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에 고착되어 있는 사람은 발전할 수 없어

그러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돼 있느냐? 뜻을 모를 때의 과거의 나와 뜻을 알고 난 후의 나의 삶에 있어서 그 보람됨이, 그 가치됨이 얼마나 차이가 있었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금년 일 년 사는 것하고 내년 일년 사는 것이 같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반드시 새로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은사의 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이 생명의 인연을 따라 가지고 우리를 찾아와 씨를 뿌리는 때가 있다 이거예요. 씨 뿌림을 받은 심령세계의 내 자신이 자라기 시작할 때 씨로서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씨가 싹이 터야 된다구요. 싹이 터야 됩니다. 싹이 터 가지고, 반드시 싹이 나와 가지고는 전부 다 자연과 화합해야 됩니다. 나 홀로, 씨 자체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크기 위해서는 그 주변의 상황과 주고받을 수 있는 동기를 갖고 상대역을 하든가 주체역을 하든가 하여서 주위 환경에서 요소를 흡수함과 동시에 요소를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그 풀 한 포기에서 꽃이 필 때까지는 씨에서부터 무한한 전진과 동화작용을 거쳐 가지고야 꽃이 피어지는 것입니다. 이 꽃이 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예요. 그다음에 열매를 맺히기 위해서는, 열매다운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환경과 반드시 화합하여 가지고 그것이 공동적인 결합적 기반을 통하여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씨라는 것이 결실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 작용을 못 하는 존재는 그 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꽃 이외의 결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구요. 꽃의 고개를 넘고 열매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조화적인 환경의 변화작용이라든가 조화작용이라든가 하는 이런 작용을 거쳐 가지고야 씨의 결실의 시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될 때 우리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나는 어떤 자리에 있느냐 이거예요. 내 자신이 정지 상태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뭐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다. 이웃 동네도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고, 지난날의 우리 생활도 그런 습관화된 생활 가지고 살았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 습관에 고착되어서는 안 되겠다 이거예요. 습관에 고착되어 있는 사람은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공부하는 학생이 책을 읽게 되면 책에 동화되어야 됩니다. 책과 더불어 동화되어야 돼요. 그 책의 내용과 동화된 자리에 머물게 될 때 책을 보는 그 사람은 시시로 변화하여 간다는 것입니다. 시시로 전진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생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동화작용을 일으키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고착된, 질식된 자리에 서 있느냐? 불평을 하고 있느냐, 좋아하고 있느냐? 혹은 내가 희생하고 있느냐, 슬퍼하고 있느냐? 이런 문제…. 아무리 슬프더라도 그 슬픔이 좋기 위한 변화과정으로서의 슬픔이라면 그건 응당히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낮이 있으면 밤이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기쁠 수는 없어요. 24시간 언제나 웃고 있을 수는 없어요. 웃을 때 한때이고 또 웃지 않을 때가 한때라는 것입니다.

그래 바른쪽에 가면 좋고 올라가면 좋지마는, 왼쪽에 가고 내려가면 좋지 않아요. 그러나 순환과정을 거쳐야 할 우리의 인생살이라면 올라가나 바른쪽으로 가나, 내려가나 왼쪽으로 가나 그것을 어떻게 좋은 것으로 커버해 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기뻤으면 오늘의 기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있으면 반드시 슬픔이 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바른 다리로 한 발걸음 걸었으면 반드시 그 다리 위에 모든 중량을 갖다 얹어 놓아야 된다구요, 중량을. 그렇지 않아요? 걸을 때는 왼 다리에 전부 다 중량을 얹어 놓고 바른 다리를 옮겨 짚었지만 이 중량이 어디로 가야 되느냐? 중량 자체를 고착해 가지고는 전진을 못 하는 거예요. 이 중량을 서서히 바른쪽으로 전부 다 옮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 바른쪽에 중량이 전부 다 옮겨져 가지고 완전히 실린 후에는 왼쪽으로 바꿔 가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