죄의 뿌리가 항상 인간의 마음 가운데서 자기도 모르게 발동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로써 인륜도덕(人倫道德)을 세우고, 제반 교육을 철저히 하며, 범죄를 빚어내는 경제사회제도를 개선함으로써 다른 모든 죄악들은 이 사회로부터 불식(拂拭)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되면서 날로 안일한 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증대되어가고 있는 음란이란 범죄만은 그 누구도 막을 길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에서 이 범죄를 발본색원(拔本塞源) 할 수 없는 한, 결코 이상세계(理想世界)는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재림(再臨)하시는 메시아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죄의 뿌리가 어디까지나 음란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2절 타락의 동기와 경로

우리는 이미 제1절에서 뱀은 곧 해와를 타락시킨 천사(天使)를 비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처럼 인간의 타락(墮落)된 동기가 천사에게 있었으므로, 그 타락의 동기와 경로를 알려면 먼저 천사에 관한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 천사의 창조와 그의 사명 및 그와 인간과의 관계

모든 존재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따라서 천사(天使)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被造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천사세계를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먼저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 26절 에 씌어 있는 천지창조(天地創造)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스스로를 복수(複數)로 부르셨는데, 이것은 지금까지의 많은 신학자들의 해석대로 삼위신(三位神)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인간보다도 먼저 창조되어 있었던 천사들을 놓고 그들을 포함시킨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창조와 그의 경륜(經綸)을 위하여 먼저 천사를 사환(使喚)으로 창조하셨다(히브리서 1장 14절).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중대한 축복의 말씀을 전하였고(창세기 18장 10절), 그리스도의 잉태에 관한 소식을 전하였으며(마태복음 1장 20절, 누가복음 1장 31절), 옥중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는 베드로를 풀어 성 밖으로 인도하였던 것이다(사도행전 12장 7절 - 10절). 이밖에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천사가 활동한 예는 성서에서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2장 9절에는 천사가 자기 자신을 '종'이라고 하였고, 또 히브리서 1장 14절에는 천사를 '부리는 영(靈)'이라고 기록하여 놓았다. 그리고 천사는 하나님에게 송영(誦詠)을 드리는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증거를 성서 가운데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요한계시록 5장 11절, 요한계시록 7장 11절).다음에는 천사와 인간과의 창조 원리적인 관계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인간을 자녀로 창조하시고 피조세계에 대한 주관권(主管權)을 부여하셨기 때문에(창세기 1장 28절), 인간은 천사도 주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6장 3절을 보면, 인간에게는 천사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영계(靈界)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은 수많은 천사들이 낙원(樂園)에 있는 성도들을 옹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도 역시 천사의 인간에 대한 시종적(侍從的)인 관계를 말해 주는 하나의 좋은 예라 하겠다.

. 영적 타락과 육적 타락

하나님은 영적인 부분과 육적인 부분으로써 인간을 창조(創造)하셨기 때문에, 타락에 있어서도 영육(靈肉) 양면의 타락(墮落)이 성립된 것이다. 천사와 해와와의 혈연관계(血緣關係)에 의한 타락이 영적 타락이고, 해와와 아담과의 혈연관계에 의한 타락이 육적 타락인 것이다.

그러면 (天使)와 인간과의 사이에 어떻게 성적(性的)인 관계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인가? 인간과 영물(靈物)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모든 감성은 어떠한 점에서나 실체적인 존재 사이에서 느끼는 그 감성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과 천사와의 성적 타락은 사실상 가능한 것이다.한편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하여서도 위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인간사회에 있어서 지상인간들이 영인(靈人)들과 결혼생활을 하는 예가 왕왕 있다는 것, 그리고 천사(天使)가 야곱과 씨름을 하여서 그의 완도 뼈를 부러뜨렸다는 예(창세기 32장 25절)와 함께, 천사가 아브라함의 가정에 나타나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창세기 18장 8절)과, 또 롯의 집에 찾아온 두 천사가 롯이 대접한 무교병(無酉孝餠)을 먹었을 뿐 아니라, 그 성 백성들이 그 천사를 보고 색정(色情)을 일으키어 롯의 집을 둘러싸고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대하리라(창세기 19장 5절)고 외친 사실 등은 모두 이에 속한 예들인 것이다.

1. 영적 타락

하나님은 천사세계(天使世界)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26절), 누시엘(啓明星이란 뜻, 사도행전 14장 12절)을 천사장(天使長)의 위(位)에 세우셨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복(福)의 기관이 되었던 것같이 누시엘은 천사세계의 사랑의 기관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하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자녀로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는 종으로 창조된 누시엘보다도 그들을 훨씬 더 사랑하시었다.사실상 누시엘은 인간이 창조(創造)되기 전이나 후나 조금도 다름없는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자기보다도 아담과 해와를 더 사랑하시는 것을 볼 때에 그는 사랑에 대한 일종의 감소감(減少感)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아침부터 노동을 한 일꾼이 자기대로의 상당한 노임을 다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와서 적게 일한 일꾼도 자기와 똑같은 노임(勞賃)을 받는 것을 볼 때에 자기가 받는 노임에 대한 감소감을 느꼈다고 하는 성서(聖書)의 예화(마태복음 20장 1 - 15절)와 같은 입장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사랑의 감소감을 느끼게 된 누시엘은, 자기가 천사세계에서 가졌던 사랑의 위치와 동일한 것을 인간세계에 대하여서도 그대로 가져 보고자 해와를 유인하게 되었던 것이니, 이것이 곧 영적 타락(靈的 墮落)의 동기였다.

피조세계(被造世界)는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을 받도록 창조되었다. 따라서 사랑은 피조물의 생명의 근본이요, 행복과 이상(理想)의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많이 받는 존재일수록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으로 창조된 천사(天使)가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된 해와를 대할 때, 그가 아름답게 보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해와가 누시엘의 유혹에 끌려오는 빛을 보였을 때, 그는 해와로부터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자극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누시엘은 죽음을 무릅쓰고 더욱 해와를 유인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사랑에 대한 과분한 욕망으로 인하여 자기의 위치를 떠난 누시엘과,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려고 때 아닌 때에 때의 것을 바란 해와가(창세기 3장 5 - 6절) 서로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게 되었으므로, 그로 인한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그들로 하여금 불륜(不倫)한 영적인 정조관계(貞操關係)를 맺게 하였던 것이다.

사랑으로 일체를 이루면 서로 그 대상으로부터 그의 요소를 받도록 창조된 원리에 의하여(창세기 3장 7절), 해와는 누시엘과 사랑으로써 일체를 이루었을 때 누시엘의 요소를 받았던 것이다. 즉 첫째로 그는 누시엘로부터 창조목적(創造目的)에 대한 배치(背馳)로 말미암아 양심은 가책에서 오는 공포심을 받았고, 둘째로는 자기가 본래 대해야 할 창조본연(創造本然)의 부부로서의 상대자는 천사가 아니고 아담이었다는 사실을 감득할 수 있는 새로운 지혜를 그에게서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해와는 아직도 미완성기에 있었다.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이미 완성기에 처해 있었던 천사 장에 비하여 지혜가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는 천사 장으로부터 그 지혜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당시 해와는 아직도 미완성기(未完成期)에 있었다.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이미 完成期에 처해 있었던 천사장(天使長)에 비하여 지혜가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에,그는 천사장으로부터 그 지혜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2. 육적 타락

아담과 해와는 완성하여서 하나님을 중심하고 영원한 부부를 이루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해와가 미완성기에서 천사장(天使長)과 불륜(不倫)한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은 후, 다시 뒤미처 아담과 부부의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아담도 역시 미완성기에서 타락되었다. 이렇게 때 아닌 때에 사탄을 중심 삼고 아담과 해와 사이에 이루어진 부부관계는 그대로 육적 타락(肉的 墮落)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와는 천사 장과의 영적인 타락에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온 공포심과 자기의 원리적인 상대가 천사 장이 아니고 아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새로운 지혜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해와는 그제서나마 자기의 원리적 상대인 아담과 일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 앞에 다시 서고, 또 타락으로 인하여 오게 된 공포심을 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담을 유인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육적 타락의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불륜한 정조관계(貞操關係)에 의하여 천사 장과 일체를 이루었던 해와는 아담에 대하여 천사장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은 해와의 눈에 매우 아름답게 보여졌다. 그리하여 해와에게 있어 아담은, 그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와는 자기를 유혹하였던 천사 장과 똑같은 입장에서 아담을 유혹하였다. 아담이 누시엘과 같은 입장에 서 있었던 해와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일어났던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아담으로 하여금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위치를 떠나게 하여, 마침내 그들은 육적인 불륜한 정조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아담은 해와와 일체를 이룸으로써 해와가 누시엘로부터 받았던 모든 요소를 그대로 이어받게 된다. 그리고 이 요소는 다시 그 후손에게로 연면히 유전되어 내려온 것이다. 해와는 타락되었다 할지라도 만일 아담이 타락된 해와를 상대하지 않고 완성되었더라면, 완성한 주체(主體)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 대상(對象)인 해와 하나에 대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대단히 용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마저 타락하였기 때문에 사탄의 혈통을 계승한 인류가 오늘날까지 번식하여 내려온 것이다.

3절 사랑의 힘과 원리의 힘 및 믿음을 위한 계명 89
. 사랑의 힘과 원리의 힘으로 본 타락

인간은 원리로써 창조되어 원리궤도(原理軌道)에 의하여 생존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의 힘 그 자체가 인간을 원리궤도에서 탈선케 하여 타락시킬 수는 없다. 이것은 마치 레일이나 기관에 고장이 없는 한, 기차가 스스로 궤도를 탈선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기차도 그가 달리는 힘보다도 더욱 강한 외력(外力)이 그와 방향을 달리하여 부딪쳐 올 때는 탈선될 수밖에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그 자신을 성장케 하는 원리의 힘보다도 더욱 강한 그 어떠한 힘이 그와 목적을 달리하여 부딪쳐 올 때는 타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리의 힘보다도 더욱 강한 힘이 곧 사랑의 힘이다. 그러므로 미완성기(未完成期)에 있어서의 인간은 그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으로 인하여 타락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그러면 왜 원리(原理)의 힘보다도 사랑의 힘이 더 강하여서, 미완성기에 있어서의 인간이 목적을 달리한 그러한 사랑의 힘에 부딪칠 때, 그로 인하여서 타락될 수도 있게 되었던가?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삼대상 사랑에 의하여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완성한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주체적인 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인간 창조의 목적인 사위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사랑은 인간의 행복과 생명의 근원이 된다.하나님은 원리로써 창조된 인간을 사랑으로 주관하셔야 하므로, 그 사랑이 사랑답기 위하여는, 사랑의 힘은 원리의 힘보다도 더 강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사랑의 힘이 원리의 힘보다 약하다면, 하나님은 원리로써 창조된 인간을 사랑으로 주관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원리를 더 추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진리(眞理)로써 세워 가지고, 사랑으로써 구원(救援)하고자 하셨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 믿음을 위한 계명을 주신 목적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따먹지 말라는 믿음을 위한 계명(誡命)을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 것인가? 그것은 사랑의 힘이 원리의 힘보다 강하므로, 아직 미완성기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랑의 주관을 받을 수 없는 아담과 해와가, 만일 천사장의 상대적인 입장에 서게 되면, 목적을 달리하는 그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에 의하여 타락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사장의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천사를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과만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였더라면, 그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작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타락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계명을 지키지 않고 천사장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그와 수수작용을 하였기 때문에, 그 불륜(不倫)한 사랑의 힘은 그들을 탈선케 하였던 것이다.

미완성기(未完成期)에 있었던 인간에게 이러한 계명을 주셨던 것은, 단순히 그들로 하여금 타락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밖에 또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으로서, 그 말씀을 믿고 스스로 완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닮게 하여 만물에 대한 주관성(主管性)을 가지게 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다(전편 제1장 제5절 .2).그리고 이 계명을 천사장에게 주시지 않고 인간에게 주셨던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입장에서 천사까지도 주관해야 할 인간의 창조 원리적인 자격과 위신을 세워 주시기 위함이었다.

. 믿음을 위한 계명이 필요한 기간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조상에게 따먹지 말라고 하셨던 믿음을 위한 계명(誡命)은 언제까지라도 필요한 것이었던가? 사랑을 중심하고 볼 때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 완성은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 삼고 부부를 이루어, 그 자녀가 번성함으로써(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직접적인 주관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완성되면 따먹는 것은 원리적인 것으로서 허용되도록 창조되어 있었던 것이다.사랑의 힘은 원리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에,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하고 부부를 이룸으로써, 그 절대적인 사랑의 힘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관을 받게 되면, 이 절대적인 부부의 사랑의 힘을 끊을 자나 그것을 끊을 힘은 없으므로 그들은 절대로 타락될 수 없다. 더구나 인간보다도 저급한 천사장(天使長)의 사랑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하나님을 중심한 그들 부부간의 사랑을 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아담과 해와가 미완성기에 있을 때에 한해서만 필요했던 것이다.

4절 인간 타락의 결과

아담과 해와가 영육(靈肉) 아울러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천사를 비롯한 피조세계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이 중요한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하자.

. 사탄과 타락인간

타락한 천사장 누시엘을 사탄이라고 한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 있다. 누시엘과 인간조상이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어 일체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탄을 중심한 사위기대(四位基臺)가 이루어지면서 인간은 사탄의 자녀가 되고 말았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마귀(魔鬼)의 자식이라고 하셨고, 또 마태복음 12장 34절동 23장 33절에서는 그들을 뱀 또는 독사(사탄)의 자식이라고 하셨다(마태복음 3장 7절). 한편 또 로마서 8장 23절에는 처음 익은 열매된 우리들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養子)되기를 고대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혈통을 이어받지 못하고,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서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었더면, 그 때 하나님 주권의 세계가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완성기에 타락되어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 세계는 사탄주권의 세계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2장 31절에는 사탄을 세상의 임금이라고 하였고, 또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는 사탄을 세상의 신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사탄은 피조세계의 주관주(主管主)로 창조된 인간을 주관하게 되었으므로, 그는 피조세계까지도 주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19절에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만물이 완성된 인간의 주관을 받지 못하고 사탄의 주관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사탄을 물리치고 자기들을 주관해 줄 수 있는 창조본연의 인간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 인간세계에 대한 사탄의 활동

사탄은 욥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듯이(욥기 1장 9절), 항상 모든 인간을 하나님 앞에 참소하여 지옥으로 끌어가려 하고 있다. 그러나 사탄도 그의 대상을 취하여서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지 않고는 사탄적인 활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탄의 대상은 영계에 있는 악영인(惡靈人)들이다. 그리고 이 악영인들의 대상은 지상에 있는 악인(惡人)들의 영인체(靈人體)이며, 지상에 있는 악인들의 영인체의 활동대상은 바로 그들의 육신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2장 3절에는 사탄이 가룟유다에게 들어갔다고 하였고, 또 마태복음 16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를 가리켜 사탄이라고 하셨다. 한편 이러한 악영인체를 마귀의 사자(使者)라고 한 기록도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25장 41절).

지상천국(地上天國)을 복귀한다는 것은(전편 제3장 제2절) 전 인류가 사탄과의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완전히 끊고, 하늘과의 상대기준을 복귀하여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사탄이 전혀 활동할 수 없게 된 세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말세(末世)에 이르러서 사탄을 무저갱(無底坑)에 가둔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사탄의 상대자가 없어지므로 사탄이 활동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인간이 사탄과의 상대기준을 끊고, 더욱 나아가서 고린도전서 6장 3절의 말씀대로 그들을 심판하기 위하여서는, 사탄이 사탄된 죄상과 그 정체를 알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탄을 참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사와 인간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그들에게 자유를 부여하셨기 때문에, 이를 복귀하시는 데 있어서도 강제로 하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한 책임분담으로써 말씀을 찾아 세워 가지고, 사탄을 자연굴복시켜야만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원칙에 의하여 섭리하시기 때문에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는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연장을 거듭해 내려오게 된 것이다.

. 목적성으로 본 선과 악

선과 악에 대한 정의는 이미 창조원리(創造原理) 중 '창조본연의 가치'에서 논한 바 있다. 이제 우리는 그 목적성으로 본 선악(善惡)의 내용을 알아보기로 하자. 아담과 해와가 그들에게 부여된 사랑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조성하였더면, 그들은 선의세계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와 목적을 반대로 한 사랑으로서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악의 세계를 이루고 말았다. 그러므로 선과 악은 동일한 내용의 것이, 상반된 목적을 지향하여 나타난 결과를 두고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악이라고 생각해 온 인간의 성품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목적 삼고 나타나면 선이 되는 예를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이제 그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흔히 (罪)라고 생각하는 욕망은,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창조본성(創造本姓)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목적(創造目的)은 기쁨에 있고, 기쁨은 욕망을 채울 때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인간에게 욕망이 없다면, 동시에 기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도, 살고자 하는 욕망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도, 발전하고자 하는 욕망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목적도 복귀섭리도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인간사회의 유지와 그 발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래의 욕망은 창조본성이기 때문에, 이 성품이 하나님의 뜻을 목적 삼고 그 결과를 맺으면 선(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사탄의 뜻을 목적 삼고 그 결과를 맺으면 악(惡)을 자아내게 되는 것이다. 이 악한 세상도 예수님을 중심하고 그 목적의 방향만을 돌려놓으면, 이 악한 세상도 예수 님을 중심하고 그 목적의 방향만을 돌려놓으면, 선한 것으로 복귀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이 이루어진다는 것은(전편 제3장 제2절 II), 이러한 원리로 보아 자명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복귀섭리는 사탄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이 타락세계(墮落世界)를,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룬 지상천국에로 그 방향성을 바꾸어 나아가는 섭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성격이 그렇기 때문에, 이 섭리의 과정에 있어서 다루어지는 선의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다. 왜냐 하면 어떤 특정한 시대를 놓고 볼 때, 그 시대의 주권자의 이념이 지향하는 목적에 순응하면 선이 되고, 그 목적에 반대하면 악이 되지만, 한번 그 시대와 주권자가 바뀌어 그 이념이 달라지게 되면, 동시에 그의 목적도 달라지고, 따라서 선과 악의 기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宗敎)나 사상(思想)에 있어서도, 그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그 교리와 그 사상이 지향하는 목적에 순응하는 것이 선이고 그에 반대하는 것이 악이 된다. 그러나 일단 그 교리나 사상이 달라지거나 혹은 다른 종교로 개종(改宗)하거나, 또는 다른 사상으로 전향하게 되면 그에 따라서 목적도 달라지기 때문에, 선악의 기준도 자연히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사회에 항시 투쟁과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주요한 원인은, 이와 같이 인간이 지향하는 목적이 달라짐에 따라서 선악의 기준이 항시 달라지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복귀과정에 있어서의 선(善)은 이와 같이 상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상에서 사탄의 주권을 물리치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영존(永存)하시는 절대자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시어 그로부터 오는 이념이 세워질 때는, 그 이념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도 절대적인 것이어서 선의 기준도 절대적인 것으로 세워지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재림주(再臨主)님에 의하여 세워질 천주적(天宙的)인 이념인 것이다.

사실상 인류역사는 수많은 투쟁과 혁명을 거듭하면서, 본심(本心)이 지향하는 이 절대선(絶對善)을 찾아 나왔던 것이다. 따라서 타락된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투쟁과 혁명은, 이 절대적인 목적을 추구하여 절대적인 선의 세계를 이룩할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선신의 역사와 악신의 역사

선신(善神)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편에 있는 선영인(善靈人)들과 천사(天使)들을 총칭하는 말이고, 악신(惡神)이라고 하는 것은 사탄과 사탄 편에 있는 악영인(惡靈人)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선과 악이 그러하듯이 선신의 역사(役事)와 악신의 역사도 동일한 모양으로 출발하여 그 목적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선신의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개체의 평화감과 정의감을 증진시키며 그 육신의 건강도 좋아지게 한다. 그러나 악신의 역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과 공포로 이기심을 증진케 하며 건강도 해롭게 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역사는 원리를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분별하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 결과를 보아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인간(墮落人間)은 하나님도 사탄도 모두 대할 수 있는 중간위치에 있기 때문에 선신의 역사인 경우에도 악신의 역사를 겸행하는 때가 있다. 또 악신의 역사도 어느 기간을 지나면 선신의 역사를 겸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원리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분별하기가 곤란하다. 오늘날에 있어 많은 교역자(敎役者)들이 이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선신의 역사까지도 악신의 것으로 몰아, 하늘 '뜻'에 상반되는 처지에 서게 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영적인 현상이 점점 많아지는 오늘날에 있어서, 선신과 악신의 역사를 잘 분간하여 분립할 수 없는 한 영통인(靈通人)들을 지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죄

(罪)라는 것은 사탄과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킴으로써, 천법(天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그런데 죄를 분류해 보면, 첫째로 원죄(原罪)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조상이 저지른 영적 타락과 육적 타락에 의한 혈통적인 죄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원죄는 모든 죄의 뿌리가 되고 있다.

둘째로는 유전적(遺傳的) 죄가 있다. 이것은 부모가 지은 죄가 몇대에 이른다고 한 십계명(十誡命)의 말씀과 같이, 혈통적인 인연으로 그 후손들이 물려받은 선조의 죄를 말한다.

셋째로는 연대적(連帶的) 죄가 있다. 자신이 범죄하지도 않았고 또 유전적인 죄도 아니지만, 연대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죄다. 제사장(祭司長)과 교법사(敎法師)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죄로 말미암아, 유대인 전체가 그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벌을 받았고 전 인류도 공동적인 책임을 지고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실 때까지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넷째로 자범죄(自犯罪)가 있으니 이것은 자신(自身)이 직접 범한 죄다.

여기에서 우리가 전기(前記)한 바와 같이 원죄를 죄의 뿌리라고 한다면, 유전적인 죄는 죄의 줄기, 연대적인 죄는 죄의 가지, 자범죄는 죄의 잎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든 죄는 그의 뿌리되는 원죄로 말미암아서 생긴다. 그러므로 원죄를 청산하지 않고는 다른 죄를 근본적으로 청산할 수 없다. 그러나 숨어 있는 이 죄의 뿌리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인간의 뿌리로서 참부모로 오시는 예수님만이 이것을 알고 청산하실 수 있는 것이다.

. 타락성본성

천사장(天使長)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해와와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을 때에, 우발적으로 일어났던 모든 성품을 해와가 계승하였고, 이렇게되어서 천사장의 입장에 서게 된 해와와 다시 혈연관계를 맺은 아담도 그 성품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성품이 타락인간의 모든 타락성을 유발하는 근본된 성품이 되었다. 이것을 말하여 타락성본성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이 생기게 된 근본동기는 천사장이 아담에 대하여 질투심(嫉妬心)을 갖게 된 데 있었다. 그러면 선(善)의 목적을 위하여 창조된 천사 장에게서, 어떻게 되어 사랑에 대한 질투심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인가?

원래 천사장에게도 그의 창조본성(創造本性)으로 욕망과 지능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천사장은 지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 오는 그것보다 크다는 것을 비교하여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며, 또 그에게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자동적으로 질투심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질투심은 창조본성으로부터 유발되는 불가피한 부산물로서, 마치 빛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물체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완성되면 이러한 부수적인 욕망으로 인하여서는 결코 타락(墮落)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을 충당할 때에 느껴지는 일시적인 만족감보다도, 그 욕망을 충당함으로써 일어나는 자기 파멸에 대한 고통이 더 클 것을 실감하게 됨으로써, 그러한 범행은 감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세계는, 마치 사람 하나의 모양과 같이 서로 유기적(有機的)인 관계를 가지는 조직사회이기 때문에, 개체의 파멸은 곧 전체적인 파멸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의 파멸을 방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에 있어서의 창조본성으로부터 일어나는 부수적인 욕망은, 인간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 요소는 될지언정 결코 타락의 요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대별하면 넷으로 가를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천사장(天使長)이 타락하게 된 동기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담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사랑하지 못하고, 그를 도리어 시기하여 해와의 사랑을 유린한 데 있다. 군왕이 사랑하는 신하를 그의 동료가 그 군왕(君王)과 같은 입장에서 같이 사랑하지 못하고 시기하는 성품은, 바로 이런 타락성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둘째로 자기의 위치를 떠나는 것이다. 누시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기 위하여, 천사세계(天使世界)에서 가졌던 것과 동일한 사랑의 위치를, 인간세계에 있어서도 가지려 하였던 불의한 욕망으로 인하여 자기의 위치를 떠나 타락하게 되었다. 불의(不義)한 감정으로 자기의 분수와 위치를 떠나 행동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타락성본성의 발로인 것이다.

셋째는 주관성(主管性)을 전도(顚倒)하는 것이다. 인간의 주관을 받아야 할 천사가 거꾸로 해와를 주관하였고,또 아담의 주관을 받앙야 할 해와가 거꾸로 아담을 주관하게 된 데서 타락의 결과가 생겼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위치를 떠나서 주관성을 전도하는 데서부터 인간사회의 질서는 문란(紊亂)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이러한 타락성본성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넷째는 범죄행위(犯罪行爲)를 번식하는 것이다. 만일 해와가 타락한 뒤에 자기의 범죄를 아담에게 번식시키지 않았더면 아담은 타락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해와만의 복귀는 용이(容易)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해와는 이와 반대로 자기의 죄를 아담에게도 번식시켜 그를 타락케 하였다. 악인(惡人)들이 동료를 번식시키려는 성품은 이와 같은 타락성본성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5절 자유와 타락
. 자유의 원리적 의의

자유(自由)에 대한 원리적인 성격을 논할 때, 첫째로 우리는 원리(原理)를 벗어난 자유는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유의지(自由意志)와 그에 따르는 자유행동(自由行動)을 일괄하여 표현한 말이다. 전자와 후자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과의 관계와 같아서, 이것이 합하여서만 완전한 자유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자유의지가 없는 자유행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자유행동이 따르지 않는 자유의지도 완전한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행동은 자유의지로 인하여 나타나는 것이며, 자유의지는 곧 마음의 발로 인 것이다. 그런데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원리를 벗어나서 그 마음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원리를 벗어난 자유의지나 그로 인한 자유행동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본연의 인간에 있어서는, 원리를 벗어난 자유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책임(責任) 없는 자유는 없다. 원리에 의하여 창조된 인간은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써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만 완성된다(전편 제1장 제5절 .2). 따라서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추구하여 나아가는 인간은 항상 자유의지로써 자기의 책임을 행하려 하기 때문에 책임 없는 자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셋째로 실적(實績) 없는 자유는 없다. 인간이 자유로써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하려는 목적은, 창조목적을 완성하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실적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항상 실적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므로, 실적 없는 자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자유와 인간의 타락

위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자유(自由)는 원리를 벗어나서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자유는 스스로의 창조 원리적인 책임을 지게 되며,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실적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한 자유행동은 선(善)의 결과만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 인하여서 타락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본심(本心)의 자유라고 한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권고를 받은 이상,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 오직 본심의 자유에 의하여 그 명령을 지켜야 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해와가 원리를 이탈하려 하였을 때, 원리적인 책임과 실적을 추구하는 그의 본심의 자유는, 그에게 불안과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여 원리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 타락된 뒤에 있어서도, 이 본심의 자유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도록 작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작용을 하는 본심의 자유로 인하여 타락될 수는 없다.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그의 본심의 자유가 지향하는 힘보다도 더 강한 비원리적(非原理的)인 사랑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 자유가 구속되었던 데 기인한다.

결국 인간은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도 이 자유를 추구하는 본성(本性)만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자유를 복귀하는 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역사가 흐를수록 인간이 자기의 생명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자유를 찾으려는 심정이 고조되어 가는 것은, 인간이 사탄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이 자유를 복귀해 나아가고 있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를 찾는 목적은, 자유의지에 의한 자유행동으로 원리적인 책임과 실적을 세워서,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 자유와 타락과 복귀

천사(天使)는 인간을 시종(侍從) 하도록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천사를 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에 속한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천사에게 유혹을 당하던 때의 해와는, 아직도 지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미완성기(未完成期)에 있었다. 따라서 해와가 천사의 유혹에 의하여, 지적으로 미혹되고 심정적으로 혼돈 되어 유인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책임과 실적을 추구하는 본심의 자유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불안을 느꼈으나, 보다 더 큰 천사와의 사랑의 힘에 의하여 타락선(墮落線)을 넘고 말았다.

해와가 아무리 천사를 자유로이 대하였다 하더라도,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계명만을 믿고 천사의 유혹의 말에 상대하지 않았더라면, 천사와의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발동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는 결코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자유가 해와로 하여금 천사를 상대하게 하여 타락 선까지 끌고 나갔던 것은 사실이지만, 타락선을 넘게 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유가 아니고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천사에 대해서도 자유로써 대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해와가 누시엘을 대하게 되어, 그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함으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게 되었을 때, 그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타락인간도 자유로써 하나님의 상대적인 입장에 설 수 있기 때문에, 진리(眞理)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그 원리적인 사랑의 힘으로 말미암아 창조본성을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유를 부르짖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이하여서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하려는 본심의 자유의 지향성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지에 떨어져 하나님을 모르게 됨에 따라서 그의 심정도 모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이 무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을 취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타락인간에 있어서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시대적인 혜택에 의하여, 신령(내적인 知)과 진리(외적인 知)가 밝혀짐에 따라, 창조목적을 지향하는 본심의 자유를 찾으려는 심정도 복귀되어 왔고, 그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심정(心情)도 점차로 복귀되어 그 뜻대로 살려는 의지도 높아 가는 것이다.또 그들은 이와 같이 자유를 복귀코자 하는 의지가 고조됨에 따라서,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환경에 자유를 찾는 그 시대의 인간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을 때 필연적으로 사회혁명(社會革命)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18세기에 있어서 불란서혁명(佛蘭西革命)은 그 대표적인 예이지만, 이러한 혁명은 결국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자유가 완전히 복귀될 때까지 계속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절 하나님이 인간조상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시지 않은 이유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므로 인간조상의 타락행위(墮落行爲)를 모르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한편 그들이 타락행위를 감행할 수 없도록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들의 타락행위를 아시면 서도 그것을 간섭하여 막지 않으셨던가? 이것은 아직까지의 인류역사를 통하여 풀려지지 않은 중대한 문제중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행위를 간섭치 않으신 이유로서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 창조원리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을 위하여

창조원리(創造원리(原理))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닮음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을 주관하시듯이 인간도 만물세계를 주관하도록 창조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기 위하여는,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수행하면서 성장하여 완성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성장기간(成長期間)을 우리는 간접주관권(間接主管圈) 혹은 원리결과주관권(原理結果主管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주관권내에 있을 때에는 그들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직접적으로 주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완성된 뒤에야 그들을 직접 주관하시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직접 주관하실 수 없는 성장기간에 있어서 그들의 행위를 간섭하시게 되면 인간의 책임분담을 무시하는 것이 되므로, 따라서 인간에 창조성을 부여하시어 만물의 주관주로 세우시려는 창조원리를 스스로 무시하는 입자에 서시게 된다. 이와 같이 원리가 무시되면, 동시에 원리의 절대성(絶對性)과 완전무결성(完全無缺性)은 상실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자 이시며 완전무결하신 창조주이시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원리도 또한 절대적이며 완전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원리의 절대성과 완전무결성을 위하여, 미완성기(未完성기(成期))에 있는 그들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2. 하나님만이 창조주로 계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신 원리적인 존재와 그 행동만을 간섭하시기 때문에, 범죄행위(犯罪行爲)나 지옥(地獄)과 같은 자기가 창조하시지 않은 비원리적인 존재나 행동은 간섭하실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일 어떠한 존재나 행동을 간섭하시게 되면, 간섭을 받은 그 존재나 행동은 벌써 창조의 가치가 부여되어, 원리적인 것으로서 인정된 것과 같은 결과에 이르게 되는 거다.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 볼 때, 만일 하나님이 인간시조의 타락행위(墮落行爲)를 간섭하시게 되면 그 타락행위에도 창조의 가치가 부여되어서, 그 범죄행위는 원리적인 것으로서 인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범죄행위도 원리적인 것으로서 인정하신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원리를 세우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어디가지나 사탄 때문이므로, 그렇게 되면 사탄이 또 하나의 새로운 원리를 창조한 것이 되어 그도 역시 창조주의 입장에 서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만이 창조주로 계시기 위하여 그들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 인간을 만물의 주관위에 세우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萬物)을 주관하라고 하셨다(창세기 1장 28절).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물을 주관하려면, 만물과 동등한 처지에서는 그를 주관할 수 없으므로 인간은 그를 주관할 수 있는 어떠한 자격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주(創造主)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주관하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계시는 것과 같이, 인간도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갖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성을 부여하시어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하시기 위하여, 성장기간(成長期間)을 두시고 이 기간이 다하기까지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완성되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원리과정을 통하여 완성됨으로써만,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가지고 비로소 만물을 주관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미완성기(未完成期)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고 간섭하시게 되면, 이것은 아직도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을 완수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창조성을 갖지 못함으로써 만물을 주관할 자격이 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주관케 하시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미완성한 인간과 동일한 취급을 하신다는 모순을 초래하게 된다. 그리고 또 이 인간에게 그의 창조성을 부여하심으로서 만물을 주관케 하시기 위하여 세우셨던 창조원리(創造原理)를 스스로 무시하시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에 의하여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하시고 그 원칙을 따라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을 주관위(主管位)에 세우시기 위하여 아직도 간접주관권(間接主管圈)내에 있었던 미완성한 인간의 타락행위를 간섭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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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인류역사 종말론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역사(人類歷史)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또 이것이 어디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를 모르고 살아왔다. 따라서 인류역사의 종말(終末)에 관한 문제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基督敎) 신도들은 다만 성서(聖書)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말세(末世)에는 하늘과 땅이 모두 불에 타서 소멸(消滅)되고(베드로후서 3장 12절{{ 베드로후서 3장 12절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마태복음 24장 29절{{ 마태복음 24장 29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 천사장(天使長)의 나팔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구름 속으로 끌어 올리어 공중(空中)에서 예수님을 상봉(相逢)하리라고(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 17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 - 17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성서의 문자 그대로 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성서의 중요한 많은 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말씀도 무엇을 비유(比喩)하여 말씀하신 것인지, 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은 기독교 신도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는, 먼저 하나님이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創造)하신 목적과, 타락(墮落)의 의의와, 그리고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은 근본문제(根本問題)를 풀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1절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과 인간의 타락

1.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완성

이미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상세히 논술한 바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그의 창조본연의 존재가치(存在價値)를 완전히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인간 이외의 피조물(被造物)은 자연 그대로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원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유의지(自由意志)와 그에 의한 행동을 통하여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유의지와 그에 의한 행동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기쁨을 돌려 드리는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스스로 노력하여서, 그 뜻대로 생활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하여 그 뜻을 알아 가지고, 그 뜻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을 개성완성(個性完成)이라고 한다.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타락 전의 아담, 해와나 선지자(先知者)들이 하나님과 일문일답(一問一答)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인간에게 이와 같이 창조되었던 소성(素性)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을 완성한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는, 몸과 마음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다. 몸은 마음이 거하는 하나의 전(殿)으로서, 마음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거하시게 되므로, 결국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聖殿)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만 생활하게 된다. 따라서 몸과 마음이 일체를 이루는 것과 같이,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장 20절에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개성(個性)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이룸으로써, 성령(聖靈)이 그 안에 살게 되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인간은 신성(神性)을 갖게 되므로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게 되고, 따라서 타락할 수도 없게 된다.

개성을 완성한 사람은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룬 선(善)의 완성체인데, 선의 완성체가 타락된다면 선 그 자체가 파멸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불합리(不合理)한 결과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전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완성된 입장에서 타락되었다면 하나님의 전능성마저 부정될 수밖에 없다. 영원(永遠)한 주체로 계시는 절대자(絶對者)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도 영원성과 절대성을 가져야 하므로, 개성을 완성한 인간은 절대로 타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성을 완성하여 죄를 지을 수 없게 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축복하신 말씀대로(창세기 1장 28절{{ 창세기 1장 28절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선의 자녀를 번식하여 죄 없는 가정과 사회를 이루었다면, 이것이 바로 한 부모를 중심한 대가족(大家族)으로 이루어지는 천국(天國)이었을 것이다. 천국은 마치 개성을 완성한 사람 하나 모양과 같은 세계여서, 인간에 있어 그 두뇌의 종적(縱的)인 명령에 의하여 그의 사지백체(四肢百體)가 서로 횡적인 관계를 가지고 활동하듯이, 그 사회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종적인 명령에 의하여, 서로 횡적인 유대(紐帶)를 맺어 생활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 있어서는, 어느 한 사람이라도 고통을 당하면 그것을 보시고 같이 서러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사회전체가 그대로 체휼하게 되기 때문에, 이웃을 해치는 행위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죄 없는 인간들이 생활하는 사회라 하더라도, 인간이 원시인들과 마찬가지로 미개한 생활들을 그대로 할 수밖에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시고 또 인간이 원하는 천국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라고 하신 말씀대로(창세기 1장 28절), 개성을 완성한 인간들은 과학을 발달시켜 자연계(自然界)를 정복함으로써, 극도로 안락한 사회환경을 이 지상에 이루어 놓아야 하는 것이니, 이러한 창조이상(創造理想)이 실현된 곳이 바로 지상천국(地上天國)인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완성되어 지상천국을 이루고 살다가 육신을 벗고 영계(靈界)로 가게 되면, 바로 거기에 천상천국(天上天國)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은 어디까지나 먼저 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2. 인간의 타락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자세히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아직도 성장기간(成長期間)에 있어서, 미완성(未完成)한 입장에 있었을 때에 타락되었다. 인간에게는 왜 성장기간이 필요하였으며, 인간시조가 미완성기에서 타락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도 이미 창조원리에서 밝혔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聖殿)을 이루지 못하고 사탄이 우거(寓居)하는 전(殿)이 되어 그와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神性)을 갖지 못하고 악성(惡性)을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이 악성을 가진 인간이 악의 자녀를 번식하여 악의 가정과 사회와 세계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바로 타락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지상지옥(地上地獄)이다. 지옥인간들은 하나님과의 종적인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횡적인 유대를 이룰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서 체휼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는 이웃을 해치는 행위를 자행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지상지옥(地上地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육신을 벗은 후에는 천상지옥(天上地獄)으로 가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 주권의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사탄 주권의 세계를 이루게 되었다. 사탄을 세상임금(요한복음 12장 31절{{ 요한복음 12장 31절 :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 또는 세상의 신(고린도후서 4장 4절{{ 고린도 후서 4장 4절 :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2절 구원섭리

1. 구원섭리는 곧 복귀섭리다.

이 죄악(罪惡)의 세계는 인간이 서러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도 서러워하시는 세계인 것이다(창세기 6장6절{{ 창세기 6장 6절 :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설움의 세계를 그대로 방치하실 것인가? 기쁨을 누리시려고 창조하셨던 선(善)의 세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설움이 가득한 죄악의 세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설움이 가득한 죄악의 세계로 영속할 수밖에 없이되었다면, 하나님은 창조에 실패한 무능한 하나님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필코 이 죄악의 세계를 구원(救援)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어느 정도로 구원하셔야 할 것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그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어야 하므로,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 죄악의 세계에서 사탄의 악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사도행전 26장 18절{{ 사도행전 26장 18절 :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 먼저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하기 전의 입장을 복귀(復歸)하는 데까지 구원하시고, 그 위에 선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시어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는 데까지(사도행전 3장 21절{{ 사도행전 3장 21절 :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병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병들기 전의 상태로 복귀시킨다는 뜻이요,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곧 빠지기 전의 입장으로 복귀시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죄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곧 죄가 없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시킨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는 곧 복귀섭리(復歸攝理)인 것이다(사도행전 1장 6절{{ 사도행전 1장 6절 :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 마태복음 17장 11절{{ 마태복음 17장 11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

타락(墮落)은 물론 인간 자신의 과오로 말미암아 되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이란 결과도 있을 수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이 결과에 대하여 창조주(創造主)로서의 책임을 지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잘못된 결과를 창조본연의 것으로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존(永存)하시는 주체이시므로, 그의 영원한 기쁨의 대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도 역시 영원성을 갖지 않으면 아니된다. 인간에게는 이와 같이 영원성을 두고 창조하셨던 창조 원리적인 기준이 있기 때문에, 타락된 인간이라고 해서 이를 아주 없애버리어 창조원리(創造原理)를 무위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인간을 구원하시어 그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하시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3대 축복(삼대축복(三大祝福))을 이루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므로(창세기 1장 28절{{ 창세기 1장 28절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이사야 46장 11절{{ 이사야서 46절 11절 :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 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 즉 정녕 행하리라. }}에 "내가 말하였은 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 즉 정녕 행하리라고하신 말씀대로, 사탄 때문에 잃어버렸던 이 축복들을 복귀하는 섭리를 하심으로써, 약속의 뜻을 이루어 나오셨던 것이다. 마태복음 5장 48절{{ 마태복음 5장 48절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 전하라. }}에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 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도, 곧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본연의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신성(神性)을 갖게 됨으로써,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중심하고 보면 하나님과 같이 완전하기 때문이다.

2. 복귀섭리의 목적

그러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던 선의 대상인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지상에 창조하시고, 그들을 중심하고 먼저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시려 하셨다. 그러나 인간 시조(始祖)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복귀섭리의 제1차적인 목적도 역시 지상천국을 복귀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나(마태복음 6장 10절{{ 마태복음 6장 10절 :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 }}),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하신 말씀(마태복음 4장 17절{{ 마태복음 4장 17절 :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등은 모두 복귀섭리의 목적이 지상천국을 복귀하시려는 데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3. 인류역사는 곧 복귀섭리역사다

우리는 위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는 바로 복귀섭리(復歸攝理)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인류역사(人類歷史)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그들로 하여금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선(善)의 세계를 복귀케 하시려는 섭리역사(攝理歷史)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역사는 곧 복귀섭리 역사라는 것을 여러 면으로 고찰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 문화권 발전사(문화권발전사(文化圈發展史))의 입장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악한 인간일지라도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려는 본심(本心)만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선이며, 어떻게 해야 선을 이룰 것인가 하는 것은 지능에 속하는 것이어서,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에, 선을 찾아 세우려는 그들의 근본목적만은 모두 동일하다.

그러면 어찌하여 인간은 본심은 누구도 막을 수없는 힘을 가지고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선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므로, 비록 타락인간은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아 선의 생활은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선을 추구하는 그 본심만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들로써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의 갈 곳은 결국 선(善)의 세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본심이 아무리 선을 지향하여 노력한다고 하여도, 이미 악주권하(惡主權下)에 놓여진 이 세계에서는 그 선의 실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시공을 초월한 세계에서 그 선의 주체를 찾으려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니, 이러한 필연적인 요구에 의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종교(宗敎)인 것이다. 이와 같이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르게 된 인간은, 종교를 세워 끊임없이 선을 찾아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 것이었기 때문에, 설혹 종교를 받들고 있었던 개인이나 민족이나 국가는 망하였다 할지라도, 종교 그 자체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남아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국가흥망사(國家興亡史)를 중심하고 더듬어 보기로 하자.

먼저 중국(中國)의 역사를 보면, 춘추전국(春秋戰國)의 각 시대를 거치어 진(秦) 통일 시대가 왔고, 전한(前漢), 신(新), 후한(後漢), 삼국(三國), 서진(西晉), 동진(東晉), 남북조(南北朝)의 각 시대를 거치어 수(隨) 당(唐) 통일시대가 왔으며, 오대(五代), 북송(北宋), 남송(南宋), 원(元), 명(明), 청(淸)의 시대를 거치어 오늘의 중화민국(中華民國)에 이르기까지 복잡다양한 국가의 흥망과 정권의 교체를 거듭하여 내려왔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儒). 불(佛). 선(仙)의 극동종교(極東宗敎)만은 엄연히 그대로 남아져 있다.

다음으로 인도(印度)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마우리아, 안드라, 굽다, 바루다나, 사만, 가즈니, 무갈 제국을 거쳐서 오늘의 인도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변천은 거듭되어 내려왔으나 힌두교만은 쇠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중동지역(中東地域)의 역사를 보면 사라센제국, 동. 서 칼리프, 셀주크 터어키, 오스만 터어키 등 나라의 주권은 여러 차례 바뀌어 내려왔으나, 그들이 신봉하는 이슬람교만은 연면하게 그 명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나아가 유럽사의 주류에서 그 실증을 찾아보기로 하자. 유럽의 주도권은 그리스, 로마, 프랑크, 스페인과 폴투갈을 거쳐 일시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지나 영국으로 옮겨갔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미국과 소련으로 나뉘고 있다. 그러나 기독(基督敎)만은 그대로 융흥(隆興)해 왔으며, 유물사관(唯物史觀) 위에 세워진 전제정체하(專制政體下)의 소련에서마저 기독교는 아직도 멸할 수 없는 것으로서 남아져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모든 국가 흥망의 발자취를 깊이 더듬어 보면, 종교를 박해하는 나라는 망하였고, 종교를 보호하고 육성시킨 나라는 흥하였으며, 그 나라의 주권은 보다 더 종교를 숭앙(崇仰)하는 나라에로 넘겨져간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종교를 박해하고 있는 공산주의세계(共産主義世界)가 괴멸될 날이 기필코 오리라는 것은 종교사(宗敎史)가 실증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에는 많은 종교가 오고 갔다. 그 가운데서 영향력이 큰 종교는 반드시 문화권(文化圈)을 형성하여 왔는데, 문헌에 나타나 있는 문화권만 해도 21 내지 26개나 된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열등한 것은 보다 우수한 것에 흡수되었거나 또는 융화되어 왔다. 그리하여 근세에 이르러서는 위에서 열거한대로 수다한 국가 흥망의 굽이침 속에서, 결국 극동문화권(極東文化圈), 인도교문화권(印度敎文化圈), 회회교문화권(回回敎文化圈), 기독교문화권(基督敎文化圈) 등의 4대 문화권이 남아지게 되었고, 이것들은 다시 기독교를 중심한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군을 형성해 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선을 지향해 온 모든 종교의 목적을 함께 달성해야 할 초종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역사적인 귀추로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화권의 발전사가, 수많은 종교의 소장(消長) 또는 융합(融合)에 따라, 결국 하나의 종교를 중심한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역사가 바로 하나의 통일된 세계에로 복귀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둘째로, 종교와 과학의 동향으로 보아도, 우리는 인류역사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타락인간의 양면의 무지(無知)를 극복하기 위한 종교와 과학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함은 이미 총서(總序)에서 논술하였다. 이와 같이 역사이래 서로 관련이 없이 독자적으로 발달해 온 종교와 과학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각각 제 갈 곳을 다 가서, 한 자리에서 서로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류역사가 이제까지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를 복귀하는 섭리노정을 걸어나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墮落)되지 않았다면, 인간의 지능이 영적인 면에서 최고도에까지 향상하였었을 것이기 때문에, 육적인 면에서도 최고도로 발달되어, 과학은 그 때 극히 단시일 내에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과학사회(科學社會)는 벌써 인간시조 당시에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무지에 빠지게 되면서, 그러한 사회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과학으로써 그 무지를 타개하면서 창조본연의 이상적 과학사회를 복귀하여 나왔다. 그런데 오늘의 과학사회는 극도로 발달되어, 외적으로는 이상사회(理想社會)에로 전환될 수 있는 그 전 단계에까지 복귀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투쟁역사(鬪爭歷史)의 귀추로 보아도,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물을 빼앗고 땅을 빼앗으며 사람을 빼앗으려는 싸움은, 인류사회의 발달과 더불어 벌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 되어왔다. 그리고 이 싸움은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중심한 싸움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나와, 오늘에 이르러는 민주(民主)와 공산(共産) 두 세계가 마지막 싸움을 겨루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제 인류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이 마지막 때에 있어서, 천륜은 드디어 재물이나 땅이나 사람을 빼앗아 가지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 온 역사의 단계를 지나서,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이름을 띠고 이 땅에 찾아왔다. 1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패전국가(敗戰國家)가 식민지를 내놓더니, 2차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전승국가(戰勝國家)들이 차례로 식민지를 내놓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 오늘의 강대국들은, 그들의 일개 도시만도 못한 약소국가들을 유엔에 가입시키고, 그들을 먹여 살릴 뿐 아니라, 자기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주어, 모두 형제국가들을 만들고 있다.

그러면 이 마지막 싸움이란 어떠한 싸움일 것인가? 그것은 이념(理念)의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유물사관(唯物史觀)을 완전히 전복시킬 수 있는 진리가 나오지 않는 한, 민주와 공산의 두 세계의 싸움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을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 해결할 수 있는 진리가 나올 때, 비로소 종교를 부인하고 과학편중의 발달을 꾀해 나온 공산주의 사상은 전복되고, 두 세계는 하나의 이념 아래 완전히 통일될 것이다. 이와 같이 투쟁역사의 귀추로 보아도 인류역사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를 복귀하는 섭리역사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로, 우리는 성서(聖書)를 중심하고 좀더 이 문제를 알아보기로 하자. 인류역사의 목적은 '생명나무'(창세기 2장 9절{{ 창세기 2장 9절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를 중심한 에덴동산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전편 제2장 제1절 1). 그런데 에덴동산은 아담과 해와가 창조된 어떤 국한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의미한다. 만일 에덴동산이, 인간 시조(始祖)가 창조되었던 그 어느 한정된 지역만을 말한다면, 이 땅에 충만하도록 번성하라 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창세기 1장 28절{{ 창세기 1장 28절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에 의하여 번식될 그 숱한 인류가 어떻게 그 좁은 곳에서 다 살 수 있을 것인가?

인간조상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중심하고 세우려던 에덴동산은 사탄에게 내주게 되었었다(창세기 3장 24절{{ 창세기 3장 24절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 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 그래서 알파로 시작된 인류 죄악역사(罪惡歷史)가 오메가로 끝날 때의 타락인간(墮落人間)의 소망은, 죄악으로 물든 옷을 깨끗이 빨아 입고, 복귀된 에덴동산으로 다시 들어가, 잃어버렸던 그 '생명나무'를 다시 찾아 나아가는 데 있다고 요한계시록 22장 13절{{ 요한계시록 22장 13 - 14절 :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는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이 성서의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타락론(墮落論)에서 밝혀진 바이지만, '생명나무'는 완성한 아담 곧 인류의 참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다. 부모가 타락되어 그의 후손도 원죄(原罪)를 가진 자녀들이 되었으니, 이 죄악의 자녀들이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되기 위하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두 거듭나지(중생(重生)) 않으면 아니된다(중생론 참조). 그러므로 역사는 인류를 다시 낳아 주실 참 아버지 되시는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이니, 역사의 종말기(終末期)에 들어 성도(聖徒)들이 소망하고 찾아 나아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는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보아도, 역사의 목적은 '생명나무'로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창조본연의 에덴동산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 내지 7절{{ 요한계시록 21장 1 - 7절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더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에도, 역사의 종말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던 옛 하늘과 옛 땅으로 복귀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9절 내지 22절에는 사탄의 주관 하에서 탄식하고 있는 만물(萬物)도 말세에 불에 타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함으로써 새롭게 되기 위하여(요한 계시록 21장 5절{{ 요한계시록 21장 5절 :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 자기를 주관해 줄 수 있는 창조본연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복귀되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여러 면으로 고찰하여 볼 때, 인류역사는 창조본연의 세계에로 복귀하는 섭리역사(攝理歷史)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3절 말세

1. 말세의 의의

하나님이 인간 조상(祖上)에게 허락하셨던 3대 축복(삼대축복(三大祝福)은 그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중심하고 이루어지지 않고, 사탄을 중심하고 비원리적(非原理的)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논술하였다.

그런데 악으로 시작된 인류역사는 실상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이기 때문에, 사탄주권의 죄악세계(罪惡世界)는 메시아의 강림(降臨)을 전환점으로 하여, 하나님을 중심하고 3대 축복(삼대축복(三大祝福)을 이룬 선주권(善主權)의 세계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탄주권의 죄악세계가 하나님 주권의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에로 교체되는 시대를 말세(末世)라고 한다. 따라서 말세는 지상지옥이 지상천국으로 바뀌어지는 때를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는 지금까지 기독교 신도들이 믿어 온 대로의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는 공포의 때가 아니고, 창세이후 유구한 역사노정을 통하여 인류가 유일한 소망으로 바라고 나왔던 기쁨의 한 날이 실현되는 때인 것이다.

상세한 것은 후편 제1장으로 미루거니와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이래, 죄악세계를 청산하고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선의 세계를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여러 차례 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인간이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지 못하여,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곤 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말세가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은 사실을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노아 때도 말세였다  123

창세기 6장 13절{{ 창세기 6장 13절 :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 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의 기록을 보면 노아 때도 말세였기 때문에,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찌하여 노아 때가 말세였던가? 하나님은 인간시조가 타락함으로써 시작된 사탄을 중심한 타락세계를, 1600년의 죄악사(罪惡史)를 일기로 하여 홍수심판(洪水審判)으로 멸하시고, 하나님만을 신봉(信奉)하는 노아가정을 세우심으로써, 그 믿음의 터 위에 하나님주권의 이상세계를 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노아 때가 말세였던 것이다(후편 제1장 제2절 참조). 그러나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그들이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창세기 9장 22절{{ 창세기 9장 22절 :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

2) 예수님 때도 말세였다                            p.124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이어서 변할 수 없기 때문에(전편 제6장),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다시 다른 선지자(先知者)들을 부르시어 믿음의 터를 닦으시고, 그 터 위에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써, 사탄을 중심한 죄악의 세계를 멸하시고 하나님을 중심한 이상세계(理想世界)를 복귀하려 하셨다. 따라서 예수님 때도 말세(末世)였던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스스로 심판주(審判主)로 오셨다고 말씀하셨고(요한복음 5장 22절{{ 요한복음 5장 22절 : 아버지께서 아무도 비판하지 아니하시고 비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그 때도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말라기 4장 1절{{ 말라기 4장 1절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이라고 예언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를 복귀하려고 오셨던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불신함으로써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뜻도 이루어지지 않고 재림(再臨) 때에로 다시 연장되었다.

3) 예수님의 재림 때도 말세다

유대 민족의 불신을 당하게 된 예수님은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영적인 구원만을 이루셨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재림하신 후에야 영육(靈肉) 아울러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완수하여(전편 제4장 제1절 4) 지상천국을 복귀하시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 때도 또한 말세인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재림 때)에도 그러하리라(누가복음 17장 26절{{ 누가복음 17장 26절 :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고 말씀하셨고, 그가 재림하실 때도 말세가 되어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날 것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24장 29절{{ 마태복음 24장 29절 :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

2. 말세의 징조에 관한 성구

이미 위에서 논한 바대로, 많은 기독교 신도들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말세(末世)에는 천지에 이변이 일어나며, 인간사회에도 현대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변이(變異)가 생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를 복귀해 가는 섭리역사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세의 징조는 실제에 있어서 그 문자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세에 관한 성서의 모든 기록은 각각 무엇을 상징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1) 하늘과 땅을 멸하고(베드로후서 3장 12절)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심(요한계시록 21장 1절, 베드로후서 3장 13절, 이사야 66절 22절)

창세기 6장 13절을 보면 노아 때도 말세가 되어 땅을 멸한다고 하셨지만, 사실상 멸하지는 않으셨다. 전도서 1장 4절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하신 말씀이나, 시편 78편 69절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라고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땅은 영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니, 그의 대상도 영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대상으로 창조된 땅도 영원한 것이 아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이, 사탄으로 말미암아 파멸되어 없어질 세계를 창조하시고 기뻐하셨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 말씀은 무엇을 비유하신 것인가? 한 국가를 멸한다는 것은 그의 주권(主權)을 멸한다는 것을 의미함이요, 또 새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요한계시록 21장 1절{{ 요한계시록 21장 1절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새 주권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을 멸한다는 것은 그를 주관하고 있는 사탄주권을 멸한다는 뜻이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운다는 것은 예수님을 중심한 하나님 주권하의 새로운 천지(天地)를 복귀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2) 하늘과 땅을 불로써 심판하심(베드로후서 3장 12절)

베드로후서 3장 12절을 보면 말세에는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말라기 4장 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 때도 그가 심판주(審判主)로 오셔서(요한복음 5장 22절, 요한복음 9장 39절) 불로써 심판하신다고 예언되어 있고, 또 누가복음 12장 49절에는 예수님이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다는 말씀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예수님이 불로써 심판하신 아무 흔적도 우리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을 비유하신 것임에 틀림없다. 야고보서 3장 6절혀는 곧 불이요라고 한 말씀에 의하여, 불 심판은 곧 혀의 심판이요, 혀의 심판은 곧 말씀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니, 불 심판은 곧 말씀심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말씀심판에 관한 성구(聖句)의 예를 찾아보자. 요한복음 12장 48절에는, 예수님을 저버리고 그의 말씀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였으며, 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에는,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 즉 말씀으로 그를 죽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사야 11장 4절에서는, 그 입의 막대기(혀)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말씀)으로 악인(惡人)을 죽이 리라고도 말씀하였으며, 요한복음 5장 24절을 보면 예수님이 자기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고 하신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불 심판은 곧 말씀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요한복음 1장 3절에 인간은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인간 시조가 말씀의 실체로서 말씀의 목적을 완수해야 할 것이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타락되어 말씀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또다시 말씀에 의하여, 타락인간을 재창조하심으로써 말씀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으니, 이것이 곧 진리(성서)에 의한 복귀섭리인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또 말씀 완성 자로 재림하셔서, 스스로 말씀심판의 기준이 됨으로써, 모든 인류가 어느 정도 말씀의 목적을 이루었는가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이렇듯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이 말씀의 목적을 이루려는데 있으므로, 그 목적을 위한 심판도 말씀으로 그의 기준을 세워 행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누가복음 12장 49절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씌어 있는 바,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의 실체로 오셔서(요한복음 1장 14절) 생명의 말씀을 이미 선포하셨으나, 유대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시고 한탄하여 하신 말씀이다.

3) 무덤에서 시체가 일어남(마태복음 27장 52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마태복음 27장 5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썩어 버린 그들의 육신이 다시 일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전편 제5장 제2절 3). 만일 영계(靈界)에 머물러 있던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성도들이, 성서의 문자 그대로 무덤에서 살아 나와 성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반드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때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을지라도, 그들의 증언을 듣고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었을 것인가? 그리고 그렇듯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육신(肉身)을 쓰고 무덤에서 다시 일어났다면, 그 후의 그들의 행적(行跡)에 관한 기사가 반드시 성서에 남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는 그들에 관한 아무런 기사도 달리 씌어 있지 않다.

그러면 무덤에서 살아 나온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마치 모세와 엘리야의 영인체(靈人體)가 변화산상(變化山上)에서 예수님 앞에 나타났었던 것처럼(마 17:3), 구약시대의 영인들이 재림부활(再臨復活)을 위하여 지상에 재림한 것을 영적으로 보고(전편 제5장 제2절 3) 기록한 말씀이다.

그러면 무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낙원(樂園)에서 보면,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성도들이 머물러 있던 영형체급 영인(靈形體級靈人)의 세계는 보다 어둠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곳을 가리켜 무덤이라고 하였다. 구약시대의 영인들은 모두 이 영계에 머물러 있다가 지상성도들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4) 지상인간들이 끌어 올리워 공중에서 주를 영접함(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공중은 공간적인 하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 성서에 있어서 땅은 타락된 악주권(惡主權)의 세계를 의미하고, 하늘은 죄가 없는 선주권(善主權)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은 땅에도 아니 계시는 곳이 없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태복음 6장 9절)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땅에서 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요한복음 3장 13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중에서 주(主)를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사탄주권을 물리치시고, 지상천국을 복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선 주권의 세계에서 성도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5)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짐(마태복음 24장 29절)

창세기 37장 9절 이하를 보면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번째인 요셉 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에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요셉이 커서 애급의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되었을 때, 과연 이 꿈대로 그 부모와 형제들이 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이 성경 말씀을 보면 해와 달은 부모를 상징했고, 별들은 자녀들을 상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독론(基督論)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예수와 성신(聖神)은 아담과 해와 대신 인류를 중생(重生)해 주실 참부모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해와 달은 예수와 성신을 상징하고, 별들은 자녀된 성도들을 상징한 것이다. 성서에서 예수님을 참 빛으로 비유한 것은(요한복음 1장 9절), 그가 ‘말씀’으로 육신을 이루신 분으로 오셔서(요한복음 1장 14절) 진리의 빛을 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하는 햇빛은 예수님이 주신 말씀의 빛을 이름이며, 달빛은 진리의 신으로 오신 성신(요한복음 16장 13절)의 빛을 이름이다. 그러므로 해와 달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성신에 의한 신약(新約)의 말씀이 빛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신약의 말씀이 빛을 잃게 될 것인가? 마치 예수님과 성신이 어셔서 구약(舊約)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신약의 말씀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말씀이 빛을 잃게 되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셔서 신약의 말씀을 이루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위한(요한계시록 21장 1절{{ 요한계시록 21장 1절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새 말씀을 주시게 되면(본장 제 5절 1 참조), 초림(初臨) 때에 주셨던 신약의 말씀은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여기에 말씀이 그 빛을 잃는다는 것은 새 시대가 옴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의 사명기간이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별들이 떨어진다는 것은 말세(末世)에 있어서의 성도들이 모두 실족(失足)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아'의 강림(降臨)은 열망해 오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반대하다가 전부 떨어진 것 같이, 예수님의 재림을 열망하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그 날에 실족하게 됨으로써, 그와 같이 떨어지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후편 제6장 제2절 2 참조).

누가복음 18장 8절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으냐하신 말씀이나, 마태복음 7장 23절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가 잘 믿는 성도들을 보시고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책망하시면서, "떠나가라"고 배척하게 될 것으로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이 끝날 의 성도들이 불신으로 실족하게 될 것을 아시고 경고하신 것이었다.

4절 말세와 현세

예수님께서 장차 있을 베드로의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에,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 가고 질문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가 무슨 상관이냐(요한복음 21장 18 - 22절)고 대답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들은 사도(使徒)들은 모두 '요한'의 생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마태복음 10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고하셨고, 마태복음 16장 28절에는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들에 의하여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했거니와,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성도들은 저마다 자기 당대(當代)에 예수님이 오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말세라는 절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말세(末世)에 대한 근본 뜻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으로 세우고 이루어 나오시던 3대 축복(三大祝福)이 복귀되어 가는 현상으로 보아, 현세가 바로 말세임을 입증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마태복음 24장 32절)라고 하셨다.

1. 제1축복 복귀의 현상

이미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논술한 바,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약속하셨던 제1축복(제일축복(第一祝福))은 바로 그들이 개성(個性)을 완성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인간(墮落人間)을 개성을 완성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해 나오신 하나님의 섭리가 그 최종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아래와 같은 여러 현상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첫째로 타락인간의 심령(心靈)이 복귀되어 가는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인간이 완성되면 하나님과 완전히 심정적인 일체를 이루어, 서로 교통(交通)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함은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도 불완전한 상태이기는 하였지만, 하나님과 일문일답하던 단계에서 타락되어, 그의 후손은 하나님을 모르는 데까지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타락된 인간이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게 됨에 따라 점차 그 심령이 복귀됨으로써, 말세에 이르러서는 사도행전 2장 17절에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 이들은 꿈을 꾸리라고하신 말씀대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영통(靈通)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에 이르러서는 영통하는 성도들이 우후(雨後)의 죽순(竹筍) 같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아, 현세는 말세이기 때문에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제1축복(第一祝福)을 복귀할 수 있는 시대에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타락인간이 본심(本心)의 자유를 복귀해 가고 있는 역사적인 귀추가 더욱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의 주관 권에 들어, 본심의 자유가 구속을 받게 됨으로써,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현세에 이르러서는 육신의 생명을 버리고라도, 본심의 자유를 찾으려는 심정이 고조되고 있으니, 이것은 말세(末世)가 되어 개성을 완성함으로써, 타락인간이 사탄에게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제1축복(第一祝福)을 복귀하여, 하나님 앞으로 자유로 나아갈 수 있는 시대에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타락인간의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성이 복귀되어 가는 현상으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있다. 인간의 창조본연의 가치를 횡적으로 보면 누구나 동등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그다지 귀중한 것 같이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을 중심하고 종적으로 보면, 각 개성은 가장 존귀한 천주적인 가치를 제각기 띠고 있는 것이다(전편 제7장 제1절).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이러한 가치를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현세에 이르러 민주주의사상(民主主義思想)이 고조됨에 따라 인간이 노예 해방, 흑인 해방, 약소민족 해방 등을 주장하며, 인권옹호(人權擁護)와 남녀평등(男女平等)과 만민평등(萬民平等)을 부르짖음으로써, 창조본연의 개성의 가치를 최고도로 추구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것은 바로 말세가 다 되어 타락 인간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제1축복을 복귀할 수 있는 시대에로 들어가고 있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넷째로 타락인간의 본성(本性)의 사람이 복귀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세계는 완성한 사람 하나 모양의 세계로서, 그 세계의 인간은 모두 하나님과 종적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인간 상호간에 있어서도 횡적으로 일체를 이루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종횡(縱橫)으로 얽히어 한 몸같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종적인 사랑이 끊어졌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의 횡적인 사랑도 따라서 끊어지게 되어, 인류역사는 투쟁으로써 엮어져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세(現世)에 이르러서는 박애주의사상(博愛主義思想)이 고조되면서 인간이 점점 그 본성애(本性愛)를 찾아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세는 하나님의 제1축복(제일축복(第一祝福))을 복귀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개성을 완성할 수 있는 말세(末世)에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제2축복 복귀의 현상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은 아담과 해와가 참 부모로 완성되어, 선의 자녀를 번식함으로써 선주권(善主權)의 가정과 사회와 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는 타락되어, 악주권(惡主權)에 구속된 세계를 이루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편으로 종교를 세워 역사 하심으로써, 내적인 사탄 분립에 의한 심령복귀(心靈復歸)의 섭리를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투쟁과 전쟁으로 외적인 사탄 분립을 하심으로써, 내외 양면에 걸친 주권복귀(主權復歸)의 섭리를 해 내려 오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역사는 內外 양면의 사탄 분립에 의한 복귀섭리(復歸攝理)로써, 장차 참부모 되신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자녀를 찾아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을 복귀해 온 것이므로, 종교를 중심한 문화권의 발전 사와 국가흥망사에 의해 나타난 내 외 양면에 걸친 하나님의 주권 복귀의 현상으로 보아, 현세가 바로 말세(末世)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문화권 발전사가 어떻게 흘러 내려와서, 현세를 말세에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문화권 발전사에 관한 문제는 이미 여려 차례 논술한 바이지만, 하나님은 타락인간에게 성현(聖賢)들을 보내시어,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심을 따라 종교를 세우게 하심으로써, 그 종교를 중심한 문화권을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역사상에는 많은 문화권이 일어났던 것이었으나,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이것들은 서로 융합 또는 흡수되어, 현세에 이르러는 기독교(基督敎)를 중심한 하나의 세계적인 문화권을 형성해 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추세는 기독교의 중심인 예수님을 중심하고 모든 민족이 같은 형제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이 복귀되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전인류(全人類)의 참부모를 찾아 세워 가지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중생(重生)하여 선의 자녀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본연(創造本然)의 대가족의 세계를 복귀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기독교가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성할 중심종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에 이르러는 세계가 기독교를 중심하고 하나의 문화권으로 형성되어, 인류의 참 부모 되신 예수와 성신(전편 제7장 참조)을 중심하고 모든 인간이 선의 자녀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 복귀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우리는 현세가 바로 말세(末世)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국가흥망사는 어떻게 주권복귀(主權復歸)의 목적을 향하여 흘러와서, 현세를 말세로 이끌어 가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투쟁이나 전쟁을 단순히 어떠한 이해관계나 이념의 상충에서 빚어지는 결과라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섭리(根本攝理)를 모르는 데서 일어나는 잘못이다. 인류역사는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惡主權)으로 출발하여 죄악의 역사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남아 있는 한, 그 역사의 목적도 어디까지나 사탄을 분립하여 하나님의 선주권(善主權)을 복귀하는 데 있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악주권의 세계에 전쟁도 분열도 없다면, 그 세계는 그대로 영속(永續)할 것이요, 따라서 선주권은 영원히 복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타락인간에게 성현(聖賢)들을 보내시어, 선을 세우고 종교를 일으키심으로써, 보다 선한 주권으로 하여금 보다 악한 주권을 멸하게 하시면서, 점차적으로 하늘편 주권을 복귀하시는 섭리를 해 오신 것이다. 따라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투쟁과 전쟁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후편에서 더욱 상세히 논하겠거니와 인류역사는 탕감복귀(蕩減復歸)의 섭리노정을 밟아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국한된 시간권내에서만 보면, 악이 승세(勝勢) 한 때도 없지 않았으나, 결국 그것은 패망하여 보다 선한 판도 내에 흡수되곤 하였다. 그러므로 전쟁으로 인한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선주권을 복귀하기 위한 섭리노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 가나안 7족을 멸하셨던 것이고, 사울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아멜렉족과 그에 속한 짐승들을 전멸시키지 않았다가 엄벌을 받았던 것이다(사무엘상 15장 18 - 23절). 하나님은 이와 같이 직접 이민족(異民族)들을 멸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선민(選民)이었던 북조 이스라엘도 악으로 돌아갈 때, 아낌없이 그들을 앗시리아에 내주시어 멸망케 하셨던 것이다(열왕기하 17장 23절). 하나님이 이와 같이하셨던 것은, 오직 악주권(惡主權)을 멸하시고 선주권(善主權)을 복귀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같은 하늘편 안에서의 개인적인 투쟁은 선주권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가 되므로 악이 되지만, 선주권이 악주권을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이것은 선이 된다.

이와 같이 사탄 분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땅과 재물을 세계적으로 빼앗아 하늘편 주권으로 복귀하는 데 이르렀고, 인간에 있어서도 개인으로부터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로 하늘편 기대를 넓혀, 오늘날에는 이것을 세계쩍으로 복귀하는 데 이르렀다. 이렇듯 사탄분립을 위한 섭리가 씨족주의시대(氏族主義時代)에서 출발하여, 봉건주의시대(封建主義時代)와 군주주의시대(君主主義時代)를 거치어 민주주의시대(民主主義時代)로 들어오게 된 오늘날에 와서는, 이 인간세계를 하늘편 주권을 세우는 민주주의세계와, 사탄편 주권을 세우는 공산주의세계의 두 세계로 분립하여 놓았다.

이와 같이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惡主權)으로써 출발한 인류 역사는, 한편으로 종교와 철학과 윤리에 의하여 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창조본성(創造本性)이 환기됨에 따라, 점차 악주권에서 선주권(善主權)을 위한 세력이 분립되어, 마침내 세계적으로 대립되는 두 주권을 형성하는데 이른 것이다. 그런데 목적이 상반되는 이 두 주권이 결코 공존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류역사의 종말에 이르르면, 이것들은 반드시 한 점에서 교차(交叉)되어, 이념을 중심하고 내적으로 상충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군사력을 중심하고 외적으로 전쟁을 하여, 결국 사탄주권은 영원히 파멸되고, 하늘편 주권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단일주권(單一主權)으로서 복귀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세는 선주권을 지향하는 하늘편 세계와 사탄을 중심한 악주권의 세계가 대결하여, 서로 교차되고 있는 때이므로 또한 말세인 것이다.

이와 같이 악주권에서 선주권을 분립하여 나온 인류역사는, 마치 흐르는 흙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흙은 가라앉고 물은 위에 뜨게 되어, 나중에는 흙과 물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과 같이,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악주권은 점차 쇠망(衰亡)의 길로 내려오고, 선주권은 융흥(隆興)의 길로 올라가게 되어,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이 두 주권은 얼마동안 교차되었다가, 결국 전자는 영원히 멸망하고 후자는 하나님의 주권으로서 영원히 남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善) 악(惡) 두 주권의 역사노정(歷史路程)이 교차되는 때가 말세(末世)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때는 아담과 해와가 타락된 장성기 완성급(長成期 完成級)의 시기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때이므로, 마치 에덴동산의 인간시조가 어디에다 중심을 두어야 할지 모르고 혼돈되었던 것과 같이 모든 인간들도 사상의 혼돈을 일으키어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에 있어 이와 같이 말세가 되어, 선 악의 두 주권이 교차되었던 때는 여러 차례 있었다.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노아 때나 예수님 때도 말세여서 이 두 주권은 서로 교차되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인간이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여 악주권을 멸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권분립(主權分立)의 섭리를 다시 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 재림기(再臨期)에 있어 다시 한번 두 주권의 교차가 있게 되는 것이다. 복귀섭리노정은 이렇듯 주기적으로 상사(相似)의 나선상(螺線狀)을 반복하면서 원형과정(圓形過程)을 거쳐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지향하여 내려왔기 때문에, 역사상에는 필연적으로 동시성의 시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후편 제3장 제1절 참조).

3. 제3축복 복귀의 현상

하나님의 제3축복(第三祝福)은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어,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대한 주관성(主管性)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피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주관성은 내외(內外) 양면의 주관성이 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이 양면의 주관성을 상실하였던 것인데, 현세(現世)에 이르러 이것이 복귀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세는 말세(末世)라는 것을 알수 있는 것이다.

내적 주관성이라는 것은 심정적 주관성을 의미한다. 인간이 개성을 완성하면 하나님과 심정적인 일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그대로 체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완성됨으로써,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과 동일한 심정을 가지고, 피조세계에 대하여 사랑을 주고 그로부터 미(美)를 돌려 받게 될 때, 인간은 피조세계에 대한 심정적인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심정으로써 피조세계를 대할 수 없게 되었었다. 그러나 종교(宗敎), 철학(哲學), 윤리(倫理) 등에 의한 하나님의 복귀섭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타락인간의 심령(心靈)이 점차로 밝아지게 되어, 현세에 이르러는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대한 심정적인 주관자의 자격을 복귀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 주관성은 과학(科學)에 의한 주관성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이 완성되어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과 동일한 심정을 가지고 피조세계를 대하여 내적 주관을 할 수 있었다면, 인간의 영감(靈感)은 고차적으로 발달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과학의 발달도 극히 단시일에 최고도에 달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인간은 그렇게 됨으로써 피조물(被造物)에 대한 외적인 주관을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일찍이 천체(天體)를 비롯한 자연계(自然界) 전체를 완전히 정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경제발전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안락한 생활환경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심령이 어두워짐으로써, 피조물에 대한 내적인 주관성을 상실하게 되어, 동물과 같이 영감이 둔한 미개인으로 영락(零落)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외적인 주관성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의하여 심령이 밝아짐에 따라, 피조물에 대한 내적인 주관성도 복귀되어 왔고, 그에 따라 피조물에 대한 외적인 주관성도 점차로 복귀되어 왔기 때문에, 현세에 이르러서는 과학의 발달도 최고도에 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의 발달에 따르는 경제발전으로 말미암아, 현대인은 극도로 안락한 생활환경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타락인간이 피조세계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함에 따라, 하나님의 제3축복(第三祝福)이 복귀되어 가는 현상을 볼 때, 우리는 현세가 말세(末世)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여러 번 보아 온 바와 같이, 문화권(文化圈)의 발전도 하나의 종교를 중심하고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 가고있고, 국가형태도 하나의 세계적인 주권기구를 지향하여, 國際聯盟에서 국제연합(國際聯合)으로,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는 세계정부(世界政府)를 모색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을 놓고 보더라도 세계는 하나의 공동시장(共同市場)을 이루어 가는 추세에 있으며, 극도로 발달된 교통기관과 통신기관은 시간과 공간을 단축시켜서 인간으로 하여금 지구를 하나의 정원과 같이 거닐고 또 교통할 수 있게 하였으며, 동서(東西)의 이색민족(異色民族)들을 한 가족처럼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인류는 사해동포(四海同胞)의 형제애(兄弟愛)를 부르짖고 있다. 그러나 가정은 부모가 있음으로써만 이루어지며, 또 거기에서만 진정한 형제애는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인류의 부모 되신 예수님만 재림하시면 전 인류는 하나의 정원에서 하나의 대가족(大家族)을 이루어 가지고 단란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더라도 현세는 말세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흘러온 역사가 인류에게 주어야 할 최후의 선물이 한 가지 있으니, 그것은 목적 없이 한 정원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낯선 이 나그네들을, 한 부모를 중심한 한 식구로 묶어 줄 수 있는 천주적(天宙的)인 이념인 것이다.

5절 말세와 새 말씀과 우리의 자세

1. 말세와 새 진리

타락인간(墮落人間)은 종교에 의하여, 신령(神靈)과 진리(眞理)로써(요한복음 4장 23절) 그의 심령(心靈)과 지능(知能)을 깨우쳐서 그의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여 나간다. 그런데 진리에 있어서도 내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종교에 의한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무지를 타개하는 과학에 의한 외적인 진리의 두 면이 있다. 따라서 지능에도 내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내적인 지능과 외적인 진리에 의하여 깨우쳐지는 외적인 지능의 두 면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인 지능은 내적인 진리를 찾아 종교를 세워 나아가고, 외적인 지능은 외적인 진리를 찾아서 과학을 세워 나아가는 것이다.

신령은 무형세계(無形世界)에 관한 사실들이 영적 오관(五官)에 의하여 영인체(靈人體)에 영적으로 인식되었다가, 이것이 다시 육적 오관에 공명되어 생리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며, 진리는 유형세계(有形世界)로부터 직접 인간의 생리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인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도 영육(靈肉) 양면의 과정을 거쳐서 오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와 육신이 합해야만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적 과정에 의한 신령과 육적 과정에 의한 진리가 완전히 조화되어 심령과 지능이 아울러 깨우쳐짐으로써, 이 두 과정을 통해 온 양면의 인식이 완전히 일치될 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과 전피조세계(全被造世界)에 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지에 빠진 인간으로 하여금, 신령과 진리에 의하여 심령과 지능을 아울러 깨우치게 함으로써,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를 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이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시대적인 혜택을 받아서, 그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높아지게 되는 것이므로, 그를 깨우치기 위한 신령(神靈)과 진리(眞理)도 또한 점차로 그 정도를 높이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리는 유일(唯一)하고 영원불변(永遠不變)하지만, 무지한 상태로부터 점차 복귀되어 나아가는 인간에게,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나 방법은 시대를 따라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38~139

예를 들면, 인간이 아직도 몽매하여 진리를 직접 받을 수 없었던 구약 전 시대(舊約前時代)에는, 진리 대신으로 제물(祭物)을 드리게 하셨고,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짐에 따라 모세 때는 율법(律法)을, 예수님 때는 복음(福音)을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시지 않고, 그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요한복음 14장 6절). 왜냐 하면 그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진리 되신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어서 그 말씀을 받는 대상에 따라서 그 범위와 정도와 방법을 달리하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의 문자는 진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요 진리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이러한 견지에 입각해 볼 때, 신약성서(新約聖書)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있어,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대단히 저급(低級)하였을 때의 인간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 주셨던 하나의 과정적인 교과서(敎科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사람들을 깨우치기에 알맞도록 주셨던, 한정된 범위 내에서의 비유 또는 상징적인 표현방법 그대로를 가지고, 현대 과학 문명인(文明人)들의 진리욕구(眞理慾求)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지성인(知性人)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는, 보다 고차원적인 내용과 과학적인 표현방법에 의한 것이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우리는 새 진리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새 진리는 이미 총서(總序)에서 말한 바, 인간의 내 외 양면의 무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통일된 과제로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는 안된다.

새 진리가 나와 야 할 이유를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성서(聖書)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그 진리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교과서인 것이다. 그런데 이 교과서에는 그 진리의 중요한 부분이 거의 상징과 비유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에는 사람에 따라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로 말미암아 많은 교파(敎派)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파 분열의 제1원인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성서 자체에 있기 때문에, 그 분열과 싸움은 계속 확대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가 나와서 상징과 비유로 되어 있는 성경의 근본내용을 누구나 공인(公認)할 수 있도록 해명하지 않는 한, 교파분열과 그 싸움의 길은 막을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기독교의 통일에 의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요한복음 16장 25절)는 말씀으로써, 끝날에 이르면 다시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이다. 140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한복음 3장 12절)고하신 말씀대로,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하실 말씀을 못다 하시고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까지도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한복음 16장 12절)고 하심으로써 속에 있는 말씀을 다하시지 못하는 서러운 심정을 토로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못다 하시고 돌아가셨던 그 말씀은 영원히 비밀로 남아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장 13절)고 계속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 말씀은 반드시 성령(聖靈)에 의하여 새로운 진리로써 가르쳐 주시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요한계시록 5장 1절)고도 기록되어 있는 바로 그 책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신 그 말씀이 인봉(印封)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계속하여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보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 능히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여 요한이 애곡(哀哭)할 때에,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요한계시록 5정 3 - 5절)고 말씀하셨다. 여기의 다윗의 뿌리에서 탄생한 사자(獅子)는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인류 앞에 오랫동안 일곱 인(印)으로 봉하여 비밀로 남겨 두셨던 그 말씀의 인봉을 떼시어, 성도들에게 새로운 진리의 말씀으로 주실 때가 와야 할 것이기 때문에,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요한계시록 10장 11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기에 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사도행전 2장 17 - 18절)라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모로 보아서 말세(末世)에는 반드시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2. 말세에 처한 우리들이 취할 자세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흐름을 보면, 낡은 것이 끝나려 할 때 새로운 것은 시작된다. 따라서 낡은 것이 끝나는 점이 바로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낡은 역사의 종말기(終末期)는 바로 새 역사의 시창기(始創期)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는, 같은 점에서 출발하여 각각 그 목적을 달리하여 가지고, 세계적인 결실을 하게 된 善과 악(惡)의 두 주권이 서로 교차되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처한 인간들은, 내적으로는 이념(理念)과 사상(思想)의 결핍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되며, 외적으로는 무기로 인한 알력과 투쟁 속에서 떨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말세에는 나라가 나라를 치고, 민족과 민족이 상쟁하며, 가족들이 서로 결투를 하리라(마태복음 24장 4 - 9절)는 성서의 기록대로 온갖 비참한 현상이 실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말세에 있어서 이와 같은 참상(慘狀)이 일어나는 것은 악주권(惡主權)을 청산하고 선주권(善主權)을 세우기 위한 필연적인 현상이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참상 속에서 새 시대를 이룩하기 위한 선주권의 중심을 반드시 세우시는 것이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예수님 같은 분들은 모두 그러한 새 시대의 중심으로 세워졌던 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적인 전환기(轉換期)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새 역사의 동참자가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이 세우신 새 역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 시대의 섭리(攝理)는 낡은 시대를 완전히 청산한 터 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시대의 종말기의 환경 속에서 싹이 트고 자라나는 것이므로, 그 시대에 대하여는 상충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섭리는 낡은 시대의 인습(因習)에 젖은 사람에게는 좀처럼 납득되어지지 않는다. 새 시대의 섭리를 담당하고 나왔던 성현(聖賢)들이, 모두 그 시대의 희생자가 되어 버렸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 실 예로서 아직도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종말기였을 때에, 신약시대(新約時代)의 새로운 섭리의 중심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구약 율법주의자(律法主義者)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단자(異端者)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었기 때문에, 종내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살해당하고 마셨다. 예수님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누가복음 5장 38절)고 말씀하셨던 이유도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다시 신약시대의 종말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새로운 섭리의 중심으로 오셔서, 새 시대의 건설을 위한(요한계시록 21장 1 - 7절) 새 진리를 주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초림(初臨) 때에 유대인들로부터 바알세불이 접한 사람으로 몰렸듯이(마태복음 12장 24절), 재림(再臨) 때도 틀림없이 기독교 신도들에게 몰림을 당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시면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으며, 그 세대에 버린 바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던 것이다(누가복음 17장 25절). 그러므로 역사의 전환기에 있어서, 그대로 낡은 시대의 환경에 집착되어 안도하려는 사람들은, 낡은 시대와 더불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타락된 인간은 신령(神靈)에 대한 감성이 극히 둔하기 때문에, 대개 진리 면에 치중하여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따라 나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들은 흔히 낡은 시대의 진리관(眞理觀)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에, 복귀섭리가 새로운 섭리의 시대에로 전환하고 있어도, 그들은 이 새 시대의 섭리에 쉽게 감응하여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성서(舊約聖書)에 집착되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신약시대(新約時代)의 섭리에 호응할 수 없었던 역사적인 사실은 이것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러나 기도로써 신령한 것을 감득할수 있는 성도들은, 새 시대의 섭리를 심령 적으로 알게 되므로, 낡은 시대의 진리 면에서는 상충적인 입장에 서면서도 신령을 따라 새 시대의 섭리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중에는, 구약성서에 집착된 인물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마음에 느껴지는 신령을 따라간 사람들 뿐이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말세(末世)에 있어서 극심한 심령 적인 초조감을 면할 수 없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막연하나마 신령을 감득하여서, 마음으로는 새 시대의 섭리를 따르려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에 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령 적으로 이러한 상태에 처한 신도들이, 그들을 새 시대의 섭리에로 이끌어주는 새 진리를 듣기만 하면, 신령과 진리가 동시에 그들의 심령(心靈)과 지능(知能)을 깨우쳐서, 새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적인 요구를 완전히 인식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그에 호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에 처한 현세인(現世人)은 무엇보다도 먼저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를 통하여 신령(神靈)한 것을 감득하도록 힘써야 한다. 

다음으로는 인습적인 관념에 집착되지 알고 우리의 몸을 신령에 호응하게 함으로써, 새 시대의 섭리에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새 진리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찾아진 그 진리가 완전히 자기의 몸에서 신령과 하나되어, 진정한 천적(天的)인 기쁨이 심령의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게 하여 주는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끝날 의 성도들은 참된 구원(救援)의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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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메시아의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메시아라는 낱말은 히브리말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사람'이라는 뜻인데, 특히 왕(王)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선민(選民)들은 그의 선지자(先知者)들의 예언에 의하여,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구세주(救世主)를 왕으로 보내마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었으니, 이것이 곧 이스라엘의 메시아사상이다. 이러한 메시아로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이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아와 같은 뜻의 헬라어로서, 보통 '구세주'로 통한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셔야 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게 된 것은 인간이 타락(墮落)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먼저 타락에 관한 문제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타락은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타락에 관한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창조목적에 관한 문제를 해명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은 먼저 지상에 천국이 건설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地上天國)은 이루어지지 않고 지상지옥(地上地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후 하나님은 이것을 복귀하시려는 섭리를 거듭해 내려 오셨다. 따라서 인류역사는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이기 때문에, 이 역사의 목적은 먼저 지상에 천국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이미 전편 제3장 제1절과 제2절에서 상세히 논술한 바 있는 것이다.

1절 십자기에 의한 구원섭리

.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예수의 목적  147

예수님이 메시아로 강림(降臨)하셨던 목적은, 타락인간(墮落人間)을 완전히 구원(救援)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므로 , 결국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천국을 이루셔야 했던 것이며, 따라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을 먼저 이루셔야 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장 48절)고 하신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신성(神性)을 갖게 되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인간은 창조목적을 두고 보면,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같이 완전한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바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어서 천국인(天國人)이 되라는 말씀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타락인간을 천국 인으로 복귀케 하여, 지상천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고(마태복음 6장 10절), 또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4장 17절). 그래서 그의 앞길을 예지 하러 왔던 세례요한도 역시 천국이 가까왔다고 부르짖었던 것이다(마태복음 3장 2절).

그러면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하늘 아버지의 완전함과 같이 완전하게 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 것인가?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그의 심정(心情)을 체휼함으로써 신성(神性)을 갖게 되어 하나님과 불가분(不可分)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은 原罪가 없으므로 다시 속죄(贖罪)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구주(求主)가 필요 없게 되며, 타락인간에게 요구되는 기도나 신앙의 생활도 역시 필요 없게 된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인간들에게는 원죄가 없으므로 그들은 원죄 없는 선(善)의 자손을 번식하게 되며, 따라서 그 자손들에게도 속죄를 위한 구주가 필요 없게 된다.

.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하여 구원섭리가 완성되었는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인하여 과연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이 완성되어, 모든 성도들이 창조본성(創造본성(本性))을 복귀함으로써, 지상천국을 이루게 되었는가? 인류역사 이래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신성을 갖게 되어 하나님과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생활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속죄가 필요 없고, 기도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성도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사실상 바울같은 훌륭한 신앙자에게 있어서도 눈물겨운 기도와 신앙생활은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로마서 7장 18-25). 뿐만 아니라 아무리 잘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구주의 대속함이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죄없는 자식을 낳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 부모가 여전히 자식에게 원죄를 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 신도들의 이러한 신앙생활의 실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의한 속죄(贖罪)가 우리의 원죄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인간의 창조본성을 완전히 복귀해 주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듯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써는,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그의 목적을 완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재림(再臨)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천국을 복귀하시려는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절대적이어서 변할 수 없는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그는 다시 오셔서 그 뜻을 완성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면 십자가(十字架)의 희생은 전혀 무위(無爲)로 돌아간 것인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요한복음 3장 16절). 만일 그렇다면 오늘의 기독교(基督敎)의 역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체험으로 보아도, 십자가 대속의 은사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대속의 역사(役事)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원죄까지 완전히 벗겨줌으로써 죄를 지으려 하여도 지을 수 없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시켜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어 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로 인한 속죄의 한계는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현대 지성인들의 신앙을 교도(敎導)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문제를 밝히 알아야 겠다.

.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

우리는 먼저 성경 상에 나타난 사도(使徒)들의 언행(言行)을 중심 삼고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이 당연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느낀 뚜렷한 하나의 정염(情念)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김으로써 분개하고 서러워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 준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을 통분이 여겼으며, 그들의 행위를 패역무도(悖逆無道)한 것으로 여겨 저주하였다(사도행전 7장 51 - 53절). 그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기독교 신도들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내려왔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결과였다면, 사도들이 그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인정이겠지만, 하나님의 예정대로 이루어진 그 섭리(攝理)의 결과에 대해서 그렇게도 분개하고 저주했을 리는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예수님은 온당치 않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과연 하나님의 예정(豫定)에서 되어진 필연적인 결과였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선민을 부르시어 저들을 보호 육성하시고, 때로는 그들을 고난과 시련으로써 인도하셨다.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시어 위로하시며, 장차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굳게 약속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막(聖幕)과 성전(聖殿)을 지음으로써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게 하시고, 동방박사(東方博士) 시므온, 안나, 세례요한 등을 보내시어 메시아의 탄생과 그의 현현을 널리 증거 하셨던 것이다.

특히ㅁㅂㅂ 세례요한에 대해서는 그가 잉태(孕胎)될 때 천사(天使)가 나타나서 증거한 사실을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었고(누가복음 1장 13절), 그가 출생할 때에 되어진 이적은 당시의 유대 성중(城中)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누가복음 1장 63절 - 66절). 뿐만 아니라 광야에 있어서의 그의 수도생활(修道生活)은 모든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가 메시아가 아닌 가고 생각케 할 정도로 놀랄만한 것이었다(누가복음 3장 15절). 하나님이 이렇듯 위대한 세례요한까지 보내시어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 하게 하셨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151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어디까지나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할 이스라엘은 그를 메시아로 믿어야만 했었다. 만일 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다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고대해 왔던 그 메시아를 누가 십자가(十字架)에 내주었을 것인가?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 길에 내준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반(反)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길을 가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예수님 자신의 언행(言行)으로 보아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과연 메시아로 오셨던 그 전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길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모든 섭리가 그러했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도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도록 언행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한복음 6장 29절)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또 유대인들의 배신행위를 가슴아프게 생각하시고, 호소할 곳이 없어 성을 바라보고 우시면서, 하나님이 2천년 동안이나 애쓰시며 사랑으로 이끌어 온 이스라엘선민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이 성마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지지 않을 정도로 멸망해 버리고 말 것이라고 저주하시면서,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누가복음 19장 41 - 44절)고, 명백히 그 무지를 지적하셨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장 37절)라고 하시어, 그들의 완고와 불신을 한탄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증거하고 있는 성경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를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도다(요한복음 5장 39 - 40절)라고 슬퍼하셨다. 그는 또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라고 서러워하시면서, 이어 모세를 믿었다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한복음 5장 43 - 46절)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돌이키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를 보여주셨던가. 그러나 그들은 그 놀라운 일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바알세불이 접한 자라고 비난하지 않았던가(마태복음 12장 24절). 그리고 이러한 비참한 정경(情景)을 보시는 예수님은 때로는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한복음 10장 38절)고도 말씀하셨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그들에게 화가 있으라고, 분노를 퍼붓기도 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23장 13 - 36절).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이와 같이 저들에게 자기를 믿을 수 있도록 언행을 하셨던 것이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신 대로 그를 메시아로 믿었다면, 누가 그를 십자가의 죽음 길로 몰아냈을 것인가 ! 153

우리는 위에서 논증한 모든 사실로 보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그가 메시아로 오셨던 전 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무지와 불신의 결과로 온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2장 8절 의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는 성구는, 바로 이 사실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 노정이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예정하신 길이었다면, 그는 당연히 가셔야 할 길을 걸어가시면서 무엇 때문에 할만 하면 그 죽음의 잔을 면케 해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를 올리셨을 것인가(마태복음 26장 39절). 실상 그것은 인간이 타락(墮落)된 이후, 4천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애쓰셨던 지상천국이 유대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실 때까지 고난의 역사가 그대로 연장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요한복음 3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민족이 애급(埃及)에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갈 때, 광야(曠野)에서 모세를 믿지 않게 되자, 불 뱀이 나와서 그들을 물어 죽이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리뱀을 장대 끝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살게 하셨다. 마찬가지로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써 만민이 지옥으로 가야만 하게 되었기 때문에, 장차 예수님이 리과 같이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신 후, 그것을 쳐다보고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예견(豫見)하시면서 예수님은 서글픈 심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누가복음 19장 44절) 그가 돌아가신 후 이스라엘선민이 衰亡한 것을 보아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사야 9장 6절이하에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다윗왕의 위(位)를 가지고 오셔서, 영원히 멸하지 않을 왕국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잉태될 때에도,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누가복음 1장 31 - 33절)는 말씀을 전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선민을 불러, 2천년간이나 고난 가운데서 이끌어 나오신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내시어 영원히 존속할 왕국을 이룩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다가 유대인들에게 몰려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저들은 선민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지리멸렬(支離滅裂)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민족적인 학대를 받아 나왔다. 이것은 그들이 신봉(信奉)해야 할 메시아를 도리어 살해함으로써,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이루시지 못하게 하였던 그 범죄에 대한 벌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이후 수많은 성도들이 당하여 온 십자가의 고난도, 예수님을 살해한 연대적 범죄(連帶的 犯罪)에 대한 형벌이었던 것이다.

.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한 구원의 한계와 예수 재림의 목적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예수님은 영육(靈肉) 양면의 구원섭리를 완수하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의 예언(이사야서 9장 6 - 7절)과,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교시(누가복음 1장 31 - 33절) 그대로, 또 예수께서 친히 천국이 가까왔다고 하신 말씀(마태복음 4장 17절)과 같이, 그는 영원토록 소멸되지 않는 지상천국을 건설하셨을 것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육신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되게 하셨다(창세기 2장 7절). 이와 같이 영(靈)과 육(肉)으로 창조된 인간이므로, 타락도 역시 영 육 아울러 된 것이었다. 따라서 구원도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아울러 하셔야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메시아로 강림하셨던 목적이 구원섭리를 완수하시려는 데 있었으므로 그는 영적 구원과 육적 구원을 아울러 완성하셔야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일체를 이룬다는 뜻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스스로 포도나무로, 신도들을 그 가지로 비유하셨고(요한복음 15장 5절), 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장 20절)고도 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신 이유는 영육(靈肉) 아울러 타락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가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를 믿음으로써 영 육 아울러 그와 하나가 되었다면, 타락인간도 영 육 아울러 구원을 받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여 그를 십자가(十字架)에 내주었으므로,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마침내 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에 사탄의 침범을 당한 예수님을 믿어, 그와 한 몸을 이룬 신도들의 육신도 그대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아무리 독실한 신앙자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贖罪)로써는 육적 구원은 완성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아담부터 내려오는 혈통적인 원죄(原罪)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그에게 원죄는 그대로 남아지게 되어, 그는 또 원죄 있는 자식을 낳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육신을 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원죄로 말미암아 항상 육신을 통하여 들어오는 사탄침범의 조건을 막기 위함이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한 것도, 이와 같이 십자가에 의한 구속(救贖)으로도 근절되지 않은, 원죄로 인한 사탄침범의 조건을 막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의 육신이 사탄 침범을 당함으로써, 육적 구원섭리의 목적은 달성하시지 못하였다. 그러나 는 십자가의 피의 대속(代贖)으로 부활의 승리적인 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영적 구원의 기대를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부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신도들은 영적 구원섭리의 혜택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인한 구원은 영적 구원뿐이므로, 잘 믿는 신도들에게도 원죄(原罪)는 육적으로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것이 계속적으로 그 자손들에게 유전되어 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도들은 그 신앙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죄와 더불어 더욱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십자가로써 청산하시지 못한 원죄를 속하고 육적 구원을 완성함으로써 영육(靈肉) 아우른 구원섭리의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지상에 재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의 대속을 받은 성도들도 원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 사도(使徒)들 중에서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바울도, 육적으로 들어오는 죄악의 길을 막을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던 끝에,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 7장 25절)고 말하였다. 이것은 영적 구원의 완성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육적 구원의 미완성에 대한 비탄을 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또 요한1서 1장 8절 내지 10절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라고 한 요한의 고백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들도, 여전히 원죄 때문에 범죄자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 십자가에 대한 예언의 양면

예수님의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이 그가 메시아로 오셨던 전 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예정에서 온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사야서 53장에, 그가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것으로 예언되어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만이 성경에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리(原理)를 알고 성서를 다시 읽어보면,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이미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에 의하여 예언된 이사야서 9장 11장, 60장등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 마리아에게 천사(天使)를 보내시어 장차 잉태될 예수님이 생전에 유대인의 왕이 되어, 영영세세(永永世世)토록 소멸되지 않을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실 것을 예언케 하셨던 사실을 알게 된다(누가복음 1장 31 - 33절). 그러면 어찌하여 이와 같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게 되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 함으로써만 완성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전편 제1장 5절 .2).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인간 시조(始祖)는 그들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도 있었던 것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여 그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를 성서에서 들어보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 분담이었기 때문에,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것을 안 따먹고 완성될 수도 있는 반면에, 결과적으로 나타난 사실과 같이 따먹고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한편 또 하나님은 구약시대의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위한 인간 책임분담(人間 責任分擔)의 조건으로 십계명(十誡命)을 주셨던 것인데, 여기에서도 인간은 그것을 지키어 구원을 받을 수도 있었고, 혹은 그것을 지키지 않고 멸망을 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애급(埃及)에서 가나안 복지(福地)를 향하여 떠난 이스라엘민족이 모세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세워야 할 책임분담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복지로 들어갈 수도 있었고, 혹은 불순종(不順從)하여 못 들어가게 될 수도 있었다. 사실상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민족을 이끌고 가나안복지로 들어가실 것을 예정하시고(출애굽기 3장 8절), 그에게 이를 명령하셨었으나, 그들은 불신으로 인하여 모두 광야(曠野)에서 쓰러지고, 그 후손들만이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이 수행해야 될 책임분담(責任分擔)이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것을 이루어 드릴 수도 있고, 혹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 드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자신의 책임분담 수해 여부에 따라 그 어느 한 면의 결과를 이루어 놓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뜻' 성사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메시아를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이지만, 오시는 메시아를 믿고 안 믿는 것은 인간의 책임분담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내시는 메시아를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뜻대로 믿을 수도 있었던 것이고, 혹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믿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분담 수행 여부에 따라 나타날 양면의 결과에 대비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의 '뜻' 성사에 대한 예언을 양면으로 하시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서 53장의 기록과 같이,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는 경우에 대한 예언도 하셨지만, 한편 이사야서 9장, 11장, 60장 누가복음 1장 31절 이하의 기록과 같이, 저들이 메시아를 믿고 모심으로써, 영광으로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경우에 대한 예언도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사야서 53장의 예언만이 이루어지고, 이사야서 9장, 11장, 60장누가복음 1장 31절 이하의 예언은 모두 재림하셔서 이루어질 말씀으로 남아진 것이다.

.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성구

복음서(福音書)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필연적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데가 많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하실 때, 이것을 만류하는 베드로를 보시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태복음 16장 23절)고하신 책망으로 미루어,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예수님이 어찌하여 베드로에 대해 그토록 책망하셨을 것인가? 그러나 사실에서는 예수님은 그때 이미,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어차피 영육(靈肉) 아우른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완성하실 수 없게 되자, 영적인 구원만이라도 이루시려고 그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서, 부득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로 결정하고 계시던 때였다(누가복음 9장 31절). 그런 때에 베드로가 이 길을 만류한 것은, 결국 십자가로 인한 영적인 구원섭리의 길마저 방해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처럼 책망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상(十字架上)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30절)고 최후의 말씀을 하신 것은 십자가로써 구원섭리의 전 목적이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불신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아시게 된 후부터, 예수님은 육적인 구원은 재림(再臨) 후의 섭리로 미루시고, 영적인 구원섭리의 기대만이라도 조성하시려고 십자가의 노정을 걸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하신 그 말씀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제2차적인 구원섭리의 목적으로 세우셨던, 십자가에 의한 영적인 구원섭리의 기대를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하여는, 첫째로 기도에 의한 신령(神靈)으로 하나님과 직접 영교(靈交)해야 되고, 다음으로는 성서를 바르게 읽음으로써 진리(眞理)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요한복음 4장 24절)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聖徒)들은,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던 근본 목적을 알지 못하고, 영적인 구원이 예수님이 띠고 오셨던 사명의 전부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서 뜻을 이루시려고 오셨다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원치 않는 죽음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억울하고도 비통한 심정을 풀어드리고 그의 뜻을 맞추어 드리는 신부가 지상에 생겨나기 전에, 예수님이 누구와 더불어 그 뜻을 이루시겠다고 재림(再臨)하실 것인가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장 8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무지를 예상하시고 개탄하신 말씀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서를 중심하고,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죽음의 길을 가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혔지만, 영교로써 예수님에게 직접 물어보면, 더욱 명백하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자기가 영통(靈通)을 하지 못하면 영통하는 딴 사람의 증언을 통하여서라도 바른 신앙을 가져야만, 끝날에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신부의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2절 엘리야의 재림과 세례요한

엘리야가 재림(再臨)하리라는 것은 이미 말라기 선지(先知)가 예언했던 바였고(말라기 4장 5절), 세례요한이 바로 재림한 엘리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증언이었다(마태복음 17장 13절, 마태복음 11장 14절). 그러나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자(再臨者)였다는 사실은, 일반 유대인은 물론 세례요한 자신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요한복음 1장 21절), 이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의혹(마태복음 11장 3절)과, 그에 따르는 유대인들의 불신은 날로 더하여지게 되어, 마침내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엘리야의 재림을 중심한 유대인들의 심적 동향

통일왕국시대(統一王國時代)에 있어서, 솔로몬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성전이상(聖殿理想)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성전 이상을 다시 찾아 세워, 실체 성전된 메시아를 맞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4대선지(四大先知)와 12소선지(十二小先知)를 보내시어 사탄분립의 역사를 하셨다. 또 하나님께서 특별선지(特別先知) 엘리야를 보내시어, 가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케 하여 바알신을 멸하신 것도, 이러한 이상실현(理想實現)의 뜻을 가로막는 사탄을 멸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의 천적인 사명을 다 이루지 못하고 승천(昇天)하였기 때문에(열왕기하 2장 11절),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사탄을 분립해 가는 노정에 다시 사탄이 횡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실체성전이상이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이에 앞서 엘리야가 지상에 다 이루지 못하고 간 사탄분립의 사명을 계승 완수하게 하는 섭리가 있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섭리 적인 필연성에 의하여, 선지자(先知者) 말라기는 엘리야가 재림해야 할 것을 예언했던 것이다(말라기 4장 5절).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고 있던 유대인들의 간곡한 소망은 물론 메시아의 강림(降臨)이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유대인들이 갈망해 왔던 것은, 엘리야의 재림(再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말라기선지를 통하여, 메시아의 강림에 앞서 그의 앞길을 예비하게 하시기 위하여,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마고 분명히 약속하셨었기 때문이다(말라기 4장 5절). 그런데 엘리야는 이미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900여년 전에 승천한 선지자로서(열왕기하 2장 11절), 그는 분명히 영계(靈界)에 있다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인 사실이 있다(누가복음 9장 31절). 이와 같이되어 유대민족은 하늘에 머물고 있는 엘리야가 다시 올 때에는, 전에 승천하던 모양으로 반드시 하늘로부터 내려오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오늘날의 기독교 신도들이,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재림하시리라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듯이,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엘리야가 다시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대로, 엘리야가 다시 왔다는 소식은 없고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메시야를 자처하고 나섰을 때, 예루살렘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7장 10절을 보면,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만일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그보다 먼저 오기로 약속되어 있는(말라기 4장 5절) 엘리야는 어디 와 있는가 하는 공박(攻駁)을 받게 되었다. 제자들은 그 답변에 궁하여 예수님께 직접 문의한 결과(마태복음 17장 10절), 예수님은 바로 세례요한이 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고 대답해 주셨다(마태복음 11장 14절, 마태복음 17장 13절).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바로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겠지만,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는 다른 유대인들이야 어떻게 예수님의 이러한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인가?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들이 자기의 증언을 즐겨 받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태복음 11장 1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을 더욱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요한복음 1장 21절의 기록이 보이는 바, 이미 세례 요한 자신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명백히 부인한 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대민족의 갈 길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서, 그가 바로 유대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엘리야라 하셨고(마태복음 11장 14절), 이와 반대로 장본인인 세례 요한 자신은 이미 이 사실을 부인하여 버렸으니, 유대민족은 누구의 말을 곧이듣고 따라갈 수 있었을 것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두 분 가운데서 누가 더 믿을 수 있는 인물로 비쳐졌던가 하는 데 따라서 좌우될 문제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먼저 당시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것으로 보여졌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예수님은 빈천(貧賤)한 목수(木手)의 가정에서 생장(生長)한 하나의 배우지 못한 청년이었다. 이러한 청년이 이름 없이 일어나 스스로 안식일(安息日)의 주인이라 칭하면서 유대인들이 생명과 같이 여기는 안식일을 범하였다(마태복음 12장 1 - 8절).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의 구원의 푯대인, 율법(律法)을 폐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마태복음 5장 17절).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에게 몰린 바 되어, 하는 수 없이 어부(漁夫)를 불러 제자를 삼았으며,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셨다(마태복음 11장 19절).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보다도, 세리(稅吏)들과 창기(娼妓)와 죄인(罪人)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먹고 마셨다(마태복음 11장 19절).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들보다도 세리들과 창기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마태복음 21장 31절) 주장하셨던 것이다.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씻은 후에, 그의 발에 입을 맞추고 값진 기름을 부은 일이 있었다(누가복음 7장 37 - 38절). 이러한 행동은 오늘날의 사회에 있어서도 용납(容納)되기 어려운 일이어 든, 하물며 음행(淫行) 하는 여인을 돌로 쳐죽여도 말 못 하던 유대인의 엄격한 윤리사회(倫理社會)에 있어서 어떻게 허용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용납하셨을 뿐 아니라 여인의 태도를 비난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도리어 그 여인을 칭찬하셨던 것이다(누가복음 7장 44 - 50절, 마태복음 26장 7 - 13절).

한편 또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 세우시고(요한복음 14장 9절), 자기로 말미암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다고 주장하시면서(요한복음 14장 6절) 자기를 그들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나 무엇보다도 더 사랑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마태복음 10장 37절, 누가복음 14장 26절). 예수님의 모습이 이러하였으므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그를 '마귀'의 왕 바알세불이 접한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조소(嘲笑)하였던 것이다(마태복음 12장 24절).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전후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당시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결코 믿겨운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당시의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본 세례 요한의 모습은 어떠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보자.

세례 요한은 당시의 명문가인 제사장(祭司長)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다(누가복음 1장 13절). 그의 부친이 지성소(至聖所)에서 분향할 때에, 그 아내가 아들을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말을 곧이듣지 아니함으로써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출생하자마자 그 입이 열린 기사이적(奇事異蹟) 등으로 인하여, 온 유대고을 사람들이 크게 놀랐던 것이다(누가복음 1장 9 - 66절). 뿐만 아니라 광야(曠野)에서 메뚜기와 석청(石淸)으로 연명하면서 수도(修道)하던 그의 빛나는 신앙생활을 보고, 일반 유대인들은 물론 제사장들까지도 그에게 혹 당신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물어볼 정도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훌륭하게 보였던 것이다(누가복음 3장 15절, 요한복음 1장 20절).

위에서 밝힌 바 그 당시의 사정을 놓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세례 요한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 과연 그들이 누구의 말을 더 믿을 수 있었을 것인가? 그것이 세례 요한의 말이었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신 예수님의 증언보다도,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한 세례 요한의 말을 더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의 말을 믿게 되자, 예수님의 이 증언은 메시아로 자처하기 위한 일종의 위증(僞證)이 되고 말았기 대문에, 예수님은 자연히 망언자(妄言者)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망언자로 몰리게 될 때,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모두가 유대인들에게 있어 거리끼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불신의 정도는 점점 더 높아지기만 하였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고 세례 요한의 말을 믿고 보니,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엘리야가 오셨으리라 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유대인들은, 말라기의 예언(豫言)을 믿는 처지에 서면,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아로 자처하는 예수님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 입장에 서면, 엘리야가 온 다음에야 [메시아]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성경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들은 부득이 예수님을 불신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의 불신

위에서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당시의 제사장(祭司長)이나 전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을 숭경(崇敬)하던 마음은, 그를 메시아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누가복음 3장 15절, 요한복음 1장 20절). 따라서 만일 세례요한이, 자기가 바로 예수님이 증언하신 그대로의 엘리야라는 것을 선포하고 나섰더라면,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엘리야를 고대하고 있었던 전 유대인들은, 이러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믿게 되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끝내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주장한 세례 요한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는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일찍이 자기는 물로 洗禮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이(예수님)는 불과 성령(聖靈)으로 세례를 주시기 때문에, 자기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증거하였다(마태복음 3장 11절). 분만 아니라 요한복음 1장 33절을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하나님)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그리스도)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고 한 세례 요한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세례 요한에게 직접 교시(敎示)하셨고, 세례 요한 자신도 또 그렇게 증거하였으며, 한편 요한복음 1장 23절을 보면, 자기는 그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다 고까지 말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3장 28절에는, 자신이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언명(言明)한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응당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스스로의 지혜로써도 알았어야 할 것이었다. 설혹 세례 요한이 그 사실을 미처 지각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하늘로부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 받아 알고 있는 위에(요한 복음 1장 33 - 34절), 예수님이 친히 자기를 엘리야라고 증언하셨으니, 자기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바로 엘리야라고 하는 것을 뒤늦게라도 선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앞에 무지하여(마태복음 11장 19절) 이미 예수님의 증언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요한복음 1장 21절) 그 후에도 섭리의 방향과 길을 달리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세례 요한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이나, 또 이렇듯 난처한 입장에 놓인 예수님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서러우셨을 것인가?

사실상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고 그를 증거 함으로써, 그의 증거 자로 서의 사명은 다 끝난 것이었다. 그러면 그 후에 있어서의 그의 사명은 무엇이었을 것인가?

그의 부친 사가랴는 성령(聖靈)에 감동되어 아직 복중(腹中)에 있었던 세례 요한을 두고서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누가복음 1장 75절)고, 그의 사명을 분명히 예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한 후에는, 그 앞에 하나의 제자의 입장에서 그를 모시고 섬겨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 예수님과 분리되어서 따로 세례를 주고 다녔기 때문에, 누가복음 3장 15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도리어 세례 요한을 메시아로 혼동하였고, 한편 또 요한복음 1장 20절을 보면 제사장까지도 그렇게 혼동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과 세례요한의 제자가, 서로 자기의 선생이 세례를 많이 준다고, 결례(潔禮)를 중심하고 다툰 일까지 있었다(요한복음 3장 25절).

그리고 요한복음 3장 30절,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는 예수님과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운명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전적으로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할 수 있는 처지에 섰었다면, 어찌하여 예수님이 흥(興)할 때에 그가 쇠(衰)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상 예수님의 복음(福音)은 누구보다도 먼저 세례 요한 자신이 전해야만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지로 인하여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야 할 그의 목숨마저 별로 가치도 없는 일에 희생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중심이 하늘편에 있었을 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증거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영적인 역사(役事)가 끊어지고 인간 세례 요한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의 무지는 더욱 더 예수님에 대한 불신을 자아내게 하였던 것이다. 자기가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례 요한은, 특히 옥중(獄中)에 들어가게 된 후부터 다른 유대인들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언행(言行)은, 인간 세례 요한의 눈에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도 역시 엘리야가 오기 전에 나타난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태복음 11장 3절)하고 질문하여 그 의심을 풀어 보려 하였다.이러한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3절 내지 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분개심에 격한 경고의 내용을 가지고 대답하셨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복중(腹中)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누가복음 1장 75절), 그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고난 어린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애노정(公生涯路程)을 출발하실 때에, 하늘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또 그것을 증거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늘의 은사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세례 요한으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자기가 바로 메시아라는 대답을 하시지는 않았다. 그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복음 11장 4 - 5절)고 완곡한 대답을 하셨다. 물론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이러한 기사와 이적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와 같이 구구하게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상기케 하심으로써, 자기가 누구시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마태복음 11장 5절) 하신 말씀에는, 세례요한과 유대인들의 불신에 대한 예수님의 비감한 심정이 어리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선민(選民)으로 부름을 받았던 유대민족, 그 중에서도 특히 세례요한은 하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부요(富饒)한 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예수님은 부득이 갈릴리 바닷가를 헤매시고 사마리아땅을 두루 도시면서 가난한 자 가운데서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찾으셨던 것이다. 불학무식(不學無識)한 어부들과 세리와 창녀들은 모두 이처럼 가난한 자들이었다.

사실상 예수님이 찾고자 하셨던 제자들은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다.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하러 오신 예수님이었으니 그에게는 따라다니는 천명보다도 먼저 천명을 영도(領導)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더욱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이 예비한 능력 있는 무리들을 찾으시려고,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 제사장(祭司長)과 교법사(敎法師)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비한 잔치에 청함을 받은 손님들은 하나도 응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거리에 나가 방황하는 거지떼를 불러 모아야만 하셨다. 이처럼 불청객(不請客)들을 맞으러 나선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은, 드디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태복음 11장 6절)라고 하는 심판(審判)의 말씀을 토하시고 말았다.

세례 요한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혹은 메시아, 혹은 엘리야, 혹은 선지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훌륭한 사람이었다(누가복음 3장 15절, 요한복음 1장 20 - 21절).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자기(예수)로 인하여 실족(失足)하면 무슨 복이 있겠느냐고 하는 간접적인 표현을 통하여서, 세례 요한의 운명을 심판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떠한 실족을 하였던가?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바와 같이 그는 종신토록 예수님을 모시고 섬겨야 할 사명을 다하지 못했던 것이다.

질문하러 왔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간 뒤에 예수님은, 사명적인 면에서 보아, 세례 요한이 본시 가장 위대한 선지자(先知者)로 왔으나, 이제 맡겨진 바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태복음 11장 11절)고 말씀하셨다. 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일찌기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지상생활을 거쳐 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여인이 낳은 사람 중에서 가장 큰 사람일라면, 천국에서도 가장 큰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역사상 가장 큰 자로 지상에 태어난 세례요한이 어찌하여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만도 못할 것인가?

과거에 왔다 간 수 많은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며 시간적인 먼 거리를 두고 간접적으로 이를 증거 하였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할 사명을 띠고 왔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하는 것이 선지자의 사명일진대, 증거적인 처지에서 보아,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증거 하는 세례 요한은 간접적으로 증거한 그 어떠한 선지자보다도 위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를 모신다는 점에서 볼 때에는 그는 가장 작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모시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가까이 모셔야 할 자리에 부름을 받은 세례 요한은 (누가복음 1장 75절), 도리어 예수님과 엇갈린 길을 걷고 있었으니, 이로써 그는 천국의 지극히 작은 자보다도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그 다음 절에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메시아를 위하여 복중에서부터 택함을 받았고, 광야에서 그렇게 어려운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하여 온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잘 모시기만 했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시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예수님의 수제자의 위(位)는 침노한 베드로에게 빼앗긴 바 되었다. 여기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라고 시간적인 한계를 지은 것을 보면, 그 아래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일반인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세례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이 지혜가 있어서 지혜롭게 행동하였다면, 예수님의 무릎 밑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행적은 영원히 의(義)로서 남아질 것이었는데, 불행히도 그는 무지하였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어니와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마저 모두 막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로써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 길을 가게 된 큰 요인이 세례요한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또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8절에서,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여, 세례 요한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이 지혜가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고 한탄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가 된 이유

우리는 상술(上述)한 바(2절 Ⅰ)에 의하여, 엘리야가 지상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계승 완성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 왔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누가복음 1장 17절에 기록된 대로, 엘리야의 심령(心靈)과 능력(能力)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슬리는 자를 의인(義人)의 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기 위하여 출생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명적인 입장에서, 엘리야의 재림자(再臨者)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상세한 것은 부활론(復活論)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엘리야는 땅에 있는 세례[요한]에게 재림하여 그가 사명을 다할수 있도록 그를 협조함으로써, 자기가 지상의 육신생활에서 다하지 못한 사명을 세례요한의 육신을 세워 그를 통하여서 완수하려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육신을 대신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사명을 중심하고 보면 그는 엘리야와 동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우리는 위에서 성서의 말씀에 의하여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무지와 불신은 유대인들의 불신은 마침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十字架)의 길을 가시게 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천적(天的)인 비밀을 밝힌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을 무조건 위대한 선지자라고 단정하는 견지에서만 성서를 보아왔던 까닭이다.

우리는 인습적인 신앙관념과 구태(舊態)를 벗어버리기를 두려워하는 고루한 신앙태도를 단연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 세례 요한의 문제를 중심하고 배웠다. 사명을 다하고 간 세례 요한의 문제를 중심하고 배웠다. 사명을 다하고 간 세례 요한을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믿는 것도 부당하겠거니와, 사실상 사명을 다하지 못한 세례 요한을 잘못 알고, 다한 것으로 믿는 것도 잘못된 신앙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신령면(神靈面)으로나 진리면(眞理面)으로나, 항상 바른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서의 말씀에 의하여 세례 요한의 진상을 밝혀 왔지만, 누구든지 영통(靈通)하여서 영계(靈界)에 있는 세례 요한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성도들은 여기에 기록된 말씀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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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聖書)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실 때에는 이미 흙 속에 파묻혀 삭아져버린 모든 성도(聖徒)들의 육신이, 다시 원상(原狀)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나올 것으로 보아야 한다(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마태복음 27장 52절).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적인 처지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의 이성(理性)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진정한 내용을 해명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1절 부활

부활(復活)이라는 것은 다시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은 죽었기 때문이므로, 우리가 부활의 의의를 알기 위하여는, 먼저 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적인 개념(槪念)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 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적 개념

누가복음 9장 60절의 기록을 보면, 부친(父親)을 장사(葬事)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 가려고 하는 제자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죽음과 삶에 각각 서로 뜻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개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장사를 치루어야 할 그 제자의 부친과 같이,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에 대한 생사(生死)의 개념이다. 이런 '죽음'에 대한 '삶'은 그 육신이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그 죽은 부친을 장사하기 위하여 모여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말하는 '죽음'에 대한 생사의 개념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님은 현재 그 육신(肉身)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죽은 자라고 말씀하셨던가?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버린 자리, 즉 사탄의 주관권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서 사탄 주관권내(主管圈內)에 떨어진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삶'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내에서 그의 뜻대로 활동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 육신이 활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관권을 벗어나서 사탄의 주관권내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기준으로 보아 죽은 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3장 1절에 기록된 바, 비신앙적인 세례교회의 신도들에게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한 말씀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 반면에 이미 육신(肉身)의 목숨이 끊어진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의 영인체(靈人體)가 영계의 천상천국(天上天國)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내에 있다면 그는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장 25절)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주관권내에서 사는 사람은, 목숨이 끊어지고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영인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관권내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또 계속하여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육신을 쓰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현재 살아 있는 것은 말할것도 없고, 후일 그가 죽어 육신을 벗어버리고 지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그의 영인체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품 속에서 여전히 삶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위의 성구에 보인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에 있어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그 죽음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아무런 영향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것이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하신 누가복음 17장 33절의 말씀도, 육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사람은, 비록 그 육신이 활동하고 있어도 그는 죽은 자요, 또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육신을 희생하는 사람이고 보면, 설혹 그 육신은 흙 속에 묻혀 썩어버린다 할지라도, 그 영인체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영존(永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곧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타락으로 인한 죽음

우리는 위에서 서로 뜻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 중 어느 것이 인간 시조(始祖)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초래된 죽음일 것인가?

하나님은 원래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어도, 노쇠(老衰)하면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930세에 죽어 그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타락 때문에 온 죽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육신은 영인체(靈人體)의 옷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옷이 더러워지면 벗는 것 같이 육신도 노쇠하면 벗어버리고, 그 영인체만이 무형세계(無形世界)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질로 된 생물체(生物體)로서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도 이 창조원칙(創造原則)을 벗어날 수는 없으므로, 인간의 육신이라고 해서 영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지상에서 육신을 쓴 채로 영존 한다면, 영인체의 갈 곳인 무형세계는 당초부터 창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원래 무형세계는 타락한 인간의 영인체가 가서 살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들이 지상에서 생활하다가, 육신을 벗은 후에 그 영인체가 가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으로서 창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육적인 생명에 강한 미련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이 원래 육신을 벗은 후에는 보다 아름답고 영원한 무형세계에가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타락으로 인하여 알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상에 있어서의 육신생활(肉身生活)과 무형세계에 있어서의 영인생활(靈人生活)은, 애벌레와 나비의 생활에 비교할 수 있다. 만일 애벌레에게 의식이 있다고 하면, 마치 인간이 육신생활에 대하여 애착을 느끼고 있듯이, 그도 역시 허물 속에 삶에 애착을 느끼어 벗고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애벌레가 일단 나비가 된 후에는 향화(香花) 감밀(甘蜜)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인과 영인과의 관계는 바로 이 애벌레와 나비와의 관계와 흡사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다면, 지상인들은 같은 지상인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인들과도 자유로이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육신을 벗는 것이 결코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완성되어 생활하다가 노쇠한 후에, 육신을 벗고 가게 되는 그 영인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오히려 육신을 벗고 가게 되는 그 영인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오히려 육신을 벗고 그 세계로 갈 수 있는 날을 그리워하며 고대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논술한 두 가지의 죽음 중에서,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이 타락으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탄 주관군내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이 곧 타락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성서(聖書)를 중심하고 좀더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타락으로 인한 죽음은, 곧 인간 시조(始祖)가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음으로써 초래된 바로 그 죽음을 말한다. 그러면 그 죽음은 어떠한 죽음이었을 것인가?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그들은 따먹은 그 날을 기해서 정녕 죽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은 아담과 해와는 오늘날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상에서 육신생활을 계속하면서 자손을 번식하여, 마침내 오늘의 타락한 인류사회(人類社會)를 이루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타락으로 인하여 초래된 그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주관권(善主管圈)으로부터 사탄의 악주관권(惡主管圈)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성서(聖書)에서 이에 관한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요한 일서 3장 14절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지상(地上)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와 동일한 뜻으로서 로마서 6장 23절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고 하였고, 또 로마서 8장 6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부활의 의의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이 목숨이 끊어져서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타락으로 인한 죽음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을, 성서가 의미하는 부활(復活)이라고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이미 타계한 성도(聖徒)들의 부활은 곧 흙으로 분해되었던 그 육신이 다시 원상대로 살아나는 것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며, 이러한 죽음은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란 노쇠하면, 그 육신은 자연히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한번 흙으로 분해되어버린 육신은 다시 원상대로 부활할 수도 없으려니와, 영계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된 영인체(靈人體)가 다시 육신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인간이 그의 타락으로 초래된 죽음 즉 사탄 주관권내에 떨어진 입장으로부터,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주관권내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그 과정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회개하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좀더 선(善)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부활한 것이 된다.

성서에서 부활에 관한 예를 들어보면, 요한복음 5장 24절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품속을 떠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한편 또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게 된 것이 사망이요,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늘의 혈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 부활은 인간에게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가

선악과(善惡果)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창세기 2장 17절)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된 아담과 해와는 죽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외형적인 아무런 변이(變異)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었다면, 불안과 공포로 인하여 순간적으로 그들의 안색이 변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인간으로 부활(復活)된다 하더라도, 그의 외형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성신(聖神)으로 중생(重生)한 사람은 중생하기 이전에 비하여 분명히 부활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그와 강도를 비교해 본다면, 하나는 하늘편의 사람으로서 중생한 정도만큼 부활한 처지에 있고, 또 하나는 지옥에 가야 할 사람으로서 죽은 처지에 있지만, 그들의 외형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예증(例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사망으로부터 생명에로 옮겨져서 부활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기 전 사망한 상태에 있을 때나, 예수를 믿고 생명에로 옮겨짐으로써 부활한 뒤나, 그의 육체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 오셨던 것이 사실이다(기독론 참조). 그러나 외형으로 본 예수님은 타락인간에 비하여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만일 그에게 다른 것이 있었다면, 당시의 측근자들이 그를 믿고 따르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부활로 인하여 사탄의 주관을 벗어나,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神性)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타락인간이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주관을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심령(心靈)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령의 변화에 의하여 인간의 육신도 사탄이 우거(寓居)하는 전(殿)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성전으로 사실상 성화(聖化)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신도 부활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악한 일을 위하여 사용되어 왔던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용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성스러운 건물로 변화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다.

2절 부활섭리
. 부활섭리는 어떻게 하시는가?

부활(復活)은 타락인간이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하는 과정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부활섭리(復活攝理)는 곧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의미한다. 복귀섭리는 곧 재창조섭리(再創造攝理)이므로, 부활섭리는 또한 재창조섭리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부활섭리도 창조원리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섭리하시게 되는 것이다.

첫째로 부활섭리역사(復活攝理歷史)에 있어서, 그 사명적인 책임을 맡았던 인물들이 비록 그 자신들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늘 뜻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타락인간이 하나님과 심정적인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터전을 넓혀 왔던 것이다. 따라서 후대의 인간들은 역사가 흐를수록 그 이전의 선지선열(先知先烈)들이 쌓아올린 심정적인 기대로 말미암아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을 더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활섭리는 이러한 시대적인 혜택에 의하여 이루어 지게 된다.

둘째로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하나님의 책임분담(責任分擔)으로 창조된 인간은 그 자신의 책임분담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실천하게 될 때, 비로소 완성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섭리(復活攝理)를 하시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책임분담으로서의 섭리를 위한 말씀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타락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으로서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만 그 뜻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로 창조원리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영인체(靈人體)는 육신을 터로 하여서만 성장하여 완성되도록 창조되었다. 따라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의한 영인체의 부활도 역시 지상의 육신생활을 중심하고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넷째로 인간은 창조원리를 따라 성장기간(成長期間)의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서 완성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에 대한 부활섭리도 그 섭리기간(攝理期間)의 질서적인 3단계를 거쳐서야 완성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 지상인에 대한 부활섭리
1.부활기대섭리

하나님은 아담가정에서부터 부활섭리를 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 뜻을 받들고 나선 인물들이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그 섭리는 연장되어 나오다가 2,000년 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찾아 세움으로써, 비로소 그것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2,000년기간은 결과적으로 다음시대에 들어 부활섭리를 하실 수 있는 그 기대를 조성한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부활기대섭리시대(復活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2. 소생부활섭리

부활섭리(復活攝理)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아브라함 때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은 소생부활섭리(蘇生復活攝理)를 해 나오셨다. 따라서 이 시대를 소생부활섭리시대(蘇生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모든 지상인들은 하나님의 소생 부활섭리에 의한 시대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소생부활섭리는 하나님이 이 시대의 섭리를 위하여 주셨던 구약(舊約) 율법(律法)의 말씀을 인간이 믿고 행함으로써,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여 의롭다함을 받도록 섭리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행의시대(行義時代) 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인체가 육신을 터로 하여 소생부활을 함으로써 영형체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지상에서 영형체(靈形體)를 이룬 인간들이 육신을 벗으면, 그 영인체는 영형체급의 영계에 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3. 장성부활섭리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섭리는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재림기(再臨期)까지 연장되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연장된 2천년기간은 영적 구원에 의하여 장성부활섭리(長成復活攝理)를 해온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장성부활섭리시대(長成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모든 지상인들은 하나님의 장성부활섭리에 의한 시대적인 혜택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장성부활섭리는 하나님이 이 시대의 섭리를 위하여 주셨던 신약(新約)의 말씀을 인간이 믿음으로써,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여 의롭다함을 받도록 섭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신의시대(信義時代)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들은 복음(福音)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인체가 육신을 터로 하여서 장성부활을 함으로써 생명체(生命體)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상에서 생명체급의 영인체를 이룬 인간들은, 육신을 벗은 후에 생명체급 영계인 낙원(樂園)으로 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4. 완성 부활섭리

재림(再臨)하시는 예수님에 의하여 영육(靈肉) 아울러 부활하여서, 부활섭리를 완성하는 시대를 완성부활섭리시대(完成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이 새대에 있어서의 모든 지상인들은, 완성부활섭리에 의한 시대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재림주님은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새 말씀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시다(전편 제3장 제5절 Ⅰ). 그러므로 완성부활섭리는 신.구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시는 새 말씀(이 말씀은 성약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을 인간들이 믿고 또 주님을 직접 모심으로써, 그 책임분담을 완수하여 의롭다함을 받도록 섭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를 시의시대(侍義時代)라고도 한다.

이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들은 재림주님을 믿고 모심으로 말미암아, 영 육 아울러 완전히 부활되어 그의 영인체는 생령체를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지상에서 생령체(生靈體)를 완성한 인간들이 생활하는 곳을 지상천국(地上天國)이라 한다. 그리고 지상천국에서 생활하던 완성한 인간들이 육신을 벗으면, 생령체의 영인으로서 생령체급의 영계인 천상천국(天上天國)으로 가서 살게 되는 것이다.

5. 천국과 낙원

이제까지의 기독교 신도들은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낙원(樂園)과 천국(天國)을 혼동해 왔다.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지상에 강림하셨던 목적이 완성되었더라면, 그 때에 이미 지상천국은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지상천국에서 생활하던 완성한 인간들이 육신을 벗고 생령체를 완성한 영인체(靈人體)로서 영계에 갔다면, 천상천국도 그 때에 이루어 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에 생령체를 완성함 인간은 나타나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생령체의 영인들이 생활하도록 창조된 천상천국에 들어간 영인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천상천국은 아직도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그 주민이 되어야 할 인간들을 중심삼고 보면, 아직 천상천국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님은 자기를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던가? 그것은 예수님이 지상에 오셨던 본래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천국을 이루시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지상천국을 이루지 못하시고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셨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끝내 믿어 주지 않았던 그 가운데서, 자신을 믿어준 오직 한 사람이 였으며 십자가의 동반자였던 강도에게, 예수님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누가복음 23장 43절).

결국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소망적인 과정에서는 천국에 들어갈 것을 강조하셨지만, 이 뜻을 못 이루고 떠나서는 십자가의 죽음길에 임해서는, 실상 낙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이된 사실을 표명하셨던 것이다. 낙원은 이렇듯 지상에서 예수를 믿음으로써 생명체급(生命體級)의 영인체를 이루어 가지고, 육신을 벗고 간 영인들이 천국 문이 열릴 때까지 머물러 있는 영계(靈界)를 말하는 것이다.

6. 말세에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

장성기 완성급(長成期 完成級)에서 타락되었던 인간이, 복귀섭리에 의하여 소생 구약시대(蘇生 舊約時代)를 지나 장성 신약시대(長成 新約時代)의 완성급까지 복귀되어 인간시조가 타락되기 전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시대를 말세(末世)라고 한다. 이 시대는 아담과 해와가 타락되기 직전, 하나님과 일문일답하던 그 때를 세계적으로 복귀하는 시대이므로, 지상에는 영통(靈通)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많이 부어주시마고 약속하셨던 것(사도행전 2장 17절)은, 바로 이러한 원리적인 근거에 의하여서만 그 이유가 해명되는 것이다.

말세에는 '너는 주(主)라'는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흔히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가 재림주(再臨主)인 줄로 알고 바른 길을 찾아가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주관하는 주가 되라고 축복하셨다(창세기 1장 28절).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이 복귀섭리에 의하여 장성기(長成期)의 완성급(完成級)까지 영적으로 복귀되어서,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기 직전의 입장과 맞먹는 심령기준(心靈基準)에 달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피조세계의 주가 되라고 축복하셨던 그 입장을 복귀했다는 뜻에서, '너는 주라'는 계시를 주시는 것이다.

말세에 들어서 이와 같이 '주라'는 계시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신앙이 독실한 성도들은, 예수님 당시에 그의 앞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던 세례요한과 마찬가지의 자리에 서게 된다(요한복음 1장 23절). 따라서 그들에게도 각자가 맡은 바 그 사명분야에 있어서, 재림하실 예수님의 앞길을 곧게 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각자의 사명분야에 있어 재림주님을 위한 시대적인 대신 사명자로 택함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주라'는 계시를 내려 주시는 것이다.

영통인(靈通人)들이 '너는 주라'는 계시를 받았을 때, 이와 같은 원리적인 사정을 알지 못하여, 자기가 재림주인 것으로 잘못 알고 행동하다가는, 그는 반드시 적그리스도의 처지에 서게 된다. 말세(末世)에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나리라고 예언하신 이유 는 실상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통인(靈通人)들은 모두 제각기 통하고 있는 영계(靈界)의 계위(階位)와 계시의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고린도전서 15장 41절), 피차가 상충적인 혼란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영통인들은 사실상 모두 동일한 영계를 찾아 나아가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대하고 있는 각자의 환경, 위치, 특성, 심령 정도 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에게 나타나는 영계도 각각 다른 모양으로 인식되어 상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을 받들고 나아가는 사람들은, 각각 섭리의 부분적인 사명을 담당하고,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만을 맺고 있기 때문에, 다른 영통인들과의 횡적인 관계를 알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각자가 받고 나아가는 하늘의 뜻이 각각 다른 것 같이 여겨져서 상충역사(相衝役事)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은 각자로 하여금 복귀섭리의 목적을 달성케 함에 있어서, 그들이 제만큼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격려하시기 위함에 있어서, '네가 제일이라'는 계시를 주시기 때문에 횡적인 상충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맡은 부분적인 사명분야에 있어서는, 사실상 그가 제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계시를 내리시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독실한 신앙자들이, 아담과 해와의 타락 직전의 심령기준(心靈基準)까지 성장하여 영통하게 되면, 아담과 해와가 넘지못하고 타락한 것과 같은 시험으로 인하여, 타락되기 쉬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원리를 모르는 한 이러한 입장을 극복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인(道人)들이, 이 시험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오랜 동안 수도(修道)한 공적인 일조일석(一朝一夕)에 허사로 돌려보내곤 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영통인들의 이러한 혼란을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빨리 이루시기 위하여, 그 섭리의 과정에 있어서, 부분적인 사명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담시켜 그 자체들을 종적으로만 대하여 나오시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영통인들은 상호간에 횡적인 상충을 면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역사의 종말기(終末期)에 이르면 그들 각자의 사명이 모두 복귀섭리의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분담되어진 것이었음을 다함께 깨닫고, 서로 횡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로 결합하여 복귀섭리의 전체적인 목적을 이루게 하시는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시게 되는 것이다.

그때에 모든 영통인(靈通人)들은 자기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온 고집을 버리고, 보다 고차적이며 전체적인 진리의 말씀 앞에 나와, 자기 자신의 섭리적인 사명과 위치를 바로 깨달아야만, 횡적인 상충에서 일어났던 지난날의 모든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동시에, 각자가 걸어온 신앙노정(信仰路程)에 대한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두게 될 것이다.

7. 첫째 부활

'첫째부활'이라 함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가 시작된 이후, 재림역사(再臨役事)에 의해서 맨 처음으로 인간이 원죄를 벗고, 창조본연의 자아(自我)를 복귀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게 하는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 신도들의 유일한 소망은 '첫째부활'에 참여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재림 주님이 강림하시게 될 때, 맨 먼저 그를 믿고 모시고 따라,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의 전체적이며 또한 세계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시는 그의 일을 협조함으로써, 모든 인간에 앞서 먼저 원죄를 벗고 생령체급 영인체(生靈體級 靈人體)를 이루어 창조목적을 완성한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성경에 표시된 14만 4천 무리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하는 사실을 알아보기로 하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완수하시기 위하여는,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하늘 뜻을 받들고 나오다가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하지 못함으로써,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모든 성현(聖賢)들의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는 대신 자들을 재림주님이 그 일대에서 횡적으로 찾아 세워, 사탄세계에 대한 승리의 기대(基臺)를 닦아 놓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재림주님이 오셔서 찾아 세워야 할 성도들의 그 전체 수가 바로 요한계시록 14장 1절 내지 4절요한계시록 7장 4절에 기록되어 있는 14만 4천 무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가정 복귀의 사명자였던 야곱은 12자식을 중심하고 출발하였고, 민족복귀를 위하여 출발하였던 모세는 12지파(支派)를 거느렸는데, 이 각 지파가 다시 12지파형으로 번식하면 144수가 된다. 세계 복귀의 사명자로 오셨던 예수님은, 영육(靈肉) 아울러 이 144의 수를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12제자를 세우셨으나, 십자가에 돌아가게 되어 영적으로만 이것을 탕감복귀하여 나오셨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노아로부터 야곱까지의 종적인 12대를,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야곱이 12자식을 세웠던 것과 같이, 재림주님은 초림 이후 영적으로만 144지파형을 세워 나왔던 종적인 섭리노정을, 영 육 아울러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복귀하시기 위하여, 144의 수에 해당하는 일정한 필요수의 성도들을 찾아 세우셔야 하는 것이다.

. 영인에 대한 부활섭리
1. 영인들이 재림부활하는 이유와 그 방법

창조원리에 의하면, 인간의 영인체(靈人體)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생소(生素)와, 육신으로부터 공급되어지는 생력요소(生力要素)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서만 성장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인체는 육신을 떠나서는 성장할 수 없으며, 또한 부활(復活)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지상의 육신생활(肉身生活)에서 완성하지 못하고 타계해 버린 영인들이 부활하기 위하여는 지상에 재림(再臨)하여서 자기들이 지상의 육신생활에서 이루지 못하였던 그 사명부분을, 육신생활을 하고 있는 지상의 성도들을 협조하여 그것을 이루게 함으로써, 지상인들의 육신을 통하여 대신 이루어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유다서 1장 14절에 끝날에 주님과 함께 수만 성도가 임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영인(靈人)들은 어떤 방법으로써 지상인(地上人)으로 하여금 뜻을 이루도록 협조하는가? 지상의 성도들이 기도 및 기타 영적인 활동을 하는 가운데 영인들의 상대가 되면, 그 영인들은 재림하여서 그 지상인들의 영인체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역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영인들은 지상인들로 하여금 불을 받게 하고, 병을 고치게 하는 등 여러 가지의 능력을 행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입신상태(入神狀態)에 들어가서 영계의 사실을 보고 듣게도 하고, 혹은 계시(啓示)와 묵시(默示)에 의하여 예언을 하도록 하며, 그 심령에 감명을 주는 등 여러 면에 걸쳐 성신의 대신 역사를 함으로써, 지상인으로 하여금 뜻을 이루어 나아가도록 협조하는 것이다.

2. 기독교를 믿고 간 영인들의 재림부활
(1) 장성 재림부활

지상에서 율법(律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간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영형체급 영인(靈形體級靈人)들은 메시아 강림 후에 전부 지상에 재림하여서, 지상성도들로 하여금 뜻을 이루어 생명체급(生命體級)의 영인체를 완성할 수 있도록 협조하였다. 이렇듯 재림 협조한 그 영인들도 그들의 협조를 받은 지상의 성도들과 동일한 혜택을 받아, 함께 생명체를 이루어 가지고 낙원(樂園)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장성재림부활(長成再臨復活)이라고 한다.

이에 관한 실례를 성경 가운데서 들어보기로 하자. 마태복음 17장 3절에 엘리야가 영인체로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앞에 나타난 데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엘리야는 그대로 영계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 12절을 보면, 예수님은 지상에서 생활하고 잇는 세례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엘리야가 세례요한에게 재림하여, 그로 하여금 자기가 지상에서 다하지 못하였던 사명까지 대신 이루도록 협조함으로써, 재림부활의 목적을 달성코자 하였으므로, 사명으로 보면 세례요한의 육신은 곧 엘리야의 육신의 대신도 되었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태복음 27장 52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무덤에서 자고 있던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흙속에서 이미 썩어 없어져 버린 그들의 육신이 다시 원상대로 육신을 쓰고 일어났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형체급(靈形體級)의 영인체로서 영계에 머물러 있었던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영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代贖)의 혜택권내에 있는 지상 성도들에게 생명체(生命體)를 이룰 수 있도록 협조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입어 자기들도 함께 생명체를 이루기 위하여, 영적으로 재림한 것을 보고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만일 성경의 문자대로 구약시대의 영인(靈人)들이 무덤에서 육신을 쓰고 다시 일어났다고 하면 그들은 반드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하였을 것이니, 무덤에서 일어난 성도들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을 유대인이 어디 있었을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성도(聖徒)들에 관한 사적은 반드시 성서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사실밖에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무덤에서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그 성도들은, 영안(靈眼)이 열린 신도들만이 잠깐 동안 볼 수 있었던 영인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에 의하여서 갈 수 있는 낙원에 비교해 볼 때, 구약시대의 영인들이 머물러 있던 곳은, 보다 어둡고 괴로운 세계이기 때문에 이것을 무덤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2) 완성 재림부활

신약시대(新約時代)에 지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낙원으로 간 생명체급(生命體級)의 영인들은, 메시아가 재강림(再降臨)하신 후 전부 지상에 재림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영인들은 지상의 성도들로 하여금, 재림하신 예수님을 믿고 모시어, 생령체급의 영인체를 완성할 수 있도록 협조함으로써, 그들도 동일한 혜택을 받아서 생령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상의 성도들이 육신을 벗고 천국으로 들어가게 될 때에, 그 영인들도 그들과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활섭리를 완성재림부활섭리라고 한다.  P.202

이와 같은 섭리를 두고 볼 때에 영인들이 지상인들을 협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과적으로 보아 지상인들도 영인들의 부활역사(復活役事)를 협조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또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39절 이하에 이 사람들(구약시대 성현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천국 들어가는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니 하나님이 우리(지상인)를 위하여 더 좋은 것(천국)을 예비하셨은즉 우리(지상인)가 아니면 저희(영인들)로 온전함(지상인)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된 말씀은, 결국 위에서 설명한 사실을 실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이 구절은 영계(靈界)에 있는 모든 영인들은 지상인의 협조를 받지 않고서는 완성할 수 없다는 원리를 증거한 것이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기록된 바 무엇이든지 너희(지상성도)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도, 결국 지상 성도들이 풀어 주지 않으면, 영인들에게 맺혀진 것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신 것이었다.

이와 같이 영인(靈人)들은 지상의 성도들에게 재림(再臨)하여서 그를 협조함으로써만 부활(復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마태복음 16장 1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천국문의 열쇠를 지상성도들의 대표로 베드로에게 주시어, 그로 하여금 천국문을 지상에서 열도록 하셨던 것이었다.

3. 낙원 이외의 영인들의 재림부활

먼저 기독교(基督敎) 이외의 타종교(他宗敎)를 믿고 간 영인들은 어떻게 하여서 재림부활(再臨復活)하는가를 살펴 보기로 하자. 인간들끼리 어떠한 목적을 공동으로 이루려면, 반드시 서로 상대기준(相對基準)이 조성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지상 인간과 영인들도 공동으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서로 상대기준을 조성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부활을 위하여 재림하는 영인들은, 자기들이 지상에 생존하였을 때에 신봉(信奉)하였던 것과 같은 종교를 믿고 있는 지상인 중에서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신도를 택하여 가지고 그에게 재림한다. 그리하여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그들을 협조함으로써 마침내 그들과 동일한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는 지상에서 종교생활을 하지 않았으나 양심적으로 살다 간 선영인(善靈人)들은 어떻게 재림부활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원죄(原罪)를 벗지 못한 타락인간 중에는 절대적인 선인(善人)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선령(善靈)이라고 하는 것은, 악성(惡性)보다 선성(善性)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영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영인들은 지상의 선인들에게 재림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협조함으로써 마침내 그들과 동일한 혜택을 받게 된다.

셋째로는 악영인(惡靈人)들은 어떻게 재림부활하는가를 알아보자. 마태복음 25장 41절마귀와 그 사자라고 한 말이 있다. 이 사자(使者)는 바로 '마귀'의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악영인체(惡靈人體)를 말하는 것이다. 세칭 유령(幽靈)이라고 하는 정체 불명의 영물(靈物)은 바로 이러한 악영인체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악령들도 역시 재림하여 가지고 시대적인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악영인들의 역사(役事)가 모두 다 재림부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 역사가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벌로써 지상인의 죄를 청산하려 하셨던 것에 대한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 세워졌을 때 비로소 그 악영인들은 재림부활의 혜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악령의 역사가 하늘을 대신하여 심판의 행사를 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 실례를 하나 들어보자. 이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시대적인 혜택으로 말미암아 가정적인 혜택권으로부터 종족적인 혜택권으로 옮겨질 수 있는 한 지상인(地上人)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자기 자신이나 혹은 그 선조가 지은 어떠한 죄가 남아 있으면, 그에 해당하는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 그 죄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종족적인 혜택권으로 넘어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때에 하늘은 악영인(惡靈人)들로 하여금, 그 죄에 대한 벌로서 이 지상인에게 고통(苦痛)을 주게 하는 역사를 하게 하신다. 이런 경우 이 지상인이 그 악영인들이 주는 고통을 감수하고 잘 넘어가면, 이 것을 탕감조건으로 하여 그는 가정적인 혜택 권으로부터 종족적인 혜택권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때에 그에게 고통을 주었던 악영인도 그에게 해당하는 혜택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하여서 복귀섭리는 시대적인 혜택에 의하여, 가정적인 혜택 권에서 종족적인 혜택권으로,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민족적인 것으로, 나중에는 세계적인 것으로 점차 그 혜택의 범위를 넓혀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적인 혜택권으로 넘어갈 때마다, 그 섭리를 담당한 인물은 반드시 그 자신이나 혹은 그 선조들이 지은 죄에 대한 탕감조건을 세워서 그것을 청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고 이렇게 악령(惡靈)들의 역사(役事)로써 지상인의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는 경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첫째로는 악영인(惡靈人)으로 하여금 직접 그 지상인(地上人)에게 접하여 역사하게 함으로써 그 지상인이 스스로 청산해야 할 죄에 대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다. 둘째로는 그 악영인이 어떤 지상인에게 직접 역사하려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범죄를 행하려는 다른 지상의 악인(惡人)에게 그 악영인을 재림하게 하여서, 그 악인으로 하여금 실체로써 그 지상인에게 악의 역사를 하게 함으로써, 그 지상인이 스스로 청산해야 할 죄에 대한 탕감조건을 세워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경우 그 지상인이 이 악령의 역사를 당연한 것으로서 기쁘게 받아들이게 되면 그는 자기나 혹은 그의 선조가 지은 죄에 대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되므로, 그 죄를 청산하고 새 시대의 혜택권내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악영인들의 역사는, 하늘을 대신하여 지상인의 죄에 대한 심판의 행사를 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그 역사로 말미암아 이 악령인들도 그 지상인과 같은 혜택을 받아 새 시대의 혜택권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 재림부활로 본 윤회설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그 전체적인 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 각 개체를 부르시어 그 개체에 적합한 사명을 분담시켜 나오셨다. 그리고 인간은 이 사명을 계속적으로 그와 동일한 형의 개체에로 전승하면서,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그 분담된 사명분야를 점차적으로 완수하여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복귀섭리는 개인에서 출발하여, 가정과 민족을 거쳐 세계를 넘어 천주(天宙)까지 복귀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에 맡겨진 사명은 비록 부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형은 개인형에서 시작하여 가정과 민족과 세계의 각 형으로 그 범위를 넓혀 내려오는 것이다. 성서에서 그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개인형 또는 가정형이었고, 모세는 민족형이었으며, 예수님은 세계형이었다.

그런데 지상에서 자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간 영인(靈人)들은, 각각 자기들이 지상에서 맡았던 것과 같은 사명을 맡은 동형(同型)의 지상인에게 재림하여서,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조하는 것이다. 이 때에 그 협조를 받는 지상인은, 자기 자신의 사명도 이루어 나아가는 동시에, 자신을 협조하는 영인의 사명을 중심하고 보면, 그 지상인의 육신은 그를 협조하는 영인의 육신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되면 그 지상인은 그를 협조하고 있는 영인의 재림자(再臨者)가 되는 것이므로, 그 지상인은 흔히 그를 협조하는 영인의 이름으로 대칭(代稱) 되곤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지상인은 흔히 그 영인이 윤회환생(輪廻還生)한 실체인 것 같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서에서 이에 관한 예를 들어보면, 세례요한은 엘리아의 협조를 받아서 그의 뜻을 세워 나아갔기 때문에, 그는 엘리아가 지상에 있을 때에 다하지 못하였던 사명까지 다해 주어야만 했었다. 따라서 세례요한의 육신은 엘리아의 육신을 대신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므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엘리아라고 하셨던 것이다(본장 제2절 Ⅱ.2)

말세(末世)에 있어서 세계형(世界型)의 분담사명을 맡은 지상인들은, 각각 과거에 그와 동형의 사명을 띠고 왔다 간 모든 영인들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 계승하여 완수해야 될 입장에 있다. 따라서 그 모든 영인들은 그 지상인들에게 재림하여 그를 협조함으로써, 그들이 지상에 있을 때에 다하지 못하였던 사명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인들의 협조를 받는 지상인은, 그를 협조하는 모든 영인들의 재림자요, 따라서 그 지상인은 그 모든 영인들이 환생한 것 같이 보여지는 것이다. 끝날에 자기가 재림 예수요, 미륵불이요, 석가요, 공자요, 혹은 감람나무 혹은 생명나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윤회환생을 주장하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재림부활(再臨復活)의 원리를 모르고, 다만 그 나타나는 결과만을 보고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3절 재림부활에 의한 종교의 통일

. 재림부활에 의한 기독교의 통일

이미 본장 제2절 Ⅱ.2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낙원(樂園)에 머물러 있는 생명체급 영인(生命體級 靈人)들은, 재림하신 예수님을 믿고 모심으로써 생령체급 영인체(生靈體級 靈人體)를 완성할 수 있는 지상의 성도들에게 재림한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복귀섭리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협조함으로써, 그들과 동일한 혜택을 받아 천국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기(再臨期)에는 낙원에 있는 모든 영인들이 함께 지상성도들에게 재림하여, 그들을 협조하는 역사(役事)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각 개체의 신앙태도와 그가 가지고 있는 천품(天稟), 그리고 뜻을 위하여 세운 그 선조들의 공적(功績) 등에 의하여, 그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처지에서, 지상 성도들은 낙원(樂園)에 있는 영인들의 협조에 의하여 재림주님 앞으로 나아가, 뜻을 위하여 헌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자연히 통일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재림부활에 의한 다른 모든 종교의 통일

이미 말세론(末世論)에서 논한 바와 같이, 이제까지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고 나왔던 모든 종교(宗敎)가, 하나의 기독교문화권(基督敎文化圈)으로 점차 흡수되어 가고 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기독교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과거 역사상에 나타났던 모든 종교의 목적까지 아울러 성취해야 되는 최종적인 사명을 가지고 나타난 종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중심으로 오실 재림주님은, 결국 불교(佛敎)에서 재림할 것으로 고대하고 있는 미륵불도 되는 것이며, 유교(儒敎) 에서 현현할 것으로 고대하고 있는 진인(眞人) 한편 또 많은 한국인들이 고대하고 있는 정도령(正道令)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밖에 모든 종교에서 각각 그들 앞에 나타나리라고 믿고 있는 그 중심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에서 고대하고 있는 재림 예수님은, 다른 모든 종교에서 재림하리라고 믿고 있는 그 중심인물(中心人物)이기도 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믿다가 타계한 영인들도 그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위치에 따라 그에 적응될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재림부활(再臨復活)의 혜택을 받기 위하여, 낙원(樂園)에 있는 영인들과 같이 재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각자가 지상에 있을 때 믿었던 종교의 지상 신자들을 재림하신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여, 그를 믿고 모시어 뜻을 이루도록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는 결국 기독교를 중심하고 통일하게 되는 것이다.

. 재림부활에 의한 비종교인의 통일

어떠한 종교도 믿지 않고 다만 양심적으로 생활하다가 타계한 영인들도 모두 재림부활의 혜택을 받기 위하여, 각각 그들에게 허락되어 있는 시기에 지상에 재림한다. 그리하여 그들도 양심적인 지상인으로 하여금 재림주님을 찾아 모시어, 그 뜻을 이룰 수 잇도록 협조하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2장 2절 이하에 기록된 바, 예수님의 탄생 때 점성술사(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敬拜)하고 모시었던 일은 이러한 예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의 궁극의 목적은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각각 그 죄를 탕감(蕩減)하는데 필요한 어느 기간만 다 경과하면, 지옥까지도 완전히 철폐하시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선의 목적이 이루어진 피조세계(被造世界)에 지옥이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다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이나 복귀섭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까지도 불완전한 분이 되어지는 모순을 초래하게될 것이다.

타락인간에 있어서도 그 어느 한 자녀라도 불행하게 되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 그 부모의 심정이어든, 하물며 하늘 부모로 계신 하나님에 있어서랴. 베드로후서 3장 9절을 보면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져야 할 이상세계(理想世界)에 지옥이 영원한 것으로 남아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 8장 29절을 보면, 예수님 당시에 바로 사탄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끝날에 있어서도 때가 이르면 악영인(惡靈人)들까지도 각각 동급의 지상의 악인들에게 재림하여, 그들이 뜻을 위하여 나아가도록 협조함으로써, 결국 오랜 기간을 경과하면서 점차적으로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는 방향으로 통일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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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예 정 론

고래(古來)로 예정설(豫定說)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성도(聖徒)들의 신앙생활의 실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성서에는 인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와 행-불행은 물론 타락인간의 구원(救援) 여부와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되어지는 것으로 해석되는 성구가 많이 있다.

그 예를 들면 로마서 8장 29절 이하에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이를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다. 또 로마서 9장 15절 이하에는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으며, 로마서 9장 21절에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9장 11절 이하에는, 하나님은 복중(腹中)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장자(長子)된 에서는 차자(次子) 야곱을 섬기리라고 한 말씀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완전예정설(完全豫定說)을 세워줄 수 있는 성서적인 근거는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예정설을 부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성서적인 근거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2장 17절에 인간조상의 타락(墮落)을 막으시기 위하여 '따먹지 말라'고 권고하신 것을 보면,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예정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은 결과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한편 또 창세기 6장 6절에는,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創造)하신 것을 한탄하신 기록이 있는데,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타락되었다면, 하나님 자신의 예정대로 타락된 인간을 두시고 한탄하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救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바로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성구인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만나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보면, 모든 성사(成事) 하나님의 예정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정으로만 되어진다면, 무엇 때문에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실 필요가 있겠는가?

야고보서 5장 14절에 환중(患中)에 있는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 것을 보면, 병이 나거나 낫거나 하게 되는 것도 역시 모두 하나님의 예정에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불가피한 운명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이 애써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종래의 예정설(豫定說)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기도나 전도나 자선행위등 인간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아무 도움도 될 수 없고,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라면 그것도 역시 절대적일 것이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변경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정설을 둘러싸고 찬 반 양론이 모두 세워질 수 있는 성서의 문자적인 근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리의 논쟁은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가 원리(原理)로써는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예정론에 대한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제1절         뜻에 대한 예정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豫定)을 논술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뜻'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지 못하셨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들을 놓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이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는 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뜻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이러한 뜻을 예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을 세우셨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루지 못하셨던 그 뜻을 다시 이루시기 위하여 그것을 다시 예정하시고 복귀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 뜻을 선(善)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셔야 하며, 악(惡)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실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의 주체(主體)이시므로 창조목적(創造目的)도 선이요,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도 선이시어서 그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도 선이 아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이루시는데 반대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을 예정하실 수는 없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이나 타락인간에 대한 심판이나, 혹은 우주의 멸망 등을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악의 결과도 하나님의 예정으로 되어지는 필연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은 선의 주체라고 할 수 없으며, 자신이 예정하신 대로되어진 악의 결과에 대하여 후회하셔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된 인간을 보시고 한탄하셨고(창세기 6장 6절), 또 불신으로 돌아간 사울 왕을 보시고 그를 택하셨던 자신의 일을 후회하셨던 것이니(사무엘상 15장 11절), 이것은 그것들이 모두 예정으로 되어진 결과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악의 결과는 모두 인간 자신이 사탄과 짝함으로써,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한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뜻을 예정하심에 있어서 그것은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유일(唯一)하시고 영원(永遠)하시며 불변(不變)하신 절대자이시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도 역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도 유일하고 불변하며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뜻에 대한 예정 또한 절대적인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이사야 46장 11절). 이와 같이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기 때문에, 만일 이 뜻을 위하여 세워진 인물이 그것을 이루어 드리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은 그의 대신 다른 인물을 세워서라도 끝까지 이 뜻을 이루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 예를 들면 아담을 중심하고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려 하셨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후아담으로 보내시어, 그를 중심하고 그 뜻을 다시 이루시려 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 뜻도 역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전편 제4장 제1절 Ⅱ),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까지 이 뜻을 기필코 완수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16장 27절).

또 하나님은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한 섭리로써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려 하셨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대신 노아가정을 세우시어 이 뜻을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나아가 노아가정이 또 이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대신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시어 기필코 그 뜻을 이루셔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또 아벨로써 이루시지 못한 뜻을 그 대신 셋을 세우시어 이루려 하셨고(창세기 4장 25절), 또 모세로써 이루어지지 않은 뜻을 대신 여호수아를 택하여 이루려 하셨으며(여호수아 1장 5절), 가룟유다의 반역(反逆)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뜻을, 그의 대신 맛디아를 택하시어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사도행전 1장 25절).

 

제2절                       성사에 대한 예정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인간이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만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관여할 수 없으나, 그 '뜻성사'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를 중심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실상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책임분담을 그들 자신이 완수함으로써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창세기 2장 17절).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데 있어서도, 그 사명을 담당한 중심인물이 그 책임분담을 수행함으로써만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도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하여는, 유대인들이 그를 절대로 믿고 따라야 할 것이었는데, 그들이 불신으로 돌아감으로써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뜻 성사'는 부득이 재림 때에로 미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뜻 성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일까? 이미 위에서 논급한 바와 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 뜻의 성사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95%의 책임분담에, 그를 중심인물이 담당해야 할 5%의 책임분담이 가담되어서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정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 5퍼센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비하여 극히 작은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100퍼센트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한 예를 들면, 아담 해와를 중심한 '뜻 성사'는, 그들이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않는 것으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되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노아가 방주(方舟)를 제작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도 타락인간(墮落人間)이 그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것으로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비로소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요한복음 3정 16절). 그러나 인간들은 이 작은 책임분담마저 감당치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연장케 하였었다.

한편 또 야고보서 5장 15절에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 5장 34절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있으며, 마태복음 7장 8절에서는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러한 聖句들은 모두 인간자신의 책임분담 수해에 의하여서만,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정되었다는 사실을 증시(證示)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인간이 담당했던 책임분담은, 하나님이 그의 책임분담으로 담당하신 수고와 은사에 비하여 얼마나 미소(微小)한 것인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 섭리적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감당치 못함으로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연장시켜 왔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 경미(輕微)한 책임분담이 인간 자신에 있어서는 얼마나 힘에 겨울만큼 큰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제3절                         인간에 대한 예정

 

아담과 해와는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선의 인간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가 인간조상이 되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타락인간도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어떠한 인물이 된다는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는 것인가? 어떤 인물을 중심한 하나님의 '뜻 성사'에 있어서는 그 자신이니 언제나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을 해야만 된다는 필수적인 요건이 따라 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인물을 어떠한 사명자(使命者)로 예정하시는데 있어서도 그 예정을 위한 95퍼센트의 하나님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5%의 인간 책임분담 수행이 합하여서, 그 인물을 중심한 뜻이 100퍼센트 완성됨으로써만 그러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하신다. 그러므로 그 인물이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의 인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실 때에, 그가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선민(選民)을 가나안 복지(福地) 까지 인도할 수 있는 영도자(領導者)가 되도록 예정하셨다(출애급기 3장 10절). 그러나 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도중에서 죽고 말았다(민수기 20장 7~12절, 20장 24절, 27장 14절).

한편 하나님이 가룟유다를 택하실 때에도, 그가 충성으로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에 그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도리어 반역자(反逆者)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세우실 때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모시어 맡겨진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영광의 선민(善民)이 될 수 있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줌으로써 이 예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그 백성은 쇠퇴해 갔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중심인물(中心人物)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은 타락된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세계에로 완전히 복귀하시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기의 차이는 있으나, 타락인간은 누구나 다 빠짐없이 구원을 받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베드로후서 3장 9절).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가 그러했듯이, 그의 재창조역사(再創造役事)인 구원섭리도 일시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전체적인 것으로 넓혀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구원섭리를 위한 예정에 있어서도, 먼저 그 중심인물을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부르심을 받는 중심인물은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그는 먼저 복귀섭리를 담당한 선민의 하나로서 태어나야 하며, 다음으로 같은 선민 중에서도 선(善)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똑같은 선의 공적이 많은 선조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그 개체가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천품(天稟)을 타고나야만 하는 것이며, 또 같은 천품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이를 위한 후천적인 조건이 모두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후천적인 조건마저 똑같이 갖춘 인물들 중에서도 보다 하늘이 필요로 하는 때와 장소에 맞추어진 개체를 먼저 택하시는 것이다.

 

제4절                       예정설을 세워주는 성구 해명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豫定)에 관한 여러 가지의 문제점을 해명하였다. 그러나 다음으로 풀어야 할 문제는, 본장의 서언(序言)에서 열거한 성구들과 같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성구를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로마서 8장 29절 내지 30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은 미리 아신 사람을 미리 정하사, 미리 정하신 이를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데 하신다고 한 말씀을 해명해 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시므로, 어떤 사람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는 조건을(본장 제3절) 갖추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와 같이 미리 알고 계시는 인물을 예정하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시는 하나님의 책임분담(責任分擔) 만으로는, 그가 의롭다 함을 얻어 영화를 누리는 데까지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부름 받는 입장에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할 때 비로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야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榮華)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화도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함으로써만 누릴 수 있도록 예정되는 것이다. 다만 성구에는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한 말씀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예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이 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로마서 9장 15절 내지 16절에는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기록이 있다.

위에서 해명한 바와같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떠한 인물이 가장 적합한가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미리 아시고 택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물이 택하시어 긍휼(矜恤)히 여기시거나 혹은 그를 불쌍히 보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에, 인간이 원함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 아니요, 또 인간의 노력으로 달음박질을 해서 되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 성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주신 말씀인 것이다.

한편 로마서 9장 21절에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슬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성(創造性)을 닮게 하심으로써,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주인으로 세우시어, 가장 사랑하시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을 세우셨다는 것은 이미 논술한 바 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조건을 스스로 범하여 타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타락인간(墮落人間)은 마치 쓰레기와 같이 버림을 받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설혹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을 어떻게 취급한다 하더라도 결코 불평해서는 아니된다는 뜻을 교시(敎示)하기 위하여 이 성구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 9장 10절 내지 13절에는, 하나님이 태중(胎中)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장자(長子) 에서가 차자(次子) 야곱을 섬기리라고 한 말씀이 있다. 에서와 야곱은 복중(腹中)에 있어서 아직 선악간(善惡間)에 아무런 행동의 결과도 나타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 것인가? 이것은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의 프로를 맞추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것은 후편 제1장의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설명하겠지만, 에서와 야곱을 쌍태(雙胎)로 세우셨던 것은, 그들을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자리에 갈라 세워 놓고, 아벨의 자리에 있는 야곱이 가인의 자리에 있는 에서를 굴복시킴으로써, 일찍이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장자기업(長子企業) 복귀의 ‘뜻’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에서는 가인의 자리이므로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이요, 야곱은 아벨의 자리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와같이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실제로 미워하시거나 사랑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 수행여부에 따라서 좌우될 문제였다. 실상에서는 야곱에게 순종굴복하였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서 야곱과 같은 사랑의 축복(祝福)을 받는 자리로 옮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처지에 세워졌던 야곱이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과연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뜻 성사'를 하나님의 전담행사(專擔行事)로서만 보아왔기 때문에, 칼빈(Calvin, Jean)과 같이 완고(頑固)한 예정설(豫定說)을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었고, 또 그것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을 두고 그대로 인정되어 오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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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기 독 론

구원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타락인간들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와 성신(聖神)과의 관계, 예수와 성신과 타락인간과의 관계, 중생(重生)과 삼위일체(三位一體) 등 기독론(基督論)에 관한 제문제(諸問題)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이 문제에 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문제에 대한 미해결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생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왔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알아야 하므로, 이에 관하여 먼저 논한 다음에 위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기로 하자.

1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가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 즉 완성한 아담의 가치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논하여 보기로 하자.

첫째,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과의 이성성상적(二性性相的)인 관계로서 논하여보자.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서 마음과 몸으로 창조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 사이에도 이성성상적인 관계가 있으므로, 이 관계는 인간의 마음과 몸과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무형(無形)의 마음을 닮게 하여 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창조된 것이 몸임 것과 같이, 무형의 하나님을 닮게 하여 그의 실체대상으로 창조된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완성한 인간에 있어서의 마음과 몸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하나가 될 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완성한 인간이 사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어서 일체가 되면,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완전히 체휼하는 생활을 하게 되므로, 그 관계는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이 항상 계실 수 있는 성전(聖殿)이 되어(고린도전서 3장 16절) 신성(神性)을 가지게 된다(전편 제1장 3절 Ⅱ).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인간은 하늘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마태복음 5장 48절).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적인 가치를 가지게 된다.

둘째, 인간 창조의 목적을 중심하고 그 가치를 논하여 보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시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딴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특성을 각각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수가 아무리 많이 번식된다 하더라도, 개성이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게 마련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내재(內在)하고 있는 어떤 개성체(個性體)의 주체적인 이성성상(二性性相)에 대한 자극적인 기쁨을 상대적으로 일으켜 드릴 수 있는 실체대상은, 그 이성성상의 실체로서 전개된 그 한 개체 밖에는 없는 것이다(전편 제1장 제3절 Ⅱ).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우주간(宇宙間)에 있어서 유일무이(有一無二)한 존재인 것이다. 석가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원리로 보아서 타당한 것이다.

세째, 인간과 피조세계(被造世界)와의 관계로 본 그 가치를 살펴보자. 우리는 창조원리에 의한 인간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앎으로써 완성한 인간의 가치를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영인체(靈人體)로는 무형세계(無形世界)를, 육신으로는 유형세계(有形世界)를 각각 주관하도록 창조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전 피조세계의 주관자가 되는 것이다(창세기 1장 28절). 이와 같이 인간에게는 육신과 영인체가 있어서 유형 무형 두 세계를 주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세계는 인간을 매개체로 하여 서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실체대상의 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여, 인간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을 실체로 전개한 것이 피조세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영인체는 무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요, 그 육신은 유형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 된다. 그러므로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천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소우주(小宇宙)라고 하는 이유는 실제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신 것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천주 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여기에 하나의 완전한 기계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 기계의 모든 부속품들이 이 세상에 단 하나씩밖에 없는 것이어서 더 이상 구할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고 하면, 그 하나 하나의 부속품은 아무리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이라도 전체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성한 인간의 개체는 유일무이(有一無二)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미미(微微)한 것 같다 하더라도 실상 전천주적(全天宙的)인 가치와 대등하다고도 볼 수 있다.

2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과 예수

. 생명나무 복귀로 본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

인류 역사는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창세기 3장 24절)를, 역사의 종말의 세계에서 복귀하여(요한계시록 22장 14절),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창세기 3장 24절)와 종말의 세계에서 복귀되어질 생명나무(요한계시록 22장 14절)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앎으로써, 완성한 아담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락론(墮落論)에서 이미 상론(詳論)한 바이지만 아담과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 되었더라면, 그가 바로 창세기 2장 9절의 생명나무가 되어, 그의 후손도 모두 생명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여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창세기 3장 24절), 타락인간의 소망은 바로 이 생명나무로 복귀되는데 있었다(잠언 13장 12절, 요한계시록 22장 14절). 그런데 타락된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생명나무로 복귀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반드시 창조이상을 완성한 한 남성이 생명나무로 오셔 가지고, 만민으로 하여금 그에게 접붙임을 받도록 해야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으로 오실 분이 바로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생명나무로 표상(表象)되어 있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상징되어 있는 완성한 아담이나,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생명나무로 비유된 예수님은,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이라는 견지에서는 서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가치에 있어서도 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창조목적의 완성으로 본 인간과 예수님

우리는 이미 본장 제1절에서 완성한 인간의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완성한 인간과 예수님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상술(上述)한 바에 의하여 아는 바와 같이, 완성한 인간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두고 보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여서(마태복음 5장 48절), 하나님과 같은 신성(神性)을 가진 가치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의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지음 받은 인간도 역시 완성되면 영원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 위에 완성한 인간은 유일무이(有一無二)한 존재이며 전피조세계(全被造世界)의 주인이기 때문에, 그가 없이는 천주(天宙)의 존재가치도 온전해 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천주적인 가치의 존재인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가치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예수님이 지니신 가치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은,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 가지는 가치 이상의 것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오신 분이심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원리(原理)는 이제까지 많은 신도들이 믿어온 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갖지 않는다. 왜 그러냐 하면 완성한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임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원리가 예수님을 말하여 그는 창조목적을 완성한 하나의 인간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의 가치를 추호도 격하(格下)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창조원리(創造原理)는 완성된 창조본연의 인간의 가치를, 예수님의 가치와 동등한 입장으로 끌어올리는 것뿐이다.

우리는 위에서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이라는 것을 논술하였다. 그러면 이제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성서적 근거를 찾아보기로 하자.

디모데전서 2장 5절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로마서 5장 19절에는 한 사람(아담)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고린도전서 15장 21절에는 사망이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예수님)으로 말미암는도다라고 표명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17장 31절에는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하였다. 누가복음 17장 26절에는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성서는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인간이시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인류를 중생(重生) 시켜 주실 참 부모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시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 예수는 하나님 자신이신가

빌립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한복음 14장 9 - 10절)라고 대답하셨다. 또 성경의 다른 곳에 세상은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한복음 1장 10절)라고 한 말씀도 있고, 또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예수님)가 있었느니라(요한복음 8장 58절)고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성구 등을 근거로 하여서 이제까지의 많은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일체이시기 때문에, 그의 신성(神性)으로 보아 그를 하나님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는 마음과 몸과의 관계로 비유하여 생각할 수 있다. 몸은 마음을 닮아 난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서 마음과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제2의 마음이라고는 할 수 있을 망정, 몸이 마음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제2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하나님 자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요한복음 14장 9절 내지 10절의 말씀대로, 그를 본 것은 곧 하나님을 본 것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에서 하신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예수님을 말하여 말씀이 육신을 이루신 분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의 실체로서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면, 만물세계는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요한복음 1장 10절에는, 이 세상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창조주(創造主)라고도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원리에 의하면, 피조세계(被造世界)는 개성을 완성한 인간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실체로 전개한 것이기 때문에,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은 피조세계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요, 또한 그의 화동(和動)의 중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세상은 완성한 인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여 완성되면 그 인간에게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하시어, 그로 하여금 만물세계에 대한 창조주의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시고자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요한복음 1장 10절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뿐이요, 그가 곧 창조주 자신임을 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그는 전인류를 중생(重生) 하여 주실 인간조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처지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의 선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 58절에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도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에 있어서도 원죄(原罪)가 없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는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인간이었고, 또 부활 후 영계에 있어서도 제자들과 다름없이 영인체로서 계신다. 다만 제자들은 생명체급(生命體級)의 영인으로서 빛의 반사체(反射體)로 있는 데 비하여, 예수님은 생령체급(生靈體級)의 영인으로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發光體)로 계시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한편 또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영계에서 지상에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계신다(로마서 8장 34절).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자신에게 어떻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어,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27장 46절, 요한복음 17장 1절).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탄이 시험을 받고, 또 사탄에 몰려 십자가에 달리는 등의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또 예수님이 십자가상(十字架上)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장 46절)라고 하신 말씀을 보더라도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3 타락인간과 예수

타락한 인간은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자기보다 저급하게 창조된 천사(天使)를 우러러 볼 정도로 천한 자리에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모두 갖추고 계셨기 때문에, 천사를 비롯한 모든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고린도전서 15장 27절), 한편 타락인간에게는 원죄가 있으므로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원죄가 없기 때문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아무런 조건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뜻과 그의 심정(心情)을 알 수 없다. 혹시 그것을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완전히 아시고 또 그 심정을 체휼하는 자리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타락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이지만, 참부모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중생(重生)하여 원죄를 벗고 선의 자녀가 되면, 예수님과 같이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복귀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인간사회의 부자간(父子間)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서차(序次)가 있을 뿐, 그 본연의 가치에는 추호의 차이도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고(에베소서 1장 22절), 우리는 그의 몸이 되어 지체(肢體)가 된다(고린도전서 12장 27절). 따라서 예수임은 본성전(本聖殿)이요 우리는 그의 분성전(分聖殿)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이며(요한복음 15장 5절), 한편 돌감람나무인 우리는 참 감람나무 되시는 예수님에게 접붙임으로써, 참 감람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로마서 11장 17절),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하셨고(요일 3장 2절) 또 그(예수님)가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은 줄을 안다(요한 1서 3장 2절)고 한 성구도 있다. 그리고 성경은 오직 예수님은 처음 익은 열매요 우리는 다음 익은 열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고린도전서 15장 23절).

4 중생론과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학계에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로 논란되어 왔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 그 근본적인 뜻을 모르는 채 그대로 지내왔던 문제 중의 하나가 역시 본항에서 다루려는 중생론(重生論)인 것이다.

. 중생론
1. 중생의 사명으로 본 예수와 성신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유대관원 니고데모에게, 중생(重生)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3장 3절). 중생이라는 말은 거듭난다는 뜻이다.그러면 인간은 왜 중생해야 되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중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담과 해와가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하여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다면, 그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은 원죄가 없는 선한 자녀가 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 인류의 악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악한 자녀들을 번식하여 지상지옥(地上地獄)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대로, 타락한 인간들은 원죄가 없는 자녀로서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를 낳아 주는 것은 부모가 아니면 안된다. 그러면 타락한 우리들을 원죄(原罪)가 없는 자녀로 다시 낳아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선한 부모는 누구일 것인가?

원죄 있는 악의 부모가 원죄 없는 선의 자녀를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선의 부모가 타락인간들 가운데에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모는 하늘로부터 강림(降臨)하셔야 하는데, 그렇게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따라서 그는 타락한 자녀들을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지상천국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참아버지로 오셨던 분이시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장 3절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중생)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은 아담으로써 못 이루셨던 참 아버지로 오셨기 대문에 성경은 그를 후아담이라고 하였다(고린도전서 15장 45절), 영존(永存)하신 아버지라 하였으며(이사야9장 6절), 또 하나님은 선지자(先知者) 엘리야를 다시 보내시어 그로 하여금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을 부모로 오시는 예수님 앞으로 돌이키게 함으로써, 그들로 자녀가 되게 하시겠다고도 말씀하셨다(말라기 4장 6절).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리라(마태복음 16장 27절)고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 혼자서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타락한 자녀들을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는 참 아버지와 함께 참 어머니도 계셔야 하는 것이다. 죄악(罪惡)의 자녀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그 참 어머니로 오신 분이 바로 성신(聖神)이시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신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요한복음 3장 5절)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은 참 어머니로서, 후해와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를 여성신(女性神)으로 계시 받은 사람이 많다. 그리고 성신이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성신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 앞에 신부로 설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성신은 여성신이시기 때문에 위로와 감동의 역사(役事)를 하시는 것이며(고린도전서 12장 3절), 또 해와가 지은 죄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죄를 씻는 역사를 하시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남성이시므로 하늘()에서, 성신은 여성이시므로 땅()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2.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본 예수님과 성신

로고스라는 낱말은 헬라어로서, ‘말씀’ 혹은 ‘이법(理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이하를 보면, 로고스는 하나님의 대상(對象)으로서, 하나님과 수수적(授受的)인 관계의 위치를 취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로고스의 주체(主體)이신 하나님이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 계시므로, 그의 대상인 로고스도 역시 이성성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로고스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로고스로 창조된 피조물(요한복음 1장 3절)이 또한 이성성상으로 되었을 수가 없다. 이러한 로고스의 이성성상이 하나님의 형상적인 실체대상(實體對象)으로 분립된 것이 아담과 해와였던 것이다(전편 제1장 제1절 Ⅰ).

아담이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남성, 즉 '생명나무'가 되고, 해와가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로 표시된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이 되어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더라면, 그 때에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이 완성되어 지상천국(地上天國)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되었기 때문에 반대로 지상지옥이 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후아담(고린도전서 15장 45절)으로서 '생명나무'의 사명을 가지고(요한계시록 22장 14절) 인류의 참 아버지로 오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여기에 후해와의 사명을 가진 인류의 참 어머니(요한계시록 22장 17절)가 마땅히 계셔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타락인간을 다시 낳아 주실 참 어머니로 오신 분이 성신(聖神)인 것이다.

3. 예수와 성신에 의한 영적 중생

부모의 사랑이 없이는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성신의 감동에 의하여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믿게 되면, 영적 참 아버지이신 예수님과 영적 참 어머니이신 성신과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나타나는 영적 참부모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를 믿는 성도들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주입되어, 새로운 영적 자아로 중생(重生)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영적 중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영육(靈肉) 아울러 타락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나아가 육적 중생을 함으로써 원죄(原罪)를 청산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육적인 중생에 의한 육적 구원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재림(再臨)하시게 되는 것이다.

. 삼위일체론

창조원리에 의하면,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에 의하여 삼대상목적(三對象目的)을 이룬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터전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는, 예수님과 성신도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으로부터 실체로 분립된 대상으로 서 가지고 서로 수수작용을 하여 합성일체화(合成一體化)함으로써, 하나님을 중심한 4위기대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에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하고 일체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삼위일체(三位一體)이다.

원래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목적은, 그들을 인류의 참부모로 세워 합성일체화시켜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한 4위기대를 이루시어 삼위일체가 되게 하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타락되지 않고 완성되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참부모로서의 삼위일체를 이루어서 선의 자녀를 번식하였다면 그의 후손들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선의 부부를 이루어, 각각 삼위일체가 되었을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 완성에 의한 지상천국은 그 때에 이미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여 사탄을 중심하고 사위기대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탄을 중심한 삼위일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도 역시 사탄을 중심한 삼위일체를 형성하여 타락한 인간사회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과 성신(聖神)을 후아담과 후해와로 세워, 인류의 참부모가 되게 하심으로써, 타락 인간을 중생(重生)케 하여 가지고,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중심한 삼위일체가 되게 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성신은 하나님을 중심한 영적인 삼위일체를 이룸으로써, 영적 참부모의 사명만을 하시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신은 영적 중생의 사명만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도들도 역시 영적인 삼위일체로만 복귀되어, 아직도 영적 자녀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을 중심한 실체적인 삼위일체를 이루시어 영육(靈肉) 아우른 참부모가 되심으로써, 타락인간을 영 육 아울러 중생케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을 중심한 실체적인 삼위일체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인간이 하나님을 중심하고 창조본연의 4위기대를 조성하면,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3대 축복(三大祝福)을 이룬 지상천국이 복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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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편
서 론

복귀섭리(復歸攝理)는 타락된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케 하기 위하여, 그들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나아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다.

전편에서 이미 논증한 바와 같이, 인간은 장성기(長成期) 완성급(完成級)에서 타락하여 사탄 주관하(主管下)에 머물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을 복귀시키기 위하여는, 먼저 사탄을 분립하는 섭리를 하셔야 하는 것이다.

이미 기독론(基督論)에서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타락인간이 사탄을 분립하고 타락이전 본연(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하려면 원죄(原罪)를 벗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원죄는 인간이 그 참 부모로 오시는 메시아에 의하여 중생(重生)되지 않으면 벗을 수 없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사탄 분립의 노정을 통하여서, 아담과 해와가 성장하였던 기준, 즉 장성기의 완성급까지 복귀한 형을 갖춘 터 위에서 메시아를 맞아 중생함으로써, 아담과 해와의 타락 이전의 입장으로 복귀된 후에 메시아를 따라 더욱 성장하여서, 창조목적을 완성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귀섭리는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려는 재창조(再創造)의 섭리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원리(原理)에 의하여 섭리하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복귀원리(復歸原理)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복귀섭리가 어떻게 하여서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 탕감복귀원리
1. 탕감복귀

탕감복귀원리(蕩減復歸原理)에 관한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인간이 그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서 어떠한 입장에 서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원래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어서 하나님과 심정(心情)의 일체를 이루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만을 대하고 사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여서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기 때문에 사탄도 대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타락직후 아직 원죄만이 있었을 뿐 다른 어떠한 선행(善行)도 악행(惡行)도 하지 않았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에 처하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해와의 후손들도 역시 이와 같이 중간 위치에 놓여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타락사회에 있어서 예수는 믿지 않았어도 양심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면, 그는 이렇듯 중간 위치에 있는 것이므로 사탄이 그를 지옥(地獄)으로 끌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양심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예수를 믿지 않는 한 하나님도 그를 낙원(樂園)으로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인(靈人)은 영계(靈界)에 가서도 낙원도 지옥도 아닌 중간 영계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같이 중간 위치에 있는 타락인간(墮落人間)을 하나님은 어떻게 사탄으로부터 분립하시는가?

사탄은 원래 혈통적인 인연을 가지고서 타락한 인간을 대하고 있기 대문에, 인간 자신이 하나님이 취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무조건 그를 하늘 편으로 복귀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사탄도 역시 인간의 창조주(創造主)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타락인간 자신에게 다시 그가 침범할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 한 이러한 인간을 무조건 취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그 자신이 선한 조건을 세울 때에는 하나님 편으로, 악한 조건을 세울 때에는 사탄 편으로 분립되는 것이다.

아담가정이 이러한 중간 위치에 있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제물(祭物)을 바치도록 하셨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제물을 뜻맞게 바치는 것으로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하실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하시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도리어 사탄이 그들에게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타락인간들에게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도,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늘 편에 서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그대로 사탄 편에 머물게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예수님이 구주(救主)이신 동시에 심판주(審判主)가 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탕감복귀(蕩減復歸)'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무엇이든지 그 본연의 위치와 상태 등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그것들을 본래의 위치와 상태에로 복귀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어떠한 조건을 세워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세우는 것을 '탕감(蕩減)'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상실된 명예나 직위나 건강 등을 원상대로 회복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노력이나 재력 등의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또 서로 사랑하던 두 사람이 어찌되어서 미워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하자. 여기에서 이들이 다시 서로 사랑하던 원상태에로 복귀하려면, 그들은 반드시 서로 사과(謝過)를 하는 등의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와 같이 타락으로 인하여서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위치와 상태를 떠나게 된 인간도 다시 그 위치와 상태에로 복귀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어떠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이러한 조건을 세워서 창조본연의 위치와 상태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라고 함, '탕감복귀'를 위해서 세우는 조건을 '탕감조건(蕩減條件)'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처럼 탕감조건을 세워서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해 나아가는 섭리를 탕감복귀섭리(蕩減復歸攝理)라고 말한다.

그러면 탕감조건은 어느 정도로 세워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들 수가 있다.

첫째는 동일(同一)한 것으로서의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본연의 위치와 상태에서 상실되었던 것과 동일한 가치의 조건을 세워서 원상(原狀)으로 복귀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보상(報償)이나 상환(償還)과 같은 것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21장 23절 내지 25절에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을 지니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는 보다 작은 것으로써 탕감조건을 세우는 경우다. 이것은 본연의 위치와 상태에서 상실되었던 것보다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워 원상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어떤 채무자가 빛을 많이 졌을 때, 그 채권자의 호의로 그중 일부 소액(少額)만을 반제(返濟) 함으로써 부채(負債)의 전액(全額)을 청산한 것으로 매듭을 짓는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원칙에 의하여,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代贖)을 '믿는다'는 극히 작은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예수님과 똑같은 죽음을 거쳐 다시 살았다는 구원(救援)의 큰 혜택을 받게 된다. 한편 또 우리는 몇 방울의 물을 머리에 떨어뜨려 세례(洗禮)를 받았다는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예수님과 성신(聖神)에 의하여 중생(重生)된 입장을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성만찬(聖晩餐)에서 한 조각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성체(聖體)를 먹었다는 커다란 가치의 혜택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셋째는 보다 큰 것으로써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경우다. 이것은 작은 가치의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실패하였을 때 보다 더 큰 가치의 탕감조건을 다시 세워서 원상(原狀)으로 복귀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비둘기와 양과 소를 바치는 헌제(獻祭)에서 실수하였기 때문에 그와 탕감조건은 가중되어서 독자(獨子)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던 것이다. 또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40일의 정탐기간(偵探期間)을 뜻맞게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탕감조건이 가중되어, 그들은 날을 해로 계수(計數) 한 40년을 광야에서 표류(漂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민수기 15장 34절).

그러면 어찌하여 탕감조건을 다시 세울 때에는 더 큰 조건을 세워야 하는가? 그것은 어떠한 섭리적 중심인물(中心人物)이 탕감조건을 다시 세울 때에는, 그가 세워야 할 본래의 탕감조건과 함께 그 앞선 인물들의 실수로 인한 탕감조건까지도 첨가하여 세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어떠한 방법으로 세우느냐 하는 문제다. 무엇이든지 본래의 위치와 상태로부터 떠난 입장에서 원상(原狀)으로 복귀하려면, 그것들로부터 떠나게 된 경로와 반대의 경로를 취하는 탕감조건을 세워야만 한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선민(選民)들이 예수님을 미워하여 그를 십자가에 내줌으로써 벌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 입장으로부터 다시 구원을 받아 선민의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앞서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누가복음 14장 27절). 기독교가 순교(殉敎)의 종교가 된 원인은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을 서럽게 해 드렸으므로,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는 그와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실천함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의 인간으로 복귀하여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첫아담이 하나님을 버림으로 말미암아서 그 후손들이 사탄의 품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이 인류를 사탄의 품속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복귀시키려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입장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라신 예수님을 버리셨던 것은 이러한 곡절에 기인하였던 것이다(마태복음 27장 46절{{ . 마태복음 27장 46절 :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한 국가의 형법도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어서 그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원상대로 유지하게 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탕감조건은 누가 세워야 하는가? 이미 창조원리(創造原理)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은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여 완성되어 가지고 천사(天使)까지도 주관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시조는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여 도리어 사탄의 주관을 받아야 할 입장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탄의 주관을 벗어나 사탄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으로써 그에 필요한 탕감조건을 인간 자신에 세우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2. 메시아를 위한 기대

메시아는 인류의 참부모로 오셔야 한다. 그가 인류의 참부모로 오셔야 하는 이유는, 타락한 부모로부터 태어난 인류를 거듭나게 하여 그 원죄를 속(贖)해 주셔야 하기 때문이다(전편 제7장 제4절 Ⅰ.1). 그러므로 타락인간이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완성한 터 위에서 메시아를 맞아 원죄를 벗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그러면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려면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는가? 이것을 알기 위하여는, 원래 아담이 어떠한 경로에 의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던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탕감조건은 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상실하게된 것과 반대의 경로에 의하여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창조목적을 완성하기 위하여서는 두 가지의 조건을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첫째는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는 것이었는데, 물론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는 인물이 되어야 했었고, 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담은 이 믿음의 조건을 세우는 것으로서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수행하기 위한 성장기간(成長期間)을 거쳐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 성장기간은 수(數)로써 된 것이므로 결국 이 기간은 수를 완성하는 기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아담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기 위하여 세워야 했던 두번째의 조건은 그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그의 성장기간을 다 거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웠더라면, 그는 그 기대 위에서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실체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을 완성한 말씀의 완성실체(完成實體)가 되었을 것이다(요한복음 1장 14절) 아담이 이와같은 완성실체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제1축복이었던 개성완성자(個性完成者)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위와같은 경로에 의하여서 창조목적을 완성하였을 것이므로, 타락인간도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는 그 경로에 의하여 아래와 같이 '믿음의 기대'를 세운 터전 위에서 '실체기대'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1) 믿음의 기대

아담은 하나님이 말씀을 믿지 않고 타락하였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세우지 못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는 말씀의 완성실체가 되지못하여 창조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인간이 창조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기준을 복귀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인간조상이 세우지 못하였던 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리고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첫째는 그를 위한 '중심인물(中心人物)'이 있어야 한다.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세우는 인물이 되지 못하고 타락(墮落)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중심인물을 찾아 나오셨다. 타락한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로 하여금 제물(祭物)을 바치게 하셨던 것도 이러한 중심인물을 찾아 세우기 위함이었고, 노아, 아브라함, 이상, 야곱, 모세, 그리고 열왕(列王)들과 세례요한 등을 부르셨던 것도 그들을 이러한 중심인물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그것을 위한 '조건물(條件物)'을 세워야 한다.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조건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함으로 인하여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타락된 인간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대신하는 조건물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타락된 인간은 만물보다 거짓된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예레미야 17장 9절), 구약 이전시대(舊約 以前時代)에 있어서 제물 또는 그 제물을 대신한 방주(方舟) 등의 만물을 조건물로 세워 가지고 '믿음의 기대'를 세우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대'는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침범을 당한 만물을 복귀하는 기대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있어서는 율법(律法)의 말씀, 또는 그 말씀을 대신한 법궤(法櫃)나 성전(聖殿)이나 중심인물 등이 이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조건물이었다. 또 신약시대(新約時代)에 있어서는 복음(福音)의 말씀, 따라서 그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이 '믿음의 기대' 조성을 위한 조건물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타락된 후에 있어서의 이와같은 조건물(條件物)은, 인간편에서 보면 그것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편에서 볼 때에는 어디까지나 소유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는 그를 위하여 '수리적(數理的)인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세워야 한다. 그러면 이 섭리적인 수에 의한 탕감기간이 왜 있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섭리적인 수의 탕감기간을 세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편의상 후편 제3장 제2절 Ⅳ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2) 실체기대

타락인간(墮落人間)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믿음의 기대'를 복귀한 터전 위에서, 일찍이 인간조상이 이루지 못하였던 '완성실체(完成實體)'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나 타락인간은 어디까지나 메시아를 통하여 원죄(原罪)를 벗지 않고서는, '완성실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은 위에서 말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한 터전 위에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움으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야 비로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것이다. 타락인간은 이와 같이 메시아를 맞아 원죄를 벗어 가지고, 인간조상의 타락 전 입장으로 복귀된 후에,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메시아와 일체가 되어, 인간조상이 타락됨으로써 걷지 못하고 남아졌던 성장기간(成長期間)을 다 지나서야 '완성실체'가 되는 것이다.

한편 '실체기대'를 세우는 데 있어서도 타락인간이 세워야할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이 필요하다. 그것이 곧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인 것이다.

인간조상은 타락하여 원죄를 지니게 됨에 따라서, 창조본성(創造本性)을 이루지 못하고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맞아서 원죄를 벗고 창조본성을 복귀하기 위한 실체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먼저 그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 조건을 어떻게 세우는가 하는 것은 후편 제1장 제1절 Ⅱ에서 논하기로 하자.

. 복귀섭리노정

1. 복귀섭리노정의 시대적 단계

이제 아담이후 오늘에 이르는 전역사노정(全歷史路程)에 있어서의 시대적 단계에 개관(槪觀)해 보기로 하자.

타락인간(墮落人間)으로 하여금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게 하고,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게 함으로써,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는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 섭리의 뜻은 좌절되었고, 그 후 10대를 지나 그 뜻은 다시 노아의 가정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40일의 홍수(洪水)로써 악한 세대를 심판하셨던 것은,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게 하고 그 기대 위에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완수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차자(次子)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노아가정과 방주(方舟)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세웠던 10대와 40일을 사탄에게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들을 다시 하늘편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 즉 400년이 지난 후에, 뜻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옮겨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아브라함이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뜻맞게 세웠더라면, 이 기대(基臺)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이루어 가지고, 그 터 위에서 메시아를 맞이하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함으로써 그 뜻은 또다시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믿음의 조상을 찾아 내려왔던 아담가정으로부터의 2천년기간은, 일단 사탄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노아의 입장과 다른 것은, 비록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는 실수하였지만 이상, 야곱의 3대에 걸쳐 연장하면서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움으로써, 이 기대를 중심하고 애급(埃及)에서 하나님의 선민(選民)을 번식하여 후일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민족적으로 넓힐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면,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찾아 세워, 장차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시작할 수있는 그 기대를 조성하는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복귀섭리의 역사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실수로 인하여,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기간을 사탄에게 내주었으므로, 이 기간을 다시 하늘 편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있어야 할 것이니, 이 기간이 바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2천년기간이다.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지 않았다면, 그 후손들에 의하여 세워졌을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 위에 메시아가 오셨을 것이므로, 그 때에 복귀섭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모시어서, 그를 하나님 앞에 민족적인 산 제물로서 뜻맞게 세워 드렸더라면, 그 대에도 그들이 세운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 위에서, 오신 바 메시아를 중심하고 복귀섭리는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한 것과 같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써, 그 민족적인 헌제(獻祭)에 실수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 이후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또다시 사탄에게 내준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내준 이 2천년기간을 또다시 하늘편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2천년 기간이 필요하게 된 것이니, 이 기간이 바로 예수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인 것이다. 이 기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한 복귀섭리로써, 기독교 신도들이 '재림주님을 위한 세계적인 기대'를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2. 복귀섭리노정의 시대 구분
(1) 말씀에 의한 섭리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인간이 아직 복귀섭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한 시대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다만 타락인간이 헌제에 의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말씀에 의한 섭리를 하실 수 있는 다음 시대를 위한 기대(基臺)를 조성한 시대였기 때문에 이 시대를 '말씀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② 또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구약(舊約)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의 심령(心靈)과 지능(知能)의 정도가 소생급(蘇生級)까지 성장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소생 구약시대(蘇生 구약시대(舊約時代))'라고 한다.

③ 한편 예수님으로부터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기간은, 신약(新約)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장성급(長成級)까지 성장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장성 신약시대(長成 新約時代)'라고 한다.

④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복귀섭리의 완성을 위하여 주시는 성약(成約)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의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완성급(完成級)까지 성장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완성 성약시대(完成 成約時代)'라고 한다.

(2) 부활섭리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인간이 헌제(獻祭)로써 장차 부활섭리(復活攝理)로 하실 수 있는 구약시대(舊約時代)를 위한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부활기대섭리시대(復活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②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부활섭리의 시대적인 혜택과 구약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이 영형체급(靈形體級)까지 부활하는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소생부활섭리시대(蘇生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③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까지의 2천년기간은,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과 신약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이 생명체급(生命體級)까지 부활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장성부활섭리시대(長成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④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복귀섭리의 시대적인 혜택과 성약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이 생령체급(生靈體級)으로 완전 부활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완성부활섭리시대(完成復活攝理時代)'라고 한다.

(3) 믿음의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섭리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까지의 2천년기간은, 사탄에게 내주었던 이 기간을, 아브라함 한 분으로 찾아 세움으로써, 하늘 것으로 탕감복귀할 수 있는 구약시대를 위한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기대섭리시대(蕩減復歸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②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하여 사탄에게 내주었던 아담으로부터의 2천년기간을, 이스라엘민족을 중심하고 다시 하늘 것으로 탕감복귀하는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섭리시대(蕩減復歸攝理時代)'라고 한다.

③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기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서 사탄에게 내주었던 구약시대의 2천년기간을, 기독교 신도들을 중심하고 하늘 것으로 재탕감복귀(再蕩減復歸)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섭리연장시대(蕩減復歸攝理延長時代)'라고 한다.

④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사탄에게 내 주었던 복귀섭리의 전 노정을 하늘 것으로 완전히 탕감복귀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섭리완성시대(蕩減復歸攝理完成時代)'라고 하는 것이다.

(4) 메시아를 위한 기대의 범위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헌제(獻祭)에 의하여 아브라함가정 하나를 찾아 세움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家庭的)인 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②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구약(舊約)의 말씀에 의하여 이스라엘민족을 찾아 세움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는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民族的)인 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③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 기간은, 신약(新約)의 말씀에 의하여 기독교 신도들을 세계적으로 찾아 세움르로써, '메시아를 위한 세계적인 기대'를 조성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세계적(世界的)인 기대섭리시대(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④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성약(成約)의 말씀에 의하여 천주적인 섭리를 하심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천주적인 기대'를 완성해야 할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메시아를 위한 천주적(天宙的)인 기대섭리완성시대(基臺攝理完成時代)'라고 한다.

(5)책임분담으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다음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책임분담섭리(責任分擔攝理)를 하시기 위한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책임분담기대섭리시대(責任分擔基臺攝理時代)'라고 한다.

②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바 원리적인 책임을 지심으로써, 친히 사탄을 굴복시키는 제1차의 책임을 담당하시고 선지자(先知者)들을 대하시어, 소생적(蘇生的)인 복귀섭리를 해 나오신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하나님의 책임분담섭리시대(責任分擔攝理時代)'라고 한다.

③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再臨期)까지의 2천년기간은, 타락의 장본인인 아담과 해와의 사명을 대신 완성해야 되었던 예수님과 성신(聖神)이, 사탄을 굴복시키는 제2차의 책임을 지시고 타락인간을 대하시어, 장성적(長成的)인 복귀섭리를 해 나오신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예수와 성신의 책임분담섭리시대(責任分擔攝理時代)'라고 하는 것이다.

④ 예수님 재림 이후의 복귀섭리완성시대(復歸攝理完成時代)는, 인간이 본래 천사까지도 주관하게 되어 있는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입각하여, 지상과 천상에 있는 성도들이 타락한 천사인 사탄을 굴복시키는 제3차의 책임을 지고, 복귀섭리를 완성해야 하는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성도(聖徒)의 책임분담섭리시대'라고 한다.

(6)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시대 구분

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들을 상징적으로 세워 나온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상징적(象徵的) 동시성(同時性)의 시대'라고 한다.

②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2천년기간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들을 형상적으로 세워 나온 시대였으므로, 이 시대를 '형상적(形象的) 동시성(同時性)의 시대'라고 한다.

③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재림기까지의 2천년기간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보건을 실체적으로 세워 나온 시대이므로, 이 시대를 '실체적(實體的) 동시성(同時性)의 시대'라고 한다.

. 복귀섭리 역사와 '나'

'나'라는 개성체(個性體)는 어디까지나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소산(所産)이다. 따라서 '나'는 이 역사가 요구하는 목적을 이루어야 할 '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역사의 뜻 가운데서야 하며, 그러기 위하여는 복귀섭리역사가 오랜 기간을 두고 종적으로 요구하여 나오고 있는 탕감조건(蕩減條件)들을, '나' 자신을 중심하고 횡적으로 찾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나'는 복귀섭리역사가 바라는 결실체로서 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역사노정에서, 복귀섭리의 목적을 위하여 부름 받았던 선지선열(先知先烈)들이 이루지 못한 시대적인 사명들을 이제 '나'를 중심하고 일대의 횡적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복귀섭리의 목적을 완수한 개체가 되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인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는, 선지선열들을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과, 그들을 부르셨던 하나님의 근본 뜻, 그리고 그들에게 맡겨졌던 섭리적인 사명들이 과연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상세히 알아야 한다. 그러나 타락인간(墮落人間)은 그 자신으로서 이러한 입장에 설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완성자로 오시는 재림주님을 통하여 그 모든 것들을 알고, 또 그를 믿고 모시어 그와 하나가 됨으로써, 그와 함께 복귀섭리역사의 종적인 탕감조건들을 횡적으로 찾아 세운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 을 이루기 위하여 왔다 간 모든 선인(先人)들이 걸었던 길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다시 되풀이하여서 걸어야 할 길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복귀섭리의 내용을 모르고서는, 결코 생명의 길을 찾아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복귀원리(復歸原理)를 자세히 알아야 하는 이유는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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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복귀기대섭리시대

1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타락(墮落)은 비록 인간 자신의 잘못으로 되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 타락인간을 구원(救援)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데 대하여는, 이미 전편 제3장 제2절 Ⅰ에서 논한 바 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 타락인간을 복귀(復歸)하시려는 섭리는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미 서론(緖論)에서 논한 바와같이 아담은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위치(中間位置)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와같이 중간위치에 처해 있었던 타락인간(墮落人間)을 하늘편으로 분립(分立)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기 위하여는, 타락인간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아담가정이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 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고, 그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 믿음의 기대

첫째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어떠한 조건물이 있어야 한다. 원래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조건으로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진 타락한 아담이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가 믿음으로써 말씀 대신의 어떠한 조건물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세워야만 했던 것이다. 아담가정에서 세워야 했던 이 말씀 대신의 조건물은 제물(祭物)이었다.

둘째는, '믿음의 기대' 를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 기대를 복귀할 수 있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 있어야 한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했던 중심인물은 물론 아담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마땅히 제물을 바쳐야 하였던 것이고, 그가 이 제물을 합당하게 바치는가 바치지 못하는가에 따라 '믿음의 기대' 의 조성 여부가 결정될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聖書)의 기록을 보면, 아담이 제물을 바치지 못하고 가인과 아벨로부터 제물을 바쳤던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본래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주인을 대하는 처지에 있는 존재를 상대로 하여 창조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 제물을 대하신다면, 사탄도 또한 아담과 혈연관계(血緣關係)가 있음을 조건삼아, 이것들을 대하려고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아담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을 대하는 비원리적인 처지에 서게 된다. 하나님은 이와같은 비원리적(非原理的)인 섭리를 하실 수 없으므로, 선 악 두 성품의 모체가 된 아담을, 선성품적(善性稟的)인 존재와 악성품적(惡性稟的)인 존재의 둘로 갈라 세우는 섭리를 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아담의 두 아들을 각각 선악(善惡)의 표시체로 분립시킨 후에,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대할 수 있는, 즉 한 주인 상대의 원리적인 입장에 세워 놓고 제각기 제물(祭物)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은 다 같이 아담의 자식인데, 누구를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고, 또 누구를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야 할 것인가?

가인과 아벨은 다 함께 해와의 타락의 열매였다. 따라서 타락의 모체(母體)인 해와의 타락경로에 의하여서 그것이 결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해와의 타락은 두 가지의 불륜(不倫)한 사랑의 행동으로 인하여 성립되었었다. 즉 첫째번은 천사장(天使長)과의 사랑으로 인한 영적 타락(靈的 墮落)이었으며, 둘째 번은 아담의 사랑으로 인한 육적 타락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똑같은 타락행위(墮落行爲)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 둘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보다 원리적이며 보다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인가를 가려 본다면, 첫째 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보다는 둘째 번의 사랑에 의한 타락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번 째의 타락행위가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지려고 한, 즉 때 아닌 때에 때의 것을 바라는 과분한 욕망이 동기가 되어(창세기 3장 5절) 비원리적 상대인 천사장과 관계를 맺었던 것임에 비하여, 둘째 번의 타락행위는 첫째 번의 행위가 분륜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편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던 심정이 동기가 되어, 아직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원리적 상대인 아담과 관계를 맺었던 것이기 때문이다(전편 제2장 제2절 Ⅱ).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모두 해와의 불륜한 사랑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해와를 중심하고 맺어진 두 형의 불륜한 사랑의 행위들을 조건으로 가름하여 가인과 아벨을 각각 상이(相異)한 두 표시적 입장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가인은 사랑의 첫 열매이므로, 그 첫번 째 것이었던 천사장(天使長)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표징(表徵)하는 악의 표시체로서, 사탄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고, 아벨을 사랑의 둘째 열매이므로, 그 두번 째 것이었던 아담과의 사랑으로 인한 타락행동을 나타내는 선의 표시체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졌던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의 세계를 사탄이 먼저 차지하였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앞서 사탄이 먼저 비원리적인 입장에서 그 원리형(原理型)의 세계를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래 하나님이 맏이를 세워서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계승시키려고 하셨던 원리적인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도 둘째 것에보다도 맏것에 대한 미련이 더욱 컸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사탄은 그 때 이미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차지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보다 미련이 컸던 장자 가인을 먼저 취하려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탄이 미련을 갖고 대하는 가인보다도 아벨을 대하셨던 것이다.

이에 대한 실례를 우리는 성서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사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창세기 4장 7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보면, 가인은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급시(出埃及時)에 애급의 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생축(牲畜)까지도 맏것은 모조리 쳤던 것이니(출애급기 12장 29절) 그것들은 모두 가인의 입장으로서, 사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는, 차자 아벨의 입장이었던 레위의 손(孫)만이 법궤(法櫃)를 메고 갔었다(신명기 31장 25절).

그리고 창세기 25장 23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직도 출생전 복중의 태아(胎兒)들이었던 장자(長子) 에서를 미워하고 차자(次子)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장.차자라는 명분만으로써 그들은 이미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이 그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동시에 축복할 때에, 차자 에브라임을 우선적으로 축복하기 위하여 손을 엇바꾸어서 축복하였던 것도(창세기 48장 14절) 역시 에브라임이 아벨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서, 하나님과 사탄을 각각 한 주인으로서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아벨과 가인을 세워 놓고, 제물을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창세기 4장 3~5절).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祭物)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가? 아벨은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히브리서 11장 4절),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셨다(창세기 4장 4절). 그리하여 아담가정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비록 타락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취하실 수 있는 조건만 성립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容納)하신다는 것을 교시(敎示)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 것은, 가인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가인은 사탄이 취할 수 있는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졌었으므로, 하나님이 그 제물을 취하실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을 가인 자신이 세우지 않는 한, 하나님은 그것을 취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써, 사탄의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편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그 자신이 어떠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면 가인은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였던가? 그것은 바로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이었는데, 이에 관하여는 아래에서 자세히 밝히기로 하겠다.

. 실체기대

아담가정에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세워지기 위하여는, 가인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이 그의 헌제(獻祭)를 기뻐 받으실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어떻게 세워야 하였던가?

인간 시조(始祖)는 천사장(天使長)으로 말미암아 타락되어, 그로부터 타락성(墮落性)을 이어 받게 되었으므로, 타락인간이 그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탕감복귀원리(蕩減復歸原理)에 의하여,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같이 그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가지게 되었던 것과 반대의 경로를 취하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천사장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던 아담을 사랑하지 못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사랑하여서 하나님의 입장과 같은 입장을 취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장(天使長)이 하나님에게 더 가까웠던 아담을 중보(仲保)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아담의 위치를 취하려다가 타락되었기 때문에, '자기 위치를 떠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을 중보로 세워,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장은 자기를 주관해야 할 인간, 즉 해와와 아담을 역주관(逆主管)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주관성을 전도(顚倒)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따라서 인간이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아담의 입장에 있는 아벨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그의 주관을 받는 입장에 섬으로써 주관성의 법도(法度)를 바로 세워야 했던 것이다.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선한 뜻을 하나님은 아담에게 전하고, 아담은 또 해와에게 전하고, 해와는 다시 천사장에게 전하여 선을 번식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천사장은 따먹어도 좋다는 불의(不義)의 뜻을 해와에게 전했고, 또 해와는 그것을 아담에게 전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죄를 번식하는 타락성'이 생겼다. 그러므로 이 타락성을 벗기 위하여는, 천사장의 입장에 있는 가인이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서 있는 아벨의 상대적인 입장을 취하여, 아벨로부터 선의 뜻을 전해 받음으로써, 선을 번식하는 입장을 조성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인, 아벨의 헌제(獻祭)와 상통되는 몇 가지의 실례(實例)를 들어 보기로 하자.

우리의 개체를 두고 생각해 볼 때 선을 지향하는 마음(로마서 7장 22절)은 아벨의 입장이요, 죄의 법을 섬기는 몸(로마서 7장 25절)은 가인의 입장인 것이다. 따라서 몸은 마음의 명령에 순종굴복(順從屈伏)해야만 우리 개체는 선화(善化)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이 마음의 명령에 반역(反逆)하여,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은 입장을 반복하기 때문에 개체는 악화(惡化)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道)의 생활은 마치 아벨에게 가인이 순응해야 했듯이, 하늘 뜻을 지향하는 마음의 명령에 몸을 순응케 하는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墮落)되어 만물보다도 거짓된(예레미야 17장 9절) 입장에 떨어졌으므로, 만믈을 아벨의 입장에 세워 놓고 그것을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헌제(獻祭)였다. 인간이 항상 좋은 지도자나 친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보다 하늘편에 가까운 아벨형의 존재를 찾아 그와 하나됨으로써, 하늘 앞에 가까이 서고자 하는 천심(天心)에서 일어나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온유겸손(溫柔謙遜)이 기독교 신앙의 강령이 된 것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기도 모르게 아벨형의 인물을 만나, 그를 통하여 하늘 앞에 설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게 하기 위함이다. 개인에서부터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거기에는 반드시 가인과 아벨의 두 형의 존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같은 모든 것을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입장으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가인형의 존재가 아벨형의 존재에게 순종 굴복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 인류가 그에게 순중굴복해야 할 아벨적인 존재로서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었다. 따라서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자가 없는 것이다(요한복음 14장 6절).

만일 아담가정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더면, 그들은 이미 조성된 믿음의 기대 위에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워, 이 두 기대로써 이루어지는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음으로써, 창조본연의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하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천사장(天使長)이 인간을 타락케 하였던 타락성본성(墮落性本性)을 반복하게 되어, 아담가정이 세워야 했던(실체기대)는 세워지지 않았다. 따라서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아담가정에 있어서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와 그의 상실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한 터 위에서 '실체기대'를 세움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헌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믿음의 기대'는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복귀되고, '실체기대'는 '실체헌제(實體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상징헌제' 및 '실체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인 3대축복(三大祝福)은, 아담과 해와가 각각 개성을 완성하여 부부를 이루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자녀를 번식하여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들이 만물을 주관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그 3대 축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와 반대의 경로를 따라,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워주는 '상징헌제'를 드림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한다. 다음으로는 자녀를 복귀하고 그 위에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동시에 세워주는 '실체헌제'를 드림으로써 실체기대를 세워 가지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징헌제'의 의의와 그 목적을 두 가지로 잘라서 생각할 수 있다. 269

이미 타락론(墮落論)에서 논술한 바와같이, 사탄이 타락인간(墮落人間)을 주관하게 됨을 인하여, 그는 인간이 주관해야할 만물세계(萬物世界)까지도 주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서의 만물이 탄식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로마서 8장 22절). 그러므로 만물로써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드리는 첫째 목적은, 하나님의 상징적 실체상인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서 만물보다도 거짓된 자리에 떨어졌으므로(예레미아 17장 9절),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는, 창조원리적(創造原理的)인 질서에 준하여 자기보다도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있는 존재인 만물을 통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따라서 '상징헌제'를 드리는 둘째의 목적은, 실체인간을 하나님 앞에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려는데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상징헌제(象徵獻祭)'는 어디까지나 내적인 헌제이므로, 만물과 인간의 창조의 순서가 그러했듯이, 외적인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린 기대(基臺) 위에서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후에, 이 기대 위에서 다시 인간을 실체적으로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서, '실체헌제'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

‘실체헌제(實體獻祭)'는 실체인간을 복귀하기 위하여,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인적인 존재가 아벨적인 존재를 실체로 헌제하여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게 되면, 그것이 바로 아래에 밝혀져 있는 바와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으로도 세워지게 되기 때문에, '실체헌제'는 뜻맞는 헌제가 되는 것이다.

아담가정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기 위하여는, 아담 자신이 먼저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워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같이 아담부터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은, 아담이 헌제를 하면, 그 제물은 하나님과 사탄의 두 주인이 대하게 되어 비원리적인 입장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여기에는 심정적인 면에서의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타락한 아담은 사실상 하나님에게 천추만대(千秋萬代)에 이르는 슬픔을 안기어 드린 죄악의 장본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직접 대하시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하실 수 있는 심정적인 대상이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 대신으로 그의 차자(次子) 아벨을 세워서, '상징헌제'를 드리게 하셨다. 이렇게 하여 먼저 만물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과 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동시에 세운 기대 위에서, 가인과 아벨이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더면, 부모된 아담은 그 실체기대 위에 서게 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그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것으로써 '실체헌제'를 하기 위하여서는, 그 헌제의 중심인물(中心人物)이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의 상징헌제에는, 아담대신으로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것과, 또 아벨을 실체헌제의 중심인물로 결정하기 위한 것의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은 가인이 세워야 했는데, 이것이 어찌하여 아담가정 전체가 세우는 결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인간조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고,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 굴복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가인과 아벨이 다 함께 자녀로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운 입장에 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또 가인과 아벨은 선악(善惡)의 모체인 아담을 분립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사탄을 분립하였더라면, 그 부모된 아담은 사탄을 분립한 그 입장에서, 먼저 실체기대(實體基臺) 위에 서게 되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루었을 것이다. 이와같이 부모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은, 상징헌제(象徵獻祭)와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벨이 뜻맞는 헌제를 함으로써, 아담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조건과 '실체헌제'를 드리기 위한 중심인물로서의 아벨의 입장은 세워졌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은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타락시킨 것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게 됨으로써 '실체헌제'에 실패하여, 실체기대를 세우지 못하게 됨에 따라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 아담가정이 보여준 교훈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첫째 뜻 성사(成事)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어떠하셨던가 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원래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반드시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의 책임분담이 합하여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통하여 헌제(獻祭)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분담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헌제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둘째, 가인이 아벨을 죽였으나, 그 후 하나님이 아벨 대신 셋을 세워 새로운 섭리를 하신 것으로써,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인 것이고, 인간에 대한 그의 예정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아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만, 그가 '실체헌제(實體獻祭)'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예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벨이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한 입장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대신 셋을 세우시어,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 '뜻'을 이루어 나아가셨던 것이다.

세째, 가인과 아벨의 헌제로써, 타락인간은 항상 아벨적인 존재를 찾아 그에게 순종 굴복해야만, 하늘이 요구하는 '뜻'을 자기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한편 아담가정을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것과 동일한 섭리(攝理)는, 인간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 후 계속 반복되어 내려왔다. 따라서 이 노정은 오늘날의 우리 자신들도 걸어야 할 탕감노정(蕩減路程)으로서 그대로 남아져 있기 때문에,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오늘 우리들에게까지도 전형적(典型的)인 산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2절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아담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아벨이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전 위에서, 그의 대신으로 셋을 세우셨다(창세기 4장 25절). 그리하여 그 후손에서 노아의 가정을 택하시사, 아담가정의 대신으로 세우시어 새로운 복귀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창세기 6장 13절에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하신 것을 보면, 그 때도 말세였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홍수심판 후 노아가정을 터로하여 메시아를 보내심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하려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아가정도 먼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고, 다음으로 그 기대 위에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하는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아담가정이 복귀하지 못하였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中心人物)은 노아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으로 이루시려다 못 이루신 뜻을 대신 이루시기 위하여 아담으로부터 1600년을 지나 10대만에 노아를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찍이 아담에게 축복하셨던 것(창세기 1장 28절)과 마찬가지로 노아에 대해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하셨던 것이다(창세기 9장 7절).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2 인간조상이 된다.

노아는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悖壞)하여 강포(强暴)가 땅에 충만한 때에 부름을 받아(창세기 6장 11절), 120년간이나 갖은 조롱과 비소를 받아가며, 하나님의 명령에만 절대 순종하여, 평지도 아닌 산 꼭대기에 방주(方舟)를 지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조건 삼아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홍수심판(洪水審判)을 감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아는 제1 믿음의 조상인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는 노아가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같이, 그의 아들 함의 범죄로 인하여 노아의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사명은 아브라함에게로 옮겨졌던 것이다.

아담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한 바와같은 이유로 말미암아 자기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이미 아벨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뜻맞게 드림으로써 하늘을 대하여 충성(忠誠)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 위에서 부름을 받았고, 그는 또 혈통적으로 보더라도 아벨 대신 택함을 받은 셋(창세기 4장 25절)의 후손이었으며, 뿐만 아니라 그의 위인(爲人)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義人)이었기 때문에(창세기 6장 9절), 그는 방주를 지어 그것으로써 직접 하나님에게 상징헌제를 드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노아가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條件物)들은 방주(方舟)였다. 그러면 그 방주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노아가 아담대신 제2 인간조상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었던 천주(天宙)를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워야 한다. 따라서 신천주(新天宙)를 상징하는 어떠한 조건물을 제물로서 하나님 앞에 뜻 맞게 바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물로 세웠던 것이 바로 방주였다.

방주는 3층으로 지었는데, 그 이유는 3단계의 성장기간들 통해서 창조된 천주를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식구가 여덟이었던 것은, 노아가 아담 대신의 입장이었으므로, 일찍이 사탄에게 내주었던 아담가정의 여덟 식구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방주가 천주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 주인으로 들어간 노아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 그의 식구들은 전인류(全人類)를 상징하였으며, 그 안에 들어간 동물들은 만물세계 전체를 상징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방주가 완성된 후에 하나님께서 40일간의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하셨는데, 이 심판의 목적은 무엇이었던가?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한 주인을 대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음란(淫亂)에 빠져서 이미 사탄을 대하고 있는 인류를 하나님이 또 하나의 주인의 입장에서 대하시어 비원리적인 섭리를 하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대하시어 섭리하실 수 있는 대상을 세우시기 위하여 사탄의 상대가 되어 있는 전 인류를 멸하시는 홍수심판의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심판기간(審判期間)을 40일로 정하신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후편 제3장 제2절 Ⅳ에서 논술하는 바, 10수는 귀일수(歸一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 이후 10대 만에 노아를 찾아 세우셨던 목적은, 아담을 중심하고 이루지 못하였던 뜻을 노아를 중심하고 탕감복귀하여, 하나님에게로 재귀일(再歸一)시키기 위한 10수 복귀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세우시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위기대(四位基臺)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4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써 각 대(代)를 세우시는 섭리를, 노아에게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서 계속하여 오셨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기간은 40수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인간들의 음란으로 말미암아, 이 40수 탕감기간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아 방주(方舟)를 중심하고 4위기대를 완성하는 섭리를 다시 하시기 위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이 40수를 복귀하는 탕감기간으로 40일 심판기간을 세워 가지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되어 40수는 그 후의 탕감복귀섭리노정(蕩減復歸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사탄 분립수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 예를 들면 노아심판(審判) 40일을 비롯하여,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 고역(埃及苦役) 400년, 모세의 두 차례에 걸친 금식기도(禁食祈禱) 40일, 가나안 정탐기간(偵探期間) 40일,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표류(曠野漂流) 40년, 사울왕 다윗왕 솔로몬왕의 재위기간(在位期間) 각 40년, 엘리야 금식 40일, 니느웨멸망에 관한 요나의 예언(豫言) 40일, 예수님의 금식기도 40일과 부활기간(復活期間) 40일 등은 모두 사탄을 분립하는 탕감기간이었던 것이다.

한편 성경을 보면 그 심판이 끝날 때에, 노아가 방주(方舟)에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실 섭리를 어떻게 예시(豫示)하셨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아모스 3장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 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방주를 하나님이 뜻 앞에 합당한 것으로 세움으로써, 천주(天宙)를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심판 40일기간은, 천지창조(天地創造)의 이상(理想)이 실현될 때까지의 혼돈기간(창세기 1장 2절)에 해당되는 기간이었다. 따라서 40일이 끝날 때에 방주를 중심하고 나타내 보이셨던 행사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완료한 이후의 전역사노정(全歷史路程)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보내어, 물이 마를 때까지 왕래하게 하신 것은(창세기 8장 6~7절) 무엇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던가? 이것은 마치 인간창조 직후에 천사장(天使長)이 해와의 사랑을 노렸었고, 도 가인과 아벨이 헌제(獻祭)를 할 때에도 사탄이 그들에게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과 같이(창세기 4장 7절), 홍수심판(洪水審判)이 끝날 무렵에도 사탄은 노아가정에 무슨 침범할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귀가 어디에 앉을 곳이 없는가 하고 물 위를 찾아 헤매는 모양으로써 표시하신 것이었다.

다음으로 노아가 비둘기를 방주(方舟) 밖으로 세 번 내보낸 것은 무엇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었던가?

성서에는 물이 준 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비둘기를 내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비둘기를 내보내지 않고 창문으로 직접 내다보아도 알 수 있었을 것이고, 설혹 그 문들이 모두 봉해져 있었다 하더라도 비둘기가 나갈 수 있는 구멍으로 내다 보아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둘기를 내보냈던 목적은 물이 준 것을 알려고 했던 것보다 더욱 중요한 데 있었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숨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다.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 홍수심판(洪水審判)이 있을것을 선포하신지 7일 후에(창세기 7장 10절) 홍수가 시작되어, 40일 심판기간이 지난 후에 첫번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런데 이 비둘기는 물 위를 왕래하다가 발 붙일 곳이 없어서 다시 방주로 돌아가니, 노아가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세기 8장 9절).

이 첫번 비둘기는 첫 아담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창세전(創世前)부터 하나님 안에 있었던 그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이, 아담이라는 완성실체(完成實體)로 실현되기를 원하시어 그를 지상에 창조하셨던 것인데, 그가 타락(墮落)되었기 때문에 그를 중심하고는 지상에 그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되어, 하나님은 할 수 없이 그의 뜻 성사를 후일로 미루시고 그 이상(理想)을 일시 지상으로부터 거두어 들이셨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다음에 7일을 지나 노아는 다시 그 비둘기를 내보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역시 물이 다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에 내려앉지를 못하고, 다음에는 앉을 수 있다는 표시로서 다만 감람나무 잎사귀를 입에 물고, 다시 방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창세기 8장 10~11절).

둘째 번으로 내보낸 이 비둘기는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완성실체'로서 다시 오실 제2 아담된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것이지만, 만일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는 지상에 머무실 수가 없게 되어 그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실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 그는 재림(再臨)하셔야 할 것을 약속하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시하신 것이었다.

물론 이 예시는, 만일 그 때에 땅에 물이 말라서 비둘기가 내려 앉아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었더면 그 비둘기는 결코 방주(方舟)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인데, 물이 채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로 다시 돌아갔던 것과 같이, 장차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잘 믿고 모시면, 그는 결코 죽지 않고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실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불신으로 흐르지 않고 지상천국을 이루실 것이지만, 만일 그들이 불신으로 흐르게 되면, 예수님은 부득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재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런 후 또다시 7일이 지나서 노아는 세번째로 비둘기를 내 보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물이 말랐었기 때문에, 다시는 비둘기가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창세기 8장 12절).

이 셋째 번의 비둘기는 제3 아담으로 오실 재림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반드시 지상에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되어 다시는 그 이상이 지상에서 거두어지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제3차의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노아는 비로소 방주에서 땅으로 내려와 신천지(新天地)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제3 아담으로 인하여 창조이상이 지상에서 이루어질때, 비로소 요한계시록 21장 1절 이하의 말씀대로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帳幕)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 비둘기를 세 번 내보낸 실례(實例)로써, 예정론(豫定論)에서 밝혀진 바와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는 그 섭리의 대상인 인간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연장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아담의 불신으로 인하여 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셔야 할 것과 만일 유대인들도 불신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부득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어 제3 아담으로 재림(再臨)하셔야 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되어있는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천지(天地)를 창조하실 때에 7일이라는 기간이 있었던 것과 같이, 그것을 다시 찾아 세우는 데에도 섭리적인 어떠한 기간이 지난 후가 아니면 아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노아가정은 심판 40일로써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인 방주(方舟)를 뜻맞게 찾아 세워 그 기대(基臺)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실체기대

노아는 방주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제물로 바쳐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다. 이로써 노아는 만물(萬物)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 동시에, 인간을 복귀하기 위한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웠던 것이다. 다음엔 이 기대 위에서 노아의 아들 셈과 함이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서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성공하면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노아가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한 후에, 이 가정의 '실체헌제(實體獻祭)'가 뜻맞는 것으로 바쳐지기 위하여서는, 먼저 '실체헌제'의 중심이 되어야 할 차자 함이, 아담가정의 '실체헌제'의 중심이었던 차자(次子)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다. 아담때에는 아벨 자신이 아담의 대신으로 '상징헌제'를 하였기 때문에, 아벨이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 동시에 '상징헌제'의 중심으로도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 때는 함이 아니고 노아 자신이 '상징헌제'를 하였기 대문에, 함이 '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와 심정으로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함으로 하여금 노아와 심정으로 일체적인 입장에 서게 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섭리(攝理)를 하셨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창세기 9장 20절 내지 26절에 씌어 있는 기록을 보면, 함은 그의 부친 노아가 장막(帳幕) 안에서 나체(裸體)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 형제 셈과 야벳을 선동(煽動)하였다. 이 때에 그들도 함의 선동에 뇌동(雷同)되어 그의 부친의 알몸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이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그 부친의 몸에 옷을 덮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죄가 되어 노아는 함을 저주하여 이르기를 그 형제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러한 섭리를 하셨으며, 또 나체를 부끄러워한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러한 내용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어떻게 되면 죄가 되는가 하는 문제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사탄도 어떤 대상을 세워 그와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하여 수수(授受)의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존재 및 활동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든지 그에게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어 사탄의 상대가 됨으로써 사탄이 활동할 수 있게 될 때 거기에 죄가 성립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찌하여 노아의 나체(裸體)로써 함을 시험하셨던가 하는 것이다. 방주(方舟)는 천주(天宙)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심판 40일로써 방주를 뜻 가운데 세운 직후에 되어진 모든 사실들을 천주창조(天宙創造) 이후에 되어지는 모든 사실들을 상징한 것이기 때문에, 심판 40일로써 방주를 뜻 가운데 세운 직후에 되어지는 모든 사실들을 상징한 것이었다 함은 이미 논술한 바와같다. 그러므로 40일심판이 끝난 직후의 노아의 입장은 천지창조 후의 아담의 입장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창조된 아담과 해와가 서로 얼마나 가깝고 허물할 것이 없는 사이였으며, 또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었던가 하는 것은, 창세기 2장 25절에 그들이 서로 알몸으로 있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墮落)한 후에 스스로 하체(下體)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나무잎으로 가렸었고, 또 하나님이 보실 것을 두려워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었다(창세기 3장 7절). 그러므로 그드이 하체를 부끄러워했던 행위는, 하체로 범죄하여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었다는 정념(情念)의 표시요, 하체를 가리고 숨었었던 행동은, 사탄과 혈연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범죄의식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40일심판으로 사탄을 분립(分立)한 입장에 있었던 노아는 천지창조 직후의 아담의 입장에 섰어야 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나체(裸體)로 있어도 그 가족들이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 숨으려 하지도 않는 모습을 바라보시는 것으로써, 일찍이 죄를 짓기전 어디도 가린 데 없이 들어낸 나체 그대로의 인간을 보시면서 기뻐하셨던 그 심정을 탕감복귀하려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노아로 하여금 나체로 누워 있게 하셨었다. 따라서 함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같은 심정(心情)으로 아무 부끄러움 없이 노아를 대했어야, 노아와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뜻 가운데서 죄 짓기 전 부끄러움을 몰랐던 아담가정의 입장으로 복귀하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아들들은 이와 반대로 그 부친의 나체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 이를 가렸으므로, 이로써 그들은 타락 후의 아담가정과 같이,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은 부끄러운 몸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증(自證)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까마귀로써 보여주신 것과 같이, 노아가정에 침범할 수 있는 무슨 조건이 없는가 하고 엿보고 있었던 사탄은 자기의 혈연적인 후손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나선 노아의 아들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가정에 다시 침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함이 그 부친의 알몸을 부끄러워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 행동은 범죄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함은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룰 수 없었으므로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나체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죄가 되는가? 노아는 아담의 대신으로서 아담으로 인하여 사탄이 침범한 모든 조건들을 없애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가정은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다는 감성과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써,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기 전 아담가정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가리지도 않는 것으로 세워야 할 탕감조건은, 아담가정 대신으로 세워졌던 노아가정만이 세워야 할 조건이었던 것이다.

. 노아가정이 보여준 교훈

노아가 120년간이나 걸려서 산꼭대기에다 배를 지었던 것은 누구나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비난과 조소를 받은 그 일로 말미암아서 노아가정이 구원(救援)을 받았다는 사실은 함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함은 설혹 노아가 알몸으로 누어 있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을 좋게만 볼 수 있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은 자기를 중심하고 하늘 앞에 선 노아를 비판하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표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으로부터 1600년이나 지나 40일 홍수심판(洪水審判)을 행사하심으로써 찾아 세우셨던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천국가는 길은 겸허(謙虛)와 순종(順從)과 인내(忍耐)를 요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또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뜻 성사(成事)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분담(責任分擔) 수행여부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셨다. 노아가정은 하나님이 1600년이나 걸려 찾아오셨고, 또 노아가 방주(方舟)를 짓기까지 120년이나 이끌어 오셨으며, 뿐만 아니라 40일의 홍수(洪水)로써 전 인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세우신 가정이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함의 작은 실수로 말미암아서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을때, 하나님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대상이었던 그 가정 전부를 아낌없이 쓸어버리시어,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한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노아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려고 오랜 기간을 두고 애써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정이 일단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를 아낌 없이 버리시고 그 대신 아브라함을 택하셨던 사실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절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285

함의 타락행위(墮落行爲)로 말미암아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시려는 '뜻' 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므로, 노아가 하늘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심정(心情)의 터전 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그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를 다시 하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노아 가정이 이루려다 못 이루었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여,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이하여야만 하였다. 따라서 아브라함도 먼저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고, 그 기대 위에서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中心人物)은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노아를 중심하고 이루려 하셨던 ‘뜻’을 계승하여 이루기 위한 중심인물로 세워졌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노아의 노정을 위하여 세워졌다가 함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 주게 되었던 모든 조건들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노아를 중심한 ‘뜻’을 이어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아가 첫째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조건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10대와 심판 40일기간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10대와 함께, 그 10대가 각각 심판 40수를 탕감복귀한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1대를 40일기간으로써는 탕감복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후일 모세노정에 있어서 정탐(偵探) 40일의 실수를 광야 표류 40년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한 것과 같이(민수기 14장 34절), 여기에서도 각 대(代)가 심판 40일의 실수를 40년기간으로써 탕감복귀하는 통산년수(通算年數)를 세우게 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로부터 10대에 걸친 400년 탕감기간을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노아 대신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셨다. 이와같이,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1600년 간에 10대를 복귀하였던 시대에서 400년 간에 10대를 복귀하는 시대로 넘어왔기 때문에 노아 이후 인간의 수명(壽命)은 갑자기 짧아지게 되었다.

노아가 둘째로 사탄에게 내주었던 조건은 믿음의 조상의 입장과 아벨 대신이었던 함의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과 함의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지 않고는 노아의 입장에 설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노아 대신 믿음의 조상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는 , 노아가 믿음과 충성으로 방주(方舟)를 지었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믿음과 충성으로‘상징헌제(象徵獻祭)’를 드려야만 했었다. 한편 또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벨의 대신이었던 함(그들은 모두 둘째 아들로서 실체헌제의 중심이었다)을 사탄에게 내주셨으므로, 탕감복귀원칙에 의하여 하나님도 그 대신으로 사탄이 가장 사랑하는 입장에 있는 존재를 빼앗아 오셔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분에 하나님은 우상(偶像)장사인 데라로부터 그 아들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셨던 것이다(수 24:2-3). 287

아브라함은 노아의 대신이요. 따라서 아담의 대신이기 때문에 복귀(復歸)한 아담형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노아에게 축복(祝福)하셨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에게도 자녀를 번식하여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라고 축복하셨던 것이다(창12:2). 아브라함은 이러한 축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하란에서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내 사라와 조카 롯 그리고 거기에서 취한 모든 재물과 삶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갔었다(창12:4-5).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노정으로써, 장차 야곱과 모세가 사탄세계인 하란과 애급(埃及)에서 각각 그 처자(妻子)를 데리고 재물을 취하여, 그 어려운 환경을 박차고 떠나 가나안으로 복귀해야 할 전형노정(典型路程)으로 삼게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노정은 또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사탄세계의 모든 인간과 만물세계를 하나님의 세계에로 복귀해야 할 전형노정을 예시(豫示)한 것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후편 제2장 제1절 Ⅱ 참조).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1) 아브라함의 상징헌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비둘기와 양과 암소로써 제사(祭祀)를 드릴것을 명하셨던 것이니, 이것들은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條件物)들이었던 것이다(창 15:9). 따라서 마치 노아가 ‘상징헌제(象徵獻祭)’로서 방주(方舟)를 지어 바치려하였을 때 그 헌제를 위한 믿음을 세웠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이 ‘상징헌제’를 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위한 믿음을 세워야만 했었다. 성서에는 노아가 어떠한 방법으로 그 믿음을 세웠는가 하는 것은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창세기 6장 9절에 노아가 당세의 의인(義人)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방주(方舟)를 지으라시는 명령을 받기에 합당한 의인이 되기까지에는 필시 어떠한 믿음을 세웠음에 틀림없다. 기실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와 같이 믿음에서 믿음을 세워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다(롬 1:17).

그러면 아브라함은 ‘상징헌제’를 하기 위하여 어떠한 믿음을 세웠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아브라함은 제2 인간 조상 노아의 입장을 복귀해야 했었다. 따라서 그는 또 아담의 입장에도 서야 했기 때문에, 그는 ‘상징헌제’를 하기전에 아담가정의 입장을 복귀하는 상징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먼저 세워야 하였던 것이다.

창세기 12장 10절 이하의 성구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기근(饑饉)으로 인하여 애급(埃及)으로 내려갔던 일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애급 왕 바로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고자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그와 부부관계(夫婦關係)하고 하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미리 짠 바 계책대로 자기의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그의 처(妻) 사라를 남매(男妹)의 입장에서 바로의 아내로 빼앗겼다가 하나님이 바로를 징계하시어 다시 그 아내를 찾아오는 동시에, 데리고 갔던 조카 롯과 함께 많은 재물을 취해가지고 나왔었다. 아브라함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서, 아담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이러한 섭리노정(攝理路程)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289

아담과 해와가 미완성기(未完成期)에서 아직 남매와 같은 입장에 있었을 때에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빼앗아 감으로 인하여, 그의 자녀들과 만물세계까지 사탄의 주관하에 속하게 되었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한 조건을 세우려면,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남매와 같은 입장에서 처 사라를 사탄의 실체인 바로에게 빼았기었다가 그의 처의 입장에서 다시 그녀를 찾아옴과 동시에, 전인류(全人類)를 상징하는 롯과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재물을 찾아오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창 14:16). 아브라함의 이러한 노정은 후일에 예수님이 오셔서 걸어야 할 전형노정(典型路程)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탕감조건을 세운 후에야 비로소 비둘기와 양과 암소로써 ‘상징헌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는, 원래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려 하셨던 노아와 그 가정의 입장을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담과 그 가정의 입장에도 서야했었기 때문에, 아담가정에서 가인 아벨의 헌제를 중심하고 복귀하려 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조건물(條件物)을 바쳐야 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또 노아가정이 방주를 중심하고 복귀하려 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할수 있는 상징적인 조건물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물로 바쳐야 했었다. 이러한 상징적인 조건물로 바친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상징제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상징제물로 바쳤던 비둘기와 양과 암소는 과연 무엇을 상징하였던가?

이 세 가지의 상징제물(象徵祭物)은 3단계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천주(天宙)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즉 그중의 비둘기는 소생(蘇生)을 상징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섭리(舊約攝理) 완성자, 곧 소생섭리(蘇生攝理) 완성자로 오셨었다. 즉 예수님은 비둘기로 표시된 소생섭리 완성자로 오셨기 때문에, 그에 대한 표징(表徵)으로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의 신(神)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임하셨던 것이다(마3:16). 한편 또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를 복귀하려고 오신 분으로서 먼저 사탄이 침범했던 그 비둘기를 복귀한 입장에 서야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둘기로써 그가 소생 구약섭리 완성자로 오셨음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290

다음으로 양(羊)은 장성(長成)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제물(祭物) 실수를 복귀하려고 오신 분으로서, 비둘기로서 표시된 모든 것을 복귀한 구약섭리의 기대(基臺) 위에서 양으로서 표시된 모든 것을 복귀해야 할 장성 신약섭리(長成 新約攝理)의 출발자이기도 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 의하여 비둘기로 표시된 소생섭리의 완성자라는 증거를 받으신 후, 어느 날 세례 요한은 또 예수님이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이로다(요1:29)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장성 사명 출발자이심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291

다음으로 암소는 완성(完成)을 상징하였다. 사사기 14장 18절을 보면, 삼손이 수수께끼의 문제를 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로 하여금 삼손을 꼬여 그 내용을 탐지해 내게 함으로써 그것을 푼 일이 있었는데, 그때 삼손은 너희가 내 암송아지로 밭갈지 아니하였더면 나의 수수께끼를 능히 풀지 못하였으리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삼손은 아내를 암소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전인류의 신랑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가 재림(再臨)하실때까지의 성도(聖徒)들은 오시는 신랑 앞에 신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부 된 성도들이 다시 오시는 신랑 된 예수님과 어린양잔치를 치른 후에는 신부가 아니고 아내가 되어 남편 된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재림 이후의 완성 성약시대(完成 成約時代)는 아내의 시대요, 따라서 암소의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암소는 곧 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많은 영통인(靈通人)들이 이때가 소의 시대라고 계시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3제물은 또 무엇을 탕감복귀하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그의 ‘상징헌제(象徵獻祭)’로써, 일찍이 아담과 노아의 각 가정을 중심한 섭리에서 그들이 ‘상징헌제’로써 탕감복귀하여다가 사탄에게 내주었던 모든 것을 재탕감복귀(再蕩減復歸)하는 동시에, 또 그들이 ‘실체헌제(實體獻祭)’로써 탕감복귀하려다가 실패하여 사탄에게 내주었던 모든 것을 재탕감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는 아담으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렇게 3대에 걸친 종적인 섭리의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그 3제물로써 일시에 횡적으로 복귀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소생(蘇生)·장성(長成)·완성(完成)의 3단계를 상징하는 비둘기와 양과 암소를 한 제단에 벌여 놓고 헌제한 것은, 마치 아담의 당대에서 3단계의 성장기간(成長期間)을 완성하려 했던 것과 같이 아담의 입장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소생 아담, 장성 노아, 완성 아브라함의 , 뜻으로 본 3대에 걸쳐서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려던 종적인 섭리를 일시에 횡적으로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헌제는 사탄이 침범하였던 3수로 표시된 모든 조건들을 일시에 탕감복귀 함으로써, 전복귀섭리(全復歸攝理)를 단번에 이루시려는 뜻을 상징적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어떻게 드렸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다. 292

창세기 15장 10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다른 제물은 모두 둘로 쪼개서 제단의 좌우에 놓았으나 비둘기만은 쪼개지 않고 그대로 놓았기 때문에, 솔개가 그 고기 위에 내려왔으므로 아브라함이 이것을 쫓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 날 해질 때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15:13)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쪼개야 할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에 솔개가 내렸었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 들어가서 400년 간을 고역(苦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었는가? 이 문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해결(未解決)의 문제로서 남아져 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원리(原理)를 통하여서만 명확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면 제물을 쪼개야 하는 이유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구원섭리(救援攝理)의 목적은 선과 악을 분립하여 악을 멸하고 선을 세움으로써 선주권(善主權)을 복귀하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한 존재를 가인과 아벨로 분립한 후에 헌제(獻祭)해야 했던 것이나, 또 노아 때에 홍수(洪水)로써 악을 치고 선을 분립했던 것 등의 목적은 모두 선주권을 복귀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제물을 쪼개 바치게 함으로써, 아담이나 노아로써 이루지 못하였던 선악 분립의 상징역사(象徵役事)를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물을 쪼개는 것은, 첫째로 아담가정에 있어서 선악(善惡)의 모체(母體)인 아담을 선과 악의 두 표시체로 분립하기 위하여 아벨과 가인으로 갈라 세운 것과 같은 입장을 복귀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노아가 홍수 40일로써 선과 악을 갈라 세웠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함이었으며, 셋째로는 사탄 주관하(主管下)에 있는 피조세계(被造世界)에서 선주권(善主權)의 세계를 갈라 세우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넷째로는 사탄과의 혈연관계(血緣關係)를 통하여 들어온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聖別)하는 조건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293

그러면 쪼개지 않은 것이 어찌하여 죄가 되는가? 쪼개지 않은 것은 첫째로 가인과 아벨을 분립하지 않은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아벨적인 대상이 없었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헌제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가인 아벨의 헌제 실패는 탕감복귀(蕩減復歸)되지 않았다. 둘째로 그것을 노아를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의 홍수심판(洪水審判)에서 선악을 분립하지 못하였던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상대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선의 대상이 없게 되어 홍수심판에서 실패한 입장으로 되돌아간 결과가 되었다. 셋째로 그것은 사탄 주관하에 있는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이 상대하실 수 있는 선주권의 세계를 분립하는 상징적인 조건을 세우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네째로 그것은 사망의 피를 뽑아 성별(聖別)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상대하여 섭리하실 수 있는 성물(聖物)이 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않고 바침으로 인하여 그것은 사탄 것 그대로를 바친 것이 되어, 결국 그것은 사탄의 소유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여 준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소생(蘇生)을 상징하는 제물인 비둘기가 사탄의 소유물로 남아지게 되었으므로, 소생의 기대위에 세워야 할 장성(長成)과 완성(完成)을 상징하는 양과 암소에게도 역시 사탄이 침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상징제물(象徵祭物)은 모두 사탄에게 바친 결과로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이 범죄가 된 것이다.  294

그러면 다음에는 상징제물에 솔개가 내렸다는 것은 (창 15:11)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한 이후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뜻 앞에는 반드시 사탄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즉 창세기 4장 7절을 보면 가인과 아벨이 헌제를 할 때에도 사탄이 그들을 엿보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노아 때에도 심판 직후에 사탄이 노아가정에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는 것을 까마귀로써 보여 주셨다(창 8:7).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할 때에도 그 제물에 침범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사탄은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것을 보고 곧 그 제물에 침범하였었다.그리하여 성경은 이 사실을 솔개가 제물위에 내린 것으로 표상(表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헌제’의 실수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실수로 말미암아 그 ‘상징헌제’로써 탕감복귀하려던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결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異邦)인 애급에서 400년 간 고역을 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노아 때에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내주셨던 10대와 40수를 동시에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하시기 위하여 400년이란 사탄 분립기간을 세우시고, 그 분립기대(分立基臺) 위에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 제물을 또 사탄에게 바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상징헌제’로써 아브람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한 탕감기간(蕩減期間)이었던 노아 이후의 400년 전도기간도 역시 사탄에게 내주시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기 전의 입장이며, 따라서 노아가 방주(方舟)를 짓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서는 이 400년이란 사탄분립기간을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고역하는 400년 기간은, 노아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출발하려 했었던 그 입장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하여 모세를 그 터전위에 세우시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고역기간(苦役期間)은 아브라함의 헌제 실수로 인한 벌을 받는 기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를 위하여 사탄 분립의 터를 닦는 기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한 제단에 3제물을 동시에 드리는 ‘상징헌제’에 성공하심으로써 소생(蘇生), 장성(長成), 완성(完成)으로 표시된 모든 섭리를 동시에 이루려 하셨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논술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를 중심한 섭리는 다시 이삭을 거쳐 야곱까지 3대에 걸친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실패는 노아의 방주(方舟)를 중심한 ‘상징헌제’와 가인 아벨을 중심한 ‘상징헌제’등의 실패를 반복한 것이 되어 버렸다. 295

(2) 아브라함의 이삭 헌제  296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한 후 다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시어(창 22:2), 그로써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하시려는 새로운 섭리를 하셨다. 예정론(豫定論)에 의하면, 하나님은 어떠한 뜻을 위하여 예정되었던 인물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 장본인을 다시 세워 쓰실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헌제로써 찾아 세우려던 모든 뜻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다시 세우시어 이삭 헌제로써 그의 ‘상징헌제’의 실패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려는 섭리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인가?

첫째로,‘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고, 노아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2차였으며,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제3차였다. 그런데 3수는 완성수 (후편 제3장 제2절 Ⅳ)이기 때문에,‘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하시려는 섭리가 연장되기 제3차 만이었던 아브라함 때에는 이 섭리를 완성해야 할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을 실체로 헌제하여 보다 큰 것으로서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움으로써,‘상징헌제’실수로 인하여 상징적으로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위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헌제를 드리는 아브라함의 입장은 곧 아담의 입장이었다. 그런데 사탄은 아담과 그의 자식 가인에게 침범함으로써 2대에 걸친 그들을 빼았아 갔었기 때문에, 탕감복귀원칙(蕩減復歸原則)에 의하여 하늘편에서도 아브라함과 그 자식의 2대에 걸쳐서 빼앗아 올 수 있는 섭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아담은 직접 헌제를 하지 못하였으나 섭리적으로 보아 노아는 아담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서도 소생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성공한 아벨의 심정의 터 위에 있었기 때문에 방주로써 직접‘상징헌제’를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소생,‘상징헌제’에 성공한 아벨의 터전과 장성,‘상징헌제’에 성공한 노아의 기대 위에 부름받아 완성‘상징헌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렇듯 ‘상징헌제’에 실수하였지만, 하나님은 아벨이나 노아가 ‘상징헌제’에 성공한 역사적인 심정의 기대를 조건으로 그를 다시 세워 한번 더 헌제를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297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릴 때에도 ‘상징헌제’를 하던 때와 같이 먼저 아담가정을 복귀하는 상징적인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이삭헌제를 위한 믿음을 세워야 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다시 자기의 처(妻) 사라와 남매(男妹)의 입장에 서 가지고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기어 일단 그의 처가 되어진 처지에서 다시 찾아오는 역사(役事)를 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때에도 사라와 함께 인류를 상징하는 노비와 만물세계를 상징하는 제물을 찾아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창 20:1~16)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 헌제(獻祭)를 어떻게 하였는가? 아브라함이 그의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祝福)의 자식으로 받았던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기 위하여 죽이려 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시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은 아노라(창 22:12)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나 그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과 충성에서 나온 행동은, 벌써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하였기 때문에 이삭으로부터 사탄을 분리하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탄이 분리된 이삭은 벌써 하늘편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제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의 실수에 대한 책망과 이삭헌제의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아울러 강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아브라함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이 이삭을 다시 하늘편으로 분립함으로써 새로운 섭리노정(攝理路程)을 출발하기 위하여, 모리아산상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는 데 3일 기간을 소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3일 기간은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새로운 섭리노정을 출발하는 데 있어서의 사탄을 분립하는 기간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야곱도 하란에서 그 가족을 이끌고 가정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출발할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이 있었고(창 31:20~22), 모세도 역시 애급(埃及)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였을 때에 사탄 분립의 3일 기간을 지난 후에야 홍해(紅海)를 향해 출발하였었다(출 8:27~29) 예수님도 영적으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실 때 사탄 분립의 무덤 3일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본진에 앞서 그들을 인도한 법궤가 사탄분립의 3일노정을 걸었던 것이다.(수 3:1~6)

(3)뜻으로 본 이삭의 위치와 그의 상징헌제  299

아브라함은 일단 그의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하였지만, 그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이룰 수 있는 원리적인 조건이 있었다는 데 관해서는 이미 위에서 상론(詳論)한 바 있다. 그러나 예정론(豫定論)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하고 실패한 장본인인 아브라함을 중심하고 또다시 같은 섭리를 되풀이 할 수는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상징헌제에서 실패한 아브라함을 실패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던 것이고, 또 그로부터 연장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연장되지 않은 것과 같은 입장에 세워야 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燔祭)로 드리라고 명령하셨던 것이다.(창 22:2)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이삭)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루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고 하심으로써 이삭을 통하여 선민(選民)을 부르실 것을 약속하셨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죽이려 했던 충성은,‘상징헌제’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한 것과 같은 입장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입장에서, 침범하였던 사탄을 분립하였고, 더 나아가서 뜻을 중심하고 이삭과 일체불가분(一體不可分)의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죽음의 자리에서 같이 살아난 이삭과 아브라함은 서로 그 개체는 다르면서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한 몸이 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중심한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이삭을 중심한 섭리에로 연장되더라도 그 섭리에서 이삭이 성공만 하면 이 성공은 바로 이삭과 한 몸 된 아브라함의 성공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그 섭리는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연장되었어도, 뜻을 중심하고 보면 아브라함이 실패도 하지 않았고 또 그 섭리가 연장도 되지 않은 것과 같이 되었던 것이다.

이삭 헌제 때의 그의 연장은 분명치 않다.그러나 그가 번제(燔祭)에 쓸 나무를 지고 갔을 뿐만 아니라(창 22:6), 번제에 쓰일 양(羊)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그것이 어디에 있는 가 하고 그의 부친(父親)에게 물어 봤던 것(창 22:7)으러 미루어 보아, 그는 이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때에 이삭 자신이 그것을 협조하였으리라는 사실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뜻에 대한 사리(事理)를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상당한 연령에 도달해 있었던 이삭이, 만일 번제를 위하여 자기를 죽이려는 부친에게 반항하였다면 하나님이 그 이삭 헌제를 받으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충성과 그에 못지않은 이삭의 충성이 합동하여 이삭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사탄을 분립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헌제를 중심하고 이삭과 아브라함이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써, 첫째로 아브라함은 '상징헌제‘실수로 인하여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그 실수 이전의 입장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해 가지고 그 입장에서 자기의 섭리적인 사명을 이삭에게 인계할 수 있게 되었고, 둘째로 이삭으로서는 그가 뜻앞에 순종굴복(順從屈伏)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늘의 사명을 이어받아, 다음에 '상징헌제’를 드리기 위한 믿음을 세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뜻이 이삭에게로 옮겨진 후,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를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 22:13)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으로 번제(燔祭)를 드렸으니, 이것은 그대로 이삭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워진 '상징헌제(象徵獻祭)'가 된 것이었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갔던 사실로 보아 아브라함이 수양을 번제로 드리는 데 있어서도 이삭이 그를 협조하였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다.따라서 아브라함이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드렸다 하였지만,뜻으로 보면 그와 한 몸이 되어 그의 사명을 계승한 이삭 자신이 헌제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의 사명을 인계하고 그를 대신한 입장에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던 것이다.

. 실체기대

이와 같이 이삭은 아브라함을 대신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로서, 수양으로 ‘상징헌제’를 뜻맞게 드렸으므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하고‘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우려면, 여기에서 또 다시 그의 자식 에서와 야곱을 가인광 아벨의 입장에 분립하여 놓고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함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이삭과 그의 이복형(異服兄)이 되는 이스마엘이 각각 아벨과 가인의 입장에 서 가지고 가인과 아벨이 이루지 못하였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 했던 것이다.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헌제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입장에 이삭을 대신 세우시고 이스마엘과 이삭의 입장에는 각각 에서와 야곱을 대신 세우시어 그들로 하여금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는 섭리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을 중심한 에서와 야곱은 아담을 중심한 가인과 아벨의 입장인 동시에 노아를 중심한 셈과 함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맏아들 에서와 둘째 아들 야곱은 각각 사탄이 침범한 아브라함의 첫째 번‘상징헌제’와 사탄을 분립한 둘째 번 이삭 헌제의 상징이었으며, 또 그들은 각각 가인과 아벨의 입장에서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해야 될 악(惡)과 선(善)의 표시체들이었다. 에서와 야곱이 태중(胎中)에서부터 싸운 것은(창 25:22~23)이와 같이 그들이 각각 악과 선의 표시체로 분립되었던 가인과 아벨의 입장으로서 상충적인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태중에서부터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 것도(롬 9:11~13), 그들은 각각 아벨과 가인의 입장에서 저들의 헌제 실패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해야 할 선악의 표시적인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에서와 야곱이‘실체헌제’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는 먼저 야곱이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그런데 야곱은 다음과 같이 ‘실체헌제’를 거친 후에, 아브라함의 ‘상징헌제’실수로 말미암은 400년 간의 탕감노정(蕩減路程)을 걷기 위하여 애급(埃及)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첫째로, 야곱은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개인적으로 복귀하는 싸움에서 승리의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사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被造世界)를 장자의 입장에서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차자(次子)의 입장에서 그 장자의 기업을 빼앗아 나오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장자를 미워하고 차자를 사랑하셨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말 1:2~3)그런데 장자의 기업을 복귀해야 할 사명을 띠고 복중에서부터 부름을 받은 야곱은 차자의 입장에서 지혜롭게 떡과 팥죽으로서 에서로부터 그 장자의 기업을 빼앗았던 것이다(창 25:34). 야곱은 장자의 기업을 중히 여기어 그것을 복귀하려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그를 축복하게 하셨고(창 27:27), 이에 반하여 에서는 그것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릴 정도로 경홀(輕忽)히 여겼기 때문에 그를 축복하시지 않았다.

둘째로, 야곱은 사탄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 21년 간을 고역(苦役)하면서 가정과 재물을 중심하고 장자의 기업을 복귀하는 싸움에서 승리해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셋째로, 야곱은 하란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어올 때, 얍복강에서 천사(天使)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실체로써 천사에 대한 주관성(主管性)을 복귀하였던 것이다. 야곱은 이와 같이 하여 드디어 아벨의 입장을 탕감복귀함으로써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중심인물이 되었었다.

이로써 에서와 야곱은 하나님이 아벨의 헌제를 받으셨을 때의 가인과 아벨의 입장을 확립하였기 때문에, 그들이‘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에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그를 중보(仲保)로 세우며, 그의 주관을 받는 입장에서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축복을 받은 야곱으로부터 선(善)을 이어받음으로써 선을 번식하는 입장에 서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 에서는 야곱이 하란에서 21년 간의 고역(苦役)을 마치고 하늘편 처자(妻子)와 재물을 취하여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그대로 그를 사랑하고 환영하였기 때문에(창 33:4)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담가정의 가인과 아벨, 또 노아가정의 셈과 함이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실패하였던 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게 되었었다.

이와 같이 에서와 야곱이 ‘실체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실체헌제(實體獻祭)’를 탕감복귀하여 나온 종적인 역사노정을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노정 중 이삭가정에서 비로소 횡적으로 탕감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에서를 태중(胎中)에서부터 미워하였다고 로마서 9장 11절 내지 13절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와 같이 그는 야곱에게 굴복하여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였기 때문에 복귀한 가인의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어 드디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따라서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다만 그가 복귀섭리(復歸攝理)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맞추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사탄편인 가인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입장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 메시아를 위한 기대

아담가정에서부터 세우려던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복귀섭리의 중심인물들이 그들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3시대에 걸쳐 연장되어 아브라함에까지 이르렀었다. 그러나 이 뜻을 완성해야 할 아브라함이 또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수함으로 인하여 이 뜻은 다시 이삭에게로 연장되었었다. 그런데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짐으로써 이때에 비로소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메시아는 응당 이때에 강림(降臨)하셔야 될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중심하고 볼 때, 메시아를 맞기 위한 이 기대의 사회적인 배경은 어떠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타락인간(墮落人間)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하는 것은 이미 사탄을 중심하고 이루어진 세계를 메시아를 위한 왕국으로 복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아담가정이나 노아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는 그 가정을 침범할 수 있는 다른 가정이 없었기 때문에,‘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만 이루어지면 그 기대(基臺) 위에 메시아는 오시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때에는 이미 타락인간들이 사탄을 중심한 민족을 형성하여 아브라함가정에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기대 위에 바로 메시아가 강림하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 기대가 사탄세계와 대결할 수 있는 민족적인 판도 위에 세워진 후에야 비로소 메시아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상징헌제’에 실수하지 않고 ‘실체헌제(實體獻祭)’에 성공하여 그때에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 기대를 중심하고 그 후손이 가나안 땅에서 번성하여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고서는 메시아를 맞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상징헌제’에 실수하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벌로서,‘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조성한 이삭의 후손들은 고향을 떠나 이방(異邦)에 들어가서 400년 간을 고역(苦役)하면서 민족적인 기대를 세워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 온 후에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실수로 말미암아 그 후손에게 남아진 탕감노정(蕩減路程)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어야 하였던가? 그것은 이삭이 아니고 야곱으로부터였다. 왜냐하면 위에서 이미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모든 탕감노정을 중심적으로 걸어야 할 인물은 ‘실체헌제(實體獻祭)’ 중심인 아벨형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가정에서는 아벨, 노아가정에서는 함, 아브라함가정에서는 이삭, 그리고 이삭가정에서는 야곱이 각각 그 가정의 탕감노정을 중심적으로 걸어야 했던 것이다. 특히 야곱은 ‘메시아를 위한 기대’위에 선 아벨형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음에 메시아가 걸으셔야 할 사탄분립의 전형노정(典型路程)을 먼저 본보기로 걸어야 했던 것이다(후편 제2장 제1절)

그리하여 야곱가정은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위에서, 아브라함이 지은 죄를 담담하고 400년 간의 탕감조건을 걸음으로써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을 이루어야 했기 때문에, 이삭가정과 같은 입장에서 이 탕감노정을 출발하게 되어 있었다.

즉 이삭가정에 있어서 아벨의 입장인 야곱이 모든 탕감노정을 걸었던 것과 같이, 야곱가정에 있어서는 야곱의 하늘편 처(妻) 라헬의 소생인 요셉이 먼저 애급(埃及)으로 들어가 그 탕감노정을 걸음으로써 아벨의 입장을 확립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의 형들에 위하여 애급으로 팔려 가서 30세에 애급의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된 후에 그가 어렸을 때 하늘에서 몽시(夢示)로써 예시해 주셨던 대로(창37:5~11), 먼저 야곱의 사탄편 처 레아의 소생인 이복형(異服兄)들이 그에게 가서 굴복함으로써 자녀들이 먼저 입애급노정(入埃及路程)을 걷게 되었고, 다음으로는 그의 부모가 같은 노정으로 인도되었었다. 그리하여 야곱가정은 장차 메시아를 민족으로 맞기 위한 탕감노정을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삭을 중심한 섭리는 또 야곱을 중심한 섭리노정(攝理路程)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이 개체는 다르지만 뜻으로 볼 때 한 몸이었던 것과 같이. 야곱은 이삭가정을 중심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운 ‘실체기대(實體基臺)’의 중심인물로서 아브라함이 지은 죄를 담당하고, 장차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워 가지고 이삭의 뜻을 민족적으로 이루어야 할 탕감노정을 출발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서로 개체는 다르나 뜻으로 보면 모두 한 몸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의 성공은 곧 이삭의 성공이요, 이삭의 성공은 곧 아브라함의 성공이 되기 때문에 ,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이삭과 야곱에로 연장되었으나 뜻을 중심하고 보면 연장되지 않고 그 당대에 이루어진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고 한 말씀은 바로 이러한 섭리노정에 입각해 볼 때, 그들은 3대이면서도 뜻으로 보면 하나의 ‘뜻’을 공동으로 이룩한 선조들로서 1대와 같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실상 하난님은 야곱가정으로 하여금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에 들어가 400년 고역의 길을 걷게 하시면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말씀대로 선민(選民)을 세워 가지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한 후‘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우시게 하심으로써, 이 기대 위에 메시아를 보내시어 복귀섭리를 완수하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가정을 중심하고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는 결과적으로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기 위한 탕감노정(蕩減路程)의 출발기대(出發基臺)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은 결과적으로 다음 시대에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세우기 위한 출발기대를 조성하는 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인한 탕감노정을 담당한 야곱은 하늘 뜻을 위한 지혜로써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빼앗는 개인적인 싸움에서 성공하였고, 사탄세계인 하란으로 들어가 그의 외숙부(外叔父) 라반으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가정적으로 빼았는 21년 간의 싸움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또 천사(天使)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인간조상이 타락된 이후 타락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천사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써 선민(選民) 형성의 기틀을 잡았던 것이다.

야곱은 이러한 노정을 걸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비로소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으므로, 그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전형노정(典型路程)을 성공적으로 걷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형노정을 따라서 모세도 걸었고 예수님도 걸으셨으며 이스라엘 민족도 또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사는 사탄을 민족적으로 굴복시켜 온 그 전형노정의 사료(史料)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사가 복귀섭리역사(復歸攝理歷史)의 중심사료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우리에게 보여 준 교훈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첫째로 우리에게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복귀섭리는 하나님의 뜻만으로써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이 합해져서만 비로소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으나,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어떠하신가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예정하셨으나, 아브라함이 그 자신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명은 이삭을 거쳐 야곱에로 옮겨졌던 것이다.

셋째로 복귀섭리느 인간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할 때에 그 뜻은 필연적으로 연장되고, 동시에 그것을 복귀하려면 보다 큰 것으로서의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서는 동물을 제물(祭物)로 바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뜻이, 그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넷째로눈 제물을 쪼개는 것으로써, 우리들도 각자를 제물로서 쪼개어 선과 악으로 분립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제물의 입장에 세워 놓고 선과 악으로 쪼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축(牲畜)의 제물로 바치는 생활이다.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고 자신을 쪼개지 않을 때에는 거기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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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모세와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아모스 3장 7절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에 관한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성서를 보아도 그 숨은 뜻을 알 길이 없었다. 성서에서는 하나의 선지자(先知者)의 생애에 대한 기록도 그것의 실상은 단순히 그의 역사에만 멎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선지자의 생애를 통하여 타락인간(墮落人間)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하나님이 야곱과 모세를 세워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걷게 하시어, 그것으로써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걸으실 섭리노정을 어떻게 미리 보여주셨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1절 사탄 굴복의 본보기 노정

이삭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있어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이었던 야곱이 아벨의 입장을 확립하여 가지고,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가던 전노정은, 야곱에 의한 그 상징노정(象徵路程)을 형상적(形象的)으로 걸어야 할 모세노정이나, 또 그것을 실체적(實體的)으로 걸어야 할 예수님의 노정에 대한 전형노정(典型路程)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이스라엘 민족과 전인류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면서 걸어가야 할 본보기노정이기도 하다.

. 예수님의 전형노정으로 야곱노정과 모세노정을 세우신 이유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으로서 사탄을 자연굴복(自然屈伏)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조상으로서 메시아의 사명을 맡고 오신 것도, 사탄굴복의 최종적인 노정을 개척하여 모든 성도(聖徒)들로 하여금 그 노정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사탄을 자연굴복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도 순종굴복(順從屈伏)하지 않았던 사탄이 인간조상으로 오시는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순종굴복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적인 책임을 지시고 야곱을 세우심으로써, 그를 통하여 사탄을 굴복시키는 상징노정을 본보기로 보여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야곱을 세우시어 사탄을 굴복시키는 본보기노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모세는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형상노정(形象路程)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야곱노정을 밟아온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그 실체노정(實體路程)을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었으며, 한편 또 성도들도 그 노정을 따라 걸음으로써, 사탄을 굴복시키고 주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세가 자기와 같은 선지자(先知者) 한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라고 한 것은(사도행전 3장 22절), 모세와 같은 입장에서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섭리노정을 걸으셔야 할 예수님을 표시한 말이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19절에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미 모세를 세워서 보여주신 본보기노정을 그대로 걷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다음에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가 되는 것이다(사도행전 3장 22절).

. 야곱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노정

야곱노정은 바로 사탄을 굴복시켜 나아간 노정이다. 그리고 사탄을 굴복시키는 노정은 사탄이 침범했던 그 경로를 되돌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야곱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노정과 예수노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① 인간은 원래 따먹지 말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었는데, 천사장(天使長)으로부터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함으로써 타락(墮落)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야곱이 하란에서 처자(妻子)와 제물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復歸)하여 가정적으로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사탄과 생명을 걸고 싸우는 시련에서 승리해야 했던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天使)와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은 것은(창세기 32장 25~28절) 바로 이러한 시련을 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천사를 사탄의 입장에 세워서 야곱을 시험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을 불행하게 하시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천사에 대한 주관성(主管性)을 복귀하는 시련을 넘게 함으로써, 아벨의 입장을 확립케 하여 가정복귀 완성자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천사가 이러한 시련의 주체적인 역활을 함으로써, 천사세계도 하늘편으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민족적 가나안 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 하는 시련에서 생명을 걸고 이겨내야 되었다(출애굽기 4장 24절). 만일 인간이 이러한 시험을 하나님에게로부터 당하지 않고 사탄에게 당하다가 그 시험에 패하게 되면, 사탄에게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편에서 시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예수님도 인류를 지상천국(地上天國)으로 인도함으로써 세계적 가나안복귀 완성자가 되기 위하여는, 광야 40일 시험에서 생명을 걸고 사탄과 싸워 승리하셔야만 했던 것이다(마태복음 4장 1~11절).

② 인간의 육(肉)과 영(靈)에 사탄이 침범하여 타락성(墮落性)이 생겼으므로, 야곱은 이것을 벗기 위한 조건을 세워야 하였다. 그러므로 야곱은 육과 영을 상징하는 떡과 팥죽을 주고 에서로부터 장자(長子)의 기업(基業)을 빼앗는 것으로써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있어서의 아벨의 입장을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창세기 25장 34절). 이 노정을 위하여 모세노정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육(肉)과 영(靈)을 상징하는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여,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강하게 함으로써, 모세에게 순종하게 하여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하려 하셨던 것이다(출애굽기 16장 13절).

예수님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장 48~53절)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도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타락인간들이 세례요한의 입장에 있는(본장 제3절 Ⅱ.1) 예수님을 신종(信從)함으로써, 영육(靈肉) 아울러 그와 일체가 되어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그를 메시아로 모시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③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체까지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다. 그런데 야곱은 축복을 받아 성별(聖別)된 몸이었기 때문에, 그의 시체도 사탄과 싸워 분립했다는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그 시체에 40일간 방부제(防腐劑)를 발랐던 것이다(창세기 50장 3절). 따라서 이 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걸은 모세에 있어서도 그의 시체를 놓고 사탄과 싸웠으며(유다서 1장 9절), 또 예수님에 있어서도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문제가 일어났었던 것이다(마태복음 28장 12~13절).

④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의 성장기간(成長期間)에 사탄이 침범하였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그 기간을 표시하는 수를 찾아 세우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후편 제3장 제2절 Ⅳ). 즉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 사탄분립의 3일기간이 있었고(창세기 31장 22절), 모세가 민족을 이끌고 애급(埃及)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복귀할 때에도, 이러한 3일기간이 있었으며(출애굽기 5장 3절), 또 여호수아도 이 3일기간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요단강을 건넜었다(여호수아 3장 2절). 그리고 예수님의 영적인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도 사탄 분립의 무덤 3일기간이 있었던 것이다(누가복음 18장 33절).

사탄에게 내주었던, 노아로부터 야곱에 이르는 12대의 종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들을, 야곱 1대에서 횡적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야곱에게 12자식이 있었던 것이다(창세기 35장 22절). 그렇기 때문에 모세 때에도 12지파가 있었고(출애굽기 24장 4절), 예수노정에도 12제자가 있었던 것이다(마태복음 10장 1절).

7일 창조기간(創造期間)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탕감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야곱 때에는 70가족이(창세기 46장 27절), 모세 때에는 70장로가(출애굽기 24장 1절), 예수때에는 70문도가 각각 그 노정의 중심역활을 하였었다(누가복음 10장 1절).

⑤ 지팡이는 불의(不義)를 치고 앞길을 인도하며 강한 의지하는 뜻의 표징물(表徵物)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것이다(본장 제2절 Ⅱ. 2. ㄴ). 따라서 야곱이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짚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들어갔다는 것은(창세기 32장 10절), 장차 타락인간이 메시아를 받들어 불의를 치고 또 그의 인도를 받으며 그를 의지함으로써, 죄악세계(罪惡世界)를 넘어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로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세도 지팡이를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홍해(紅海)를 건넜으며(출애굽기 14장 16절), 예수님도 자신을 표징하는 철장(鐵杖)을 가지고, 이 고해(苦海)의 세계를 건너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에로 전 인류를 인도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요한계시록 12장 5절, 요한계시록 2장 27절).

⑥ 해와의 범죄가 죄의 뿌리를 이루었고, 그의 자식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 열매를 맺었다. 이와 같이 모자(母子)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범하여 죄의 열매를 맺었으므로, 탕감복귀(蕩減復歸)의 원칙에 의하여 모자로써 사탄을 분립해야만 된다. 따라서 야곱이 축복을 받고 사탄을 분립하였던 것도, 그 모친(母親)의 적극적인 협조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창세기 27장 43절). 모세도 또한 그 모친의 협조가 없었으면, 그가 사지(死地)에서 헤어나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자리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출애굽기 2장 2절). 그리고 예수님 때에도 역시 그를 죽이려던 헤롯왕을 피하여 그를 데리고 애급(埃及)으로 피난한 그 모친의 협조가 있었던 것이다(마태복음 2장 13절).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을 이루는 중심인물(中心人物)은 사탄세계에서 하늘세계에로 복귀하는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러므로 야곱은 사탄세계인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고(창세기 31장 33절), 모세는 사탄세계인 애급에서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걸었으며(출애굽기 3장 8절), 예수님도 이 노정을 걸으시기 위하여 출생하자마자 애급으로 피난갔다 돌아오셔야 했던 것이다(마태복음 2장 13절).

⑧ 복귀섭리의 최종적인 목적은 사탄을 괴멸(壞滅)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야곱은 우상(偶像)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고(창세기 35장 4절), 모세는 금송아지로 된 우상을 부수어 그 가루를 물에 뿌려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하였으며(출애굽기 32장 26절), 예수님은 그의 말씀과 권능으로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이 죄악세계를 진멸(殄滅)하셔야 했던 것이다(전편 제3장 제3절 Ⅱ.2참조).

2절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
.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의 개관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는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이미 세워진 '메시아를 위한 기대'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탕감복귀하여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해야 된다는 원칙은 그에게 있어서도 다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섭리를 담당한 중심인물(中心人物)들이 달라졌으므로, 그 인물들 자신도 또한 그러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않고는 복귀섭리의 뜻을 계승할 수 없었으며, 또 그 섭리의 범위가 가정적인 것에서 민족적인 것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에 있어서는 다음의 기록이 보이는 바와같이, 이 기대의 조성을 위한 탕감조건(蕩減條件)의 내용이 전의 것에 비하여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1. 믿음의 기대

(1)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말미암은, 그 후손의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기간이 끝난 다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福地)로 복귀하는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은 모세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이 '믿음의 기대'를 어떻게 세웠는가 하는 것을 알기 전에, 복귀섭리로 본 모세의 위치를 상고(詳考)하여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려던 다른 인물들, 즉 아담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에 비하여, 모세의 다른점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그것은 첫째로, 모세는 하나님 대신의 신(神)으로 세워졌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기 4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선지자 아론 앞에서 신과 같이 되리라고 하셨고,출애굽기 7장 1절에는 그를 바로에게 있어 신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둘째로,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였었다.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하나님은 모세를 아론과 바로 앞에 신이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육신을 쓴 신은 예수님밖에 없으므로, 하나님이 모세를 신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곧 모세를 출애급노정(出埃及路程)에 있어서 예수님의 모의자로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는 예수님의 모의자로서 예수님이 걸으실 노정을 그대로 앞서 걸음으로써, 마치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가실 길을 곧게 해야 했던 것과같이(요한복음 1장 23절) 모세도 예수님이 가실 길을 미리 개척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는 이 노정(路程)을 어떻게 걸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였던 야곱의 후손으로서,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의 섭리역사를 담당한 중심인물일 뿐 아니라, 다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걸으셔야 할 야곱의 전형노정(典型路程)을 형상적으로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모세는 야곱가정의 입애급노정(入埃及路程)에서 요셉이 세운 터전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요셉은 또 하나의 예수님의 모의자였다. 요셉은 야곱의 하늘편 처(妻)로 세워진 라헬이 낳은 아들로서, 야곱의 사탄편 처로 세워진 레아의 소생(所生)들의 동생이었다. 그러므로 요셉은 아벨의 입장으로서, 가인의 입장에 있었던 그의 형들이 죽이려 했던 가운데서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상인에게 팔린 바 되어 먼저 애급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30세에 애급의 총리대신(總理大臣)이 된 후에, 그가 어렸을 때 하늘에서 몽시(夢示)로써 교시한 대로(창세기 37장 5~11절) 그의 형들과 그의 부모가 애급으로 찾아와 굴복한 섭리노정의 터전위에서, 이스라엘의 사탄분립을 위한 애급고역노정(埃及苦役路程)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요셉의 이러한 노정은 장차 예수님이 사탄세계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통하여 30세에 만왕의 왕으로 군림한 후에, 전 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이 선조까지도 굴복시켜 가지고, 그들을 사탄세계로부터 분립하여 하늘편으로 복귀시킬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처럼 요셉의 전 생애는 바로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로서의 걸음이었던 것이다.

한편 또 모세의 생장(生長)과 서거(逝去)도 예수님의 그 본보기노정이었다. 모세는 출생시부터 바로왕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그 모친이 그를 숨겨서 키운 후에야 바로 궁중에 들어가 원수들 가운데서 안전하게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출생하자 헤롯왕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계셨었으므로, 그의 모친이 그를 데리고 애급에 들어가 숨겨 키운 후에야, 헤롯왕의 통치권내로 다시 돌아와 원수들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성장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죽은 후 그 시체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신명기 34장 6절), 예수님의 시체의 그러한 것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모세의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은, 바로 그대로가 아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바와같이,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걸으실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전형(典型)이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가 예수님의 모의자(模擬者)였다는 사실은 신명기 18장 18절 내지 19절에 하나님이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예수님)를 세우실 것을 예언하시면서,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벌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도 역시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 장차 예수님이 행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한 조건물

모세는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모세 이전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여 온 다른 중심인물들과는 다른 입장에 서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아벨이나 노아나 아브라함과 같이 '상징헌제(象徵獻祭)'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40일 사탄분립기대'만을 세우면,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를 더 들어 보면, 첫째, 모세는 아벨 노아 이삭등 3차에 걸친 '상징헌제'에 성공함으로써, '상징헌제'에 의한 섭리를 모두 완료한 기대 위에 섰었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시조가 타락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말씀 대신의 조건물로 세운 것이 제물이었다. 그런데 모세 때에 이르러서는, 제물을 조건물로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던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는 지나가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로 들어왔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위한 '상징헌제'는 필요없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아담가정을 중심한 섭리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연장되어감에 따라, 사탄이 침범하여 연장되었던 그 섭리적인 기간을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노아가 방주(方舟)로써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40일 사탄분립기대'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400년기간을 탕감복귀하여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 선 후에야,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상징헌제'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00년간 고역하게 되었던 것도, '40일 사탄분립기대'를 탕감복귀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되어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는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서 제물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서기만 하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실체기대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에 있어서는 '가정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에 들어와서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우는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모세는 하나님 대신이었으므로(출애굽기 4장 16절, 출애굽기 7장 1절) 예수님의 입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는 부모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세는 예수님에 앞서서 그의 길을 개척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선지자(先知者)로서 자녀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세워야 할 중심인물로서 아벨의 입장에도 설 수 있어야 하였다.

아벨은 아담 대신 부모의 입장에서 헌제(獻祭)를 하였기 때문에, 그 헌제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아담이 세워야 할 '믿음의 기대'와 함께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아벨 자신의 입장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과 동일한 원리에 의하여 이때에 있어서 모세도 부모와 자녀의 두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부모의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면, 그와 동시에 자녀의 입장에서 '실체헌제'를 하기 위한 아벨의 위치도 확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모세가 아벨의 위치를 확립한 후, 이스라엘민족이 가인의 입장에서 모세를 통하여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면 거기에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3. 메시아를 위한 기대

모세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고,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민족이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면, 그것이 바로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그 기대 위에서, 오시는 메시아로 말미암아 중생(重生)되어 원죄를 벗고, 하나님과 심정적인 일체를 이룸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하면 '완성실체'가 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

모세가 사탄세계인 애급(埃及)에서 이스라엘 선민을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로써 인도하여, 홍해(紅海)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노정은, 장차 예수님이 이 죄악세계(罪惡世界)에서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을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여, 이 죄악세계의 고해(苦海)를 건너고 생명의 물이 마른 사막을 돌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창조본연의 에덴으로 복귀케 될 그 노정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이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된 것과 같이,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도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3차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여기에서는 모세노정과 예수노정과의 세밀한 대조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것은 본절과 다음 절을 대조함으로써 소상히 밝혀질 것이다.

1.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간을 애급에서 고역(苦役)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초래된 민족적인 탕감기간(蕩減期間)은 끝나게 되었었다. 여기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領導)하여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인물이 되기 위하여, 민족적 탕감기간인 400년을 다시 개인적으로 탕감함으로써, 40일 사탄분립의 기대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모세는 이 목적과 함께, 타락전 아담이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워야 했던 40수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후편 제3장 제2절 Ⅳ) 사탄세계의 중심인 바로궁중에 들어가 40년을 지나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남 모르게 그의 유모(乳母)로 세워진 어머니로부터 선민의식(選民意識)에 불타는 교육을 받으면서 바로궁중생활 40년을 마친 후, 선민의 혈통에 대한 지조(志操)와 충절(忠節)을 변치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고난을 받기를 잠시 바로궁중에서 죄악의 낙(樂)을 누리는 것보다 기뻐하여, 그 가운데서부터 뛰쳐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히브리서 11장 24~25절). 이와같이 모세는 바로궁중생활 40년으로써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세워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였던 것이다.

(2) 실체기대

모세는 믿음의 기대를 세움으로써, 동시에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같이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게 되었었다. 이제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민족이, 그들의 부모의 입장인 동시에 자녀로서의 아벨의 입장에 있었던 모세에게, 믿음으로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음으로써 선(善)을 번식하게 되었더라면, 그 때에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민족적인 실체기대를 탕감복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와같이 모세를 따라 애급을 출발하여 가나안 복지로 돌아가는 기간은, 바로 그들이 이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모세는 자기의 동포가 애급인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불타는 동포애(同胞愛)를 이기지 못하여 그 애급인을 쳐 죽였던 것이나(출애굽기 2장 12절), 실상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참경(慘景)을 보시고(출애굽기 3장 7절) 울분을 느끼신 그 심정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모세를 중심하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모세를 따라서 사막을 횡단하는 가나안 복귀노정을 성공적으로 출발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사실을 결정짓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모세가 이와 같이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인 것은, 첫째로 천사장(天使長)이 인간시조를 타락시켰고 또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사탄이 장자(長子)의 입장에서 인류 죄악사(罪惡史)를 이루어 나오고 있으므로, 하늘편에서 장자의 입장에 있는 사탄편을 쳐서 탕감복귀하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모세로 하여금 바로 궁중에 대한 미련을 끊고, 다시는 그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입장에 서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의 애국심을 보여줌으로써 그를 믿게 하시기 위함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하나님이 애급인의 장자와 그 가축의 맏것을 전부 쳐버렸던 이유도 이러한 데 있었다.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모세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를 더 존경하고 더 믿고 모시며 따랐더라면, 그들은 모세를 중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홍해(紅海)를 건너거나 시내광야를 도는 일이 없이 바로 블레셋으로 가는 곧은 길을 통하여 가나안복지로 들어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정은 야곱의 하란 21년노정을 탕감하는 21일 노정이 되었을 것이었다.

출애굽기 13장 17절에는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급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보아서 하나님은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블레셋 땅의 곧은 길로 통하게 하려 하셨던 것인데, 이스라엘민족이 모세를 불신함으로 말미암아 이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보지 못하고 말았고,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때는 제1차 때와 같이 그들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가나안 복귀의 도중에서 애급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여 홍해(紅海)를 건너고 광야를 돌아서 가도록 인도하셨던 것임을 알 수 있다.

(3)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이는 것을 보고 도리어 그를 오해하고 나쁘게 발설하였으므로, 바로는 이 소문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2장 15절). 이에 모세는 할 수 없이 바로의 눈을 피하여 이스라엘민족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게 되었으므로 그 실체기대는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며,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복귀노정은 2차 내지 3차까지 연장되게 되었던 것이다.

2.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모세가 그의 '믿음의 기대'를 위하여 세웠던 바로궁중 40년기간은,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므로 모세가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출발하기 위하여는 사탄 침범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로 궁중생활 40년기간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기간을 다시 찾아 세워,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 다시 40년기간을 보내게 되었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40년기간에는 이스라엘 민족도 모세를 불신한 죄로 더욱 더 비참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으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새로이 세웠기 때문에,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애급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급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급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애굽기 3장 7~10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2) 실체기대

모세는 미디안 광야 40년으로써, '40일 사탄분립기대'를 다시 만들어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다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였다. 따라서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경우와 같이, 가인의 입장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벨의 입장에 있는 모세를 절대로 믿고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여기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하였을 때에,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죽였던 것과 같은 목적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때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3대 기적(삼대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십재앙(十災殃))의 권능을 주시어 애급인을 치게 하심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모세가 사탄편을 쳐야 하는 이유는 위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첫째 사탄편이 침범한 장자의 입장을 탕감복귀하고, 둘째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고, 셋째 모세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1~9절).

그리고 모세가 애급인을 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인한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 탕감기간을 다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30년이나 더 고역을 당함으로써(출애굽기 12장 41절), 그들의 탄식이 하나님에게 상달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자아내게 되었었다는 사실이다(출애굽기 2장 24~25절).

3대기적은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에 있어서 무엇을 예시하셨던가?

첫째 기적은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보여주신대로(출애굽기 4장 3~9절) 모세의 명령에 의하여 아론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던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되었다. 이것을 본 바로도 그의 술객(術客)들을 불러 지팡이를 던지게 하자 그것들도 역시 뱀이 되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변하여서 된 뱀이 그들의 것을 모두 삼켜버렸다(출애굽기 7장 10 ~12절).

그러면 이 기적(奇蹟)은 무엇을 예시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구주(救主)로 오셔서 사탄세계를 멸하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하나님 대신 신(神)으로 세워진 모세(출애굽기 7장 1절) 앞에서 기적을 나타냈던 그 지팡이는, 장차 하나님 앞에서 이렇듯 기적을 나타내실, 권능적인 면에서의 예수님을 상징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또 지팡이는 대신 의지자며 대신 보호자로서 불의(不義)를 쳐서 바른 길잡이의 사명을 하는 것이어서,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전 인류 앞에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오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사명적인 면에서의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상징하는 지팡이가 뱀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또한 뱀의 역할도 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라고, 자기를 뱀으로 비유하셨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도 하셨다(마태복음 10장 16절). 이것은 원래 인간조상이 악한 뱀에게 꼬임을 당하여 타락되었으니, 이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한 지혜의 뱀으로 오셔서, 악한 인간들을 꼬여 선으로 인도해야 되기 때문에, 제자들도 선한 뱀으로 오신 예수님의 지혜를 본받아 악인(惡人)들을 선도(善導)해야 된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한편 또 모세의 뱀이 술객의 뱀을 삼켰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 뱀으로 오셔서 사탄 뱀을 삼켜 멸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둘째 기적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모세가 첫번 손을 품었을 때 그 손이 문둥병에 걸렸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그 손을 다시 품었을 때, 그 병든 손이 깨끗이 나아버렸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6~7절).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후아담으로 오셔서, 후해와의 신성(神性)이신 성신(전편 제7장 제4절 Ⅰ)과 더불어 속죄(贖罪)의 역사(役事)를 하시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다.

첫번 손을 품음으로써, 고칠 수 없는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은, 처음에 천사장(天使長)이 해와를 품음으로써 인간이 죽음의 입장으로 타락해버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손을 다시 품어서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것은 인류의 부성신(父聖神)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의 모성신(母聖神) 되신 성신(전편7장 제4절 Ⅰ)을 복귀하여,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마태복음 23장 37절) 전 인류를 다시 품어 중생(重生)시킴으로써, 완전복귀한다는 것을 표시하신 것이었다.

셋째 기적은 강물을 육지에 부어서 피가 되게 한 것이었다(출애굽기 4장 9절). 이것은 무기물()과 같은 생명 없는 존재가 유기물()과 같은 생명 있는 존재로 복귀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물은 타락되어 생명을 잃은 세상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요한계시록 17장 15절) 이 기적은 장차 예수와 성신이 오셔서 생명을 잃어버린 타락인간들을 생명 있는 자녀로 복귀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위와 같은 3권능을 나타내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장차 예수님과 성신이 인류의 참부모로 오셔서, 전 인류를 자녀로서 복귀하고, 사탄에게 빼앗겼던 창조본연(創造本然)의 4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할 수 있는 상징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다음으로 모세가 하나님에게 자기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 형 아론(출애굽기 4장 14절)과 아론의 누이가 되는 여선지(女先知) 미리암(출애굽기 15장 20절)을 주셨다. 이것은 장차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과 성신(요한복음 1장 14절)이 오셔서, 타락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린 인간을 말씀의 실체로 복귀하실 것을 형상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론과 미리암이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입장인 모세의 뜻을 받들고, 그의 대신으로 영도(領導)의 사명을 했던 것은, 장차 예수님과 성신(聖神)이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대신 속죄(贖罪) 사명을 하실 것을 형상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는 도중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 그 때에 모세는 그의 처(妻) 십보라가 그의 아들을 할례(割禮)함으로써 죽음을 모면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24~26절). 모세는 할례로써 그 시험을 이겼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살아났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이 애급(埃及)에서 나올 수 잇게 되었으니, 이것도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면 할례는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인간조상은 사탄과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맺음에 따라 양부(陽部)를 통하여 사망의 피를 받았었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그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 양부를 쳐서 피를 냄으로써, 그 사망의 피를 뽑았다는 표시의 조건으로 할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할례의 근본 의의는 첫째로 사망의 피를 뽑는 표요, 둘째로는 남자의 주관성(主管性)을 다시 찾는 표이며, 셋째로는 본성(本性)의 자녀의 입장을 다시 찾는 약속의 표인 것이다. 그런데 할례의 종류에는 마음할례(신명기 10장 16절), 육신할례(창세기 17장 10절), 만물할례(레위기 19장 23절) 등 세 종류가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10재앙(十災殃)의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구출하셨으니(출애굽기 7장 10~12장 36절), 이것도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로써 하나님의 선민(選民)을 구원하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었다. 야곱이 하란에서 21년간의 고역(苦役)을 할 때에, 라반이 응당 야곱에게 주어야 할 품삯을 주지 않고 열 번이나 그를 속였었다(창세기 31장 7절). 그렇기 때문에 야곱노정을 걷는 모세노정에 있어서도,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도에 넘는 고역을 시켰을 뿐 아니라, 열 번이나 그들을 놓아 준다고 하면서 매번 속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탕감으로 10재앙을 내려 바로를 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면 이 재앙(災殃)들은 또 무엇을 예시(豫示)하였는가를 알아보자.

애급 편에는 3일간의 어둠이 있었고 이스라엘에게는 3일간의 광명이 있었으니,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사탄편은 흑암이요, 하늘편은 광명으로 분기(分岐)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애급(埃及)의 장자(長子)와 육축(育畜)의 맏것을 모조리 쳤으나 이스라엘은 양(羊)의 피로써 이것을 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탄편에 있어서의 장자는 가인의 입장이었으므로 이것을 쳐서 아벨의 입장인 차자(次子)로 하여금 장자의 입장을 복귀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 재앙도 역시 장차 예수님이 오시면 당초에 장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섭리노정(攝理路程)을 먼저 출발한 사탄편은 망하고, 차자의 입장인 하늘 편은 예수님의 피의 대속(代贖)으로 인하여 구원(救援)을 받는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는 또 애급에서 많은 재물을 취해 가지고 왔는데(출애굽기 12장 35~36절), 이것도 장차 있을 예수님의 만물복귀(萬物復歸) 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재앙의 이적을 내리실 때마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剛愎)하게 하셨으니(출애굽기 10장 27절), 그이유는 첫째, 바로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어, 하나님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출애굽기 10장 1~2절), 둘째로는 바로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하여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잡다가 할 수 없이 단념하게 하심으로써,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이스라엘이 애급을 떠난 후에도 그들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로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하여 애급에 대한 미련을 끊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 죽이는 것으로써 그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를 도리어 불신하였기 때문에, 이 노정은 출발도 해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은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보여주신 3대 기적(삼대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十災殃)을 보고, 모세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진정한 이스라엘의 영도자(領導者)라는 것을 믿게 되었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 위에서 아벨의 입장을 확립한 모세를 믿고 따르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드디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일시적으로 이와같이 모세에게 순종굴복(順從屈伏)하였다고 해서 그것으로 곧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는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사탄이 침범하여, 오랜 섭리의 기간을 사탄에게 내주었던 것이므로, 모세에 대하여 가인의 입장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기간'을 민족적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이 광야노정의 전 기간을 두고 순종과 굴복으로 모세를 믿고 따라가지 않고서는 '타락성을 벗기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하여 광야노정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는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제2차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있어서는 그 1차 때보다도 더 큰 은사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으므로, 제2차 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야 할 탕감조건(蕩減條件)은 더 가중되었던 것이다. 즉 제1차 노정에 있어서는 그들이 모세를 믿고 따르기만 하였더면, 블레셋의 곧은 길로 인도되어 야곱의 하란노정 기간수인 21일간이면 가나안 복지(福地)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그런데 제2차 노정에 있어서는 출애굽기 13장 17절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같이, 만일 그들이 블레셋 땅의 곧은 길로 인도되면 전쟁을 보고 두려워함으로써, 제1차 노정 때와 같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 애급땅으로 되돌아갈까 염려하시어, 하나님은 그들을 이 길로 인도하시지 않고 홍해(紅海)를 건너고 시내광야를 돌아 21개월 걸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노정을 취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되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21개월 광야노정(曠野路程)을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미 위에서 논술한 바와같이, 이 노정이 어떻게 장차 오실 예수님을 중심한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본보기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에게 굴복한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거기에서 희생(犧牲)을 드릴 것을 허락했을 때에, 모세는 그리함은 불가하나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급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급사람이 보는 데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대로 하려 하나이다(출애굽기 8장 26~27절)라는 말로써 바로을 속여 자유허여(自由許與)의 3일 간을 얻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나왔다.

3일기간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헌제를 위하여 사탄분립에 요(要)한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 후 이것은 섭리노정(攝理路程)을 출발할때마다 사탄 분립에 필요한 탕감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야곱이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려 할 때에도, 라반을 속이고 하란을 떠나 사탄을 분립한 3일기간이 있었다(창세기 31장 19~22절).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에게도 그가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기 위하여서는, 바로를 속이고 자유행동을 취하여 사탄을 분립하여 3일기간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후일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사탄분립을 위한 3일기간이 있은 후에야 영적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출발을 하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도 되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장정(壯丁) 60만명이 라암셋을 출발한 것은 정월 15일이었다(출애굽기 12장 6~37절, 민수기 33장 3절).

이스라엘 민족이 3일기간을 뜻맞게 세워 숙곳에 이른 후에는, 하늘이 은사를 내리시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셨다(출애굽기 13장 21절). 모세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한 낮()의 구름기둥은, 장차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으로 인도할 예수님을 표시하고, 밤()의 불기둥은 여성신(女性神)으로서 그들을 인도할 성신(聖神)을 상징했던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지팡이로 홍해(紅海)를 가름으로써 이것을 육지와 같이 건넜으나 그들의 뒤를 추격해 오던 애급의 병거는 다 수장(水葬)되어 버리고 말았었다(출애굽기 14장 21~28절).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같이 바로 앞에 선 모세는 하나님을 상징하였고(출애굽기 7장 1절),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적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 사탄은 예수님을 따라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걷는 신앙자들의 뒤를 추격할 것이지만, 지팡이의 사명자로 오시는 예수님이 철장(鐵杖)으로(요한계시록 2장 27절, 시편 2장 9절) 그들 앞에 가로놓인 이 고해(苦海)의 세상을 치면, 이 고해도 평탄한 길로 갈라질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갈 길은 열리고 추격하는 사탄은 멸망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전편 말세론(末世論)에서 이미 밝힌 바와같이, 철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7장 15절에는 이 죄악세상을 '물'로 비유하였다. 우리가 이 세상을 고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통념(通念)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건너서 애급(埃及)을 떠난 후 제2월 15일에 신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6장 1절). 이때부터 하나님은 그들이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만나와 메추리를 내려 먹이셨으니(출애굽기 16장 35절), 이것은 장차 예수님의 살(만나)과 피(메추리)를 모든 인간에게 주실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 48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광야에서 떠나 르비듬에 장막(帳幕)을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호렙산의 반석(磐石)을 쳐서 물을 내어 그들에게 먹이셨다(출애굽기 17장 6절). 고린도전서 10장 4절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으니, 이 행사는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생명수(生命水) 샘물로(요한복음 4장 14절) 모든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다음에 시내산에서 받게 되는 두 석판(石板)도 예수와 성신(聖神)을 상징하지만, 반석(磐石)은 석판의 뿌리가 되므로 이것은 또한 하나님도 상징한다. 모세가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 살린 터전이 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모세가 석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법궤(法櫃)와 성막(聖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르비듬에서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손을 내리면 패하였다. 그러므로 아론과 훌은 돌을 쌓아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그의 손을 내려지지 않도록 좌우에서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서 싸운 여호수아는 아말렉왕과 그 백성을 쳐서 승리하였다(출애굽기 17장 10~13절). 이것도 장차 예수께서 오실 때에 되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으니, 여호수아는 예수를 믿는 신앙자를, 아말렉은 사탄세계를, 그리고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고 서 있는 것과 그 앞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쳐서 멸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수님과 성신의 3위신(三位神)을 모신 신앙자들은 그 앞에 오는 모든 사탄을 멸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3) 성막을 중심한 복귀섭리

우리는 먼저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받게 된 경위를 알아야겠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말렉과 싸워서 승리한 후 제3월 초에 시내광야에 이르렀다(출애굽기 19장 1절). 여기에서 모세는 장로(長老) 70인을 거느리고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뵈었다(출애굽기 24장 9~10절). 하나님은 특별히 모세를 시내산정(山頂)으로 부르시사, 석판에 기록한 십계명(十誡命)을 받기 위하여 40주야의 금식(禁食)을 하라고 명하시었다(출애굽기 24장 18절). 모세는 시내산에서 금식을 하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법궤와 성막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출애굽기 25장 31장). 그리고 40일간의 금식이 끝났을 때 모세는 십계명을 기록한 두 석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1장 18절).

모세가 이 석판(石板)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들은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埃及)에서 인도한 신(神)이라고 섬기고 있었다(출애굽기 32장 4절). 이것을 본 모세는 대로(大怒)하여 손에 들었던 석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19절).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처음것과 같은 석판을 깎아 만들어 오면 거기에 다시 십계명의 말씀을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 이 말씀을 받은 모세가 다시 40주야를 금식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의 석판에 다시 십계명을 기록하여 주셨다(출애굽기 34장 28절). 모세가 이 석판을 가지고 다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났을 때 비로소 그들은 모세를 받들게 되어 법궤를 만들고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35장 ~ 40장).

. 석판 성막 법궤 등의 의의와 그 목적                 차트

석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세가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을 받았다는 것은, 타락으로 인하여 제물로만 하나님을 대해 오던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는 지나가고, 타락인간이 말씀을 복귀하여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에로 들어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후편 서론(緖論)에서 밝힌 바와같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던 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었더라면, 그들은 말씀의 완성실체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됨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이제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써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石板)을 찾았다는 것은, 사탄세계로부터 잃어버렸던 아담과 해와를 상징적인 말씀의 실체로 복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말씀을 기록한 두 석판은 복귀한 아담과 해와의 상징체로서 장차 말씀의 실체로 오실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했던 것이다. 성경에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2장 17절) 또 반석은 곧 그리스도(고린도전서 10장 4절)라고 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석판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결국 이것들은 또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것이되기도 한다. 339

다음으로, 성막(聖幕)의 의의는 무엇이었던가?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聖殿)을 자기의 몸으로 비유하셨다(요한복음 2장 21절). 그리고 또 예수님을 믿는 성도(聖徒)들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던 것이다(고린도전서 3장 16절). 그러므로 성전은 예수님의 형상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제1차 가나안복귀에 성공하였더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곧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제1차 노정은 출발조차도 해 보지 못하였고, 제2차노정에서는 홍해(紅海)를 건너 광야에서 떠돌아다니게 되었으므로 성전은 건축하지 못하고 그 대신 성막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님의 상징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실 때에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애굽기 25장 8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막은 지성소(至聖所)와 성소(聖所)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지성소는 대제사장(大祭司長)만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헌제(獻祭)를 하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곳이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영인체(靈人體)를 상징한 것이었고, 성소는 보통 제사 때에 들어가는 곳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성소는 무형실체세계(無形實體世界)를, 성소는 유형실체세계(有形實體世界)를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둘로 갈라졌다는 것은(마태복음 27장 51절),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영적 구원섭리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영인체와 육신 또는 하늘과 땅이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법궤는 무엇이었던가? 법궤는 지성소에 안치하는 언약궤(言約櫃)로서, 그 속에는 예수님과 성신, 따라서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두 석판(石板)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또 거기에는 광야노정(曠野路程)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생명의 양식이었고, 또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만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표상(表象)하는 금항아리에 담긴 것이 들어 있었으며, 또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던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브리서 9장 4절)가 거기에 들어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법궤는 크게는 천주(天宙)의, 작게는 성막(聖幕)의 축소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법궤 위에는 속죄소(贖罪所)가 덮였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금으로 두 그룹을 쳐서 만들어 속죄소의 좌우에 덮으면, 두 그룹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어, 이스라엘족속에게 전할 모든 말씀을 주시겠다고 하셨다(출애굽기 25장 26~22절). 이것은 장차 두 석판으로 표시된 예수님과 성신이 오시어 역사하시게 됨으로써 속죄(贖罪)가 성립되면, 그 속죄소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동시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던(창세기 3장 24절)이 좌우로 갈라져서 누구든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를 주신 목적은 어디 있는가? 이스라엘민족은 아브라함의 상징헌제(象徵獻祭) 실수로 초래된 400년 탕감기간을 마치자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민족(埃及民族)을 치고, 추격해 오던 애급의 수 많은 군사와 병거를 수장(水葬)하고서 홍해(紅海)를 건너 광야길로 나섰다. 하나님의 뜻으로 보아서도 그러하지만, 이처럼 원수를 맺고 떠난 애급이었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나안 복귀는 기필코 이루어져야 하는 노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출발을 위한 섭리'를 그처럼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으로 하셨고, 또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환경 가운데로 몰아넣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모두 불신으로 흘러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최후에는 모세마저 불신의 행동을 취할지도 모르는 터이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비록 사람은 변하여도 변할 수 없는 그 어떠한 신앙의 대상을 세워놓으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즉 언제나 단 한사람만이라도 이것을 절대로 신봉(信奉)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신앙의 대상을 마치 바톤과 같이 이어받게 하면서 섭리(攝理)의 뜻을 이루어 나아가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의 대상을 무엇으로 세워야 할 것이었던가? 석판이 들어있는 법궤를 안치함으로써 메시아를 상징하였던 성막(聖幕)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민족이 성막을 지었다는 것은, 벌써 메시아가 상징적으로 강림(降臨)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이, 이 성막을 메시아와 같이 충성으로 받들어 가나안 복지(福地)로 복귀하면 민족적인 실체기대는 그 때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더라도 모세 한 사람만이라도 남아서 그 성막을 지키면, 그 민족은 다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워가지고 성막을 모시는 모세를 중심한 그 기대 위에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설혹 모세마저 불신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민족 중의 어느 한 사람이라도 모세를 대신하여 끝까지 성막을 지킨다면, 또 그를 중심하고 불신으로 돌아간 나머지 전민족을 복귀하는 섭리를 하실 수 있는 것이었다. 342

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면 모세의 가정은 성막 대신이요, 모세는 석판과 법궤 대신이며, 또 모세의 가법(家法)은 천법(天法) 대신이 되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석판이나 법궤나 성막이 필요 없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聖殿)을 지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는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감에 따라 그들을 구원(救援)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었다. 성막은 예수님과 성신(聖神)의 상징적인 표시체로서 성전을 지을 때까지 필요한 것이었고, 성전은 예수님과 성신의 형상적 표시체로서 실체성전(實體聖殿)이신 메시아가 강림하실 때까지 필요했던 것이다.

. 성막을 위한 기대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맞기 위하여서도 '성막을 위한 기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는,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와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워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하여서 이 두 기대를 세울 수 있었던가?

모세가 성막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금식기도(禁食祈禱)로서 '40일 사탄분립기간'을 뜻맞게 세우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스라엘 민족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성막이상(聖幕理想)을 세워 나아가는 모세에게 믿음으로써 순종굴복(順從屈伏)하면, 성막을 위한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지고, 따라서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성막이라 함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성판과 법궤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a. 제1차 성막을 위한 기대

인간은 6일만에 창조된 말씀의 실체이다(요한복음 1장 3절). 따라서 이와같이 창조되었다가 타락된 인간을 복귀하시기 위한 재창조(再創造)의 말씀을 주시려는 섭리를 하시기 위하여는, 사탄의 침범을 당한 창조기간(創造期間)의 6수를 성별(聖別)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6일 동안 여호수아의 영광의 구름으로 시내산을 덮으심으로써 성별하신 후, 제7일내에 그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셨다(출애굽기 24장 16절). 모세는 이때부터 40주야를 금식하였던 것이다(출애굽기 24장 18절). 그것은 이미 위에서 상세히 논한 바와같이 이스라엘민족이 홍해를 건너 후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상징적 메시아인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은, 저들이 일시적으로 모세를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聖殿)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때까지 계속하여 그러한 입장에 서 있어야만, 그것이 성립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논한 바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막(聖幕)을 세우기 위하여, '타락성을 벗기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는 데 있어서도,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을 지나서 성막을 세울 때까지, 그를 믿고 모시고 순종해야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가 금식기도(禁食祈禱)를 하는 기간에, 모두 불신으로 돌아가서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인도해 낸 신(神)이라고 섬겼던 것이다(출애굽기 32장 4절).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성막을 위하여 세워야 했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도 이룰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적과 기사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주셨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말씀의 터를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인간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으로 그것을 찾아야 할 이 기간에 있어서만은 하나님도 그들의 행동을 간섭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상(偶像)을 만들어 놓고 춤을 추는 백성들을 보자마자 모세는 대로(大怒)하여 손에 들었던 두 석판(石板)을 산 아래로 던져서 깨뜨렸다(출애굽기 32장 19절). 그리하여 이것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 세웠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에 사탄이 침범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두 석판(石板)은 이미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후아담과 후해와로서 복귀될 예수님과 성신(聖神)을 상징한다. 모세가 예수님과 성신을 상징하는 두 석판을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깨뜨렸다는 것은, 다음에 예수님이 오실 때도 만약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심으로써, 예수님과 성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본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를 중심하고 행해진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불신은, 모세가 '40일 사탄분립기간'을 세운 후,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에게 순종케 하심으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루시려던 하나님의 섭리를 좌절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루시려는 섭리는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2차 또는 3차까지 연장되어 나아갔던 것이다.

b. 제2차 성막을 위한 기대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석판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불신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르비듬에서 석판의 뿌리 되는 반석(磐石)의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 있었기 때문에(출애굽기 17장 6절), 모세가 석판을 깨뜨린 후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석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어 오면 처음 석판에 써주시었던 것과 같은 말씀을 다시 써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출애굽기 34장 1절). 그러나 여기에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다시 찾아 세워, 성막(聖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지 않고서는, 석판을 중심한 성막을 복귀할 수 없기 때문에, 모세는 다시 40주야를 금식한 후에 십계명(十誡命)의 말씀을 기록한 제2차 석판과 성막이상(聖幕理想)을 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출애굽기 34장 28절).  346

한번 깨뜨린 석판을 40주야의 금식기도로써 복귀하였다는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도 저를 믿는 성도들이 40일 사탄분립기대로써 그를 맞을 수 있는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면, 그 기대 위에 재림(再臨)하셔서 구원섭리(救援攝理)를 다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모세가 제2차로 석판을 중심한 성막이상을 복귀하던 '40일 사탄분립기간'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에게 순종굴복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은 모세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성막을 건축하였던 것이니, 때는 제2년 정월(正月) 초하루였던 것이다(출애굽기 40장 17절). 이리하여 이스라엘 선민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를 이룸으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이룩한 터전 위에서 성막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논한 바와같이, 그들이 성막을 짓는 것만으로는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실체기대(實體基臺)'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가 성전을 짓고 메시아를 맞을 때까지, 변치않고 이 성막을 자기들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모시고 받들어야 하였던 것이다.

2년 2월 20일, 이스라엘 민족은 구름기둥의 인도를 따라 성막을 중심하고 시내광야에서 출발하였다(민수기 10장 11~12절). 그러나 그들은 다시 불신으로 흘러 모세를 원망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시어 불로써 진(陳) 끝을 사르기도 하셨다(민수기 11장 1절). 이스라엘 민족은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통곡하며, 만나 외에는 생선도 외도 수박도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애급땅을 그리워하였다(민수기 11장 4~6절).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이 세우고 나아가야 할 성막을 위한 기대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게 되어, 이 기대를 복귀하려는 섭리는 다시 제3차로의 연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c. 제3차 성막을 위한 기대

이스라엘 미족이 다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들을 중심한 제2차 성막을 위한 기대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었다. 그러나 모세의 변함없는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 성막은 여전히 모세를 중심한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 서 있었고, 또 이스라엘 민족은 이미 르비듬에서 성막의 중심인 석판(石板)의 뿌리되는 반석(磐石)의 샘물을 마신(출애굽기 17장 6절) 터전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세우고, 성막을 위한 기대를 탕감복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위한 조건으로서 주신 것이 40일 정탐기간(偵探期間)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각 지파로부터 족장(族長) 한 사람씩을 모든 12명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어(민수기 13장 1절) 40일 동안을 정탐하게 하셨다(민수기 13장 25절). 그러나 정탐에서 돌아온 12명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신적인 보고를 하였다. 즉 그 땅의 거민(居民)은 강하고 성읍(城邑)이 견고할 뿐 아니라(민수기 13장 28절),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長大)하여 자기들은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더라(민수기 13장 32~33절)고 하면서, 이스라엘은 그 성과 그 백성을 공격할 수 없다고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원망하고 통곡하면서 새로이 한 장관을 세워 애급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떠들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 백성들은 이미 그 보호자가 떠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밥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반면에 자기들은 여호와가 보호자시니 두려워 말고 그들을 공격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자고 외쳤던 것이다(민수기 14장 9절).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도리어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였다(민수기 14장 10절). 이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시어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민수기 14장 11절)고 하시면서,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그 40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민수기 14장 31~3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3차 성막을 위한 기대도 복귀할 수 없게 되어, 제2차 21개월 광야노정(曠野路程)은 제3차 40년 광야노정으로 연장되었다.

(4)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성막을 위한 기대'가 3차나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墮落性)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은 세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제2차로 세우려던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조성하지 못하게 되어,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로 연장되었던 것이다.

3.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이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세웠던 미디안 광야 40년 기간은 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偵探) 40일 기간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함으로써, '날'을 '해'로 환산하여 광야를 떠돌아 다니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오는 40년 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여 제3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한 기간이었다. 따라서 이 광야 40년 기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聖幕)을 모시고 표류하다가 가데스바네아로 다시 돌아온 모세는,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민족적인 '실체헌제(實體獻祭)'를 위한 아벨의 입장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실체기대

이스라엘 민족이 정탐 40일 노정을 믿음과 순종으로 찾아 세우지 못하고 불신과 반역(反逆)으로써 실패하였으므로 '성막을 위한 기대'는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제2차 노정을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성막을 충성으로 받들고 모셨던 모세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는 여전히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 터전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표류(광야표류(曠野漂流))의 40년기간을, 변치않는 신앙으로 성막을 받들고 있는 모세에게 순종굴복함으로써 정탐 40일에 침범한 사탄을 분립하는 기대를 세우면, 그 때에 성막을 위한 '실체기대'가 조성되는 동시에 성막을 위한 기대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성막을 중심한 모세를 받들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있어서의 '실체기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광야 40년 표류기간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제3차 노정에 있어서의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한 기간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워가지고 제2차 노정에 그들이 모세를 받들고 성막을 건축하던 입장으로 돌아감으로써, 제3차노정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기 위한 기간이었다.

)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받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밝힌 바 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제2차 민족적 가나안복귀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 '출발을 위한 섭리'로서 나타내셨던 3대 기적(삼대기적(三大奇蹟))을 불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들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40일 시련기간을 거치게 하신 후에,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3대 은사(三大恩賜)를 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또 야곱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복귀하려 하였을 때, 라반이 야곱을 열번이나 속였던 것을(창세기 31장 7절)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10재앙(십재앙(十災殃))을 내리셨던 것인데, 이스라엘이 또 이것을 분신하는 입장에 섰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십계명(十誡命)의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심으로써 3대 은사와 십계명을 지키게 되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埃及)을 출발하던 입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민족이 믿음과 순종으로 모세를 따라 광야 40년의 탕감기간을 마치고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온 후,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받을었더면, 그들은 제2차노정에서 3대 기적과 10재앙으로 애급을 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의 목적을 이루었던 입장에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석판은 법궤의 축소체요 법궤는 성막의 축소체이므로 결국 석판은 성막의 축소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법궤나 성막은 석판이나 그의 뿌리 되는 반석(磐石)으로써 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가데스바네아를 출발하는 것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믿음과 충성으로 성막을 받들고 모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면, 그 때에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이 세워짐으로써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어떻게 이루려 하셨던가? 광야 40년기간을 뜻앞에 세우지 못하고 다시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민수기 20장 4~5절)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회중(會衆)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여가지고 그들에게 마시게 하셨다(민수기 20장 8절).

만일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한 번 쳐서 샘물을 내어 먹임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권능을 새로이 깨달아 그를 중심하고 하나가 되었더면, 그들은 모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서,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모세를 믿고 순종하여 그를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갔더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게 됨으로써, 제3차 노정의 모세를 중심한 실체기대를 이루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물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백성을 보자, 격분하여 치밀어 오르는 혈기(血氣)를 누르지 못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수기 20장 12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이와 같이 한 번 쳐야 할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써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기대'도 이루지 못하게 되어, 드디어 약속받은 가나안 복지(福地)를 눈 앞에 바라보면서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다(민수기 20장 24절, 민수기 27장 12~14절).

우리는 이제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 이유와, 두 번 친 것이 어떻게 되어 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겠다.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서는 예수님을 흰 돌로 상징하였고, 한편 또 고린도전서 10장 4절을 보면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타락론(墮落論)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생명나무로 오신 분이시므로(요한계시록 22장 14절), 반석은 곧 생명나무이기도 하다. 한편 창세기 2장 9절의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있어서의 장래(將來)할 완성한 아담을 상징한 것으로서, 이 생명나무도 또한 반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반석은 그 완성한 아담을 상징하기도 하다.

그런데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장차 반석이 될 그 아담을 쳐서 타락시켰다. 따라서 아담은 생명나무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창세기 3장 24절), 그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생명수(生命水) 샘물을 영원히 그 자손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반석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모세가 지팡이로 치기 이전, 샘물을 내지 못하던 반석(磐石)은 바로 타락된 아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탄이 장차 생명수를 낼 수 있는 반석으로 성장하고 있던 아담을 한 번 쳐서 타락시킴으로써, 그를 '샘물을 내지 못하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샘물을 내게 함으로써, '샘물을 낼 수 있는 반석'으로서의 아담을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려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한 번 쳐서 생물을 내게 된 반석은 바로 생명나무로 오셔서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장 14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반석을 한번 치는 것은 타락된 제1아담을 완성한 제2아담 예수님으로 탕감복귀(蕩減復歸)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허락된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가 하늘편에서 한 번 쳐서 샘물을 내게 된 반석을 또 한 번 친 행동은 장차 복귀한 반석으로 오셔서 만민에게 생명수 샘물을 먹여 주실 예수님을 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것을 목격한 모세가 혈기(血氣)로써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반석의 실체되시는 예수님 앞에 사탄이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조건을 성립시킨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되었던 것이다.

모세가 석판(石板)을 한번 깨뜨린 것은 복귀할 수 있었으나, 반석을 두번 친 실수는 복귀할 수 없었으니 그 이유는 어디 있었던 것인가?

복귀섭리(復歸攝理)로 보아 석판과 반석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십계명(十誡命)이 기록된 석판은 모세의 율법(律法)의 중심이요, 따라서 구약성서(舊約聖書)의 중심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이 석판이상(石板理想)을 믿음으로써 그 시대의 구원권내(救援圈內)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석판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반석(磐石)은 곧 그리스도라고 하신 말씀대로, 반석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동시에 석판(石板)의 뿌리가 되기 때문에, 그것은 석판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뿌리 곧 하나님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판은 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내적인 것이다. 또 석판은 몸으로 비유한다면 반석은 마음에 해당하며, 석판은 성소(聖所)라고 한다면 반석은 지성소(至聖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석판을 땅이라고 한다면 반석은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석은 석판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내적인 표시체인 것이다.

이와같이 석판은 예수님에 대한 외적인 표시체였으므로,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상징하는 모세 앞에(출애굽기 4장 16절, 출애굽기 7장 1절), 예수님의 외적인 표시체로 세워졌던 아론을 상징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이 아론을 시켜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출애굽기 32장 4절), 아론이 깨어짐에 따라서 석판도 깨어지게 되었었다. 그러나 아론이 르비듬에서 반석 샘물을 마신 터전 위에서(출애굽기 17장 6절) 회개함으로써 소생(蘇生)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론을 상징하는 석판도 반석 샘물의 내적인 터전 위에서 다시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움으로써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석판의 뿌리가 되는 반석은 그리스도와 그의 뿌리되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친 행동은 만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모세가 반석 2타(磐石二打)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던가?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던 것은 불신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혈기(血氣)를 참지 못한 결과였기 때문에(시편 106편 32~33절), 이 행동은 결국 사탄의 입장에서 행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석으로 이루시려던 '출발을 위한 섭리'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한 결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이렇듯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외적인 행동은 사탄의 행동으로 돌아갔으나, 내적인 실제에 있어서는 그 반석에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을 먹여 살렸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埃及)에서 나온 외적인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이 예정하신 가나안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모세도 120세를 1기로 소망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신명기 34장 4~5절). 그러나 여호수아가 모세의 대신으로(민수기 27장 18~20절), 반석 샘물을 마시고 성막을 받드는 광야노정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민수기 32장 11~12절).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행동이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 반석에서는 샘물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려면 어떻게 되어 거기에서 샘물이 나올 수 있었던가?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는 일찌기 르비듬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시게 함으로써 반석 샘물의 터전을 마련한 바 있었던 것이다(출애굽기 17장 6절). 그리고 이 터전 위에서 세워진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는, 다른 모든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40일 금식기도(禁食祈禱)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그것을 굳게 지켜온 모세는 한 사람의 믿음에 의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까지 계승되어 왔었다. 그 뒤에 모세마저 불신의 입장으로 돌아갔지만 하늘을 대한 그의 심정은 변하지 않았고 또 여호수아가 그의 정탐(偵探) 40일로써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변치 않는 신앙으로 석판과 성막과 법궤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르비듬에서 세웠던 반석(磐石) 샘물의 터전도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그대로 남아졌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모세의 외적인 불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제2차 반석이 외적으로는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으나, 그의 내적인 불변의 심정과 여호수아의 믿음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내적으로는 샘물을 내어 마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은 결과적으로 사탄의 입장에서 친 것이 되어 그 돌은 사탄이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돌의 실체로 오셨던 얘수님은, 그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서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자, 일찍이 저들이 광야(曠野)에서 잃어버렸던 이 돌을 몸소 찾으시려고 광야로 가셨었기 때문에, 사탄으로부터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시험을 제일 먼저 받으셨던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외적으로는 혈기(血氣)를 내어 반석을 두 번 쳤기 때문에,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광야에서 죽었으나, 내적으로는 그의 불변의 심정으로 인하여 반석의 샘물을 내어 먹였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장차 반석의 실체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 때에도, 유대민족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예수님도 그의 육신은 사탄의 침범을 받아 십자가에 달리시게 됨으로써, 영육(靈肉) 아우른 세계적 가나안 복귀는 완수하지 못하시고, 부활(復活)하심으로써 영적으로만 그것을 완수 하게 되시리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모세가 반석(磐石)을 두 번 친 후, 하나님은 불신(不信)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에게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어 죽이게 하셨다(민수기 21장 6절). 그러나 이스라엘이 회개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여,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만은 구원을 받도록 하셨다(민수기 21장 9절). 이 불뱀은 해와를 타락시킨 옛 뱀 곧 사탄을 상징하였고(요한계시록 12장 9절), 장대 끝에 매단 구리뱀은 장차 하늘 뱀으로 오실 예수님을 상징했던 것이다(요한복음 3장 14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불신으로 돌아갔을 때는 그들을 사탄 뱀에게 내주셨다가, 그들이 회개하고 신앙을 돌이킬 때에는 다시 구리뱀으로 살려 주셨던 것과같이, 후일 예수님 때에 있어서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사탄에게 내주시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는 것과 그 때에 예수님은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부득이 하늘 뱀으로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과, 또 불신을 회개하고 그의 십자가로 인한 구속(救贖)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구원해 주시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사실은 실상 예수님을 중심한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십자가로 인한 영적인 노정으로 출발하게 한 먼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하여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쳤을 때,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민수기 20장 12절). 이에 모세는 하나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한 애원(哀願)의 기도를 올렸으나(신명기 3장 25절), 종내 그 목적의 땅을 눈 앞에 바라보면서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어 그가 죽은 뒤에 그 시체를 장사(葬事)하였으나, 그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신명기 34장 6절).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불신으로 돌아가면, 그는 십자가에 달리시게 될 것이고, 또 할수만 있으면 죽음의 잔을 면하고 세계 가나안 복귀를 이루게하여 달라고 애원의 기도를 하실 것이지만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될 것과, 한편 그의 시체도 장사한 뒤에 간 곳을 아는 사람이 없게 될 것 등을 예시(豫示)하신 것이다.

) 여호수아를 중심한 실체기대

모세가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반석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로써 가나안으로 복귀하려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민수기 20장 1~13절)사탄이 외적으로는 침범했지만, 르비듬 반석 샘물의 터전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는 그대로 샘물을 내어 이스라엘에게 먹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위에서도 밝혀 온 바와같이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대한 또 하나의 노정을 보여주셨다. 즉 이스라엘 민족 중, 사탄 세계인 애급(埃及)에서 출생하여 광야노정에서 불신으로 돌아갔던 외적인 이스라엘에 속하는 사람들은, 정탐(偵探) 40일을 믿음으로 세웠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반석샘물을 마시고 성막(聖幕)을 받드는 광야생활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 이스라엘만이, 모세 대신의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다(민수기 32장 11~12절).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가나안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시면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잔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민수기 27장 18~20절)고 하셨다.

여호수아는 정탐(偵探) 40일기간에 불신으로 돌아갔던 온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모세가 세운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위에 굳게 서서 변함 없는 믿음과 충절(忠節)로써 '성막을 위한 기대'를 조성하고 끝까지 그것을 받들었던 오직 두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와같이 비록 모세는 불신으로 돌아갔으나,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는 여전히 여호수아가 세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대신으로 세우시고, 그 내적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에게 복종하여 그와 함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서게 하심으로써, 반석 샘물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고, 이 섭리에 의하여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써 거기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민족적인 탕감조건'을 세워가지고, 제3차 노정의 여호수아를 중심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여호수아)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가나안으로) 건너가서 네(모세)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신명기 3장 28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후수아에게도 모세와 함께 있떤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여호수아 1장 5~6절)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생활 40년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찾아 세웠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민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고 명령하셨던 것과 같이(출애굽기 3장 8~10절), 하나님은 광야에서 표류(漂流)하는 40년을 오직 믿음과 충성으로 찾아 세운 여후수아를 모세 대신으로 부르시어,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여호수아 1장 2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有司)들을 불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러한 뜻을 전하였을 때(여호수아 1장 10절), 그들은 여호수아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여호수아 1장 16~18절)라고 대답하면서, 그들은 죽기를 맹세하고 여호수아를 따라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모세의 사명을 대신하고 나선 여호수아는 초림(初臨)때의 사명을 계승 완성하러 재림(再臨)하실 예수님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모세노정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는 여호수아의 노정은, 예수님의 영적 복귀의 노정을 영육(靈肉) 아울러 탕감복귀해야 할 그의 재림노정(再臨路程)에 대한 표시적인 노정이 되는 것이다.

모세가 제2차 노정에서 가나안 땅에 정탐(偵探)으로 보냈던 열 두 사람이 있었다(민수기 13장 1~2절). 그들 중 오직 충성으로 그 사명을 완수한 두 사람의 심정의 터전 위에서, 여호수아는 다시 두 사람의 정탐을 여리고성으로 보냈다(여호수아 2장 1절). 그리하여 여리고 성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두 정탐인은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여호수아 2장 24절)라고 믿음으로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광야에서 출생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모두 그 정탐인(偵探人)의 말을 믿었으므로, 이것으로써 과거에 40일 정탐을 뜻맞게 세우지 못한 선조들의 죄를 탕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내적 이스라엘이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선 여호수아에게 순종할 것을 죽음으로써 맹세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그 기대(基臺)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그들은 반석 샘물을 중심한 '출발을 위한 섭리'로써, 제2차 노정에서 3대 기적(삼대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十災殃)으로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었던, 모세를 중심한 그들의 선조들과 같은 입장을 복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이 홍해(紅海)를 거너기 전에 3일노정을 찾아 세웠던 것과같이,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도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3일 조정을 찾아 세웠던 것이다(여호수아 3장 2절). 361

한편 제2차 노정에 있어서 3일노정을 지난 이스라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홍해까지 인도하였던 것과같이,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그들이 3일노정을 마친 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표상된 예수님과 성신(聖神)의 상징적 실체인 법궤가 그들을 요단강까지 인도하였던 것이다(여호수아 3장 3절, 여호수아 3장 8절).

그리고 모세를 인도하던 지팡이에 의해서 홍해가 갈라졌듯이, 여호수아를 인도하던 법궤가 요단강의 물 위에 서자 언덕에 넘치던 요단의 흐름이 갈라져서(여호수아 3장 16절), 따라온 이스라엘은 육지와 같이 강을 건너게 되었다(여호수아 3장 17절). 지팡이는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한 하나의 표시체였고, 두 석판과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는 법궤는 예수님과 성신의 상징적인 실체였었다. 그러므로 법궤 앞에서 요단강의 물이 갈라지고이스라엘이 평탄하게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였다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과 성신 앞에 몰로 표시된 이 죄악세상(요한계시록 17장 15절)이 선 악으로 분립되어 심판을 받은 후, 모든 성도들이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게 될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때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 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 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 밤 너희의 유숙할 그곳에 두라(여호수아 4장 2~3절)고 하셨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정월(正月) 10일에 요단강에서 올라와서, 여리고의 동편 지경(地境)인 길갈에 진을 치고 요단강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거기에 세웠었다(여호수아 4장 20절).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예시(豫示)한 것인가?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돌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따라서 12지파를 대표한 열두 사람이 법궤로 인하여 물이 갈라진 요단강 가운데서 열 두 돌을 받들었다고 하는 것은, 장차 12지파의 대표형으로 부름을 받을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이 죄악세상이 선악(善惡)으로 갈라질 때, 그 곳에서 예수님을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들이 열 두 돌을 받들었다가 가나안땅의 안정된 진(陳)에 한데 모아 놓았을 때, 여호수아는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여호수아 4장 24절)고 말하였다. 이것은 장차 돌로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열두 제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한 곳에서 하나로 뭉쳐야만,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여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을 영원히 찬양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야곱이 가는 곳마다 돌단을 쌓았던 것과 같이, 야곱의 열 두 아들의 후손인 열두 지파(支派)의 대표들도 열 두 돌을 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祈禱)의 제단을 쌓아 앞으로 성전(聖殿)을 건축할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열 두 제자(弟子)가 힘을 합하여 예수님을 성전으로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후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되지 못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장 19절)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과연 12제자는 하나 되지 못하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으므로, 성전된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로써 헐렸다가 3일 만에 부활(復活)하시어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은 후에야 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들어 영적인 성전으로 모시게 되었고, 또 재림(再臨)하신 후에야 실체성전(實體聖殿)으로 모실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埃及)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제2차노정을 출발할 때, 그 해 정월(正月) 14일 유월절(逾越節)을 지나고 진군하였던 것과 같이(출애굽기 12장 17~18절), 길갈에 진을 쳤던 여호수아를 중심한 이스라엘도 그 해 정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고 굳게 닫힌 여리고의 성벽을 향해 진군을 하였다. 땅의 소산(所産)을 먹기 시작하자 40년간이나 내려주시던 만나도 그쳤으므로 그때부터는 인간의 땀으로 된 곡식으로 생활해야만 되었으며, 사탄 도성의 최후의 관문을 뚫는데 있어서도 인간으로서 할 책임을 다해야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4만의 병사가 선두에 서고, 그 뒤를 따라 일곱 제사장(祭司長)이 일곱 나팔을 불면서 행진하고, 또 그 뒤에는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멘 법궤(여호수아 3장 3절)가 따랐으며, 최후선에는 이스라엘 전군이 연달아 진군하였던 것이다(여호수아 6장 8~9절).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행군으로 하루에 한 번씩 6일이나 성(城)을 돌았어도 그 성엔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그들은 인내(忍耐)와 복종(服從)으로 사탄의 침범을 당한 6일의 창조기간(創造期間)을 탕감복귀해야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순종으로 6일을 찾아 세운 후, 제7일에 일곱 나팔을 부는 7명의 제사장(祭司長)이 성벽을 일곱 번 돌면서 7회의 나팔소리를 끝내고 여호수아가 백성을 향하여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고 호령하자, 백성들이 이에 응하여 일제히 큰 소리로 외치니 그 성이 곧 무너졌었다(여호수아 6장).

이러한 노정은 장차 예수님의 권능(權能)과 그의 성도(聖徒)들에 의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가로막혀 잇는 사탄의 장벽이 무너질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성벽은 다시 쌓아서는 아니 될 것이었으므로, 여호수아는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 계자를 잃으리라(여호수아 6장 26절)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적을 공격하게 된 여호수아는 벧호론 싸움에서의 19왕과 메롬격전에서의 12왕을 합하여 모두 31왕을 멸하였으니(여호수아 12장 9~24절), 이것도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이방(異邦)의 왕들을 전부 굴복시키시고 그 백성들을 포섭하여 통일된 지상천국을 건설하실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었다.

(3) 메시아를 위한 기대

이스라엘 민족은 정탐(偵探) 40일의 사탄분립 기간을 세우지 못하여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실패하고, 이 기간을 재탕감(再蕩減)하기 위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여 광야에서 40년을 유리(流離)하고 다시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왔다.

이때의 모세는 제3차 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에 따르는 모세의 반석 2타(磐石二打)로 말미암아 이 두 기대는 모두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를 중심하고 애급(埃及)에서 떠난 외적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섬멸(殲滅)되었으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은 모세가 세웠던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와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정탐 40일의 사탄분립기간을 믿음과 충성으로 찾아 세웠기 때문에 '성막을 위한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를 중심한 외적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말았으나, 성막을 받드는 광야생활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 이스라엘은, 모세를 대신한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충성을 다하여 법궤를 모시고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무찌르고 소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되어 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체기대(實體基臺)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조성됨으로써, 아브라함 때에 이루어졌던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는 그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400년 애급고역(埃及苦役)의 탕감노정(蕩減路程)을 지나서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이미 후편 제1장 제3절 Ⅲ에서 상론(詳論)한 바와 같이, 그 때는 이미 타락인간들이 사탄을 중심하고 애급왕국(埃及王國) 등의 굳건한 왕국을 건설하여, 하늘편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는 세워졌을 지라도 그 터전 위에 사탄에 대결할 수 잇는 하늘편의 왕국이 건설되기까지는 메시아가 강림(降臨)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들어간 내적 이스라엘도 또다시 불신으로 흘러, 이 섭리는 다시 연장을 거듭하여 예수님 때까지 밀려 나왔던 것이다.

. 모세 노정이 보여준 교훈

모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구(悠久)한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늘뜻을 받드는 수많은 성도(聖徒)들이 모세에 관한 성서(聖書)의 기록을 읽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모세의 역사에 관한 기록인줄만 알았고,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복귀섭리(復歸攝理)에 관한 어떠한 비밀을 가르쳐주시려 하셨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정도로 말씀 하셨을 뿐 모세노정의 근본 의의를 밝히지 않고 돌아가셨던 것이다(요한복음 16장 12절).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가 어떻게 복귀섭리를 위한 공식적인, 또는 전형적(典型的)인 노정을 걸었는가 하는 것을 밝혔다. 이것이 장차 예수님께서 걸으실 길을 그대로 예시(豫示)하신 것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본장 제3절을 대조함으로써 더욱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세를 중심한 섭리 하나만을 보아도, 하나님이 계셔서 하나의 절대적인 목적을 지향하여 인류역사를 이끌어 나오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음으로 모세 노정은 인간의 책임분담(責任分擔) 수행 여부에 따라서, 그 인간을 중심한 하나님의 예정의 성사 여부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예정도 그 예정을 위하여 세워진 인물 자신이 그의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면, 그 인물을 중심하고는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을 예정하시고, 그에게 이것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애급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민족 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뿐, 나머지는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책임분담(人間責任分擔)에 대해서는 간섭치 않으시고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놀라운 이적(異蹟)과 기사(奇事)로써 이스라엘을 이끌어 주셨으나, 모세가 석판을 받는 동안 백성들이 금송아지의 우상(偶像)을 만드는 행동에 대해서나,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치는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 결과만을 보시고 주관하셨으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자신이 독자적으로 걸어야 할 책이분담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뜻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豫定)의 절대성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뜻을 예정하시고 이루시려는 것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모세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의 대신으로 여호수아를 세워서라도 한 번 예정하신 뜻은 기필코 이루시고야 마셨던 것이다. 이와같이 하늘이 세우신 아벨적인 인물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가인의 입장에서 충성(忠誠)을 다한 사람이 그를 대신하여 아벨의 사명을 계승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태복음 11장 12절)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한편 큰 사명을 진 사람일수록 그에게 주어지는 시험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인간 시조(始祖)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배반함으로써 타락되었기 때문에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인물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시고 버리시는 시험을 이기고 나서야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님이 그를 죽이려 하셨던 시험을 이기고 난 후에야(출애굽기 4장 24절), 이스라엘 민족의 인도자로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사탄이 타락(墮落)을 조건으로 하여 인간을 대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조건하고 인간에게 은사를 내리실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참소(讒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사를 내시려 할 때에는, 그 은사를 전후하여 사탄의 참소를 막기 위한 시험을 반드시 하시는 것이다.

모세노정에서 그 예를 들어보면, 모세에게는 바로궁중 40년의시련을 거친 후에야 제1차 출애급(出埃及)의 은사가 허락되었던 것이고, 또 미디안광야 40년의 시련이 있은 후에야 하나님은 제2차 출애급의 은사를 내리셨던 것이다(출애굽기 4장 2~9절).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는 시험이 있은 후에야(출애굽기 4장 25절) 3대 기적과 10재앙의 이적을 내려 주셨고(출애굽기 7장 10절~12장 36절) 삼일노정의 시련이 있은 후에야(출애굽기 10장 22절)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은사가 있었다(출애굽기 13장 21절). 한편 홍해의 시련을 지난 후에야(출애굽기 14장 21~22절) 만나와 메추리의 은사(출애굽기 16장 13절)가 있었고, 아말렉과의 싸움으로 인한 시련(출애굽기 17장 10절)이 있은 후에야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은사(출애굽기 31장 18절)가 있었다. 그리고 40년간 광야에서 표류한 시련(민수기 14장 33절)이 있은 후에 반석 샘물의 은사(민수기 20장 8절)가 있었고, 불뱀의 시련을 거친 후에야(민수기 21장 6절) 구리뱀의 은사(민수기 21장 9절)가 있었던 것이다.

모세노정은 위와 같이 여러 가지의 교훈(敎訓)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던 것이다.

3절 예수를 중심한 복귀섭리 369

천사(天使)를 주관해야 할 아담(고린도전서 6장 3절)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도리어 사탄의 주관을 받아서 지옥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후아담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그 자신이 사탄을 굴복시켜 천국을 복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제1절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사탄이 예수님과 성도들에게 순종굴복할 리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리적인 책임을 지시고 야곱과 모세를 세워 장차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본보기노정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야곱은 사탄을 굴복시키는 상징적(象徵的)인 노정을 걸었고, 모세는 사탄을 굴복시키는 형상적(形象的)인 노정을 걸었으며, 예수님은 그 실체적(實體的)인 노정을 걸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사탄을 굴보시켜 나아갔던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본보기로 하여 사탄을 굴복시킴으로써,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을 완수하셔야 했던 것이다.

신명기 18장 18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그들의 형제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고 하신 말씀 중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先知者) 하나라고 하신 것은 바로 모세와 같은 노정을 걸으셔야 할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워 보여주신 본보기노정을 그대로 걷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상세한 것은 이미 모세를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에서 논하였지만, 모세를 중심한 3차의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과, 예수님을 중심한 3차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전체적인 윤곽을 비교 대조하면서, 예수님을 중심한 복귀섭리를 노하여 보기로 하자.

.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해야 할 중심인물(中心人物)은 세례 요한이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어떠한 처지에서 그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었던가?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인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모세가 석판(石板)을 깨뜨린 것과 또 반석(磐石)을 두 번 친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그를 중심한 유대민족이 불신(不信)으로 돌아가면, 석판과 반석의 실체인 예수님의 몸도 칠 수 있다는 조건을 사탄에게 허락하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이미 모세노정에서 논급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조건을 피하시게 되려면, 그의 강림(降臨)을 위한 터전을 닦아 나아가는 선민(選民)들이 장차 오실 메시아의 형상체인 성전(聖殿)을 중심하고 하나가 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항상 불신의 길을 걷게 되어, 장차 오실 예수님 앞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을 성립시켜 왔으므로, 이러한 조건을 막기 위하여 선지자(先知者) 엘리야가 와서 발알의 선지자와 아세라의 선지자를 합하여 850명을 멸하는 등(열왕기상 18장 19절), 사탄분립의 역사(役事)를 하고 승천하였던 것이다(열왕기하 2장 11절). 그러나 엘리야의 전체적인 사명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그는 재림해야 했던 것이다(말라기 4장 5절). 이와같이 엘리야가 다하지 못한 사탄 분립의 사명을 맡아 완수하고, 메시아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하여(요한복음 1장 23절) 엘리야로 왔던 선지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마태복음 11장 14절, 마태복음 17장 13절).

이스라엘민족은 애급(埃及)에서 400년 동안, 그들을 인도해 주는 선지자도 없이 고역(苦役)을 당하여 오다가, 그들을 민족적으로 가나안 땅에 인도하여 메시아를 맞게 해 줄 수 있는 인물로서 모세 한 분을 만나게 되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말라기 선지(先知) 이후 메시아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 400년 간, 그들을 인도해 주는 선지자도 없이 페르샤, 헬라, 애급, 시리아, 로마 등의 이방(異邦)들에게 고역을 당하여 오다가, 마침내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 앞으로 그들을 인도해 줄 수 있는 인물로서 세례요한을 만났던 것이다.

애급고역(埃及苦役) 400년 간의 '사탄 분립기대' 위에 섰던 모세가 바로궁중에서 충효(忠孝)의 도를 배웠던 것과같이, 메시아강림준비시대 400년간의 사탄분립기대 위에 섰던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石淸)을 먹으면서 메시아를 맞기 위하여 하늘에 대한 충효(忠孝)의 도를 세웠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祭司長)을 비롯한(요한복음 1장 19절) 유대인들은 모두 세례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누가복음 3장 15절). 세례요한은 이와같이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세웠으므로,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371

2. 실체기대 372

세례요한은 모세와 같은 처지에 세워졌었기 때문에, 유대민족에게 있어 부모와 자녀의 두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부모의 입장에서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였기 때문에 동시에 자녀의 입자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입장도 확립할 수 있었다(본장 제2절 Ⅰ.2). 따라서 세례요한은 모세가 바로궁중에서 40년간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지나고,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웠던 입장을 세계적으로 찾아 세운 터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모세가 애급인(埃及人)을 쳐 죽이는 것을 보고 그를 믿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려 하였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사탄 국가인 애급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지만, 세례요한을 중심한 유대민족은 로마제국을 떠나 다른 땅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권하(政權下)에 있으면서 그들을 굴복시켜 그 제국(帝國)을 하늘 것으로 복귀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세례요한을 중심한 기사 이적(奇事異蹟)을 보여 주시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잉태(孕胎)에 관한 천사의 놀라운 예고와 또 그 부친이 이것을 믿지 않았을 때 벙어리가 되었던 기사, 그리고 그가 출생할 때에 보여주신 이적 등으로 말미암아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고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누가복음 1장 65~66절)고 하신 성경의 말씀대로, 이스라엘민족은 세례 요한의 출생시부터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石淸)으로 목숨을 연명하면서 기도의 생활을 한 그의 빛나는 수도(修道)의 생애로 인하여, 제사장들과(요한복음 1장 19절) 일반 유대인들이(누가복음 3장 15절) 그를 메시아로 오인 할 정도로 그의 신망이 높았던 것이다.

모세가 바로궁중 40년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마치고 애급인(埃及人)을 살해하였을때 이스라엘 민족이 그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를 믿고 따랐더면, 그들은 홍해(紅海)를 건너거나 광야를 돌지 않고, 또 석판(石板)이나 성막(聖幕)이나 법궤(法櫃)도 필요없이 불레셋의 곧은 길을 통하여서 곧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이 기사 이적(奇事異蹟)으로써 믿음의 대상자로 세워 주신 세례 요한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를 복귀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유대인들은 세례요한이 세운 믿음의 기대 위에서, 그를 메시아와 같이 믿고 따르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요한복음 1장 19절, 누가복음 3장 15절), 그들은 구약시대(舊約時代)를 청산하고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새로운 노정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편 제4장 제2절에서 상술(詳述)한 바와 같이,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고서도 그를 의심하는 데 이르렀고(마태복음 11장 3절), 또 자기가 엘리아로 왔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부인하여(요한복음 1장 21절),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았을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반하는 처지에 서게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세례 요한은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를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타락성을 벗기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실체기대'를 이루지 못하게 됨에 따라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어, 이것도 모세 때와 같이 2차 내지 3차까지 연장되게 되었던 것이다.

.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1. 믿음의 기대
(1)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사명을 대신하심

세례 요한은 완성한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 복귀한 아담형의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그 때까지의 섭리역사상(攝理歷史上)에서,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왔다 간 모든 중심인물들이 다하지 못하였던 사명을 완전히 이루어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대 위에서 믿고 따르는 유대민족을 인도하여, 전체적인 섭리의 기대와 함께 예수님께 인계해 드린 후, 믿음과 충성으로 그를 따르고 모셔야 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도 모르고 행한 일이었지만, 요단강에서 예수님에게 세례를 준 것은(마태복음 3장 16절)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쌓아온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 인계하는 하나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세례 요한은 점점 예수님을 의심하고 배신하는데 이르렀으므로, 세례 요한을 메시아와 같이 믿고 따르던(누가복음 3장 15절) 유대인들은 자연히 예수님을 불신하는 처지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전편 제4장 제2절). 따라서 세례 요한이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을 위하여 세웠던 믿음의 기대는 사탄의 침범을 당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예수님 자신이 세례 요한의 사명을 대신하여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함으로써,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禁食)을 하시면서 사탄을 분립하신 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대신 입장에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375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로 영광의 주(主)로 오셨으므로, 원칙적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고린도전서 2장 8절). 그러나 그의 앞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던 세례 요한(요한복음 1장 23절,누가복음 1장 75절)이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당했어야 할 고난을 예수님 자신이 당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면서도 세례 요한 대신으로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출발하셨던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자기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밝히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16장 20절).

(2) 예수님의 광야 40일 금식기도와 3대시험 375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禁食祈禱)와 3대시험(三大試驗)에 대한 먼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을 알아야겠다.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반석(磐石) 앞에 섰던 모세가 불신(不信)으로 돌아가 그것을 두 번 쳤기 때문에, 예수님을 상징하는 그 반석(고린도전서 10장 4절)은 사탄의 침범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후일 메시아로 오셔서 모세노정을 본보기로 걸어야 할 예수님의 노정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앞길을 곧게 하기 위하여 오게 될 세 례요한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되면 반석되시는 예수님 앞에도 사탄이 침범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 되었다. 따라서 이 행동은 메시아에 앞서 올 세례 요한을 중심한 믿음의 기대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다는 표시적인 행동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반석을 두 번 친 모세의 행동은, 바로 세례 요한이 불신으로 돌아가게 될 때에 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기 위하여 예수님 자신이 세례 요한의 대신 입장에서 광야로 나아가 40일 금식과 3대 시험(三大試驗)을 치르지 않을 수 없게 한 원인(遠因)이 되었었다. 375

사실상 세례 요한이 불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전편 제4장 제2절 Ⅲ), 그가 세웠던 '믿음의 기대'에는 사탄이 침범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근인(近因)이 되어 예수님은 몸소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40일 사탄분립의 기대'를 세움으로써,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기 위하여 광야에서의 40일 금식과 3대 시험을 겪지 않을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면 사탄이 3대시험을 하게 된 목적은 어디 있는가? 마태복음 4장 1절 내지 10절을 보면, 사탄은 예수님에게 돌을 보이면서 그것으로써 떡이 되게 하라고 하였고, 또 그를 성전(聖殿) 꼭대기에 세우고 자기에게 경배하면 온 세상을 다 주겠다는 등 세가지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였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서 그 개성의 완성, 자녀의 번식, 그리고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대한 주관 등 세 가지의 축복(祝福)을 하셨다(창세기 1장 28절). 그러므로 인간이 이것을 완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인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킴으로써 이 세 가지 축복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그 창조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이 세 가지의 축복을 복귀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고 오셨기 때문에, 사탄은 축복 복귀의 길을 막기 위한 그 세 가지의 시험으로써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377

그러면 예수님은 이 3대 시험(三大試驗)을 어떻게 받으시고 어떻게 이기셨는가?

우리는 먼저 여기에서 사탄이 어떻게 되어 예수님을 시험하는 주체로 설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모세를 중심한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불신과 모세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탄이 예수님과 성신(聖神)을 상징하는 두 석판(石板)과 반석(磐石)을 취함으로써 그는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의 주체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밝혔다. 그런데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이르러, 사탄을 분립하여 메시아의 갈 길을 곧게 하기 위한 사명자로 왔던 세례 요한(요한복음 1장 23절)이 그 책임을 다 하지 못하게 되자 모세 때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불신(不信)과 불순종(不順從)으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미 모세노정에서 예시(豫示)하신 대로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 시험(試驗)의 경위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예수님이 광야에서 밤낮 40일을 금식(禁食)하시고 난 뒤, 사탄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태복음 4장 3절)는 시험을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광야에서 40일 사탄분립기대 위에 섰던 석판(石板)을 깨뜨리고 반석(磐石)을 두 번 쳤던 행동과, 세례요한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그 돌을 사탄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찾기 위하여 예수님도 광야로 나아가 40일을 금식하여 사탄을 분립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사탄은 예수님이 돌을 찾기 위하여 광야에 나오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옛날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광야노정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불신으로 흘러 돌을 사탄이 가지게 되었던 것과 같이, 이제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광야노정(曠野路程)에 있는 예수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가운데 있으니 어서 불신으로 돌아가 그 돌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것으로 떡이나 되게 하여 주린 배를 채우면, 그 돌은 사탄이 영원히 가지겠다 하는 뜻이었다. 378

이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태복음 4장 4절)고 하셨다.

원래 사람은 두 가지의 영양소로써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즉 자연계로부터 섭취하는 영양소로서는 육신(肉身)이 살아가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는 영인체(靈人體)가 살아 가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지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써 그 영인체 들이 살아 간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6장 48절을 보면,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고 말씀하시면서 계속하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장 53절)고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떡을 먹고 그 육신이 살아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써 온전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다.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이 육신으로 화하여 모든 사람의 생명의 양식으로 오신 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석판(石板)의 뿌리 되는 반석(磐石)을 두 번 침으로써 그 돌은 사탄의 소유로 돌아갔었다. 이렇게 사탄의 것이 되어진 그 돌은 바로 모세가 잃어버린 그 반석이었고 또 그 석판이었으므로, 그 돌은 결국 사탄의 시험을 받고 있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한 것이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장 17절에 돌을 그리스도로 상징하고, 고린도전서 10장 4절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한 것을 보아서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탄의 첫째 시험에 응한 예수님의 대답은 결국 내가 지금 아무리 굶주린 가운데 있을지라도, 육신(肉身)을 살리는 떡이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너로부터 시험을 받고 있는 자리에서 승리하고 나서 온 인류의 영인체(靈人體)를 살려 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이 되어야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시험을 받아 이김으로써, 개성을 완성한 메시아의 입장을 찾아 세우는 시험이었던 것이다.  379

이처럼 원리적인 입장에서 뜻을 대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에 사탄은 지고 말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첫번 시험에 승리하여 개성(個性)을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제1축복(第一祝福) 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聖殿)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마태복음 4장 5~6절)고 하였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셨고, 또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는 성도(聖徒)들을 일러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도 하였으며, 고린도전서 12장 27절에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지체(支體)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님은 본성전(本聖殿)이요 성도들은 그 분성전(分聖殿)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공으로 오셨으므로, 사탄도 그 격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한것은, 주인공의 위치에서 떨어져 타락한 인간의 입장으로 돌아가면 자기가 예수님 대신으로 성전 주관자(主管者)의 위치를 점령하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태복음 4장 7절)고 대답하셨다. 380

원래 천사(天使)는 창조본연(創造本然)의 인간의 주관을 받도록 창조된 것이므로 타락한 천사는 마땅히 예수님의 주관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천사가 예수님 대신으로 성전주관자의 입장에 서려 하는 것은 비원리적(非原理的)인 행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비원리적인 행동으로 원리적인 섭리를 하시는 하나님의 몸 되신 예수님을 시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된다. 더구나 예수님은 제1차 시험에 승리하여 개성을 복귀한 실체성전(實體聖殿)으로서 성전의 주인공의 입장을 확립하셨기 때문에, 사탄의 시험을 받을만한 아무런 조건도 없으니. 이제는 예수님 자신을 시험하지 말고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하여 둘째 시험에 승리함으로써, 본성전이시고 신랑이시며 또한 인류의 참부모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성도들을 분성전과 신부와 참자녀의 입장으로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워 하나님의 제2축복(第二祝福) 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셨던 것이다.

다음으로 사탄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서 천하만국(天下萬國)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장 9절)고 시험하였다.

원래 아담이 타락됨으로 인하여 만물세계(萬物世界)에 대한 주인공의 자격을 상실하고 사탄의 주관을 받게 됨에 따라, 사탄이 아담의 대신으로 만물세계의 주관자로 서게 되었다(로마서 8장 20절). 그런데 완성한 아담격으로 오신 예수님은 고린도전서 15장 27절에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대로 피조세계(被造世界)의 주관자이시었다. 따라서 사탄도 이러한 원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산 위로 인도하여 만물의 주인공의 자리에 세워 놓고, 태초에 아담이 사탄에게 굴복한 것과 같이 제2 아담된 예수님도 사탄에게 굴복하라고 시험했던 것이다. 381쪽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태복음 4장 10절)고 대답하셨다.

천사(天使)는 원래 부리는 신(神)으로서(히브리서 1장 14절),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배(敬拜)하고 섬기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타락한 천사인 사탄도 그에게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 원리요, 따라서 사탄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의 몸으로 나타난 예수님에게도 굴복하고 경배하며 섬기는 것이 원리라는 것으로 예수님은 대답하셨던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은 이미 두 번의 시험에 승리하여 하나님의 제1, 제2 축복을 복귀할 수 있는 기대(基臺)를 조성하셨으므로 그 기대 위에서 하나님의 제3축복을 복귀하여 만물세계를 주관해야 할 것은 당연한 일이니, 이미 승리의 기대 위에 선 만물세계를 걸어 놓고는 더 이상 시험받을 여지가 없다는 뜻으로 원리적인 대답을 하셨다.

이렇듯 예수님은 셋째 시험에도 승리하시어, 피조세계(被造世界)에 대한 주관성을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제3축복(第三祝福) 복귀의 기대를 조성하셨다.

(3) 40일 금식과 3대 시험으로 사탄을 분립한 결과

창조원리(創造原理)에 의하면, 인간이 정(正) 분(分) 합(合) 3단계의 과정을 거치어 4위기대(四位基臺)를 이루어야만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4위기대를 이루어 나오는 과정에서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도 역시 3단계까지 연장되어 내려오면서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세워가지고, 상실되었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蕩減復歸)코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면서도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3단계의 시험에 승리하여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세우셨다. 이것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역사노정에서, 3단계로 연장하시면서 '40일 사탄부립의 기대'로써 찾으시려 했던, 다음과 같은 모든 조건들을 일시에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역사노정에서, 3단계로 연장하시면서 '40일 사탄 분립의 기대'로써 찾으시려 했던, 다음과 같은 모든 조건들을 일시에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셨으므로, 그 때까지의 섭리노정(攝理路程)에 있어서 '믿음의 기대'를 세우기 위하여 찾아 세우려던 모든 것을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가인 아벨의 헌제,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의 헌제, 모세의 성막, 솔로몬의 성전 등을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아담 이후 4천년 간의 종적인 역사노정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중심인물(中心人物)들의 실수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모든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횡적으로 일시에 탕감복귀하시었다.노아의 심판 40일, 모세의 3차의 40년기간과 2차의 40일 금식, 정탐 40일, 이스라엘의 광야노정 40년, 그리고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400년, 애급고역 400년, 그리고 그 후 예수님 때까지에 있어졌던 모든 40수의 기간을 전부 탕감복귀하셨던 것이다. 383쪽

둘째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메시아의 입장에서게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을 이루어 4위기대(四位基臺)를 탕감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헌제(獻祭)를 이룬 실체시요, 또한 석판(石板)과 성막(聖幕)과 법궤(法櫃)와 반석(磐石)과 성전(聖殿)의 실체로 설 수있게 되셨던 것이다.

2. 실체기대

예수님은 인류의 참 부모로 오셔서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40일 사탄 분립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셨기 때문에, 부모의 자리에서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자녀의 자리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세가 미디안광야에서 40년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지남으로써,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던 입장을 세계적으로 탕감복귀한 입장에 서게 되셨던 것이다.

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3대 기적(三大奇蹟)과 10재앙(十災殃)으로 그의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런데 그 후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무위(無爲)로 돌아간 애급에서의 3대 기적과 10재앙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석판 성막 법궤의 3대 은사와 십계명을 세우는 것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던 것은 이미 모세노정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석판 성막 법궤의 3대 은사와 십계명(十誡命)의 실체이시기 때문에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는, 예수님 자신이 말씀과 기사 이적(奇事異跡)으로써 그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가인의 처지에 있었던 유대민족이, 이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세례요한의 사명을 가지고 아벨의 자리에 서 있는 예수님을 믿고 모시고 따르면,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보건'을 세워가지고 '실체기대(實體基臺)'를 복귀하게 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었더면 예수님은 이 기대 위에서, 세례요한의 입장으로부터 메시아로 서게 되고, 온 인류는 그에게 접붙임을 받아(로마서 11장 17절) 중생(重生)되어 원죄를 벗고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창조본성(創造本性)을 복귀하여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이루게 되었을 것이었다. 384쪽

3.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패

세례요한의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섭리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사명을 대신하여 몸소 광야 40일의 고난을 당하시면서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蕩減復歸)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 3대 시험(삼대시험(三大試驗))에서 예수님에게 져버린 사탄은 예수님 앞을 얼마 동안 떠났다고 하였다(누가복음 4장 13절). 사탄이 얼마 동안 떠났다는 말은, 아주 떠난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과연 사탄은 불신으로 돌아간 제사장(祭司長)과 교법사(敎法師) 등을 중심한 유대민족, 특히 예수님을 판 제자 가룟 유다를 통하여 다시 예수님 앞에 대립하고 나섰던 것이다. 385쪽

이와같이 유대민족의 불신으로 인하여,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섭리를 위한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이룰 수 없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 섭리를 위한 '메시아를 위한 기대'를 조성할 수 없게 되어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
1. 예수를 중심한 영적 가나안 복귀노정

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復歸路程)에 관한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상세히 말한 바와 같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대상은 메시아의 상징체인 성막(聖幕)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불신으로 흘러갔을 때에도, 이 성막만은 모세가 금식 40일기간으로 세웠던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 여호수아에 의한 정탐 40일 사탄분립기간으로 조성되었던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서, 계속 그 뜻을 받들어 나온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유대민족의 신앙의 대상은 성막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이었는데, 그의 제자들마저 불신으로 돌아갔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한복음 3장 14절)라고 하신 말씀대로, 그의 육신을 십자가(十字架)에 내주시어 죽음의 길을 가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유대민족은 영육(靈肉) 아울러 신앙의 대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은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과 같이 직접 실체노정으로써 출발하지 못하고, 제2 이스라엘인 기독교 신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신앙의 대상으로 세워가지고, 먼저 영적노정으로써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성전(예수님)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장 19절)고 말씀하신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치 여호수아가 모세의 사명을 계승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완성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님은 재림(再臨)하셔서 초림(初臨) 때의 사명을 계승하시어,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영육 아울러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을 보더라도,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와 같이 육신을 쓰시고 다시 오시지 않으면, 처음 오셨을 때에 이루려 하셨던 복귀섭리의 목적을 계승 완수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 영적인 믿음의 기대 386쪽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배반함으로 인하여, 제2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노정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40일 금식으로 세웠던 '믿음의 기대'는 사탄에게 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의하여 그 육신을 사탄에게 내주신 후에는, 영적인 세례요한 사명자의 입장에서, 40일 부활기간(復活期間)으로 사탄분립의 영적기대를 세우심으로써,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의 영적 노정을 위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40일의 부활기간(復活期間)을 세우시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안 사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어떻게 세우셨던가? 예수님이 메시아로 나타나실 때까지는 하나님은 유대 선민(選民)들과 함께 계셨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아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배반한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들 선민을 사탄에게 내주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로부터 배척당한 독생자(獨生子) 예수님과 함께, 선민을 버리고 돌아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신 목적은 선민을 비롯한 전인류(全人類)를 구원(救援)하시려는데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시고서라도 전 인류를 구원하려 하셨던 것이다.

한편 또 사탄은 자기편에 서게 된 선민을 비롯한 전 인류를 모두 하나님에게 내놓게 되더라도, 메시아인 예수님 한 분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4천년 복귀섭리(復歸攝理)의 제1목적이 메시아 한 분을 세우시려는데 있었으므로, 사탄은 그 메시아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전섭리(全攝理)의 목적을 깨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되어 하나님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사탄편으로 돌아간 유대민족을 비롯한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탕감조건(蕩減條件)으로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시게 되었던 것이다.

사탄은 자기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그가 4천년 역사노정을 두고 목적해 왔던 바를 달성한 것이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을 사탄에게 내주신 하나님은 그 대가로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조건을 세우시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여서 죄악 인간(罪惡人間)들을 구원하실 수 있게 되었는가?

사탄이 이미 그의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여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탕감복귀원칙(蕩減復歸原則)에 의하여 하나님에게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입장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사탄의 최대 실권행사(實權行事)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최대 실권행사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탄이 그의 최대 실권행사로서 예수님을 죽인 것에 대한 탕감조건으로 하나님도 최대의 실권을 행사하시어 죽은 예수님을 부활(復活)시키시고, 온 인류로 하여금 그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접붙이어(로마서 11장 24절) 중생(重生)케 하심으로써 구원을 받도록 하신 것이었다. 387쪽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잘 아는 바와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같이 생활하시던 그러한 예수님은 아니시었다. 그는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에 계셨기 때문에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었다. 그는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는 방 안에도 문득 나타나셨는가 하면(요한복음 20장 19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갑자기 나타나시어 오랫동안 동행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하였으며(누가복음 24장 15~16절), 이와같이 나타나셨던 예수님은 또 어디론가 갑자기 사라져버리기도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육신을 제물(祭物)로 십자가에 내주신 후 이렇듯 부활 40일의 사탄분립기간으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세우심으로써,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셨다.

(2) 영적인 실체기대

예수님은 영적(靈的)인 세례요한 사명자의 처지에서, 영적인 부활 '40일 사탄분립기대'를 조성하심으로써 영적 참 부모의입장에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복귀하는 동시에, 또 영적인 자녀의 입장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蕩減條件)'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영적인 아벨의 위치도 확립하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 표류(曠野漂流)40년의 탕감기간(蕩減期間)을 지남으로써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과 같이, 제3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영적인 '믿음의 기대'를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모세 때에는 '성막을 위한 기대'를 세우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다. 그러나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 흩어졌던 제자들을 거두어 모으시고, 자신이 석판과 성막과 법궤의 영적인 실체가 되어, 제자들에게 기사(奇事)와 이적(異蹟)의 권능을 주심으로써(마태복음 28장 16~18절) '출발을 위한 섭리'를 하셨던 것이다.

여기에서 가인의 입장에 선 성도(聖徒)들은, 이 '출발을 위한 섭리'에 의하여 영적인 세례요한 사명자로서 영적인 아벨의 입장에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모시고 따라 '타락성을 벗기 위한 영적인 탕감조건'을 세움으로써 영적인 실체기대를 복귀하게 된 것이다.

(3)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 390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신 후에 남은 열한 제자는 모두 힘없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그들을 다시 한 곳으로 거두어 모으시고, 영적 가나안 복귀의 새로운 섭리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제자들은 가룟유다 대신으로 맛디아를 택하여 12제자의 수를 채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숨을 바쳐 믿고 모시고 따름으로써, '영적인 실체기대'를 조성함에 따라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를 복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 기대 위에서, 영적인 세례요한 사명자의 입장으로부터 영적인 메시아의 입장을 확립하고 성신(聖神)을 복귀함으로써, 영적인 참 부모가 되어 중생(重生)의 역사를 하시게 되었다.

사도행전 2장 1절 내지 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오순절(五旬節)에 성신이 강림하신 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참아버지로서, 영적 참어머니 되신 성신과 합하여 역사하심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접붙이게 하시어 영적 중생의 역사를 하시기 때문에, 영적 구원섭리만을 이루시게 되었다(전편 제4장 제1절 Ⅳ).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권내에는 사탄의 영적 참소조건(讒訴條件)이 청산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영적인 면에 있어서의 사탄의 불가침권(不可侵權)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타락인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와 하나가 되어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그의 몸은 여전히 사탄의 침범을 당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육적 구원은 의연(依然)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그와 함께 영적으로 사탄 불가침권내에 있게 됨으로써, 사탄의 영적인 참소조건을 면하고 영적 구원만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영적 가나안 복귀

기독교 신도들은 '메시아를 위한 영적인 기대' 위에서 영적인 메시아로 서게 된 예수님을 믿고 모심으로써, 영적 가나안 복귀만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적 가나안 복귀의 혜택권내에 있는 성도들의 육신은 십자가(十字架)에 의하여 사탄의 침범을 당한 예수님의 육신과 같은 처지에 서게 됨으로써,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다름 없이 사탄의 침범을 당하여 원죄(原罪)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로마서 7장 25절), 성도들도 도한 예수 재림을 위한 사탄 재분립(再分立)의 노정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전편 제4장 제1절 Ⅳ).

모세를 중심하고 섭리하셨던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있어서의 성막이상(聖幕理想)은,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적 실체성전(實體聖殿)을 중심하고 세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지성소(至聖所)와 성소(聖所)는 그것들이 상징한 바 예수님과 성신(聖神), 예수님의 영인체와 육신이 영적 실체로 이루어졌고, 속죄소(贖罪所)의 이상(理想)은 예수님과 성신의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짐으로써,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말씀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는 그 속죄소에서, 인간시조가 타락된 후에 그 앞을 가로막았던 그룹을 좌우로 갈라 세우고, 법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