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 양식의 총합체

근원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 그 과정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과정에 아무리 그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 과정이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지금 생각할 때에 우리의 근원, 우리의 뿌리, 그 뿌리가 어떻게 돼 있느냐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을 가만 보면, 나 하나에는 전부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질이 들어와 있고, 그다음엔 사람이 들어와 있고, 영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3대 부모를 갖고 있다고. 첫번째는 만물이 우리를 낳아준 부모입니다. 그다음엔 우리를 낳아 준 부모, 우리 부모가 우리를 낳아 줬습니다. 사람이 결국에는 우리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3대 부모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을 볼 때에 그 사람 가운데에는, 그 아무개 하면 아무개, 구조적인 그 인간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데 그 구조적인 것 가운데에는 반드시 역사성이 들어 있고, 자기의 부모가 되는 조상이 깃들어 있고, 더 나아가서는 거기에 하나님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가만 보면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의 깊이를 우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양심이 얼마나 깊으냐 할 때, 이것이 무한히 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양심이 얕다면 무한히 얕다구요. 무한히 얕은 것 같으면서도 무한한 깊이를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건 어째서 그러냐 하면 우리의 근원이 무한한 근원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에, 깊고 깊은 그런 근원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근원이 깊을 수밖에 없기에 그 깊은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이 우리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마음을 갖고 있고 몸을 갖고 있습니다. 그 몸은 부모로부터 이어받았고, 또 몸이 자랄 수 있는 이 '나'라는 것은 이 만물로부터 공급받아 가지고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나'라는 이 자체는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하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문 아무개 하면 문 아무개, 레버런 문 하면 레버런 문 그 자체가 태어난 그날부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 역사성은 지극히 오래인 것입니다. 지극히 방대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한 나무를 바라보면 나무에는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나무는 뿌리를 통해 가지고, 줄기를 통해 가지고, 가지를 통해 가지고, 잎사귀를 통해 가지고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잎사귀를 통해 가지고 탄소동화작용, 광합성작용을 해서 엽록소를 보관하여 뿌리의 모든 탄화 작용과 화합해 가지고 엽록소를 보충받는 사실을 바라볼 때, 그 잎이 살고 있는 것은 잎 자체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체를 대표해서 살고 있습니다. 가지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줄기도 줄기 자체로서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하에 뻗어 있는 가지와 뿌리와 잎들을 대신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우주는 어떤 것이냐? 우주는 연체(聯體)로 되어 있습니다. 공동 생명체로 되어 있다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만물을 바라볼 때…. 내가 갖고 있는 '눈' 하면 그 눈의 역사는 깊다는 거예요. 내가 보는 이 눈과 동물이 보는 눈, 그 눈의 역사는 공통한 것입니다. 깊은 근원에 가 가지고는 연관돼 있다 이거예요. 우리의 모든 사지백체가 개별적으로 이렇게 나눠진 것 같지만 그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찾아 들어갈수록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어느 하나도 빼낼 수 없는 공동 운명권에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게 볼 때 '나'라는 한 존재는 전체를 대표한, 다시 말해서 뿌리들의, 근원의 한 열매로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우주 존재들의 뿌리를 대표한 하나의 결실체다 이겁니다. 또, 평면적으로 보면 모든 존재 양식의 하나의 종합체 형상을 갖추고 있는 것이 '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