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중심삼고 눈물 흘린 예수

옛날의 의인이나 성현들은 다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그 사람들은 하늘을 중심삼고 인류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 서 가지고 눈물을 흘리게 되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종교의 길을 찾아서 눈물을 흘려 나와야 된다는 말이 성립된다구요.

그러면 어떤 종교가 세계를 지도할 수 있고, 하나님편에 설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여기에 등장한다는 거예요. 인류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류를 위하여 보다 더 눈물을 흘리는 그 종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요, 인류의 중심 종교로 등장할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것입니다.

자, 눈물을 흘리는 데는, 여러분이 울게 된다면 그 동네에 화제가 되는 거예요. 자 그래, 누구를 위해 우느냐? 그 부락 전체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면 부락 사람이 거기에 전부 다 머리 숙이는 일이 벌어진다 구요. 그렇지요?「예」 만약에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그 앞에서는 전부가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자라는 것은…. 부모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못한 사람은 효자가 될 수 없다 이거예요. 그 나라의 충신이면 그 나라의 군왕을 위해서, 그 나라의 애국자면 그 나라의 백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요? 「예」

그러면 성인이 뭐냐, 성인이? 위인과 애국자라는 말은, 위인과 애국자라는 것은 한 국가에 한해 가지고는 있을 수 있지만 성인이라는 것은 그것들과는 종류가 다르다는 거예요. 초민족적 기준에서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성인이 될 수 없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구요.

이렇게 볼 때에 이 세계의 성인 가운데서 자기의 생명이 직접적으로 끊어지는 자리, 자기가 운명하는 그 자리에서 인류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눈물을 흘린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은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 도밖에 없다구요. 십자가를 지면서까지도 로마 병정을 위해서, 자기 원수를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했다 이거예요. 그것은 인류를 위해서, 어떤 사람을 위해서라도 눈물을 흘렸다는 자리에 섰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그건 뭐냐면 원수까지도 그 눈물 앞에, 그 죽음 앞에 굴복시킬 수 있는 하나의 표제로, 하나의 중심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그러면서 그는 나중에 '내 생명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하늘 앞에 당당코 기도했다 이거예요. 그것은 '당신이 슬퍼한 모든 슬픔을 내가 대표해서 슬퍼하는 이 시간을 기억하시옵소서' 이런 기도라고 생각해야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나와 당신과는 하나지 둘이 아니다' 하는 결론이 나온다는 거예요. 무엇에 있어서? 눈물을 흘리는 데 있어서.

아담 해와가 타락되어 흘린 눈물과 예수 그리스도가 흘린 눈물과는 종류가 다르다구요. 반대예요. 완전히 방향이 다르다구요. 자, 아담 해와의 자리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길에 떨어지는 자리요,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도 죽음의 길에 떨어지는 자리다 이거예요. 거기에 있어서 아담 해와는 자기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는 거예요. 요게 다르다는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 자체는 하나님을 위해서, 세계를 걸어 놓고, 인류를 걸어 놓고 눈물을 흘린 역사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기독교 자체가 그러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생명이 있는 기독교와 생명이 없는 기독교를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느냐? 자기를 위해서 울 수 있는 이런 기독교는 생명이 없는 것이요, 남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기독교는 생명이 같이한다는 거예요.