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와 대상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생활환경

그다음에 3단계는 뭐예요? 「실천생활입니다」 전통이 없고 교육강화의 실력이 없는 사람은 실천생활을 할 수 없다구요. 자기 분야에 있어서 어떤 부처를 책임지려고 해야 돼요. 부처마다 과장이 있는데 그 과장이 책임을 다 못할 때는 내가 그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돼요. 알면서 살필 수 있는 그 사람은 실천장에 있어서 주인이 되는 거예요. 반드시 그래요. 종국에는 그런 경쟁이예요.

여기 몇 사람이예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뭐 많구만, 이거. 「아닙니다. 현재 세 사람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세 사람이 있으면 그 세 사람을 중심삼고 누가 주인이 될 수 있느냐? 이런 것에 과장과 전부 다 비교할 때, 지금 과장은 몇년 전에 앞섰지만 이제 십년 후에는 내가 앞설 수 있다 이거예요. 무엇이 앞설 수 있느냐? 무엇을 가지고? 실천장에서 주체성을 얼마나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 가지고.

주체성을 얼마나 지니느냐 하는 것이 문제예요. 이것은 중요한 문제예요. 어디에 가든지 그런 사람이 주인입니다. 단체면 단체, 국가면 국가, 상대적 배경을 가진 그 배경 밑에서 어떠한 주체성을 유지했느냐 이거예요. 주체성은 그 환경을 수습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환경에 상대적 여건을 제시해 가지고 상대적 여건을 조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절대적 주체로서 상대권을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실천장을 반드시 내 자의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 놓아야 됩니다. 그것이 제일 필요한 거예요. 아무리 장(長)이 있다 하더라도 장이 나를 환영하고, 아무리 말단에 직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직원이 나를 환영할 수 있고, 내 마음대로 쓸 환경을 언제나 지닐 수 있는 사람이 실천장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래서 선생님 같은 사람은 그런 싸움을 해 나온 거예요. 한국이 이해 못 했지만 나는 한국에 대한 그런 놀음을 해 나왔어요. 선생님이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 세월이 지나 40년이 지나더라도 그 생활을 하다 보니 결국 한국 민족이 레버런 문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실천장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좋고, 누구보다도 중심이 되고, 누구보다도 가치적인 내용을 알고 거기에 상대적 기준에 서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급진적인 발전을 해서 그 세계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형, 밸런스가 취해지는 데 있어서 입체적인 조화가 벌어지는 거예요. 평형이, 수평선이 이루어지지 않는 세계는 조화가 생기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주체성을 지녀 가지고 환경이 언제나 나를 '좋다'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거기에는 새로운 입체성이 시작됩니다, 입체성. 조화의 역사가 벌어지게 되는데 새로운 풍토가 벌어져요. 거기에 웃음이 나오고 희망이 나오고, 좋고 나쁜 것이 감정의 세계까지 연결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천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이거예요.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는 말이예요, 저 안방에서 신앙생활하던 것이 실천장에서 공의에 대한 주체성화 되는 것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이 지금까지 선생님이 40년 동안 세계무대를 걸어 놓고 싸워 나오는 노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사연이 많지요. 사연 많은 것에 대해 거기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연을 넘어가야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길이 있더라도 말이예요. 그렇다구요. 사회생활이 그래요. 어느 단체에 가게 되면 반드시 환경이 있고 그 환경은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맺어져 있어요. 생활철학의 개념으로써 이걸 수습해 놔야 됩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여기면 여기, 가정부면 가정부를 중심삼아 가지고 가정이라는 환경이 있습니다. 여기는 반드시 주체 대상 관계가 있다구요, 어떤 일이거나.

하나님의 창조이상이라는 것은 반드시 환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어요. 환경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그 환경을 수습하는 데 있어서는 주체 대상의 관계에 의해서 수습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가정부란 이 환경에는 반드시 주체 대상 관계가 있다구요. 주체자가 여기 책임자로 오게 되면 여기에 같이 있는 회원이 구성되어 가지고 환경을 소화해 나가야 됩니다.

거기에는 높은 환경으로 가느냐, 낮은 환경으로 가느냐? 샛길로 가느냐, 이만한 길로 가느냐? 이게 문제라구요. 그러니 전부 다 환경이 있어야 됩니다. 그 환경의 주체 대상과 완전히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밸런스다 이거예요. 환경적 여건의 시공적 권(圈)안에 있어서 누가 수평선을 긋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환경에 수평선을 긋는 데 있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하나는 높지만 이것이 상대권만 이루어지면 여기서부터 수평이 벌어져 가지고 수평선이 벌어진 여기서 조화가 벌어지는 거예요. 거기서 둘이 하나되어 가지고 새로운 길, 조화가 나오는 것입니다. 입체성 구성이….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환경에서 주체와 대상이 하나 안 되면 그것은 후퇴를 하는 거예요. 이걸 명심해야 되겠다구요. 아무를 갖다 놔도 이게 안 되면 이미 흘러가 버리는 거예요. 가정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라구요. 마음을 중심삼고 몸이 하나되지 않고는 거기에 아무리 이상적 구상을 그리더라도 그 환경은 나와 더불어 상관이 없는 것이요, 시공이라도 모든 여건은, 미래의 모든 여건은 나와 하등의 상관이 없어요. 이걸 생활철학적인 개념으로서 소화해야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