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함으로써 몸 마음이 싸우는 자리에 있어

그래서 신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될 때에, 오늘날 우리 자신을 두고 보더라도 몸과 마음이 완전히 평화, 통일의 기준에 서 있지 못하다 이거예요. 기독교 신학을 창시한 바울 같은 양반은 말이예요, 마음의 법이 있고 몸뚱이의 법이 있어 가지고 두 법이 싸우는데 몸의 법이 마음의 법을 언제나 사로잡아 도탄 중에 몰아넣음으로 말미암아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라!' 하는 비통한 결론을 내렸어요. 그건 왜 그러냐? 그러면 마음의 법이 어찌하여 몸의 법을 지배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하였더냐? 신이 있다면 그래야 할 터인데.

자, 이렇게 볼 때에 오늘날 우리 인간 자신의 통일권을 찾아보려고 할 때, 신이 있다면 완전히 통일적인 내적 기준을 중심삼고, 양심을 중심삼고 몸을 지배할 수 있는 자리에 당장 서야 할 터인데 그런 입장에 선 자아를 보장할 수 없다면 그건 어떤 원인 때문이냐 이거예요.

타락이라는 말을 갖다 놓게 되면 신이 있다 하는 것을 우리는 여유를 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타락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타락하지 않았으면 몸과 마음이 싸우는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싸우는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이거예요. 오늘날 인류역사에 성인 현철들이 많이 왔다 갔지만, '나는 인류세계, 인생도상에 있어서 위인의 명칭, 혹은 성인의 명칭을 가지고 선언하나니, 나는 몸과 마음의 완전 통일을 이루어 영원히 하나로서 행복할지어다!' 한 성인 만나 봤어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누가, 성인이 못 한다면 누가 할 것이냐? 할 사람 없어요. 사람으로서는 할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가망성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망성을 걸고 오늘 여러분 앞에 나타나 가지고 말하고 있는 본인은 역사상의 어떠한 누구보다도 비참한 투쟁을 했습니다.

인간이 통일할 수 있는 길, 오늘날 혼란된 세상을 수습할 수 있는 길, 평화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길, 인간이 완성하여서 이상적인 자아를 세워 가지고 만 우주에 자랑하고 주체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아 발견을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신을 확실히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결론지었기 때문에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걸고 누구보다도 담판을 한 대표적인 사나이입니다.

그러다 보니, 남 모르는 걸 알다 보니, 말을 하다 보니,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 반대도 많이 받으며 지금까지 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윤리, 도덕관념, 누구나 아는 모든 사회제도에 일치될 수 있는 것을 하나 둘 했으면 뭐 그건 문제도 안 됐을 거예요. 그러나 수만 년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어떻게? 원점으로 돌아가야 된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통일교회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은 고장이 났기 때문에 필요한 거예요. 구원한다는 것은 고장나지 않았던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섭리는 통일교회에서는 복귀섭리다, 이런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을 세계 역사상에 레버런 문이 발표한 거예요. 구원섭리는 복귀섭리다! 그걸 몰랐다는 거예요.

복귀해 가는 데는 어떻게 하느냐? 맹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원칙을 따라서 가야 됩니다. 어느누구라도 맹목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섭리는 재창조섭리다 이거예요. 재창조해야 돼요. 여러분이 공장에서 블루프린트(청사진)를 통해 가지고 생산돼 나왔던 그 존재가 고장이 날 때에는 블루프린트를 통해서 재차 고장나기 전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생산하여 바라던 목적의 본연의 실체를 만날 수 없는 것이 현실사회의 실상입니다. 마찬가지 이치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