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세계가 이루어진 다음에야 행복이 있어

이렇게 볼 때에 가지의 행복이 있기 전에 종대의 행복이 선의 조건이 되어야 되고, 내 행복이 있기 전에 가정적 행복이 선의 조건으로 등장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런 환경 여건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데서만이, 그것을 타고 올라서는 데서만이 내 행복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걸 부정하고, 이걸 흡수시켜 가지고 자기 위주한 기준에서 뿌리를 박고 모든 가지를 돕고자 하면 행복이 있을 수 없어요. 거기에는 문제가 벌어진다구요.

자, 오늘날 세계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느냐? 하나의 세계를 바랍니다, 하나의 세계. 선한 세계를 바라요. 행복한 세계를 바란다 이거예요. 그러면 행복한 세계라는 것이 하나의 세계가 되기 이전에 있느냐, 하나의 세계가 된 이후에 있느냐? 어디겠어요? 하나의 세계 이후에 있어야 된다 이거예요.

선하지 않은 곳에 행복이 있을 수 없어요. 오늘날같이 하나의 세계를 모색해 가는 가운데에는 완전한 행복이 정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거예요. 행복은 어디 있느냐? 선한 세계가 이루어진 그다음부터 있는 거예요.

이렇게 볼 때 행복권이라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섭리의 과정에는, 선악이 투쟁하는 과정의 세계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투쟁사가 끝나 가지고 선이면 선한 것의 결정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결정된 것이 한 나라 기준 이상의 결정권이어야 되는데 그것이 생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상(理想)의 환경적 여건이 성립 안 되고는 나라 형성의 기준이 거기 들어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나라의 행복을 추구하기 전에 선한 세계를 추구해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선한 세계가 없는 데 선한 나라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나라가 없는 데 선한 사회가 있을 수 없고, 선한 가정이 없는 데 선한 내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봐야만 되는 거예요.

이러한 전제를 두고 볼 때, 우리 역사가 선악의 투쟁 노정의 방향을 따라간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찾고 있는 행복, 우리들이 찾고 있는 선하다는 가치를 우리는 어디서부터 결정해야 되느냐? 결정을 지어야 된다 이거예요. 표준을 정해 가지고 출발과 표준이 일치된 자리에서 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목적을 향해 가고 있다 하면 그 목적이 이루어진 후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살이도 그렇잖아요? 학교 다니는 학생이 학기마다 시험을 치르는데 시험을 쳐서 전부 만점을 받고 나서야 행복한 것이지 시험 치는 과정에서 행복할 수 있어요? 아무리 자기가 안심하더라도 그건 행복한 것이 아니예요. 아직까지 선악에 대한 판정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기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기반이 없는 데는 행복의 기틀이 마련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볼 때, 여러분들이 자기를 중심삼고 선악에 대한 결정을 지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냥 따라가는 사람이냐? 아무리 따라가더라도 얼마만큼 가다가는 갈라질 수 있는 사람이냐? 이 세계는 이렇게 가더라도 나는 틀림없이 저리 간다 하는 그런 표준을 정해 가지고 결정하고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따라가는데 내가 살기 위해 따라가느냐? 내가 하루하루 생활하기 위해서 따라가느냐? 아니예요. 내가 따라가는 것은 이렇게 가 가지고 저렇게 가기 위한 거예요. 타락한 세계를 대해서 복귀섭리를 해 나오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을 따라 나오고 있다 이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따라 나오는데 왜 따라 나오느냐? 하나님이 따라 나오는 것은 인간들을 다른 곳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따라오고 있는 것이지 따라가는 그 무리들과 더불어 종말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예요. 종말이 되게 될 때는 급변해서 방향을 전환시킬 수 있는 그 길을 가는 하나님이지 그 환경 여건에 휩쓸려 가지고 벼랑에 굴러 떨어질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예요. 아무리 벼랑 끝에 가더라도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라가는 하나님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는데 세계사적인 결단을 지어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 할 수 있는, 급변할 수 있다 할 수 있는…. 이렇기 때문에 따라가지 그렇지 않으면 따라가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거예요. 파괴를 내포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