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보호하에 세계적인 종단이 된 통일교회

그래, 선생님을 이렇게 만나니까 반가와요? 「예」 반가운 사람도 있고 또 싫은 사람도 있을 거라. 「아닙니다」 여기가 어디든가요? 부산 무슨 동인가, 여기가? 「초량1동입니다」 초량, 초량1동이라는 여기에 옛날에는 부산진역이 있었지. 여기 옛날 생각이 난다구요. 그래서 오늘은 '하늘이 우리를 보호하셨네'라는 제목으로 말씀해 보자구요.

지금으로 말하면 옛날이 되겠습니다. 1951년도, 그때 내가 여기 도착한 것이 1월 27일이었습니다. 초량역에 내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여 년, 35년이 지났나? 35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선생님이 몇 살 때인가, 35년 전이니까? 서른 몇 살인가? 「서른 하나입니다」 서른 하나지. 그러면 상당히 젊었을 때이지요? 「예」 지금보다도 더 미남이었을 거라. (웃음)

내가 피난을 내려와 가지고 여기 초량 부산진 4부두에 일하러 다니고, 그다음에…. 응? 안 들려요? 「예」 누가 뒤에 앉으랬어요? (웃음) 내가 목이 쉬었기 때문에 크게 얘기 못 하겠다구요. 오늘 저녁때에도 얘기해야 되기 때문에 살살 얘기하는 거예요. 못 들었으면 절반 이상 이 앞에 있는 사람들한테 다시 들으라구요. 내가 그거 책임 못 져요.

팥죽 팔아먹는 아줌마들, 그다음에 시루떡 파는 아줌마들, 그때 생각이 나요. 또 초량에 노무자 수용소가 있어 가지고 그 조그만 방에서 내가 원리원본을 쓰던 것이 생각난다구요. 요만한 방에서 바로는 못 누워요. 그렇기 때문에 엑스(X)로 누워야 하는데, 엑스로 누웠댔자 발이 닿습니다. 그런 방에서 지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빠르다구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범일동에 토담집, 돌담집을 짓고 거기서 지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5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눈 깜박할 새에 35년이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 두 배가 되면 70년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일생이라는 것은 전부 뭣이라고 할까? 저 구름과 같이 떠올랐다가 기류에 떠밀려 가고 혹은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기간에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사느니, 뭐 어쩌니, 좋고 나쁘니, 시집 장가를 가느니, 아들딸이 있느니, 공부를 시키느니 등 매일매일 복잡다단한 인생살이의 환경을 거쳐 나가고 있는 거예요.

자,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제가 이 범일동에서 기거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때만 하더라도 6·25사변이 계속될 때예요, 1953년에 휴전협정이 됐으니까. 그때 미국에서 들어오는 군수물자 선단들이 줄지어 이 항구에 꽉 들어왔어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선생님은 그것을 헤아리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구요. 하나, 둘, 셋, 넷…. 보통 50척이고, 어떤 때는 100척이 넘을 때도 있었다구요. 그럴 때 전시상황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배의 수가 많아진 것을 볼 때 '아, 이 전쟁이 치열해지겠구나' 이렇게 생각했고, 배들이 적어지면 '아, 이제는 전쟁이 그저 이럭저럭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던 것이 엊그제 같다구요.

그때에 통일교회를 믿던 식구들이 몇몇 있었어요. 영계를 통해 인연이 돼 가지고 만났던 식구들이 전부 다 총총걸음으로 그때 범일동에 혼자 살고 있던 선생님을 찾아오던 것이 엊그제 같다구요. 그런 식구들 가운데 이미 영계에 간 사람도 여러 명 있습니다. 그때에 통일교회에는 나 혼자였습니다. '통일교회' 하게 되면 나 혼자밖에 없었다구요. 혼자서 시작해 가지고 몇몇 식구들을 모아 움직이면서 전국에 제일 신령한 사람들을 방문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중에 대구에 전도를 보냈던 강현실 전도사라고 있었다구요. 범일동 천막교회 전도사로 책임지고 있던 그 아줌마가, 지금 저 산골짜기, 그때 범일동 산골짜기 하게 되면 그 위에는 절간밖에 없었는데, 맨 마지막 집에 이상한 청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전도하겠다고 찾아왔댔지요. 찾아와 가지고 방문할 때의 내 모습은…. 위에는 곤색으로 물들인 미군 잠바를 입고, 아래는 한국 바지에 물들인 퍼렁바지를 입고, 또 신은 고무신을 신고, 그러니까 이렇게 삼층 옷을 입고 있을 때 찾아오던 것이 엊그제 같다구요. 그래서 그때 말씀했는데 하나님이 역사해서 매일매일 찾아오게 된 거예요. 그러다가 그 교회를 버리고 통일교회 믿을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구에 전도를 보낸 거예요.

이제 당시 예를 들어 보면, 그때 재건파가 아니지요? 저 고신파에 다니는 극렬분자 부인 전도사가 통일교회에 넘어왔다고 해서, 고신파 중에서 한상동, 한명동이를 중심삼고 이 일파가 전부 다 똘똘 뭉쳐서 '문 아무개라는 것이 이리떼다, 이단이다'고 야단하고 그랬다구요. 그런 판국에 대구는 남한의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이기 때문에 대구에 전도 보냈습니다. 보낼 때에 아무것도 없이 내보낸 거예요. 여비도 안 주고 어떻게 하든지 가서 전도하라고 내보낸 그때의 사정이…. 그러니까 영계에서 전부 다 역사를 많이 했지요. 대구에 갔는데 갈 곳이 없으니까 영계에서 코치를 해 가지고 만날 사람을 만나게 해서 대구교회의 시작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 사연들이 있어요.

자, 그러던 통일교회―선생님도 35년 전보다도 늙었지만―가 그 기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셔서 어느 사이엔가 통일교회는 세계적인 종단이 되었습니다. 140개에 가까운 국가에 우리 통일교회의 신도가 수백만 명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나는 그저 그냥 그대로 그렇게 살았다구요. 먼저 뜻을 위해서 사니 출발도 뜻을 위해 하고, 목숨을 걸고 달리고 또 달리고 또 달리고, 욕을 먹으면서도 다 잊어버리고 이렇게 나오다 보니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세계적인 종단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내가 여기 오늘 찾아오면서 생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가만히 보니까 별로 한 일이 없어요. 욕을 먹고 피해 다니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늘의 사나이로서 가려진 것 같았는데 어느 사이에 세계적 기반이 닦아졌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미국 자체에서 보더라도 레버런 문의 신세를 지지 않고는 국가의 방향도 가릴 수 없는 단계에 들어왔습니다. 일본을 봐도 그렇고, 지금 한국도 역시 그렇다구요. 이제 통일교회가 움직이는 여하에 따라서 대한민국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는 단계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그간 물론 나도 수고했지만, 통일교회를 따라온 사람들도 수고했겠지만, 배후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셨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